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존 드 뷰챔프 John de Beauchamp | |
출생 | 1316년 | |
잉글랜드 왕국 워릭셔 워릭 성 | ||
사망 | 1360년 12월 2일 (향년 44세) | |
잉글랜드 왕국 런던 | ||
아버지 | 기 드 뷰챔프 | |
어머니 | 엘리스 드 토에니 | |
형제 | 토머스 뷰챔프, 모드 드 뷰챔프, 엘리자베스 드 뷰챔프 | |
직위 | 워릭 백작, 가터 기사단 단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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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백년전쟁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활약했다.2. 생애
1316년경 잉글랜드 왕국 워릭셔의 워릭 성에서 제10대 워릭 백작 기 드 뷰챔프와 플랜스테드의 토에니 영주인 랄프 7세 토에니의 딸인 엘리스의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로 토머스 뷰챔프, 모드[1], 엘리자베스[2]가 있었다. 1338년 플란데런 백국으로 원정을 떠난 에드워드 3세를 기사 신분으로 동행했고, 1340년 슬로이스 해전에 참전해 승리에 기여했다. 1346년 크레시 전투에서 국왕의 깃발을 들고 장병들을 독려해 대승에 일조했으며, 1346년 10월부터 1347년 8월까지 이어진 1차 칼레 공방전에 참전한 뒤 칼레 총독 직책을 역임했다.1348년 4월 23일 가터 기사단의 단원에 선임되었으며, 1349년 칼레 앞바다를 경비하는 영국 함대 사령관으로 발탁되었다. 1350년 11월 25일 영국 의회의 소환을 받고 런던으로 가서 직위를 세습할 수 있는 '뷰챔프 남작'으로 승격되었다. 그는 동시대에 존재했던 다른 뷰챔프 남작들과 구별하기 위해 보통 "워릭 남작"으로 일컬어졌다.
1351년 5월, 300명의 맨앳암즈와 300명의 장궁병을 이끌고 생 오메르 주변 지역을 돌며 슈보시(Chevauchée: 약탈 행진)를 벌였다. 보주와 몽펜시에의 영주이자 프랑스 원수인 에두아르 1세 드 보주는 그런 적의 동태를 살피다가 그들이 너무 많은 약탈물을 챙겨가느라 행군 속도가 매우 느려졌고 경계도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이들을 공격해 섬멸하기로 하고 수천 병력을 동원해 출진했다.
1351년 6월 6일, 프랑스 북부 파드칼레의 아르드르(Ardres)에서 양군이 조우했다. 잉글랜드군은 즉시 고지대에 올라가서 원형 방진을 결성했고, 에두아르 1세는 모든 기사들이 말에서 내리도록 한 뒤 고지를 향해 공격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전투 도중 에두아르 1세가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었지만, 프랑스 병사들은 꿋꿋이 공세를 이어갔다. 늦은 오후에 생 오메르 수비대가 지원하러 오자, 잉글랜드군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존 드 뷰챔프와 측근 몇 명 만이 가까스로 탈출했고, 나머지는 프랑스군에 사로잡혔다. 프랑스군의 승리를 이끈 에두아르 1세는 전투가 끝난 직후 사망했고, 벨빌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1355년 서해 제독이 되었고, 1360년에는 북, 남, 서해의 제독이 되었다. 1360년 12월 2일에 미혼인 상태에서 자녀 없이 사망했고, 그의 직위는 만료되었다. 사후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에 안장되었지만, 1666년 런던 대화재 때 파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