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조지 2세 드 던바 George II de Dunbar | |
생몰년도 | 1370년 ~ 1457년 이후 | |
출생지 | 스코틀랜드 왕국 마치 백작령 | |
사망지 | 잉글랜드 왕국 | |
아버지 | 조지 1세 드 던바 | |
어머니 | 크리스티나 세튼 | |
형제 | 엘리자베스, 가빈, 콜럼바, 패트릭, 존 데이비드, 자네트 | |
아내 | 베아트릭스, 하와이즈 또는 알리시아 | |
자녀 | 패트릭, 조지, 아치볼드, 마조리, 유페미아 | |
직위 | 제11대 던바 및 마치 백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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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코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아버지와 함께 잉글랜드로 망명해 스코틀랜드군과 맞서다가 스코틀랜드에 도로 돌아와서 영지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왕실 음모에 휘말려 전 재산을 잃고 잉글랜드로 망명했다.2. 생애
1370년경 제10대 던바 및 마치 백작 조지 1세 드 던바와 스코틀랜드 기사 앨런 드 윈툰의 딸인 크리스티나 새튼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1390년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2세로부터 마치 백작과 애넌데일 영주권을 지키기 위해 군대를 자율적으로 이끌 권리 및 결혼 허가를 받았다. 1400년 아버지와 함께 잉글랜드로 이주한 뒤 잉글랜드 국왕 헨리 4세에게 충성을 서약했다.1402년 6월 22일, 헨리 '핫스퍼' 퍼시와 함께 스코틀랜드를 침공해 패트릭 햅번이 이끄는 소규모 스코틀랜드군을 네스빗무어 전투에서 격파하고 패트릭 햅번을 비롯한 스코틀랜드 장병 240명을 사살했다. 스코틀랜드 정계는 이에 분개했고, 제4대 더글러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가 총사령관을 맡고 100명이 넘는 남작과 50명의 프랑스 기사를 포함한 대규모 스코틀랜드군이 조성되었다. 당대 연대기에는 40,000명에 달한다고 기술되었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7,000 ~ 10,000 명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스코틀랜드군은 잉글랜드 북부를 별다른 저항 없이 초토화한 뒤 스코틀랜드로 귀환했다. 그러다가 호밀돈 언덕에서 헨리 '핫스퍼' 퍼시, 조지 2세 드 던바, 랄프 드 그레이스토크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에게 가로막혔다. 1402년 9월 14일에 벌어진 호밀돈 언덕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은 참패했다. 이 전투에서 80명의 스코틀랜드 영주가 생포되었는데, 그들 중에는 아치볼드 더글러스를 포함한 거의 모든 스코틀랜드 사령관과 30명의 프랑스 기사가 있었다. 반면 잉글랜드군은 단 기사 10명만 잃었다고 전해진다. 스코틀랜드 포로들은 북부 잉글랜드의 도시들에 보내졌다. 1403년 퍼시 가문이 헨리 4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을 때 헨리 4세를 지지했고, 아버지와 함께 헨리 4세의 군대에 가담하여 슈루즈버리 전투에 참여해 왕실군이 헨리 '핫스퍼' 퍼시를 격파하는 데 일조했다. 이후 1405년 버릭셔주 콕번스페스 성의 중장을 맡았다.
1409년 아버지와 함께 스코틀랜드로 귀환했으며, 1411년 12월 7일에 스코틀랜드의 권신인 올버니 공작 로버트 스튜어트의 아들인 머독 스튜어트를 잉글랜드의 포로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위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1416년에서 1419년사이에 수많은 다른 귀족과 함께 헨리 5세의 양해를 받고 잉글랜드를 안전하게 여행했다. 1420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50세의 나이에 제11대 던바 및 마치 백작이 되었다. 1422년 8월 19일, 형제 패트릭과 함께 오랫동안 잉글랜드에 포로로 잡혀 있던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1세의 석방을 협상하기 위해 파견된 사절단의 일원이 되었다.
1424년 3월 28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7년 휴전 협정이 이뤄지는 데 일조했으며, 스코틀랜드로 귀환한 뒤 더럼에서 제임스 1세와 조앤 보퍼트 왕비를 알현했다. 1424년 5월 21일 스콘에서 열린 제임스 1세의 대관식에 참석해 기사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1425년 올버니 공작 머독 스튜어트를 비롯한 20명의 귀족들과 함께 부패 혐의로 긴급 체포되어 지하 감옥에 감금되었다. 올버니 공작과 그의 아들들, 그리고 레녹스 백작 던컨이 스털링에서 처형되었지만, 그는 다른 귀족들과 함께 석방되었다. 1427년 제5대 더글러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와 함께 잉글랜드 국왕 헨리 6세와 접견해 2년간의 휴전 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베릭어폰트위드의 총독 로버트 움프라빌은 이를 거부하고 스코틀랜드에 대한 적대 행위를 지속했다. 조지는 1429년 6월과 이듬해 1월에 잉글랜드와의 임시 휴전 협상에 참여했으며, 1430년 10월 홀리루드하우스에서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2세의 후견인으로 공식 임명되었다.
1434년, 조지는 아들 패트릭과 함께 잉글랜드에 2번 방문했다. 이에 정적들은 그가 잉글랜드와 내통하고 있다고 고발했고, 에딘버러 성에 투옥되었고, 앵거스 백작 윌리엄 더글러스 , 크라이튼 총리, 헤일스의 아담 헵번 경이 던바 성으로 파견되어 조지의 영지를 몰수했으며, 아담 햅번이 던바 성의 성주로 임명되었다. 1435년 1월 10일, 퍼스에서 열린 스코틀랜드 의회는 조지를 반역죄가 아니라 이전에 아버지로부터 압수했던 토지와 재산을 소유한 혐의로 기소했다. 조지는 자기 아버지가 1409년 올버니 공작 로버트 스튜어트로부터 사면받고 영지를 돌려받았다고 항변했지만, "반역죄로 선언된 몰수는 섭정에 의해 취소될 수 없다"는 대답을 받았다.
결국 모든 영지를 몰수당한 그는 스코틀랜드를 떠나 잉글랜드로 망명했고, 웨스트민스터 의회는 1435년 10월 31일 "던바 백작 조지, 기수 24명"에 대한 통행권 영장을 발령했다. 그는 1457년경에 잉글랜드 기록에서 마지막으로 언급되었지만, 언제 어디서 사망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3. 가족
- 베아트릭스: 출신이 알려지지 않았다.
- 킬콘구하르의 패트릭 드 던바: 마치의 기사. 엘리자베스 싱클레어의 남편.
- 조지 드 던바: 던바의 주교.
- 아치볼드 드 던바
- 마조리 드 던바: 일크의 기사 존 스윈턴의 부인.
- 유페미아: 기사 조지 그레이엄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