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EAE0B3><colcolor=#000> 클래런스 공작 앤트워프의 라이어널 Lionel of Antwerp, Duke of Clarence | |
이름 | 앤트워프의 라이어널 (Lionel of Antwerp) |
출생 | 1338년 11월 29일 |
브라반트 공국 안트베르펜[1] | |
사망 | 1368년 10월 17일 (향년 29세) |
피에몬테주 알바 | |
배우자 | 제4대 얼스터 여백작 엘리자베스 드 버그 (1352년 결혼 / 1363년 사망) |
비올란테 비스콘티 (1368년 결혼) | |
자녀 | 필리파 |
아버지 | 에드워드 3세 |
어머니 | 에노의 필리파 |
형제 | 에드워드, 이사벨라, 조앤, 존, 에드먼드, 메리, 마거릿, 토머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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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왕자. 에드워드 3세의 차남이다.[2]2. 생애
1338년 11월 29일, 브라반트 공국 안트베르펜의 성 미카엘 수도원에서 출생했다. '앤트워프(Antwerp)'는 안트베르펜 출신이라는 의미가 담긴 별명이다. 아버지는 1327년부터 잉글랜드 국왕이었던 에드워드 3세였고, 어머니는 프랑스와 플란데런 일대에서 강력한 세력을 일군 아벤 가문 출신으로, 에노 백작 기욤 1세의 딸인 에노의 필리파였다. 에드워드 3세와 필리파는 14명의 자녀를 두었다. 라이오넬은 세번째 아들이었지만, 에드워드 3세의 차남인 헤트필드의 윌리엄이 유아기에 사망하면서 실질적으로는 두번째 아들로 취급되었다.에드워드 3세의 장남인 흑태자 에드워드가 에드워드 3세의 후계자로 일찍부터 공인되었고, 그 다음 순위는 라이오넬이었다. 그는 다섯 남동생을 두었는데, 이중 곤트의 존, 요크 공작 랭글리의 에드먼드와 글로스터 공작 우드스톡의 토머스가 성인으로 성장했으며, 누이로 이사벨라[3], 조앤[4]이 있었다.
에드워드 3세가 아들에게 '라이오넬(Lionel)'이라는 특이한 이름을 지은 것에 대해 여러 전승이 전해진다. 이중 하나에 따르면, 에드워드 3세는 자신과 동맹을 맺은 브라반트 공국의 문장인 사자를 본땄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아서 왕 전설을 신봉했던 에드워드 3세가 원탁의 기사 중 한 명인 라이오넬을 아들의 이름으로 쓰기로 한 것이 사실에 근접할 거라고 본다.
1332년, 아일랜드에서 가장 강력한 앵글로-노르만 가문 중 하나의 우두머리이자 제3대 얼스터 백작이며 제6대 콘노트 남작이었던 윌리엄 드 버그가 사망했다. 그는 생전에 제3대 랭커스터 백작 헨리 플랜태저넷의 딸 마틸다와 결혼해 외동딸 엘리자베스를 낳았다. 에드워드 3세는 자신의 아들 라이오넬을 엘리자베스와 결혼시켜 아일랜드에 대한 잉글랜드의 영향력을 증대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리하여 1342년 9월 9일, 런던 탑에서 라이오넬과 엘리자베스의 약혼식이 거행되었다. 라이오넬이 이때 받은 지참금에는 아일랜드 북부, 서부 및 남서부에 위치한 코노트, 먼스터, 얼스터가 포함되었다. 결혼은 1352년에 이뤄졌지만 라이오넬은 늦어도 1347년 1월 26일이 되기 전에 아내로부터 얼스터 백작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아일랜드 현지 귀족들은 순순히 라이오넬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았고, 버그 가문의 다른 대표자들도 얼스터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다. 이 때문에 라이오넬을 대신하여 통치하는 총독들은 매우 제한된 영토에 대해서만 효과적인 통제권을 행사할 수있었다. 에드워드 3세는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엘리자베스의 어머니 마틸다와 자신의 절친한 친구인 제1대 서퍽 백작 로버트 우퍼드의 형제인 랄프 우퍼드와 재혼시켰다. 1344년 랄프는 아일랜드의 대리 집행관로 선임되었다. 그는 얼스터 카운티를 복원하는 임무를 맡아 아일랜드의 오닐 왕조를 무너뜨리는 등, 강경책을 동원해 아일랜드에 대한 잉글랜드 왕국의 지배력을 강화했다. 그러나 1346년에 사망했고 에드워드 3세의 계획은 이뤄지지 않았다.
1345년 7월, 에드워드 3세는 플란데런 백국으로 진군해 프랑스군과 대결했다. 라이오넬은 그해 7월 3일부터 26일까지 잉글랜드의 수호자로 선임되었다. 그는 1346년 7월 11일부터 1347년 10월 12일까지 같은 직책을 맡았고, 에드워드 3세는 이 기간 동안 크레시 전투와 1차 칼레 공방전을 수행했다. 당시 라이오넬은 나라를 이끌기에는 나이가 너무 어렸기에, 의회가 그를 대신해 왕권을 행사했다. 다만 두 번째 섭정 기간에는 왕의 비용으로 개인 인장이 제공되었으며, 그는 이를 통해 개인적으로 할당된 제한된 범위의 행정 업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이 인장으로 인증된 문서는 그가 이 기간동안 런던 타워, 윈저, 레딩 및 브리스톨에 자리잡았음을 암시한다.
1355년 아버지와 함께 칼레로 가서 기사 작위를 수여받았고, 칼레 주변 프랑스 영토에 대한 습격 작전에 참여했다. 1355~1356년 겨울에는 에드워드 발리올을 스코틀랜드 국왕에 올리기 위한 잉글랜드군의 스코틀랜드 침공에 참여했다. 원정은 실패로 돌아갔고, 발리올은 잉글랜드 국왕을 위해 스코틀랜드 왕위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조약에 서명했다. 이 조약에서, 그의 이름이 증인 명단의 선두에 올랐다. 1359년 5월, 라이오넬은 런던 스미스필드에서 열린 마상창시합에 참여했다. 1359년 10월부터 1360년 5월까지 랭스 공방전과 샤르트르 공방전, 브레티니 평화 협약을 포함한 아버지의 군사 작전에 참여했다. 1360년 12월 2일 가터 기사단 중 한 명이었던 제1대 워릭 남작 존 드 뷰챔프가 사망했다. 1361년 4월, 에드워드 3세는 라이오넬을 존 드 뷰챔프의 뒤를 이어 가터 기사에 선임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1361년 3월 15일, 에드워드 3세는 라이오넬을 아일랜드로 보내 아일랜드를 통치하게 하겠다고 선포했다. 그해 7월 1일에는 라이오넬을 아일랜드 보안관으로 선임했다. 그는 아일랜드에 도착한 후 아일랜드 현지 게일군이 집결하여 더블린 주변의 잉글랜드인 정착촌을 위협하던 위클로를 공격해 게일군을 물리쳤다. 이후 라이오넬은 더블린 성을 개조하고 자신의 본부로 삼았으며, 일부 행정부를 카로우로 옮겨 아일랜드에서 군사 활동을 원활하게 수행하도록 했다. 에드워드 3세는 라이오넬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1362년에 아일랜드 귀족들에게 아들에게 복종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1362년 11월 13일 의회에서 라이오넬에게 클라렌스 공작이라는 새로운 칭호를 하사했다. 이 칭호의 이름은 라이오넬이 아내의 지참금으로서 소유했던 클레어 성에서 유래했다.
1362년 초, 라이오넬은 드로에다에 이르렀다. 그해 말에는 미스에서 군사 작전을 이끌었다. 1364년 4월 22일, 제2대 오먼드 백작 제임스 버틀러가 아일랜드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그는 아버지 및 의회와 협의하기 위해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9월 24일 다시 왕실 보안관에 선임된 그는 12월에 아일랜드로 돌아와서 코크에서 트림을 거쳐 드로에다까지 군사 원정을 수행했다. 그러나 현지 게일인들은 끈질기게 저항했고, 라이오넬은 울스터 동부 해안의 작은 지역만을 통제할 수 있었다. 1365년, 라이오넬은 다시 잉글랜드로 떠났고, 토머스 드 라데일이 아일랜드 총독을 맡았다. 라이오넬은 1366년 2월 킬케니에서 의회를 소집하고, 킬케니 법령을 체택했다. 이 법령은 아일랜드 태생 영국인들의 문화적, 정치적 '퇴화' 과정을 방지하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 왕의 가신이 된 이들은 아일랜드어 사용, 아일랜드 여성과의 결혼, 아일랜드 법률 준수가 금지되었다. 또한 '출생 영어'와 '혈통 영어'의 구분을 최대한 없앴다. 이 법령은 17세기 초까지 아일랜드에 그대로 적용되었다.
1366년 11월 7일 에드워드 3세는 아들을 3대 데스몬드 백작 제럴드 피츠제럴드로 교체했고 라이오넬은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이후 에드워드 3세는 1363년 아내 엘리자베스가 사망한 뒤 홀아비가 된 라이오넬의 새 아내를 물색했다. 그 결과, 밀라노와 파비아의 통치자 갈레아초 2세 비스콘티의 딸인 비올란테 비스콘티와 라이오넬을 결혼시키기로 했다. 결혼 협약은 1367년 5월 웨스트민스터에서 합의되었고, 라이오넬은 1368년 2월에 이탈리아로 떠났다. 그는 457명의 수행원과 최소 1,280마리의 말을 데리고 갔다. 결혼식은 5월 28일 또는 6월 5일 밀라노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이후 5개월간 축하 행사, 잔치, 토너먼트가 열렸다. 비올란테의 지참금은 200만 금 플로린과 피에몬테의 여러 도시와 성이었다.
그러나 라이오넬은 1368년 10월 초에 알려지지 않은 질병에 걸렸고, 10월 17일 피에몬테의 알바 시에서 사망했다. 그가 갈레아초 2세 비스콘티에게 독살되었다는 의혹이 당대에 제기되었지만, 후대 학자들은 갈레아초 2세가 잉글랜드의 지원을 받아 북부 이탈리아를 평정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위를 죽일 이유가 없다며 부정한다. 라이오넬은 처음에 파비아에 묻혔지만, 1369년 6월 8일에 공개된 그의 유언장에서 클레어 수도원에 묻히고 싶다는 그의 소망이 확인되면서 잉글랜드로 이송된 뒤 클레어 수도원에 있던 첫 아내 엘리자베스의 석관 옆에 안장되었다.
3. 가족
<colbgcolor=#EAE0B3><colcolor=#000> 엘리자베스 드 버그(Elizabeth de Burgh) |
<colbgcolor=#EAE0B3> 비올란테 비스콘티(Violante Visconti) |
3.1. 자녀
<colbgcolor=#EAE0B3><colcolor=#000> 외동딸 필리파 |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제4대 얼스터 여백작 엘리자베스 드 버그 (Elizabeth de Burgh, 4th Countess of Ulster) | ||||
1녀 | 제5대 얼스터 여백작 필리파[5] (Philippa, 5th Countess of Ulster) | 1355년 8월 16일 | 1382년 1월 5일 | 제3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6] 슬하 2남 2녀 |
3.2. 후손
자식은 제4대 얼스터 여백작 엘리자베스 드 버그와의 사이에서 낳은 외동딸 필리파 뿐이었고, 필리파는 제3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Edmund Mortimer, 3rd Earl of March)와 결혼해 자손을 두었다. 그러나 필리파의 자손들은 라이오넬의 남동생인 곤트의 존의 후손들에게 밀려나고 말았다. 이후 필리파의 친손녀 앤 모티머의 아들인 요크의 리처드가[7] 모계 혈통을 통해서 자신의 왕위를 주장하는 명분이 된다.4. 여담
- 키가 7피트에 운동신경이 좋았다는 기록이 있다.
[1] 잉글랜드 왕국의 왕자였지만 출생지가 브라반트 공국인 이유는 그 당시에 백년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에드워드 3세가 직접 전쟁에 나서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2] 실제로는 삼남이지만 차남이 요절하는 바람에 실질적인 차남이다.[3] 1332/1334 ~ 1379/1382, 쿠시 영주 앙게랑 7세의 부인[4] 1334/1335 ~ 1348, 카스티야 왕자 페드로와 약혼했지만 중세 흑사병에 걸려 결혼 전에 사망[5] 위키피디아에서는 5대 얼스터 여백작 필리파라고 명시되지만 아버지의 작위에서 따온 클래런스의 필리파(Philippa of Clarence) 혹은 소속 왕조의 성씨에서 따온 필리파 플랜태저넷(Philippa Plantagenet)이라고도 불린다.[6] 2대 마치 백작 로저 모티머의 아들로 필리파의 증조할머니 프랑스의 이자벨의 정부였던 초대 마치 백작 로저 모티머의 증손자다.[7] 라이오넬의 남동생 랭글리의 에드먼드의 친손자이자 에드워드 4세, 클래런스 공작 조지, 리처드 3세의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