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잉그램 드 움프라빌 Ingram de Umfraville |
출생 | 미상 |
스코틀랜드 왕국 | |
사망 | 1321년 2월 이후 (향년 미상) |
스코틀랜드 왕국 | |
아버지 | 콜러튼의 로버트 드 움프라빌 |
어머니 | 에바 드 발리올 |
배우자 | 이사벨라 |
자녀 | 에바, 이사벨라 |
직위 | 노럼 남작, 스코틀랜드의 수호자 |
1. 개요
스코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서 스코틀랜드의 수호자로서 에드워드 1세에 맞섰지만, 1304년 에드워드 1세에게 귀순한 뒤에는 로버트 1세에 대적했다.2. 생애
잉글랜드 왕국과 스코틀랜드 왕국에 걸쳐 상당한 영지를 거머쥔 움프라빌 가문의 일원이다. 아버지는 노섬벌랜드 콜러튼 출신의 기사 로버트 드 움프라빌이고, 어머니는 발리올 가문 출신의 에바였다. 에바는 남편이 죽은 후 두 번 더 결혼했다. 1259년 2월 이전에 니콜라스 드 볼테비와 결혼했고, 1274년경 윌리엄 드 퍼시와 결혼했다. 1285년경에 만들어진 '세인트 조지 문장'과 '찰스 문장'에는 잉그램의 문장이 레드캐슬의 이그램 드 발리올 경의 문장과 함께 나와있다. 어민 모피로 장식된 잉그램의 문장은 발리올의 문장과 정확히 같으며, 상속인을 나타내는 방패 모양만 다르다. 1299년경에 작성된 문서에서는 잉그램이 잉그램 드 발리올의 상속인으로 명시되었다. 그가 아버지 가문이 아닌 발리올 가문의 문장을 채택했다는 사실과 발리올의 상속인으로 지명된 것은 그가 계부 및 발리올 가문과 매우 밀접한 관계였음을 암시한다.1284년 스코틀랜드 국왕 알락산더르 3세에게 기사 작위를 받았고, 그 해 2월 5일 스콘에서 소집된 스코틀랜드 의회에 참석해 다른 스코틀랜드 귀족과 함께 알락산더르 3세의 외손녀 마르그레트 에이릭스도티르를 알락산더르 3세의 후계자로 인정했다. 1286년 알락산더르 3세가 사고사한 뒤 1291년 스코틀랜드 왕위를 결정하기 위한 에드워드 1세의 대규모 의회가 소집될 때까지의 공백기 동안, 잉그램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다. 그는 발리올 가문과 깊은 관련이 있었기에, 존 발리올의 왕위 등극을 지지했을 것이다.
에드워드 1세는 1291년 6월 13일에 잉그램에게 노섬벌랜드의 노럼 영지를 하사했다. 이와 동시에, 존 발리올은 그를 대의회의 감시관 중 한 명으로 선임했다. 1292년 12월 26일, 잉그램은 뉴캐슬에서 존 발리올이 에드워드 1세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식에 참석했으며,. 1293년 2월 23일 던디에서 존 발리올이 헌장을 제정하는 것을 지켜봤다.
1293년 에드워드 1세에 의해 스코틀랜드 왕이 된 존 발리올이 소집한 첫번째 의회에서, 전임 국왕 알락산더르 3세가 잉그램의 아내이자 가모란의 앨런 맥루아이드리의 과부인 이사벨라에게 지참금으로 100마크를 하사한 것이 인정되었다. 이 가운데 40마크는 캐릭 영지에서 나왔고, 40마크는 왕실 직할지에서 나왔다. 이중 왕실 직할지에서 나온 금액은 맥루아리드리 영지가 상속인에게 반환될 때까지 지불해야 했다. 또한 잉그램은 아내 이사벨라가 가모란의 앨런 맥루아이드리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크리스티나의 교육에도 관여했을 가능성이 있다. 크리스티나는 나중에 로버트 1세의 아내의 형제인 마르의 도널드의 아내가 되었다.
1294년 6월 에드워드 1세가 가스코뉴 전선에 투입하기 위해 소환한 스코틀랜드 귀족 명단에서 제외되었는데, 그 이유는 알려진 바 없다. 1295년 존 발리올의 지시를 따라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와 반(反) 잉글랜드 동맹을 맺기 위해 파견된 위원 4인 중 한 명이었다. 1296년 에드워드 1세가 스코틀랜드를 침공하고 스코틀랜드군이 던바 전투에서 완패했을 때, 그는 아직 프랑스에 있었다. 그 해 6월 28일 스코틀랜드에 돌아온 그는 대세가 기울었음을 직감하고 에드워드 1세에게 귀순했다. 에드워드 1세는 그가 경비를 맡았던 덤버튼 성을 제임스 스튜어트에게 넘기라고 명령했고, 그의 딸들인 에바와 이사벨라를 인질로 잡았다. 같은 해 8월에 작성된 헌장에서, 에드워드 1세는 잉그램을 '에어 백작'으로 임명하고, 베릭과 에어의 보안관에게 그의 영지를 회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들이 어떻게 그 영지를 차지하고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1297년 스털링 다리 전투에서 스코틀랜드 반군이 승리한 후, 잉그램은 그 해 9월 25일 진압군 사령관 브라이언 피츠앨런을 지원하라는 에드워드 1세의 명령을 받은 스코틀랜드 귀족 16인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에 따르지 않고 스털링 다리 전투의 승리자이며 스코틀랜드의 수호자를 칭한 윌리엄 월레스 편에 섰다. 이에 에드워드 1세는 1299년 2월 잉그램 드 발리올이 사망한 후 본래 잉그램 드 움프라빌이 계승해야 할 영지를 "왕의 적이자 반역자에게 넘길 수 없다"며 다른 상속인인 제7대 토프클리프의 퍼시 남작 헨리 퍼시에게 넘겼다.
1299년 8월, 스코틀랜드의 수호자를 맡은 캐릭 백작 로버트 브루스와 바데녹 영주 존 코민 3세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이 에트릭 숲을 침공했을 때, 잉그램은 여러 스코틀랜드 귀족과 함께 참여했다. 이후 두 수호자 사이의 격렬한 분쟁이 벌어졌고, 스코틀랜드 주교들은 두 사람을 중재하기 위해 세인트앤드루스 주교 윌리엄 램버튼을 수석 수호자로 세우기로 했다. 이와 동시에, 잉그램은 잉글랜드군의 손에 넘어간 록스버러 성의 보안관으로 선임되어 그곳을 탈환하는 임무를 맡았다.
1300년 5월 스코틀랜드 수호자 존 코민 3세와 램버튼 주교 사이에 또 다른 분쟁이 벌어졌다. 그 후 캐릭 백작 로버트 브루스는 수호자 직위를 사퇴했고, 잉그램이 수호자로 선택되었다. 1301년 상반기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간의 휴전 협정이 맺어진 뒤,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잉글랜드에 억류되었던 존 발리올과 접촉했다. 존 발리올은 존 드 소울스를 스코틀랜드의 새 수호자로 지명했다. 그 해 8월, 잉그램과 존 드 소울스는 스코틀랜드로 쳐들어온 웨일스 공 에드워드 왕자의 군대를 스코틀랜드 남서부에서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1301년 9월 7~8일, 잉그램과 존 드 소울스는 대군을 이끌고 로크마벤 성을 기습 공격했지만 공략에 실패했고, 이후 에드워드 1세에게 포위된 보스웰 성을 구원하기 위해 라우던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강력한 전투력을 갖춘 잉글랜드군과 정면 대결하는 건 자살행위라고 여기고,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분견대를 급습하는 유격전을 전개했다. 에드워드 1세는 결국 스코틀랜드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302년 1월 스코틀랜드와 9개월 간의 휴전 협정을 맺었다.
1302년 7월 11일 쿠르트레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플란데런 반란군에게 참패한 후, 필리프 4세는 플란데런 반란 진압에 전력을 쏟고 싶었기에 잉글랜드와 화해하려 했다. 이에 스코틀랜드 정부는 프랑스와의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 1302년 가을 잉그램과 존 드 소울스를 포함한 여섯 귀족들을 프랑스로 파견했다. 그들은 필리프 4세로부터 더 많은 지원을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설득했지만, 필리프 4세는 끝내 그들을 외면했다. 1303년 5월 20일,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 파리 평화 협약이 맺어졌는데, 조약문에서 스코틀랜드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되지 않았다. 이제 에드워드 1세는 프랑스 국왕의 견제를 받지 않고 스코틀랜드에 집중할 수 있었다.
1303년,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를 향한 원정을 재개해 큰 저항을 받지 않고 로우랜드 전역을 휩쓸었다. 이에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1304년 2월 에드워드 1세에게 귀순하기로 결의했다. 에드워드 1세는 상당히 관대한 평화 조건을 제안했고, 이는 당시 프랑스에 없었던 존 코민 3세와 다른 스코틀랜드 귀족들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대부분의 귀족은 2년 동안 스코틀랜드에서 추방되었지만, 그들은 그 나라에 있는 재산을 유지했고, 영국에 재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사들일 수 있었다. 당시 잉그램은 아직 프랑스에 있었고, 에드워드 1세는 반란의 수괴 윌리엄 월레스를 잡을 때까지 잉그램, 존 드 소울스, 제임스 스튜어트에게 안전 통행권을 제공하지 않았다. 잉그램은 1305년 8월 3일 윌리엄 월레스가 잉글랜드군에 체포된 뒤에야 스코틀랜드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해 10월, 에드워드 1세는 5년치 임대료에 해당하는 수수료를 받고 그의 영지를 반환했다.
이후 에드워드 1세를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받든 잉그램은 1306년 3월 로버트 브루스가 존 코민 3세를 살해하고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1세로 즉위하자 이를 규탄하고, 스코틀랜드 남서부의 잉글랜드군 사령관으로서 로버트 1세에 대적했다. 1308년 8월 갤러웨이의 수호자이자 케어라버록 성의 수호자로 선임되었다. 1310년 6월 16일 알렉산더 애버네시, 알렉산더 맥두걸, 존 맥두걸과 협력해 1310년 6월 16일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에드워드 2세에게 스코틀랜드에 남아있는 잉글랜드 성채들을 구원하기 위해 군대를 친히 일으켜 지휘해 줄 것을 촉구했다.
1312년 8월 에드워드 2세의 의회에 참석해 스코틀랜드 문제에 대한 고문 역할을 맡았다. 1314년 6월 24일 배넉번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의 일원으로 참여했지만 참패를 면치 못하고 스코틀랜드군에 생포되었다. 그 후 6년간 스코틀랜드 궁정에 억류되었다가, 1320년에 래드캐슬 영지 절반을 돌려받는 대가로 로버트 1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1320년 4월 6일 스코틀랜드 귀족들이 교황 요한 22세에게 잉글랜드에 대한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인정해달라고 청원한 아브로스 선언에 서명했다.
1320년 8월, 로버트 1세를 암살하려는 음모가 발각되었다. 이때 재판을 받고 처형된 이들 중에는 잉그램의 절친한 친구인 브레친 영주 데이비드가 있었다. 그는 이 일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로버트 1세에게 잉글랜드로 보내달라고 간청했다. 로버트 1세의 승인을 받고 잉글랜드로 이동한 그는 1320년 12월 에드워드 2세에를 알현하고 자신은 로버트 1세에게 충성을 서약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에드워드 2세는 그에게 후한 선물을 주었고, 1321년 2월에 그를 프랑스 내 영지로 보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3. 가족
- 이사벨라: 역사가 앤드류 맥이완은 로버트 1세의 어머니인 캐릭 여백작 마조리의 자매였을 거라고 추정하지만,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잉그램과 결혼하기 전에 가모란의 앨런 맥루아이드리와 결혼해 딸 크리스티나를 뒀다.
- 에바 드 움프라빌: 1296년 에드워드 1세의 인질이 되었다가 풀려남. 필립 드 모브레이의 부인.
- 이사벨라 드 움프라빌: 1296년 에드워드 1세의 인질이 되었다가 풀려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