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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6 09:30:03

에기용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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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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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346년 4월 1일 ~ 8월 20일, 노르망디 공작 장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잉글랜드군이 장악한 에기용을 포위 공격한 공방전.

2. 상세

1345년 8월과 10월, 더비 백작 그로스몬트의 헨리가 이끄는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은 수적으로 우월한 남부 프랑스군을 상대로 베르주라크 전투오베르슈 전투에서 연전연승하고 몽셰귀르, 라 레올, 에기옹 등 남부 프랑스의 여러 도시를 공략해 잉글랜드의 가스코뉴 및 남부 프랑스에 대한 지배력을 성공적으로 강화했다. 이때 또다른 가스코뉴 방면 잉글랜드 사령관인 스태퍼드 백작 랄프가론 강론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프랑스 남서부의 요충지인 에기용으로 진군했다. 주민들은 잉글랜드군이 접근해오자 수비대를 축출한 뒤 그들에게 성문을 열었다.

1346년 초,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의 후계자이자 노르망디 공작인 은 적을 남부 프랑스에서 몰아내라는 명령을 받들어 오를레앙에 15,000~20,000명에 달하는 대군을 집결시켰다. 그는 먼저 에기용을 탈환한 뒤 라 레울을 공략하고 뒤이어 가스코뉴의 수도인 보르도를 공략하기로 했다. 프랑스군은 장 왕자의 지휘하에 아쟁에서 가론 계곡을 따라 행진하여 4월 1일 에기용에 도착했다. 스태퍼드 백작은 이에 맞서 300명의 중장병과 600명의 장궁병을 통해 요새 수비에 만전을 기했다.

수적으로는 프랑스군이 압도적인 우위였지만, 장은 에기용을 완전히 고립시키기엔 지형이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론 강과 론 강이 서로 합류하면서 3개의 서로 다른 구역을 형성했기에, 도시를 포위하려면 이 3개 구역 모두에 병력을 배치해야 했다. 그렇게 했다가는 각개 격파될 우려가 있었기에 서로 긴밀하게 협력해야 했지만, 강이 가로막고 있어서 가론 강과 론 강 위에 새로운 다리를 건설해야 했다. 론 강을 잇는 다리 공사는 잉글랜드 수비대가 훼방을 놓는 통에 지연되었지만, 5월 말에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가론 강을 잇는 다리는 적 수비대가 장악하고 있던 터라 쉽사리 장악되지 않았다.

더욱이 워낙 많은 병사들이 몰려든 터라 프랑스군이 가지고 온 보급품은 금새 바닥났고, 주변 지역 역시 황폐화되었기에 병참을 전적으로 강에 의존해야했다. 라 라울에 기반을 둔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은 프랑스 식량 운송부대를 지속적으로 습격하고 그들의 보급품을 가로챘다. 여기에 프랑스 숙영지 내부에서 이질이 발생해 많은 병사가 죽어갔다. 6월 중순 프랑스군이 2척의 대형 보급 바지선에 보급품을 채워서 가론 강 서쪽에 주둔한 병사들에게 전달하려 했다. 하지만 그러려면 적 수비대가 지키고 있는 가론 강 다리 아래를 통과해야 했다. 프랑스군은 강행돌파를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바지선들은 파괴되었다. 이에 격분한 프랑스군이 달려들자 수비대는 후퇴했지만, 많은 병사가 성문이 닫히기 전에 들어가지 못해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프랑스군은 이후에도 공성전을 이어갔지만 좀처럼 함락될 기미가 없었다.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이 소량의 보급품과 증원군을 야간에 강을 통해 수비대에 전달하는 것을 막지 못했기 때문이다. 프랑스군은 에기용 남쪽 방어선에 최소 12개의 투석기를 동원해 포격을 가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7월에는 3개의 공성탑을 바지선에 태워서 에기용 북쪽 방어선을 공격했지만, 공성탑들이 적 투석기가 날린 바위에 맞아 모조리 파괴되는 바람에 실패했다.

장은 도시를 점령할 때까지 공성전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엄숙하게 맹세했지만,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7월 초 프랑스군 보급로를 경비하던 바하몽 성이 잉글랜드군의 기습 공격으로 함락되었다. 7월 말 아쟁의 세네샬인 로베르 드 우데토가 2,000명의 장병을 이끌고 탈환을 시도했지만, 가이야르 1세 드 듀퐁이 이끄는 수비대가 이를 격파하고 로베르를 생포했다. 이로 인해 보급로가 끊겨버리자, 프랑스군은 굶주렸고 수많은 말이 사료 부족으로 죽었으며, 이질은 갈수록 널리 퍼졌다. 이에 절망한 많은 장병들은 끊임없이 탈영했다.

그러던 중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1346년 7월 12일 노르망디에 상륙한 뒤 약탈 행진을 이어간 끝에 7월 26일 노르망디에서 루앙 다음으로 큰 도시인 캉을 점령하고 주민 수천명을 학살하고 200여 명의 기사와 향사들과 수많은 도시 유력자들을 생포하자(1차 캉 공방전), 필리프 6세는 아들 장에게 당장 에기용 포위를 중단하고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장은 에기용을 공략할 때까지 공성전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하느님께 맹세했다며 거부했지만, 8월 12일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서 32km 떨어진 지점까지 진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더는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8월 14일, 장은 지난날 아버지 랭커스터 공작이 사망하면서 랭거스터 공작위를 상속받은 그로스몬트의 헨리에게 지역 휴전을 제안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곤경을 사전에 파악한 헨리는 거부했다. 8월 20일, 장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북쪽으로 철수했다. 에기용 수비대를 비롯한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은 이들을 추격해 수많은 보급품과 공성 무기 및 말 등을 포획하고 장의 개인 수하물 일부를 입수했다. 프랑스군이 론 강 상류에 설치했던 소규모 요새들은 잉글랜드군에 공략되었다.

장 공작과 그의 군대는 20,000~25,000명의 북부 프랑스군이 크레시 전투에서 완패한 지 2주 후인 9월 7일 즈음에 필리프 6세와 합류했지만, 군기가 매우 불량하고 식량이 부족해서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승리할 가망이 없었다. 이에 프랑스군은 파리를 위협해오는 에드워드 3세에 맞서 새로운 군대를 양성하기 위해 가스코뉴 전선의 수비대를 대거 철수했다. 그 덕분에 가스코뉴를 비롯한 남부 전선은 사실상 무방비 상태가 되었고, 랭커스터 공작 헨리는 이 기회를 틈타 프랑스 남부의 상당수 도시 및 요새들을 공략하고 필리프 6세를 여전히 따르는 마을들을 철저하게 약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