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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04 21:23:48

잭 케이드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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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경과4.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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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450년 5월 ~ 7월, 잭 케이드가 이끈 민중 봉기. 15세기 잉글랜드 왕국에서 일어난 가장 큰 대중 봉기이다.

2. 배경

1450년, 잉글랜드 왕국은 안팎으로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다. 프랑스 왕국과의 백년전쟁은 갈수록 불리하게 흘러갔고, 국고는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였으며, 왕실은 막대한 빚더미에 짓눌렸다. 급기야 1450년 4월 15일 포미니 전투에서 잉글랜드군 4,000명이 궤멸된 후 노르망디 전역이 프랑스의 손아귀에 넘어가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켄트와 서식스 등 잉글랜드의 해안 지역은 프랑스 해군의 연이은 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여기에 헨리 6세의 총애를 받던 서퍽 공작 윌리엄 드 라 폴이 추방되었다가 대서양을 건너던 중 '탑의 니콜라스' 호의 선원들에게 체포되어 처형되고, 서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와 요크 공작 요크의 리처드 간의 정쟁이 갈수록 심해지는 등, 권력자들간의 분쟁도 갈수록 거세졌다. 이 상황을 해결해야 할 헨리 6세는 우유부단하게 처신하기만 할 뿐 뚜렷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본 잉글랜드인들은 왕이 무능하고 부패한 고문들에게 둘러싸여 자신들을 제대로 통치하지 못하고 있으며, 국법은 무의미해진 지 오래이고, 자기들에게서 거둬들인 세금은 전쟁에 쓰이지 않고 엉뚱하게 쓰이고 있다며 깊은 반감을 품었고, 누군가가 나서서 이 난국을 해결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때 등장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잭 케이드였다. 이 인물의 기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단지 백년전쟁에 참전하면서 전투 경험을 쌓았고, 글을 읽을 줄 알았으며, 군대를 조직할 수 있었다는 것만 분명하다. 15세기 잉글랜드 왕실 연대기 작가들은 그를 "아일랜드인"이라고 지칭했지만, 빅토리아 시대의 서식스 지역 역사가마크 앤서니 로어(Mark Antony Lower, 1813 ~ 1876)는 그가 1440년대에 기사 토머스 데이커의 집에 살았으며 서식스 출신이라고 주장했다.

당대 연대기 작가 로버트 파비안은 반란군이 '모티머'라는 이름의 대장을 선택하면서, 그를 요크 공작의 사촌으로 여겼지만, 그는 사람들에게 '잭 케이드'라고 더 많이 불렸다고 기술했다. 현대 작가들은 그가 제3대 마치 백작이며 에드워드 3세의 둘째 아들인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의 외손자인 에드먼드 모티머의 아들이라고 주장했을 거라 추정한다. 그의 또다른 별명은 "모든 것을 바꾸는 존(John Amend-All)"인데, 그가 나라를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길 바라는 대중의 희망과 연계되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잉글랜드의 영토였던 노르망디가 프랑스군의 맹공으로 속절없이 공략당하고, 권력자들은 정쟁이나 일삼고, 세금은 갈수록 가중되는 것에 민중이 분노하고 있는 것을 지켜보고, 이를 기회로 삼아 반란을 주도하기로 마음먹었다.

3. 경과

1450년 5월 8일, 잭 케이드는 켄트 지방의 애쉬포드에서 헨리 6세를 대신해 나라를 그릇되게 통치하는 대귀족들에게 책임을 묻겠다며 봉기를 일으켰다. 소농, 요멘, 길드원, 기사, 젠트리, 상인, 심지어 현지 도시의 시장과 경찰관까지 이 봉기에 대거 가담했다.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반란에 대거 호응한 것은 그해 4월 15일 포미니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이 참패했다는 소식과 프랑스 해적이 켄트 해안을 습격한 사건이 겹치면서 이대로는 안 된다는 위기감이 계층을 막론하고 뒤덮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1450년 6월 1일, 케이드는 런던 남동쪽 블랙히스에 숙영지를 세웠다. 이때 그가 세운 숙영지는 해자를 파고 방어벽을 세우는 등, 정규군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6월 4일, 케이드는 "켄트의 가난한 주민들의 항의"라는 제목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는 이 선언문에서 왕에게 반역 한 관리들을 체포하고 처형 할 것을 요구했으며, 과중한 세금을 인하하고, 1351년에 제정된 '노동자법'을 폐지하며, 뇌물을 받은 판사들을 처벌하며, 사법 시스템을 완전히 개혁하라고 주장했다.
“법은 우리 시대에 아무 소용이 없으며, 오직 허위일 뿐이다. 왜냐하면 범은 거의 아무 일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뇌물 수수, 협박, 후원을 정당화하기 위해 합법성을 구실로 한 부당한 행위만 할 뿐이다. 불의한 공의회는 법을 망각했고, 재산을 잃었으며, 평민을 파멸시켰고, 바다를 잃었으며, 프랑스도 잃었다. 왕 자신은 고기와 술값을 지불할 수 없는 상태에 있으며, 그는 지금까지 빚진 다른 어떤 영국 왕보다 더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왜냐하면 매일 그의 주변에는 반역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왕에게서 반역자들을 솎아내야 한다."

서식스, 에식스, 서리 일대에서도 케이드의 봉기에 호응한 민중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6월 6일, 헨리 6세는 이 상황에 겁을 집어먹고 레스터에서 열리던 의회를 해산시켰다. 6월 13일, 켄터베리 대주교 존 스태퍼드와 요크 대주교이자 잉글랜드 총리 존 캠프가 이끄는 왕실 대표단이 블랙히스에 가서 반군과 대면했다. 그들은 해산한다면 사면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아무런 호응을 얻지 못했다. 한편, 케이드는 직물 상인 토마스 쿡을 그의 대리인으로 고용한 뒤 런던의 롬바르드 상인들에게 보냈다. 롬바르드 상인들은 토머스 쿡에게 갑옷과 무기, 완전하게 갖춰진 말 6마리와 1,000마르크의 현금을 제공했다.

6월 18일,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출진한 험프리 스태퍼드와 사촌 윌리엄 스태퍼드가 이끄는 10,000명 가량의 왕실군이 세븐오크스에서 케이드가 매복한 반군에게 격파되었다. 런던은 이 소식을 접하자 공황을 일으켰고, 헨리 6세는 어쩔 수 없이 부패하고 수탈을 일삼는 관리라는 비난에 시달리던 재무장관 제임스 파인즈를 투옥했다. 연대기 작가 로버트 파비안에 따르면, 케이드는 승리를 거둔 후 험프리가 버린 갑옷과 헬멧 및 금박 박차를 착용했다고 한다.

1450년 6월 말, 케이드는 군대를 이끌고 런던 교외 사워스워크로 진입해 그곳의 모든 저택과 여관을 점령하고 화이트 하트라는 이름의 여관을 본부로 삼았다. 7월 2일, 헨리 6세는 워릭셔의 케닐워스로 피신했다. 다음날 이 사실을 알게 된 케이드는 5,000명의 지지자들과 함께 런던에 입성하고 런던 스톤을 어루만지며 존 모티머라는 이름으로 스스로 "런던의 제왕(Lord of London)"이라고 선포했다. 7월 4일, 반군은 무기고를 점령하고 여러 관리, 특히 구금되어 있던 재무장관 제임스 파인즈와 그의 사위인 켄트주의 보안관 윌리엄 크로머를 살해했다.

그러나 반군이 런던 시내를 한바탕 약탈하자 반감을 품은 도시 엘리트들은 길드 민병대를 조직했다. 사흘 후인 7월 5일, 런던 브리지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매튜 고프런던 탑을 지키고 있다가 길드 민병대와 반군이 한바탕 격투를 벌이는 광경을 목격하고 출격해 반군을 공격해 런던 시에서 몰아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중상을 입고 런던 브리지에서 사망했다. 며칠 후, 런던 탑에 피신했던 요크 대주교 존 캠프와 윈체스터 주교 윌리엄 웨인플리트의 중재를 통해 반군과 정규군의 휴전이 체결되었다. 잭 케이드 본인을 포함해 2,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공식적으로 사면받았다.

이후 많은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갔지만, 사우스워크에 남아있던 케이드와 추종자들은 주변의 감옥에 갇혀 있던 수감자들을 풀어줘서 자신들과 함께 하게 한 뒤 로케스터로 진군해 퀸버러 성을 공략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반군 내에서 전리품을 놓고 다툼이 벌어지다가 사분오열되었고, 케이드는 얼마 안 남은 추종자들과 함께 이스트 앵글리아로 피신했다. 당국은 그에게 1,000 마르크의 현상금을 걸고 체포령을 내렸다. 7월 12일, 잭 케이드는 루이스에서 켄트 주의 새 보안관 알렉산더 이든에 의해 치명상을 입고 체포된 뒤 처형을 집행하기 위해 런던으로 끌려가던 중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사우스워크의 퀸스 벤치 광장에 7월 16일까지 전시되었고, 이후 4등분해 블랙히스, 노리치, 솔즈버리, 글로스터로 보내졌다.

4. 영향

잭 케이드의 반란이 진압된 후에도, 잉글랜드의 상황은 여전히 불안정했다. 1450년 8월 케이드를 따랐던 무리들이 윌리엄 파민터를 지도자로 세워 재 봉기했다. 파민터는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기 위해 봉건 질서를 완전히 철폐할 것을 요구했지만 1451년 초 진압군에게 피살되었다. 또한 서식스의 자작농인 존 머폴드와 윌리엄 머폴드 형제는 1450년 10월 주민들을 선동해 반란을 일으킨 뒤, 서식스 각지를 돌며 귀족과 성직자들을 구타하고 약탈했으며, 로버츠브리지에서 지역 성직자들이 징수하는 회비를 몰수하고 이스트본에서는 높은 토지 임대료를 회수했다.

1451년 봄 부활절 주간에 서식스의 로더필드, 메이필드, 버워시와 켄트 내 일부 정착지에 집결한 반란군은 무능한 국왕 헨리 6세를 폐위하고 모든 영주와 고위 성직자를 처단하며, 자신들 중 12명을 새로 뽑아 땅을 다스리려 했다. 그러나 토벌대가 이들을 급습해 모조리 진압하고, 머폴드 형제를 비롯한 주동자들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후에도 농민 봉기군은 1454년까지 잉글랜드 각지에서 산발적으로 준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