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EAE0B3><colcolor=#000> 제2대 서포크 백작 윌리엄 우퍼드 William Ufford, 2nd Earl of Suffolk | |
성명 | 윌리엄 우퍼드 William Ufford |
출생 | 1338년 5월 30일 |
잉글랜드 왕국 우퍼드 | |
사망 | 1382년 2월 15일 (향년 43세) |
잉글랜드 왕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궁전 | |
아버지 | 로버트 우퍼드 |
어머니 | 마가렛 노리치 |
형제자매 | 로버트, 월터, 토머스, 조앤, 캐서린, 세실리, 마가렛, 모드 |
아내 | 조앤 몬타구, 이사벨라 뷰챔프 |
자녀 | 토머스, 로버트, 윌리엄, 에드먼드, 성명 미상의 딸 |
직위 | 우퍼드 남작, 서퍽 백작, 가터 기사단 단원, 북부 제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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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장군. 백년전쟁 시기에 프랑스군을 상대로 맞서 싸웠다.2. 생애
1338년 5월 30일 잉글랜드 왕국 우퍼드에서 제2대 우퍼드 남작이자 초대 서퍽 백작이었던 로버트 우퍼드와 기사 월터 드 노리치의 딸인 마가렛의 세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두 형 로버트와 월터가 존재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상속을 크게 기대할 수 없었지만, 1361년 초대 몬타구 남작 에드워드 몬타구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의 장남 브라더턴의 토머스의 딸인 노퍽의 엘리스 사이의 딸인 조앤 몬타구와 결혼하면서 아내로부터 많은 영지를 전달받았다.아버지 로버트 우퍼트는 1355~1356년, 1359~ 1360년에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가 단행한 프랑스 원정에 참여했는데, 기록에는 없지만 그 역시 동행했을 가능성이 있다. 1367년 고대 프로이센을 상대로 벌인 튜튼 기사단의 십자군에 가담했다. 그러던 중 두 형 로버트와 월터가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하면서, 그는 우퍼드 가문의 후계자가 되었다. 1369년 11월 4일 아버지 로버트 우퍼드가 사망한 후, 그는 우퍼드 남작 겸 서퍽 백작이 되었다.
1370년 나바라 왕국의 국왕 카를로스 2세를 셰르부르까지 호위하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1372년 에드워드 3세의 프랑스 원정에 참여했지만 역풍으로 인해 함대가 항해하지 못하면서 실패했다. 1373년 곤트의 존의 슈보시에 참여했으며, 1375년 가터 기사단의 기사가 되었고 북부 제독의 직위를 받았다.
1376년 4월에 열린 의회에서 에드먼드 모티머와 윌리엄 코트니가 이끄는 그룹에 참여해 왕실 지출에 대한 통제와 군주의 부패한 고문들의 사임을 촉구했다. 그들의 요구는 부분적으로 충족되었고, 그는 국왕을 보좌하는 새로운 위원회의 일원이 되었다. 1377년 6월 16일 새로운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의 대관식에서 왕홀을 직접 가져와서 왕에게 바치는 역할을 수행했으며, 섭정 의회의 일원이 되었다. 1380년 섭정 의회가 해산된 후에도 잉글랜드세 가장 영향력 있는 귀족 중 한 사람으로 남았다. 특히 리처드 2세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의 딸인 보헤미아의 안나와의 결혼 협상을 주도했고, 곤트의 존과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 사이의 갈등에서 중재자 역할을 수행했으며, 서퍽 및 노퍽 사법 위원회에 자주 참여했다. 1378년 브르타뉴 전선으로 파견되어 브르타뉴 전역을 공략하려는 프랑스군에 맞섰다.
1381년 와트 타일러의 난에 가담한 노퍽 반란군은 이스트 앵글리아를 독립 왕국으로 만들고 윌리엄을 지도자로 삼으려 했다. 윌리엄은 그들의 계획을 눈치채고 극비리에 탈출한 뒤 런던으로 가서 500명의 창병 분견대를 이끌고 노퍽 반군을 공격해 봉기를 진압했다. 이후 노퍽과 서퍽의 여러 도시에서 반란에 가담했던 자들을 심판하는 윙원회를 이끌었다. 서퍽에서만 최소 16명이 처형되었고, 노퍽에서는 그보다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으며, 104명이 유죄를 선고받았다고 전해진다. 1382년 2월 15일 웨스트민스터 궁전에서 열린 의회에 참석하고자 궁전 계단을 오르던 중 발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실족사했다.
그는 조앤 몬타구와의 사이에서 4명의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지만, 이들 모두 그보다 일찍 죽었다. 1375년 조앤이 사망한 뒤, 그는 1376년 6월에 제11대 워릭 백작 토머스 뷰챔프의 딸인 이사벨라 뷰챔프와 재혼했지만 자식을 낳지 못했다. 따라서 1382년 2월에 사망했을 때, 살아남은 우퍼드 가족 구성원은 없었다. 이에 따라 그의 세 외조카인 제4대 스케일즈 남작 로저 스케일스, 제4대 윌로비 드 어스비 남작 로버트 드 윌로비, 그로비의 제4대 페러스 남작 헨리 드 페러스가 우퍼드 가문의 영지를 나눠 가졌다. 서퍽 백작위는 공석 상태로 남겨졌다가 1385년 리처드 2세의 총신이었던 마이클 드 라 폴에게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