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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356년 10월 3일 ~ 1357년 7월 5일, 잉글랜드군이 렌을 포위 공격했으나 함락에 실패한 공방전. 보잘것 없는 신분이었던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프랑스의 영웅으로서 이름을 떨치는 계기가 된 전투이다.2. 상세
1356년 9월 19일, 프랑스 국왕 장 2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푸아티에 전투에서 흑태자 에드워드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에 궤멸되고 장 2세가 생포되었다. 이 일로 민심은 요동쳤고, 수많은 도시와 마을들이 잉글랜드군에 투항했다. 1341년부터 이때까지 10여 년간 공작위 계승을 놓고 내전이 벌어지고 있던 브르타뉴에서도 귀순 행렬이 이어졌다. 하지만 몇몇 도시들은 여전히 프랑스에 충성했는데, 그중 하나가 렌이었다.1356년 10월 3일, 렝커스터 공작 그로스몬트의 헨리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브르타뉴 내전을 마무리하기 위해 렌을 침공했다. 당시 그가 거느린 병력 규모는 불분명하나, 학자들은 당대 연대기 기록들을 종합해 1,500 ~ 4,000명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기욤 드 페뉴와 베르트랑 드 생페른이 도시 방어를 지휘했다고 전해지며, 수비대 규모는 알려진 바 없으나 잉글랜드군보다 약간 많았다고 한다. 헨리는 당장 공격하는 것은 승산이 적다고 보고, 도시를 에워싸서 굶겨죽이기로 했다.
1357년 2월, 렌의 일부 주민들은 지하에서 땅을 파는 소리를 듣고 적군이 성벽 아래에 터널을 파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페뉴는 성벽 근처의 집 주인들에게 금속 공이 들어있는 구리 대야를 걸어두도록 명령했다. 이후 어느 곳에서 금속 공이 구리 대야를 치는 소리가 들리자, 페뉴는 그곳으로 달려간 뒤 지하에서 땅굴을 파고 있던 적병을 쳐 죽이고 땅굴을 지탱하기 위해 설치된 목조 벽에 불을 질렀다. 알랭 부샤르는 <브르타뉴 연대기>에서 잉글랜드군이 땅굴을 파던 지점 위의 건물은 생 소뵈흐 성당이었다고 밝혔다. 이후 성당 예배당에 있던 성모상이 기적적으로 살아나 프랑스군에게 적이 있는 곳을 손가락으로 가르켜줬다는 전설이 돌았고, 이 동상에 대한 숭배 의식이 브르타뉴에서 오랫동안 유행했다.
헨리는 땅굴을 파는 시도가 실패하자 적군이 식량난에 시달리는 점을 이용하기로 하고, 모르델레 성문 앞에서 돼지 떼를 잔뜩 풀어서 먹이를 먹였다. "우리는 이렇게 많은 돼지를 먹일 정도로 식량이 남아도니 어서 항복하라"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이었다. 페뉴는 이에 대응해 성문 기둥에 암돼지 한 마리를 매달아뒀다. 잉글랜드군이 잔뜩 풀어놓은 돼지들은 기둥에 매달린 돼지의 울음을 듣고 이에 호기심을 품은 나머지 잉글랜드 병사들이 막기 전에 성으로 달려들었다. 수비대는 이 황당한 상황에 얼이 빠져 있는 잉글랜드군을 향해 이렇게 조롱했다고 전해진다.
"우리가 이제 너희 돼지를 사육하고 있으니 우리에게 삯을 갚아라!"
한편 브르타뉴에서 민병대를 이끌고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벌이고 있던 베르트랑 뒤 게클랭은 렌을 구하기로 했다. 그는 장병들을 독일인 용병 복장으로 갈아입힌 뒤 식량 수송 마차들을 이끌고 잉글랜드군에 접근했다. 잉글랜드 장병들은 그들이 아군과 합세하러 온 용병들이라 여겨 경계하지 않았고, 그들은 잉글랜드 진영을 그대로 통과해 렌 시에 식량을 전달했다. 이후 게클랭은 잉글랜드 진영을 야간에 습격하고 반격이 오기 전에 철수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중 한 전투에서 잉글랜드 기사 윌리엄 밤브로우(William Bamborough)가 일기토를 신청하자, 베르트랑은 바로 응전해 그를 처단했다.
이렇듯 렌 공략이 뜻대로 되지 않고 베르트랑이 유격전으로 괴롭히는 상황에 시달리던 헨리는 1357년 7월 에드워드 3세로부터 장 2세와 평화 협약을 맺었으니 렌 공격을 중단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에 헨리는 10만 리브르를 보상금으로 받고 렌 시가 명목상으로 항복하면서 잠깐동안 성벽에 자신의 깃발을 세우는 조건으로 물러나겠다고 제안했고, 렌 수비대는 이를 받아들였다. 오베르슈 전투 등에서 프랑스군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연이어 안겼던 헨리를 물리친 게클랭은 이때부터 전국적으로 유명해졌고, 장차 프랑스를 구한 영웅으로 거듭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