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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3-04 20:23:05

이오아니나

파일:요아니나 1.jpg
구도심의 전경
파일:요아니나 2.jpg
내성 일대

1. 개요2. 역사
2.1.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2.1.1. 시난 파샤의 서약
2.2. 오스만 제국
2.2.1. 알리 파샤의 야니아 파샤령2.2.2. 근대

1. 개요

그리스어 Ιωάννινα
터키어 Yanya
영어 Ioannina

그리스 서북부의 도시. 이오안니나, 요안니나, 요아니나 등으로도 표기된다. 다만 현지인들은 얀니아 (Γιάννινα) 혹은 얀네나 (Γιάννενα)로 부른다. 핀도스 산맥 사이의 분지에 자리하며, 팜보티다 호수의 서안에 위치한다. 이피로스 주의 주도로, 인구는 약 8만명이다. 13-15세기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시절 수도가 되어 번영했고, '야니아' (Jania)라 불린 오스만 제국기에는 18-19세기 알리 파샤가 사실상 자립한 야니아 파샤령의 중심지로써 번영을 이어갔다. 호수로 돌출된 반도에 형성된 구도심은 외성과 내성의 2중 성벽과 페티예 모스크, 아슬란 파샤 모스크 등 그리스에서 오스만 제국 시기의 모습이 가장 잘 남아있는 곳이다.[1]

2. 역사

고대에는 몰로시아 인이 거주했으나 마을 수준에 그쳤다. 그러다 기원전 3세기 무렵부터 벽이 둘러지는 등 도시화가 되었으나 이름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다. 동로마 제국기인 879년에야 주교 자카리아스의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참석으로 이오아니나 지명이 처음 등장한다.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세례 요한의 수도원 자리에 도시가 세워져 '요안니스의 자리'란 뜻인 아기오안니나 (Agioannina)가 바뀐 형태, 벨리사리우스의 딸의 이름이란 설 등이 있다. 9-10세기 동안 나프팍토스 대주교구에 속해있던 이오아니나 주교구는 1020년 바실리오스 2세의 불가리아 정복 후 오흐리드 대주교구로 이관되었다. 10세기에 처음 세워진 성벽은 11세기 말에 보강되었고, 1082년 보에몽이 함락해 잠깐 영유하며 내성의 남부를 증축했다. 12세기 들어 도시는 요아니나 주의 치소가 되었고, 1204년 4차 십자군베네치아 공화국령으로 결정되었으나 미하일 1세 콤니노스 두카스가 접수해 남쪽 아르타에 기반한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령이 되었다.

2.1.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파일:요아니나 그리스 4.jpg
외성의 시계탑 일대

미하일 1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등지의 난민들을 수용하며 시가지를 확장, 성벽을 신축했다. 당시 나프팍토스 대주교는 이오아니나를 '구원의 방주'라 묘사했다. 기존 주민들은 1232년에 이주민들을 내쫓으려 했지만, 결국 둘은 동화되었고 도시는 갈 수록 정치 및 경제적으로 중요성을 얻었다. 그 무렵 유대인들도 정착했다. 1259년 펠라고니아 전투 후 아르타를 비롯한 이피로스 대부분 지역이 니케아 제국군에게 점령당한 상태에서도 이오아니나는 포위를 견뎠고, 미하일 2세 콤니노스 두카스가 구원했다. 1280년대에는 테살리아 왕국의 요안니스 1세와 동로마 제국군이 연달아 도시를 포위했으나 실패했다.

1318년 토마스 1세 콤니노스 두카스의 암살로 이피로스 황실의 직계가 끊기자 이오아니나는 암살자인 조카 니콜로 오르시니를 인정하지 않으며 동로마에 도움을 청했다. 이에 안드로니코스 2세가 점령, 대주교구로 지정하고 주민들에게 여러 특권과 자치 및 면제권을 부여하는 금인칙서를 하사했다. 따라서 1338-39년 이피로스 반란 시에도 이오아니나는 동로마에 충성을 유지했다. 동로마 지배는 오래가지 못하여 1347년 세르비아 제국스테판 두샨이 점령했고, 그의 사후 동생 시메온 우로시가 계승했으나 1356년 니키포로스 2세 오르시니가 점령해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의 지배가 36년만에 복구되었다. 니키포로스 2세는 아르타의 도시 규모를 뛰어넘은 이오나니나를 수도로 삼았다.

다만 1359년 니키포로스 2세가 알바니아 부족들과 싸우다 전사하자 이피로스 상당 부분이 무정부 상태가 되었고, 바게네티아 일대의 그리스 인들이 이오아니나로 피신해왔다. 혼란을 틈타 이오아니나를 탈환한 시메온 우로시는 테살리아에 머물렀고, 사위 토마 프렐류보비치 (토마스 2세)를 이피로스 군주에 봉했다. 토마스 2세는 1367년 알바니아 인들에게 상실한 아르타 대신 이오아니나를 수도로 하여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을 이어갔고, 싸늘한 여론에도 1379년 알바니아계 아르타 전제군주국의 기습을 격퇴했다. 이 승리에 대해 현지인들은 수호 성인 미카엘의 가호가 있었다고 여겼다.

1384년 토마스 2세의 암살 후 주민들은 그의 라이벌이던 에사우 부온델몬티를 추대했다. 에사우는 추방되었던 대주교 마테오를 복직시키고 다른 인사들의 몰수된 재산을 돌려주었다. 또한 밀과 과일 등 여러 생필품에 부과된 세금을 폐지하여 민심을 얻었다. 1386년 에사우는 동로마에 명목상 복속했고, 이에 동로마 사절이 이오아니나에 당도해 데스포티스 칭호를 수여했다. 1389년 아르타 전제군주국의 진 부아 슈파타가 이오아니나를 포위하자 에사우는 오스만 제국의 구원병을 얻어 격퇴했고, 1396년 그는 진 부아 슈파타의 딸 이리니와 결혼해 양국의 화목을 도모했다. 안정적으로 통치하던 에사우가 1411년 사망하자 주민들은 케팔로니아 & 자킨토스 백작이자 1407년 아카르나니아를 접수한 카를로 1세 토코를 추대했다.

2.1.1. 시난 파샤의 서약

파일:시난 파샤.jpg
시난 파샤가 주민들에게 안전과 자치를 보장한 서약문의 필사본

카를로 1세는 1416년 아르타를 점령해 이피로스를 통합했고, 동로마 및 오스만의 인정도 받았다. 하지만 1429년 그가 사망한 후 어린 아들 카를로 2세가 계승한 것에 대해 장성한 서자 에르콜레가 반발하며 오스만 군대를 불러들였다. 알바니아 인이 다수였던 이피로스 군대는 1430년, 마침 테살로니카를 점령하고 다가온 오스만 군에 저항하지 않았다. 이오아니나는 그해 10월 9일, 오스만 지휘관 시난 파샤가 안전과 자치를 서약하자 항복했다. 이후 도시는 483년간 오스만 령으로 남았다.

2.2. 오스만 제국

오스만 시기 이오아니나는 '야니아' 혹은 '자니아'로 표기되었고, 야니아 산작의 치소였다. 15-16세기 동안 도시는 안정을 누렸고, 성내에 성당 25개와 수도원 7개가 있는 반면 모스크는 성밖에만 세워지는 등 종교적 존중이 이루어졌다. 1564년 기준 이오안니나에는 기독교도 1250 가구와 무슬림 50 가구가 거주했다. 그러던 1611년 9월, 전 라리사 대주교 디오니시오스가 테스프로티아 해안의 70여 마을에서 8백여 농민과 목동들을 모아 봉기를 일으켜 이오아니나로 진격했다. 봉기군은 현지 총독 오스만 파샤의 저택을 불태웠고, 대주교 대리가 지지를 표했다. 겨우 피신한 오스만 파샤는 기병을 포함한 수비대와 그리스인 유력자들의 도움으로 다음날 반격하여 봉기군을 격파했고, 동굴에 숨었다가 잡힌 디오니시오스는 시내의 광장에서 고문을 당한 후 화형에 처해졌다. 그의 시신과 봉기군 및 내통자들의 수급은 코스탄티니예로 보내졌다.[2]

일부지만 주민들이 봉기에 가담한 사실이 드러나자 가혹한 보복이 뒤따랐다. 오스만 파샤는 성내의 모든 성당과 수도원을 모스크로 전환했고, 그리스인 주민들을 성밖으로 이주시켰다. 성내에는 무슬림과 유대인만이 거주가 허락되었고, 1204년에 세워진 데스포티스 학교 역시 폐쇄되었다. 이로써 180년간 이어진 종교적 관용 및 자치권이 폐지되었다. 1618년에는 이오아니나의 상징과도 같던 세례 요한 성당이 파괴되었고 그 자리에 아슬란 파샤 모스크가 세워졌다. 또한 오스만 당국은 보복으로 기독교도 시파히에게 주었던 티마르 (영지)를 몰수했고, 이에 많은 현지 유력자들이 특권 유지를 위해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투르코야니오트 (Τoυρκογιαννιώτες)라 불리게 되었다.

17세기 초의 사태에도 이오안니나는 그리스 정교도 다수 도시로 남았고, 그리스어 사용 역시 압도적이었다. 오스만어를 쓰는 관료 및 오스만어와 알바니아어를 혼용한 수비대 역시 종종 그리스어를 구사했다. 1670년 도시를 방문한 여행가 에블리야 첼레비는 37개의 마할레 (구역)가 무슬림 18개, 기독교도 14개, 유대인 4개, 집시 1개로 구성되어 있으며 4천 가구가 거주하고 1900개의 상점 및 공방이 있다고 기록했다. 이를 통해 이오아니나의 경제적 활발함을 알 수 있고, 주민들은 종종 수공업에 종사헸다. 베네치아와 리보르노 등 이탈리아 상인들은 종종 왕래하며 시내에 상관 및 은행을 두었다. 한편 베네치아로 이주한 이오안니나 출신의 니콜라오스 글리키스, 니콜라오스 사로스, 디미트리오스 테오도시우는 각각 1670년, 1687년, 1755년 베네치아에 인쇄소를 세웠다. 베네치아에서 출판된 1600권 이상의 그리스어 서적들은 이오아니나를 중심으로 그리스에 보급되었다. 책의 종류는 역사, 철학, 수학, 의학 등 다양했다.

이오아니나 출신 사업가들은 종종 고향에 학교를 세우는 등 자선 활동에 나섰다. 그 일환으로 1647년 베네치아 상인 에피파네이오스 이구메노스가 에피파니우 학교를, 1676년 엠마누엘 구마스가 기우메이오스 학교를 설립했다. 후자의 경우 1725년 교장 발라노스 바실로풀로스에 의해 발라네이오스로 개칭되었고 철학, 사상, 수학을 가르쳤다. 베사리온 마크리스, 게오르기오스 수그두리스, 아나스타시오스 파파바실레이우, 메토디오스 안트라키테스, 요안니스 빌라라스, 코스마스 발리노스 등의 그리스 계몽주의자들이 그곳에서 공부했다. 1742년에는 역시 베네치아의 이오아니나 출신 주민인 마우체스 가문이 마루차이아 학교를 세웠다. 첫 교장 에우게니오스 불가리스는 물리학과 화학, 철학, 그리스어 전문가였다.

이오아니나의 계몽주의 학교들 중 마루차이아는 1797년 베네치아 멸망 후 폐교되었다가 러시아의 이오아니나 출신 상인 조에스 카플라네스의 후원으로 카플라네이오스 학교로 재개교했다. 첫 교장 아타나시오스 프살리다스는 발라네이오스 출신인 메토디오스 안트라키테스의 제자로, 빈과 러시아 등지에서 유학했다. 그는 다국어로 쓰인 수천권의 책을 소장한 도서관과 물리학 및 화학 실험을 위한 연구소를 설립했고, 후자에 대해 알리 파샤가 호기심과 의심을 보였다. 네오피토스 두카스는 과장을 보태어 18세기 헬라권의 모든 작가들은 이오아니나 출신이거나 그곳의 학교 출신이었다고 평했다. 발라네이오스는 1797년 베네치아 멸망 후 자금난을 겪다가 1820년 이오아니나 공성전과 함께 폐교되었다. 학교 도서관에 소장된 많은 필사본과 시집들은 이오나니나 함락 당시 전소되었다.

2.2.1. 알리 파샤의 야니아 파샤령

1788년 야니아 산작을 중심으로 이피로스, 테살리아, 아이톨리아, 보이오티아, 아티카 등 그리스 서부와 중부를 석권한 알리 파샤 테펠레나는 이오안니아를 수도로 삼았다. 30년 이상 이어진 그의 지배 하에서 도시는 경제적, 학문적으로 크게 발전했고 19세기 초엽에 방문한 프랑스인 학자 프랑수아 푸크빌은 3200 가구 (2천 기독교도, 1천 무슬림, 2백 유대인)가 거주한다고 기록했다. 알리 파샤는 여인들을 자루에 넣어 호수에 던지는 등 그리스 주민들에게 가혹했지만 동시에 그의 휘하에서는 후일 그리스 독립 운동을 이끌 요르요스 카라이스카키스, 마르코스 보트사리스, 오디세아스 안드루초소스 등이 배출되었다. 1820년, 알리 파샤가 유럽 각국과 교류하는 등 자립을 꾀한다 여긴 조정은 그를 반역자로 선포하고 토벌군을 보내 이오안니나를 포위했다. 1년여의 공성전 끝에 알리 파샤는 항복하고 호수의 이오안니나 섬에서 술탄의 사면을 기다렸으나, 1822년 암살되었다. 한편 발라네이오스, 카플라네이오스 역시 불타는 등 1820-21년 이오아니나는 시가지 상당부가 소실되는 피해를 입었다.

2.2.2. 근대



[1] 테살로니키처럼 5백년 가까이 지배를 받았으니 그럴만 하다[2] 한편 디오니시오스의 부관 가브리엘 말라마스는 마니 반도로 도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