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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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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346년 7월 26일,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노르망디을 공격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한 공방전.

2. 상세

1345년 6월, 1343년 1월 19일에 체결된 레스트로이트 휴전 협약이 만료되자,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는 전쟁을 재개하기로 했다. 그는 3개의 전선에서 프랑스를 동시에 공격하는 계획을 세웠다. 노샘프턴 백작 윌리엄 드 보훈은 분견대를 이끌고 브르타뉴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더비 백작 그로스몬트의 헨리가스코뉴에서 활동하며, 에드워드 3세 본인이 이끄는 주력군은 플란데런 백국을 통해 프랑스를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주력군은 6월 29일 출항했다. 그들은 7월 22일까지 플란데런의 슬로이스 항에 정박하다가 재차 바다로 떠났다. 그러나 도중에 폭풍을 만나는 바람에 잉글랜드의 여러 항구로 흩어졌다. 그 후 병력을 재규합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데다 왕과 의회가 앞으로의 계획을 놓고 격론이 벌어지느라 시간을 더 지체했다. 그러는 사이 겨울이 가까워지면서 재출항이 힘들어졌다.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는 에드워드 3세가 내년에야 프랑스에 올 거라는 정보를 파악하자 가스코뉴와 브르타뉴에 병력을 파견해 그곳에서 활동하는 잉글랜드 분견대를 궤멸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로스몬트의 헨리가 이끄는 가스코뉴 방면 잉글랜드군이 베르주라크 전투오베르슈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연전연승하면서, 가스코뉴를 공략하려는 프랑스 왕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1346년 초, 필리프 6세의 후계자이자 노르망디 공작인 은 적을 남부 프랑스에서 몰아내라는 명령을 받들어 오를레앙에 15,000~20,000명에 달하는 대군을 집결시켰다. 그는 먼저 에기용을 탈환한 뒤 라 레울을 공략하고 뒤이어 가스코뉴의 수도인 보르도를 공략하기로 했다. 프랑스군은 장 왕자의 지휘하에 아쟁에서 가론 계곡을 따라 행진하여 4월 1일 에기용에 도착했다. 그러나 뒤이은 에기용 공방전에서 스태퍼드 백작 랄프의 결사적인 항전으로 인해 좀처럼 공략하지 못했다.

한편, 에드워드 3세는 1346년 프랑스로의 공세를 재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에게는 4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하나는 브르타뉴에 상륙해서 쇠락해가고 있던 친영파인 몽포르 가문을 재건시키는 것이었고, 두번째는 플란데런 백국에 상륙해서 북부 프랑스를 휩쓸면서 프랑스 주력군을 야전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고, 세번째는 가스코뉴에 상륙해서 잘 싸우고 있는 랭커스터 공작 헨리와 합세한 뒤 남부 프랑스군을 섬멸하는 것이었으며, 마지막으로 노르망디에 상륙해서 해안 지역의 요충지를 장악하고 노르망디, 플란데런, 가스코뉴 세 방향에서 프랑스를 압박하는 것이었다.

에드워드 3세는 마지막 안건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판단하고 노르망디 상륙을 준비했다. 그러면서도 정보가 새지 않기 위해 출항 직전 8일 동안 어느 누구도 잉글랜드를 떠날 수 없다는 내용의 법령을 반포하는 등 보안에 신경썼다. 필리프 6세와 프랑스 수뇌부는 에드워드 3세가 브르타뉴나 가스코뉴에 상륙할 거라고 오판했지만, 혹여 문제가 생길 것을 막기 위해 노르망디 해안 요새들에 주둔군과 순찰대를 대거 배치하고 함대를 동원해 영국 해협 경비를 철저히 하도록 했다. 그런데 잉글랜드군이 상륙하기 3일 전에 요새에 배치된 제노바 용병들이 임금 체불에 불만을 터트리며 탈영해버렸고, 상륙 당일엔 용병대를 대체하기 위해 민병대 소집령이 막 내려진 상황이었다.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은 그 덕분에 1346년 7월 11일 라 우그 인근 해변에 무사히 상륙했다.

12,000~15,000명으로 추산되는 잉글랜드군은 필리프 6세의 통치에 불만을 품은 몇몇 노르망디 귀족들과 합세한 뒤 약탈 행진을 감행했다. 이들의 진군로 주변의 모든 마을이 파괴되고 민중들은 막대한 재산을 잃었다. 700척에 달하는 잉글랜드 함대는 해상에서 군대의 경로와 평행하게 이동하면서 해안에서 최대 8km 지점까지의 범위를 약탈하고 전리품을 모았으며, 100척이 넘는 적선들을 나포하거나 불태웠다. 이런 에드워드의 초기 목표는 노르망디 북서부의 문화, 정치, 종교 및 금융 중심지인 이었다. 그는 이 중요한 도시를 공략함으로써 전쟁 비용을 회수하고 필리프 6세에게 압력을 가하기를 원했다.

1346년 7월 25일, 잉글랜드군이 캉 교외에 접근했다. 그들은 도시 수비대장인 외 백작 라울 2세 드 브리엔과 시의회에 항복을 권유하는 사절을 보냈지만, 라울은 이를 거부하고 사절을 투옥했다. 그 후 라울은 캉 시를 구성하는 세 지역인 신시가지와 구시가지, 생장 섬 중 생장 섬을 포기하고 나머지 두 지역을 중점적으로 경비하려 했다. 그러나 생장 섬에 거주하는 부유한 상인 및 지주들이 강력한 압력을 행사하자, 결국 구 시가지를 포기하고 생장 섬을 경비하기로 했다.

다음날 현장에 도착한 잉글랜드군은 구시가지가 방어되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이곳을 즉시 점령했다. 이후 바이외 주교 기욤 베르트랑의 지휘를 받는 군인 300명이 주둔하고 있는 마을 북쪽의 요새를 봉쇄하기 위해 소규모 병력이 파견되었다. 에드워드 3세는 전장을 쭉 살펴본 뒤 캉 시가지를 관통하는 오돈 강 북쪽 기슭에 있는 다리를 공략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군대를 재편성하려 했지만, 약탈을 열망하는 장궁병과 중장병들이 편성이 완료되기도 전에 다리를 향해 돌진했다. 에드워드는 자신이 명령을 내리지도 않았는데 병사들이 돌격하자 당장 돌아오라고 명령했지만 무시당했다.

잉글랜드군은 가뭄으로 수위가 낮아진 오돈 강을 건너 반대편 강둑을 따라 급조된 적 방어선을 공격했다. 프랑스 수비대는 서둘러 이를 막으려 했지만 압도적인 전투력을 발휘하는 적군을 상대로 고전했다. 그러던 중 일부 잉글랜드군이 도시에 침투한 뒤 디리 수비군을 후방에서 공격하자, 프랑스 병사들은 공포에 질러 패주했다. 몇몇 프랑스 고위 장교들은 말을 타고 잉글랜드의 포위를 뚫고 성채로 도주했고, 다른 몇몇 장교들은 탑에 바리케이드를 쌓고 버텼다. 그러나 나머지 병사들은 모조리 학살되었고, 외 백작 라울 2세를 포함한 소수의 부유한 전투원과 상인들은 생포되었다.[1]

잉글랜드군은 성채를 제외한 캉 시를 장악한 뒤 주민 5,000명 이상을 학살하고 수많은 여성을 강간했다. 닷새간의 약탈이 끝난 뒤 성채를 함락시키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 후 에드워드 3세는 자신의 조상인 윌리엄 1세의 무덤에 경의를 표한 뒤 파리를 향해 진군했다. 한편 필리프 6세는 7월 29일 프랑스 북부에 대한 신민 소집령을 선포하고 모든 건강한 남성에게 루앙에 집결하라고 명령한 뒤 31일 루앙에 이르렀다. 그는 즉시 훈련이 부족하고 장비도 잘 갖추지 못한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군의 진군을 저지하기 위해 서쪽으로 이동했다. 그러다 닷새 후 루앙으로 돌아와서 센 강의 다리를 파괴했다.

8월 7일, 잉글랜드군은 센 강에 도달하여 루앙 교외를 약탈했다. 필리프 6세는 당장 잉글랜드 왕과 화해하라는 교황 사절들의 압력을 받고 에드워드에게 사절을 보내 결혼 동맹을 맺어서 전쟁을 끝내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쓸데없는 토론에 행군을 멈출 생각이 없다고 답하고 쫓아낸 뒤 파리를 향해 진군했다. 8월 13일 잉글랜드군이 파리 시에서 하루 이내 거리에 있는 푸아시까지 진군하자, 필리프 6세는 맨앳암즈 8천과 제노바 용병 6천을 동원해 푸아시로 이동한 뒤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다리를 파괴했다. 하지만 잉글랜드군은 하루만에 임시 교량을 설치하여 센강을 건너 푸아에 이르러 약탈을 자행했다.

필리프는 센 강 북쪽으로 후퇴한 뒤 파리 남쪽 교외로 진군해 부르라렌 인근의 고지대에 진을 친 뒤 에드워드에게 여기서 야전으로 한판 붙자며 도전장을 보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고지대에 자리잡은 적과 싸우는 멍청한 짓을 할 생각이 없었고, '필리프가 숨어서 안 보이기 때문에 대신 그가 신민이라고 부르는 반역자들을 처벌하러 가겠다'는 내용의 답변을 보낸 뒤 다시 푸아시 다리를 건너 북쪽으로 이동했다. 필리프는 파리 시내로 돌아와 공포스러운 야만인들을 도시에서 쫓아낸 국왕의 위엄에 감격한 시민들 앞에서 잉글랜드 왕의 비겁함을 규탄했다. 그리고 플랑드르 국경 방향으로 후퇴하는 잉글랜드군을 추격하면서 계속 병력을 모았다.

에드워드는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프랑스인들의 청야 전술에 시달렸다. 가까운 지역에서는 프랑스인들이 미리 밭을 갈아엎고 식량을 없애고 집을 불태웠기 때문에, 잉글랜드군은 더 먼 곳에 식량 수집 부대를 보내야 했다. 이들은 프랑스 민병대의 습격을 받아 전력이 갈수록 소모되었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군의 행진이 느려지는 사이, 필리프는 적보다 하루 먼저 솜 강에 도착한 뒤 적이 플란데런이나 노르망디로 이동할 길목을 틀어막고 잉글랜드군을 향해 접근했다.

에드워드는 프랑스군의 솜 봉쇄를 뚫기 위해 행게스트, 퐁레미를 찔러봤지만 모조리 격퇴되었다. 그 와중에 보급품은 바닥났고 병사들은 굶주림에 시달려 사기가 급격히 떨어졌다. 이제 프랑스군이 곧 들이닥치면 영락없이 무너질 판이었지만, 에드워드는 블랑슈타크 전투에서 여울목에 주둔한 프랑스 수비대를 격파하고 극적으로 솜 봉쇄를 돌파했다. 그 후 8월 26일 크레시에서 자신들의 뒤를 쫓은 프랑스군을 상대로 크레시 전투에서 격돌했다.
[1] 라울 2세는 잉글랜드로 끌려간 뒤 1350년에 풀려나 프랑스로 돌아왔지만 그가 잉글랜드와 내통했다는 의심을 품은 장 2세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