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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335~1336년,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스코틀랜드를 복속하기 위해 벌인 원정.2. 상세
1333년 7월 19일,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할리돈 힐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에드워드 3세에 의해 스코틀랜드 국왕에 복위한 에드워드 발리올은 1333년 10월 스코틀랜드의 수도 퍼스에서 의회를 개최한 뒤 자신이 왕좌에 오르도록 도왔던 잉글랜드 귀족들에게 스코틀랜드 내 재산을 돌려줬다. 1334년 6월 19일, 발리올은 공식적으로 스코틀랜드 남동부의 8개 카운티를 잉글랜드에 양도했고, 에드워드 3세에게 경의를 표했다. 또한 데이비드 2세와 결혼했던 에드워드 3세의 여동생 조앤과 약혼했다.그러나 발리올의 입지는 여전히 안전하지 않았다. 로버트 1세에게 추방당했다가 발리올과 함께 스코틀랜드에 복귀한 귀족들과 브루스 가문의 지지자들간의 갈등이 갈수록 심해졌고, 급기야 에이셔의 로버트 스튜어트와 리데스데일의 영주 윌리엄 더글러스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이 데이비드 2세의 복위를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 결국 존은 1334년 8월 반란군을 피해 베릭 성으로 이동했다. 이에 에드워드 3세는 스코틀랜드를 무력으로 정복하기로 마음먹고, 1334년 겨울에 록스버러에서 기병대를 이끌고 출진해 1335년 초까지 스코틀랜드 서부 저지대로 이동하면서 여러 마을과 영지를 파괴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군이 정면 대결을 벌이길 꺼리고 유격전으로 대응한 데다, 그해 겨울 기후가 혹독했기에 더 이상 군사 활동을 하지 못하고 철수했다.
한편, 스코틀랜드 국왕이었다가 에드워드 3세의 침공을 피해 프랑스로 망명한 데이비드 2세를 지지하는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프랑스는 스코틀랜드와 1295년 동맹을 맺은 이래 이때까지 우호 관계를 이어갔다. 당시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한 십자군 원정을 준비하고 있던 필리프 6세는 동맹국이 무너진 채로 원정을 떠날 수는 없다고 여기고 에드워드 3세에게 항의하기로 했다. 1335년 2월 18일, 프랑스 사절이 뉴캐슬에서 에드워드 3세를 만나 스코틀랜드를 침략한 근거를 물었다. 에드워드 3세는 서유럽의 초강대국인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고 싶진 않았기에 이에 대해 애매모호한 태도로 일관하면서도 1335년 중반까지 지속되는 휴전을 스코틀랜드인들과 맺고 프랑스 사절이 평화 협상을 논의하는 걸 허용했다.
하지만 평화 협상은 말 뿐이었고, 에드워드 3세는 스코틀랜드 국경지대에 13,000명 이상의 군대를 집결시켰다. 스코틀랜드인들도 그의 의도를 눈치채고 잉글랜드군의 침략에 노출될 로우랜드에서 가져갈 수 있는 모든 재산을 챙겨 북부 산악지대로 피신했다. 1335년 7월, 에드워드 3세는 군대를 일으켜 칼라일에서 글래스고로 진격했다. 스코틀랜드군의 어떠한 저항도 받지 않는 가운데, 잉글랜드군은 진군로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파괴했다. 에드워드 3세는 스코틀랜드의 수도 퍼스에 입성했고, 스코틀랜드인들에게 전투를 강요하기 위해 계속해서 약탈하고 심각한 파괴를 자행했다.
1335년 8월 11일, 에드워드 3세는 스코틀랜드 왕실 청지기를 맡은 로버트 스튜어트와 제3대 머레이 백작 존 랜돌프 등 여러 스코틀랜드 거물들을 접견하고 퍼스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에드워드 발리올을 주권자로 받들며 에드워드 3세가 에드워드 발리올의 주군임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 대신, 에드워드 3세는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작위와 영지를 인정하기로 했다. 그는 이것으로 스코틀랜드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믿고 런던으로 귀환했다. 그러나 앤드류 머레이, 윌리엄 더글러스 등 일부 스코틀랜드 귀족들이 여전히 에드워드 발리올을 받들길 거부한 데다, 필리프 6세가 에드워드 3세가 자신을 무시했다고 여기고 스코틀랜드를 돕기 위해 중기병 1,000명이 포함된 장병 6,000명을 스코틀랜드로 파견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 1335년 8월, 스코틀랜드인과 프랑스인 선원들을 태운 사략선 3척이 잉글랜드 남부 해안에 상륙해서 마을들을 습격했다가 수비군에게 격퇴당했다. 잉글랜드인들은 프랑스가 오랜 앙숙인 스코틀랜드를 지원하는 것에 격분했고, 양국간의 갈등은 갈수록 고조되었다.
1335년 11월 30일, 앤드류 머레이가 이끄는 스코틀랜드 반군 1,100명이 컬블린 전투에서 데이비드 드 스트라스보기가 이끄는 3,000 가량의 잉글랜드군을 격파하고 스트라스보기를 전사시켰다. 이로 인해 스코틀랜드 내 잉글랜드 세력이 쇠약해진 데다, 필리프 6세가 노르망디에 500척 이상의 함대를 결집한 뒤 한 군대를 스코틀랜드로 수송하고 다른 군대를 포츠머스에 상륙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는 첩보를 접하자, 에드워드 3세는 잉글랜드 남부 해안의 수비를 강화하는 한편 프랑스군이 오기 전에 스코틀랜드를 완전히 제압하기로 마음먹었다. 1336년 6월, 에드워드 3세는 대규모 군대를 일으켜 퍼스로 진격했다. 앤드류 머레이는 이에 대응해 스코틀랜드의 수도 퍼스를 스스로 파괴한 뒤 고산 지대로 피신했다.
에드워드 3세는 6월 28일 폐허가 된 퍼스에 도착한 뒤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진군했다. 7월 중순 퍼스에서 북쪽으로 160km 떨어진 로킨도르브에 도착한 뒤 800명의 기병대만 이끌고 테이 만과 머레이 만 사이에 있는 스코틀랜드 동부 해안을 철저히 파괴했고, 프랑스 원정대의 잠재적인 하선 항구로 여겨진 포레스와 애버딘을 파괴했다. 머레이는 이런 잉글랜드와 전투를 벌이길 회피하고 산악지대에 은거했다. 필리프 6세는 이에 분노해 8월 20일 파리에 찾아온 잉글랜드 사절단에게 함대를 규합하여 잉글랜드를 침공해 스코틀랜드인들을 해방할 것이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 후 프랑스 전함들이 와이트 섬과 서퍽주의 해안을 습격해서 마을과 도시를 불태우자, 에드워드 3세는 9월 중순에 런던으로 돌아간 뒤 새로운 전쟁세를 부과해 프랑스의 침공에 대비한 군대 양성에 투입될 예산을 마련하도록 한 뒤, 스코틀랜드로 돌아가서 클라이드 요새에서 겨울을 보냈다.
잉글랜드군이 물러가자, 앤드류 머레이는 반격에 착수해 잉글랜드 해군이 사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던노타, 키네프, 로리스턴을 파괴했으며, 뒤이어 킨카딘과 앵거스 일대를 황페화했다. 이후 에드워드 3세가 가스코뉴를 침공한 프랑스에 대응하느라 스코틀랜드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못하는 틈을 타, 1337년 초 마르 백작, 파이프 백작, 윌리엄 더글러스의 지원을 받으며 파이프 주를 통과하여 포클랜드 마을을 파괴했으며, 루카르 성을 점령한 뒤 3주 간의 포위 공격 끝에 세인트 앤드류스 성을 점령하고 약탈했다. 뒤이어 그해 3월에 잉글랜드군으로부터 보스웰 성을 탈환했다.
1337년 중순, 앤드류 머레이는 칼라일로 진군한 뒤 에딘버러 탈환 작전에 착수했으며, 인근에 있던 잉글랜드군의 구원 시도를 크라이튼 전투에서 격퇴했다. 그러나 에딘버러 공방전 도중에 질병을 얻어 어쩔 수 없이 철수했고, 1338년 사순절에 오몬드 성에서 병사했다. 이후에도 윌리엄 더글러스, 패트릭 5세 드 던바, 알락산더르 램지 등 데이비드 2세에게 충성하는 스코틀랜드 귀족들이 프랑스의 지원에 힘입어 프랑스 원정에 골몰하는 에드워드 3세로부터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한 에드워드 발리올 추종 세력을 몰아붙이면서, 잉글랜드의 스코틀랜드 지배력은 갈수록 약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