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9-20 06:06:31

제노바 쇠뇌병

Balestrieri genovesi / Genoese crossbowmen [1]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c5de4a7cfc9c2a0ae16e77decc6f6947.jpg

1. 개요2. 등장3. 몰락4. 무장5. 매체6. 관련항목

1. 개요


제노바 쇠뇌병[2]이라 불리는 용병집단은 중세시대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용병집단 중 하나였다. 묵직한 대형방패인 파비스와 제노바제 쇠뇌로 무장을 한 이들은 제노바 공화국의 주요 수출품 중 하나였으며, 다양한 전장에서 활약했고, 이탈리아가 중세 시대에 용병으로 유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노바 쇠뇌병은 다른 이탈리아 용병들과 차별되는 독자적인 취급을 받는다. 흔히 말하는 란츠크네히트와 같은 떠돌이 유랑집단 같은 용병단은 아니었다.

2. 등장

이탈리아에서 중세 중기 이후 자치권을 가진 도시국가들이 발달하면서 도시간 분쟁이 발발하는 경우가 늘어났는데, 영토가 작지만 부유한 도시국가들은 병력을 외부에서 고용하는 용병들로 군사력을 유지했다. 초창기에는 노르만, 슬라브, 게르만족 기사 등 외국인을 고용하는 형태가 많았지만, 차츰 이탈리아 내부에서도 콘도티에로(Condottiero - 복수형 : 콘도티에리 Condottieri)[3]라는 용병대를 만들어 용병업이 성행하게 되고, 이들 콘도티에로는 차츰 이탈리아 국내뿐이 아니라 유럽 각국의 군주들을 위해 용병업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제노바 쇠뇌병이 처음으로 두각을 나타낸 전투는 제1차 십자군 원정으로, 상인이자 무장대 리더였던 귈레무스 엠브리아쿠스가 조직해 예루살렘 공성전에 참여함으로써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귈레무스 엠브리아쿠스는 이 성전에 투자하고 참여함으로써 제노바의 자치권을 획득하고 안전을 보장받았다. 리처드 1세가 이끄는 제3차 십자군 원정에도 참여해 야파 전투에서 활약한 그들은 화약의 시대가 찾아오기 전까지 유럽에서 가장 인정받고 존경받는 용병집단이 된다.

3. 몰락

그들의 쇠퇴는 영국 장궁병이 유명해지는 계기와 맞물린다. 크레시 전투에서 잉글랜드 장궁수들에게 패배한 것은 그야말로 상징적인 모습이다.

사정거리가 더 긴 장궁병을 상대로, 전날 비가 와 진창이 된 전장에서, 그것도 언덕 위의 진지를 향해 돌격을 하라는 명령을 받은 그들은 파비스도 없이 전방으로 내몰려 손 쓸 틈 없이 죽어갔다. 자세한 것은 크레시 전투 항목을 참고.

크레시 전투의 프랑스군 지휘자였던 필리프 6세는 이미 1328년에 플랑드르군을 공격할 때 쇠뇌수들을 훌륭히 활용했으므로 당시 프랑스 기사들 전체는 몰라도 프랑스 왕실과 필리프 6세는 제노바 쇠뇌수들의 진가와 활용법을 알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문제는 크레시 전투에서는 제노바 쇠뇌수들이 파비스를 지참하지 않았고 이것이 사거리가 더 긴 잉글랜드 장궁병들에게 쇠뇌수들이 그대로 노출되어 박살나는 결과로 이어지고 만 것이다.[4]

반면, 프랑스군이 백년전쟁에서 우세를 점하게 된 1360~1412년의 기간 동안에는 전세를 거의 승리 직전으로 탈바꿈시킨 샤를 5세, 베르트랑 뒤 게클랭의 활약 속에서 제노바 쇠뇌수들도 종종 고용되어 좋은 전과를 세웠다. 특히 숙적이던 흑태자 에드워드가 사망한 이후 혼란에 빠진 잉글랜드를 상대로 프랑스군은 1361~1380년의 기간 동안에는 거의 전승을 거두었다고 봐야하며 이 시기 잉글랜드는 심지어 프랑스 해군에 의해 본토 강습까지 당할 정도로 전세가 악화되었다.

그러나 샤를 5세가 급사하고 정신병자인 샤를 6세가 즉위하며 곧 전국적인 귀족 내전에 휩싸인 프랑스는 순식간에 붕괴하기 시작했으나, 다행히 샤를 6세가 제 때 죽고 정상인인 아들 샤를 7세가 즉위하며 그가 잔 다르크를 기용하고 대포의 전술적 운용을 시작하면서 백년전쟁은 프랑스군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는데 사실 필리프 6세의 '기사+제노바 쇠뇌수' 조합과 잔다르크의 '기사+대포' 조합은 유사한 전술적 형태를 가지고 있다.

즉 진지를 짜고 장궁수의 사거리를 이용해 돌격을 끌어내는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쇠뇌수를 보내서 화살비를 퍼붓고 = 대포를 보내서 포격을 퍼붓고 → 견디지 못한 적군이 진지를 풀고 나오면 기사로 들이친다.'라는 개념이었다. 따라서 프랑스군의 큰 전술적 특색은 바뀌지 않았다고 보아야 옳은데 단지 차이라자면[5] 필리프 6세의 쇠뇌수를 통한 장궁수 요격은 실패했지만 잔다르크, 리슈몽 등의 대포를 통한 장궁수 요격은 성공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도 결국에는 지휘관의 문제인 것이 마찬가지로 제노바 쇠뇌수들을 운용했지 아직 대포가 제대로 활용되기는 전 시점이던 샤를 5세, 베르트랑 뒤 게클랭은 필리프 6세나 장 2세와는 달리 잉글랜드군을 압도하며 코르슈렐 전투, 퐁발랭 전투에서 대승을 연속해서 거두었으므로 결국 쇠뇌가 장궁에 마냥 밀렸다기보다는 지휘관의 지휘 능력과 기법에 따른 문제였다고 볼 수 있겠다. 그 필리프 6세도 사실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실패한 것이지 플랑드르군을 상대로는 쇠뇌수 활용에 성공하기도 하였다.

여하간 뒤이은 이탈리아 전쟁에서는 심각한 질적 저하를 겪은 제노바 쇠뇌병을 포함한 이탈리아의 콘도티에리[6]들은 본격적으로 화약무기를 도입하기 시작한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가문의 정예 상비군과 훨씬 단련된 용병인 란츠크네히트, 스위스 용병들을 상대로 손쓸 도리 없이 패하며 이탈리아 반도의 패권을 두 강대국에게 넘기게 된다. 그리고 점차 이탈리아 내에서도 상비군 제도가 도입되며 제노바 쇠뇌병, 그리고 콘도티에리들의 시대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시대의 종말과 함께 막을 내리게 된다.

4. 무장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제노바제 쇠뇌. 발리스타이 길드의 장인들이 제작한 것으로 제노바 쇠뇌병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중세 초기에는 조잡한 쇠뇌를 썼지만, 십자군 전투 이후 빠르게 발전해서 중세시대 서구 쇠뇌의 표준이나 다름없게 된다.

그리고 또 유명한 것이 무겁고 큰 파비스. 이 대형 방패는 이동시에는 등에 짊어지고 있다가 전투시가 되면 땅에 박아넣고 엄폐물로 활용한다. 위력이 뛰어나지만 재장전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쇠뇌의 약점을 보완해주는 짝궁과도 같은 존재다. 이 파비스 덕에 제노바 쇠뇌병은 중세시대 병과로 야전에서 활약할 수 있었다. 엄폐물을 찾아 뛰어다니는 게 아니라, 스스로 엄폐물을 세우고 원하는 곳에서 전투를 치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외에 개인무장으로 금속 투구와 백병전용 단검, 그리고 사슬 갑옷과 고지트라 불리는 강철판을 가공한 목 보호대 등 가벼운 갑옷을 입었다.

5. 매체

6. 관련항목



[1] 왼쪽은 이탈리아어 - 오른쪽은 영어.[2] 병이 아니다. 발음이 비슷해서 혼동하기 쉬운 단어.[3] 위키피디아 - 영어 & 위키백과 - 한글[4] 파비스 미지참의 원인은 학계에서도 아직 연구 중인 주제이다. 애초에 쇠뇌수들이 생각보다 파비스를 지참하는 빈도가 잦지 않았다는 설, 제노바 용병들의 준비 시간 부족설, 지형적 문제로 불편함을 느껴 지참하지 않았다는 설 등이 있다.[5] 아쟁쿠르 전투처럼 아예 프랑스군 지도부가 귀족 내전 문제로 지리멸렬한 연합군 수준이었던 것은 논외 상황이라고 봐야 옳다.[6] 이 때쯤 되면 이탈리아 도시국가간의 전쟁이 지나치게 형식화돼서, 화약병기를 쏟아부으며 요란하게 싸웠는데 사상자가 지나치게 적게 나오고, 보수에 따라 배신을 일삼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니콜로 마키아벨리군주론에서 용병을 신랄하게 비판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