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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6 01:33:00

로버트 우퍼드

<colbgcolor=#EAE0B3><colcolor=#000> 제1대 서포크 백작
로버트 우퍼드
Robert Ufford, 1st Earl of Suffolk
성명 로버트 우퍼드
Robert Ufford
생몰년도 1298년 8월 9일 ~ 1369년 11월 4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우퍼드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서퍽
아버지 로버트 우퍼드
어머니 세실리 발로뉴
형제자매 랄프 우퍼드, 에바 우퍼드
아내 마가렛 드 노리치
아들 로버트, 월터, 윌리엄, 토머스, 조앤, 캐서린, 세실리, 마가렛, 모드
직위 우퍼드 남작, 서퍽 백작, 북부 제독, 가터 기사단 단원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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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장군. 백년전쟁 시기 프랑스 왕국에 맞섰다.

2. 생애

우퍼드 가문은 본래 서퍽 출신의 젠트리였다. 조부 로버트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가 수행한 여러 전쟁에서 활약했으며, 수 년간 아일랜드의 집행관으로 활동했다. 아버지 로버트는 기사 로버트 발로뉴의 딸인 세실리와 결혼해 장남 로버트와 차남 랄프[1], 에바[2]를 두었다.

1308년 아버지 로버트가 초대 우퍼드 남작이 되었고, 1316년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우퍼드 남작으로서의 직위와 영지를 물려받았다. 이후 서퍽에서 다양한 임무를 수행했다. 1322년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에드워드 2세를 지지해 버러브리지 전투에서 반란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하는 데 일조했지만, 1326년에는 에드워드 2세의 타도를 지지했다. 1329년 5월부터 6월까지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에게 가신으로서 맹세하려는 에드워드 3세와 함께 아미앵으로 갔다.

그는 에드워드 3세의 어머니 프랑스의 이자벨과 이자벨의 애인이자 권신인 로저 모티머로부터 왕을 충실히 봉사한 공으로 서퍽의 오퍼드 시와 성채, 켄트와 노퍽 영지를 수여받았다. 그럼에도 1330년 에드워드 3세가 이자벨과 모티머를 축출하는 음모를 꾸미는 데 적극적으로 가담햇고, 모티머 체포에 참여했으며, 모티머의 지지자인 휴 드 터플링턴과 리처드 드 몬머스 살해에 관여했다. 1331년 2월 12일 왕실로부터 이 살인 사건에 대한 사면을 받았다.

그는 에드워드 3세로부터 노퍽의 영지, 크리플게이트의 연립 주택 및 로저 모티머의 지지자였던 존 멜트레버스가 소유했던 트렌트 강 남쪽의 숲 관리인 직위를 받았으며, 시종장에 선임되었다. 1332년부터 우퍼드 남작으로서 의회에 출석했고, 에드워드 3세의 가장 가까운 고문 중 한 명이 되었다. 1337년에는 서퍽 백작과 북부 제독에 선임되었으며, 백작을 지원하기 위한 추가 재산과 연금도 받았다.

그는 여러 중요한 외교 임무를 맡았다. 1337~1338년 스코틀랜드인들과 평화 협상을 수행했고, 1339년에는 프랑스의 필리프 6세, 신성 로마 제국루트비히 4세, 스코틀랜드 국왕 데이비드 2세와 협상했으며, 1343년에는 플란데런 백작 루이 1세 드 플란데런교황청과 협상했다. 그러면서도 에드워드 3세의 프랑스 원정에 참여해 여러 작전을 수행했다. 그러던 1340년 릴에서 초대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몬타구와 함께 프랑스군에 체포된 뒤 파리에 투옥되었고, 그해 9월 큰 돈을 몸값으로 지불하고 석방되었다.

1342년 여름 에드워드 3세의 브르타뉴 원정에 참여해 렌을 공략하는 데 일조했으며, 1344년 2월 윈저에서 에드워드 3세가 소집한 "원탁의 기사" 중 한 명이 되었으며, 1348년 가터 기사단의 기사가 되었다. 1346년 에드워드 3세의 노르망디 원정에 동행한 그는 그해 8월 26일 크레시 전투에 참전해 승리에 일조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에드워드 3세가 크레시를 전장으로 선택하도록 조언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고 한다. 1350년 윈첼시 해전에 참전해 카스티야 함대를 격파하는 데 일조했고, 1355년 흑태자의 슈보시에 참여했고, 1356년 로마미두르에 대한 습격 작전을 이끌었다.

1356년 여름, 그는 흑태자 에드워드와 함께 보르도에서 출발해 루아르 강으로 진군했고, 푸아티에 전투에서 서번째 전투 부대, 즉 후위를 지휘해 승리에 일조했다. 나중에 푸아티에에서 포로가 된 오세르 백작의 몸값인 3,000 플로린을 받아냈다. 1359년 상파뉴 습격 작전을 수행했으며, 1362년 에드워드 3세의 네번째 아들인 랭글리의 에드먼드와 플란데런 백작 루이 2세의 딸과의 결혼 협상을 주도했다. 1369년 11월 4일 페스트에 걸려 사망했고, 캠시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3. 가족



[1] ? ~ 1346, 1338년 백년전쟁이 발발한 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프랑스 원정에 기사 자격으로 참여했고, 1344년부터 아일랜드 집행관을 맡아 아일랜드의 오닐 왕조를 무너뜨리는 등 강경책을 동원해 아일랜드에 대한 잉글랜드 왕국의 지배력을 강화했다.[2] ? ~ ?, 기사 존 드 브리우스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