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5-29 20:36:03

프란스 아커만

파일:프란스 아커만.jpg
성명 프란스 아커만
Frans Ackerman
생몰년도 1330년경 ~ 1387년 7월 22일
출생지 플란데런 백국 겐트
사망지 플란데런 백국 겐트
직위 겐트 봉기군 지도자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플란데런 백국의 백작 루이 2세 드 플란데런에 맞서 봉기를 일으킨 겐트의 지도자.

2. 생애

겐트의 상인 가문 출신으로, 1381년 1월 24일 겐트 반란군 지도자로 선출된 필립 반 아르테벨데에 의해 부관에 선임되었다. 1382년 5월 3일 베버하우트 평원 전투에 참전해 플란데런 백작 루이 2세 드 플란데런이 이끄는 토벌군을 격파하는 데 일조했으며, 리에주, 브뤼셀, 루벤과 함께 도시의 보급선을 확보하는 임무를 맡은 3,000명의 기동 부대인 라이저 부대 의 지휘권을 맡았다.

1382년 11월 27일 겐트 반란군이 루즈베케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참패하고 필립 반 아르테벨데가 전사했다. 다른 플란데런 도시들은 루이 2세에게 귀순했지만, 겐트 주민들은 끝까지 저항하기로 결의하고 그를 새 지도자로 옹립했다. 이후 아커만은 잉글랜드에 사절을 보내 루이 2세가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를 따른다는 점을 상기시키며, 자신들은 우르바노 6세를 위해 봉기를 일으켰으니 이단을 토벌할 십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로마 교황 우르바노 6세는 플란데런에서 발생한 사건을 전해듣고 클레멘스 7세를 추종하는 이들을 상대하는 십자군을 일으킬 것을 촉구하는 교서를 반포하면서, 노리치 주교 헨리 르 디스펜서에게 십자군에 참여하거나 지원하는 자들에게 면죄부를 발급하는 권한을 부여했다. 잉글랜드 의회와 상인들은 프랑스의 플란데런 침공으로 중단된 양모 수출이 이번 십자군 원정을 통해 재개될 수 있다고 여겨 호응했고, 의회 역시 부유한 플란데런 백국과의 우호 관계를 회복하고 상당한 이권을 확보할 수 있으리라 여겨 찬성했다.

한편,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는 삼촌인 곤트의 존이 카스티야 십자군을 운운하며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던 터라, 디스펜서 주교의 십자군을 지원한다면 삼촌이 원정을 포기하게 만들 수 있을 거라 보고 지지를 표했다. 또한 그는 1년 전 막대한 세금 부과에 반발한 농노들이 와트 타일러의 난을 일으킨 것 때문에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세금을 부과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번 십자군에 들어가는 비용은 교회가 전적으로 부담하니 꺼릴 게 없기도 했다.

1382년 12월 6일, 리처드 2세는 잉글랜드 전역에 십자군을 선포했다. 그리고 12월 말에 디스펜서 주교와 기사들은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클레멘스 7세를 숭배하는 이단을 토벌할 때까지 십자가를 지겠다고 맹세했다. 1383년 2월, 잉글랜드 의회는 국왕에게 지급하던 전쟁 수행 보조금을 디스펜서에게 할당하기로 결의했다. 이후 아커만은 잉글랜드군의 지원을 받으며 아르텐부르크를 공략해 마을을 약탈하고 약탈물을 겐트로 운반했으며, 뒤이어 브뤼헤를 습격했지만 공략엔 실패했다. 1383년 5월 25일 덩케르크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의 지원을 받아 루이 2세의 진압군을 격파했고, 오우데나르데를 기습 공략했다.

1383년 6월 8일 ~ 8월 8일에 잉글랜드군과 함께 이프르 공방전을 벌였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 후 프랑스군이 대대적인 반격에 착수하면서 됭케르크, 부르부르, 베르그, 포페링에, 뉴포르트 등이 차례로 프랑스군에 재정복되었고, 십자군이 플란데런에 마련한 마지막 거점인 그하블린느도 며칠 뒤 포위되었다. 디스펜서는 처음엔 항복을 거부하고 리처드 2세가 원군을 보내주기를 희망했지만, 리처드 2세가 프랑스와 정면 대결하기 싫어서 군대를 보내주지 않는데다 그하블린느 시민들이 프랑스군에 항복하겠다고 통보하자,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이 잉글랜드로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는 조건으로 항복하겠다고 제안했고, 프랑스군 수뇌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디스펜서의 십자군은 10월 말까지 영국 해협을 건너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아커만이 이끄는 겐트는 잉글랜드군이 허망하게 떠난 뒤에도 계속 항전했고, 플란데런 백작 루이 2세는 이들을 굴복시키지 못한 채 사망했다. 장인이 죽은 후 플란데런 백작위를 물려받은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는 1384년 1월 겐트 시와 15개월간 휴전을 맺는다는 내용의 로이링헨 협정을 체결한 뒤 겐트를 제압하기 위한 병력을 준비했다. 겐트 시민들 역시 그의 의도를 눈치채고 100명의 맨앳암즈와 300명의 장궁병으로 구성된 잉글랜드군 지원군을 받았다. 1385년 5월 휴전이 끝나자, 겐트 시민들이 선제 공격을 감행했다. 그들은 브뤼헤를 공략하려고 시도했고, 담 항구를 장악했다. 필리프는 즉시 슬로이스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를 이끌고 진격해 8월 28일에 담을 공략했다.

하지만 겐트의 방어가 워낙 강해서 무력으로 공략하기엔 무리라고 보고, 그 대신에 도시의 모든 보급선을 차단해 굶주리게 했다. 이후 겐트 시민들은 도시 내 식량이 바닥나면서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사절을 보내 평화 협상을 하자고 간청했고, 필리프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1385년 12월 18일, 양자는 투르네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필리프는 겐트 주민들을 사면하고 특권을 보장하는 대가로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벌금을 납부하도록 했다. 이후 모든 플란데런 도시들이 그에게 충성을 서약하면서, 플란데런 전쟁이 막을 내렸다. 아커만은 투르네 협약에 동의했지만, 궁정이나 관리로서 필리프를 섬기길 거부했다. 1387년 7월 22일, 아커만은 겐트의 성 베드로 수도원으로 가던 중 그 때문에 살해된 헤르젤레 영주의 아들의 습격으로 피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