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5-29 20:35:18

필립 반 아르테벨데

파일:필립 반 아르테벨데.jpg
성명 필립 반 아르테벨데
Philipp van Artevelde
생몰년도 1340년경 ~ 1382년 11월 27일
출생지 플란데런 백국 겐트
사망지 플란데런 백국 루즈베케
아버지 야코프 반 아르테벨데
어머니 카타리나 반 코스터
직위 겐트 봉기군 지도자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플란데런 백국의 백작 루이 2세 드 플란데런에 맞서 봉기를 일으킨 겐트의 지도자.

2. 생애

1340년경 플란데런 백국 겐트에서 겐트 봉기군 지도자 야코프 반 아르테벨데와 카타리나 빈 코스터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1337년 플란데런 백작 루이 1세 드 플란데런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뒤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와 손잡고 승승장구해 플란데런 최강의 권력자가 되었으며, 에드워드 3세의 왕비인 에노의 필리파는 필리프의 대모가 되어줬다. 그러나 1345년 7월 아버지가 겐트에서 정적들에게 피살당한 뒤, 그는 가족과 함께 잉글랜드로 망명했다. 이후 오랫동안 타지 생활하던 그는 1360년 브레티니 평화 협약이 체결되고 나서야 겐트로 돌아갈 수 있었다.

1379년 8월, 플란데런 백작 루이 2세 드 플란데런이 라이벌인 브뤼헤만 감싸고 도는 것에 반감을 품은 겐트 직조공들이 반란을 일으켜 시민 정부를 다시 세웠고, 북부 플란데런의 나머지 지역에서도 루이 2세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다. 루이 2세는 토벌군을 규합한 뒤 반란군과 맞붙었고, 여러 전투에서 승리한 뒤 1381년 겐트를 포위했다. 겐트 시민들이 협상을 요청하자, 그는 겐트의 모든 성인 남성들의 운명을 자신이 결정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대숙청을 우려한 겐트 주민들은 끝까지 항전하기로 결의했다. 그들은 지난날 플란데런의 강력한 지도자로서 활약했던 야코프를 떠올리고, 그의 아들인 필립을 1382년 1월 24일에 지도자로 선출했다.

필리프는 지도자가 된 뒤 아버지를 살해한 살인범 12명을 처형한 후 잉글랜드에 구원을 요청했다. 이후 1382년 5월 3일, 그의 군대는 베버하우트 평원 전투에서 수적으로 훨씬 많은 토벌군을 격파하고 브뤼헤에 입성했다. 루이 2세는 강에 몸을 던져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고 릴로 도주했다. 이후 플란데런 전역이 반란에 가담했고, 오직 덴데르몬드와 오우데나르데 만이 루이 2세에 대한 충성을 유지했다. 한편 가혹한 세금에 시달리던 프랑스 북부 백성들 역시 플란데런 반란에 고무되어 봉기를 일으켰다. 상황이 이처럼 악화되자, 루이 2세는 사위인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필리프 2세는 이 기회에 플란데런을 자신에게 귀속시키기로 마음먹었고, 자국의 농민 반란에 영향을 끼친 플란데런 반란군을 경계한 프랑스 귀족들 역시 그를 지원하기로 했다. 1382년 11월 초 아라스에서 10,000명의 병력을 집결한 프랑스군은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의 지휘 하에 플란데런으로 진격했다. 11월 12일, 프랑스군은 코미네스 마을 인근의 리스 강에서 플란데런 반란군 900명에게 저지되었다. 이들은 리스 강의 유일한 다리를 끊어서 적군이 강을 건너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은 야밤에 400명의 프랑스 기사를 이끌고 강 건너편으로 건넌 뒤 다음날 아침 플랑드르 반란군과 교전했다. 그 사이에 다리를 재건한 프랑스군 대부분이 건너갔고, 플란데런군은 패주했다. 이후 플란데런의 여러 도시와 마을은 프랑스군에 평화 협상을 요청하고 프랑스 왕실에 몸값을 지불했다.

적군이 강을 건넜다는 소식을 접한 필립 반 아르테벨데는 파스상델레 인근의 루즈베케 언덕에 진영을 세우기로 했다. 프랑스군은 언덕 반대편에 진을 쳤다. 11월 27일 아침, 필립 반 아르테벨데는 짙은 안개가 낀 것을 이용해 프랑스군을 공격하기로 했다. 그는 프랑스 기병대의 돌파를 막기 위해 부하들에게 밀집된 정사각형 대형으로 전진하라고 명령했다. 프랑스 사령관 올리비에는 안개 속에서 진군해오는 적을 확인하고 보병대에게 적과 맞서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중기병에게 적의 측면과 후방을 요격하라고 덧붙였다.

이리하여 플란데런군은 프랑스 보병대와 치열한 백병전을 벌이던 중 적 중기병들의 측면과 후방 공격에 직면했다. 많은 플란데런인들이 적의 공격을 피해 도주하다가 자기들끼리 짓밟혔다. 많은 플란데런인들은 원형 방진을 치고 항전했지만, 사방에서 원거리 무기를 발사하고 기병들이 계속 전열을 흐트리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패주했고, 필립은 전사했다. 이 소식이 프랑스 북부에 전해지자, 플란데런 봉기에 호응하여 반란을 일으켰던 농민들은 저절로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겐트 주민들은 끝까지 항전하기로 결의하고 프란스 아커만을 새 지도자로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