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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4-04 18:39:22

알렉산더 맥두걸

이름 알렉산더 맥두걸
Alexander Macdougall
출생 미상
스코틀랜드 왕국 아가일
사망 1310년
아일랜드 영지
아버지 이웬 맥두걸
어머니 미상
부인 바데녹 영주 존 코민 3세의 누이
자녀 존 맥두걸, 줄리아나 맥두걸
직위 아가일의 영주

1. 개요2. 생애3. 가족


1. 개요

아가일의 영주. 스코틀랜드 왕국 서부 해안과 헤브리디스 제도 등 여러 섬의 지배자로,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서 잉글랜드 왕국을 지지했다가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1세에게 축출되었다.

2. 생애

아버지 이웬 맥두걸은 헤브리디스 제도와 멀 섬 등 여러 섬과 아가일, 킨타이어, 론 등 스코틀랜드 서부 해안을 다스린 대영주로, 스스로 '군도의 왕'을 칭했다. 1263년 스코틀랜드 국왕 알락산더르 3세와 노르웨이 국왕 호콘 4세가 헤브리디스 제도의 패권을 놓고 전쟁을 벌였을 때, 그는 알락산더르 3세 편을 들었다가 호콘 4세에 의해 군도의 왕에서 폐위되었다. 1266년 퍼스 조약이 체결되면서, 맥두걸 가문의 영지는 서부 스코틀랜드 섬의 다른 영주들과 마찬가지로 스코틀랜드에 양도되었고, 이웬 맥두걸은 스코틀랜드의 대귀족이 되었다. 1268년 이웬 맥두걸이 사망한 뒤, 알렉산더가 그의 재산을 물려받았다. 그의 상속 재산에는 스코틀랜드 본토의 아가일, 킨타이어, 론과 멀을 비롯한 여러 섬이 포함되었다.

1275년, 맨 섬의 마지막 왕 매그너스 올라프슨의 아들 고트프리드 맥그누슨이 맨 섬에서 스코틀랜드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이에 알락산더르 3세는 스코틀랜드 남서부의 갤러웨이와 헤브리디스 제도에 군대를 소집한 뒤 맨 섬 공략에 착수했다. 알렉산더는 스카버러 성 총독 존 드 베시, 바데녹 영주 존 2세 코민, 가모란 영주 앨런, 아솔 백작 토머스의 사생아 앨런 피츠카운트와 함께 알락산더르 3세의 지휘하에 맨 섬으로 원정을 떠났다. 1275년 10월 8일 랭네스 반도 북쪽 끝에서 격전이 벌어진 끝에, 고트프리트가 패배하고 목숨을 잃었고, 맨 섬은 스코틀랜드 왕국에 귀속되었다. 알렉산더는 1280년대 초부터 헤브리디스 제도에서 스코틀랜드 왕의 신뢰받는 대표자로 활동했다. 그는 킨타이어, 아가일, 루이스 일대에서 왕실에 공물을 바쳤다. 그의 상선 중 하나가 1275년에 브리스톨에서 언급되었으며, 잉글랜드 정부는 1292년에 그의 상인들이 아일랜드에서 무역하는 걸 허용하기도 했다.

그러던 1284년, 그는 알락산더르 3세가 스콘에서 소집한 의회에 참석한 뒤, 왕이 아들없이 죽을 경우 마르그레트 에이릭스도티르를 스코틀랜드 여왕으로 받들겠다고 맹세했다. 하지만 1286년 알락산더르 3세가 사망한 뒤, 그는 여러 귀족들과 함께 존 발리올의 왕위 계승을 지지했으며, 존 발리올의 가장 중요한 지지자 중 한 명인 바데녹 영주 존 코민 3세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누이와 결혼했다. 맥두걸 가문의 경쟁자였던 맥도날드 가문은 이에 맞서 존 발리올의 경쟁자인 제5대 애넌데일 영주 로버트 브루스를 지지했다.

맥두걸 가문과 맥도날드 가문은 토지 소유권을 둘러싸고 오래 전부터 분쟁을 벌였다. 알렉산더와 아이슬레이의 알렉산더 맥도날드는 1292년 7월 베릭에서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에게 토지 분쟁을 해결해달라고 의뢰했다. 양자가 서로에게 비난을 퍼부을 뿐 사태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에드워드 1세는 그들에게 평화를 유지하라고 명령했다. 1292년 9월, 그들은 이 분쟁을 스코틀랜드 의회에 제소했지만 별다른 응답을 받지 못했다. 에드워드 1세는 분쟁을 명확히 하기 위해 스코틀랜드의 두 호국경인 바데녹 영주 존 2세 코민과 스코틀랜드 대집사 제임스 스튜어트에게 회부했지만, 두 사람 역시 분쟁에 대한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1292년 11월 존 발리올이 에드워드 1세에 의해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존 발리올은 알렉산더의 도움을받아 스코틀랜드 서부에서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1293년 2월 의회에서 스코틀랜드 서부에 3개의 새로운 보안관구를 구성했다. 알렉산더는 멀, 주라, 아이슬레이 삼을 포함한 아가일의 보안관이 되었고, 그의 관할권에는 맥도날드 가문의 영지도 포함되었다. 그는 보안관으로서 스코틀랜드 서부 고원지대의 봉건화를 실시해야 했다. 이렇게 보안관에 선임되면서, 알렉산더는 맥도날드 가문보다 유리한 입장에 놓였다. 이에 맥도날드 가문이 거세게 반발하면서, 양자간의 대립이 가속화했다. 급기야 맥도날드 가문에 속한 아이슬레이의 알렉산더와 앵거스 모르가 존 발리올에게 충성을 거부하면서, 맥두걸 가문과 맥도날드 가문의 분쟁은 스코틀랜드 국왕과 맥도날드 가문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존 발리올은 알렉산더에게 아이슬레이 섬에서 맥도날드 가문의 영향력을 억제하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알렉산더가 이를 관철하기에는 맥도날드 가문의 위세가 만만치 않기에 명령이 집행되지 않았다. 또한 맥두걸 가문은 캠벨 가문의 지도자인 케일린 모어 켐빌과 또 다른 갈등을 겪었다. 캠벨 가문은 서부 하일랜드 지역의 주요 가문이었다. 1296년에는 알렉산더의 아들 존이 이끄는 맥두걸 부대와 캠벨 부대가 로크 아비치에서 전투를 벌여 케일린 모 캠벨이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1296년 에드워드 1세가 자기에게 불충실한 봉신 존 발리올을 응징하곘다는 명문을 내걸고 스코틀랜드를 침고앴다. 에드워드 1세는 신속한 원정으로 스코틀랜드 왕국 대부분을 접수하고 존 발리올을 페위했다. 알렉산더는 처음에는 존 발리올을 지원했지만 중과부적으로 체포되었고, 아이슬레이의 알렉산더 맥도날드는 이 때를 틈타 킨타이어 반도를 접수했다. 하지만 존 맥두걸이 아버지를 대신해 맥도날드 가문과의 전쟁을 이어갔다. 에드워드 1세는 아가일 일대를 복종시키기 위해 1297년 4월 이전에 알렉산더를 석방했다. 이후 알렉산더는 맥도날드 가문과의 전쟁을 지속하면서, 스코틀랜드 북부의 가르모란과 서부의 일부 섬들을 지배한 해적 라클런 맥루아리와 동맹을 맺었다. 라클런 맥루아리는 알렉산더의 의뢰를 받아들여 맥도날드 가문의 영지를 약탈했다.

1299년 맥도날드 가문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우세를 점한 뒤, 알렉산더는 스코틀랜드에서 잉글랜드의 지배에 대항하는 싸움을 지원했다. 1301년 이후, 존 맥스윈과 휴 비셋이 이끄는 함대가 에드워드 1세의 의뢰에 따라 맥도날드 가문의 새로운 수장 앵거스 오그를 지원해 맥두걸 가문과 맥루아이드리 가문을 공격했다. 여기에 캐릭 백작 로버트 브루스 등 여러 스코틀랜드 귀족이 1304년 이후 에드워드 1세에게 복종하자, 알렉산더는 맥루아이드리 가문과 함께 잉글랜드 왕에게 복종했다.

에드워드 1세는 맥두거 가문에게 영지를 물려주고, 그들의 영지를 스코틀랜드의 잉글랜드 행정부에 통합하려고 노력했다. 1305년,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의 잉글랜드 총독 장 드 브르타뉴에게 조언하는 역할을 맡은 위원회 20인 중 한 사람으로 알렉산더를 지명했다. 그는 에드워드 1세의 후원에 힘입어 스코틀랜드 서부 전역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던 1306년 초, 캐릭 백작 로버트 브루스가 바데녹 영주 존 3세 코민을 살해했다. 그 후 로버트 브루스는 자신을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1세라고 선언했다. 이에 알렉산더는 자신의 처남인 존 3세 코민의 원수를 갚겠다며 로버트 1세를 적대했다.

1306년 6월 19일, 로버트 1세가 잉글랜드 장성 에이머 드 발랑스에게 메스번 전투에서 참패했다. 그 후 로버트 1세는 500 장병을 수습한 뒤 서쪽으로 퇴각해 아가일 산맥을 통과하려 했다. 이에 알렉산더의 아들 존 맥두걸이 가로막았고, 그 해 7월 또는 8월 달리그 전투에서 로버트 1세를 격파했다. 전승에 따르면, 로버트 1세는 어느 순간 언덕과 호숫가 사이에서 홀로 남아서 적에게 에워싸였다. 공격자들은 그를 잡아 끌어내리려 했지만, 그의 망토와 못이 박힌 브로치만 벗겨졌고, 로버트 1세는 가까스로 빠져나갔다고 한다. 이 브로치는 일명 '론의 브로치'로 일컬어졌으며, 맥두걸 가문의 수중에 넘어가서 두놀라 성에 보관되었다가 영국 내전 때 케레라 섬의 가일런 성으로 옮겨졌다가 1647년 뉴어크 영주 데이비드 레슬리가 가일런 성을 함락한 뒤 캠벨 가문의 수중에 들어갔다. 1824년 로크넬의 던컨 캠벨 장군이 맥두걸 가문에 브로치를 돌려줬다.

달리그 전투에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로버트 1세는 더 이상 군대를 유지할 수 없게 되자 병사들을 해산한 뒤, 아내 엘리자베스 드 버러, 동생 닐 브루스, 아솔 백작 존 드 스트라스보기, 알렉산더 린제이, 로버트 보이드를 데리고 산을 넘어 애버딘 북서쪽의 킬드럼미 성으로 향했고, 나중엔 아솔 백작과 함께 브레달베네 산으로 도피했다. 그 후 아솔 백작은 브루스 가문의 여성들과 함께 도주하다가 테인에서 생포되었고, 런던으로 끌려가 잔인하게 처형되었다. 로버트 1세의 동생 닐 브루스도 체포되어 베릭에서 잔인하게 처형되었다. 로버트 1세의 처남 크리스토퍼 세튼은 로크둔 성에서 체포되어 덤프리스에서 처형되었고, 크리스토퍼의 동생 존 세튼과 버나드 모왓은 8월 4일 뉴캐슬에서 교수형에 처했다. 로버트 1세의 왕비 엘리자베스는 홀더니스에서 가택연금 되었고, 자매인 크리스찬 브루스는 부컨 백작부인 이사벨라 맥더프와 함께 록스버러와 버윅의 성벽에 매달린 철창에 갇혔다. 로버트 1세의 딸 마조리는 당시 12살이 채 되지 않았는데, 처음에는 런던 탑에 갇혔다가 나중에 요크셔의 수녀원으로 보내졌다.

그 후 로버트 1세는 레녹스를 거쳐 스코틀랜드 남서쪽의 킨타이어 반도로 도주했다. 이후 두나버티 성에 잠시 머물렀다가, 잉글랜드군이 거기까지 몰려오자 배를 타고 탈출했다. 그가 그다음 6개월 동안 어디에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스코틀랜드 서부 섬들이나 아일랜드로 망명했을 것이다. 1307년 4월, 스코틀랜드 서부 해안에 돌아온 로버트 1세는 1308년까지 종횡무진하며 스코틀랜드 대부분 지역을 재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1308년 8월, 로버트 1세는 군대를 이끌고 아가일로 진군했다. 당시 노인이었던 알렉산더는 전투에 나서지 않았고, 그의 아들 존 맥두걸이 로버트 1세를 상대하러 출진했다. 그러나 8월 말에 벌어진 브랜더 고개 전투에서 맥두걸 가문의 군대가 참패했다.

그 후 존 맥두걸은 잉글랜드로 망명했고, 그는 던스태프니지 성에서 로버트 1세의 군대에 포위되었다가 로버트 1세에게 충성을 바치겠다고 맹세하고 풀려났다. 로버트 1세는 그를 포섭하기 위해 1308년이나 1309년 초에 군 섬의 수호자로 선임했다. 1309년 3월, 알렉산더는 로버트 1세가 세인트앤드류스에서 소집한 첫번째 스코틀랜드 의회에 참석했다. 그러나 그는 1309년 8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2세에게 몰래 도움을 청했지만, 로버트 1세에게 발각되는 바람에 8월에서 10월 사이에 로버트 1세와 로버트 1세의 최측근 제임스 더글러스의 침략을 받고 아가일의 앤드류 주교와 함께 잉글랜드로 망명했다.

그 후 잉글랜드에 거주하던 그는 1310년 6월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열린 의회에 참석해, 아들 존 맥두걸, 잉그램 드 움프라빌, 알렉산더 애버네시와 함께 에드워드 2세에게 로버트 1세를 토벌해 달라고 간청했다. 에드워드 2세는 맥두걸 가문에게 아일랜드에서 스코틀랜드 서부 섬을 탈환하기 위한 싸움을 지속하도록 위임했다.

알렉산더는 1310년 말 아일랜드에서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롭러트 1세는 로른과 벤더로크에 있던 알렉산더의 영지를 캠벨 가문에 수여했고, 맥두걸 가문의 나머지 영지는 맥도날드 가문에게 넘겼다.

3.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