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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1 10:53:26

곤도르


<colbgcolor=#000><colcolor=#C0C0C0> 레젠다리움의 국가
곤도르
Gondor
파일:Escudo_Real_de_Gondor.svg 파일:istockphoto-1179853778-170667a.jpg
상징 백색 나무
파일:external/images1.wikia.nocookie.net/Gondor.gif
3시대 곤도르의 영토[1]
S.A. 3320 ~ Fo.A. 120 이후
성립 이전 반지전쟁 이후
누메노르 곤도르-아르노르
위치 가운데땅 동부
수도 오스길리아스 (S.A. 3320 - T.A. 1640)
미나스 티리스 (T.A. 1640-)
건국자 이실두르, 아나리온
정치 체제 군주제
언어 아두나익
서부어
신다린
퀘냐
민족 두네다인
곤도르인[2]
드루에다인
북부인
면적 약 2,000,000km2 (전성기)
약 600,000km2 (제3시대 말)[3]
통화 카스타르
테마곡

1. 개요2. 이름3. 상세
3.1. 상징3.2. 국력
4. 역사
4.1. 건국4.2. 전성기4.3. 쇠퇴기4.4. 아르노르 멸망, 미나스 이실의 함락과 왕가의 단절4.5. 통치 섭정의 시대
4.5.1. 곤도르와 로한의 우정
4.6. 반지전쟁 시기4.7. 제4시대
5. 역대 지도자들
5.1. 곤도르의 역대 국왕5.2. 곤도르의 역대 섭정5.3. 텔콘타르 왕조
6. 주요 지명
6.1. 행정구역
7. 역사적인 유사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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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곤도르(Gondor)는 판타지 소설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가공의 국가이다.

2. 이름

3. 상세

인간 역사상 최강의 왕국이었던 누메노르일루바타르가 일으킨 지각변동으로 사라진 이후 가운데땅으로 망명 온 누메노르인들이 세운 왕국이다. 초대 국왕은 엘렌딜이었으며, 북부에 아르노르 왕국을, 남부에 곤도르를 세웠다. 아르노르 왕국은 엘렌딜이 직접 통치하였으며 곤도르 왕국은 아들인 이실두르아나리온이 공동 통치하였다. 이후 아나리온의 혈통이 역대 국왕들로 연이어 재위하면서 찬란한 전성기를 이끌었고, 가장 강력한 황금기인 '선박왕들의 시대'에는 옛 누메노르의 영광을 연상시킬 정도로 강대한 왕국이었다.

그러나 이토록 찬란했던 곤도르도 마지막 선박왕 햐르멘다킬 1세 사후 흔들리기 시작했다. 친족분쟁, 대역병, 전차몰이족 전쟁 등 3연속으로 재난이 겹치며 국력이 쇠했으며, 동쪽의 사우론은 끊임없이 곤도르를 공략하면서 곤도르의 국력을 갉아먹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마지막 국왕 에아르누르마술사왕의 흉계에 넘어가 실종된 이래로 왕좌가 공백에 빠졌고, 국왕 대신 통치 섭정들이 곤도르를 다스리게 되었다. 섭정들의 시대 동안 곤도르는 조금씩이지만 꾸준하게 쇠락했으며, 반지전쟁 직전에는 전성기 시절에 비하면 대단히 세력이 위축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반지전쟁 시기에 이실두르의 정당한 후계자인 아라고른이 되돌아오면서 약 1,000년 만에 국왕이 귀환했으며, 반지전쟁이 선한 세력들의 승리로 끝난 이후 곤도르-아르노르 통합 왕국이 세워지면서 옛 시절의 화려한 영광을 다시 찾게 된다.

제1시대의 요정왕국 곤돌린[17]과는 다르다. 다만 톨킨이 초창기부터 구상했던 곤돌린에서 곤도르라는 지명(+문화)을 구상해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3.1. 상징

곤도르의 상징
파일:곤도르 국기.svg
파일:White_Tree_of_Gondor.png
국기 백색 나무[18]
곤도르의 상징은 백색 나무였다. 이 백색 나무는 발리노르의 영생목이자 성수(聖樹)인 텔페리온을 본따 발라 야반나가 직접 만든 갈라실리온의 후손으로, 단순히 곤도르를 상징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누메노르에서 건너온 엘렌딜 혈통의 정당성과 신성함을 상징하는 성물이었다. 발리노르의 요정들은 이 갈라실리온 묘목을 요정들의 섬인 톨 에렛세아에 심었고, 이 나무를 켈레보른이라고 불렀다. 이후 요정들에 이어 인간들이 세상에 생겨나고 최초의 왕국인 누메노르를 세우자, 요정들은 친선 우호를 위하여 켈레보른의 묘목들 중 하나를 누메노르인들에게 선물로 주었다. 누메노르인들은 이 묘목을 아르메넬로스 왕궁의 뜰에 심고 정성껏 키웠는데, 이 묘목은 크게 자라나 해질녘마다 하얀 꽃들을 가득 피웠고 밤의 어둠을 꽃의 향기로 가득 채웠다. 누메노르인들은 이 나무를 '님로스', 신다린으로 '하얀 꽃'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그러나 누메노르가 점차 오만에 빠져 타락하면서 님로스를 돌보는 자들도 줄어들었다. 누메노르의 마지막 왕 아르파라존은 사악한 사우론의 꼬임에 넘어가 끝없는 영생을 원했고, 이를 요정들과 발라들이 가로막고 있다고 여겼기에 그들이 선물한 님로스를 함부로 대했던 것이다. 아르파라존은 결국 님로스를 도끼로 베어버렸으나, 그 직전 전날 밤에 이실두르가 몰래 열매 하나를 따 님로스의 혈통을 보존하면서 대가 끊기는 일만은 면하게 되었다. 누메노르가 세상의 개변으로 인하여 바닷속으로 가라앉으면서 배를 통해 탈출한 이실두르가운데땅으로 건너와 겨우 살려낸 묘목을 미나스 이실의 뜰에 심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우론의 군대가 미나스 이실을 함락하면서 이 나무를 불태워버렸고, 이실두르는 이번에도 겨우 미나스 이실에 심겨진 나무의 묘목을 가지고 미나스 이실을 탈출할 수 있었다. 이후 대전쟁을 통하여 사우론의 군세를 물리치는 데에 성공한 이실두르는 이 묘목을 미나스 아노르에 새롭게 심었고, 이 나무는 오랫동안 곤도르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3시대 1636년에 곤도르에 대역병이 닥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고, 이로 인하여 26대 국왕 텔렘나르가 승하했으며 이와 함께 백색 나무도 병들어 죽어버렸다. 다음 국왕인 타론도르는 죽어버린 나무를 뽑아내고 나무에서 얻어낸 묘목을 새롭게 심었으니, 이 것이 바로 반지의 제왕 실사영화 시리즈에 나온 그 백색나무다. 이 백색나무는 왕이 있을 때까지는 매일마다 하얀 꽃을 피우면서 아름다움을 뽐냈으나, 마지막 왕 에아르누르마술사왕의 속임수에 빠져 실종된 이후 왕가의 혈통이 끊겨버리자 점차 시름시름거리더니 죽어버리기 시작했다. 국왕을 대신해서 곤도르를 다스리던 통치 섭정들은 어떻게든 이 나무를 살리려 노력했으나, 이미 죽어가는 나무를 살릴 수는 없었다고 한다. 결국 21대 섭정인 벨렉소르 2세가 사망하는 날 백색 나무는 완전히 죽어버렸고, 당시 특별히 남아있는 묘목을 구할 수도 없었던 터라 결국 죽어버린 나무는 그대로 그 자리에 놔두고 보존했다. 영화에서 나온 말라 비틀어진 백색 나무의 모습이 바로 이 죽어버린 나무의 모습이다. 이후 반지전쟁 동안 아라고른이 1,000년 만에 국왕으로 돌아왔다. 아라고른 왕은 옛 시절 누군가 민돌루인 산에 묻어두었던 백색 나무의 묘목을 발견해 이를 미나스 티리스로 가지고 와 다시 심었고, 원래 있던 죽은 나무는 깨끗이 뽑아 라스 디넨[19]에 보관했다고 한다.

곤도르 왕국의 국기에는 백색 나무와 그 위에 곤도르의 왕관, 그리고 7개의 별들이 있었다. 백색 나무는 앞서 말했다시피 누메노르 시절부터 전해져내려오던 왕권과 신성함의 상징이었고, 위에 뜬 7개의 별들은 아르다에 뜨던 7개의 별자리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요정들은 이 별들이 사악한 발라모르고스의 파멸과 선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또한 백색 나무 위에 있는 것은 곤도르의 왕관이다. 본디 곤도르의 왕관은 일반적인 누메노르의 투구와 별다를 바가 없었으나, 16대 국왕인 아타나타르 2세가 왕관을 보석과 황금이 달리도록 화려하게 치장하였다. 책에서 묘사된 곤도르 왕관은 완전히 구색을 갖춘 날개가 달린 투구의 모습이나, 영화판에서 나오는 왕관은 그냥 전형적인 왕관처럼 생겼다.[20]

3.2. 국력

제3시대 기준으로 인간들의 국가 중 가장 강대한 국가. 사실상 서부를 제외하면 가운데땅 전역을 지배하는 것이나 다름없던 사우론의 세력을 제2시대 말에 패퇴시켰고, 최전성기 시절에는 가운데땅 전역의 바다를 지배하고 가운데땅 서부 전역의 절반 가까운 곳을 국토로 삼았으며 하라드의 왕자들을 볼모로 삼는, 명실공히 가운데땅 최강의 초강대국이었다. 엘론드의 평가로는 누메노르를 연상시킬 정도로 위대했던 국가. 그리고 이 위세는 엘렛사르 시대에 이르러 다시 부활한다. 엘론드와 갈라드리엘의 예언에 의하면 엘렌딜 이후 모든 선조들의 영광을 부활시킬 자가 바로 아라고른이니 위세는 완전히 부활했을 것이다.

반지전쟁 당시 미나스 티리스로 지원 온 곤도르의 지방군이 3천 명인데 이것은 해적의 발호 때문에 원래 동원가능한 병력의 1/10만 차출한 것이라 언급되어 있다. 즉, 전성기 이후 내전 + 전염병 + 전차몰이족이라는 훈족몽골 제국에 비견될만한 강력한 기마군단의 침략[21][22]에다가 1000년 가까이 이루어진 모르도르와의 밀고 밀리는 전쟁으로 인해 2천년간이나 지속적으로 쇠퇴하고도 수도 방위대를 제외한 3만 명의 군대를 동원할 정도의 국력은 남아있었다는 뜻이다. 심지어는 왕이 부재하고 섭정이 대신 통치하는 상황에서 모르도르와의 소모전을 천 년도 훨씬 넘고도 멸망하지 않았는데, 로한이 아이센가드, 던랜드의 세력에게 국가적 위기를 겪고, 아르노르는 결국 망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어지간한 나라들이 쫄딱 망할 만큼의 시련을 그나마 곤도르라서 몇 번이나 극복해낸 것에 가깝다. 게다가 여기에 수도 방위대, 해군 등을 합치면 대략 전체 군사 수는 45,000명 정도로 추정된다. 이를 통해 톨키니스트들이 유추해본 곤도르의 전체 인구 수는 제3시대 사이 변동치를 생각하면 100만 ~ 200만 정도라고 한다. 고대에 군의 인구 대비율이 1~2%정도에 머물렀다는 사실로 미루어 최대 500만까지 잡는 경우도 있다. 무엇이 되었건 확실한 것은 인구수 = 국력이나 다름없는 시대에서 곤도르의 인구는 가운데땅 전체에서도 최상위권을 달렸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심지어 문화와 기술 역시 인간들의 나라 중 최고 수준이다. 영화상의 묘사로 보면 차이가 더 크다. 로한의 수도 에도라스는 수도임에도 불구하고 목책을 둘렀으며 석조 건물이 드물다. 호빗 시리즈의 인간 국가인 너른골도 외관이 제법 그럴 듯하지만 미나스 티리스의 아름다움에는 미치지 못한다.[23] 건물의 건축 난이도만 봐도 기술 격차가 드러나는데, 너른골은 강가 도시로 비교적 평탄한 곳에 지어진 반면 미나스 티리스는 산을 깎아 요새와 도시를 만들었다. 이쯤 되면 중세 수준의 기술력이 아니다. 의학의 경우, 미나스 티리스 6층에 위치한 치유의 집에서는 노화를 제외한 대부분의 병을 치료할 줄 알았다고 했으며, 실제로 힘을 못 썼던 질병은 가운데땅 전역을 휩쓴 대역병과 사우론과 그 수족들로 인해 앓게 되는 질병 정도가 다였다.[24]

로한에 비하면 기병보단 보병의 비율이 훨씬 높으며 데네소르가 우린 로한에 비해 말과 그리 친하지 않다고도 언급한다. 그렇지만 기병의 전력이 알고 보면 굉장히 높으며 백조 기사단 같은 두네다인 혈통의 매우 뛰어난 기병 전력도 보유하고 있다. 완전한 곤도르의 소속이라기엔 애매한 감이 있지만 형제와도 같은 소속 출신이라 할 수 있는 북부 두네다인 순찰자들도 펠렌노르 전투에서부터 모란논 전투까지 기병으로 참전했다.[25] 기병 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병종이 전부 갖춰져 있으면서 평균 이상은 하는 굉장히 튼튼한 로스터를 가지고 있다. 궁병의 경우 활의 대가 요정족 만큼은 아니지만 오크 따위는 우습게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의 궁병들을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으며, 보병의 경우 난쟁이 만큼의 정신 나간 단단함을 가지진 못했지만 튼튼한 중갑옷과 큰 방패로 무장하고 대열을 갖출 수 있는 견실한 중보병들을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다. 위에 언급되어 있듯이 기병 또한 규모 면에서 로한의 기병대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혈통면에서 매우 우월하며 중갑옷을 걸치고 적진을 향해 용감하게 돌격할 수 있는 중기병대를 소수 보유하고 있다.[26] 심지어 해군까지 운용했다. 즉, 어느 병종이든 모자람이 없다. 평균 이상의 질과 많은 머릿수라는 전쟁 수행에 있어서 가장 이상적인 시스템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사우론과의 최전선에서도 굳건히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가운데땅에서 사우론에 버티는 마지막 보루라 여겨지는 대국이었으며, 이마저도 어디까지나 쇠락할 대로 쇠락한 반지전쟁 당시의 이야기였다. 힘 vs 힘으로는 도저히 답이 안 나와 자체적인 멸망을 유도했던 누메노르처럼 곤도르 역시 사우론이 전성기엔 힘으로 도저히 답이 안 나와 수천년 간의 지속적인 쇠퇴를 계략해야 했을 정도로, 멸망한 전신 국가 누메노르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가운데땅 최강의 대국이라고 할 만한 국가.

종합적으로 보면 동로마 제국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진짜로) 천년 단위로 외적과 싸우거나, 내부 분열과 관료제, 전염병을 겪으면서도 번영하거나 하는 것이 닮았다.

반대로 영화에서 보여준 모습은 그러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건 감독의 연출과 각색 때문에 생긴 문제이지 절대로 곤도르가 약한 게 아니다. 외국에서 반지의 제왕 팬 앞에서 곤도르는 약하다는 말을 했다가는 진짜 한 대 맞을 수도 있다. 영화에서도 지휘관급이 아닌 이상 사슬갑옷이 기본인 로한이나 북부에 비해서 말단 궁수까지 전부 판금을 입고 있는 등 쇠퇴하긴 했어도 기본 국력은 충분한 걸 알 수 있다.

4. 역사

4.1. 건국

파일:elendilwithsword.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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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국왕 엘렌딜 이실두르 아나리온
제2시대에 가운데땅의 서쪽 벨레가에르 해에 있는 엘레나 섬에는 인간이 세운 최초의 왕국이자 거대한 대제국이었던 누메노르가 있었다. 그러나 누메노르는 지나치게 오랜 전성기로 인하여 점차 오만해졌고, 결국 자만에 빠져 타락하고야 말았다. 누메노르의 마지막 국왕인 황금왕 아르파라존은 죽음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고, 결국 사악한 사우론의 꼬임에 넘어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불멸의 존재들인 아이누엘다르가 거하는 발리노르를 침공하는 대실수를 저질렀다. 결국 진노한 발라들은 절대자 일루바타르에게 청원해 아르파라존과 그의 군대가 발리노르 땅에 발을 내딛는 순간 이들을 땅에 가두어 버렸고, 누메노르 왕국은 바다 속으로 침몰해 사라지게 만든다. 그리고 침몰한 누메노르는 아칼라베스라 불리게 된다. 그러나 이 재앙 속에서도 살아남은 누메노르인들이 있었으니, 평소 일루바타르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발라를 존경하던 엘렌딜과 그를 따르던 신실파였다. 엘렌딜은 배를 수배하여 최대한 도망칠 수 있는 사람들을 모아 동쪽의 가운데땅으로 도망쳤으며, 이곳에서 새로운 왕국을 도모했다.

가운데땅의 안두인 대하 유역에 당도한 엘렌딜과 그의 두 아들 이실두르아나리온은 대하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 왕국을 세웠다. 이 시기 가운데땅에 펠라르기르, 벨팔라스 등 여러 누메노르인들의 식민도시들이 있었는데, 이 식민도시들은 모두 엘렌딜과 그의 아들들을 반기고 자신들의 지배자로 받아들였다. 엘렌딜은 가운데땅에 새로운 누메노르 망명 왕국을 세우고, 자신은 안누미나스에서 놀도르 대왕 길갈라드와 협력하기 쉬운 북쪽의 아르노르만을 직접 통치하고, 남쪽의 곤도르는 두 아들 이실두르아나리온에게 공동 통치를 맡겼다. 이실두르는 이실리엔 지방을 얻어 옛 사우론의 영토 모르도르를 감시한다는 의미로 모르도르 바로 인근에 미나스 이실(Minas Ithil)[27]을 지었고, 아나리온은 야만족들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안두인 평원에 미나스 아노르(Minas Anor)[28]를 지었다. 특히 이실두르는 미나스 이실에 백색 나무를 심기도 했다.[29] 두 형제는 곤도르를 공동으로 통치한다는 의미로 미나스 이실과 미나스 아노르 사이에 수도 오스길리아스를 지었고, 오스길리아스와 미나스 이실, 미나스 아노르에 팔란티르를 설치하여 엘렌딜과 끊임없이 연락했다.

당시 아르노르인들과 곤도르인들은 찬란하던 누메노르 왕국 시절의 기술을 상당 부분 유지하고 있었다. 곤도르인들은 이 기술들을 보존해온 덕분에 거대한 산과 언덕들을 깎아 아름다운 도시들을 세웠고, 특히 수도인 오스길리아스의 화려함은 가운데땅 구석구석까지 소문이 퍼질만큼 그 명성이 굉장했다. 오스길리아스는 중앙에 안두인 강이 가로질러 흐르는 구조로, 곳곳에 장대한 돌로 깎아 만든 다리들이 걸쳐져 있었으며 거대한 석조 주택들이 끝도 없이 늘어져 있었다. 곤도르의 이 기술들은 시간이 꽤 흐른 이후에도 실전되지 않아서 나중에도 아르고나스의 거대한 석조상들을 세우거나 오르상크의 부서질 수 없는 첨탑을 세우는 등 여러 건축학적인 업적을 많이 남겼다고 한다. 참고로 북왕국 아르노르를 다스리는 것은 아버지인 엘렌딜이고 남왕국은 두 아들들이 다스렸으나 실제로는 곤도르가 아르노르보다도 훨씬 인구도 많았고 국력도 강대했다. 아르노르는 단 한 번도 곤도르를 국력 면에서 능가해 본 적이 없었다.

처음에 곤도르는 사우론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사우론이 누메노르가 침몰할 적에 함께 물에 빠져 사망한 것으로만 대략적으로 추정하고 있던 것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오로드루인의 불꽃이 타오르고 인근의 악이 세력을 불리기 시작하면서 곤도르인들도 사우론이 돌아왔다는 것을 직감하고야 말았다. 결국 제2시대 3429년에 사우론은 미나스 이실에 대한 총공격을 감행했고, 이실두르는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미나스 이실에서 후퇴했다. 이로 인하여 미나스 이실의 백색나무가 불에 타버렸다고 한다. 이실두르는 백색 나무의 묘목들 중 하나를 챙겨서 미나스 이실을 탈출하여 아버지 엘렌딜을 찾아가 구원을 요청하는 한편, 아나리온은 미나스 아노르와 오스길리아스를 중심으로 곤도르 군대를 지휘하며 사우론의 군세를 막아냈다. 아나리온은 일시적으로 사우론의 군대를 에펠 두아스[30]까지 몰아내는 데에 성공했으나 결국 세를 추스른 사우론에게 밀려나 절체절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이 급박한 상황에서 이실두르의 구원 요청을 받은 엘렌딜은 곧바로 놀도르의 대왕이었던 길갈라드에게 연락한다. 엘렌딜과 길갈라드는 '요정과 인간의 마지막 동맹'을 맺어 함께 사우론에 맞서 싸우기로 결정하였으며 각각 아르노르와 린돈에서 군세를 모아 모르도르로 향했다. 요정 군대 10만 명, 인간 군대 10만 명, 크하잣둠에서 온 난쟁이 군대 5만 명으로 이루어진 연합군은 사우론의 군대에 맞서 다고를라드 평원의 전투를 치렀고, 다고를라드 평원에서 승리한 연합군은 평원을 넘어 사우론의 본진인 바랏두르까지 진군해 공성전을 펼쳤다. 7년 동안 이어진 바랏두르 공성전 동안 곤도르의 국왕인 아나리온이 날아온 돌에 머리를 맞아 죽었다. 7년째 되는 해에 사우론은 포위를 풀기 위해서는 직접 나설 수 밖에 없다고 판단하여 직접 전장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길갈라드엘렌딜이 사우론을 직접 막다가 둘 다 전사했다. 길갈라드와 엘렌딜이 쓰러진 후, 이실두르가 끝까지 사우론과 싸워 그의 손가락을 잘라 절대반지를 빼앗으면서 결국 사우론을 쓰러뜨리는 데에 성공했다.

이후 엘렌딜아나리온이 사망했기에 한동안 유일하게 남은 이실두르가 아르노르와 곤도르의 양국을 2대 왕으로서 통치하며 전후 질서를 바로 잡았다. 또한 그는 모르도르의 입구인 검은문 양편에 거대한 이빨탑을 건설하였고, 두르상과 키리스 두아스를 세워 모르도르를 철저히 감시토록 하였다. 그러나 이실두르는 이 과정 속에서 정신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사우론에게서 빼앗은 절대반지의 사악함에 잠식되면서 이실두르는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기 시작했고, 이실두르는 절대반지를 파괴하지도 않은 채 오히려 아르노르의 국보로 삼고 대신 그것에 대한 기록을 곤도르에 남겼다.[31] 마지막으로 이실두르는 동생 아나리온을 생각하며 미나스 이실에서 구해낸 백색나무의 묘목을 미나스 아노르에 심은 후 곤도르를 아나리온의 아들 메넬딜에게 맡겨두고 아르노르로 떠난다. 아르노르에 도착하여 정식으로 아르노르와 곤도르 양국의 대왕임을 선언하려던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이실두르가 창포 벌판을 건너던 중 오르크 잔당의 습격으로 사망하면서[32] 두 왕국의 사이는 멀어지게 되었으며 곤도르는 메넬딜의 자손들이, 아르노르는 이실두르의 막내 발란딜과 그 자손들이 계속 대를 이어나가게 되었다.

4.2. 전성기

파일:타란논.jpg
파일:에아르닐 1세.jpg
파일:키랸딜.jpg
파일:햐르멘다킬 1세.jpg
타란논 에아르닐 1세 키랸딜 햐르멘다킬 1세
메넬딜과 그의 자손들이 통치하기 시작한 곤도르는 아르노르로부터 벗어나 독자적인 길을 가기 시작했다. 곤도르는 꾸준하게 세를 불려나가며 제3시대 동안 가운데땅 최강의 대국으로 군림했다. 곤도르는 초기에는 아노리엔 지방과 이실리엔 지방, 안두인 하류로 이어지는 연안 지방만을 지배하고 있었지만 제3시대 500년부터 하라드림동부인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한다. 동부인들은 490년 7대 국왕 오스토헤르의 재위기부터 곤도르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541년 제8대 국왕인 로멘다킬 1세가 동부인들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였으나, 9년이 흐른 550년 그의 아들이었던 투람바르가 동부인의 군대를 대파하고 동쪽의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다.

12대 국왕으로 즉위한 타란논은 해군을 양성하며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꾸준히 영토를 확장시키며 선박왕의 시대를 열었다. 선박왕이라는 칭호는 강력한 해군을 바탕으로 해안 지방을 정복한 타란논, 에아르닐 1세, 키랸딜, 햐르멘다킬 1세, 이 4명의 국왕들에게 주어진 칭호였다. 이 4명의 선박왕들은 곤도르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최고의 명군들이었다. 선박왕의 시대를 연 타란논이 후사를 남기지 않고 사망하자 조카인 에아르닐 1세가 왕위에 올랐다. 에아르닐 1세는 곤도르의 항구인 펠라르기르를 재정비하고 대규모 해군을 양성, 933년에는 검은 누메노르인[33]들의 본거지인 움바르를 점령하는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움바르 연안에서 936년에 폭풍우로 인하여 에아르닐 1세가 실종되자 키랸딜이 새로운 14대 국왕으로 즉위했다. 1015년에 움바르에서 쫒겨난 검은 누메노르인들이 하라드[34]의 군대를 이끌고 움바르를 포위 공격하였고 결국 전투 중에 키랸딜이 전사하고 만다. 하지만 1050년 마침내 15대 왕인 햐르멘다킬 1세가 하라드를 정복하면서 움바르의 포위를 풀었고 하라드인들은 완전히 쇠망하며 뿔뿔히 흩어지게 된다.

곤도르는 햐르멘다킬 1세의 재위기에 국력이 절정에 달했다. 햐르멘다킬 1세는 무려 134년이라는 긴 세월을 통치했고,[35] 이 시기 곤도르의 국력은 최절정기에 달해 누구도 감히 곤도르를 공격하지 못했다. 타란논, 에아르닐 1세, 키랸딜, 햐르멘다킬 1세로 이어지는 선박왕들의 시대의 곤도르 왕국은 워낙 그 세력이 강대했기에 안두인 강 북쪽의 북부인들도 곤도르의 북쪽 영역의 통치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으며, 남부 하라드의 왕자들은 곤도르에 볼모로 보내져 곤도르의 궁정에서 살아야했다. 곤도르의 강역은 북으로는 켈레브란트 벌판과 초록숲 남쪽, 서로는 회색강, 동으로는 룬 내해, 남으로는 하르넨 강과 움바르 지역에 이르게 되었는데, 이는 거의 가운데땅 서부의 절반에 가까운 국토를 보유한 셈이었다. 모르도르는 황폐한 곳이었으나 키리스 웅골과 모란논 등에 요새와 탑을 세우고 쉴 틈 없이 감시했다.

4.3. 쇠퇴기

이렇게 선박왕들의 시기 동안 몇 백여년에 걸쳐서 오랜 최전성기를 이루던 곤도르도 제3시대의 1000년이 지나면서 급격히 쇠퇴하게 된다. 특히 곤도르에게 닥친 3가지의 시련인 친족분쟁, 대역병 그리고 전차몰이족의 침략은 곤도르에게 회복 불가능할 정도의 타격을 입힌 대재앙이었다.

4.3.1. 친족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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햐르멘다킬 1세는 위대한 선박왕이었으나, 그의 아들 아타나타르호부견자의 전형이었다. 곤도르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햐르멘다킬 1세가 사망한 후 그의 뒤를 이어 아타나타르 2세가 왕위에 올랐다. '알카린(영화대왕)'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던 아타나타르 2세는 대단한 사치를 누리며 호사스러운 생활을 계속했다. 그는 곤도르의 부귀와 영화에만 탐닉했으며, 그의 통치 아래 곤도르는 보석따위는 곤도르의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공기돌에 불과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부유하면서 외면상은 선박왕 시대의 번영을 지속하는 듯 보였으나, 실상은 내면이 썩어들어가기 시작한 빛좋은 개살구였다. 아타나타르 2세는 곤도르의 전성기를 유지하기 위해 해야 될 일들을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며, 그가 했던 일이라고는 평범했던 왕관을 날개가 달리고 화려한 보석이 달린 것으로 교체한 것이 전부였다. 아타나타르 2세는 약 27년 동안 재위했고, 그의 재위기 내내 곤도르는 정체기를 맞으며 이전의 영광에 가려 점차 무너져가는 국가의 현실을 외면하고야 만다.[36]

1240년에 아타나타르 2세의 후임으로 즉위한 17대 국왕인 나르마킬 1세는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아 아예 국가 경영에서 뒷전으로 물러나고 조카였던 미날카르에게 섭정을 맡긴다. 곤도르의 만력제 제 아버지를 닮아 통치에 별 관심이 없었던 나르마킬 1세는 섭정에게 모든 권한을 일임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때부터 시작된 기강 해이로 인하여 곤도르의 국력이 쇠퇴하자 이를 노린 동부인[37]의 공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1248년에는 섭정 미날카르는 로바니온의 왕 비두가비아와 함께 로바나온과 룬 내해 사이에서 동부인들을 격파하고 그들의 진영을 모조리 파괴하여 '동부의 승리자' 로멘다킬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동부인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미날카르는 안두인 대하 서안에서 맑은림강 하구까지를 요새화하고, 이방인이 에뮌 무일 너머 대하로 내려오는 것을 금지하며 넨 히소엘 입구에 이실두르아나리온의 모습을 본땄다고 전해지는 아르고나스를 세우게 하였다.[38] 또한 북부인과 우호를 돈독히 하고 싶었던 미날카르는 그의 아들 발라카르를 북부의 로바니온에 대사로 보내 머물게 하였으며, 발라카르는 그곳에서 로바니온의 왕인 비두가비아의 딸 비두마비와 결혼하고 그곳에서 아들 엘다카르를 낳았다. 참고로 이는 훗날 엘다카르의 큰 약점으로 작용하였다. 곤도르인들은 모국인 누메노르인의 순수혈통을 중시하는 사회로 두네다인의 핏줄을 유지하는 것을 매우 중시하였다. 따라서 왕가의 일원이 두네다인이 아닌 일반 북부인과 결혼한 사건은 곤도르 귀족들에게 크나큰 반발을 일으켰다.

나르마킬 1세가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자 그의 동생인 칼마킬이 왕위를 계승했다. 칼마킬 역시 아버지와 형을 담아 정치에 별 관심이 없었고, 곤도르의 실권은 나르마킬 1세 시대와 똑같이 섭정직을 맡았던 미날카르가 휘둘렀다. 이후 칼마킬이 사망하자 마침내 섭정직을 맡고 있던 미날카르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로멘다킬 2세로 즉위했다. 새롭게 왕위에 즉위한 로멘다킬 2세는 즉위 이전부터 북부인들에게 가지고 있던 호감 때문에 곤도르인들이 북부인들과 함께 어울려 살기를 바랐다. 로멘다킬 2세는 북부인들을 초대하여 궁정으로 불렀으나 이는 오히려 곤도르 고관들의 분노를 산다. 자신들을 누메노르의 적통이라 여기면서 자신들보다 덜떨어진 피를 가지고 있는 인간들을 무시하던 곤도르인들에게 소위 하등한 북부인들과의 결합은 꺼림칙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차별은 로멘다킬 2세와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20대 국왕 발라카르의 시기까지 표면적으로 대놓고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발라카르 국왕이 사망하자 그의 뒤를 누가 이을 것인가에 두고 대대적으로 논란이 일어났다.

1432년에 발라카르 국왕이 죽자 본격적인 친족분쟁이 시작되었다. 그의 아들인 21대 왕 엘다카르는 반대파에게 약점을 잡히는데 우선 그가 곤도르가 아닌 북부의 로바니온에서 태어난데다가 어머니 또한 두네다인이 아닌 북부인이기 때문에 혼혈아로 간주되어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왕과 가장 가까운 왕족이며 곤도르의 대함장으로서 해군 기지가 있던 펠라르기르움바르의 큰 지지에 힘 입은 작은 할아버지의 손자 카스타미르가 내전을 일으키니, 엘다카르의 대관식은 제대로 열리지도 못하였다. 1437년에 결국 카스타미르가 이끄는 반란군은 엘다카르가 있는 수도 오스길리아스를 포위 공격하였다. 별다른 성벽이 존재하지 않았던 궁전은 불타 무너졌고, 그곳에 있던 거대한 팔란티르는 안두인 강에 빠져 소실되었다. 이후 엘다카르는 로바니온으로 달아나 북부인들과 두네다인들을 모아 때를 기다렸다. 수도를 빼앗은 찬탈자 카스타미르는 스스로 제22대 곤도르의 왕위에 오르고 6촌인 엘다카르의 맏아들 오르넨딜을 처형했다. 그의 잔인무도한 모습에 미나스 아노르미나스 이실의 주민들은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39]

세를 키우며 때를 기다리던 엘다카르가 카스타미르가 왕위를 찬탈한지 10년이 지난 1447년에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카스타미르를 응징하러 오니, 이미 오르넨딜 처형 사건으로 인해 카스타미르에 등을 돌린지 오래였던 이실리엔아노리엔, 칼레나르돈도 이에 호응하였다. 마침내 에루이 여울에서 양 세력의 결전이 벌어졌고 여기에서 엘다카르가 카스타미르를 죽이고 승리, 왕권을 회복하였다. 카스타미르의 아들은 펠라르기르로 달아나고, 엘다카르는 이를 뒤쫒아 펠라르기르를 포위하였다. 그러나 1년 후에 남은 반란군은 모든 배들을 이끌고 포위망을 뚫은 채로 펠라르기르를 탈출하는데 성공하였다. 당시 곤도르 해군의 대부분이 반란군을 지지하였기 때문에 엘다카르에게는 사실상 해상 병력이 없었으므로 반란군의 탈출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탈출한 반란군은 움바르를 빼앗고 현지에서 독립하는 것으로 친족분쟁은 마무리되었다.

친족분쟁의 결과 곤도르는 움바르를 다시 빼앗김으로써 남쪽 영토를 많이 상실하고, 다시 해적과 하라드림의 위협을 받게 되었으며, 과거 아르파라존사우론을 사로잡은 상징적인 지역을 잃었다는 점에서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40] 비록 친족분쟁으로 곤도르의 인구는 많이 감소했지만, 엘다카르와 함께 온 북부인들이 이곳에 많이 머물면서 어느 정도 보충이 되었다. 물론 누메노르의 지혜와 힘이 점차 쇠퇴하였지만 이는 북부인의 혈통이 섞인 탓은 아니다.[41][42]

4.3.2. 대역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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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족 분쟁의 상처는 깊었다. 곤도르는 카스타미르가 이끌던 반란군들의 잔당에게 움바르를 잃어버렸고. 동부의 하라드림 지역의 통제력을 상실하였으며 다시 움바르 해적들의 약탈에 시달렸다. 1540년에는 23대 국왕인 알다미르가 해적들과 싸우다가 전사했고, 25대 미나르딜 국왕 역시 1634년에 해적들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43] 연달아 국왕들이 해적과의 전쟁에서 전사하자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텔렘나르는 더이상 해적들을 방치할 수 없음을 느끼고 움바르의 해적들을 일소하기 위한 대함대를 꾸렸다. 그러나 이 대함대의 발목을 붙잡은 대사건이 터졌으니......

바로 대역병의 창궐이었다. 1635년 겨울 경에 북부의 로바니온부터 휩쓸기 시작했던 대역병은 곤도르에게도 손길을 뻗쳐왔다. 로바니온 지역의 인구를 반으로 줄여버린 이 지독한 대역병은 계속 남하하면서 곤도르 지방에도 빠른 속도로 침투해 들어왔다. 이 과정에서 특히 인구가 집중돼있던 아노리엔 지역과 칼레나르돈 지역에서 많은 수가 죽었으며, 심지어 국왕이었던 텔렘나르와 그의 자식들 모두 병사하고 만다. 그가 죽으면서 당연히 움바르 공격도 흐지부지 되었고, 미나스 아노르에 있던 백색나무마저 시들어 죽고 말았다. 대역병이 휩쓸고 지나간 곤도르는 인구가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고 내전에 이어 대역병까지 휩쓸고 지나간 오스길리아스는 사실상 수도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27대 국왕 타론도르는 오스길리아스가 갈수록 폐허로 변해거자 이에 수도를 미나스 아노르로 옮기고 백색나무의 묘목을 다시 심었다. 이는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이는 곧 모르도르에 대한 방어선이 허술해지는 결과를 낳았다.[44]

하지만 이 대역병의 순기능도 있었으니, 바로 잠시동안 동부인들의 침입을 막아내었다는 점이었다. 전염병은 곤도르인이나 동부인이나 가리지 않았고, 동부인들도 엄청난 인명 피해를 입은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자 내부를 수습하느라 경황이 없던 동부인들은 감히 곤도르로 쳐들어 올 생각을 하지 못했다[45]. 이에 곤도르는 움바르 해적들에게 전선을 집중할 수 있었고 마침내 1810년, 28대 왕인 텔루메흐타르움바르를 공격하여 카스타미르의 후손들을 모두 죽이고, 움바르를 다시 수복하였다.[46] 텔루메흐타르 국왕은 이 업적으로 인하여 자신의 이름에 '움바르다킬'이라는 칭호를 덧붙였다.

4.3.3. 전차몰이족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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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친족분쟁과 대역병으로 연달아 치명타를 맞아 휘청거리던 곤도르는 전차몰이족의 침략이라는 엄청난 시련을 또다시 맞게 된다. 1851년에 돌 굴두르에 있던 사우론의 영혼의 꼬드김을 받은 전차몰이족이 북부인들의 영토로 대규모의 침략을 해 들어왔다. 전차몰이족은 곤도르 동부에 거주하던 여러 부족들 중 하나로, 동부 최강 세력들 중 하나였으며 거대한 크기의 전차를 타고 다니면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파괴하는 굉장히 호전적인 성향의 부족이었다.[47] 전차몰이족은 약 100여 년이라는 엄청나게 오랜 기간 동안 곤도르를 끊임없이 괴롭히면서 안그래도 망해가는 곤도르의 국력을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전차몰이족이 1856년에 쳐들어오자 당시 29대 국왕인 나르마킬 2세는 로바니온의 마르하리 국왕의 군대와 함께 어둠숲 아래 평원으로 출전하여 전차몰이족과 대규모 전투를 벌였으나 완패하였고 그 자신도 전사하였다. 하지만 곤도르군은 후위대로 있던 마르하리의 기병대가 큰 활약을 한 덕분에 전멸은 면하고 이실리엔으로 간신히 후퇴할 수 있었다.[48] 이 결과로 곤도르는 이실리엔을 제외하고 안두인 대하와 에뮌 무일 동쪽 영토를 모두 상실하였다.[49] 전차몰이족은 여세를 몰아 로바니온으로 쳐들어갔고 많은 수의 북부인들이 그들의 노예가 되었다. 하지만 일부는 더 북쪽으로 이동하여 데일인들과 섞였고 마르하리의 아들 마르위니가 이끄는 잔존 세력들은 어둠숲과 안두인 사이의 기슭을 지나 바위섬 캐락과 창포벌판 사이의 안두인 골짜기에 정착하여 초대 군주가 되니, 이들이 곧 에오세오드 족이 된다.

1899년에 곤도르의 국왕 칼리메흐타르는 남부의 위협이 제거[50]되자 전사한 나르마킬 2세의 원수를 갚기로 한다. 마르위니는 다시 전차몰이족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곤도르에 경고를 하였으며 동시에 노예가 된 북부인들에게 전차몰이족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라고 선동한다. 마르위니의 경고대로 전차몰이족은 다시 곤도르를 침략하나 곤도르와 마르위니가 숨겨둔 기병대의 후방공격이라고 쓰고 뒤치기을 받고 대패하였다. 동시에 로바니온에서도 북부인들이 반란을 일으키지만 전차몰이족의 저항이 거센 바람에 완전히 몰아내지는 못했다. 한편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자 곤도르와 아르세다인 왕국[51]은 오랜 단절을 끊고 다시 동맹을 맺는다. 이들은 앙마르나 전차몰이족이 누메노르 생존자들을 없애려는 단일한 목적[52]에 의해 움직인 것이라 판단하였고 이에 아르세다인의 왕자 아르베두이와 곤도르의 공주 피리엘의 혼인으로 더욱 굳건한 관계를 맺는다.

1940년에 에오세오드 족에게서 다시 전차몰이족의 움직임이 있다는 소식이 입수되었고 곤도르의 왕 온도헤르는 이에 전쟁준비를 시작한다. 온도헤르는 적들이 북쪽과 남쪽에서 모두 쳐들어올 것이라 예상하고 군대르 둘로 나눠 상대적으로 전력이 약한 남부전선에는 왕실의 일원인 에아르닐에게 지휘권을 줘서 펠라르기르에 주둔토록 했다. 그리고 북부전선은 왕인 자신이 스스로 지휘하였는데 이는 오래된 곤도르의 관습[53]이었다. 마침내 1944년에 적들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이 곤도르에 전해졌다. 에아르닐은 절반의 군대와 함께 안두인 강을 건넜고 나머지는 일부러 포로스 강의 여울을 무방비로 둔 채 남부 이실리엔에서 북쪽으로 40마일 정도 되는 곳에 야영하였다. 한편, 온도헤르는 북부 이실리엔을 통과해 다고를라드 평원에 군대를 배치하기로 하였다.[54]

10월 4일, 온도헤르는 45년전 승리했던 전투를 생각하며 적들이 북쪽에서 쳐들어올 것이라 생각하고 막 검은 문을 지나고 있었다. 또 외조카 미노타르가 우익부대, 당시 도르엔에르닐[55]의 제후 아드라힐이 좌익부대를 이끌며 뒤를 따르고 있었는데 이들은 다고를라드에서 비로소 그들의 자리를 잡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전차몰이족은 룬해에서 집결한 뒤 로바니온과 칸드의 군대와 합류하여 곧장 서진한 다음 곤도르의 측면을 공격하였다. 이에 전열이 무너진 온도헤르의 군대는 급히 우측으로 방향을 돌려 맞섰고 후미에 있던 미노타르에게 자신의 좌측을 지원하라는 전령을 보냈다. 하지만 온도헤르는 중무장한 기병대와 이륜 마차들의 돌격에 대비할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호위대와 기와 함께 급히 낮고 둥근 언덕 위에 자리를 잡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무시무시한 공격이 그 기를 향해 퍼부어져 그 기는 노획되었고 그자신과 호위대 그리고 맏아들이었던 아르타미르가 전사하였다. 그 후, 이들은 곤도르군의 전열 깊숙히 질주하여 대혼란을 일으켰고 많은 자들을 죽음의 늪까지 몰고 가서 대부분 전멸시켰다.

이제 왕의 외조카 미노타르가 지휘권을 잡았다. 전차몰이족의 주력부대가 다가오고 있었으므로 온도헤르를 전사시킨 기병대와 이륜 마차들은 퇴각하였고 그 사이 그는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먼저 그는 자신의 기를 세워, 가까이에 있는 중앙부대의 남아있는 사람들과 자신의 관할에 있는 자들을 재집결시켰다. 그 후, 자신의 후위에 있던 좌익의 아드라힐에게 전령을 보내 당장 후퇴할 것을 명하고, 자신은 안두인 강 동쪽에서 가장 좁은 지역인 카이르 안드로스와 에펠 두아스 사이까지 후퇴하여 그곳에 방어선을 치고 미나스 아노르로 가는 길을 최대한 방어하려고 했다. 이 후퇴의 시간을 벌기 위해 미노타르는 몸소 후외대를 결성하여 전차몰이족의 전진을 저지해보려고 했다. 또한 아드라힐에게 남쪽의 에아르닐을 찾아 이 재앙과 현재 상황을 전하도록 명했다.

또한 미나스 아노르에 있는 둘째 왕자 파라미르에게도 급보를 보내려는 찰나, 에오세오드의 군사들이 방어선에 합류하여 그가 전사하였음을 알렸다.[56] 비록 이실리엔의 땅은 전차몰이족에게 익숙하지 않아 곤도르에게 유리한 상황이었으나, 이마저도 얼마 되지 않아 곤도르군이 친 방어선이 수적으로 우세한 전차몰이족의 주력부대의 돌격 앞에 무너져 적의 손에 떨어졌고 미노타르도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후위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아드라힐을 찾아 남쪽으로 달아난다. 북부 이실리엔까지 들어와 진격을 멈춘 전차몰이족들은 진지를 차리고, 두 차례의 완승에 축하연을 열었다.

하지만 곤도르의 군대가 모두 전멸한 것은 아니었다. 남부전선에 있던 에아르닐은 군대를 이끌고 와서 포로스강을 건어 근처의 하라드와 칸드의 연합군을 전멸시키고, 급히 북쪽으로 올라오면서 후퇴하던 군사들을 모았다. 그리고 성급하게 곤도르의 멸망을 자축하던 그들의 캠프를 기습하여 대부분 전멸시키고, 달아나는 이들도 쫓아와 죽음늪에서 모두 죽이니, 연합군은 죄다 몰살되었다. 하라드와 칸드는 이 패배로 치명타를 입었고 더 이상 곤도르를 함부로 침공하지 못했다. 이후 곤도르는 멸망의 위기를 간신히 모면하게 되었다.

4.4. 아르노르 멸망, 미나스 이실의 함락과 왕가의 단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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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노스트 전투[57] 곤도르의 에아르누르
전차몰이족과의 전쟁으로 곤도르는 온도헤르 왕과 두 왕자마저 죽어 직계혈통이 끊어졌고 이에 이실두르의 직계후손이자 북왕국 아르노르의 적통을 이은 아르세다인 왕국의 왕자였던 아르베두이는 온도헤르의 사위로서 곤도르의 왕권을 요구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 곤도르를 대신 통치하고 있던 후린 가문의 섭정 펠렌두르가 우리는 아나리온의 후손이 아니면 왕위에 올릴 수 없다고 단칼에 거절해버렸다. 이에 아르베두이는 곤도르는 대왕 엘렌딜에서 시작했으며, 그가 두 아들에게 통치를 위임한 것이고, 또 그가 죽은 후 대왕 이실두르아나리온의 아들에게 통치를 위임한 것뿐이지, 왕권을 양도하거나 엘렌딜의 왕국을 쪼개려고 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누메노르의 후손으로서, 남자든 여자든 제일 가까운 친족이 후계자가 되는 누메노르의 법도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섭정 펠렌두르에게 아르베두이의 항변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고, 펠렌두르는 결국 온도헤르 왕의 7촌 조카뻘 되는 친척이자 전차몰이족과의 전쟁에서 큰 공적을 세워 사람들의 추앙을 받던 에아르닐을 왕위에 올렸다. 사실 섭정의 결정은 좀 복잡한데, 누메노르의 옛 법도를 따라 여성의 왕위계승이 인정되었다면 섭정은 그의 아내 피리엘의 계승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어서 피리엘의 남편이었던 아르베두이가 곤도르의 왕이 되는 것을 막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섭정은 곤도르의 왕은 아나리온의 후손이여야 한다는 법칙에 준해 아르베두이의 왕위계승을 거부했다. 누메노르 멸망 이후 누메노르의 문화를 이어받은 두네다인들은 대부분 가부장적인 계승을 선택했고 곤도르의 왕가도 계속 그렇게 이어져 왔으니 섭정이 억지를 부린 거라곤 할 수 없었다. 섭정의 결정엔 예전 친족분쟁으로 나라를 말아먹을 뻔 한 경험이 있는 곤도르에 또다른 왕위계승 문제를 만들기를 피하고 싶었다는 이유도 있었다. 또 왕과 먼 친척이기는 하지만 엄연히 온도헤르 국왕의 방계혈족인 에아르닐 2세가 두눈뜨고 살아있었기에 굳이 먼 북왕국 아르세다인의 아르베두이에게 왕권을 넘기지 않은 것이다.

결국 아르베두이의 요구는 묵살되고, 에아르닐 2세가 곤도르 왕국의 제 32대 국왕에 올랐다. 그는 직접 아르세다인에 사자를 보내 자신은 엘렌딜 이래 오랜 역사를 이어온 아르노르곤도르의 불화를 원치 않으며, 필요하면 모든 협조를 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미 북왕국 아르노르를 다스리고 있던 아르베두이도 곤도르 왕위에 대한 그리 강한 집착은 없으므로 그냥 넘어갔지만, 그의 주장은 훗날 그의 후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1973년에 아르베두이는 위기를 감지하고 곤도르에 원군요청을 하게 된다. 이에 에아르닐 2세는 아들 에아르누르를 함장으로 하여, 파견이 가능한 모든 군대로 대함대를 구성한 후 회색항구로 파견하였다.[58] 하지만 이듬해에 원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앙마르에서 쏟아져 나온 대공세가 시작되었고 치열한 공방전 끝에 아르세다인 왕국의 수도인 포르노스트는 결국 함락되고 말았다. 아르세다인의 국왕 아르베두이는 북부언덕에서 저항했지만 결국 북부의 포로켈로 피신할 수 밖에 없었다. 1975년 3월, 키르단은 자신에게 도망을 온 아르세다인의 전령에게 소식을 듣고 아르베두이를 구출하기 위해 배를 보내지만 아르베두이가 탄 배는 빙산에 부딪혀 침몰하였다.[59] 결국 아르베두이가 탄 배는 빙산과 부딪쳐 침몰하였고 그가 가지고 있던 포르노스트와 아몬 술의 팔란티르도 함께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만다.

한편 아르베두이 국왕이 바다에 빠져 사망한 이후에야 뒤늦게 도착한 곤도르의 대함대는 아르세다인의 잔존세력, 에리아도르 지역의 요정들이 보고 경악할 정도로 엄청난 규모였다. 그 당시의 기록으로는 포를론드, 하를론드, 미슬론드까지 세 개나 되는 항구를 배들이 가득 채웠는데도, 정박하지 못해 기다려야 했던 배들이 부지기수였다고 전해진다. 이에 고무된 키르단은 린돈[60]의 요정군대와 남아있던 북부의 두네다인을 모두 모았고 에아르누르의 군대에 도중에 참전한 호빗들로 구성된 궁병들까지 더해 엄청난 대군을 이끌고 동쪽으로 진군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적군에게 점령당한 포르노스트 인근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포르노스트 서쪽 평원에서 벌어진 이 대전투에서 압도적인 화력을 가진 곤도르 기병대의 후방공격으로 앙마르의 군대가 대참패하면서 결국 카른둠으로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도착하기 전에 에튼황야에서 에아르누르가 이끄는 곤도르의 기병대가 그들을 따라잡았고 남쪽에서도 임라드리스에서 나온 글로르핀델의 기병대가 이들을 공격하였다. 이에 남은 앙마르군은 또 다시 크게 패했고 마침내 전멸할 위기에 놓이자 앙마르의 마술사왕이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61] 친히 전장에 나선 마술사왕을 본 이들은 모두 겁을 먹었다. 마술사왕이 특유의 괴음을 지르며 에아르누르에게 흑마를 달려 덤벼드니, 에아르누르는 물러서지 않고 싸우려고 했지만 그가 탄 말이 겁을 먹어 주인을 태운 채 달아났다. 이에 마술사왕은 고약하게 비웃지만 글로르핀델이 백마를 타고 나타나니 그의 주위에 감도는 강력한 기운에 마술사왕은 어둠 속으로 도주하였다. 한편 에아르누르가 돌아와 그를 쫓으려 하나, 글로르핀델은 그의 운명은 인간 남성의 손에 달려있지 않다며 추적을 말렸지만[62] 에아르누르는 아까 당한 불명예를 씻고 싶어 분을 참지 못했다.[63]
1977년 경에 에오세오드 족[64]은 거주하고 있던 창포벌판과 바우바위 사이의 원래 살고 있던 지역이 비좁았던 관계로 새로운 거주지를 찾고 있었다. 이때 마침 북쪽에서 앙마르와 그를 이끌던 마술사왕이 무너진 소식을 듣고 에오세오드 족은 모든 백성을 이끌고 저 멀리 북쪽에 새로운 정착지를 건설하였다. 곤도르와의 관계가 끊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곤도르는 위급할 때 이들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한편 북쪽에서 패퇴해 도망친 마술사왕은 본거지인 모르도르로 돌아가 세력들을 규합한 뒤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곤도르의 미나스 이실을 공격하였다. 미나스 이실의 주민들은 2년 동안 방어했지만 그들을 도우러 올 군대는 존재하지 않았고 결국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65] 미나스 이실을 함락시킨 마술사왕은 이 성을 미나스 모르굴[66]로 개명하고 자신의 성으로 삼아버렸다. 미나스 이실의 함락으로 이 곳에 있던 팔란티르는 사우론의 손에 들어가버렸고, 이 팔란티르를 통해서 사우론이 곤도르 내부를 염탐할 것을 크게 우려한 에아르닐 2세는 곤도르가 보전하고 있던 나머지 팔란티르의 사용들마저 금하게 된다. 대신 백색산맥 지대에 아몬 딘을 비롯한 거대한 봉화대를 설치하였으며 아노리엔 지역을 보호하기 위해 거대한 방벽인 람마스 에코르를 건설하였다.

2043년, 에아르닐 2세가 죽고 아들 에아르누르가 곤도르의 32대 왕이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마술사왕은 68년 전 에튼황야의 대결에서 에아르누르의 말이 마술사왕의 앞에서 도망쳤던 사건을 비웃으며 그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마술사왕의 조롱에 분노한 에아르누르는 출전하려 하지만 섭정 마르딜의 만류로 참았다. 대신 미나스 모르굴에 대항한다는 의미로 미나스 아노르를 미나스 티리스[67]로 개명하였다. 에아르누르는 섭정 마르딜의 필사적인 만류 때문에 참기는 했지만, 이를 절대 잊지는 못했다. 2050년에 마법사 군주는 다시 도발을 해오자 이에 참지 못한 에아르누르는 미나스 모르굴로 향한 후 소식이 끊겨버렸다.[68] 하지만 여기에서 일어난 문제가 있었으니, 에아르누르가 마술사왕을 치러 떠나기 전에 자손을 남기지 않았을 뿐더러 가까운 친족마저도 없었다는 점이었다. 거기에 나머지 왕족들은 오랜 내란으로 많이 죽었고 남은 왕족들은 댓수가 멀었고 다른 민족들과 혈통이 섞였으며 무엇보다 누구나 인정할 만한 적합한 계승자가 없었다. 정당한 계승권을 가진 후계자가 드러나지 않자, 결국 곤도르는 마르딜을 시조로 하는 섭정가문이 대리통치를 하는 기묘한 국가체제로 변화한다.

이후 섭정의 후계자들은 왕이 돌아올 때까지 왕의 권리와 의무를 대리하여 수행하게 되었다. 하지만 통치 섭정은 오직 국왕만이 앉을 수 있는 옥좌에 앉지 못하고[69] 왕관과 홀을 사용하지 못하였고 대신 섭정의 권력을 나타내는 흰 봉을 사용하게 되었다.

후린 가문이 왕실을 몰아낸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70]

4.5. 통치 섭정의 시대

곤도르를 통치하게 된 섭정 가문인 후린 가문은 미나르딜 왕의 섭정이자 누메노르 귀족 후손이었던 에뮌 아르넨의 후린이 시조였다. 원래 섭정은 로멘다킬 1세가 만든 직위로, 세습이 아니었으며 왕족을 임명했다. 예를 들면 나르마킬 1세는 자신의 조카 미날카르를 섭정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미나르딜 왕은 귀족이었던 후린을 섭정으로 선택했는데 마르딜 이전에는 그냥 조언자 정도의 섭정이었다. 그러나 에아르누르 왕이 실종되고 왕위가 공석이 되면서 마르딜 때부터는 왕에 적합한 자가 돌아올 때까지 권력을 대행하는 '통치 섭정'이 되었다. 물론 그 후 부자 또는 형제, 조카 등 친족 계승이 이루어지고 세월이 흐르면서 본래 의미는 퇴색하고 실상 왕과 다를 바가 없는 존재가 되었다. 따라서 정확히 통치섭정으로서는 후린의 후손 마르딜 보론웨가 시조였다.

곤도르의 섭정들은 즉위할 적에 모두 이실두르의 정당한 후계자가 돌아온다면 무조건 그에게 왕위를 전달해줄 것을 맹세하고 즉위했다. 그러나 이실두르의 후계를 자처할 만한 정당성을 지닌 인물이 오랜 기간 동안 나타나지 않으면서 사실상 섭정이 곤도르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섭정들은 거의 왕과 맞먹는 권력을 누리면서 가문 대대로 영광과 명예를 누렸다. 하지만 그건 섭정 가문 내의 일이었고, 왕이 돌아올 때까지 섭정들은 어려운 상황을 헤쳐나가야만 했다. 서쪽에서는 왕조가 끊긴 것을 안 던랜드인들이 충성 맹세를 저버렸고 남쪽에서는 움바르 해적들이 출몰하고 있었으며 동쪽에서는 모르도르와 동부인들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태였다. 게다가 혈맹이었던 에오세오드족은 저 멀리 북쪽으로 이동하여 소식이 끊긴지 오래였기 때문에 곤도르는 사실상 고립된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왕통이 단절된 후 왕위를 노린 잦은 변란으로 섭정 통치 하의 곤도르는 차츰차츰 기울기 시작한다.

곤도르는 첫 통치 섭정인 마르딜 보론웨부터 26대 섭정 데네소르 2세 사이까지 24명의 섭정들이 연이어 집권했다. 초대 통치 섭정 마르딜 보론웨 이래로 8대 섭정 디오르까지는 불안불안한 평화가 지속되며 별다른 사건이 터지지 않았다. 디오르가 후사를 남기지 않고 사망하자 디오르의 여동생 리안의 아들 데네소르 1세가 새로운 섭정직에 올랐다. 곤도르는 데네소르 1세의 시대에 새로운 악에 직면한다. 2475년에 모르도르에서 나온 대규모의 우루크 군대가 이실리엔을 휩쓴 다음 오스길리아스를 공격하여 함락시킨 것이다. 당시 통치 섭정이었던 데네소르 1세의 아들 보로미르[71]가 이를 격퇴하고 이실리엔까지 회복하는 데에는 성공하였으나, 하지만 곤도르의 피해도 워낙 커서 오스길리아스는 완벽하게 황폐화되었고 안두인 강을 가로질렀던 석조 다리도 파괴되었다. 게다가 승리를 이끈 보로미르 자신도 나즈굴과의 전투 도중 부상을 입었고, 이 부상으로 인하여 후에 섭정에 오른지 12년 만에 결국 사망하였다.[72]

4.5.1. 곤도르와 로한의 우정

2489년에 보로미르가 나즈굴과의 전투에서 입은 상처가 악화되어 사망하자 뒤를 이어 키리온이 통치 섭정으로 즉위했다. 그의 재위 시기에 곤도르는 크나큰 위기에 처한다. 2501년에 전차몰이족의 일족인 발크호스 부족이 동부에서 몰려와 북부인들을 학살하고 이들을 내몬 다음 로바니온을 차지한 것이다. 또한 돌 굴두르의 지원을 받아 창포벌판의 남부 안두인 계곡까지 모두 황폐화 시키면서 곤도르를 궁지로 몰아넣는 데에 성공하였다. 2510년에 로바니온을 점거한 발크호스 부족이 곤도르로 남하할 움직임을 보이고 안개산맥의 오르크들도 위협적인 움직임을 보이자 통치 섭정 키리온은 과거에는 혈맹이었지만 지금은 저 멀리 북쪽으로 이동한 에오세오드족에게 구원을 요청하기로 한다. 에오세오드족에게 구원을 청하는 것은 돌 굴두르의 어둠지역을 통과해야하는 어려운 임무였기에, 키리온은 여섯 명의 자원자를 모집하여 하루에 2명씩 짝을 지어 밀사를 파견했다.

총 6명의 밀사들이 에오세오드족을 향해 구원을 청하러 떠났으나, 오직 한 명만이 포위망을 뚫는데 성공하였다.[73] 3월 25일에 사신은 에오세오드 부족의 거주지에 도착하여 에오세오드의 지도자인 에오를에게 전갈을 전했고, 에오를 또한 곤도르가 무너지면 에오세오드족도 안전하지 못할 것이라 판단, 곤도르를 돕기로 결정한다. 4월 6일, 에오세오드는 대략 7천명 정도의 모든 기병대를 이끌고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돌 굴두르에 도달했을 무렵, 돌 굴두르의 사악함에 두려움을 느끼고 망설였지만 갈라드리엘이 새하얀 안개로 어두움을 밀어내며 그들을 도와서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한편 곤도르에서 원군만을 간절히 기다리던 키리온은 에오세오드 부족의 군대가 와줄지 회의를 느끼며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로한 고원을 지날 무렵 이미 안두인 강을 건넌 발크호스족이 후방에서 대거 출현하여 퇴로를 끊어버렸고 북쪽의 맑은림강을 넘어 곤도르 군대를 켈레브란트 벌판까지 밀어붙였다. 게다가 북쪽에서는 안개산맥의 오크들이 대거 출현하면서 곤도르군을 사이에 밀어넣으며 앞뒤가 모두 막힌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키리온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던 바로 그 순간, 발크호스 군대의 후방에서 에오를의 기병대가 기습공격을 펼쳤고 발크호스는 크게 패해 달아났다. 에오를은 이들을 마저 추격하여 칼레나르돈 평원에서 발크호스족 군대를 대파하고 곤도르 병사들과 키리온을 구해내는 데에 성공한다. 모든 이들은 키리온이 에오를을 데리고 가 대연회를 베풀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에오를에게 석달 후 이곳에서 다시 만날것을 약속하고 빠르게 미나스 티리스로 돌아간다.

석달 후, 키리온은 에오를과 함께 성산[74]에 올라 이미 숱한 전쟁으로 인하여 인구가 많이 줄어있었던 칼레나르돈의 소유권을 에오를에게 양도한다고 선포하였다. 이에 에오를은 칼레나르돈에서 살 것이며 곤도르와의 우정은 영원하고 곤도르의 적은 곧 그들의 적이라고 에오를의 맹세를 선포하며 화답한다. 키리온과 에오를은 함께 퀘냐로 이 맹세는 누메노르의 영광과 엘렌딜의 신념이 함께 할 것이고 발라일루바타르가 보살필 것이라고 맹세했고,[75] 이렇게 곤도르와 로한의 동맹은 시작된다.

이후 곤도르의 통치 섭정직은 할라스-후린 2세-벨렉소르 1세-오로드레스-엑셀리온 1세로 이어졌다. 엑셀리온 1세는 미나스 티리스에 백색탑을 재건하였고, 이 이래로 이 탑을 '엑셀리온의 백색탑'이라고 불렀다. 그에겐 후사가 없었으므로 벨렉소르 1세의 딸인 모르웬의 손자 에갈모스가 그 뒤를 이어 통치 섭정이 되었다. 에갈모스 다음 섭정으로 즉위한 베렌 시절에 곤도르와 로한은 동시에 크나큰 시련을 맞았다. 2758년에 움바르와 하라드인들로 구성된 해적들이 곤도르 해안에 상륙해 산맥을 넘어 로한으로 쳐들어온 것이다. 이에 던랜드인들과 동부인들까지 움바르, 하라드인들과 합세하여 공격하니 수적 열세에 몰린 로한은 대패하고 수도 에도라스를 빼앗긴 채로 남쪽요새[76]으로 후퇴하여 농성을 벌였다.

그러나 곤도르 내부로 들어온 해적들을 먼저 물리친 곤도르 측에서 섭정 베렌의 아들 베레곤드를 로한에 파견하여 해적을 격파한 다음, 백색산맥 동서로 원군을 보내 로한에 있던 던랜드인들과 동부인들을 큰 패배를 안겨주어 몰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보로미르 이래 곤도르에서 가장 위대한 장수였던 베레곤드가 2763년, 섭정직을 물려받은 뒤 곤도르는 예전의 위세를 서서히 찾아가는 듯 했다.[77] 그러나 베렌의 아들인 벨렉소르 2세가 죽자 미나스 티리스의 백색 나무도 시들어 죽고 말았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새로운 묘목을 구할 수 없었고 나무는 국왕이 귀환할 때까지 죽은 채로 방치되었다. 벨렉소르 2세 후임 섭정인 투린 2세 때에 사우론의 세력이 다시 준동하기 시작했다. 모르도르의 오르크들이 곤도르 내부에 침범해왔고 이실리엔의 주민들은 모두 모르도르의 군대를 피하여 안두인 대하 너머의 서쪽으로 이주했다. 투린은 이실리엔에 '일몰의 창' 헨네스 안눈을 비롯한 많은 비밀 은거지들을 만들었고 아노리엔 방비를 목적으로 카이르 안드로스 섬을 요새화 했다.

2885년에는 남쪽의 하라드인들이 남곤도르를 점령하고선 포로스 강을 건너 이실리엔을 공격해왔다. 이에 로한의 국왕 폴크위네는 쌍둥이 왕자 폴크레드와 파스트레드를 보내 곤도르를 지원했다. 곤도르, 로한 연합군은 포로스 강의 여울목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두 쌍둥이 왕자는 전사하고 말았다. 로히림은 두 왕자를 한 무덤에 함께 묻었는데 이 무덤 '하우드 인 과누르'는 오랫동안 그 강변 위에서 곤도르를 지켜왔다. 투린 2세는 그에 대한 보상으로 상당량의 황금을 폴크위네에게 보내 위로했다. 투린의 아들 투르곤의 시대에 '운명의 산' 오로드루인이 다시 화염을 내뿜었고 사우론은 모르도르로 재입성하여 자신의 존재를 공공연히 알렸다. 투르곤이 죽자 사루만은 명목상으로는 아직 곤도르의 소유였던 아이센가드를 자신의 소유로 하고선 점차 요새화했다.

4.6. 반지전쟁 시기

모르도르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25대 섭정 엑셀리온 2세는 영토의 수비를 강화하고 수많은 인재를 자신의 휘하로 끌어모았다. 그는 특히 '별의 독수리'라 불린 소롱길이란 이의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그는 로한의 셍겔 아래에서 일하다 엑셀리온에게 온 자였다. 누구도 그의 정체를 알지 못했지만 소롱길은 굉장히 능력이 뛰어났고, 수많은 곤도르인들이 그를 믿고 따랐다. 움바르의 해적들이 후에 큰 위협이 될 것을 예감한 소롱길은 소규모의 함대로 움바르에 잠입하여 수많은 해적선들을 불태우는 등 큰 성과를 올렸으나, 펠라르기르까지 온 후, 그는 많은 이들이 만류하는데도 불구하고 작별인사의 메세지를 남기고 북쪽으로 떠났다. 이렇게 한 이유는 소롱길 스스로 유능했던 데네소르 2세와의 충돌을 피하고 싶었고 아직 능력도 부족한 자기 자신을 숨기고 싶어했기 때문이었고, 결국 소롱길은 미나스 티리스로 돌아가지 않고 곤도르를 떠났다. 오직 엑셀리온 2세의 아들 데네소르만이 그가 북왕국의 혈통, 이실두르와 엘렌딜의 후손인 아라소른의 아들 아라고른 2세라는 것을 알아냈고 그가 간달프와 함께 자신의 지위를 찬탈하려 한다 생각하며 시기했기에 그가 떠나는 것을 아쉬워하지 않았다.

2984년에는 마침내 데네소르가 26대 통치 섭정이 되었다. 그는 오랜 전란으로 폐허가 된 오스길리아스를 수복하여 요새화하였고 끊어진 다리도 재건하였으며 거대한 방벽 람마스 에코르도 보수하였다. 데네소르는 돌 암로스의 영주 아드라힐의 딸 핀두일라스를 아내로 맞이했다. 그녀는 한 송이의 꽃처럼 아름다웠지만 모르도르의 공포에 떨며 바다를 그리워하다 결혼한 지 12년만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녀를 애틋하게 사랑하던 데네소르는 아내가 죽자 전보다 말수가 더 적어지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자신의 의지력을 자신한 데네소르는 미나스 이실의 팔란티르가 적의 손에 넘어갔던 에아르닐 2세의 시대 이후 사용이 금지되었던 미나스 티리스의 팔란티르를 들여다 보았다. 그 결과 그는 자신의 영토 안팎의 일들에 대해 소상히 알게 되었지만 사우론과의 의지력 대결로 빠르게 노쇠하였다. 그의 마음 속엔 오만과 절망만이 커져갔으며 마침내는 백색탑과 바랏두르 사이의 대결만을 유일한 것으로 여기고 자신을 섬기지 않는 모든 세력을 불신했다.

데네소르에겐 핀두일라스가 낳아준 두 아들이 있었다. 보로미르와 파라미르는 둘 다 용모는 부친을 닮았으나 심성은 전혀 달랐다. 보로미르는 과거 에아르누르 왕처럼 학문을 탐구하는 것 보다는 무예를 훨씬 더 좋아했고 자존심이 굉장히 강했다. 데네소르는 자신과 많은 점에서 다른 그를 더 편애했다. 한편 파라미르는 형과는 달리 온화한 성품에 학문과 음악을 더 사랑했고 부친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마음을 날카롭게 읽어낼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그 능력으로 그들을 경멸하기보다는 측은하게 여겼다. 파라미르는 특히 회색의 간달프를 잘 따랐는데 미스란디르를 불신하던 데네소르는 그를 '마법사의 제자'라 하며 경멸했다. 항상 형에게 비교되고 아버지로부터 차별 받았지만 파라미르와 보로미르의 우애는 매우 돈독했다. 반지전쟁 동안 보로미르는 반지원정대의 일원으로 참가했고 두 호빗 동료를 구하려다 목숨을 잃었다.

통치 섭정의 시대 이래 최대 규모의 전투였던 펠렌노르 평원의 전투가 벌어지던 날, 모든 희망을 저버린 데네소르는 마침내 이성을 잃고 왕과 섭정들의 무덤 라스 디넨에서 아들 파라미르와 자신을 함께 화장하려 하였으나 간달프의 간섭으로 인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혼자서 불속의 재로 사라졌다. 불가능할 것 같던 펠렌노르 평원의 전투에서 결국 곤도르는 승리를 거두었고, 이어 아라고른과 그의 7천명의 군대는 정말 죽을 각오를 하고 모란논으로 향했다. 치열하게 싸우는 도중 그들이 내건 신의 한 수가 성공하였고 사우론은 패망하고 만다. 절대반지가 파괴되고 바랏두르도 붕괴함으로써 사우론은 영원히 가운데땅에서 사라졌고, 곤도르엔 거의 1,000년 만에 정당한 국왕이 돌아왔다. 이로써 통치 섭정의 시대는 공식적으로 막을 내린다. 데네소르의 차남 파라미르는 엘렛사르 왕의 섭정이자 이실리엔의 영주로 남아 왕을 섬겼다.

4.7. 제4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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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귀환하자 곤도르에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3019년 5월 1일, 엘렛사르 텔콘타르 왕의 대관식이 열렸고 엘렛사르 왕은 아르노르와 곤도르 재연합왕국의 초대 국왕이 되었다. 민돌루인 산 남쪽 기슭에서 흰 나무의 묘목을 발견한 엘렛사르 왕은 시든 나무를 라스 디넨에 옮겨 심고 새 묘목을 미나스 티리스의 정원에 심었다. 한가운뎃날, 아라고른은 엘론드의 딸 저녁별 아르웬 운도미엘과 결혼하였고 이로서 역사상 세 번째로 요정과 인간의 혼인이 이루어졌다. 그들은 아들 엘다리온을 낳았고 이로써 오랫동안 끊겼던 반요정의 혈통이 다시 가운데땅에 등장하게 된다. 제 4시대 120년 3월 1일, 엘렛사르 왕은 210세의 나이로 마침내 세상을 떠났고, 그의 뒤를 이어 아들 엘다리온이 재연합왕국의 2대 왕이 되었다. 엘렛사르 왕이 죽자 저녁별 아르웬 왕비는 조용히 자식들과 작별하고 로리엔으로 가 그곳에서 쓸쓸히 인간들에게 주어진 선물인 죽음을 맞이하였다.

엘렛사르 왕의 치세 아래 곤도르는 로한을 제외하면 곤도르의 전성기의 국토를 포함한 과거 모든 영토를 회복했다. 에레보르 및 데일과는 평화협정과 동맹을 맺었고, 하라드와 동부에서도 우호적인 이들과는 기꺼이 평화협정을 맺었으며, 누른의 자유민들은 자치령으로서 곤도르의 이름으로 보호되었다. 다만 백색나무의 안정적인 성장을 위해 하라드의 먼 벌판과 룬 내해 너머에서 직접 엘렛사르 왕이 에오메르 왕과 함께 출정하여 전투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평화를 원하는 이들과는 평화협정을 맺되 적대적인 이들에게는 무력을 주저하지 않았다. 엘렛사르 왕 사후 곤도르에서는 엘다리온 왕에게 통치권이 이어졌으며, 이후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5. 역대 지도자들

5.1. 곤도르의 역대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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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곤도르의 역대 섭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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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텔콘타르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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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주요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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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노리엔
(오스길리아스 | 미나스 티리스 | 하를론드)
이실리엔
(오스길리아스 | 미나스 이실 | 카이르 안드로스 | 헨네스 안눈 | 에뮌 아르넨)
라메돈
(칼렘벨 | 에스링 | 링글로 계곡)
롯사르나크
(임로스 멜루이)
레벤닌
(펠라르기르)
벨팔라스
(돌 암로스 | 에델론드 | 린히르 | 에스링)
안팔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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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경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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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바드 | 던랜드 | 론드 다에르)
분쟁지역
남곤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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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레나르돈
(아이센가드)
고르고로스 고원
(두르상 | 키리스 웅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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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행정구역

7. 역사적인 유사점

동로마 제국과 유사한 점이 매우 많다. 톨킨 옹 본인도 미나스 티리스가 비잔틴풍 도시라고 밝힌 적 있다. 로마 제국에서 서로마 제국동로마 제국이 분리되었고 서로마 제국이 몰락하고 난 뒤 동로마 제국이 남은 것처럼 엘렌딜의 초기 왕국에서 아르노르와 곤도르가 분리되었고 아르노르가 몰락하고 난 뒤 곤도르가 남았다. 위치적으로도 비슷한데 동로마 제국이 남쪽과 동쪽의 외세 민족으로부터 유럽의 방파제 역할을 한 것과 마찬가지로 곤도르도 마찬가지로 남쪽과 동쪽의 민족들로부터 가운데땅의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한 번도 함락된 적 없다는 미나스 티리스의 7겹 성벽은 대포가 등장하기 전까지 난공불락이었던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떠올리게 한다.[83] 영화판에서도 이 점을 반영하여 미나스 티리스의 비잔틴식 건축양식을 볼 수 있고 곤도르 사람들의 복식이 동로마 제국의 것과 유사하다.

이집트에서 따온 것들도 많은데 톨킨은 곤도르의 왕관을 이집트의 헤젯 왕관에서 따 왔다고 한다. 영화에서도 이를 반영하여, 곤도르군의 투구를 보면 키가 크고 위가 뾰족한 헤젯이 연상된다. 또 옛날에는 이집트가 아틀란티스의 식민지였다 카더라는 설도 있었는데 톨킨이 참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누메노르가 아틀란티스에 해당된다는것을 보면 어느정도 들어맞는다. 그밖에도 고트족. 랑고바르드족의 역사도 상당수 섞여있다.

여담으로 20세기에도 국왕 없이 섭정만 있었던 나라들이 있었다. 프란시스코 프랑코스페인국호르티 미클로시헝가리 왕국.


[1] 3시대 동안 곤도르의 영토 변화가 나타난 지도. 푸른색으로 표시된 지역이 곤도르이다. 가장 작았을 때가 처음이며, 마지막 노란색 부분은 반지전쟁을 끝내고 곤도르의 왕으로 정식 즉위한 아라고른이 확장한 영토다. 분홍색은 제3시대 중반에 에오세오드족에게 양도하여 세워진 로한이며, 초록색 지역은 그보다 앞서 곤도르 내전기 시대에 왕위를 찬탈하고 폭정을 떨쳤던 카스타미르와 그 후손들이 장악한 곤도르를 보여준다. 해당 시기 파란색은 북방으로 쫓겨간 엘다카르 왕과 그 동맹들의 세력권을 보여준다.[2] 서부인(두네다인)과는 비슷하지만 약간 구분되는 개념이다. 본래 신실파 세력이 제2시대 말 도래하기 전까지 곤도르 땅에는 할레스 가문을 기원으로 하는 선누메노르인을 비롯한 다양한 중위인간(Middle Men)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주로 백색산맥 기슭(특히 모르손드 계곡과 롯사르나크 일대), 안팔라스 일대의 중위인간 현지인들과 두네다인 귀족들이 통혼하면서 태어난 혼혈인들이 바로 곤도르인(Gondorian)이다. 이들 곤도르인들은 순혈 두네다인에 비해 키가 비교적 작고, 수명이 짧고, 피부색이 거무스름했다고(swarthier) 언급된다.[3] 전성기 영토는 대략 동로마의 두 번째 최전성기인 바실리오스 2세 연간, 제3시대 말의 영토는 제4차 십자군이 도래하기 직전인 알렉시오스 3세 연간과 엇비슷하다.[S] 신다린[Q] 퀘냐[R] 로한어[7] Land(땅). 'stone(돌)'을 의미하는 원시 요정어 어근 GONOD에서 파생된 gondō, 또는 gon-에서 비롯됐다.[8] Land(땅). 'land/hard/firm(땅/단단한/확고한)'을 의미하는 원시 요정어 어근 NDOR, 또는 'hard/tough(단단한/거친)'를 의미하는 원시 요정어 어근 DOR에서 파생된 ndorē에서 비롯됐다.[9] Stone/Rock(돌/바위)[10] Land(땅). 'Land/Hard/Firm(땅/단단한/확고한)'을 의미하는 원시 요정어 어근 NDOR, 또는 'Hard/Tough(단단한/거친)'를 의미하는 원시 요정어 어근 DOR에서 파생된 ndōro, 또는 ndorē에서 비롯됐다.[S] [Q] [13] South(남쪽)[14] Harbourage(안식처). 'Haven/Harbour(항구)'를 의미하는 원시 요정어 어근 LON에서 파생된 단어 lond(항구)와 추상 명사를 만드는 접두사 as가 결합해 파생된 단어이다.[15] Left-hand/South(왼손/남쪽). 'Left-hand/South(왼손/남쪽)'을 의미하는 원시 요정어 어근 KHYAR에서 파생됐다.[16] Harbourage(안식처). 'Haven/Harbour(항구)'를 의미하는 원시 요정어 어근 LON에서 파생된 단어 londë(항구)와 추상 형명사를 만드는 접두사 -ië가 결합해 파생된 단어이다.[17] 곤돌린의 뜻은 '바위의 노래'를 의미하는 퀘냐 온돌린데의 변형이며, 중의적으로는 '숨은 바위'를 의미하는 신다린이다. 물론, 둘이 이름이나 성격이 비슷하긴 하다.[18] 21대 섭정인 벨렉소르 2세가 사망했을 때 죽어버린 백색 나무의 모습이다. 이후 이 돌아오면서 새로운 묘목을 찾아내어 이 자리에 다시 심는다.[19] 미나스 티리스에 있는 왕들의 무덤[20] 참고로, 톨킨은 곤도르의 왕관을 이집트의 왕관인 헤젯(hedjet)에서 따 왔다고 한다. 영화에서도 이를 반영했는지, 곤도르군의 투구를 보면 키가 크고 위가 뾰족한 헤젯이 연상된다. 다만 투구를 뺀 갑옷 등의 나머지 복식은 동로마 제국의 것과 유사하다.[21] 결과적으로 이들은 곤도르에 막대한 피해를 끼쳤지만, 그 대가로 완전히 몰살당해 이후 동부는 반지전쟁 당시 사우론과 연합해 침공할 때를 제외하면 곤도르와의 대규모 전쟁을 수행할 능력을 잃어버리게 된다.[22] 펠렌노르 평원 전투 당시 동부 전역에서 보낸 군대는 1만이 조금 안 되었는데, 모란논 전투에서 오크들마저 도망갈 때 이 전투에서 패한다면 우린 다 끝장이라는 생각으로 끝까지 버틴 군대가 동부인 군대였다. 사실상 곤도르와 철천지원수를 지면서도 할애할 수 있는 전력은 그 정도가 다였으며, 이는 곤도르 국가멸망급 재앙이었던 전차몰이족 이후 동부가 곤도르를 단독으로 공격할 수 있는 전력 자체를 완전히 상실해버렸다는 것을 증명하는 셈.[23] 다만 너른골은 영화판에서 화려하게 묘사된 탓이 크다.[24] 마술사왕을 찌른 대가로 앓게 된 메리와 에오윈아라고른 2세가 직접 온 뒤에야 차도를 보였다.[25] 이들도 텔콘타르 왕조에선 엄연히 곤도르 소속이 된다.[26] 백조 기사단의 주를 이루는 누메노르 혈통은 일반적인 인간보다 모든 면에서 더 우위에 서 있다. 실제로 누메노르인은 말과 교감하는 수준의 승마술을 보유했다. 정작 제2시대의 누메노르인들은 말을 워낙 사랑해서 전쟁터에서 기병이라는 병종을 꺼렸지만, 제3시대에 이르러서 누메노르의 후손들은 기병으로서 대활약했다. 아라고른, 임라힐, 회색부대백조 기사단이 그 예이다.[27] 떠오르는 의 탑.[28] 저무는 태양의 탑.[29] 발리노르를 비추던 성목(聖木)인 텔페리온의 혈통을 받은 나무로, 신성한 나무로 여겨졌다. 요정들이 누메노르 왕국에게 친선의 선물로 텔페리온의 혈통을 이은 묘목을 선물로 준 것을 누메노르에서 대를 이어 키웠으며, 이후 이실두르가 누메노르를 탈출하면서 이 나무의 씨앗을 챙겨온 것이다.[30] 모르도르와 곤도르를 나누는 거대한 산맥.[31] 훗날 반지전쟁 시기에 간달프가 보던 기록이 바로 이것이다.[32] 이로 인하여 이실두르와 그를 호위하던 3명의 아들들이 모두 사망했다. 때문에 아르노르의 왕위는 이실두르의 넷째이자 막내인 발란딜에게 돌아갔다.[33] 사우론의 유혹에 넘어가 변절한 누메노르인들. 누메노르인들의 지혜와 피지컬이 일반 인간보다 더 뛰어났기에 배신한 누메노르인들은 굉장히 위험한 존재였다.[34] 곤도르 남쪽에 있는 지방. 굉장히 넓은 지방으로 인종은 중동 계열이나 흑인에 가깝다[35] 이는 아나리온 이래 2번째로 긴 재위 기간이었다. 가장 오래 재위한 국왕은 27대 국왕인 타론도르이다.[36] 이 시기에 처음으로 간달프가 곤도르를 방문한 것으로 추정된다.[37] 곤도르 동부 지역에 살던 인간 종족. 보통 몽골족과 비슷한 느낌의 부족이며, 나중에는 사우론에 충성하는 사악한 종족이다.[38] 반지의 제왕 영화에 나오는 거대한 두 석상이 바로 아르고나스이다.[39] 게다가 카스타미르가 아예 수도를 오스길리아스에서 펠라르기르로 천도하려 했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수도의 주민들은 완전히 그에게 진절머리를 내었다.[40] 과거 누메노르의 국왕인 황금왕 아르파라존은 이 움바르에서 사우론을 사로잡는 데에 성공했다.[41] 작품 내외로 "북부인들의 하등한 피가 누메노르 혈통의 곤도르인들과 점차 섞이면서 누메노르 출신들만이 가지고 있던 기나긴 수명과 뛰어난 지혜가 점차 희석되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곤도르인 전체의 자질이 저하되었다."라는 오해가 있지만 책에서 분명히 서술했듯이 북부인의 혈통이 섞이는 것과 곤도르에게서 누메노르의 축복이 점차 사라지는 것은 상관이 없다. 누메노르의 축복은 누메노르가 위치했던 엘렌나 섬에서 기인했던 것으로, 누메노르 자체가 침몰하자 그 축복도 서서히 사라지던 탓이다. 카스타미르를 비롯한 반란군의 순수혈통을 중시하는 명분은 그냥 편견이자 억지에 지나지 않는다.[42] 실제로 북부인의 혈통이 유입되기 전부터 역대 곤도르 국왕들의 수명을 헤아려보면 대가 내려갈수록 조금씩 줄어든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건 외래 혈통이 적게 유입된 아르노르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누메노르가 침몰하자마자 그 축복이 떠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아라고른에 대해 설명할 때 순수한 혈통에 대한 언급이 많은 것도 순수한 혈통이라 그 자질이 더 뛰어나다는 소리가 아니라 칭왕할 정통성이 강하다는 뜻이다. 애초에 아라고른 역시 엘다카르의 후손이기도 한 만큼 완전한 순수혈통도 아니다.[43] 참고로 미나르딜 국왕은 펠라르기르에서 카스타미르의 증손자 앙가마이테와 상가햔도가 지휘한 움바르의 해적들에게 살해되었다.[44] 애초에 여의도에 수도가 있었는데 관악산 밑으로 수도를 옮겼다고 생각해보자. 그럼 자연스럽게 북한산 쪽에 대한 관심도가 낮아지는 것은 당연하다.[45] 그렇지 않았다면 당장 쇠퇴해가는 곤도르로 쳐들어왔을 것이다.[46] 하지만 오래 가지는 못했다.[47] 전차몰이족의 모티브는 훈족이나 몽골 제국 정도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48] 하지만 이 전투에서 마르하리 국왕 또한 전사하고 만다.[49] 하지만 여전히 곤도르의 군대는 강력했고 전차몰이족들도 더이상의 진격을 못하여 로바니온 정복을 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50] 이미 그의 조부시기에 움바르는 곤도르 영토가 되었고 하라드인들은 내분이 일어나 있었다.[51] 당시 단일 국가를 유지하고 있던 곤도르와 달리, 북왕국 아르노르는 10대 국왕인 에아렌두르 사후 후계자들 간의 분열이 일어나 3개의 왕국으로 분리되었다. 수도인 안누미나스를 포함한 서쪽의 아르세다인, 북부 지역을 차지한 루다우르, 곤도르와 접한 남부를 차지한 카르돌란으로 나누어진 것이다. 이후 루다우르는 이실두르의 혈통이 끊어져 북쪽의 야만족이 쳐들어오면서, 카르돌란은 한때 곤도르도 휩쓸었던 대역병의 시련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지면서 결국 아르세다인만이 아르노르의 적통을 이었다.[52] 둘다 배후에는 사우론의 술책이 있었다.[53] 왕이 주요 전투에 나서고 왕위 계승자는 수도에 남는것.[54] 이 시기 아직 안두인강 북쪽에 세워둔 요새들은 잘 정비되어 있었고 적들의 도강을 충분히 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온도헤르에게는 어떠한 경고도 전해지지 않았고 이에 온도헤르는 느린 속도로 이동하게 되었다.[55] 이 지역은 돌 암로스가 있는 지역으로 곤도르 건국전부터 엘렌딜의 먼 친척들이 다스리던 지역이었다. 곤도르가 건국한 이후에도 이 지역은 여전히 이들의 자치령으로 남아있었다.[56] 곤도르의 국법으로 왕의 모든 아들이 모두 전쟁터에 나가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하지만 작은 아들 파라미르는 마치 반지전쟁 때의 에오윈 공주처럼 변장을 하고 전투에 참여하였고 죽음의 늪 쪽을 후퇴하다가 적들에게 포획되었다. 마르위니가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달려왔지만 결국 파라미르는 그의 팔에 안기어 죽었고, 그가 왕자라는 사실은 몸수색을 하다가 왕자의 인장을 우연히 발견하면서 알려졌다.[57] 말을 돌려 도망치는 마술사왕. 뒤에 요정 글로르핀델에아르누르가 보인다.[58] 허나 온도헤르 왕이 이끌던 주력의 소멸로 인한 피해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원군은 지체된다.[59] 원래 배가 떠나기 전에 포로켈 인들은 여름까지 기다린 후 떠나라고 조언했다고 한다.[60] 가운데땅 서쪽 끝단에 위치한 요정들의 소국[61] 사실상 발악에 불과했다. 앙마르 군대는 완전히 몰살당했기에 빡친 마술사왕만 덩그러니 남아 발악한 상황이나 다름없던 것. 세가지 재앙을 다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곤도르는 에리아도르의 인간과 요정족들이 처음 볼 정도로 거대한 군세를 원정군으로서 조직하고, 아르세다인이 수백년 동안 처절하게 싸워가며 쇠락해가고, 끝내 멸망당하고만 마국 앙마르를 단 몇 차례의 전투만으로 완전히 멸망시킬 정도의 국력을 보유했던 것이다. 더 대단한 점은 얼마 전 왕과 주력이 날아갔던, 피해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나라의 저력이라는 점이다. 곤도르의 엄청난 힘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62] 실제로 마술사왕의 운명은 인간 남성의 손에 있지 않았다. 펠렌노르 평원의 전투에서 마술사왕은 여자인 에오윈 공주에게 사망한다.[63] 이 사건은 훗날 곤도르의 왕계가 끊기는 계기가 된다. 이 때의 사건을 두고 마술사왕은 두고두고 에아르누르를 조롱했으며 결국 에아르누르가 실종되는 원인이 된 것이다.[64] 로바니온의 왕자 마르위니가 전차몰이족들의 침략 때 살아남은 로바니온의 잔존 세력들을 이끌고 바위섬 캐락과 창포벌판 사이의 안두인 골짜기에 정착했다. 이들의 후손을 에오세오드 족이라고 부른다.[65] 대단위 원정군을 보낼 능력을 가진 나라가 20, 30년만에 본토 방위가 안될만큼 나라가 막장이 될만한 큰 일은 없었다. 지원군이 포위망을 뚫지 못했다고 보는게 옳다고 본다.[66] 마술사의 탑이라는 뜻.[67] 감시의 탑[68] 왕관 등 왕의 상징물은 안들고 갔다는게 그나마 다행. 실종된 후 가묘처리되었으며 왕관은 라스 디넨의 에아르누르 왕 가묘 위에 놓여졌다. 영화에서 마지막에 아라고른이 쓰는 그 날개달린 왕관이다.[69] 영화를 보면 데네소르가 높이 설치돼있는 옥좌에 앉아있지 않고 그 아래에 놓여있는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70] 다만 해당 글은 노론음모론마냥 후린 가문이 모든 것의 흑막이라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친족분쟁 이후 왕이 다른 왕족들을 숙청한 공백을 타서 후린 가문이 세습섭정으로 성장했다는 부분까지는 그럴 듯하지만, 나머지는 근거가 없거나 부족한 억지에 가깝다. 예로, 왕이 존재하던 시절에 북부인을 중용하지 않은 이유는 국력이 강성한 것도 있지만, 곤도르인들이 누메노르 혈통이라는 오만함 때문에 다른 인간족과 사이가 나쁜 것도 있었다. 친족분쟁 뒤에야 이런 오만함이 줄어들었다지만 엄연히 존재했고, 이를 국가적 풍조를 누르고 로한이라는 동맹을 얻은 키리온과 후린 가문은 큰 업적을 세운 것이 맞다. 또한, 마르딜이 권력 찬탈을 목적으로 아르베두이의 즉위를 거부했다고 썼는데, 작중에서 마르딜과 여타 곤도르 귀족은 또다른 친족분쟁이 두려워서 에아르닐을 대신 즉위시켰다고 분명히 서술하고 있었다. (당장 후린 가문도 왕권을 행사하면서 즉위하지 못하는 이유도 친족분쟁에 대한 두려움 탓이다.) 마지막으로 에아르누르를 마르딜이 암살했다는 부분은 아무 근거가 없는 망상이다. 무엇보다 이실두르의 후손이 오랫동안 야인으로 산 이유는 후린 가문의 견제 때문이 아니라 이실두르의 후예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사우론에게 숨겨야한다고 엘론드가 조언했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반지의 제왕을 왕좌의 게임처럼 해석했는데, 두 작품이 속한 장르의 차이를 망각한 오류로 보인다.[71] 반지원정대의 그 보로미르와 동명이인이다.[72] 보로미르는 굉장히 용맹하고 고귀한 인물이었기에 심지어 마술사왕도 그의 재위기에는 함부로 곤도르를 침범하지 못했다고 한다.[73] 사신의 이름은 보론디르로, 에오세오드와 같은 북방인 혈통을 이어받아 승마에 능숙했다. 그는 켈레브란트 벌판의 전투에서 전사했다.[74] 로한어로 할리피리엔. 엘렌딜의 무덤이 있던 곳으로 로한의 건국 이후에 유해는 미나스 티리스에 이장하고 봉화대로 쓰이게 된다.[75] 그리고 반지전쟁 시기에 사루만에게 유린당한 로한발라 만웨의 사자이자 일루바타르가 부활시킨 간달프에 의해 다시 부활하게 된다.[76] 이 전투에서 로한의 왕 헬름은 홀로 괴력을 발휘해 싸우다가 동사한다. 그 이후 남쪽요새와 요새가 위치한 협곡은 헬름과 그가 분 나팔의 이름을 따 나팔산성과 헬름협곡이라 불리게 된다.[77] 한편 베렌은 2759년, 사루만에게 오르상크아이센가드의 원형구역을 내주었고 그로 인해 로한은 전쟁의 상처를 쉽게 회복하지 못했다.[78] 오스길리아스는 안두인 대하를 중심으로 동오스길리아스와 서오스길리아스로 나뉘며, 도시 한가운데의 거대한 다리 위에 왕궁이 있었다.[79] 여러가지 정황상 엘로스의 후손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80] 아름다운 히를루인 이라고 불리는 미남으로 펠렌노르 평원 전투에서 전사한다.[81] 엘렌딜 일파와 다른 누메노르 일파가 지배하고 있으며 잠시 곤도르의 산하에 들어갔으나 독립했다.[82] 북왕국 아르노르가 갈라지며 건국된 카르돌란의 영향 아래에 놓인듯 하다[83]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적 있으나, 육상의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돌파한 것이 아니라 바다 쪽 성벽을 돌파한 것이었다. 다만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도시 외곽을 보호하는 것이어서 각 층을 보호하는 미나스 티리스 성벽과는 차이점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