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시 전투 영어: Battle of Crécy 프랑스어: Bataille de Crécy | ||
시기 | 1346년 8월 26일 | |
장소 | 프랑스 북부 칼레 남쪽 크레시앙퐁티외 인근 | |
원인 | 브르타뉴의 계승 분쟁. | |
교전국 | 잉글랜드 왕국 | 프랑스 왕국 보헤미아 왕국 |
지휘관 | 에드워드 3세 흑태자 에드워드 윌리엄 드 보훈 | 필리프 6세 샤를 2세 달랑송† 얀 루쳄부르스키† 라울 드 로렌† 루이 1세 드 플란데런† 루이 1세 드 샤티옹† |
병력 | 10,000~15,000명 | 30,000~40,000명 |
피해 | 40~300명 전사 | 12,000~16,000명 전사 |
결과 | 잉글랜드의 대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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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346년 백년전쟁 초반에 일어난 대규모 전투.2. 배경
1341년 브르타뉴 공위 계승 전쟁이 일어나자 브르타뉴 공국의 후계를 놓고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갈등을 빚게 되면서 정전협정이 깨지고[1] 1346년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면서 벌어진 전투다. 잉글랜드군은 에드워드 3세와 흑태자 에드워드, 프랑스군은 필리프 6세가 각각 지휘했다.에드워드 3세는 노르망디에 상륙하여 캉을 공략하고 파리를 침공했으며 이후 보급의 문제로 플랑드르를 향해 북상했다. 잉글랜드군은 지나치는 곳마다 농촌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다. 이는 의도적인 것이었는데 적의 영토에 상륙한 잉글랜드 입장에선 단기일전을 치르지 못하고 시간을 끌수록 보급의 문제가 필연적으로 따라오기 때문이었다. 이에 잉글랜드군은 경기병을 이용하여 프랑스 농촌지역에서의 조직적인 습격과 약탈, 방화를 자행했고, 이를 통해 프랑스군이 전투 준비를 충분히 갖추지 못한 채 잉글랜드군과의 일전을 서두르도록 강요했다.
필리프는 잉글랜드군의 노르망디 상륙 계획을 예상하고 해안 요새들에 주둔군과 순찰대를 편집증적으로 깔아놓았지만 운이 더럽게 없게도 잉글랜드군이 라 우그 인근 해변에 상륙하기 고작 3일 전 요새에 배치된 제노바 용병들이 임금체불에 대한 불만으로 탈영했고, 상륙 당일은 용병들의 자리를 대신하기 위한 민병대 소집 명령이 막 내려진 다음이었다. 얇고 넓게 펼쳐진 방어선이 하루만에 뚫리자 노르망디를 가로지르는 잉글랜드군의 진격을 막을 방법이 더는 없었다.
프랑스군은 충분한 병력을 갖추는 데 시간이 필요했기에 잉글랜드군이 조직적 약탈과 방화를 자행하는 동안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결국 충분한 전력을 모은 프랑스 주력군에 따라잡히기 고작 몇 시간 전인 8월 24일 아침, 잉글랜드군은 블랑슈타크 전투에서 여울목을 방어하는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솜 강을 건넜다.
잉글랜드군이 솜 강을 건너자 필리프는 추격을 포기했다. 마침 플랑드르군이 잉글랜드군의 작전에 호응해 남하하고 있었으므로 두 군대가 합류해서 다시 남쪽으로 역습을 가해 올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필리프와 프랑스군 지휘관들은 즉시 방어전을 준비했다.
하지만 그때 작은 기적이 일어났다. 국경 지역의 소도시 베뒨의 주민들의 결사항전에 플랑드르군의 진격이 저지되면서 잉글랜드군은 보급도 받지 못한 채 고립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필리프는 8월 26일 토요일 이른 아침부터 강행군을 시작해 오전 중 크레시 마을 근처에서 잉글랜드군을 따라잡았다.
3. 양측의 전력
병력은 사료마다 다른데, 잉글랜드군은 6,000~12,000명. 프랑스군은 20,000~100,000명으로 나온다.이처럼 사료에 따른 차이가 큰 이유는 당시의 《연대기》 사가들이 전반적으로 매우 과장된 서술을 하는 경우가 많았을 뿐 아니라,[2] 영국 측 자료들은 잉글랜드군은 최대한 줄이고, 프랑스군은 최대한 늘려 잡았으며, 반대로 프랑스 측은 프랑스군은 최대한 줄이고 잉글랜드군은 최대한 늘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대의 문헌을 통해서도 양군의 정확한 규모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고 한다.[3]
아무튼 현대 역사가들이 여러 관련 자료를 바탕으로 추산한 것에 따르면 잉글랜드군은 대체로 10,000~15,000명, 프랑스군은 30,000~40,000명가량으로 보는 게 중론이다.
당시 잉글랜드군 측 병력은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군대로 이뤄진 원정군에 더해, 당시 동맹관계였던 브르타뉴와 플랑드르의 병력 일부와 약간의 독일 용병들이 가세해 있었던 상태였다. 물론 그럼에도 프랑스군에 비하면 한참 적은 숫자였다.
'잉글랜드군'의 주축을 이룬 것은 2,300~3,000명 가량으로 추정되는 맨앳암즈와 5,000~7,000명 정도로 추정되는 장궁병들이었다.
그리고 그에 더해 2,500~3,000명 정도로 추정되는 "호블러(Hobelar)"[4]경기병과 역시 2,000~3,000명 규모로 추정되는 창병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창병'들도 도보 이동을 하는 '순수한' 보병인지, 일종의 '승마 보병'이었지는 불분명하다.
또한 당시 잉글랜드군이 소량의 - 정확한 숫자는 미확인이지만 대체로 총 5문 내외로 추정되는 - 리볼데퀸 및 사석포 등 화포[5]를 사용했다는 기록도 있다.[6]
프랑스군은 대체로 10,000~12,000명 정도의 중기병을 주축으로 이뤄진 것으로 추산하는 경우가 많다.[7] 또 프랑스군에는 2,000~6,000명 정도의 제노바 쇠뇌병들이 있었다.[8]
이처럼 양측이 동원한 정확한 실제 병력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해서는 다소 불확실하지만, 하여튼 결론적으로 대체로 합의되는 것은 프랑스군이 잉글랜드군보다 3~4배는 많았다는 것이다.
4. 전개
4.1. 전투 준비
잉글랜드군은 크레시 인근 구릉지에 진지를 구축한 채 프랑스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에드워드 3세는 모든 병사들에게 말에서 내리라고 명령했으며 하마(下馬) 기사와 보병들을 3개로 나누어 배치했다. 장궁병 부대는 역 V자의 양익에 배치되었는데 기병의 돌격을 저지하기 위해 구덩이와 통나무 등등 장애물을 설치했다. 그리고 자신과 측근은 후방의 언덕 풍차에 진을 치고서 전투를 지휘하기로 했다.[9] 흑태자 에드워드는 전방에서 보병대를 지휘하게 했다.
그리고 전투태세를 마쳤을 때 프랑스군이 도착했다.
미리 도착해 언덕에 진을 친 잉글랜드군은 식사를 하고 휴식을 취한 상태였지만, 프랑스군은 수일을 내리 행군해 온 다음 곧장 전투에 참여해야 했다. 게다가 이들이 도착한 직후 뜬금없이 폭풍우가 몰아쳤기에 프랑스군의 공격은 더욱 늦춰졌다.[10] 비가 그치고 다시 해가 뜨자 프랑스군은 공격을 시작했고, 잉글랜드군은 '태양을 등진 채' 그들을 맞이했다.
게다가 잉글랜드군이 언덕 위의 유리한 지형을 장악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프랑스군의 진입로에는 자연제방 같은 둑길이 가로놓여 있었다.[11]
때문에 프랑스군은 벌판을 가로질러 곧장 진격하지 못하고 빙 둘러 좁은 협곡을 통해서 잉글랜드군을 향해 접근해야 했다.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 데다가 지형조차 극악인 탓에 프랑스군은 효율적인 병력배치를 전혀 할 수 없었다. 뒤집어 말하면 잉글랜드군은 최상의 지형을 선점하고 있었고 프랑스군은 그곳으로 무턱대고 밀려들어간 셈.
애초 필리프 6세는 전열을 재정비한 후에 공격을 시작할 생각이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필리프 6세의 고문들은 당일 곧장 전투를 시작하는 것에는 반대했다. 프랑스군이 크레시에 오후가 되어 도착했기 때문에 해가 질 때까지 4시간 정도밖에 없어 전투를 벌일 시간이 충분하지 않고, 또 행군으로 병사들이 지쳤고 대열도 흐트러졌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따라서 일단 군대를 재정비한 후 다음 날 공격을 해야한다고 필리프 6세에게 조언했고, 필리프 또한 그에 동의했다. 그러나 다수의 귀족들은 잉글랜드군을 매우 만만하게 보고 쉬운 승리가 눈 앞에 있다고 믿고 있었고, 또한 프랑스군 사이에는 그동안 잉글랜드군의 약탈행위로 격앙된 분위기도 적잖았기에 많은 귀족들은 필리프에게 즉각 공격할 것을 독촉했다.
필리프 6세는 고문들의 조언을 받아들여서, 전방의 부대들에게 일단 멈춰서 전열을 정비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잉글랜드군이 시야에 들어오자 지나치게 흥분한 군사들이 앞을 가로막은 채 멈춰 선 아군 부대를 무시하고 꾸역꾸역 잉글랜드군을 향해 진군했고, 부대끼리 뒤섞이면서 끔찍한 혼란이 일어났다. 설상가상으로 필리프 6세는 상황을 수습하기는커녕 오히려 독촉에 밀려 곧장 공격을 시작하는 데 동의한다.
잉글랜드군이 비교적 일사불란한 지휘 통솔하에 움직였던 반면, 프랑스군은 이처럼 지휘, 통솔부터 중구난방으로 흐른 것 역시 지형 조건 및 잉글랜드군의 전술과 어우러져 전투의 결과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친다.
4.2. 프랑스군의 자멸
프랑스군은 고용한 제노바 쇠뇌병을 앞에 세우고 후열에 기사들을 배치했으며 전투는 필리프 6세의 외침과 함께 시작되었다. 주님과 성 드니의[12] 이름으로 명하노니 제노바 병사들을 앞으로 보내고 전투를 시작하라.
―필리프 6세(프루아사르 연대기)
―필리프 6세(프루아사르 연대기)
제노바인들은 쇠뇌를 쏘려고 했으나 비가 와서 땅이 미끄러웠기 때문에 한 발로 균형을 잡아서 당기는 당시 쇠뇌를 장전할 수 없었다. 결국 제노바인들은 절망해서 도망갔다.
제노바인들이 최소한 몇 발만 더 쏘았어도 프랑스 기병들은 최소한의 이해가 가능했겠지만 비에 젖은 땅으로 인해 장전이 불가능했던 제노바인들의 사정을 이해 못한채 반격하지도 않고 도망치는 제노바인들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다.
프랑스인들이 웅성거렸다. 제노바인들에게 아직 급료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배신했다고 생각했다. 제노바 용병들이 급료가 밀렸다는 이유로 전투를 거부하며 파업하는 것은 이전에도 흔한 일이었다.
프랑스인들이 외쳤다.
이 자들은 쇠뇌를 쏘지 않을 것이고 쏜다 해도 화살촉을 제거하고 쏠 것이다. 제노바인들을 쳐 죽여라!
―(익명의 로마인 연대기)
―(익명의 로마인 연대기)
분노한 프랑스 기병들은 제노바인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2000~3000명으로 추정되는 제노바 쇠뇌수들은 대부분 죽었다.
필리프 6세도 제노바인들이 배신했다고 생각했다. 필리프가 외쳤다.
제노바인들을 죽여라! 이 새끼들을 죽여라! 제노바인들은 전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프루아사르 연대기)
―(프루아사르 연대기)
우리는 보병이 필요 없다. 우리는 충분한 기사들이 있다.
―필리프 6세가 제노바인들을 학살하며 한 말 (익명의 로마인 연대기)
―필리프 6세가 제노바인들을 학살하며 한 말 (익명의 로마인 연대기)
쇠뇌가 비에 적셔져 장전이 안 되었다는 말도 있지만 이것은 14세기 쇠뇌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말이다. 당시 쇠뇌는 200파운드가 넘어서 한 발로 장전해야 했고 쇠뇌의 현은 튼튼했기에 물에 젖어도 멀쩡했다. 즉 제노바인들이 잉글랜드 장궁병에게 패배한 것은 쇠뇌가 비에 젖어서가 아니라 땅이 미끄러워서 장전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13]
4.3. 잉글랜드의 압승
궁수대가 아무 힘도 못쓰고 발리자 후열의 기사들이 대열을 이룬 채 공격을 시작했다. 제노바 쇠뇌수들을 팀킬하느라 흩어진 알랑송 백작 등의 부대들도 그대로 무질서하게 돌격했는지, 아니면 후퇴하고 재집결해서 다시 대열을 이루고 돌격했는지는 알 수 없다. 프랑스군 지휘관들이 이전까지 보여준 능력을 고려해서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재집결을 했겠지만, 애초에 잉글랜드군의 노르망디 상륙부터 솜강 저지선 돌파에 방금전 일어난 제노바 용병 팀킬까지 비상식적인 상황 투성이라 지휘관들도 정신줄을 붙잡을 수 있었을지 의문이라서 진실은 알 수 없다.
아무튼 장궁병들이 돌격해오는 기사들을 향해 화살비를 퍼붓기 시작했다. 하필 비가 내려서 진창이었던 데다가 양익 장궁수의 사격을 피해 중앙으로 몰려있었기 때문에 프랑스 기사들은 비좁은 곳에서 무기 휘두를 공간도 확보 못하고 지들끼리 버둥거리며 밀치다가 넘어져 압사당하거나 짓밟히기 일쑤였다. 잉글랜드 장궁병들은 기사들보다도 말을 노리고 화살을 퍼부었다. 아직까지 마갑의 사용이 적었던 시기였기에 그 효과는 더 컸다.[14]
장궁병들의 주요 역할은 기사들의 돌격속도를 늦추는 것이었다. 쓰러진 말과 낙마한 기사들이 후속부대의 돌격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는 난장판 속에서 프랑스군은 혼란에 빠졌다. 적진 돌파에 실패하고 지휘관을 잃은 기병들도 스스로 재집결해서 다시 돌격을 시도할 정도로 프랑스군의 전의가 높았지만, 진창과 장애물 때문에 쉽사리 돌파하지 못했고, 궁수대의 지원사격을 받는 잉글랜드군의 보병들과 하마 기사들은 만신창이가 되어 돈좌한 프랑스 기사들을 두들겨 잡았다. 콘월과 웨일스의 경보병들은 특히 커다란 단검을 허리에 차고 다니면서 낙마한 기사를 덮쳐 재빠르게 투구의 면갑을 열고 얼굴을 찔러 죽이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5. 결과
프랑스군은 최소 1만에서 3만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제후[15] 11명과 1,200명의 기사가 죽었으며 필리프 6세도 중상을 입었고, 필리프 6세의 동생인 알랑송 백작 샤를 2세, 보헤미아 왕국의 왕이자 룩셈부르크 백작인 맹인왕 얀[16] 등 당대 거물들도 전사했다. 잉글랜드군은 150~250명으로 나와있지만 이 통계는 다소 신빙성이 낮고 과소평가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그걸 감안해도 프랑스군에 비하면 터무니없을 정도로 적은 사상자가 나왔으리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결국 교황 클레멘스 6세의 중재로 휴전 협정에 들어갔고 그 와중에 흑사병이 돌았으며 필리프 6세가 사망하고 장 2세가 즉위하는 등의 사건이 일어났다. 하지만 1354년 교섭이 결렬되면서 1355년 다시 전쟁이 재개되었다.
크레시 전투를 비롯해서 아쟁쿠르 전투까지 이어지는 잉글랜드군의 우세한 전술 운용의 많은 요소들은 거슬러 올라가면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을 포함해 13~14세기 잉글랜드에서 치렀던 여러 전쟁들의 전훈을 바탕으로 발전시킨 것들이었다.
일반적으로 1346년의 크레시 전투, 1356년의 푸아티에 전투, 1415년의 아쟁쿠르 전투가 백년전쟁 시기 프랑스 기사들의 3대 패전으로 묶어서 취급되기 때문에 전투의 진행 과정이 서로 혼동되는 경우가 많지만 세 전투는 프랑스군이 잉글랜드군에게 대패했다는 공통점 외에는 양상이 많이 달랐다. 요약하면 크레시 전투에서는 비가 내린 뒤의 진창에서 보병의 지원 없이 참호를 낀 보병 진형에 대규모 기병 돌격을 가했다가 학살당했고, 푸아티에 전투에서는 비가 내리지 않았지만 전장 일부에 기동을 방해하는 습지와 도랑과 덤불 등이 있었으며 말에서 내린 맨앳암즈들로 정석적인 공세를 가했고 치열한 전투 끝에 아쉽게 패배했지만 국왕이 포로로 잡혀버려서 정치적 여파가 더 컸으며, 아쟁쿠르 전투에서는 또 비가 내렸지만 잉글랜드군이 먼저 프랑스군 진영을 기습하면서 전투가 시작됐으며 프랑스군에서 말을 타고 돌격한 맨앳암즈는 400기뿐이었고 대규모 기병 돌격은 없었다.
6. 영향
도시 대표들이 말했다. "폐하. 우선 전쟁을 하시는 동안 가까운 신하들에게 들은 조언들을 돌아보셔야 합니다. 그 조언에 따른 결과 폐하께선 모든 것을 잃고 아무것도 얻지 못하셨습니다. 뷔렁포스, 툰 레베크, 부빈, 에귀용과 그밖의 모든 전장에서 폐하를 따른 군대가 얼마나 크고 훌륭했는지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폐하께선 항상 막대한 비용을 들여 모집한 거대한 군대를 이끌고 명예를 지키기 위해 진군하셨으나 매번 굴욕적인 휴전을 구걸한 뒤 비겁하게 물러났습니다. 심지어 적은 수의 적군이 왕국의 심장부에 들어왔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347년 파리 삼부회 회의 기록
1347년 파리 삼부회 회의 기록
필리프 왕은 왕국의 고위 성직자들과 남작들과 자치도시 대표들을 소집해서 전쟁을 끝낼 방법을 물었다. 그들은 이렇게 조언했다. "거대한 함대와 군대를 소집해 바다와 땅에서 잉글랜드를 공격해야 합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이 일을 성사하기 위해 저희 모두 몸과 재산을 기꺼이 폐하의 뜻에 맡기겠습니다." 이를 위해 국왕은 왕국의 모든 지방에 대리인을 파견해 각자 일정한 숫자의 병력을 요청했다.
프랑스 대연대기
프랑스 대연대기
크레시 전투의 그림자는 필리프 6세의 아들인 장 2세의 치세에도 프랑스 정부를 족쇄처럼 얽매고 있었다. 군사전문가가 아닌 대다수의 프랑스 국민들은 잉글랜드군이 무섭도록 강하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3배 이상의 전력을 가진 프랑스군을 압살할 정도로 강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이해할 수 없었다. 따라서 필리프 6세와 군사 고문들이 크레시 전투 이전에 1339년 라 카벨, 1340년 투르네, 1343년 말레트르와, 1346년 파리까지 총 4번이나 전투를 포기한 사실은 신중한 전략적 결단이라기보다는 겁쟁이의 행태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크레시 전투도 비겁하고 무능한 총신들이 강행군으로 지친 군사들을 조급하게 밀어붙여서 벌어진 어이없는 졸전이었다는 해석이 당대에 널리 인정받았다.
정부에 대한 분노와 경멸을 숨김없이 드러낸 1347년 삼부회의 발언처럼, 귀족이든 평민이든 프랑스인들은 국왕이 기사들을 이끌고 용감하게 전투에 나서서 명예로운 승리를 거두길 원했다. 나중에는 심지어 푸아티에 전투에서 패배하고 포로로 붙잡힌 장 왕마저도 용감하다고 칭송하며 왕을 배신하고 도망친 기사들을 대신 욕했다.
하지만 국왕과 원수들의 생각에 잉글랜드군과 야전을 벌이는 것은 위험하고 멍청한 짓이었다. 장 왕 자신과 그의 아들인 샤를 5세가 한 것처럼 국민들로부터 막대한 조세를 거둬서 복잡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전쟁 전문가인 직업군인들을 많이 고용해 끊임없는 전초전으로 전선을 밀어내고, 적들이 마지막 발악으로 벌이는 기마약탈을 청야전술로 막아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대응이었다.
그러나 국민들은 그렇게나 많은 세금을 이미 걷었으면서도 전비가 부족하다며 돈을 더 내라고 하고, 막상 적군이 침공해 오면 도망만 치는 국왕과 원수들의 뻔뻔함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장 왕은 불만을 가진 신하들을 설득하거나 타협하기에는 자존심이 너무 강했고, 그들이 자발적으로 따르게 만드는 말재주나 인간적인 매력도 없었다. 그렇게 정부에 실망한 국민들이 납세에 소극적이 되자 이제는 대규모 야전군을 소집해 정면대결을 벌이는 도박을 감행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이 끝없는 악순환을 끝낸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프랑스군이 다시 참패하고 장 왕이 끝까지 남아서 싸우다 포로로 잡힌 푸아티에 전투였다.
7. '14세기 보병 혁명' 이론과 반박
일반적인 편견과 달리 중세의 어느 시대에도 기병은 무적이 아니었으며, 참호로 보강되었거나 사기 높고 정연한 보병 대열에 의해 기사들의 돌격이 저지되거나 심지어 퇴로가 막힌 채 일방적으로 학살당할 수 있다는 사실은 프랑스군 지휘관들에게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살라딘의 측근인 바하 앗딘의 증언에 따르면 12세기 후반에는 참호를 파고 중무장 보병과 쇠뇌수를 배치한 야전 진지를 구축하는 것이 '프랑크인들'의 장기였으며 이들의 완성된 진지를 공격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실패했다.13세기부터 프랑스가 서유럽 최강국으로 떠오르면서 이전 시대의 보병 전술이 전부 잊혀졌다고 가정해도, 고작 두 세대 전인 1302년 코르트레이크 전투에서 프랑스 기사들은 이미 참호를 낀 민병대 보병들에게 돌격했다가 방직공과 축융공과 소작농들의 군대에 학살당하는 굴욕을 당한 바 있었다.
기사들의 정면 돌격이 대규모 궁수 부대의 사격에 저지될 수 있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로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제2차 십자군 원정에서도 다마스쿠스 보병대에 돌격한 프랑스 기병들이 궁병들의 집중 사격을 받고 패주하자 독일 기사들이 '독일인들의 전통적인 방식대로' 말에서 내린 다음 방패를 앞세우며 도보로 진격해 적군을 격퇴한 유명한 사례가 있었다. 십자군이 상대한 지하드군에서 거의 항상 주축을 이뤘던 투르크계 유목민 용병들의 장기는 궁술이었다.
이 시대의 프랑스에는 십자군에 참가해서 투르크나 사라센 궁수들과 싸워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아마도 거의 없었겠지만, 필리프 6세와 군사 고문들이 1339년 라 카벨, 1340년 투르네, 1343년 말레트르와에서 항상 2~3배 이상의 우월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잉글랜드군과의 야전을 포기한 사실이나, 처음으로 공격을 개시한 크레시 전투에서는 제노바 쇠뇌수들을 먼저 내보낸 것을 보면 적어도 지휘관들은 맨앳암즈가 아무리 많아도 장궁병들을 견제할 궁병 전력 없이는 불리하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전투 당일과 이후 며칠 동안 프랑스 진영의 주된 여론은 잉글랜드인들에게 매수된 제노바 용병들이 배신해서 프랑스군이 대패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필리프 6세가 전투 다음 날 아침 아미앵에 도착한 뒤 가장 먼저 내린 명령은 '배신자'인 제노바인들을 보이는 대로 잡아 죽이라는 것이었다. 이 명령은 아미앵 시와 인근 지역에서 학살이 이미 시작되고 나서야 철회된다.
이후 생존자들의 증언이 모이면서 제노바 용병들의 명예가 회복되자, 연대기 작가들은 전통적인 수사법대로 무술 훈련 대신 사치스러운 취향에 물든 기사들의 낮은 규율과 상관의 지시에 따르지 않는 오만함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보병 전술의 정교함을 곧 문명의 수준을 평가하는 척도로 여긴 19세기 군사학자들은 이러한 기록과 편견에 근거해서 중세 후기의 원시적인 보병 전술에 대패한 중세 기병대는 전술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과학적이고 당연한 결론을 내렸으며, 잉글랜드군과 대치하기 직전 행군 대열의 후열이 전열을 앞질러갔다거나 필리프 왕이 명령을 내리기 전부터 알랑송 백작이 먼저 제노바 쇠뇌수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는 등의 정황에 미루어 크레시 전투를 맹렬하지만 무질서한 '중세식' 기병 돌격이 초기 근대식 보병 대열과 대규모 투사무기에 패배하면서 중세가 상징적으로 종결된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이는 정황에 따른 추정일 뿐 크레시에서 모든 프랑스군 부대가 대열을 무너뜨렸거나 또는 무너뜨린 그대로 재편성하지 않고 무질서하게 돌격했다는 증거는 없으며, 나폴레옹 전쟁의 기병전 사례들을 보면 크레시 전투의 후반부처럼 적진 돌파에 실패하고 지휘관을 잃은 기병들이 스스로 재집결해서 다시 돌격하는 것은 대단히 높은 수준의 훈련과 규율 없이 용기만 가지고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현대의 연구를 종합해보면 크레시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대패한 진정한 원인은 아마도 지휘관들에게 정보와 지식과 그에 기반한 전략 전술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게 전부 어설프고 불완전했다는 점이었을 것이다. 필리프와 프랑스군 지휘관들은 적과 아군이 가진 전력에 대해 무지하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잘 알지는 못했다.
즉 야전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상대와 마찬가지로 정예 궁병대를 대규모로 모집해야 한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대형 방패인 파비스 없이는 쇠뇌수들이 개활지에서 장궁병에게 맞사격 하면서 버티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몰랐을 것이다. 보병과 궁병의 지원 없이 완성된 야전 진지를 공격하는 것은 3배 이상 많은 중기병 전력으로도 자살행위에 가깝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게 말 그대로의 뜻이라는 사실은 몰랐으며 그래도 네 번이나 적 앞에서 도망쳤다는 치욕을 감수하기보다는 싸우다 죽는 편이 낫고 운이 좋다면 이길 수 있다는 막연한 희망을 가졌을 것이다.
8. 대중매체
워렌 엘리스(Warren Ellis)라는 영국의 만화가가 크레시 전투를 소재로 한 그래픽 노블, 크레시(Crécy)를 그렸다.9. 관련 문서
[1] 물론 에스플레친 조약에서 정전 협정을 논의하자는 부분은 외교적 수사일 뿐 애초에 누구도 진지하게 믿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2] 일례로 당시의 어느 이탈리아 《연대기》 작가는 이 전투에 참여한 프랑스군의 규모가 기사와 맨앳암즈 등 중기병만 10만(!)에 일반보병 12,000명, 노궁병 5,000명 등(거의 몽골 제국 서역 원정군 규모의 대군...)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3] 다만 중세 유럽에서는 군대의 숫자를 셀 때에 전투병의 수만 계산했고, 군대를 따라와서 잡다한 일을 하는 인부나 하인들 같은 잡역부들의 수는 계산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의 수까지 모두 넣는다면 예상 외로 군대의 숫자가 더 늘어날 수도 있다.[4] 중세 유럽, 특히 잉글랜드의 경기병 또는 "승마 보병". 원래는 중세 시절 아일랜드 지역에서 키우던 조랑말의 품종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대체로 경장에 창과 검으로 무장한 기병으로 스코틀랜드 왕국과의 전쟁을 비롯해 13~14세기 잉글랜드에서 벌어진 여러 전쟁에서 활약했던 병종이다. 정찰, 추격 및 산병전과 게릴라전에서 매우 유용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잉글랜드군이 프랑스 여러 지역의 촌락과 도시를 약탈하고 불태우는 일종의 초토화 전술(Chevauchée)을 썼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실제 당시 잉글랜드군의 구성에 이런 경기병이나 혹은 "승마 보병" 형태의 병력의 규모가 꽤 컸을 수 있다. 또 당시 잉글랜드군 장궁병 중 일부는 말을 타고 이동하는 일종의 "승마 궁병"에 해당했다.[5] 슬로이스 해전 때 프랑스 함선에서 노획한 대포가 포함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6] 전장 유적에서 화포에서 발사된 것으로 보이는 철환 등이 나왔기 때문에 화포의 사용 자체는 확인되지만, 실제 전투에서 어느 정도의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불명이다. 기록에 따라 나름 활약했다고 나오기도 하고, 반대로 아예 화포가 언급도 안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일단 화포 자체나 화포 운용법이 초보적이던 시절로 당시 '리볼데퀸'의 경우 '하루에 한 번 쏜다'고 말해지던 수준이었고, 당시의 사석포들 역시 한번 발사하는 데 매우 긴 시간을 소요했다. 따라서 화포 사격 자체로 프랑스군에 얼마나 피해를 주었는지와는 별개로, 일단 전투 동안 화포의 발사 자체가 그리 많이 이뤄지지는 못했을 것은 분명하다.[7] 경우에 따라 이 중기병의 숫자가 실제로 순수한 기병 병력의 숫자인지, 아니면 중기병인 맨앳암즈뿐 아니라 그들에 동반되는 - 이를테면 종자와 같은 - 보조인력까지 계산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나타내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는 프랑스군만 아니라 잉글랜드군의 중기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8] 이 노궁병의 숫자가 모두 제노바 쇠뇌병이었는지에 대해서도 설이 갈린다. 즉 당시의 시점에서 제노바 한 곳에서만 적게 잡아도 2,000명 이상의 노궁병을 모아서 보내는 게 실제로 가능했는지에 의구심을 나타내는 역사가도 있다. 그에 따르면 2,000~6,000명의 숫자는 그 전부가 제노바 쇠뇌병의 숫자보다는, (전력으로서는 제노바 쇠뇌병이 그 주축일 수 있으나) 당시 시점에서 프랑스가 보유한 노궁병 전체의 규모라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하다는 것.[9] 이렇게 잉글랜드군은 기병을 말에서 내리게 해 밀집한 전형을 자주 짰는데 이는 잉글랜드군이 비교적 소수였기에 방어적인 진형을 짜는 게 유리했고 기병은 방어적인 진형엔 이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에서 내린 기병들은 보병으로서의 방어전투를 마치고 다시 본진에 뒀던 자신들의 말에 탑승, 중기병 차지를 감행해 타격을 입힌 뒤 본진으로 귀환하였고 이후 또다시 말에서 내려 방어진을 짜는 등 유동적으로 활약했다.[10] 이 때문에 제노바 노궁병들의 활시위가 젖어 전투 때 제 성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도 간혹 주장되는 것. 반면 잉글랜드 장궁병들은 활시위를 풀어 투구 속에 (기록에 따라서는 품 속에) 넣어두어 비에 젖지 않게 했다.[11] 근처에 큰 하천 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지형이 형성되어있다. 따라서 해당 지역을 실제로 살펴보기 전에는 예상하기 어려운 매우 뜬금스런 지형이다. Channel 4의 다큐멘터리 '영국을 만든 무기들'의 "장궁" 편에 이에 대해 잘 소개되어 있다. 동영상 링크. 32분 정도에 해당 내용이 나온다.[12] 성 드니는 프랑스의 수호성인이었다. 그래서 중세 프랑스 군대는 전투 전에 성 드니를 기리기 위해서 "몽주아 생드니!"라고 큰 소리로 구호를 외치는 것이 관습이었다.[13] The Implications of the Anonimo Romano Account of the Battle of Crécy[14] 물론 잉글랜드군은 장궁병대를 양익에 배치해 프랑스 기사들을 측면에서 공격했으므로, 마갑을 더 충실히 갖추는 이후 시대에도 측면의 마갑은 상대적으로 허술했기에 여전히 일정한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안장을 얹고 사람이 타야 하는 부분이고, 또 갑옷을 입은 기사의 다리로 어느 정도 커버되므로 이 부분에는 일부만 갑주로 덮거나 혹은 경우에 따라 생략되기도 했다.[15] Prince[16] 얀 루쳄부르스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7세의 아들이자, 역시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는 카를 4세의 부친이다. 헝가리 왕위를 노린 적도 있으며, 당연히 신성 로마 제국 제위 계승전에 참여했다. 백년전쟁 이전에 이미 안염으로 시력을 상실해서 맹인왕이라고 불릴 정도였기 때문에, 생전에도 보헤미아 왕위는 아들 카렐 4세가 대리청정을 했다. 그런데도 크레시 전투에서 참전해서 돌진하고 싶다고, 다른 기사들과 몸을 쇠사슬로 연결해서 돌진하고 죽었다는 일화가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