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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3 17:56:05

슈루즈버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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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루즈버리 전투
영어: Battle of Shrewsbury
파일:슈루즈버리 전투도.jpg
시기 1403년 7월 21일
장소 잉글랜드 왕국 슈롭셔 슈루즈버리
원인 헨리 4세퍼시 가문의 갈등 폭발.
교전국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잉글랜드 왕국 파일:Coat_of_Arms_of_Henry_Percy_(Hotspur).svg.png 퍼시 반란군
지휘관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헨리 4세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헨리 5세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에드먼드 스태퍼드
파일:Coat_of_Arms_of_Henry_Percy_(Hotspur).svg.png 헨리 퍼시
파일:Coat_of_Arms_of_Henry_Percy_(Hotspur).svg.png 토머스 퍼시
파일:Coat_of_Arms_of_Henry_Percy_(Hotspur).svg.png 아치볼드 더글러스
병력 14,000명 왕실군보다 다소 많았다고 전해진다.
피해 3,000명 이상 2,000명 이상
결과 잉글랜드 왕실군의 승리.
영향 랭커스터 왕조의 입지 강화, 퍼시 가문의 쇠락.

1. 개요2. 배경3. 전개4. 전투 결과와 이후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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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403년 7월 21일, 헨리 4세가 이끄는 잉글랜드 왕실군과 헨리 '핫스퍼' 퍼시가 지휘하는 반란군이 맞붙은 전투. 헨리 4세가 이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위태로웠던 랭커스터 왕조의 입지가 강화되었으며, 잉글랜드 북부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퍼시 가문이 쇠락했다.

2. 배경

1399년 6월 말, 지난해 리처드 2세에 의해 추방당한 더비 백작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리처드 2세가 아일랜드에서 발발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원정을 떠난 틈을 타 추종자들을 이끌고 노스 요크셔의 레이븐스퍼에 기습 상륙한 뒤 리처드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수많은 귀족이 잇달아 가담했는데, 그중 가장 강력한 귀족은 단연 초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와 아들 헨리 '핫스퍼' 퍼시였다. 두 사람은 수백년 간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을 주도하면서 잉글랜드 북부에 강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퍼시 가문의 일원이었다. 볼링브로크의 헨리는 두 사람의 지원에 힘입어 리처드 2세를 폐위하고 잉글랜드 국왕 헨리 4세로 등극했다.

헨리 4세를 국왕으로 옹립한 뒤, 두 사람은 헨리 4세로부터 보상받았다. 헨리 '핫스퍼' 퍼시는 10년간 스코틀랜드 동부 국경 감시관을 맡을 권리를 인정받았고, 아버지 헨리 퍼시 역시 10년간 스코틀랜드 서부 국경 감시관을 맡을 권한을 부여받았다. 이리하여 퍼시 가문은 스코틀랜드와 접한 잉글랜드 북부 전체를 총괄할 정도로 강대한 위세를 떨쳤다. 하지만 헨리 4세는 두 사람의 권세가 왕권에 위협이 될 정도로 강해지는 걸 우려해 견제하기로 하고, 라비의 네빌 남작 랄프 네빌에게 컴벌랜드 등 다수의 영지를 넘겨주고 초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에 선임했으며, 1402년 3월 헨리 '핫스퍼' 퍼시를 대신해 록스버러 성의 수비대장으로 선임했다. 이후 헨리 퍼시 부자는 왕에게 일련의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은 왕이 국경을 지키는 데 필요한 재정을 제대로 지원해주지 않아서 수비가 잘 되고 있지 않다고 불평하는 것이었다.

한편, 퍼시 부자는 헨리 4세가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에 전념하고 웨일스 반란군 지도자 오와인 글린두르와 화해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헨리 4세는 정반대로 행동했고, 두 사람은 이에 불만을 품었다. 그러던 1402년 6월 22일, 에드먼드 모티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브린 글라스 전투에서 오와인 글린두르에게 참패하고 에드먼드 모티머가 생포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헨리 '핫스퍼' 퍼시는 모티머의 누이 엘리자베스를 아내로 두고 있었기에, 그의 몸값을 모집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헨리 4세는 모티머 가문이 자신에게 진심으로 충성하는지 의심해 에드먼드의 몸값을 지불하길 거부했고, 급기야 에드먼드의 영지를 압수하기 시작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에드먼드 모티머는 겨분해 오와인 글린두르의 딸 카트린과 결혼하고, 리처드 2세의 후계자는 헨리 4세가 아니라 자기 조카이자 제5대 마치 백작인 에드먼드 모티머라고 선언했다.

1402년 9월 14일, 헨리 '핫스퍼' 퍼시, 조지 2세 드 던바, 랄프 드 그레이스토크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은 호밀돈 언덕 전투에서 잉글랜드 북부를 기습 공격해 약탈을 자행하고 본국으로 귀환하던 스코틀랜드군을 궤멸하고, 스코틀랜드군 사령관 아치볼드 더글러스를 비롯한 스코틀랜드 영주 80명을 생포했다. 이 소식을 접한 헨리 4세는 포로가 된 스코틀랜드 남작들을 런던으로 이송하라고 요구했다. 헨리 '핫스퍼' 퍼시는 자신이 잡은 더글러스 백작을 넘기길 거부했다. 이에 헨리 4세가 연이어 질책하자, 그는 반란을 일으키기로 작정했다.

1403년 6월 초, 헨리 '핫스퍼' 퍼시는 체스터에서 헨리 4세를 성토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는 이 선언문에서 헨리 4세가 리처드 2세에 대한 반역과 배신을 했다고 비난했으며, 정당한 왕위 계승자인 에드먼드 모티머[1]의 법적 권리를 부정하게 박탈했다고 덧붙였다. 여기에 웨일스에서 반란을 일으킨 오와인 글린두르와 글린두르의 포로로 있던 에드먼드 모티머[2]도 호응했으며, 포로로 잡혀 있던 스코틀랜드 영주들도 자유를 얻는 대가로 그와 동맹을 맺었다. 이후 헨리 '핫스퍼' 퍼시는 숙부인 우스터 백작 토머스 퍼시와 함께 슈루즈버리로 행진하면서 오와인 글린두르와 합세하고자 했고, 아버지 헨리 퍼시도 아들을 돕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다.

한편, 헨리 4세는 버튼온트렌트에서 병력을 소집하고 있었다. 이때 조지 2세 드 던바가 퍼시 반란군이 오와인 글린두르와 합류하기 전에 쳐부숴야 한다고 조언했고, 그는 이를 받아들여 서쪽으로 진군했다. 리치필드에서 아들인 웨일스 공 몬머스의 헨리와 합세해 14,000명 가량의 병력을 확보한 후, 슈루즈버리에 헨리 '핫스퍼' 퍼시보다 한발 앞서 도착했다. 이리하여 슈루즈버리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전개

1403년 7월 20일, 슈루즈버리에 도착한 헨리 '핫스퍼' 퍼시는 헨리 4세가 한발 앞서 슈루즈버리 성에 입성한 걸 확인한 후, 슈루즈버리 시 주변을 도는 세번 강의 북쪽 지역에 진지를 세웠다. 7월 21일, 왕실군은 슈루즈버리에서 동쪽으로 약 1마일 떨어진 어핑턴에서 세번 강을 건너 체스터로 향하는 헨리 퍼시의 퇴각로를 차단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이후 해틀리필드로 알려진 넓은 완두콩 밭에 주둔했다. 양자는 7월 21일 오전 내내 협상했다. 슈루즈버리의 수도원장인 토마스 프레스트버리가 헨리 '핫스퍼' 퍼시와 만나 왕의 제안을 전달했지만, 헨리 '핫스퍼' 퍼시는 어떤 조건도 거부했고, 삼촌인 토머스 퍼시는 헨리 4세를 자칭하는 찬탈자와는 어떤 대화도 하지 않겠다며 모욕했다.

협상이 정오 무렵에 결렬된 뒤, 양군은 전투를 벌이기 위해 접근했다. 해가 지기 약 2시간 전, 헨리 4세가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이후 양측 궁수대가 상대방을 향해 화살을 퍼부었다. 퍼시 가문이 조련한 체셔 궁수들은 왕실군 궁수대보다 뛰어난 실력을 발휘했다. 당대 연대기 작가 토머스 월싱엄은 왕의 부하들이 "가을의 낙엽처럼 떨어졌다"고 기록했다. 디울라크르 연대기에 따르면, 스태퍼드 백작 에드먼드 스태퍼드의 지휘를 받던 왕의 우익 부대는 에드먼드 스태퍼드가 아치볼드 더글러스에게 살해당하자 전장에서 일찍 패퇴했다고 한다. 이렇듯 왕실군이 뛰어난 궁술을 발휘한 체셔 궁수들에게 압도당하자, 헨리 '핫스퍼' 퍼시는 아치볼드 더글러스와 함께 국왕의 깃발이 있는 쪽으로 돌격해 헨리 4세를 처단하려 했다.

파일:해리 핫스퍼의 죽음.jpg

헨리 '핫스퍼' 퍼시의 맹렬한 돌격으로 왕실군은 한때 붕괴 위기에 몰렸고, 국왕 기수였던 기사 월터 블런트가 헨리 4세로 오인되어 아치볼드 더글러스에게 살해되었다. 그러나 헨리 4세는 목숨을 건졌고, 오히려 헨리 '핫스퍼' 퍼시가 돌격 중에 전사했다. 토머스 월싱엄에 따르면, 그는 부하들을 이끌고 적진에 무모하게 침투했다가 피살되었다고 한다. 또다른 기록에 따르면, 그는 앞을 좀더 잘 보기 위해 바이저를 열었다가 얼굴에 화살을 맞아 죽었다고 한다. 노섬브리아 기사들은 헨리 4세가 죽었을 거라 여기고 그의 죽음을 환영하며 "헨리 퍼시 왕!"이라고 외쳤다. 그러자 헨리 4세가 나서며 "헨리 퍼시는 죽었다!"라고 외쳤다. 헨리 퍼시가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자, 노섬브리아 기사들은 그제야 헨리 퍼시가 전사했다는 걸 깨닫고 항복하거나 도주했다. 이리하여 슈루즈버리 전투는 막을 내렸다.

4. 전투 결과와 이후의 이야기

헨리 4세는 슈루즈버리 전투에서 3,000 가량의 병력을 상실해, 2,000여 명을 상실한 반란군에 밀렸고,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하지만 헨리 퍼시가 그의 목숨을 노리고 돌격했다가 전사하는 행운이 찾아온 덕분에 승리했다. 헨리 '핫스퍼' 퍼시의 유해는 슈롭셔 주 휘트처치로 옮겨져 가매장되었다가, 그가 살아있다는 소문을 불식시키려는 헨리 4세의 명령으로 슈루즈버리의 시장에 두 개의 맷돌 사이에 똑바로 세워져서 전시되었다. 이후 그의 수급은 베어져 요크에 보내져 요크 시의 성문에 박혔고, 몸통은 4등분되어 런던, 뉴캐슬, 브리스톨, 체스터에 별도로 보내졌다가 나중에 미망인인 엘리자베스 모티머에게 전달되었다. 한편, 우스터 백작 토머스 퍼시는 생포된 뒤 뒤이은 짧은 재판 끝에 사형을 선고받았고, 7월 23일에 슈루즈버리 시에서 참수형에 처해졌다. 그의 유해는 슈루즈버리에 있는 성 피터 수도원에 안장되었고, 머리는 런던으로 보내져 런던 브리지 위에 전시되었다. 그리고 아치볼드 더글러스 등 퍼시 반란군에 가담한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생포된 뒤 런던으로 끌려갔다.

파일:몬머스의 헨리의 뺨에서 화살촉을 빼내는 존 브래드모어.jpg

헨리 4세의 장남 몬머스의 헨리는 최전선에서 진군하다가 체셔 궁수가 쏜 화살이 얼굴에 박혀 중상을 입었지만, 고통을 찹고 부하들을 이끌고 경사면으로 올라가 육박전을 벌여 아버지의 승리에 일조했다. 그러나 헨리 왕자가 입은 부상은 거의 치명적이었다. 화살이 코 옆에 6인치(15.24cm)나 박혔으며, 의사들은 화살을 뽑으려고 했을 때 화살촉이 안쪽 깊숙한 곳에 남아 뼈가 갈라지는 것을 발견했다. 헨리는 패혈증으로 거의 죽기 직전까지 갔지만, 왕실 의사 존 브래드모어가 긴 족집게 같은 특수 장비#를 사용해 화살촉을 제거하고, 붕대에 천연 항생제인 꿀을 발라 막은다음 꿰맨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수술은 몇 시간 동안 진행되었는데, 헨리는 수술을 받는 내내 의식이 있었고 끔찍한 고통에 시달렸는데도 끝까지 인내했다고 전해진다. 헨리는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지만, 얼굴은 평생 동안 흉터로 인해 훼손된 상태로 남아 있었다.

이 무렵, 아들의 반란에 가담하려 했던 초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는 군대를 이끌고 남하했지만 도중에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이 이끄는 군대에 가로막혀서 아들과 합세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나중에 슈루즈버리 전투 소식을 접하자 급히 워크워스 성으로 피신했다. 이후 상황을 살핀 끝에 모든 게 틀렸다는 걸 깨닫고 남쪽으로 말을 타고 내려가 8월 8일 요크에서 헨리 4세에게 엎드려 용서를 구했다. 헨리 4세는 그가 반란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던 점을 고려해 스코틀랜드 국경 감시관으로서의 직위를 박탈하고, 영지 일부를 몰수하며, 워크워스 성에 가택 연금하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그러나 노섬벌랜드 백작은 헨리 4세에게 깊은 복수심을 품고, 오와인 글린두르와 비밀리에 서신을 주고받다가 1405년 요크 대주교 리처드 르 스크루프, 잉글랜드 원수 토머스 모브레이, 제5대 바르톨프 남작 토머스 바르돌프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반란군은 1405년 5월 29일 쉽턴 무어 전투에서 패배했고, 생포된 스크루프 대주교와 모브레이 원수는 처형되었다. 이후 랄프 네빌이 이끄는 왕실군이 북쪽으로 이동하자, 노섬벌랜드 백작은 바르톨프 남작 및 헨리 '핫스퍼' 퍼시의 아들이자 자신의 손자인 헨리 퍼시와 함께 스코틀랜드로 망명했다. 헨리 4세는 노섬벌랜드 백작 편에 섰던 몇몇 영주들의 머리를 참수한 뒤 요크 성벽에 전시하라고 명령했다. 다음 의회에서 노섬벌랜드 백작의 모든 영지는 압수되었고, 그의 작위는 회수되었다. 그 후 헨리 퍼시는 스코틀랜드와 프랑스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1408년 2월 잉글랜드로 몰래 귀국했다가 브래햄 무어에서 요크셔 보안관 토머스 로크비의 지령을 받은 장병들에 의해 피살되었고, 그의 수급은 런던 브리지에 공개 전시되었고 몸통은 4등분되었다.

헨리 4세는 슈루즈버리 전투 현장에 전사자들을 기리기 위한 예배당을 세우도록 했다. 이 예배당은 1460년 성 마리아 막달레나 교회로 대체되었고, 1862년에 복원되었다.
[1]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둘째 아들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의 외손자[2] 퍼시 가문이 잉글랜드 왕위 계승자로 내세운 에드먼드 모티머의 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