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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382년 11월 27일, 부르고뉴-플란데런 백작 연합군과 플란데런 반란군이 맞붙은 전투.2. 상세
플란데런 백작 루이 2세는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간 인물이었다. 그의 아버지 루이 1세는 모직업에 전념하는 플란데런인들의 사정상 막대한 양모를 생산하는 잉글랜드 왕국과 우호관계를 맺어야 하는 걸 거들떠보지 않고 프랑스 왕국에 절대적으로 복종하고 주민들을 심하게 억압하다가 잉글랜드와 결탁한 주민들의 반란으로 축출되었다. 그는 반란군에 억류되었다가 1346년 크레시 전투에서 아버지가 전사한 후 아버지의 직위를 물려받았으나 겐트 시민 정부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1348년, 루이 2세는 극적으로 탈출해 파리로 망명한 뒤 친프랑스파 망명자들을 이끌고 플란데런으로 돌아왔다. 그는 프랑스 왕의 폭정에 맞서 플랑드르 공동체의 대의를 지지하겠다고 선포해 시민들의 호응을 이끌어냈고, 9월 17일 브뤼헤에 무혈 입성했다. 겐트와 이프르 시는 계속 저항했지만, 12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가 루이 2세가 잉글랜드에 적대하지 않는 조건으로 그가 플란데런 백작이 되는 것을 용인하는 협약을 맺자 이프르 역시 귀순했다. 겐트는 끝까지 저항했지만 1349년 1월 루이 2세에게 무력으로 정복되었다.
루이 2세는 아버지를 반면교사로 삼고 백년전쟁이 지속되는 동안 중립을 고수하는 한편 프랑스와 영국에 상당한 물자, 자금 지원을 해줘서 양국의 호의를 얻어내는 수완을 발휘했다. 그러면서 플란데런인들이 하나로 뭉쳐서 자신에게 반기를 일으키는 일이 없도록 주의를 기울였고, 플란데런의 무역 부흥에 힘썼다. 그 결과 플란데런 백국은 그의 치세에서 번영을 구가했다. 그에게는 딸 마르그리트가 있었는데, 서유럽에서 매우 부유한 지역으로 손꼽히는 플란데런의 공주였기에 많은 귀족들이 그녀와 결혼하길 희망했다. 루이 2세는 1355년 마르그리트를 부르고뉴의 공작 필리프 1세와 결혼시켰지만, 필리프 1세가 4년 후 역병으로 사망해버렸다. 이후 수년간의 협상 끝에 1363년 부르고뉴 공작인 호담공 필리프 2세와 마르그리트을 결혼시키기로 했다. 그 대가로, 그는 릴, 두에, 오르키에스의 영주권을 받고 200,000 리브르를 지급받았다.
그러나 루이 2세는 치세 말년에 마상창시합을 자주 열고 값비싼 보석에 집착하는 등 사치를 지나치게 부려 민심을 많이 잃었다. 특히 겐트 주민들은 라이벌인 브뤼헤가 운하를 파는 것을 허락한 것을 보고 그가 브뤼헤만 감싸고 돈다며 반감을 품었다. 결국 1379년 8월 겐트 직조공들이 반란을 일으켜 시민 정부를 다시 세웠고, 북부 플란데런의 나머지 지역에서도 루이 2세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다. 루이 2세는 토벌군을 규합한 뒤 반란군과 맞붙었고, 여러 전투에서 승리한 뒤 1381년 겐트를 포위했다. 겐트 시민들이 협상을 요청하자, 그는 겐트의 모든 성인 남성들의 운명을 자신이 결정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대숙청을 우려한 겐트 주민들은 끝까지 항전하기로 결의했다.
1382년 1월 24일 겐트 반란군의 지도자가 된 필립 반 아르테벨데는 1382년 5월 3일 베버하우트 평원 전투에서 수적으로 훨씬 많은 토벌군을 격파하고 브뤼헤에 입성했다. 루이 2세는 강에 몸을 던져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고 릴로 도주했다. 이후 플란데런 전역이 반란에 가담했고, 오직 덴데르몬드와 오우데나르데 만이 루이 2세에 대한 충성을 유지했다. 한편 가혹한 세금에 시달리던 프랑스 북부 백성들 역시 플란데런 반란에 고무되어 봉기를 일으켰다. 상황이 이처럼 악화되자, 루이 2세는 사위인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필리프 2세는 이 기회에 플란데런을 자신에게 귀속시키기로 마음먹었고, 자국의 농민 반란에 영향을 끼친 플란데런 반란군을 경계한 프랑스 귀족들 역시 그를 지원하기로 했다. 1382년 11월 초 아라스에서 10,000명의 병력을 집결한 프랑스군은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의 지휘 하에 플란데런으로 진격했다. 11월 12일, 프랑스군은 코미네스 마을 인근의 리스 강에서 플란데런 반란군 900명에게 저지되었다. 이들은 리스 강의 유일한 다리를 끊어서 적군이 강을 건너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은 야밤에 400명의 프랑스 기사를 이끌고 강 건너편으로 건넌 뒤 다음날 아침 플랑드르 반란군과 교전했다. 그 사이에 다리를 재건한 프랑스군 대부분이 건너갔고, 플란데런군은 패주했다. 이후 플란데런의 여러 도시와 마을은 프랑스군에 평화 협상을 요청하고 프랑스 왕실에 몸값을 지불했다.
적군이 강을 건넜다는 소식을 접한 필립 반 아르테벨데는 파스상델레 인근의 루즈베케 언덕에 진영을 세우기로 했다. 프랑스군은 언덕 반대편에 진을 쳤다. 11월 27일 아침, 필립 반 아르테벨데는 짙은 안개가 낀 것을 이용해 프랑스군을 공격하기로 했다. 그는 프랑스 기병대의 돌파를 막기 위해 부하들에게 밀집된 정사각형 대형으로 전진하라고 명령했다. 프랑스 사령관 올리비에는 안개 속에서 진군해오는 적을 확인하고 보병대에게 적과 맞서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중기병에게 적의 측면과 후방을 요격하라고 덧붙였다.
이리하여 플란데런군은 프랑스 보병대와 치열한 백병전을 벌이던 중 적 중기병들의 측면과 후방 공격에 직면했다. 많은 플란데런인들이 적의 공격을 피해 도주하다가 자기들끼리 짓밟혔다. 많은 플란데런인들은 원형 방진을 치고 항전했지만, 사방에서 원거리 무기를 발사하고 기병들이 계속 전열을 흐트리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패주했고, 필립은 전사했다. 이 소식이 프랑스 북부에 전해지자, 플란데런 봉기에 호응하여 반란을 일으켰던 농민들은 저절로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플란데런 반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겐트 주민들은 끝까지 항전하기로 결의하고 잉글랜드에 사절을 보내 원군을 요청했다. 그들은 루이 2세가 대립 교황 클레멘스 7세를 따른다는 점을 상기시키며, 자신들은 우르바노 6세를 위해 봉기를 일으켰으니 이단을 토벌할 십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잉글랜드 당국은 이에 따르기로 하고, 헨리 르 디스펜서를 수장으로 하는 '십자군'을 일으켜 플란데런으로 파견했다. 이리하여 플란데런 내전은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의 대리전으로 전환되어 1385년까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