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코린토스 전쟁(BC 395~BC 387)은 스파르타와 테베, 아테네, 아르고스, 코린토스 (이외 올린투스, 만티네이아 등) 연합군이 맞붙은 전쟁이다. 이 전쟁은 스파르타의 쇠퇴를 상징한다.2. 배경
스파르타는 제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를 굴복시키고 그리스의 패권을 잡았다. 하지만 이웃 국가들에게 10인의 과두정(아테네의 경우는 30인)을 강제로 도입하고, 각지에 클레루코스, 즉 군사 총독부를 설치하는 등 폭정을 일삼아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원성이 높아졌다. 또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절부터 스파르타의 우방국이었던 테베와 코린토스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이탈리아의 '불구의 승리'(vittoria mutilata) 사례와 비슷하게 참전의 대가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특히, 스파르타가 BC 401년에 엘리스의 독립운동을 잔인하게 압박한 뒤로 테베와 코린토스는 스파르타가 참전하는 전쟁에 지원군을 보내지 않는 등 수동적인 공격적 태도를 보였다. 테베는 보이오티아 연맹이라는 독자적인 세력권을 구축해 힘을 비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파르타도 피해를 감안하지 않고서는 함부로 공격하기 어려웠다.3. 전쟁의 전개
테베는 스파르타에게 전면적으로 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서 아테네로 외교관들을 보내 동맹을 요청했다. 아테네는 아직 전쟁의 트라우마 때문에 스파르타에게 굴종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테네의 민주정을 부활시킨 트라시불로스는 테베로 유배당했던 시절부터 테베에 대해 개인적인 애착을 갖고 있었고, 아테네의 영광을 되찾고 싶어했던 터라 이를 수락했다. 아테네, 테베, 아르고스와 코린토스는 스파르타 몰래 비밀 협약을 맺고 스파르타와 가까운 코린토스에 군영을 설치했다.할리아르토스 전투에서 스파르타의 주요 권력가였던 리산드로스가 전사하고 전세가 스파르타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스파르타의 종교 담당 왕 [1] 파우사니아스는 연합군과 황급히 평화 협정을 맺었다. 하지만 스파르타인들은 이를 인정치 않고 파우사니아스를 추방한 후 협정을 파기했다. 전쟁 소식을 들은 전쟁 담당 왕 아게실라오스 2세는 이오니아 지방에서 진행하던 소아시아 원정을 중단하고 스파르타로 돌아와 군대를 진두지휘했다. 그는 BC 394년에 코로네이아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하지만 아테네는 국방력의 상징인 피레우스 항구 성벽을 재건했고, 아테네의 명장 코논은 아직 소아시아에서 미처 철군하지 못한 스파르타군을 격파했다. 이로써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전에 아테네 땅이었던 소아시아 열도의 영토를 수복했고, 다시금 해상 강국이 되기 위한 초석을 깔았다. 스파르타는 이후 해상 패권을 회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육지, 특히 그리스 남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는 스파르타가 아직 유리했다. 물자가 풍부해지니 아테네인 트라시불로스는 완전한 국토 회복을 위해 페르시아 제국령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리스의 세력간 균형을 원했던 페르시아 제국은 BC 401년에 스파르타가 페르시아를 공격했던 만병대 원정 사건을 잊어버리고 스파르타를 지원했다. 페르시아는 코논을 포로로 잡고 아테네에게 반격을 가했다. 전세가 다시 스파르타 쪽으로 기울기 시작하자, 페르시아의 샤한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안탈키다스 장군을 보내 안탈키다스의 화의를 맺었다. 아테네는 아직 전성기 시절 [2] 국력을 회복하지 못한 터라 불리한 조건의 협정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안탈키다스 화의'는 아테네, 스파르타 또는 테베가 국가간에 맺은 협정이 아닌 페르시아 대왕 대 전체 그리스가 맺은 비대칭 협정이었다. 다시 말해,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페르시아 제국 밑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4. 결과
군사적으로는 스파르타나 연합군이나 비등비등했기에 누가 승자라 얘기할 수는 없겠지만 아테네는 스키로스, 렘노스, 임브로스를 제외한 소아시아의 도시들을 모두 포기해야 했고, 테베는 권력의 기반인 보이오티아 연맹을 해산해야 했다. 그리고 다시 이토록 위협적인 전쟁이 발발하는 것을 우려한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제외한 모든 도시 연맹체의 결성을 금지시켰다.한편,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기억이 아직 뇌리에 생생한 그리스인들에게 페르시아는 영원한 적이었다. 그런 적과 손을 잡은 스파르타는 제아무리 패권국이라 해도 변절자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스파르타는 그리스의 패권에 있어서 치명적인 도덕적 약점을 노출하게 되었고, 실질적으로는 패권국이었지만, 그리스 국가들의 반감은 극에 달하게 되었다.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와 지속적인 전쟁을 벌인 탓에 재정적 파탄에 가까운 상태에 봉착해 있었고, 연합군과 전쟁을 계속하기 어려웠다.
요약하자면, 스파르타는 그리스 지역의 패권국이라는 지위를 유지할 수는 있었지만 적국 페르시아를 개입시키면서 외교적인 패배를 겪었다. 아테네는 3개 섬의 도시를 유지할 수 있었고, 피레우스 성벽을 지킬 수 있었으나 애매한 패배였다. 테베는 보이오티아 연맹을 해체당했고 민주주의는 친스파르타 과두정으로 대체당했으니 완전한 패배였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BC 379년에 펠로피다스[3]가 민주정을 다시 세우고, 테베를 강국의 길로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