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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6 01:25:04

토머스 뷰챔프(제11대 워릭 백작)

파일:토머스 드 뷰챔프.jpg
성명 토머스 드 뷰챔프
Thomas de Beauchamp
출생 1313년 2월 14일
잉글랜드 왕국 워릭셔 워릭 성
사망 1369년 11월 13일 (향년 56세)
잉글랜드 왕국 칼레
아버지 기 드 뷰챔프
어머니 엘리스 드 토에니
형제 존 드 뷰챔프, 모드 드 뷰챔프, 엘리자베스 드 뷰챔프
배우자 캐서린 모티머
자녀 기, 토머스, 윌리엄, 모드, 필리파, 앨리스, 조안, 이사벨라, 마가렛, 엘리자베스, 앤, 캐서린
직위 워릭 백작, 가터 기사단 단원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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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백년전쟁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활약했다.

2. 생애

1313년 2월 14일 잉글랜드 왕국 워릭셔의 워릭 성에서 제10대 워릭 백작 기 드 뷰챔프와 플랜스테드의 토에니 영주인 랄프 7세 토에니의 딸인 엘리스의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로 , 모드[1], 엘리자베스[2]가 있었다.

2살 때인 1315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2세의 후견을 받았고, 1326년 에드워드 2세가 타도된 후에는 제1대 마치 백작 로저 모티머의 후견을 받았다. 1328년 로저 모티머의 딸 캐서린과 결혼했다. 1330년대에 에드워드 3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 동행했으며, 1333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우스터셔의 세습 고위 보안관에 선임되었다. 1344년에는 워릭셔와 레스터셔의 종신 세습 보안관에 선임되었다.

1343년 3월에 잉글랜드 원수에 발탁되었고, 1346년 에드워드 3세의 프랑스 원정에 참여했다. 그는 아군이 라 호그에 상륙할 때 이를 저지하려는 프랑스군 100명을 향해 종자 및 6명의 궁수와 함께 공격해 적병 60명을 사살하고 나머지는 도망치게 했다. 그 해 8월 26일 크레시 전투에서 명목상 흑태자 에드워드의 지휘를 받았던 잉글랜드군 우익 부대의 실질적인 사령관을 맡아 아군의 대승에 일조했다. 이후 1346년 9월부터 1347년 8월까지 1차 칼레 공방전에 참전해 칼레 공략에 일조했다.

1348년 남동생 존과 함께 가터 기사단의 일원이 되었으며, 1355년 10월부터 12일까지 흑태자 에드워드가 단행한 슈보시(Chevauchée: 약탈 행진)에 참여해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1356년 1월 소규모 분견대를 이끌고 가론강을 따라 아쟁까지 진군하면서 여러 마을을 파괴하고 약탈과 살육을 자행했다. 1356년 9월 19일 푸아티에 전투에 참여해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몬타구와 함께 선봉대를 공동으로 지휘해 아군의 승리에 일조했다.

1360년 브레티니 평화 협약이 성립되면서 프랑스와 잉글랜드간의 전쟁이 소강 상태가 되자 1362년 튜튼 기사단고대 프로이센을 향한 십자군 원정에 가담했고, 1365년에 잉글랜드로 귀환했다. 1369년 프랑스군이 칼레를 공략하려고 인근에 진을 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칼레로 향했다. 14세기에 집필된 아노니말레 연대기(Anonimalle Chronicle)에 따르면, 그가 칼레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칼레 인근 프랑스군을 이끌던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는 '악마 워릭'과 싸우기를 꺼려 철수했다고 한다.

1369년 11월 13일에 56세의 나이로 칼레에서 사망했다. 공식적으로는 중세 흑사병에 걸려 사망했다고 기술되었지만, 세간에서는 그와 갈등을 여러 번 벌였던 험프리 드 보훈에게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의 유해는 잉글랜드로 옮겨져 워릭에 있는 세인트 메리 교회에 안장되었다.

3. 가족



[1] ? ~ 1366, 세이 영주 제프리 드 세이의 부인[2] 1316 ~ 1359, 애슬리 남작 토머스 애슬리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