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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랑슈타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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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저민 웨스트 작, <솜강을 건너는 에드워드 3세>, 1788년.

1. 개요2. 상세

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346년 8월 24일,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솜강의 교두보인 블랑슈타크를 경비하던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솜강을 극적으로 건넌 전투.

2. 상세

1346년 7월 11일 노르망디의 라 우그 인근 해변에 상륙한 에드워드 3세의 잉글랜드군 12,000~15,000명은 필리프 6세의 통치에 불만을 품은 몇몇 노르망디 귀족들과 합세한 뒤 약탈 행진을 감행했다. 이들의 진군로 주변의 모든 마을이 파괴되고 민중들은 막대한 재산을 잃었다. 700척에 달하는 잉글랜드 함대는 해상에서 군대의 경로와 평행하게 이동하면서 해안에서 최대 8km 지점까지의 범위를 약탈하고 전리품을 모았으며, 100척이 넘는 적선들을 나포하거나 불태웠다.

7월 26일, 잉글랜드군은 노르망디의 정치적, 문화적, 종교적, 경제적 중심지인 을 공격해 심각한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1차 캉 공방전) 그 후 에드워드 3세는 자신의 조상인 윌리엄 1세의 무덤에 경의를 표한 뒤 파리를 향해 진군했다. 한편 필리프 6세는 7월 29일 프랑스 북부에 대한 신민소집령을 선포하고 모든 건강한 남성에게 루앙에 집결하라고 명령한 뒤 31일 루앙에 이르렀다. 그는 즉시 훈련이 부족하고 장비도 잘 갖추지 못한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군의 진군을 저지하기 위해 서쪽으로 이동했다. 그러다 닷새 후 루앙으로 돌아와서 센 강의 다리를 파괴했다.

8월 7일, 잉글랜드군은 센 강에 도달하여 루앙 교외를 약탈했다. 필리프 6세는 당장 잉글랜드 왕과 화해하라는 교황 사절들의 압력을 받고 에드워드에게 사절을 보내 결혼 동맹을 맺어서 전쟁을 끝내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쓸데없는 토론에 행군을 멈출 생각이 없다고 답하고 쫓아낸 뒤 파리를 향해 진군했다. 8월 13일 잉글랜드군이 파리 시에서 하루 이내 거리에 있는 푸아시까지 진군하자, 필리프 6세는 맨앳암즈 8천과 제노바 용병 6천을 동원해 푸아시로 이동한 뒤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다리를 파괴했다. 하지만 잉글랜드군은 하루만에 임시 교량을 설치하여 센강을 건너 푸아시에 이르러 약탈을 자행했다.

필리프는 센 강 북쪽으로 후퇴한 뒤 파리 남쪽 교외로 진군해 부르라렌 인근의 고지대에 진을 친 뒤 에드워드에게 여기서 야전으로 한판 붙자며 도전장을 보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고지대에 자리잡은 적과 싸우는 멍청한 짓을 할 생각이 없었고, '필리프가 숨어서 안 보이기 때문에 대신 그가 신민이라고 부르는 반역자들을 처벌하러 가겠다'는 내용의 답변을 보낸 뒤 다시 푸아시 다리를 건너 북쪽으로 이동했다. 필리프는 파리 시내로 돌아와 공포스러운 야만인들을 도시에서 쫓아낸 국왕의 위엄에 감격한 시민들 앞에서 잉글랜드 왕의 비겁함을 규탄했다. 그리고 플란데런 국경 방향으로 후퇴하는 잉글랜드군을 추격하면서 계속 병력을 모았다.

에드워드는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프랑스인들의 청야 전술에 시달렸다. 가까운 지역에서는 프랑스인들이 미리 밭을 갈아엎고 식량을 없애고 집을 불태웠기 때문에, 잉글랜드군은 더 먼 곳에 식량 수집 부대를 보내야 했다. 이들은 프랑스 민병대의 습격을 받아 전력이 갈수록 소모되었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군의 행진이 느려지는 사이, 필리프는 적보다 하루 먼저 솜강에 도착한 뒤 적이 플란데런이나 노르망디로 이동할 길목을 틀어막고 잉글랜드군을 향해 접근했다.

에드워드는 프랑스군의 솜 봉쇄를 뚫기 위해 행게스트, 퐁레미를 찔러봤지만 모조리 격퇴되었다. 그 와중에 보급품은 바닥났고 병사들은 굶주림에 시달려 사기가 급격히 떨어졌다. 8월 24일 저녁 잉글랜드군이 아슈앙비메우 북쪽에 진을 쳤을 때, 필리프 6세의 프랑스군은 불과 10km 떨어진 아브빌에 진을 쳤다. 이제 다음날이면 프랑스군이 그들을 따라잡고 지칠대로 지친 잉글랜드군을 궤멸시킬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그날 밤, 에드워드는 현지에 사는 잉글랜드인이나 프랑스 포로로부터 불과 6km 떨어진 세뉴빌 마을 근처에 블랑슈타크라는 여울목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는 즉시 숙영지를 철거한 뒤 전 병력을 그쪽으로 이동시켰다. 블랑슈타크에는 프랑스 장군 고데마르 1세 뒤 페이 휘하 500명의 중장병과 알려지지 않은 수의 용병 석궁수를 포함한 3,500명 가량의 프랑스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여울의 폭은 2,000야드(1,800m)였고 해안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 조류가 강해 하루 두 번 몇 시간 동안만 통행할 수 있었다. 잉글랜드군이 새벽에 도착했을 때 조수는 높았고 몇 시간 이내에 건널 수 있는 수준까지 떨어질 것으로 예상되지 않았다. 고데마르는 적이 나타난 것을 보고 경사진 북쪽 강둑을 따라 3개 대열로 병사들을 배치하고 최고의 정예병인 500명의 중장병을 중앙에 배치했다.

그런데 잉글랜드군이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강을 건널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한 당대 사료들의 서술이 불일치하다. 프랑스 연대기 작가 장 드 브네트(Jean Venette)는 고데마르가 잉글랜드군이 엄청난 수로 용감하게 건너는 것을 보고 돌아서서 부하들과 함께 달아났다고 기술했다. 잉글랜드 왕의 고해사제인 리처드 윈클리도 이와 비슷한 기술을 남겼다.
"우리 왕은 크로토이(Crotoy)와 아브빌(Abbeville) 사이의 조수간만 지역을 제외하고는 건너갈 길을 찾을 수 없었다. 한 번에 6~10명을 제외하고는 지역 주민들 중 누구도 안전한 곳이라고 알지 못하는 곳에서 군대 전체가 무사히 건넜다. 우리 병사들이 마치 안전한 여울목인 것처럼 거의 모든 곳을 건넜는데, 그 곳을 아는 사람들은 매우 놀랐다."

반면 챈더스 해럴드(Chandos Herald)는 저서 <흑태자의 삶>에서 수백 명의 최고의 기사가 선발되어 솜강을 앞장서서 건너면서 적을 상대로 큰 전투를 벌였다고 밝혔다.
필리프는 파리에 있었고 그곳에 집결하고 있는 그의 대군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센강과 솜강 사이에 잉글랜드군을 가두어 그곳에서 싸울 생각을 했기 때문에 복수하지 않으면 자신을 나쁘게 생각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잉글랜드인들은 모든 것을 불태우며 즐겁게 지냈다. 그들은 많은 여성을 과부로 만들고 많은 가난한 아이들을 고아로 만들었다. 그들은 솜강에 이를 때까지 밤낮으로 말을 탔다. 반대편에는 고데마르 드 페이 경이 피카르디의 많은 병사들과 함께 있었다. 강은 매우 넓고 조수로 인해 부어올랐기 때문에 영국인들은 어떻게 건너갈지 궁금해했다.

고귀한 왕자는 자신의 선봉대 중 가장 뛰어난 기사 백 명을 선택하여 그들이 어떻게 건너는지 알아보도록 보냈다. 그리고 이 칭찬받을 만한 사람들은 솜강을 가로질러 여울목을 보여 주는 사람을 찾을 때까지 말을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그들 100인 모두는 용감한 기사들이었기 때문에 군마를 타고 즉시 물 속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창을 들고 쉬었고, 그들을 바짝 따라오던 왕자가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솜강 건너 여울목에서 큰 전투를 벌였고 기사들은 열심히 싸웠다. 양측은 활과 창을 휘두르었지만 곧 고데마르와 피카르디인들이 달아났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모든 잉글랜드인들은 적절한 시기에 그곳을 건너갔다.

프루아사르의 연대기는 기사의 용맹에 중점을 둔 챈더스 해럴드와는 달리 장궁에 중점을 두고, 잉글랜드 궁수들이 사격을 너무 잘해서 무장한 병사들이 교두보를 양보하도록 강요했다고 밝혔다.
프랑스군은 여울목으로 이어지는 좁은 통로 근처에 전투 대열을 구성했고, 잉글랜드군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물에서 나올 때 그들 때문에 크게 짜증을 냈다. 왜냐하면 그들 중에는 그들에게 많은 해를 끼치는 제노바 석궁병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아더, 반면에 잉글랜드 궁수들은 사격을 함께 잘해서 무기를 들고 있는 병사들을 굴복시켰다. 블랑슈타크의 이 여울목에서는 양쪽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결국 잉글랜드군은 건너갔고, 그들이 해안에 도착하자마자 서둘러 들판으로 달려갔다. 왕과 왕자, 그리고 다른 영주들이 건너간 후, 프랑스군은 대열을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빠르게 도망갔다.

이렇듯 당시 상황에 대한 동시대 기록이 다양하기 때문에 잉글랜드인들이 강을 어떻게 건넜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아무튼 에드워드 3세는 고데마르의 프랑스군을 물리치고 여울목을 무사히 건넜다. 몇 시간 후 필리프 6세의 프랑스군이 추격해와서 여러 잉글랜드 낙오병들과 마차 몇 대를 포획했다. 이후 프랑스군은 8월 24일의 남은 시간 동안 강 건너편에 있는 잉글랜드군과 대치했다. 프랑스 수뇌부는 저녁 썰물 때 도강을 시도할 지를 논의한 끝에 그러지 않기로 하고 8월 25일 아침에 아브빌로 돌아갔다.

잉글랜드군은 프랑스군이 철수하는 것을 보고 크레시앙퐁티유까지 14km를 행진하여 방어 진지를 건설했다. 프랑스인들은 그들이 솜 방어선을 뚫을 수 없을 거라고 여겼기에 그 지역을 황폐화하지 않았고, 잉글랜드군은 그 덕분에 재보급을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그 후 프랑스군이 추격해오면서, 양자는 8월 26일 크레시 전투에서 맞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