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 왕국의 역대 왕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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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어: Merovingian dynasty프랑스어: Dynastie mérovingienne
서게르만계 프랑크족이 세운 프랑크 왕국의 첫 번째 왕조로, 메로빙거(Merowinger) 왕조라고도 부른다.
481년 클로비스 1세의 집권이 메로베우스 왕조의 시작점이었다. 공식적인 왕조의 소멸은 754년이지만, 카롤루스 마르텔의 집권부터 메로베우스 왕가는 사실상 권력을 완전히 상실했기에, 왕조의 끝은 719년이나 다름없었다.
2. 역사
2.1. 로마의 봉신
왕조의 시조인 메로베우스는 서게르만계 프랑크족의 일파인 살리 프랑크족의 지도자이자 서로마 제국의 봉신으로, 라인 강 전선 북부 일대를 이민족으로부터 지키는 역할을 맡았으며, 보조병을 보내는 대가로 로마 정부로부터 상당량의 보조금을 받았다. 451년 6월 20일,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가 이끄는 서로마군과 서고트족, 프랑크족 연합군이 아틸라의 훈족, 동고트족, 부르군트족, 게피드족 동맹군을 상대로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격렬하게 맞붙었다. 이때 서고트 왕 테오도리크 1세가 혈전을 치르던 중 전사했고, 아들 토리스문드가 부왕을 대신해 서고트족을 이끌어 승리로 이끈 사실은 확인되나, 프랑크족을 이끈 지도자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요르다네스에 따르면, 전투 전날 밤에 프랑크족과 게피드족이 충돌하여 15,000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전투 후 본거지로 돌아갔다는 것만 전해진다. 일각에서는 메로베우스가 프랑크군을 이끌어 카탈라우눔 전투에 참전했으며, 전투가 끝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고, 킬데리크 1세가 뒤를 이었다고 추론하지만 불확실하다. 요즘에는 아예 메로베우스가 실존인물인가에 대한 회의적인 시선도 적지 않은 실정이다.킬데리크 1세는 갈리아 방면 로마군 사령관 아에기디우스와 동맹을 맺고, 458년경에 아에기디우스가 마요리아누스 황제의 지령에 따라 갈리아 북부를 장악하는 데 협조해 리옹에서 부르군트족을 몰아내는 데 기여했다. 461년 마요리아누스가 플라비우스 리키메르에게 피살되자, 아에기디우스가 리키메르에 대항해 독립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는
"463년 킬데리크가 오를레앙에서 전투를 벌였다."
라고 기술했으며, 마리우스 아벤티센지스(Marius d'Avenches)는 아에기디우스와 서고트 왕국이 오를레앙 인근에서 격전을 벌여 서고트군이 패배했고, 서고트 왕은 살해되었다고 밝혔다. 이로 볼 때, 킬데리크 1세는 463년 아에기디우스가 서고트 왕국의 군주 토리스문드를 상대로 오를레앙에서 맞붙었을 때, 아에기디우스 편에 가담하여 승리에 기여했을 것이다.464년경 아에기디우스가 사망한 뒤 그의 아들인 시아그리우스가 갈리아에 잔존한 서로마군을 통솔했다. 킬데리크 1세는 시아그리우스에게도 적극적으로 협조해 갈리아 북부를 방어하는 임무를 착실하게 수행했다. 469년, 앙주의 백작 파울루스가 도시를 지배하던 색슨족 지도자 오도바크리우스(Odovacrius)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 킬데리크 1세는 파울루스를 도와 색슨족을 앙주에서 몰아냈고, 파울루스가 전투에서 사망하자 앙주를 그대로 장악했다.[1] 이후 루아르 강 하류의 섬들을 장악하고, 그곳의 수비를 자신의 친척이자 캉브레 프랑크족의 왕이었던 라그나카르의 형제인 리그노메르에게 맡겼다.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동게르만계 스키리족의 수장 오도아케르가 이탈리아의 왕을 자처했다. 시아그리우스는 오도아케르에게 복종하길 거부했고, 자신은 여전히 서로마 제국의 갈리아 방면 사령관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동로마 제국에 사신을 보내 자신을 서로마 황제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제노 황제가 거부하자 교류를 끊었다. 반면 킬데리크 1세는 제노에 충성을 맹세했고, 원정대를 파견해 오도아케르가 장악한 이탈리아 북부를 공격하기도 했다.
2.2. 클로비스 1세의 영토 확장과 프랑크 왕국의 성립
481년 킬데리크 1세가 승하하고 아들인 클로비스 1세가 등극할 무렵, 그가 통솔하는 살리 프랑크족은 현 네덜란드의 영토에, 그들의 사촌 부족인 라인 프랑크족은 라인 강 유역에 정착하여 살고 있었다. 그들의 남서쪽인 파리와 수아송 부근에는 서로마 제국의 잔존 세력이 시아그리우스의 지도하에 수아송 왕국을 수립했고, 제네바와 리옹을 끼고 있는 알프스 산맥 부근에는 동게르만계 부르군트 왕국이 있었다. 그리고 프랑스 남서부와 스페인 북부 가론 강 유역에는 동게르만계 서고트 왕국이 버티고 있었으며, 북동쪽으로는 게르만족의 분파들인 서게르만계 알레만니족, 색슨족, 프리시족과 훗날 이탈리아 반도에 왕국을 건설하게 될 랑고바르드족이 정착하지 못한 채 유랑하고 있었다.클로비스 1세는 갈리아의 패권을 확보할 야심을 품고, 이를 이루기 위해 원정을 감행했다. 우선 갈리아 북부 지방에 잇따라 원정을 단행해 군소 부족들을 복종시켰다. 뒤이어 486년 수아송 전투에서 시아그리우스를 물리치고 수아송 왕국을 병합했다. 이리하여 솜 강에서 루아르 강까지의 영역이 그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이후 친척들이 이끄는 다른 프랑크족을 통합하기 위해 모략을 발휘했다. 살리 프랑크족의 또다른 세력을 이끌고 있었던 친척인 시게베르 부자를 살해했고, 경쟁 상대였던 카라리크의 아들들을 보물로 매수해 카라리크를 살해하게 한 후 그들을 '아버지를 살해한 패륜아를 정벌한다'라는 명분을 내세워 척살한 후 카라리크의 신민들을 복속시켰다. 또한 캉브레에 거주하는 프랑크족을 이끌고 있었던 라그나카르의 전사들을 금팔찌로 매수해 라그나카르를 제거했다. 이 금팔찌는 사실 청동을 도금한 가짜였는데, 배반자들이 이에 대해 항의하자 주군을 배신한 자는 금팔찌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대꾸했다. 그 외에도 온갖 방법을 동원해 차후 경쟁자가 될지 모를 친척들을 전부 제거했다.
490년 즈음 프랑크족의 통합을 달성해 서유럽의 강자로 올라선 클로비스 1세는 이탈리아 반도의 강자였던 동게르만계 동고트 왕국의 테오도리쿠스 대왕과 자신의 여동생인 아우도플레다(Audofleda)를 결혼시켜 우호관계를 맺었으며, 동로마 제국과도 유대관계를 맺었다.
이렇듯 입지를 다지던 클로비스 1세가 결정적인 행보를 내디뎠으니, 바로 가톨릭을 국교로 삼기로 한 것이었다. 5세기~6세기 게르만계 왕국들의 대부분은 기독교로 개종했지만, 아타나시우스파가 아닌 아리우스가 4세기에 정립한 종파인 아리우스파를 믿었다. 프랑크족 역시 가톨릭이 아닌 아리우스파 또는 게르만 이교를 신봉했다. 클로비스 1세 본인은 게르만 이교를 믿었으며, 그의 누이 몇 명은 아리우스파를 믿었다.[2] 그러던 493년, 클로비스 1세는 부르군트 왕국의 공주였던 클로틸데와 결혼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클로틸데는 남편에게 가톨릭으로 개종하라고 끊임없이 권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클로비스 1세는 처음엔 왕비의 간언을 듣지 않았다. 그러던 496년 알레만니족과의 톨비악 전투에서 막대한 희생자가 발생하고 전세가 갈수록 불리해지자, 클로비스 1세는 하늘을 향해 눈을 치켜뜨며
"만약 당신이 나에게 이 적들에 대한 승리를 허락한다면, 나는 당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겠다."
라고 했다. 그후 알레만니족을 격파하는 데 성공한 그는 비로소 가톨릭으로 개종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496년, 로마 교황 펠릭스 3세로부터 세례와 왕관을 받았다.클로비스 1세의 가톨릭 국교화는 신의 한 수였다. 당시 갈리아에는 로마인과 로마화된 식민지인들이(colonia)[3] 다수였다. 그들은 로마 제국의 영광을 그리워하고, 프랑크 지도층을 'barbarius', 즉 이방인/미개인으로 취급하며 경멸했다. 하지만 클로비스 1세가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프랑크 왕국의 국교를 가톨릭으로 정하자, 로마인들은 아리우스파를 강요하며 핍박하는 다른 이민족과는 다르다고 여기며 프랑크 왕국에 호응했다.
클로비스 1세는 로마인들의 열렬한 호응에 힘입어 갈리아 전역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특히 507년에 벌어진 부이예 전투에서 서고트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하고 서고트의 왕 알라리크 2세를 처단한 뒤, 여세를 몰아 보르도를 포함한 아키텐 전역을 휩쓸었고, 서고트 왕국의 수도인 툴루즈도 함락하여 왕실의 숱한 보물을 노획했다. 클로비스 1세는 내친 김에 서고트 왕국 전체를 정복하려고 했지만, 동고트의 테오도리크 대왕이 사절을 보내 그러지 말라고 권하자 아키텐만 얻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다. 이리하여 서고트 왕국은 셉티마니아를 제외한 프랑스 남부 일대를 전부 잃고, 이베리아 반도의 톨레도로 본거지를 옮겼다.
508년, 클로비스 1세는 랭스에서 부하 3,000명 및 일가족과 함께 가톨릭 세례를 공식적으로 받은 후, 로마 교회 소속의 주교들로부터 '아우구스투스'(로마 황제)의 칭호를 받았다. 이리하여 프랑크 왕국이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다만 형식적으로는 동로마 제국에 복종하면서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집정관과 로마 특별 시민의 지위를 얻었다. 클로비스 1세와 클로틸데 부부는 가톨릭 개종을 기념하여 센 강의 왼쪽 기슭에 '거룩한 사도들의 바실리카'를 건설했다.
2.3. 제1차 분할
클로비스 1세는 클로틸데 왕비로부터 클로도미르, 킬데베르 1세, 클로타르 1세를 낳았고, 클로틸데 이전에 결혼했던 성명 미상의 여인으로부터 테우데리크 1세를 낳았다. 511년 클로비스 1세가 파리에서 승하한 후, 네 아들은 왕국의 영토를 4개로 분할했다. 수아송은 클로타르 1세에게, 파리는 킬데베르 1세에게, 랭스는 테우데리크 1세에게 주어졌고, 오를레앙은 클로도미르에게 맡겨졌다.
515년, 데인족이 테우데리크 1세의 영역에 쳐들어와서 주민들을 포로로 잡고 배에 태운 후 본국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이때 데인족의 왕 헤이겔라크는 마지막으로 승선하려 했다가, 테우데리크 1세가 급파한 강력한 기병대의 급습을 받았다. 데인족은 크게 패배해 뿔뿔이 흩어졌고 헤이겔라크는 전사했으며, 그들이 가지고 가려던 노획물은 전부 회수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헤이겔라크의 뼈는 라인 강 어귀의 섬에서 종종 목격되었다고 한다.
523년, 킬데베르 1세, 클로도미르, 클로타르 1세는 부모를 처참하게 죽인 곤데바우드의 아들이자 부르군트 왕인 지기스문트에게 복수하려는 모후 클로틸데의 부추김에 따라 부르군트 왕국을 공격했다. 지기스문트는 일찍이 딸 수아베코테(Suavegothe)와 테우데리크 1세의 결혼을 주선해 그의 지원을 받기를 원했지만, 테우데리크 1세는 별다른 지원을 해주지 않았다. 결국 지기스문트는 프랑크군에게 패배한 뒤 사로잡힌 후 왕위에서 물러나 오를레앙으로 끌려갔다.
프랑크군이 작전을 완수하고 돌아간 뒤, 폐주 지기스문트의 형제인 고도마르 3세가 동고트의 테오도리크 대왕의 지원에 힘입어 부르군트 왕국을 탈환한 뒤 클로도미르가 남겨뒀던 프랑크군 수비대를 학살했다. 이에 분노한 클로도미르는 524년 5월 1일 지기스문트와 그의 왕비 및 아들을 살해한 뒤 이들의 유해를 우물에 던지게 했다. 그후 테우데리크 1세를 설득하여 부르군트 왕국에 대한 제2차 원정에 함께 착수하도록 했다. 그러나 524년 6월 25일 베체롱체 전투에서 거짓으로 후퇴하는 부르군트군을 추격했다가 매복에 걸려 전사했고, 그의 수급은 베어진 뒤 창 끝에 꽂혔다.
전사한 클로도미르의 세 아들들은 어머니 곤테우크에 의해 양육되다가 곤테우크가 클로타르 1세와 결혼하면서 클로타르 1세의 수중에 들어갔다. 클로타르 1세와 킬데베르 1세가 죽은 클로도미르의 영지를 양분하려고 하자, 클로틸데는 이에 맞서 클로도미르가 남긴 세 아들의 권리를 보호하려고 했다. 그러나 클로타르 1세와 킬데베르 1세는 모후의 반대를 뿌리치고, 클로도미르의 영지를 양분했으며 클로도미르의 세 아들 중 테오데발트와 군타르가 클로타르 1세에게 살해되었다. 오직 클로도알드만이 목숨을 건졌는데 나중에 수도자가 되었다. 아들들의 만행에 실망한 클로틸데는 살해된 두 손자의 시신을 들것에 실어 생피에르 교회에 안장한 뒤 속세와 인연을 끊고 수녀원에 들어갔다. 한편, 테우데리크 1세는 클로타르 1세와 킬데베르 1세에게 자기 몫을 달라고 요구해 트루아, 센, 오세르, 리모주를 접수했다.
테우데리크 1세는 자신의 조카인 아말라베르가를 서게르만계 투링기(튀링겐)족의 왕 헤르만프리드와 결혼시켰다. 529년, 헤르만프리드는 공동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던 형제 베르타차르와 내전을 벌였다. 테우데리크 1세는 조카사위인 헤르만프리드를 지원하여 투링기 내전에서 승리하도록 했다. 그러나 헤르만프리드는 권력을 잡은 뒤 땅을 넘겨주겠다던 약속을 무시했다. 이에 격노한 테우데리크 1세는 클로타르 1세와 손을 잡고 튀링겐을 공격하기로 했다. 531년 또는 532년, 테우데리크 1세와 그의 아들 테우데베르 1세, 그리고 클로타르 1세가 튀링겐을 공격했다. 이들은 운스트루트 강 전투에서 튀링겐군을 격파하고 스키팅기 왕궁을 공략했다. 헤르만프리드는 가까스로 도망쳤지만, 조카 라데군트 등 여러 왕실 인사는 붙잡혔다. 이후 테우데리크 1세는 헤르만프리드에게 신변의 안전을 보장할 테니 투항하라고 요구하며 선물을 보냈다. 헤르만프리드는 이에 응해 줄피히(Zülpich) 성에서 그와 만나 이야기를 나눴으나, 도중에 누군가가 그를 성벽에서 밀어 떨어뜨려 죽였다. 그리하여 튀링겐 왕국은 멸망했고, 테우데리크 1세와 클로타르 1세가 영토를 분할했다.
531년, 서고트 왕국의 왕 아말라리크에게 시집갔던 클로비스 1세의 딸 클로틸데가 킬데베르 1세에게 남편이 자신을 학대한다는 기가 찰 소식을 전했다. 이에 분노한 킬데베르 1세는 여동생의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서고트 왕국으로 쳐들어가 나르본 전투에서 서고트군을 격파했다. 패배한 아말라리크는 카탈루냐의 바르셀로나로 도피했으나 그곳에서 곧 피살당했다. 킬데베르 1세는 나르본에서 보물을 대거 거둬들인 뒤 여동생과 함께 귀환했지만, 클로틸데는 도중에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망한 뒤 아버지 클로비스 1세가 묻힌 생드니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532년, 킬데베르 1세와 클로타르 1세, 테우데리크 1세의 아들 테우데베르 1세가 연합하여 부르군트 왕국으로 쳐들어갔다. 그들은 오툉에서 부르군트 왕 고도마르 3세를 포위한 뒤 맹공을 퍼부은 끝에 534년 오툉을 함락시키고 고도마르 3세를 처단했다. 이리하여 부르군트 왕국이 멸망했을 무렵, 테우데리크 1세가 중병에 걸려 승하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클로타르 1세와 킬데베르 1세는 즉시 군대를 일으켜 테우데리크 1세가 다스렸던 영역을 접수하려고 했다. 이에 테우데베르 1세는 서둘러 랭스로 귀환한 뒤 전리품을 랭스 일대에 주둔한 프랑크군에게 공평하게 분배해 그들의 충성을 받아냈다. 이후 두 숙부에게 뇌물을 건네며 자신을 인정해달라고 청했고, 킬데베르 1세와 클로타르 1세는 상황이 여의치 않게 되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536~537년, 클로타르 1세와 킬데베르 1세는 프로방스를 함께 공략한 뒤 이곳의 소유권을 놓고 분쟁을 벌였다. 킬데베르 1세는 조카인 테우데베르 1세와 손을 잡고 클로타르 1세를 협공하기로 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투르의 수녀원에 있었던 킬데베르 1세와 클로타르 1세의 모후 클로틸데가 하느님에게 아들끼리 전쟁을 벌이는 것을 막아달라며 호소했다고 한다. 그러자 킬데베르 1세와 테우데베르 1세가 합세한 장소에 번개와 천둥이 내리치고 우박이 쏟아졌다. 반면 클로타르 1세의 진영에는 비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다. 이에 공포를 느낀 두 사람은 바닥에 엎드린 채 형제를 해치려 한 죄를 회개할 테니 용서해달라고 간청했다. 이윽고 날씨가 개이자 클로타르 1세와 화해한 뒤 즉시 철수했다고 한다.
이 무렵, 테우데베르 1세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감행한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으로 인해 동고트 왕국과 동로마 제국이 격전을 치르는 걸 지켜보면서 동게르만계 게피드족 및 서게르만계 랑고바르드족과 협약을 맺어 동로마 제국이 장차 프랑크 왕국까지 공격할 가능성에 대비했다. 그러다가 539년 여름, 동고트 왕 비티게스로부터
"라벤나에서 포위된 우리를 도와준다면 이탈리아 북부 전체를 주겠다."
라는 제안을 받아들여 대군을 일으킨 후, 알프스 산맥을 넘어 포 강에 도달한 뒤 강의 양안에 진영을 세웠다. 동고트군은 그들을 환영했지만, 프랑크인들은 돌연 태도를 바꿔 이들을 물리치고 여러 도시를 공략했다. 동로마 군대도 프랑크군에 싸움을 걸었다가 패배하고 토스카나로 후퇴했다. 동로마의 역사가 프로코피우스는 테우데베르 1세가 "갈리아에서 채굴된 황금으로 볼로냐에서 금화를 주조했는데, 관습에 따라 로마 황제의 형상을 쓰지 않고 자신의 형상을 새긴 최초의 야만인 왕이었다."
라며 분개했다. 그러나 프랑크 진영에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수많은 이가 죽어나가자 어쩔 수 없이 테우데베르 1세는 철수했다. 이후 프랑크 사절이 비티게스를 접견하여 동맹을 제안했으나, 저번 침략을 기억하던 비티게스는 이를 불신하여 거부했다.541년, 테우데베르 1세는 알레만니족 장군 부틸리누스를 이탈리아로 파견해 리구니아의 일부 지역과 알프스 산맥 지역 및 대부분의 베네티 지역을 공략하고 공물을 부과하도록 했다. 한편 541년 또는 542년, 클로타르 1세와 킬데베르 1세는 공동으로 피레네 산맥을 넘어 서고트 왕국의 도시 사라고사를 포위했다. 비록 함락에는 실패했지만, 그들은 이베리아 반도 북부 지역을 약탈해 막대한 전리품을 챙기고 귀환했다.
547년 말 또는 548년 초, 테우데베르 1세가 승하하고 아들인 테우데발트가 부왕의 영지를 물려받았다. 그 직후 동고트 왕국의 토틸라와 동로마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사절단이 랭스에 찾아와서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다. 테우데발트는 고심 끝에 어느 쪽도 공개적으로 돕지 않은채 관망하는 태도를 취하기로 했다. 하지만 선왕 테우데베르 1세가 중용했던 알레만니 족장 레우타리스와 부틸리누스 형제가 대이탈리아 출정을 강력히 주장하자, 결국 허락했다. 아가티우스에 따르면, 알레만니족이 주축이 된 75,000명의 게르만 대군이 553년 초엽에 알프스 산맥을 넘었다고 한다. 이 소식을 접한 동로마 제국의 환관 출신 장군 나르세스는 시칠리아 섬에 주둔해 있었던 아르타바네스의 군대를 소환하여 아펜니노 산맥의 고갯길에 주둔시켰다.
한편, 침공군은 이탈리아 북부의 동로마 제국 거점이었던 파르마를 함락시켰다. 그곳의 동로마군은 동게르만계 헤룰리족 용병이 대다수였는데, 지휘관이었던 풀카리스는 패배 직후 파벤티아(파엔차)로 후퇴했다. 그리고 겁을 먹은 아르타바네스도 역시 파벤티아로 철수했다. 이후 나르세스의 독촉을 받아 다시 파르마로 북상했고, 피사우룸에서 훈족 용병대와 게르만 부대의 퇴로 차단을 맡았다. 70,000명이나 되는 대군의 기세를 회전으로 막기에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낀 나르세스는 이탈리아 중남부 일대의 도시들에 수비대를 분산 배치시키고, 자신은 나머지 군대를 모아 이듬해 봄까지 로마시에 주둔했다.
554년 초엽, 프랑크군은 이탈리아 중부를 약탈하고 삼니움까지 남하했다. 레우타리스와 부틸리누스는 병력을 둘로 나눠서 양 갈래로 진군해 이탈리아 남부를 공격하기로 했다. 레우타리스는 아풀리아, 부틸리누스는 칼라브리아와 캄파니아로 진격하기로 했다. 그러다가 레우타리스가 방향을 돌려 본국으로 귀환하려 하자, 아르타바네스의 동로마군이 피사룸 인근에서 기습 공격해 선봉대를 궤멸시켰다. 이후 레우타리스의 패잔병들은 알프스 산맥을 넘는 여정에서 전염병의 습격을 받았고, 레우타리스 본인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죽어나갔다.
한편, 부틸리누스의 군대는 동고트군과 합세하여 칼라브리아 일대를 약탈했는데, 전염병에 걸려 30,000명의 군대가 20,000명으로 축소되었다. 554년 늦여름 경에 캄파니아로 회군하여, 마차를 둥글게 모아 숙영지를 세웠고 볼투르누스 강의 다리를 지키기 위해 큰 탑을 지었다. 이후 18,000명의 동로마군이 현지에 도착해 탑에 불을 질러 주도권을 장악했다. 이어진 회전에서, 프랑크군은 완패했고 부틸리누스는 전사했다.
프랑크군이 이탈리아에서 섬멸당하고 있을 무렵, 테오데발트는 허리가 아파서 곧게 펴지 못하는 등 중병에 시달리다가 555년 11월 또는 12월에 승하했다. 테오데발트의 왕비이자 랑고바르드 족장의 딸이었던 부데트라다는 자식을 낳지 못했다. 클로타르 1세는 테오데발트가 사망하자 즉시 영지를 접수하고 과부가 된 부데트라다와 결혼했다. 그러나 주교들이 이 일에 비난을 퍼붓자 부데트라다와 이혼하고, 바이에른 공작 가리발트 1세에게 부데트라다를 시집보냈다. 그후 동로마군은 556년 프랑크군을 이탈리아 북부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한때 테우데베르 1세가 정복했던 땅에 대한 로마 제국의 권력을 회복했다.
이 무렵, 파리와 오를레앙에서 군림하던 킬데베르 1세와 클로타르 1세 사이의 관계가 급격하게 악화되었다. 이와 동시에, 클로타르 1세의 아들인 크람도 부왕에게 반감을 품고 킬데베르 1세와 손을 잡으려고 했다. 클로타르 1세는 아들을 달래고자 오베르뉴로 보내고, 그에게 왕에 버금가는 칭호와 권한을 내렸다. 그러나 크람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킬데베르 1세의 지원을 받아 부왕 클로타르 1세를 축출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크람은 파리로 가 킬데베르 1세 앞에서
"저는 이제부터 아버지의 최악의 적이 될 겁니다."
라며 맹세했다고 한다. 이리하여 크람의 반란이 터지면서 프랑크 왕국이 혼란에 빠지자, 일부 아키텐 귀족들은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아키텐 왕국'을 세웠다.클로타르 1세는 또다른 아들인 카리베르 1세와 군트람을 보내 크람을 토벌하도록 했다. 두 아들은 리모주에서 크람을 포위했지만, 크람이 클로타르 1세가 색슨족과의 전투 도중 전사했다는 거짓 소문을 탈영병을 통해 퍼뜨리자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크람은 그 틈에 잃어버린 영토를 확보하고자 노력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고, 뒤늦게 부왕이 건재하다는 걸 알게 된 카리베르 1세는 회군하여 크람을 압박해 들어갔다. 그러던 558년, 킬데베르 1세가 상속인없이 승하하면서 파리-오를레앙 일대마저 클로타르 1세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로써 프랑크 왕국 전역이 클로타르 1세에게 귀속되었다. 이리하여 동맹을 잃은 크람은 브르타뉴의 브로그웨네드 왕 차나오 1세에게 망명한 뒤 항전을 이어나갔다.
560년, 클로타르 1세는 브르타뉴 원정에 착수하여 차나오 1세를 격파하고 전사시켰다. 크람은 패전 소식을 듣자 배를 타고 바다로 도망쳤지만 부왕이 급파한 추격대에게 따라잡혔다. 클로타르 1세는 끝까지 저항한 아들 크람에게 분노한 나머지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두 손녀를 오두막에 가둬놓고 산채로 불태우라는 참혹한 명령를 내렸다. 하지만 사형 집행인들은 너무 잔혹하다고 여겨 몰래 그들을 먼저 교살한 뒤 시신을 오두막에 안치한 후 불태웠다.
2.4. 프레데군트와 브룬힐트의 시대
2.4.1. 제2차 분할과 내전
561년 11월 29일, 클로타르 1세가 콩피에뉴 사유지의 별궁에서 승하했다. 그는 생전에 인군트 왕비와의 사이에서 시게베르 1세, 카리베르 1세, 군트람을 낳았고, 아레군트와의 사이에서 킬페리크 1세를 낳았다. 킬페리크 1세는 이복형제들에게 뒤쳐지지 않고자 국고를 서둘러 확보한 뒤 병사들에게 황금을 나눠줘 자신에게 충성 맹세를 하도록 했다. 이후 파리에 무혈 입성한 뒤 프랑크 왕을 자처하려고 했다. 하지만 시게베르 1세, 카리베르 1세, 군트람 형제가 연합하여 파리로 진군해 압박을 가했고, 킬페리크 1세는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후 그들과 협상한 끝에 수아송에서 왕국을 조용히 이끌기로 했다.이리하여 이복동생을 멀리 쫓아낸 세 형제는 나머지 프랑크 영토를 분할했다. 파리 일대는 카리베르 1세가 맡았고, 오를레앙은 군트람이, 메츠는 시게베르 1세가 맡았다. 킬페리크 1세가 이끄는 수아송 왕국은 훗날 네우스트리아 왕국이 되었고, 군트람이 이끄는 오를레앙 왕국은 부르군트 왕국으로, 시게베르 1세가 이끈 메츠 왕국은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으로 일컬어졌다. 형제들은 곧 서로의 영토를 조금이라도 빼앗고자 각축전을 벌였다. 562년, 킬페리크 1세는 시게베르 1세가 아바르족의 침략에 맞서 싸우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 조용히 지내겠다는 맹세를 파기하고 랭스를 공격해 자기 영지로 삼았다. 이에 시게베르 1세는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서 수아송을 공략하고, 뒤이은 킬페리크 1세와의 전투에서 완승을 거두었다. 테우데베르는 1년 내내 폰티오에서 포로로 남아있다가 다시는 시게베르 1세에게 어떠한 대항도 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한 뒤 부왕 킬페리크 1세에게 돌아갔다.
565년, 시게베르 1세는 군트람에 속한 아를을 공략하고자 클레르몽의 프림과 아도발라 백작의 지휘하에 군대를 파견했다. 아도발라 백작은 아를에 들어와서 시게베르 1세에게 충성을 바치라고 주민들에게 요구했다. 그러나 군트람의 군대가 아를에 도착하여 프림과 아도발라를 포위했다. 두 사람은 요격에 나섰으나 패퇴하고 도주했다. 아를을 탈환한 군트람은 여세를 몰아 아비뇽을 점거했다가 시게베르 1세와 화해한 뒤 돌려줬다.
567년 11월 또는 12월, 파리 일대를 다스리던 카리베르 1세가 후계자를 낳지 못한 채 승하했다. 이에 킬페리크 1세, 시게베르 1세, 군트람이 카리베르 1세의 영토를 분할하고 파리를 공유지로 남겼다. 그런데 프로방스의 분배를 놓고 시게베르 1세와 군트람 사이에 분쟁이 벌어졌다. 시게베르 1세는 군트람의 재산인 아를을 기습 공략했다. 이에 부르군트의 파트라케인 켈수스가 즉각 반격해 아비뇽을 공략하고 뒤이어 시게베르 1세가 남겨놓은 부관을 물리친 후 아를을 탈환했다. 군트람은 아비뇽을 시게베르 1세에게 돌려주고 화해했다.
568년, 서고트 왕국의 공주이자 킬페리크 1세의 왕비였던 갈스빈트가 교살되고, 갈스빈트 살해를 사주한 것으로 의심되는 정부 프레데군트가 킬페리크 1세의 세 번째 왕비가 되었다. 이에 갈스빈트의 언니이자 시게베르 1세의 왕비였던 브룬힐트가 분노하여 남편에게 복수해달라고 간청했다. 시게베르 1세는 아내의 간절한 설득을 받아들여 아우스트라시아 군대를 이끌고 킬페리크 1세의 네우스트리아로 쳐들어갔다. 그러자 부르군트의 군트람이 두 형제에게 자제할 것을 촉구했고, 그들은 569년 전국에서 소집한 대표들이 집결한 궁정회의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기로 했다. 궁정회의 결과, 킬페리크 1세는 살인에 관여한 책임을 지고 처형이었던 브룬힐트에게 아키텐의 5개 도시(보르도, 리모주, 카오르, 베른, 비고르)를 넘겨야 했다.
이리하여 평화가 이뤄지는 듯했지만, 킬페리크 1세는 영토 손실을 만회하고자 시게베르 1세로부터 투르와 푸아티에를 탈취했다. 이에 격노한 시게베르 1세는 이참에 킬페리크 1세를 처치하고 그의 네우스트리아 왕국을 자신의 영역으로 귀속시키기로 마음먹었다. 575년, 시게베르 1세는 라인 강 너머 게르만인들을 대거 고용해 강대한 군사력을 갖춘 뒤 수아송으로 쳐들어갔다. 킬페리크 1세의 장남이었던 테우데베르가 네우스트리아의 군대를 이끌고 맞서 싸웠다. 군트람은 '군트람 보손'을 보내 테우데베르를 돕게 했지만, 보손이 돌연 편을 바꿔버리는 바람에 데우데베르가 참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이후 시게베르 1세는 킬페리크 1세가 숨은 투르를 포위 공격하다가 프레데군트가 사주한 자객들에게 암살되었다. 지도자를 잃은 아우스트라시아 군대는 해산되었고, 킬페리크 1세는 잃어버렸던 영토와 재산을 쉽게 되찾은 뒤 파리로 진군하여 그곳에 있었던 브룬힐트를 생포한 후 루앙 시로 유배보내고, 그녀가 파리로 가져온 보물들을 탈취했다.
하지만 시게베르 1세와 브룬힐트의 아들이었던 킬데베르 2세는 무사히 탈출해 아우스트라시아의 수도였던 메츠로 이동한 뒤 아우스트라시아의 왕으로 옹립되었다. 군트람은 조카인 킬데베르 2세의 후견인을 맡았고, 575년 말 또는 576년 초에 후견인 자격으로 마르세유의 절반을 자기 것으로 삼았다. 한편, 네우스트리아의 킬페리크 1세는 측근 한 명을 군트람 보손이 숨은 생마르틴 대성당이 있는 투르에 보내 자신의 장남인 테우데베르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자를 넘기지 않는다면 투르를 파괴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투르의 주교인 그레고리우스가 이끄는 투르 주민들은
"성스러운 성당이 스스로 찾아온 죄인을 보호하는 것은 정당한 일인데 이를 위반할 수는 없다."
라고 답했다. 이에 분노한 킬페리크 1세는 아들인 클로비스에게 투르를 응징하도록 했다. 클로비스가 명령을 받들어 데시데리우스 공작과 함께 투르와 앙제 일대를 약탈하고 있었을 때, 부르군트 왕 군트람이 리모주에 도착하여 이들과 응전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이후에 벌어진 전투에서 군트람은 5,000명의 전사를 잃었고 데시데리우스는 24,000명의 전사를 잃은채 가까스로 탈출했다고 한다. 그후 군트람은 오베르뉴를 통과하면서 약탈과 파괴를 자행한 뒤 부르군트로 돌아갔다.576년, 킬페리크 1세는 아들 메로베에게 군대를 이끌고 군트람을 따르는 푸아티에를 공격하도록 했다. 하지만 메로베는 명령을 무시하고 투르에 진군해 그 일대를 심하게 황폐화시켰다. 이후 모후인 아우도베라[4]에게 가고 싶은 척하면서 루앙으로 갔고, 그곳에서 사모하던 브룬힐트를 만난 뒤 그녀와 결혼했다. 이 어이없는 소식을 접한 킬페리크 1세는 분노하여 아들을 만나기 위해 직접 떠났다. 오랜 협상 끝에, 킬페리크 1세는 브룬힐트와 결혼하겠으니 간섭하지 말라는 아들 메로베의 요구에 굴복하는 듯했지만 여전히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한편, 샹파뉴에서 온 이들이 수아송을 습격해 순식간에 장악한 후 프레데군트와 킬페리크 1세의 아들인 클로비스를 수아송에서 몰아냈다. 이에 킬페리크 1세와 메로베 부자는 잠정적으로 화해한 뒤 수아송으로 진군해 샹파뉴군을 몰아내고 수아송을 회복했다. 그러나 킬페리크 1세는 이 사건이 메로베의 사주로 일어났다고 여겨 아들을 긴급 체포한 뒤 감옥에 가둔 후 상속권을 박탈하고 아나솔 수도원으로 보냈다. 그 사이에 브룬힐트는 루앙을 탈출한 후 메츠로 이동하여 아들 킬데베르 2세와 합세한 뒤 섭정을 맡았다.
아노솔 수도원에 보내진 메로베는 얼마 후 그곳을 탈출하여 투르로 도주했다. 킬페리크 1세는 메로베를 넘겨줄 것을 요구하며 투르로 군대를 재차 보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메로베와 브룬힐트의 결혼을 주선한 루아나 주교는 체포된 후 브룬힐트로부터 뇌물을 받고, 사람들을 선동하여 킬페리크 1세에 대한 불복종을 부추긴 혐의가 적용되어 교회 법원에 회부되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를 포함한 여러 주교들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킬페리크 1세의 압력으로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루아나는 주교직을 박탈당한 뒤 감옥에 갇혔다가 밤에 탈출하려 했으나 발각되어 심하게 구타당한 뒤 저지 섬으로 보내졌다.
577년, 메로베는 부왕 킬페리크 1세의 공세를 피해 아우스트라시아로 도주하여 브룬힐트와 합류했다. 당시 아우스트라시아는 암살당한 시게베르 1세의 어린 아들인 킬데베르 2세가 군림했지만 실권은 왕을 보좌하는 신하들에게 주어졌다. 그들은 섭정으로 있었던 브룬힐트의 권력이 강화되는 걸 꺼렸기에 메로베의 망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메로베는 정체를 숨긴 채 랭스에 숨어있다가 테루안 백성에게 발각되었다. 그들은 메로베에게 킬페리크 1세에게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키려 하니 자신들을 이끌어달라고 청했다. 메로베는 이에 기뻐해 가장 용감한 추종자들만 데리고 테루안으로 갔다가 도중에 붙들려 별장에 갇혔다. 주민들은 별장 주위에 무장한 남자들을 배치한 뒤 킬페리크 1세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 킬페리크 1세는 메로베가 구금되어 있는 곳으로 급히 갔지만, 메로베는 이미 살해된 뒤였다. 세간에서는 프레데군트가 전 왕비 아우도베라의 모든 아이들을 멸하려고 살인을 사주했을 거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킬페리크 1세는 아들이 살해된 것을 알게 되자 살인자를 처형했다.
577년, 킬페리크 1세와 프레데군트의 아들이었던 삼손이 이질에 걸려 2살의 어린 나이로 요절했다. 프레데군트 역시 병에 걸렸지만 곧 회복되었다. 578년, 킬페리크 1세는 브르타뉴 원정을 계획하고 투르, 푸아티에, 베른, 르망, 그리고 앙주의 전사들을 소집했다. 브르타뉴 브로그웨네드의 군주 와로흐 2세는 야밤에 원정군을 습격해 대부분의 적병들을 격파했지만, 나중에 킬페리크 1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아들을 인질로 보냈다. 그러면서 매년 공물을 바치는 조건하에 빼앗겼던 도시들을 돌려받았다. 이에 킬페리크 1세의 군대가 철수했지만, 579년 와로흐 2세는 맹세를 어기고 렌을 공격해 약탈을 자행했으며, 뒤이어 낭트를 습격해 수많은 전리품을 확보하고 포도밭에서 포도를 모조리 거둬들인 후, 여러 주민들을 포로로 끌고 갔다.
579년, 킬페리크 1세는 프레데군트의 조언에 따라 세금 징수량을 늘리기 위하여 네우스트리아에 인구 조사를 실시하기로 했다. 여기에 밭, 숲, 집, 가축, 포도원에 대한 새로운 세금이 도입되었다. 580년 2월 갈리아-로만인 출신인 마르크가 리모주에 도착하여 인구 조사를 실시했다. 이에 분노한 주민들은 3월 1일 반란을 일으켰고, 마르크는 간신히 도시를 탈출한 뒤 킬페리크 1세에게 폭동이 일어났다는 보고를 했다. 킬페리크 1세는 즉시 군대를 보내 리모주의 폭도들을 학살하고, 리모주의 대표 및 모든 저명한 사람들을 추방했다. 여기에 사람들을 선동한 혐의로 기소된 성직자들을 잡아들인 뒤 도시 광장에서 다양한 고문을 가했다. 이때 처형되거나 추방된 이들의 모든 재산은 국고로 귀속되었고, 리모주 시는 이전에 지불하기를 거부했던 세금보다 훨씬 더 무거운 과세를 내야 했다. 당시 킬페리크 1세가 이끄는 네우스트리아의 세금이 너무 무거워서, 많은 이들이 네우스트리아를 떠나 킬데베르 2세가 다스리는 아우스트라시아나 군트람이 지배하는 부르군트로 도주했다.
580년 봄 론, 소나, 그리고 루아르 일대가 홍수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오베르니 계곡 전체가 물에 잠겼고, 리옹의 많은 집이 파괴되었으며, 도시 성벽의 일부가 무너졌다. 그해 여름 동안 우박이 쏟아지면서 오베르뉴 일대가 파괴되었으며, 오를레앙 시는 화재로 절반이 파괴되었고, 강한 지진이 보르도를 강타했다. 8월에는 천연두가 갈리아 전역을 휩쓸면서 수많은 이들이 죽어갔다. 이때 킬페리크 1세 및 두 아들 클로도베르와 다고베르도 병에 걸렸다. 킬페리크 1세는 병에서 회복되었지만, 두 아들은 모두 죽었다. 이 일련의 자연재해에 동요한 킬페리크 1세는 추가 세금을 폐지하고 인명부를 불태웠으며, 교회, 바실리카, 그리고 빈민들에게 많은 선물을 나눠줬다.
프레데군트 사이에서 낳은 클로도베르와 다고베르가 모두 죽자, 킬페리크 1세는 아우도베라와의 사이에서 낳았고 현재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 클로비스를 후계자로 삼았다. 그러나 프레데군트는 클로비스마저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클로비스가 클로도베르와 다고베르를 마법으로 죽게 만들었다고 비난했으며, 마법사로 간주된 한 여인을 체포해 화형에 처했다. 클로비스는 조사를 위해 한 별장으로 보내졌다가 프레데군트의 명령으로 살해되었다. 이후 프레데군트는 수도원에 사람을 보내 아우도베라를 살해하고, 아우도베라의 딸 바시나를 강간한 뒤 푸아티에 수도원으로 보냈다. 이때 아우도베라의 모든 소유권과 여동생 바시네는 프레데군트의 소유로 넘어갔다.
581년, 군트람이 이끄는 부르군트 왕국과 브룬힐트가 이끄는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이 마르세유 일부의 소유권을 놓고 분쟁을 벌였다. 킬페리크 1세는 이를 보고 데시데리우스 공작을 불러서 군트람을 괴롭히라고 명령했다. 데시데리우스는 군트람을 따르는 라그노발트 공작을 몰아내고 페리 시를 공략한 뒤 아제네로 진군해 군트람의 통치하에 있는 모든 도시를 점령했으며, 투르 지역 역시 약탈되었다. 또한 킬페리크 1세의 부하인 블라다스트 공작이 바스크 왕국까지 공격했지만 대부분의 병력을 잃고 패퇴했다.
583년, 킬페리크 1세의 부하들인 베룰프, 데시데리우스, 그리고 블라다스트 공작은 킬데베르 2세를 지지하는 오베르뉴 지역을 침공했다. 오베르뉴 측은 15,000명의 병력을 소집하여 대응했고, 양자는 사토메안 요새에서 격돌했다. 데시데리우스는 이 전투에서 7,000명 이상의 병력을 잃고 패퇴했다. 하지만 베롤프와 블라다스트는 별다른 저항없이 순조롭게 진군하면서 주변의 모든 것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살육했다. 이에 오베르뉴 주민들이 군트람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군트람은 즉시 진군하여 베롤프와 블라다스트의 군대를 거의 섬멸했다. 킬페리크 1세는 이 상황에 동요해 평화협상을 요청했다.
584년 초, 킬페리크 1세와 프레데군트의 유일하게 남은 아들이었던 테우데리크가 이질에 걸려 사망했다. 그동안 여동생과 남편을 죽음으로 몰고 간 킬페리크 1세 및 프레데군트와 대립했던 브룬힐트는 아들인 킬데베르 2세가 네우스트리아를 물려받을 가능성을 고려해 화해를 모색했고, 킬페리크 1세도 긍정적으로 검토했다. 그런데 584년 5월경, 프레데군트가 클로타르 2세를 낳으면서 킬데베르 2세가 네우스트리아를 상속받을 가능성이 사라졌다. 이에 군트람과 브룬힐트는 화해를 포기하고 킬페리크 1세와의 전쟁을 재개했다. 킬페리크 1세는 이에 대응해 캉브레로 피신한 뒤 전쟁을 이어나가다가 그해 9월 27일 괴한에게 살해되었다. 암살을 사주한 이가 누구인지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2.4.2. 불완전한 화해
프레데군트는 남편인 킬페리크 1세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국고를 챙겨서 갓난아기인 클로타르 2세와 함께 노트르담 대성당으로 피신해 숨어 지냈다. 그녀는 한동안 정세를 살피다가 부르군트의 군트람 왕에게 서신을 보내 아이의 대부가 되어 주고 성년이 될 때까지 네우스트리아의 섭정을 맡으라고 요청했다. 군트람은 즉시 파리에 도착한 뒤 프레데군트 모자를 자기 진영으로 들였고, 나중에는 클로타르 2세를 양자로 들였다. 아우스트라시아의 브룬힐트는 여동생과 남편을 죽인 철천지 원수인 프레데군트를 자신에게 인도해달라고 요구했으나, 군트람은 이를 묵살했다. 이후 네우스트리아의 귀족들을 불러놓고 당시 사생아로 의심받던 클로타르 2세를 킬페리크 1세의 아들로 인정하라고 명령해 복종을 얻어낸 뒤 클로타르 2세를 양자로 삼았다. 당시 군트람은 브룬힐트의 아들이자 아우스트라시아의 왕이었던 킬데베르 2세도 양자로 들였기에, 사실상 프랑크 왕국 전역의 통치자가 되었다.이리하여 네우스트리아, 부르군트, 아우스트라시아 3국은 상호간의 전쟁을 멈추고 화해했지만, 양자간의 적의는 여전히 사그라들지 않았다. 586년, 프레데군트는 일찍이 루아르 강과 센 강 사이의 앙제, 생트, 낭트 마을을 장악하고 자신으로부터 독립한 베폴렌 공작을 몰아낸 뒤 이 영토를 탈환했다. 베폴렌 공작은 군트람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었기에, 프레데군트는 군트람에게 사절을 보내 평화협약을 제안했다. 그러나 네우스트리아의 사절단은 체포되었고, 군트람은 프레데군트로부터 등을 돌린 후 브룬힐트의 아들인 킬데베르 2세를 지지하기로 했다. 587년 11월 28일, 군트람과 킬데베르 2세는 안델로트 조약에 서명했다. 두 사람은 영원한 우정을 보장하고, 아이가 없을 경우 상호 유산을 확립하며, 상대방에게 모반을 꾀한 자를 넘기기로 했다. 또한 두 왕은 왕국의 분할과 경계를 정했다. 군트람은 파리, 토덴, 반도마, 에탐나, 샤르트르를 받았고, 킬데베르 2세는 모, 상리스, 투르, 푸아티에, 아브론테, 에어, 콩세랑스, 라부르드, 알비를 접수했다. 하지만 군트람이 여전히 킬데베르 2세를 유일한 상속자로 삼는 것에 주저하자, 브룬힐트는 그의 마음을 사기 위해 예전에 군도발트를 지지하고 군트람에 대적했던 자들을 넘기기로 했다.
이 움직임에 당황한 우르시온과 베르테프레드는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정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수아송의 라우칭 공작과 동맹을 맺어 브룬힐트에게 대항하려고 했다. 그러나 음모는 사전에 발각되었고, 라우칭 공작은 킬데베르 2세와 대화를 나누던 중 갑자기 궁전 경비원의 공격을 받아 살해되었다. 이후 우르시온과 베르테프레드 역시 살해되었고, 많은 이가 브룬힐트를 두려워하여 다른 지역으로 도주했다. 브룬힐트는 라우칭이 다스리던 수아송이 언제라도 프레데군트에게 넘어갈 수 있다고 여겨, 이를 방지하고자 589년 8월 킬데베르 2세의 아들이자 자신의 손자인 테우데베르 2세를 수아송의 왕으로 임명했다. 이렇듯 갈수록 강성해지는 브룬힐트의 권세를 경계한 프레데군트는 590년 킬데베르 2세와 테우데베르 2세 부자를 암살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그녀는 6명의 암살자를 고용해 두 팀으로 나눠서 두 왕을 동시에 죽이도록 했다. 그러나 이 음모는 조기에 발각되었고, 브룬힐트는 암살 음모에 관련된 자들을 모조리 처형했다.
2.4.3. 내전 재개와 프레데군트의 최후
592년, 그동안 프레데군트와 종종 대립하면서도 브룬힐트와 그녀의 대결을 최대한 막고 있었던 군트람이 승하했다. 이제 방해자가 사라지자, 브룬힐트와 킬데베르 2세는 오랜 숙적인 프레데군트와 클로타르 2세를 타도하려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592년 또는 593년, 브룬힐트는 네우스트리아로 쳐들어가서 수아송의 드로슈에서 프레데군트의 군대와 격돌했다. 《프레데가르 연대기》에 따르면, 양측 모두 막대한 손실을 입은 후 전투를 중단했다고 한다.한편, 브룬힐트와 킬데베르 2세는 군트람이 생전에 굴복시키려 했지만 연전연패하면서 끝내 실패했고, 이후에도 변경 지역을 약탈하는 브르타뉴 브로그웨네드의 군주 와로흐 2세를 제압하기로 결정하고 594년 토벌대를 파견했다. 원정 결과가 어땠는지는 알려진 바 없지만, 브르타뉴가 이후로 조용해진 것을 볼 때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듯하다. 595년, 튀링겐과 북해 연안에 살던 바르네스족이 반란을 일으켰다. 프랑크군은 즉시 투입되어 이들을 모조리 살육하고 이 지역에 대한 프랑크의 주권을 복원시켰다. 한편 바이에른 왕 가리발트 1세가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독립할 낌새를 보이자, 킬데베르 2세는 바이에른으로 쳐들어가서 그를 축출하고 타실로 1세를 왕위에 올렸다. 이렇듯 대외에서 문제가 연이어 터졌기 때문에, 네우스트리아의 숙적 프레데군트를 축출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596년 초, 킬데베르 2세가 26세의 젊은 나이에 승하했다. 프레데가르는 그가 왕비 페일루바와 함께 독살당했다고 주장하면서도 별다른 근거는 없으며 단지 소문일 뿐임을 인정했다. 사후에 각각 10살과 9살인 두 아들 테우데베르 2세와 테우데리크 2세가 왕위에 올랐고, 조모인 브룬힐트가 섭정을 맡았다. 이 소식을 접한 프레데군트는 지금이야말로 브룬힐트를 물리치고 프랑크 왕국 전역을 제패할 때라고 판단했다. 그녀는 12살의 아들 클로타르 2세와 함께 군대를 일으켜 파리로 진격했다.
몇몇 아우스트라시아 귀족들의 호응 덕분에 일드프랑스의 일부 지역을 확보한 후, 프레데군트는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의 영내로 진입했다. 이윽고 수아송 인근의 라포에서, 네우스트리아군과 아우스트라시아군이 맞붙었다. 막대한 희생자를 양산한 이 라포 전투에서 승리한 프레데군트는 여세를 몰아 아우스트라시아의 수도인 메츠로 진격하려고 했다. 그러나 도중에 폐렴에 걸려 쓰러졌고, 1년 동안 병상에 누워 있다가 사망했다. 일설에 따르면, 프레데군트는 병상에 누워서도 브룬힐트를 잡아오라며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2.4.4. 브룬힐트의 승리와 손자들의 내전
브룬힐트는 프레데군트가 사망한 뒤 곧바로 네우스트리아 왕국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녀는 주변 정세가 여전히 불안했고 귀족들이 여전히 독립적으로 구는 상황에서 섣불리 공세를 개시했다간 위험하다고 여겼다. 여기에 599년 프로방스에서 역병이 발생해 군대를 일으키는 것이 더 힘들어졌다. 그래서 그녀는 충실한 관료를 임명하고 잠재적인 반역자들을 숙청하며 행정을 돌보는 등 내치에 전념했다. 그러다가 600년, 기반을 어느 정도 닦았다고 판단한 브룬힐트는 친히 아우스트라시아와 부르군트 연합군을 이끌고 두 손자와 함께 파리로 진군했다. 여기에 맞서 16살의 클로타르 2세가 방어했다. 양군은 도르멜 근처의 오르베나 강둑에서 맞붙었다. 네우스트리아군은 이 전투에서 시체가 너무 많아 강을 막을 정도로 참혹한 패배를 당했고, 클로타르 2세는 얼마 안 남은 병력을 이끌며 파리로 도주했다. 이후 여러 마을을 차례대로 공략하고 파괴한 아우스트라시아-부르군트 연합군은 클로타르 2세를 포위했다. 결국 클로타르 2세는 세나와 루아르 강 사이에 있는 영역 전체를 부르군트에게 넘기고, 오이즈, 캉슈, 영국해협 등 해안 지대를 아우스트라시아에 넘기는 평화협약에 동의해야 했다. 이제 클로타르 2세에게 남은 것은 센 강 하류에 자리잡은 12개 마을 뿐이었다.하지만 브룬힐트는 네우스트리아 왕국을 병합하지 않고 클로타르 2세가 조그마한 왕국에서 계속 군림하도록 내버려뒀다. 이는 아우스트라시아-부르군트 연합이 네우스트리아 왕국과 대립할 때는 단결하지만 공동의 적을 무너뜨린 뒤에는 서로 세력 경쟁을 벌이다가 나중에는 내전을 벌일 거라고 여겼고, 아우스트라시아 귀족들을 힘겹게 통제하는 상황에서 네우스트리아 귀족까지 통제하기는 버겁다고 여겼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래서 네우스트리아를 껍데기나마 남겨놓고 상파르뉴 공작 비시온과 프로방스 지사 에길라를 반역을 꾀한 혐의로 처형하는 등 정적 숙청에 힘을 기울였다. 이 무렵, 바스크인들이 아두르 강과 가론 강 계곡을 장악하고 프랑크 왕국을 잇따라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이에 브룬힐트는 602년 군대를 파견해 이들을 물리치고 그들을 복종시킨 후 공물을 바치도록 했다. 또한 바스크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바스코니아 공작을 세웠다.
이윽고 아우스트라시아의 테우데베르 2세가 15살이 되어 성인식을 거행했다. 브룬힐트는 손자에게 노예 신분이던 빌리힐데라는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도록 했다. 이는 훌륭한 가문에서 며느리를 맞아들이면 자신의 권력이 약화될 것을 우려한 조치였다. 브룬힐트는 일찍이 아들 킬데베르 2세에게도 평범한 신분이었던 페일루바를 왕비로 맞이하게 했다. 페일루바는 시어머니에 대한 흠잡을 데 없는 충성심을 보이며 공손하게 처신했다. 그러나 빌리힐데는 이와 달리 브룬힐트의 간섭에서 벗어나 여러 귀족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면서 남편인 테우데베르 2세에게 할머니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활동하라고 권고했다. 테우데베르 2세는 왕비 빌리힐데의 말에 동감했고, 점차 조모인 브룬힐트를 적대하기 시작했다.
604년 말, 클로타르 2세가 일전의 패전으로 잃어버린 땅을 되찾기 위해 부르군트 왕국을 공격했다. 그들은 센 강과 루아르 강 사이에 있는 여러 도시와 마을을 공격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부르군트의 테우데리크 2세는 형에게 협약을 위반한 클로타르 2세를 응징하자고 요청했지만, 테우데베르 2세는 병력을 보내길 거부했다. 이에 테우데리크 2세가 독자적으로 진군하여 루아르 강으로 가서 네우스트리아군과 맞붙었다. 이 전투에서 부르군트 선봉대를 이끌었던 베르토랄트가 아들과 함께 전사했지만, 부르군트군은 이에 굴하지 않고 밀어붙여 적장 메로벨을 사로잡고 랑데리크를 패퇴시키는 등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테우데베르 2세가 콩피에뉴에서 클로타르 2세와 평화협약을 맺고 아무런 손실 없이 돌아가게 하는 바람에 전과를 확대시키지 못했다. 이후 부르군트와 아우스트라시아 왕국 사이에 긴장감이 흘렀지만, 브룬힐트가 내전을 벌이는 것만큼은 원하지 않았기에 몇년 동안은 별 탈 없이 흘러갔다. 브룬힐트가 수아송에 있는 생메다드 바실리카 대성당에서 나오는 수입을 받기를 거절했을 때, 테우데베르 2세는 이를 확인해달라고 요청하는 지역 주교에게 할머니가 그 돈을 계속 받기를 바란다는 답장을 보내기도 했다.
605년, 테우데리크 2세는 할머니의 요청에 따라 프로타디우스를 재무관으로 삼았다. 프로타디우스는 재무 능력은 뛰어났지만 잔인한 인물이었다. 그는 온갖 기발한 방식으로 세금을 매겨 백성들을 착취해 재고를 풍족하게 했으며, 정적들을 잡아들여 온갖 잔혹한 고문을 가했다. 그의 전횡에 반감을 품은 병사들이 왕의 천막을 에워싼 후 프로타디우스를 처형하라고 요구하자, 테우데리크 2세는 그들을 달래기 위해 운실렌을 보냈다. 그러나 운실렌은 군인들에게
"왕께서 프로타디우스의 처형을 명령했다."
라며 거짓말을 했고, 병사들은 이에 고무되어 프로타디우스를 죽였다. 이후 새로운 재무관에 선임된 클라우디우스는 폭식을 일삼아 무척 뚱뚱했지만 좋은 교육을 받아 지성이 뛰어났고 모두에게 온화하게 대해 두터운 인망을 샀다. 그러나 총신 프로타디우스를 죽인 것에 분노한 브룬힐트는 운실렌을 체포해 유죄를 선고하고 발을 자른 후 재산을 몰수하는 조치를 취했으며, 프로타디우스의 죽음에 연루된 또다른 귀족이었던 울프는 파베른에 있는 자신의 별장에서 살해되었다.606년, 테우데리크 2세는 서고트 왕국의 위테리크 왕에게 그의 딸인 예르멘베르다와 결혼하고 싶다는 제안을 했다. 강력한 프랑크 왕국과 손을 잡는다면 득이 된다고 본 위테리크는 흔쾌히 허락했고, 예르멘베르다는 607년 샬롱으로 가서 테우데리크 2세와 약혼했다. 그러나 이 결혼은 이뤄지지 않았다. 브룬힐트가 서고트 왕국을 등에 업은 며느리를 제어할 수 없다고 여겨 결혼을 결사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테우데리크 2세는 1년 후 예르멘베르다를 돌려보냈지만 지참금은 그대로 가졌다. 위테리크는 이에 분노하여 네우스트리아 왕 클로타르 2세와 테우데리크 2세의 형제인 아우스트라시아 왕 테우데베르 2세와 동맹을 맺고, 랑고바르드 왕국의 군주였던 아길루프와도 손을 잡아 테우데리크 2세를 협공하려고 했다. 그러나 각자 사정이 있었기 때문인지 연합 공격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위테리크를 암살한 뒤 서고트의 왕위에 오른 군데마르 역시 셉티마니아 공작 불가르를 통해 테우데베르 2세와 서신을 주고 받으며 테우데리크 2세와 브룬힐트를 조속히 타도하려 했지만 실현에 옮기지는 못했다.
610년, 아우스트라시아의 빌리힐데 왕비가 갑자기 사망하고 테오데힐트가 새 왕비가 되었다. 프레데가르에 따르면, 테오데힐트가 빌리힐데를 독살하고 그 자리를 가로챘다고 한다. 빌리힐데는 브룬힐트에게 복종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우스트라시아 왕국과 부르군트 왕국 사이에 평화가 유지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테오데힐트 왕비를 비롯한 아우스트라시아의 귀족들은 달랐다. 그들은 일전에 부르군트에 넘겼던 생트, 샹파뉴, 투르가우, 그리고 프로방스 서부와 알자스 일부 지역을 되찾기를 바랬다. 테우데베르 2세는 그들의 설득에 넘어가 클로타르 2세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과 힘을 합쳐 부르군트를 협공하자고 제안했다. 부르군트의 테우데리크 2세는 낌새를 눈치채고 역시 클로타르 2세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과 합세하라고 권고했다. 클로타르 2세는 두 제의를 놓고 고심한 끝에 중립을 선택했다.
610년 초, 아우스트라시아군이 알자스를 침공하여 강제로 병합했다. 테우데리크 2세는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라인 강 하류에 있는 셀츠 요새에서 회담을 가지기로 했다. 그러나 테우데리크 2세가 소수의 무장 수행원과 함께 회담장에 간 것과 달리, 테우데베르 2세는 정예병을 대거 동원해 회담에 참석했다. 결국 테우데리크 2세는 강한 압박을 받고 알자스를 형에게 공식적으로 넘겨야 했다. 이리하여 부르군트 왕국이 약한 모습을 드러내자, 알레만니인들은 자발적으로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에 귀순한 뒤 부르군트 왕국에 귀속된 아벙슈 일대를 파괴했다. 이 일련의 상황에 분노한 브룬힐트는 테우데리크 2세의 편에 서서 테우데베르 2세와 대립했다.
612년 5월, 테우데리크 2세는 부르군트의 전 병력을 집결한 뒤 할머니 브룬힐트와 함께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을 침공했다. 그들은 안델로트를 통과한 후 툴루즈를 공략했다. 이에 테우데베르 2세 역시 아우스트라시아의 전군을 이끌고 툴루즈 교외에서 맞붙었다. 전투 결과는 브룬힐트와 테우데리크 2세가 지휘한 부르군트군의 압승이었고, 테우데베르 2세는 수많은 정예병을 잃은채 아르덴 숲을 통해 도주했다. 이후 색슨족과 튀링겐족 등 여러 게르만족을 용병으로 고용한 뒤 612년 7월 톨비악(현재의 췰피히)에서 재차 맞붙었다. 《프레데가르 연대기》에 따르면, 프랑크 왕국의 성립 이래 이 톨비악 전투 만큼 막대한 희생자가 양산된 전투는 없었으며, 전사자들은 마치 그들이 아직 살아있는 것처럼 서로 몸을 기댄채 서 있었다고 한다. 테우데베르 2세는 이 전투에서도 역시 패배한 뒤 쾰른으로 도주했다. 그러다가 추격대가 오자 소수의 추종자들과 함께 탈출하여 숲속으로 달아나려 했으나 테우데리크 2세의 부하인 베르타르에게 사로잡혀 끌려왔다.
테우데베르 2세는 왕의 의복과 인장을 빼앗긴 뒤 샬롱 수도원으로 보내져 머리를 깎이고 수도자가 되었다. 그의 어린 아들이었던 메로베는 숙부인 테우데리크 2세의 명령에 의해 돌에 던져지면서 머리가 깨져 죽었다. 《성 콜룸바누스와 제자들의 삶》의 저자였던 바비오의 요나에 따르면, 테우데베르 2세는 수도자가 된 지 며칠 만에 조모인 브룬힐트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다고 한다. 반면 익명의 저자가 기술한 《프랑크 역사집》에 따르면, 테우데베르 2세를 죽여 수급을 보내라는 테우데리크 2세의 지시에 따라 리푸아리 백성들이 목을 베었다고 한다.
이로써 부르군트와 아우스트라시아 일대의 군주가 된 테우데리크 2세는 숙적인 클로타르 2세와 대립했다. 613년 아우스트라시아와 부르군트에서 군대를 소집한 뒤 클로타르 2세에게 사절을 보내 덴텐 공국을 자신에게 넘기지 않는다면 정벌하겠다고 통보했다. 그러나 613년 8월 23일 테우데리크 2세는 메츠에서 돌연 승하했고 부하들은 집에 돌아갔다. 《프랑크 역사집》은 테우데리크 2세가 조모인 브룬힐트에 의해 독살당했다고 주장하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브룬힐트가 유일하게 남은 손자를 굳이 해쳐야 할 동기가 없으며, 《프레데가르 연대기》에 명시된 대로 이질에 걸려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2.4.5. 브룬힐트의 몰락
테우데리크 2세가 승하한 뒤, 브룬힐트는 테우데리크 2세의 사생아이자 자신의 증손자인 시게베르 2세를 아우스트라시아와 부르군트의 왕으로 선포했다. 그러나 아르눌프와 피핀 1세 등 아우스트라시아의 다른 귀족들은 네우스트리아의 클로타르 2세를 왕으로 초빙했다. 클로타르 2세가 안더나흐에 도착했을 때, 테우데리크 2세의 아이들과 함께 보름스에 있었던 브룬힐트는 테우데리크 2세에게 정당한 후계자가 있으니 아우스트라시아의 왕위를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사절을 클로타르 2세에게 보냈다. 이에 클로타르 2세는 특별히 소집된 프랑크 민회에서 왕위 계승자를 결정할 것이라고 답했다.브룬힐트는 클로타르 2세에게 맞서기 위해 알보인, 바나차르 및 지지자들을 규합한 뒤 시게베르 2세를 튀링겐으로 보냈다. 이때 그녀는 알보인에게 비밀 편지를 보내 바나차르 등이 클로타르 2세에게 합류하려 할 경우, 그들을 죽이라고 지시했다. 알보인은 편지를 읽은 뒤 갈기갈기 찢어서 땅에 던졌지만, 바나차르의 부하 한 명이 이를 발견하고 밀랍판에 붙인 후 주군에게 보였다. 바나차르는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는 것을 깨닫고 다른 귀족들에게 이 사실을 털어놨다. 그들은 서고트 왕국 출신의 이민족 여자이고, 절대권력을 휘두르며 귀족들을 모조리 숙청한 브룬힐트에게 두려움과 혐오를 동시에 느꼈고, 이참에 테우데리크 2세의 아이들 중 한 명도 탈출하지 못하도록 한 뒤 브룬힐트와 함께 모조리 죽이고 왕국을 클로타르 2세에게 넘기기로 결의했다.
얼마 후, 부르군트와 아우스트라시아 연합군이 브룬힐트의 지휘하에 클로타르 2세를 격퇴하려고 진군했다. 샹파뉴의 아시네 강에 이르러 네우스트리아군과 마주쳤을 때, 바나차르를 비롯한 수많은 귀족들이 곧바로 귀순했다. 브룬힐트의 원정에 동행했던 시게베르 2세, 코르부스, 메로베는 곧바로 체포되었고, 킬데베르는 가까스로 빠져나온 후 종적을 감췄다. 브룬힐트는 도주를 시도했으나 끝내 딸 테오데린다와 함께 체포되어 클로타르 2세 앞으로 끌려갔다.
클로타르 2세는 메로베의 대부를 맡은 바 있었기에 그를 살려줬지만 시게베르 2세와 코르부스는 죽였다. 이후 브룬힐트에게 40여년 동안 프랑크 왕국을 혼란과 고통에 빠뜨리고 여러 왕을 파멸로 몰고 간 책임을 물었다. 이에 모든 프랑크인과 부르군트인이 한 목소리로
"저 악녀에게 참혹한 죽음을 내려라!"
라고 외쳤다. 브룬힐트는 3일 동안 온갖 고문을 받은 뒤 낙타에 태워진 후 조리돌림을 당했다. 그후 발가벗겨진 채 머리카락과 양 팔, 양 다리가 두 마리의 야생마의 발에 묶인 뒤 두 말이 채찍질을 받고 앞으로 내달리면서 사지가 갈기갈기 찢겨졌다. 이리하여 프랑크 왕국으로 시집온 이래 40여 년 동안 나라를 좌지우지하며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서고트족 여인은 참혹한 최후를 맞이했고, 프랑크 왕국은 프레데군트의 아들 클로타르 2세에 의해 통합되었다.2.5. 클로타르 2세
브룬힐트를 제압하고 프랑크 왕국의 단독 군주가 된 클로타르 2세는 614년 파리에서 공의회를 소집한 뒤 교회에 관한 칙령을 발표했다. 칙령은 교회 선거의 자유를 제한적으로 인정했으며, 성직자들이 국왕을 제외한 세속인들의 보호 아래 귀속되는 것을 금지했고, 성직자들을 위해 주교급 또는 법관과 주교가 함께 참여하는 법원을 개설했다. 또한 모든 교육과 과학 연구는 교회의 책임하에 실시되었다. 칙령의 세속적인 조항들은 왕권의 측면에서 국민들, 특히 귀족들에게 유리한 내용이 많았다. 범죄자가 현장에서 붙잡히지 않는 한 피고인의 말을 듣지 않고 사형을 선고하는 것이 금지되었다.판사와 백작은 주어진 지역에 살고, 그 지역에 재산이 있는 사람들 중에서 임명되어야 했다. 귀족들은 이 조항에 따라 판사와 백작 지위를 독점하고 세습했다. 클로타르 2세는 법적 권리를 침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과부와 소녀들을 그들의 동의없이 결혼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새로 제정된 세금은 폐지되었으며, 주인의 허락없이 교회와 사유지에서 왕 소유의 돼지를 방목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한편, 유대인들은 관직을 맡을 권리를 박탈당했다. 바나차르는 브룬힐트 축출에 공을 세운 보답으로 부르군트 공작에 임명되었으며, 클로타르 2세로부터 폐위될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는 맹세를 받아냈다. 또한 아르눌프는 614년경 메츠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옛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의 영역은 라돈과 후카 등 귀족들이 다스리다가 623년부터 피핀 1세의 관할하에 들어갔다.
617년, 클로타르 2세는 랑고바르드 왕국의 군주 아길루프로부터 36,000솔리디의 선물을 받은 후 랑고바르드 왕국이 본래 지불해야 하는 연간 12,000개의 금화 공물을 취소했다. 622년, 아우스트라시아의 귀족들로부터 자신들을 이끌 왕을 세우라는 강한 압력을 받은 클로타르 2세는 아들 다고베르 1세를 아우스트라시아의 왕으로 선임했다. 당시 18세였던 다고베르 1세는 메츠에 도착한 뒤 메츠 주교 아르눌프와 피핀 1세의 보좌를 받았다. 다만 프로방스와 오베르뉴, 랭스 일대는 아우스트라시아로부터 이탈하여 클로타르 2세의 수중에 들어갔다.
624년, 다고베르 1세는 바이에른 귀족 크로도알트가 막대한 부를 활용해 용병을 고용한 뒤 아우스트라시아를 침략하는 것에 분노해 군대를 파견하여 격파한 뒤 크로도알트를 체포한 후 피핀 1세의 조언에 따라 처형 명령을 내렸다. 클로타르 2세는 크로도알트로부터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면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겠다는 서신을 받고 아들 다고베르 1세에게 크로도알트를 살려주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다고베르 1세는 부왕의 명령을 무시하고 크로도알트를 처형했다. 이 일로 부자간의 사이가 악화되었다.
625년, 클로타르 2세의 왕비이자 다고베르 1세의 계모인 시킬트의 여동생 고멘트루트가 다고베르 1세와 결혼했다. 이때 다고베르 1세는 부왕 클로타르 2세에게 프로방스, 오베르뉴, 랭스 일대를 지참금 형식으로 돌려달라고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이로 인해 부자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자, 메츠의 주교 아르눌프를 포함한 12명의 프랑크 귀족들이 공의회를 개최해 중재에 나섰고, 클로타르 부자는 곧 화해했다. 클로타르 2세는 아들 다고베르 1세의 요청을 받아들이되 루아르와 프로방스의 일부 영토는 계속 가지기로 했다.
626년, 부르군트 공작 바나차르가 왕의 허락 없이 주교회의를 소집할 권한을 얻었으나 곧 사망했다. 클로타르 2세는 바나차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참에 부르군트 공국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바나차르의 아들 고딘이 계모인 베르타와 결혼한 걸 문제 삼고 교회법을 어긴 죄를 적용해 체포하려고 했다. 이에 고딘은 교회에 피신한 뒤 베르타와 헤어질 테니 용서해 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고딘이 왕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베르타가 고발하자, 클로타르 2세는 고딘을 죽이기로 했다. 고딘은 성지 순례를 떠나 속죄하라는 명령을 받고 길을 떠났다가 샤르트르 인근에서 왕이 보낸 자객에게 살해되었다. 그후 클로타르 2세는 부르군트 귀족들과 궁정 관료들을 트루아에 소집한 뒤 바나차르의 후임자가 되길 원하는지 물었다. 그들은 왕의 의중을 눈치채고 한 목소리로 부르군트 공작이 되기를 원하지 않으며 오직 왕이 직접 다스리기를 요청했다. 이리하여 부르군트는 클로타르 2세의 소유로 돌아갔다.
2.6. 다고베르 1세
629년 10월 18일, 클로타르 2세가 45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왕을 떠나 보낸 네우스트리아인들은 아우스트라시아의 왕 다고베르 1세가 자신들을 다스리는 것에 반감을 품고, 카리베르 2세를 자신들의 왕으로 추대하려 했는데, 외숙부인 브로둘프가 이 계획을 주도했다. 그러나 부왕의 승하 소식을 전해들은 다고베르 1세는 그들이 미처 왕을 선출하기 전에 재빨리 행동했다. 모든 아우스트라시아인 측근들에게 스스로 무장하도록 한 뒤 부르군트와 네우스트리아에 사절을 보내 자신에게 복종하라고 명령했다. 이후 친히 랭스를 거쳐 수아송으로 이동하면서 여러 귀족과 주교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그가 이렇듯 신속하게 움직이자, 네우스트리아의 귀족들은 어쩔 수 없이 다고베르 1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권력을 장악한 다고베르 1세는 브로둘프를 처형했지만, 어릴 때부터 신체가 허약해 오래 살지 못할 게 분명한 카리베르 2세는 별로 위협적이지 않다고 여겨 아키텐의 왕으로 세웠다.그리하여 프랑크 왕국의 최고 권력자가 된 다고베르 1세는 파리를 수도로 삼고, 아우스트라시아 귀족들이 군사적인 자치권을 누릴 수 있게 하여 지지 기반을 강화한 후, 란덴의 피핀 1세를 궁재로 임명해 지역 귀족들을 통제하도록 했다. 또한 카리베르 2세의 외숙부이며 일전에 그를 네우스트리아의 왕으로 세우려는 계획을 주도했던 브로둘프를 처형했다. 이제 이복동생을 자기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다고 확신한 다고베르 1세는 카리베르 2세를 아키텐의 왕으로 세웠다. 몸이 허약했던 카리베르 2세는 3년만인 632년에 승하했다. 아키텐의 귀족들은 카리베르 2세의 아들인 킬페리크를 왕으로 추대했지만 곧바로 투입된 다고베르 1세의 군대가 킬페리크를 살해했다. 이로써 아키텐은 다고베르 1세에게 귀속되었다.
한편, 슬라브가 점차 서진하면서 프랑크인들과 접촉했다. 프랑크 왕국의 북동쪽 지역에서는 슬라브 상인들이 잇따라 방문했으며, 사모[5]는 6세기부터 시작된 서슬라브족과 판노니아 평원에 정착한 아바르 사이의 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가 625년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둔 보헤미아의 벤트인[6]으로부터 왕으로 선출되었다. 다고베르 1세는 이러한 상황을 면밀히 살피면서 동방 원정을 떠날 적절한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려던 630년경, 프랑크 상인들이 보헤미아를 지나가던 중 벤트인의 습격을 받아 몰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다고베르 1세는 이를 빌미삼아 사모와 전쟁을 벌이기로 결의했다.
다고베르 1세의 명령이 내려지자, 아우스트라시아 전역에서 군대가 소집되었다. 그는 군대를 세 부대로 나누었는데, 한 부대는 자신이 이끌었으며, 알레만니족으로 구성된 두 번째 부대는 흐로도베르크 공작이 이끌도록 했다. 그리고 랑고바르드족 출신 용병들이 세 번째 부대를 결성하여 슬라브의 영역을 침공했다. 알레만니족과 랑고바르드족은 국경 지대에서 벌어진 몇 차례의 소규모 접전에서 승리해 포로와 전리품을 확보했다. 다고베르 1세가 이끄는 아우스트라시아군은 사모와 수행원들이 자리잡은 보가티스부르크 요새를 포위했다. 그러던 중 사모와 벤트인들이 성문을 열고 프랑크인에게 싸움을 걸었다. 3일 동안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한 프랑크인들은 숙영지와 보급품 및 전리품을 남겨두고 도주했다. 《프레데가르 연대기》에 따르면, 이 패배는 벤트인들이 특별히 용맹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고베르 1세의 왕권 강화 정책에 반감을 품은 프랑크인 귀족들의 배신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다고베르 1세를 물리친 뒤, 사모는 프랑크 왕국으로 서진했고, 튀링겐 일대까지 밀어붙이며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그동안 프랑크 왕국의 봉신으로 지냈던 소르브 공작 데르반은 다고베르 1세를 떠나 사모에게 복종했다. 다고베르 1세는 보복 원정을 벌이려고 했지만 귀족들을 통제하는 데 애를 먹었기 때문에 쉽사리 병력을 확보할 수 없었다. 631년, 슬라브인들의 서진으로 곤경에 처했던 색슨족이 다고베르 1세에게 사절을 보내 슬라브인을 포함한 외적의 습격으로부터 아우스트라시아의 국경을 지켜줄 테니 공물을 줄여달라고 요청했다. 다고베르 1세는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클로타르 1세 시기부터 매년 500마리의 소를 바치는 관례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켰다. 그러나 슬라브인들이 왕국의 영역을 침략해 약탈을 자행하는 상황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결국 튀링겐 공작 라둘프는 프랑크 왕국이 슬라브인의 습격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주지 못하는 것에 반감을 품고,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독립한 뒤 사모와 동맹을 맺었다.
631년, 수인틸라 왕의 귀족 억압 정책에 반감을 품은 서고트 귀족들이 시세난드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시세난드는 프랑크 왕국에 도움을 요청하면서 그 대가로 500파운드에 달하는 황금 접시를 바치겠다고 제안했다. 이 접시는 훈족과의 전쟁 때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가 아버지 테오도리크 1세를 잃은 서고트 왕자 토리스문드에게 위로하는 차원에서 선물했다고 전해지는 보물이었다. 다고베르 1세는 이 제안에 혹하여 시세난드를 돕기로 했다.
프랑크 왕국이 시세난드를 도우려 한다는 소식이 이베리아 반도 각지에 알려지자, 민심은 급격히 동요했다. 프랑크군이 사라고사에 도착하자마자 사라고사 시민들이 시세난드에게 귀순했고, 모든 군대가 시세난드를 서고트의 왕으로 선포했다. 631년 3월 26일 시세난드가 툴레도에 입성한 후 수인틸라는 폐위되었지만, 시세난드는 수인틸라를 죽이지 않고 2년 동안 감옥에 가두었다. 프랑크군이 노획한 전리품을 싣고 조국으로 돌아간 뒤, 다고베르 1세는 약속한 황금 접시를 받기 위해 시세난드에게 사절을 보냈다. 시세난드는 약속대로 접시를 건넸지만, 사절들이 귀환 중에 강도떼의 습격을 받으면서 접시를 잃어버렸다. 이후 양자간의 긴 협상 끝에, 다고베르 1세는 200,000솔리디에 달하는 금액을 보상받기로 합의했다.
632년, 다고베르 1세는 아우스트라시아 귀족들의 요구에 따라 3년 전에 왕비 라그네트루드 사이에서 낳은 시게베르 3세를 아우스트라시아의 왕으로 세웠다. 이듬해, 다고베르 1세는 왕비 난틸다로부터 또다른 아들인 클로비스 2세를 낳았다. 왕은 네우스트리아, 부르군트, 그리고 아우스트라시아의 귀족들을 불러모은 후,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군트인들에게 클로비스 2세를 왕으로 받들고 아우스트라시아인들은 시게베르 3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했다.
635년, 하도인에게 명령하여 부르군트에서 소집한 병력을 이끌고, 가스코뉴와 연합하여 프랑크 왕국에 쳐들어와 약탈을 일삼고 있는 바스크인들을 토벌하도록 했다. 바스크인들은 전투에서 패배한 뒤 피레네 산맥으로 피신하려고 했다. 부르군트군은 그들을 맹렬히 추격해 많은 포로를 확보한 뒤, 여세를 몰아 그들의 산악 마을까지 들어가서 집을 모조리 불태우고 모든 재산을 빼앗았다. 다만 철수하던 중 바스크인들의 습격으로 후위대를 이끌고 있었던 프랑크 공작 한 명이 전사했다. 636년, 가스코뉴 귀족들과 그들의 공작 아이기나는 다고베르 1세에게 바스크인과 손잡았던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아들들을 인질로 보냈다.
다고베르 1세는 여세를 몰아 그동안 프랑크 왕국에 대적하며 연이어 약탈을 벌였던 브르타뉴를 공격해 렌과 낭트를 파괴한 뒤, 친구인 엘리기우스 등의 사절단을 파견해 복종을 요구했다. 브르타뉴 돔노네의 왕 주디카엘은 다고베르 1세에게 찾아가서 충성을 맹세하며 다시는 프랑크 왕국에 해를 입히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다고베르 1세는 라인 강 하류에 있는 왕국 소유지와 이전의 국경선을 따라 세워진 요새를 회복하고, 위트레흐트에 생베드로 성당과 조폐국을 세웠다. 이리하여 프랑크 왕국은 서고트 왕국의 영토인 셉티마니아를 제외한 갈리아 전체를 장악했다. 그리고 동로마 제국 황제 이라클리오스에게 사절을 보내 양국간의 영구적인 평화를 약속했다.
이리하여 다고베르 1세는 위신을 세웠지만, 일전에 서슬라브인들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당한 일로 아우스트라시아 귀족들에게 경원시되는 것에 불안감을 느끼고 그들을 통제하고자 노력했다. 다고베르 1세는 공작들을 해임하고 새롭게 임명하는 방식으로 귀족들이 제멋대로 굴지 못하게 했으며, 콘스탄츠와 추르 등 새로운 교구들 사이의 경계를 규정하는 등 동부 교회도 통제하려 했다. 638년 9,000명의 불가르인들이 아바르족을 피해 바이에른으로 피신한 후 자신들이 이곳에서 겨울을 보내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다고베르 1세는 이를 허용했다간 불가르인들이 아우스트라시아 귀족들의 사병으로 귀속되어 그들의 군사력을 강화시킬 것을 우려했다. 이에 겨울을 보낼 수 있도록 허락한 뒤 군대를 은밀히 파견해 불가르인들을 모조리 몰살시켜 버렸다. 한편, 다고베르 1세는 유대인들의 공직 참여를 금지한 부왕 클로타르 2세의 반유대주의 정책을 이어가 유대인들에게 가톨릭 세례를 강요했고, 이를 따르지 않은 이들을 추방하라고 명령했다.
2.7. 왕조의 몰락
2.7.1. 클로비스 2세와 시게베르 3세
638년 말 병에 걸려 생드니 수도원으로 이송된 다고베르 1세는 639년 1월 19일에 승하했다. 클로비스 2세의 모후 난틸다 왕비는 다고베르 1세가 축적한 국고의 3분의 1을 얻었고, 클로비스 2세도 3분의 1을 받았으며, 나머지 3분의 1은 피핀 1세에 의해 메츠로 이송되어 시게베르 3세의 수중에 들어갔다. 당시 6살이었던 클로비스 2세의 공식적인 섭정은 난틸다 왕비였지만, 실권은 에가 궁재에게 넘어갔다. 에가는 641년에 사망할 때까지 나라를 안정적으로 이끌었으며, 다고베르 1세가 귀족들로부터 빼앗아간 재산을 원주인에게 돌려줘서 그들의 지지를 얻었다. 641년 에가가 사망한 후 새 궁재가 된 에르치노알트는 온순하고 친절한 성품의 소유자였으며 청렴했다고 한다.그러나 부르군트의 상황은 좋지 않게 흘러갔다. 627년 바나차르 2세가 사망한 후 클로타르 2세가 왕실의 직할지로 삼은 이래, 부르군트에는 별다른 지도자가 세워지지 않았으며, 왕실의 통제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 결과, 부르군트 지역의 귀족과 주교들은 프랑크 왕국의 의중과는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활동했다. 다고베르 1세가 생전에 바스크인을 물리치고 그들과 손잡았던 가스코뉴 귀족들을 통제하고자 세웠던 윌레바트 공작은 리옹과 발랑스 사이의 영역을 사유지로 삼고 권세를 누렸다. 난틸다 왕비는 642년 오를레앙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자신의 조카인 라그노베르트와 결혼한 플레차드를 부르군트의 궁재로 삼으려고 했다. 플레차드는 부르군트 귀족들에게 그들의 재산과 명예를 존중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윌레바트는 이를 따르길 거부하고, 프랑크 왕국에 적대적인 세력의 지도자가 되었다.
642년, 난틸다 왕비는 오를레앙 공의회가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그해 9월, 클로비스 2세는 에르치노알트 및 플레차드와 함께 오툉으로 간 뒤 윌레바트에게 출두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윌레바트는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라고 확신한채 전 병력을 동원해 오툉으로 쳐들어갔다. 이리하여 벌어진 전투에서 수많은 프랑크인과 부르군트인이 전사했고, 윌레바트는 목숨을 잃었다. 그리하여 플레차드가 부르군트 전체의 지도자가 되었으나, 샬롱에 도착한 직후 열병에 걸려 왈레바트가 사망한 지 11일만에 병사했다.
한편, 시게베르 3세가 다스리는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의 상황도 그리 좋지 않게 돌아갔다. 640년 란덴의 피핀 1세가 사망한 뒤, 아우스트라시아 왕실은 피핀 가문의 강력한 위세를 경계해 피핀 1세의 아들 그리모알트의 승계를 받아들이지 않고, 평소 피핀 가문에 적대적이었던 바이셈부르크 가문의 일원인 오토를 란덴 공작으로 선임했다. 얼마 후, 튀링겐 공작 라둘프가 아우스트라시아 분국에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이에 시게베르 3세는 11~12살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친히 원정군을 이끌고 출진했다.
우선 라둘프의 동맹자였던 크로도알트의 아들 파라를 사로잡아 처단했고, 뒤이어 라인 강을 건너 튀링겐 공국으로 진격했다. 라둘프는 언스트루트의 높은 둑에 울타리를 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전 병력과 가족들을 울타리 너머 진영에 세운채 장차 있을 전투를 준비했다. 시게베르 3세는 그의 군대와 함께 그곳에 도착한 뒤 평원에 숙영지를 세웠다. 그러나 이후에 이어진 전투에서 프랑크군이 대패해 수천 명의 병사가 전사했고, 살아남은 프랑크인들은 전부 달아났다. 《프레데가르 연대기》에 따르면, 어린 시게베르 3세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안장에 앉은 채 울음을 터트렸다. 이때 그리모알드가 달려와서 왕이 타고 있는 말 고리를 잡고 이끌어서 튀링겐군에게 죽거나 사로잡힐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줬다고 한다.
전투에서 패배한 뒤, 시게베르 3세는 라둘프가 제시한 조건에 승복하고 평화협약을 맺은 후 본국으로 돌아갔다. 라둘프는 자신을 튀링겐의 왕으로 자처하며 주변 종족들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특히 그의 부추김을 받은 알레만니 공작 로타리가 642년 란덴으로 쳐들어가 오토를 죽였다. 이에 시게베르 3세는 일전에 자신을 구해줬던 그리모알트를 란덴 공작으로 세우고 왕국의 통치를 일임했다. 이 무렵 알지셀 왕이 이끄는 프리슬란트인이 다고베르 1세가 공략했던 도레슈타트와 위트레흐트를 도로 빼앗았다.
그후 시게베르 3세와 클로비스 2세는 실권을 신하들에게 내주고 정치에 별다른 참여를 하지 않다가 각각 656년과 657년에 잇따라 승하했다. 이후 메로베우스 왕조는 급격하게 쇠락했다.
2.7.2. 무력한 왕들
시게베르 3세는 침네차일드와 결혼했으나 아들을 좀처럼 얻지 못했다. 이에 그리모알트는 자기 아들을 양자로 삼을 것을 권고했고, 시게베르 3세는 이를 받아들여 아이에게 '킬데베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얼마 후 침네차일드 왕비가 다고베르 왕자를 낳았다. 이로 인해 킬데베르가 왕이 될 가망성이 사라지는 듯했지만, 그리모알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656년 시게베르 3세가 승하하자, 그리모알트는 사병들을 이끌고 궁궐을 장악한 뒤 어린 다고베르를 삭발시키고 푸아티에의 주교 디도에게 보내 수도자로 삼게 했다. 디도는 이 소년을 아일랜드의 수도원들 중 한 곳으로 데려갔고, 그리모알트의 친자이자 시게베르 3세의 양자인 킬데베르가 킬데베르 3세로서 프랑크의 왕위에 올랐다.그러나 메로베우스 왕가의 피를 물려받지 않은 자가 왕위에 오른 것에 반발하는 이들이 많았다. 특히 클로비스 2세 사후 클로타르 3세를 왕으로 옹립한 뒤 정권을 휘두르고 있었던 궁재 에브로인이 이 기회를 틈타 아우스트라시아를 공략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그리모알드와 킬데베르 3세를 네우스트리아로 유인해 처형했다. 이후 수 개월 동안 차기 아우스트라시아 왕이 될 적임자를 물색한 끝에 시게베르 3세의 조카인 킬데리크 2세를 시게베르 3세의 딸 빌리킬다와 결혼시키고 아우스트라시아의 왕위에 오르도록 했다.
에브로인은 614년 클로타르 2세가 반포했던 칙령을 폐지해 귀족들이 직위를 세습하는 걸 막았고, 중앙 정부에서 파견한 관료의 지시에 무조건 순종하라고 지시했다. 이 정책에 반감을 품은 네우스트리아의 귀족들은 에브로인을 축출할 임모를 꾸몄고, 파리의 새 주교였던 시게브란트도 여기에 가담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곧 발각되었고, 주교는 처형되었다. 에브로인은 말을 듣지 않는 귀족들을 가차없이 숙청하는 한편, 귀족들이 왕궁에 접근하는 것마저 차단했다. 그러나 오툰의 레오데가리우스 주교가 이끄는 부르군트는 그의 통제에 따르지 않은채 관례대로 자치를 누렸다.
665년, 클로타르 3세의 모후 바틸다가 에브로인의 강요에 의해 셀라에 있는 수녀원으로 들어갔다. 에브로인은 이후에도 권세를 누렸고, 클로타르 3세는 별다른 정치 참여를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지내다가 열병에 걸려 재위 16년째인 673년 3월 10일에서 5월 15일 사이에 승하했다. 이에 에브로인은 귀족들과 논의하지 않고 클로비스 2세의 3남이었던 테우데리크 3세를 새 군주로 내세웠다. 부르군트의 레오데가리우스 주교와 형제인 파리 백작 바렌 등의 주교들과 귀족들은 에브로인의 독단적인 처사에 반감을 품고, 킬데리크 2세와 궁재 울포알드에게 에브로인을 몰아내준다면 프랑크 왕국 전체의 왕으로 추대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킬데리크 2세는 파리로 진군해 귀족들의 호응을 얻었고, 테우데리크 3세와 에브로인은 삭발당하여 수도자가 되었다. 테우데리크 3세는 생드니 수도원으로 보내졌고, 에브로인은 부르군트의 룩셀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레오데가리우스 등의 귀족들은 킬데리크 2세에게 프랑크 전체의 왕으로 옹립하는 대가로 세 가지 법령에 서명하도록 했다. 첫 번째 법령은 각 지역마다 고유한 법과 관습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 법령은 고위 관리인 공작과 백작은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전출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으며, 세 번째 법령은 궁재 직을 폐지하는 것이었다. 킬데리크 2세는 이 세 가지 법령 모두를 받아들였다. 다만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는 직위를 유지했다. 그러나 674년 성년이 된 킬데리크 2세는 나라를 스스로 통치하려고 했다. 레오데가리우스가 이를 막으려 들자 주교 직을 박탈하고 룩셀 수도원에 수감했다. 또한 지금까지 아우수트라시아 왕국만 관장하던 울포알드가 왕국 전체를 관장하도록 했다
한편, 툴루즈 공작 루푸스는 673년에서 676년 사이에 프랑크 왕국이 권력 투쟁으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로데즈와 알비를 점령했으며, 전통적으로 네우스트리아 왕국의 소유지인 리모주를 점령했다. 그리하여 루푸스는 비엔 강에서 가론 강까지 이르는 광대한 아키텐 공국을 부활시켰다. 그러나 킬데리크 2세는 툴루즈 공작의 영역 확장에 신경쓰지 않고 귀족들을 숙청했다. 《프랑크 왕국 역사집》에 따르면, 그는 보딜로를 잡아다가 막대로 채찍질을 했다고 한다.
675년, 보딜로와 친구 아말베르트, 잉고베르트는 리브리(오늘날 로그네스) 숲에서 사냥하던 킬데리크 2세를 암살하기로 했다. 왕은 숲에서 사냥하던 중 왕비 빌리칠트, 다섯살 된 장남 다고베르와 함께 살해되었다. 사후 네우스트리아의 왕위에는 지난날 폐위되었던 테우데리크 3세가 복위했다. 한편, 에브로인은 수도원에서 나온 뒤 아우스트라시아로 이동한 후 한 소년을 클로타르 3세의 사생아로 내세우며, 클로비스 3세로서 왕위에 올렸다. 이후 에브로인이 군대를 이끌고 오자, 테우데리크 3세는 레오데가리우스와 함께 도주했다. 에브로인은 권력을 재장악하고 레오데가리우스를 암살했다. 그러나 귀족들이 클로비스 3세의 혈통을 의심해 왕으로 옹립하기를 거부하자, 에브로인은 클로비스 3세를 폐위하여 수도원에 보낸 뒤 테우데리크 3세를 복위시켰다. 아무런 실권이 없었던 테우데리크 3세는 에브로인이 궁재로서 통치를 행사하는 걸 방관했다.
677년, 에브로인은 테우데리크 3세를 대동하여 아우스트라시아 원정에 착수했다. 아우스트라시아 궁재 울포알드는 이에 맞서 다고베르 2세와 함께 출진했다. 양군은 랑그르 전투에서 맞붙었지만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678년, 에브로인은 테우데리크 3세를 부추겨 주교 평의회를 소집한 뒤 오툉의 주교 레제를 킬데리크 2세 암살 혐의로 재판에 회부했다. 이에 대한 증거는 없었지만, 에브로인의 권세를 두려워한 주교들은 유죄를 평결했고 테우데리크 3세 역시 사형을 선고했다.
679년, 울포알드와 다고베르 2세가 잇따라 살해되었다. 에브로인은 아우스트라시아를 병합하기로 마음먹고, 자신의 손아귀에 있는 테우데리크 3세를 프랑크 전역의 단독 군주로 선포했다. 이에 아우스트라시아의 유력 귀족인 피핀 2세와 상파뉴 공작 마르틴이 반기를 들었다. 680년, 에브로인은 루코파오 전투에서 두 귀족을 격파한 뒤 아우스트라시아의 대부분을 초토화시켰다. 패배한 피핀 2세는 자신의 땅으로 피신할 수 있었지만, 마르틴은 랑트로 피신했다가 귀순하면 살려주겠다는 에브로인의 말을 믿고 병사들과 함께 항복했다가 피살당했다. 이제 에브로인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는 듯했지만, 얼마 후 그의 잔혹한 성정에 반감을 품은 에르멘프레드에 의해 궁정에서 살해당했다. 권신 에브로인을 죽인 에르멘프레드는 보물들을 챙긴 후 피핀 2세에게 달려가 귀순했다.
피핀 2세는 새로운 네우스트리아 궁재 와라톤과 평화협약을 맺고 테우데리크 3세의 권위를 인정하되 자신 역시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로 인정받았다. 686년 와라톤이 아들 지젤마르에 의해 폐위된 후, 처남 베르차르가 뒤를 이었다. 와라톤의 아들 지젤마르와 베르차르는 경쟁자들을 최대한 배제해 권력을 유지하길 희망했고, 이로 인해 많은 네우스트리아 귀족들이 갖은 탄압에 시달리다가 아우스트라시아의 피핀 2세에게 귀순했다.
687년 군대를 일으킨 피핀 2세는 뫼즈강을 따라 이동했다. 프랑크 국왕 테우데리크 3세는 피핀 2세의 강대한 권력을 경계하여 베르차르의 편을 들었고, 베르차르는 군대를 일으켜 피핀 2세와 맞설 태세를 갖췄다. 피핀 2세는 평화협약을 제안했지만, 테우데리크 3세는 베르차르의 조언에 따라 이를 거절했다. 이에 피핀 2세는 새벽에 아우스트라시아 군대를 뫼즈 강 건너편에 은밀히 이동시켰다. 날이 밝아오면서, 베르차르는 적의 군영이 텅 비었다는 걸 확인했다. 그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군영으로 들어가서 버려진 물자를 약탈했다.
이때 사전에 매복하고 있었던 피핀 2세의 군대가 덮쳤고, 베르차르의 군대는 별다른 대항도 못하고 궤멸되었다. 테우데리크 3세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베르차르는 적군에게 쫓기다가 끝내 피살되었다.(테르트리 전투) 이후 피핀 2세는 수도 파리로 진격하여 단숨에 공략하고 테우데리크 3세를 붙잡았다. 하지만 국왕을 폐위하지는 않고, 네우스트리아-부르군트 분국의 궁재까지 맡으면서 프랑크 왕국 전역의 궁재가 되었다. 피핀 2세는 680년대 중반부터 프랑크 왕국의 북동쪽 국경을 위협하던 프리시 부족들을 공략하여 689년에 물리치고, 조공 관계를 형성시켰다. 또한 알레만니족과 프랑코니아를 프랑크 왕국에 복속시키고, 영향력을 공고히 다졌다. 한편 알레만니아와 바이에른에 기독교 선교사를 파견하고 수행을 도와 선교 활동를 지원, 장려했다.
691년 테우데리크 3세가 승하한 뒤 클로비스 4세가 즉위해 4년 동안 왕좌에 앉았지만 별다른 실권을 행사하지 못한 채 695년에 승하했고, 뒤이어 동생인 킬데베르 4세가 왕위에 올라 16년 동안 통치했지만 역시 별다른 실권을 행사하지 못하다가 711년에 승하했다. 이후 킬데베르 4세의 아들 다고베르 3세가 왕위에 올랐지만 역시나 허수아비 국왕일 뿐이었다. 피핀 2세는 아우스트라시아에서 통치를 행사하는 한편,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군트를 아들 그리모알드에게 맡겼다.
그러던 714년, 그리모알드가 모종의 이유로 급사했고 피핀 2세도 곧 사망했다. 이후 그리모알드의 아들 테오도랄드가 궁재를 세습했지만, 아직 나이가 어렸기에 피핀 2세의 미망인인 플레트루다가 섭정을 맡았다. 카롤루스 가문의 권력 독점과 세습에 반감을 품고 있었던 네우스트리아의 귀족들은 이때를 틈타 반기를 들었다. 그들은 715년 상파뉴 인근의 숲에서 아우스트라시아군을 격파하고 카롤루스 가문의 지배로부터 독립한 뒤 라겐프리드를 궁재로 선출했다. 프랑크 왕국이 이 일련의 상황으로 혼란스러울 때, 715년 오세르의 주교 사바리크가 오를레앙, 네베르, 아발론, 톤네레를 정복하고 프랑스 남부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었다.
2.7.3. 킬페리크 2세의 왕권 회복 시도와 좌절
킬페리크 2세는 675년 부왕 킬데리크 2세가 암살당한 뒤 수도원에 보내져 40여년 동안 수도자로서 성직 활동에 전념했다. 그러다가 715년 다고베르 3세가 승하한 뒤 반 카롤루스파 세력에 의해 4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그는 갈수록 몰락해가고 있는 메로베우스 왕조를 부활시키기 위해 사력을 다하기로 마음먹었다.716년, 킬페리크 2세는 라겐프리드와 함께 카롤루스 가문이 지배하고 있는 아우스트라시아를 정벌하기 위한 원정군을 일으켰다. 그는 프리슬란트 왕 라드부드와 동맹을 맺고 카롤루스 마르텔이 이끄는 아우스트라시아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여 쾰른 인근 평원에서 격파했다. 마르텔은 에펠 산맥으로 숨었고, 킬페리크 2세는 라겐프리드와 함께 아우스트라시아의 수도인 메츠에 입성했다. 이제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한 플레트루다는 그를 왕으로 인정하고 아우스트라시아의 국고를 넘겼으며, 테오도랄드 역시 궁재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이때까지만 해도 카롤루스 가문은 몰락하고 메로베우스 왕조가 부활하는 듯했다.
그러나 킬페리크 2세와 라겐프리드가 네우스트리아로 돌아갈 때 상황이 극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카롤루스 마르텔은 추종자들을 규합하고 병력을 끌어모은 뒤 돌아가는 적을 추격하여 말메디 인근의 앙블레브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717년 3월 21일, 카롤루스 마르텔은 네우스트리아로 진군해 캉브레 인근의 빈시에서 킬페리크 2세를 상대로 또다시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아우스트라시아로 귀환한 마르텔은 플레트루다와 테오도랄드를 축출한 뒤 클로타르 4세를 아우스트라시아의 왕으로 옹립했다.
카롤루스 마르텔의 세력이 갈수록 커지자, 킬페리크 2세와 라겐프리드는 아키텐의 공작 외드와 동맹을 맺었다. 718년 초, 킬페리크 2세는 외드의 아키텐 군대와 연합하여 수아송 인근에서 카롤루스 마르텔과 격돌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도 대패한 킬페리크 2세는 루아르 강 남쪽으로 도주했고, 라겐프리드는 앙제로 도망쳤다. 이에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한 아키텐의 외드는 킬페리크 2세를 버리고 카롤루스 마르텔에게 귀순했다.
때마침 마르텔이 옹립한 클로타르 4세가 승하했다. 이에 마르텔은 외지에 숨어있었던 킬페리크 2세에게 전령을 보내 프랑크 왕국 전역의 왕으로 인정할 테니 자신을 궁재로 인정한 후 전권을 쥐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더는 대항할 도리가 없었던 킬페리크 2세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719년 병사들에 의해 방패 위로 올려져서 모든 프랑크인의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명목상일 뿐이었고, 마르텔이 사실상 프랑크의 군주로 군림했다. 그후 실의 속에서 조용히 지내던 킬페리크 2세는 721년 2월 13일 아르덴의 아티니에서 승하했다.
2.8. 멸망
킬페리크 2세의 사후 왕위에 오른 이는 다고베르 3세의 아들로 수도원에 들어가 성직 활동을 하고 있었던 테우데리크 4세였다. 카롤루스 마르텔은 그를 명목상의 왕으로 섬기면서도 전권을 자신의 손아귀에 쥐었다. 마르텔은 내치를 안정적으로 이끌었고, 732년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우마이야 칼리파군을 격파해 기독교의 수호자로서 만인의 칭송을 받았다. 그러던 737년 테우데리크 4세가 승하했다. 카롤루스 마르텔은 왕을 세우기를 거부하고 왕좌를 비워두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기록이 미비해 분명하지 않으나, 즉위하기 위한 사전 작업을 하려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마르텔은 왕이 없는 왕국의 궁재로서 전권을 행사하다가 741년에 사망했고, 두 아들 카를로만과 피핀 3세가 궁재를 세습했다. 두 사람 역시 몇년 동안 왕을 옹립하지 않다가 이복동생 그리포와 처남인 바이에른 공작 오딜로의 반란에 직면하자, 자신들의 통치에 합법성을 더하기 위해 743년 선왕의 아들인 킬데리크 3세를 왕으로 옹립하기로 했다.
그후 카롤로만과 피핀 3세는 최고 권력을 놓고 대립했다. 그러다가 경쟁에서 밀린 카롤로만이 747년 수도원에 들어가면서 피핀 3세가 유일한 궁재가 되었다. 751년, 피핀 3세는 모두가 자신을 추종하는데 왕이 되지 않을 이유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프랑크 대표단을 교황 자카리아에게 보내 다음과 같이 문의했다.
"실력은 있는데 왕이 되지 못한 자가 왕이 되어야 합니까? 아니면 왕이면서도 실력이 없는 자가 통치를 해야 합니까?"
자카리아는 피핀 3세의 속내를 눈치채고 그를 프랑크의 왕으로 인정했다. 이에 피핀 3세는 751년 11월 킬데리크 3세의 머리를 삭발시키고 생오메르에 있는 생베르탱 수도원으로 보냈다. 그후 그곳에 갇혀 지내던 킬데리크 3세는 754년경에 사망했다. 이리하여 메로베우스 왕조는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고, 카롤루스 왕조가 개창되었다.
3. 국왕 계보
메로베우스 왕조 계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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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디오 | ||||
메로베우스 | ||||
킬데리크 1세 | ||||
전 프랑크인의 왕 | ||||
클로비스 1세 | ||||
수아송 | 파리 | 오를레앙 | 랭스 | |
클로타르 1세 | 킬데베르 1세 | 클로도미르 | 테우데리크 1세 | |
킬데베르 1세 | 테우데베르 1세 | |||
클로타르 1세 | 테우데발트 | |||
전 프랑크인의 왕 | ||||
클로타르 1세 | ||||
수아송 → 네우스트리아 | 파리 | 오를레앙 → 부르군트 | 메츠 → 아우스트라시아 | |
킬페리크 1세 | 카리베르 1세 | 군트람 | 시게베르 1세 | |
분할 | 킬데베르 2세 | |||
클로타르 2세 | 테우데리크 2세 | 테우데베르 2세 | ||
테우데리크 2세 | ||||
시게베르 2세 | ||||
전 프랑크인의 왕 | ||||
클로타르 2세 | ||||
전 프랑크인의 왕 | 아우스트라시아 | |||
클로타르 2세 | 다고베르 1세 | |||
아키텐 |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고뉴 | 아우스트라시아 | ||
카리베르 2세 | 다고베르 1세 | |||
킬페리크 | ||||
다고베르 1세 | 시게베르 3세 | |||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고뉴 | 아우스트라시아 | |||
클로비스 2세 | 시게베르 3세 | |||
클로타르 3세 | 킬데베르 3세 | |||
클로타르 3세 | ||||
클로타르 3세 | 킬데리크 2세 | |||
테우데리크 3세 | ||||
킬데리크 2세 | ||||
테우데리크 3세 | 클로비스 3세 | |||
다고베르 2세 | ||||
테우데리크 3세 | ||||
클로비스 4세 | ||||
킬데베르 4세 | ||||
다고베르 3세 | ||||
킬페리크 2세 | 클로타르 4세 | |||
킬페리크 2세 | ||||
테우데리크 4세 | ||||
킬데리크 3세 |
3.1. 요약본
Regnum Francorum 프랑크인의 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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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데리크 2세 | 분할 | 테우데리크 3세 | 클로비스 4세 | |
킬데베르 4세 | 다고베르 3세 | 킬페리크 2세 | 테우데리크 4세 | |
메로베우스 왕조 | 카롤루스 왕조 | |||
킬데리크 3세 | 피핀 | 카를 1세♔ | 루트비히 1세♔ | |
♔: 신성 로마 황제 서프랑크인의 왕 → 중프랑크인의 왕 → 동프랑크인의 왕 → | }}}}}}}}} |
4. 인구 구성
'프랑크 왕국'이라고 하니까 왠지 현대인들은 프랑크인들만이 살았다는 착각을 하는 경우가 굉장히 잦은데, 메로베우스 왕조~카롤루스 왕조 초기까지 프랑크 왕국의 다수는 갈로-로만인이었다. 특히 프랑스 북부와 남부를 가르는 루아르 강을 기준으로 메로베우스 왕조 시대의 루아르 강 남쪽 프랑크인 유적지나 정착 흔적은 매우 찾기 힘들며, 8세기가 끝나는 그 순간까지 프랑스 남부 특히 아키텐과 프로방스, 프랑스 북부에서도 오를레앙과 프랑스 동북부 지역은 라틴어가 보존되었고 로마인 및 갈로-로만인이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았다. 프랑크 왕국이지만 오히려 프랑크인은 소수여서, 카롤루스 왕조 시기가 되면 로마인들이 프랑크족에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프랑크인이 로마인에게 동화되어 로망스계 언어를 사용하는 새로운 정체성이 수립되었다. 이는 프랑크족의 비율이 다수는 아니나, 그렇다고 반달족이나 수에비족, 넓게 보면 서고트족처럼 너무 적어서 아예 별다른 흔적도 못 남기고 소멸해 버릴 정도까지는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한편, 라틴어와는 별개로 갈리아인들이 쓰던 갈리아어(또는 골어)도 보존되었는데, 로마화된 갈리아인들이 갈리아어를 여전히 쓰거나 로마화되지 않고 남은 프랑스 북부의 극소수 갈리아인들이 7세기가 끝나는 시점까지도 독자적인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프랑크 왕국이 진정한 의미에서 융화된 것은 카롤루스 왕조 시기로, 프랑크족은 이때쯤되면 위에서도 말했듯이 고대 프랑크어를 기반으로, 민중들이 쓰는 로망스계 민중 라틴어를 받아들여 프랑스어라는 새로운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프랑크인이 희박하던 프랑스 남부에서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다. 동시에 라틴어를 쓰는 로마인들도 이러한 추세를 따라 프랑크인들과 공존하게 되면서 프랑크인 지배층-로마인 피지배층이라는 메로베우스 왕조 시절의 구도가 깨지게 되었다.
5. 시스템과 권력의 배분
메로베우스 왕조는 클로비스 1세의 계획적인 분할 혹은 전통에 의한 분할 정책에 의해서 여러 차례 분할과 통합을 겪었다. 여기서 분할 상속의 전통은 일반적으로 《살리카 법전》에 의거하는 게르만족의 전통이라고는 하지만, 이는 하나의 학설일 뿐이다. 다른 학설로는 후기 로마 제국의 전통이나 클로비스 1세의 우려 등등이 있다.메로베우스 왕조 시대는 지방 분권화가 가속화되는 시대였다. 개별적인 지방 간의 차이는 점층적으로 커져 갔고, 그들은 자신들이 아닌 이방인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교나 여러 관료들의 임명권을 실질적으로 지방의 유력자들이 행하고는 했다. 물론 이는 왕권이 심각하게 약해졌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만 왕들은 이들에게 이러한 타협을 통해서 국가 체제를 유지시켰음을 시사한다.
5.1. 정부 작동 원리
메로베우스 왕조 시절 프랑크 왕국의 정부 체제는 기본적으로 게르만 전통에 기반해 있었으나, 동시에 매우 로마적이기도 했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나타난 게르만 왕국들이 다 그렇듯 메로베우스 왕조의 역대 국왕들은 정복을 행하고 새로 정복한 땅과 전리품을 게르만족의 가신 제도에 따라 휘하 가신들에게 분배했으며, 이들은 그 땅에 정착해 유력자가 되었다. 이때부터 이미 농노제의 원초적인 형태가 나타나는데, 고대 로마 시대 후기부터 발생한 콜로누스라고 불리는 토지에 묶인 농민들 또한 토지와 함께 수여되었으며, 이들은 토지가 상속되면 그에 따라 같이 상속되었다.왕들은 로마의 전통에 따라 자기 측근 또는 믿을 수 있는 지방 유력자들을 코메스, 즉 백작으로 임명했다. 이때는 봉건제가 정립되기 이전이었기에 백작은 공식적으로 세습되는 작위는 아니었는데, 후기로 갈수록 메로베우스 왕조의 힘이 약해지고 지방이 따로 놀기 시작하면서 세습되는 현상도 나타났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카롤루스 마르텔이 부상하는 메로베우스 왕조 말기부터 아키텐 공작위가 세습되는 반독립적인 작위로 바뀌었다가 카롤루스 대제때에야 축출된 것이다.
이런 식의 행정체계는 프랑크 왕국의 땅이 넓어짐에 따라 지방 각지에 이식되었으며, 로마 제국의 체제가 온전히 살아남은 프랑스 남부에서도 원활하게 작동했다. 메로베우스조의 군주들은 최대한 지방 세력의 발호를 억제하고 군주권을 강화하고자 지방 행정관들이 토호 세력과 유착하는 것을 막고자 했으며, 또 다수의 피지배층이었던 로만-갈리아인들을 관료조직으로 끌어들였다. 이러한 시도가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는지 다고베르 1세의 시기가 되면 프랑크 왕국 전역의 관료체제가 완전히 로마인들로 채워져 '로마화'되기에 이르렀으며, 모든 공식문서는 라틴어로 작성되었다. 한편 클로타르 2세의 시기부터는 성직자들이 주요한 관료 역할을 맞게 되었는데, 이는 성직자가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을 맡았던 것과 관련이 있었다.
한편 지방 행정관인 백작들은 자기가 다스리는 자유민들을 군대에 징집하고 왕이 군대를 필요로 할 때 제공해야 했으나, 그 대가로 그들에게 땅을 나눠줘야했다. 이것은 로마 시대 은대지 제도의 유산이었는데, 메로베우스 왕조의 멸망 이후 가신 제도와 결합해 봉건제가 탄생하게 되었다. 어쨌든 이런 백작들과 자체적인 무장을 갖춘 자유민들로 구성된 왕국 회의가 정기적으로 열렸는데, 이 회의에서는 전쟁을 벌일지에 관한 논의를 비롯해 여러 정교한 군사적, 전술적 논지들이 오갔다. 일반적인 편견과는 달리 이 회의에 참석하는 귀족들을 비롯한 전사 계급은 정교한 전술적, 전략적인 명령을 이해하고 수행할 수 있었으며, 문맹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카페 왕조의 성립부터 극명하게 나타나게 될 왕의 사유지 전통, 즉 왕이 자기가 보유한 사유지에서 나는 재산만으로 자기와 자기 가족들을 부양하는 전통이 이 시기부터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메로베우스 왕조 시대의 프랑크 왕국은 로마 제국의 유산을 받아들여 어느 정도 안정적인 중앙집권화를 이루는 데 성공했으나, 그 근본은 지방 분권적이었던 것이다. 이런 면모는 메로베우스 왕조 내의 내분과 분할이 격화되고 왕이 힘을 잃으면서 가속화되었다.
5.1.1. 칙령 반포와 순찰사 파견
프랑크 왕국 시기에 왕이 수립한 법령은 영어로 Capitulary라고 불리며, 라틴어로는 capitulare라고 한다. 프랑크 왕들은 신민들을 통치하기 위해 왕국의 법을 반포하거나 지방에 헌장을 보내기도 했으며, 이를 위해 지방에 순찰사라고 불리는 이들을 왕의 사절로서 파견했다. 이러한 칙령-순찰사 정치는 카롤루스 대제 대에 이르러 정식으로 시스템화되며 꽃피우지만, 메로빙거 왕조 때부터 이미 그 제도가 존재했다. 순찰사(missi dominicus)는 메로빙거 왕조 시절 관직이 아닌 왕이 칙령이나 헌장을 반포하면 지방에 이를 전달하는 파발의 역할을 맡았다가 카롤링거 왕조 대에 이르러 먼 지방을 다스리는 국왕 직속 관직으로 변화한다. 메로빙거 왕조 시절 순찰사는 평민 한명 성직자 한명 구성으로 보내졌는데, 이는 왕에게 충성할 인사를 보내기 위해 특별히 의도한 인선이었다. 이러한 순찰사들은 단순히 소식을 알리는 것 뿐 아니라 지방 행정 및 사법의 감찰 업무를 하기도 했는데, 상설직이라기보다는 부정기적으로 파견되는 느낌이었다.한편 프랑크 왕들은 여러 칙령들을 반포했는데, 그 칙령의 종류는 여러가지로 나뉜다. 첫번째는 왕국의 각 지역, 부족들마다 별개로 적용되던 '이민족 법률', 즉 살리카법, 부르군트법, 바이에른법, 리푸아리법[7] 등의 각 지방 법률들을 제정, 승인, 반포하였다. 카롤링거 왕조 시대에 가면 이 법률들을 살리카법과 로마법을 중심으로 조화시키기 위해 각 법률 조항들을 수정, 추가하는 단계에 이르지만 이때는 그정도는 아니었고, 기껏해야 왕국의 주 지배 부족인 살리 프랑크족의 법인 살리카법에 손을 대는 정도였다. 실제로 살리카법 중 그 유명한 '여성 상속 금지 조항' 등은 시대와 왕들에 따라 적용 범위나 효력이 변화해 왔다.
두번째는 교회 칙령이다. 이 칙령은 왕국 내의 주교들이 공의회를 열어 교회의 일이나 교회법에 대해 어떠한 사안을 결정하면 왕이 이를 보고 판단하여 승인한 후 왕국 내의 기독교인 신민들에게 알렸다. 이러한 교회의 법률이나 칙령은 기독교인이기만 하면 왕국의 모든 신민들에게 구속되었다.
세번째는 'Capitula per se scribenda'라고 불리는 것으로, 왕국 전체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법률이다. 이 법률은 한번 제정되면 영구한 효력을 지녔으며, 왕국 내의 모든 신민들에게 구속되었다. 이 칙령은 봄과 가을에 열리는 왕국 회의에서 토의되고 결정되었다.
그리고 이외에 국왕이 직접 통치하는 직할령을 다스리기 위해 반포한 문서 등 기타 잡다한 문서들도 이 '칙령'의 범주에 포함된다.
이러한 메로빙거 왕조시절 내려진 칙령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614년 클로타르 2세가 반포한 '파리 칙령'(Chlotarii II Edictum)이다. 이 칙령은 공의회의 결정을 통해 내려진 교회 칙령의 일종이지만 동시에 왕국 전역에 적용되는 법률이기도 하다. 분할상속 이후 형제들을 모두 숙청하고 왕국을 통합한 클로타르 2세는 왕국의 기틀과 규칙을 정하는 법률을 반포하고자 했다. 이 법률의 내용은 주교의 임명 절차, 즉 주교는 그 지역 인민들의 선택으로 추천되고 왕의 승인으로 임명된다는 것, 성직자의 재판 규정 및 절차, 자유인과 노예 모두 재판을 거치지 않고 처벌하지 못하게 한 것, 처녀와 과부를 강제로 결혼시키지 못하게 한 것, 어떤 이가 재산을 전쟁 등의 이유로 잃어버렸을 경우 소유자에게 돌려주어야 하며, 왕이 함부로 사망한 이의 재산을 환수하려 들 수 없다는 것 등을 포함했다. 이외에 교회의 재산을 함부로 빼앗을 수 없다는 것과 교회의 자치권을 인정한다는 것 등 교회 보호 조치도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지역 판사는 그 지역에 사는 사람만이 임명되어야 한다'고 규정한 12조가 제일 유명하다.
보통 관리를 그 사람의 관직에 임용시키지 않는 것이 오래된 규칙이었던 동양 전통 관료제의 특성상 이 조치는 대단히 봉건적이고 중앙집권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오해하기 쉽고, 실제로도 옛날 사학자들은 이 조치를 '프랑크 왕국 봉건화의 시작'으로 평가했다. 심지어 어떤 사학자는 이 칙령을 마그나 카르타와 비교하기까지 했다. 즉 왕국을 통일한 클로타르 2세가 자신을 지지한 지방 귀족들 및 토호들에게 일종의 '양보'를 행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이 시각은 통하지 않으며, 오히려 클로타르 2세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내린 조치로서 새롭게 해석한다. 먼저 첫번째로, 이 칙령의 해당 조항이 '봉건화의 시작'이라기엔 카롤루스 왕조 중기까지 관료제는 꽤 멀쩡히 지속되었으며 오히려 시기에 따라 더 발전하는 양상을 보여주었기에 기존 시각이 틀렸다는 것이 밝혀졌다. 두번째로, 클로타르 2세가 판사를 그 지역 사람만 임용하도록 명령한 것은, 해당 칙령에서 강조되는 '재산권 보호'와 연결지어져 공정한 통치와 재산권 보호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해당 12조에서는 관리가 불법적으로 인민의 재산을 압류했을 때 이 재산을 돌려주어야 할 것을 명시했다. 관리가 자기가 사는 지역이 아닌 생판 타지에서 일하게 된다면 현지민들과의 유대감 약화로 인해 많은 수탈과 불공정한 통치가 발생하게 된다는 것은 여러 역사적 경험으로 인해 잘 알려진 사실이었기에, 일부러 해당 지역사회에 속한 인물을 관리로 임명함으로서 관리의 폭정을 방지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외에 이 칙령에서는 공의회에서 결정된 유대인에 대한 억압 조치도 발표했는데, 유대인은 그리스도인을 고발할 수 없었으며 그리스도인을 지휘하는 어떠한 공직이나 장교 직위도 맡을 수 없다고 규정되었다.
5.1.2. 관직
흔히 이 시기를 비롯한 중세 초기에 유럽에는 관료체제라고 할만한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편견이 많은데, 프랑크 왕국은 포스트 서로마 왕국들 중 가장 성공적이었던 나라였던 만큼 메로베우스 왕조 시절부터 이미 관료체계를 어느 정도 갖추고 있었다. 이 관직들 중 많은 수는 로마 제국 시절의 관료제나 행정제도를 그대로 이어받은 경우가 많았다. 이는 주요 관직들 목록이다.지방행정의 경우 실제론 여기 나온 관직들보다 훨씬 복잡해서, 로마제국 시절 군사 관직인 프라이펙투스(praefectus)를 일부 중요성이 낮은 주에 파견해 행정관을 겸임하게 했던 것을 이어받아 프로방스 지방 등 일부 지방의 경우 프라이펙투스가 임명되기도 했으며, 이것조차 쭉 유지되지 못하고 때때로 다른 칭호로 뒤바뀌는 등의 일이 비일비재했다. 어떨 때는 로마 시절 '귀족'이라는 의미로서 명예직 비스무리하게 쓰였던 파트리키우스(Patrice)가 사용되기도 하는 등[8], 특히 남부에서는 로마 제국의 경칭과 관직, 현지 토착 왕국에서 쓰였던 칭호, 프랑크식 칭호가 마구 어지럽게 뒤섞였다. 이 중 과거 부르고뉴 왕국에 속했던 지역들의 경우 후기 로마제국과 부르고뉴 왕국 시절 속주 총독의 명칭으로 쓰였던 Rector가 임명되기도 했다.
이런 칭호 상의 혼란은 카롤루스 왕조가 들어선 이후 대부분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 궁재(Maior domus): 가장 유명한 관직으로, 후대에 카롤루스 가문이 세습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직위는 궁정의 제1인자를 뜻하는 라틴어 maior palatii에서 온 것으로, 6세기부터 존재했으며, 7세기부터 실권을 가지기 시작했고, 왕조 말기의 국왕은 사실상 꼭두각시에 불과해져서 궁재들이 나라를 다스렸다.
- 고문(counselors): 궁재가 실권을 잡은 이후, 정확히는 대략 카를 마르텔 즈음부터 궁재를 대신해 왕에게 조언하는 역할로 만들어진 관직이었다. 궁재와는 달리 철처하게 실권에서 배제되었고, 주로 성직자가 맡았다. 랭스 대주교가 맡는 경우가 많았다.
- 상서(尙書)(Referendarius): 많은 경우 서기관이 겸직하였다. 최종적인 서명과 날인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지방의 청원서 또는 왕실의 문서를 각 관료에게 보고했으며 문서들을 관리하고, 지방에 배포하는 역할을 맡았다. 한편 대상서(Grand Référendaire)란 관직도 딱 한 명에게서 언급되는데, 아마 다양한 분야의 문서들을 종합적으로 관리한 관직인 듯하다. 이 직위들 역시 주로 성직자들이 맡았다. 후에 cancellarius로 발전하는데, 번역하자면 수상이다.
- 서기관(Chancellor): 챈슬러는 오늘날 주로 수상으로 번역되는데 이 시기의 챈슬러는 왕의 칙령을 작성하고 반포하며 사법적으로 이를 적용하는 역할을 맡았다. 메로빙거 왕조 시대에 챈슬러가 상서를 겸직하기도 했다. 중세 시대에는 챈슬러가 대법관에게 사용되기도 해, 영국에서는 로드 챈슬러를 여전히 대법관에게 쓴다. 공식적인 재판 및 법령 검토 이외에도 왕국의 법이 지방 법원에서 잘 적용되는지 감찰하기도 했다. 메로빙거 왕조 시절에는 거의 대부분 세속 관리가 임명되었으나 카롤링거 왕조 이후로는 오로지 성직자에게만 임명된다.
- 지방법관(Senechal): 그냥 '세네샬'이라 음차되기도 한다. 프랑스어로는 집사의 의미였는데, 중세 유럽에서 지방 판사의 의미로 쓰였던 단어로, 메로베우스 왕조 시기에는 사법 및 감찰 업무를 담당했다.
- 공작(dux): 보통 공작의 기원이 군사 사령관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고 실제로 로마 후기에는 비슷한 의미를 띄기도 했지만, 정작 실제로 프랑크 왕국 초기의 공작은 추상적인 '영역' 또는 지역을 다스리는 군주라는 의미가 더 강했다. 예를 들어 가장 유명한 초기 공작 작위인 프랑크 공작(dux francorum)은 '프랑크 왕국의 군 사령관'이 아니라 '프랑크족의 지배자' 정도의 의미를 가지는 추상적인 경칭에 가까웠다. 또 하나의 초기 공작위인 아키텐 공작의 경우에도 아키텐 지역 군 사령관이 아닌, '아퀴티니아[9] 지역의 지배자' 정도의 어감이다. 독일의 5대 부족 공국 역시 부족적 전통에 기반한 '지배자' 정도의 어감에서 출발한 것이다. 메로빙거 왕조 시절 공작이었던 것들이 일부 카롤루스 왕조로 넘어가면서 백작으로 격하되기도 했다.[10]
- 백작(Comes): 우리가 아는 오등작 중 그 백작으로, 로마 제국 시절 도시를 중심으로 농촌 마을영역을 포괄하는 주(州) 정도의 행정구역이었던 civitas를 통치하는 행정관 관직으로 시작했다. 각 civitas의 경계는 로마 제국 시절의 것을 그대로 활용했으며, 한 civitas 당 최대 6명까지 백작이 임명되었다. 아직 봉건제가 형성된 시대가 아니기에 이 시절 백작이 통치하는 중심지는 장원이나 자기 소유의 성이 아닌 주의 중심 도시였다. 메로빙거 왕조 시절까지는 갈로-로만인들이 신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시대인 만큼 프랑크족 거주 지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백작은 갈로-로만인이 임명되었으나, 후대에 갈수록 둘 사이의 구분이 사라진다. 6세기 이후로는 civitas 단위로 구성된 행정구역을 쪼개 Pagus[11]를 기본 단위로 설정해 한명의 백작이 통치하는 구역은 축소되었다. 원칙적으로는 세습이 불허되는 관료직이었고, 권한은 왕이 전쟁에 소집할 때 자유민들을 군대로 징병하며, 세금을 걷고, 백작령에 설치된 법원에서 재판을 주재한다. 이후 봉건 시대로 접어들며 백작이 가문 내에서 상속되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기 시작해 결국 사실상 세습직으로 변한다. 백작이 세습되기 시작한 이후로는 밑에서 나올 순찰사가 대신 왕이 파견하는 지방 관료의 역할을 담당했다.
- 재무총감(grand argentier) 또는 조폐총감(monétaire): fisc는 로마 제국 시절의 '공공재정'에게서 계승된 개념으로, 왕이 국가와 신민의 대표자로 여겨지게 됨에 따라 왕실 사유지, 즉 왕령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 관직 역시 로마 시절 공공재정(또는 황실 재정)을 관리하는 재무관에서 유래해 말 그대로 왕실 재정과 왕령지를 관리하는 업무를 맡았는데, 이외에 조폐국장 업무도 맡은 듯하다.[12] 동전에 국왕의 얼굴과 이름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 궁정백(count palatine): 신성 로마 제국에서 백작보다 높은 의미의 작위로 사용된 것으로 유명한데, 사실 궁정백은 카롤루스 왕조가 멀쩡하던 시기까지는 일반 백작과는 아무 상관없는, 궁정에서 왕의 업무(주로 사법)를 돕는 관료를 지칭하는 단어였다. 로마 제국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이어받은 관직이었으며, 서고트 왕국과 동고트 왕국에도 존재했다.
- 그라피오(Grafio,Grafiones): 제국의 북부와 동부에서 백작 대신 사용된 관직. 대부분 Pagus 단위로 구성된 작은 규모의 관할지에서 행정,사법,군사기능을 수행했으며 왕실의 직할이었다. 세금을 징수하기도 했다. 의미상이나 기능상 백작과 겹치는 부분이 많으며, 메로빙거 왕조 시절에는 서열상 백작보다 하위였으나, 후세에 독일어 graf가 되어 comes와 일맥상통하게 된다.
- 도메스티쿠스(Domesticus): 왕이나 기타 귀족의 보좌였다. 지도자의 조언자이자 군에서는 고위장교로서의 역할 또한 있었다. 멸망한 서로마에 동일한 이름의 관직이 존재한다.
- 마구관장(comes stabuli) 또는 마상총감(maréchal): 로마 제국에서 계승된 관직으로, 국왕의 마구관을 관리했다. 이후에는 군대 사령관 정도의 의미까지 격상되지만, 메로빙거 왕조 시절까지는 군대 지휘와는 연관이 없었다.
- 문지기 수장[13](Magister ostiariorum): 궁전에서 일하는 하인들과 관료들이 왕에게 방문하고, 궁전에 드나들던 것을 통제하는 관직이었고 궁정의 문지기(Ostiariis Palatinis)들을 관할하였다. 성스러운 궁전의 최고 문지기(summus sacri Palatii Ostiarius)라고도 불리었다.
- 친위대(truste): 국왕에게 특별한 의식을 거쳐 충성을 맹세한 친위전사(antrustions)로 구성된, 왕의 경호를 맡는 역할을 한다. 왕 또는 귀족에게 충성을 맹세한 개인적인 전사의 경우 가신(leaudes)이라 불린다.
- 시종관(Chamberlin): 중세시대의 일반적인 시종은 왕의 방이나 옷을 관리하는 궁정의 일을 총괄하는 관직이었으나, 메로베우스 왕조 시대에는 주로 강력한 백작들이나 귀족들에게 수여하는 명예직 느낌의 관직이었던 듯하다.
- 순찰사(missus dominicus): 수도에서 결정된 사항을 왕국의 먼 곳까지 전달하는 관직으로, 쉽게 말해 파발이었다. 주로 두명씩 보내졌기 때문에 미시 도미니니치(missi dominici)라고도 불린다. 두명중 한명은 성직자가, 다른 한명은 평민(layman)이 보내졌다고 하고, missus regis 라고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독일계 언어에서는 Zendgraaf라고 불리운다. 카롤루스 왕조 시대 이후부터는 왕이 지방에 파견한 지방관으로 격상되어 현지 백작을 감시하는 등의 역할을 했다.
5.2. 사법
전체적으로, 프랑크 왕국을 포함한 게르만계 왕국들은 로마 제국과 유사한 제도를 구축했다. 하지만 사법적인 제도는 후기 로마 제국의 그것에 비해 의무성과 권위를 많이 잃었다.로마법과 게르만 관습법을 혼합해 일원화된 법전이었던 《부르군트법》으로 운영되던 부르군트 왕국이나 비슷한 방식으로 운영되던 서고트 왕국 및 동고트 왕국과는 달리, 프랑크 왕국은 법의 일원화도 이루어지지 않아서 라인란트 프랑크족이냐, 살리 프랑크족이냐, 아니면 로마인이냐에 따라 법이 다르게 적용되었다. 이중 살리 프랑크족에게 적용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살리카법》이었다. 이는 다민족국가였던 프랑크 왕국에서 마치 이슬람 제국마냥 출신에 따라 다른 관습을 존중했다는 의미가 있지만, 동시에 제도의 일원성을 떨어뜨렸으며,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처럼 도시 생활에 적용되는 법전이 없어서 주로 도시에 거주하는 로마인들에게는 불편한 체계였다.
이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당시에 새로운 법을 만든다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법은 곧 게르만법과 로마법, 혹은 교회법뿐이었고, 과거로부터 축적된 판례들을 암기하는 것이 판사들이 할 수 있는 행위였다. 이러한 점에서 메로베우스 왕조 시대의 사법은 매우 경직적이었다.
프랑크 왕국, 그리고 초기 중세시대의 재판은 가족 간의 복수(페드)와 합의, 정부의 금전적인 배상(웨르젤드)과 물증에 기반한 재판, 그리고 신의 처벌(오르달리), 세 가지로 나뉠 수 있었다. 단, 프랑크족으로 묶여 불리지만 프랑크족이 하나의 게르만 부족을 통칭하는건 아니었기 때문에 다른 프랑크 부족들마다 고유의 법이 있어서, 지역마다 법이 약간씩 다른 경우도 있었다.
5.2.1. 가문의 형성과 복수
분쟁 해소의 대부분의 경우, 1차적으로는 개인간의 합의와 복수로 이루어졌고, 국가는 이러한 분쟁이 지속될 때 방안을 제의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오늘날처럼 적법한 폭력을 국가가 독점적으로 점유하는 사회에서는 게르만계 왕국에서처럼 가족 사이에서 합의를 보거나, 폭력으로 분쟁을 해결하는 것은 익숙하지 않다. 이러한 사회적 제도는 게르만족이 무조건 폭력적이고 야만적이라는 오명을 쓰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최근 게르만족 공동 묘지의 발굴은 폭력으로 죽은 사람의 수가 14세기보다 적었으며, 영양이나 건강의 면에서도 상당히 뛰어났다는 것을 밝혀주고 있다.4세기 로마 제국 후기부터 중앙정부의 영향력은 서서히 줄어들었고, 정부가 모든 분쟁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강력한 중앙정부의 부재는 가족들이 모여 구성원들의 이해를 보호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 이러한 가족적 연대(시펜, Sippen)는 점층적으로 규모가 커져 거대한 혈맹을 이루게 되었다. 예를 들어, 어떠한 개인이 부당한 피해 또는 모욕을 당하면, 그 개인이 속한 가문 전체가 모욕을 당한 것으로 간주해서 가문이 직접 피의자에게 복수를 가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복수를 프랑크 왕국에선 페드(불: Faide, 영: Feud)라고 불렀다. 이렇듯, 사립 사법 시스템이 성립된 것은 폭력의 사례가 급작스럽게 많아져서가 아니라, 사법권이 국가에서 공동체로 옮겨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의 산물이었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5.2.2. 국가의 역할과 금전적인 배상
물론, 복수는 복수를 낳고, 장기적으로 봤을 때 가족들 사이의 분쟁은 중재자가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국가였다. 5세기 후반부터, 각 게르만계 왕국들은 법전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이 법전들은 로마 제국 출신의 법률가들이 국가가 모든 개인의 분쟁을 조정하는 데 있어서 어려움이 있었던 당시 상황에 알맞게 로마 법전을 고쳐 쓴 것이었다. 이 새로운 법전의 핵심 철학은 분쟁의 경중과 가족이 분쟁으로 인해 입은 감정적인 피해를 측정하는 데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바로 법의 지표가 개인이 아닌 가족이 입은 감정적이 피해라는 것인데, 이것은 가족이 차후 복수를 가하는 것을 미리 예방하기 위해서였다.우선,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중재자는 피해자의 원한을 풀어주어야 했다. 이를 위해, 피의자의 가족은 웨르젤드(Wergeld)라는 벌금을 피해자의 가족에게 물어야 했다. 이 벌금이 커버하는 범죄의 종류는 굉장히 다양해서, 아주 가벼운 경범죄로부터 살인같은 심각한 범죄까지도 제안되었다. 좀 더 가벼운 범죄일 경우, 벌금은 공개적인 수치를 주는 것으로 대체될 수 있었다. 예컨데 개를 훔친 사람은 공개적으로 개의 항문에 입맞춤해야 했다.
5.2.3. 신의 처벌
결과에 승복하지 않거나, 증거가 부족해 옳고 그름을 가를 수 없다면, 국왕은 마지막으로 오르달리(신의 심판, ordalie)를 요청할 수도 있었다. 이러한 관습은 훗날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중세를 “암흑의 시대”라고 칭하는 데 구실을 주었다. 신의 심판은 손을 끓는 물에 넣는다거나, 달군 쇠를 손으로 잡는다거나, 결투(듀엘, duel)를 해, 무사히 살아 돌아오는 사람이 “신의 선택”을 받았다고 간주하는 것이었다. 이때 신의 선택을 받지 못한 사람은 처형되었다.6. 왕조의 정당성과 의례 행위
6.1. 통치행위
메로빙거 왕조는 왕조의 정당성을 신민들에게 보장하고, 교회에게 인정받으며 지속시키기 위해 여러 상징적 통치행위와 의례를 동원했다. 이중에서도 특히 '의례'의 중요성은 최근 서양사학계를 중심으로 큰 관심을 받고 있다.우선, 통치행위에 있어서 메로빙거 왕들이 행하는 왕권의 정당성을 보장해주는 두 행위는 바로 법의 제정과 전쟁이었다. 잘 알려져있다시피 중세에서 귀족은 전사, 왕은 그 전사의 우두머리에 가까웠고 이는 게르만 부족 시절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었다. 왕이 행하는 전쟁은 단순한 약탈 행위가 아닌 전쟁을 통해 얻은 전리품을 신하들에게 분배하거나 교회에 기부함으로서 왕과 신하, 영주 사이의 유대감과 충성을 확인하고 또한 자신의 가신들에게 보상을 수여해 줄수 있는 매우 정치적인 행위였으며, 또한 교회에게 왕권의 정당성을 어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이는 왕국의 번영을 증대시키는 것과 필연적으로 연결되며, 따라서 메로빙거 왕들은 매년마다 길일을 잡아 전쟁을 수행해 영토를 확장함으로서 왕국의 번영을 유지하고 더욱 찬란하게 만든다는 것을 선전할 수 있었다.
한편, 윗 문단에서 설명한 것처럼 법 제정은 메로빙거 왕조 시절 정치의 핵심이었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구절들로 말미함아 흔히 율법이라고 비유되는 것처럼, 왕이 제정하는 법 역시 구약성서의 율법과 같이 국가를 결속시키고, 왕이 법적, 종교적 권위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며, 또한 신민들의 평화와 권리를 보장해 준다는 것을 선전할 수 있었다. 클로비스 1세, 클로타르 2세 이후에도 메로빙거 왕들은 법을 통해 왕국의 평화를 유지하고, 신민의 권리를 보호할 수 있는 여러 법들을 반포했다.
본래 다신교 사회에서는 법 제정과 전쟁 수행이라는 두 기능이 하나로 통합되어 있지 않았으며, 각 부분을 담당하는 이들이 각각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관념화되었다. 그러나 단 한명의 절대자를 상정하는 기독교를 받아들임으로서 사법과 전쟁을 하나로 통합시키고, 따라서 '단 한명의 왕'이라는 관념을 무리없이 납득시킬 수 있었다. 성직자들은 왕을 다윗과 같은 신성한 재판관이자 지상의 신의 대리인으로 자주 묘사했으며, 또한 솔로몬처럼 왕국의 영역을 크게 확장함으로서 왕국의 번영을 이끌어내는 전사로서 관념화되기도 했다. 여러번 분할과 통일을 반복하면서도 프랑크 왕국이 영구적으로 분할되지 않고 결국은 한 명의 왕에 의해 통일될 수 있었던 원동력이기도 했다.
6.2. 의례
왕은 지구상, 우주상에 존재하는 봉역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고 다룰 수 있는 존재로 관념화되었다. 왕은 특정 지역을 어떠한 방식으로 정의내리거나 출입을 통제하는 등 공간을 '지배'할 수 있었다. 이는 신이 우주를 다루는 방식과 유사하게 여겨졌으며, 왕이 신을 대신해 지상을 다스린다는 관념이 자연스럽게 출현하였다.예를 들어, 메로빙거 왕들은 '신성한 구역'을 설정하고 접근을 제한하는 조치를 취함으로서 공간에 대한 종교적 권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는 왕들이 자주 행하는 수도원에 대한 지원과 특권 부여와 연결되어 왕과 왕국을 위한 구원을 이끌어낸다는 영성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7세기에 메로빙거 왕들은 숲을 자연적인 공간, 야생적 공간으로 설정하고 이에 대한 수렵권을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는데, 이 조치는 이러한 권능의 발현이었다.
또 하나 중요한 의례적 요소는 바로, 방패즉위 의식이다. 방패즉위는 본래 로마 제국에서 군대가 황제를 즉위시킬 때 방패 위에 황제를 올려 태우는 의식인데, 이것이 게르만족들에게 수입되어 프랑크 왕국에서도 왕이 즉위할 때의 중요한 의례로서 작동하였다. 왕을 방패에 태우고 위로 올림으로서 그들은 새로 즉위하는 왕이 위쪽의 신성한 공간에 접근하고, 그럼으로서 통치의 정당성을 획득하며, 이 의식이 전사들에 의해 수행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왕은 '전쟁 지도자'로서의 성격을 가지게 된다. 이는 위에서 말한 전쟁의 기능과도 연결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수도사들은 이 의식을 종교적이지 않고 오로지 전사들과의 유대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좋지 못하게 보았고, 무엇보다도 신이 왕을 선택한다는 중세의 기본적 원리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았다. 그렇기에 메로빙거 왕조에서는 7세기부터는 방패즉위 의식이 폐지되고 성직자들에 의한 의식으로 대체된다.
또 하나 왕이 수행하는 중요한 의식은, 바로 황소가 이끄는 수레에 올라타 왕국을 돌아다니는 일이다. 이는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가 집필한 역사서 게르마니아에도 나오는 유서깊은 의식으로, 이는 왕이 다산과 풍요, 생산력의 영역을 관장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황소는 농경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생산력을 상징하는 동물이며, 공간을 지배하고 권능을 발휘하여 평화와 풍요를 유지시키는 왕이 황소의 수레에 올라타 국토를 순회한다는 것은 왕의 권능과 대지의 생산력이 결합하여, 왕을 만나는 그 지역의 신민들에게 베풀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왕이 순회할 때는 그냥 돌아다니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묵게 되는 지역에서 신민들을 모아놓고 재판을 행하거나 민의를 듣는 의례를 자주 행했으며, 이러한 의례들은 모두 왕과 신민을 결합시키는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이 의식은 봉건제가 발달해 왕들이 더이상 전국을 온전히 다스리지 못하게 된 카롤루스 왕조 이후부터는 폐지되어, 오히려 '수레 위에 올라타 느긋하고 게으르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왕'이라는 의도적으로 폄하된 이미지로 재창조되었다. 이는 20세기 초까지 메로빙거 왕조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이 시대를 이른바 암흑시대로 규정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또 하나 왕조의 정당성, 특히 세습과 국토 지배의 정당성을 상징하는 요소는 바로 '이름'이다. 왕이나 왕족의 이름은 단순한 이름이 아닌, 방패즉위 의식 등을 통해 즉위하는 새로운 왕에게 조상으로부터 이어진 바로 그 왕조의 이름을 전달하고, 위대한 조상들과 자신을 연결함으로서 국토의 지배자가 된다는 의미이다. 일본 천황의 즉위 의식을 생각하면 편하다. 어쨋든, 이러한 차원에서 이름은 조상들과 자신을 연결하고 국토를 지배하는 중요한 수단이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부르군트 왕국을 정복했을 때 메로빙거 왕들은 자식들의 이름을 부르군트식으로 지음으로서, 장차 그들이 분할상속을 통해 물려받게 될 부르군트 왕국의 옛 왕, 조상들과 그들을 연결하고, 그럼으로서 국토의 지배 정당성을 자연스레 선포했다. 다니엘이라는 이름으로 살던 킬페리크 2세가 수도원에서 꺼내져 옹립될 때 킬페리크라는 조상들로부터 계승된 이름을 사용한 것은, 조상의 이름을 계승한다는 것이 의례라는 측면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한편 종교적으로 중요한 권능을 같는 의식은 바로 '긴 머리'와 '이발'이다. 프랑크의 왕들이 긴 머리를 유지한 것은, 종교적으로 중요했던 구약성경에 표상되는 장발의 신성한 기능과 연관이 있다. 하느님께 헌신을 바치기 위해 머리를 자르지 않겠다는 맹세, 머리를 자른 후 초인적인 힘을 상실한 삼손의 이야기, 공통적으로 장발로 묘사되는 예수의 이미지 등이 이를 잘 보여준다. 메로빙거 왕들은 긴 머리를 유지함으로서 종교적으로 하느님께 신실하고, 신의 뜻을 받들며, 신으로부터 주어진 신성한 권능을 가지고 봉역을 통치하는 왕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피핀 3세가 메로빙거 왕조의 마지막 왕 킬데리크 3세를 폐위할 때 머리카락을 깎은 것은, 메로빙거 왕조가 더이상 신성한 권능을 가지지 못한다는 삼손적 선언이었다. 하지만 카롤루스 왕조 시대부터는 짧은 머리가 유행했는데, 이들은 메로빙거 왕들이 긴 머리를 유지한 것을 머리도 자르지 않을 정도로 왕들이 게으르고 멍청했기 때문이라며 또다시 악의적인 폄하를 일삼았다. 이러한 이미지 역시 근대까지 매우 강력한 효과를 발휘해, 사람들이 메로빙거 왕조를 편견에 기반해 인식하게 만드는데에 크게 공헌했다.[14]
7. 외교와 정책
메로베우스 왕조의 시조인 클로비스 1세가 실행한 정책의 핵심은 팽창주의였다. 481년에 즉위한 직후부터 갈리아인(골족)을 예속시켰고, 511년에 임종하기 직전까지 남쪽으론 서고트족의 아키텐(현 보르도/툴루즈까지), 북쪽으론 발트 해, 동쪽으론 쾰른 및 라인 강 부근까지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클로비스 1세의 후계는 테우데리크 1세, 클로타르 1세, 킬데베르 1세에게로 돌아갔는데, 팽창주의 정책은 클로비스 1세의 죽음 뒤에도 계속되었다. 이 후계자들 중 가장 두드러지는 왕은 테우데리크 1세로, 부르군트 지방을 손에 넣는 데 성공해, 클로타르 1세와 킬데베르 1세의 영토를 합산한 정도의 방대한 영토를 획득했다.여러 프랑크 왕들은 지속적으로 로마 제국의 전통을 흡수한 정부 체제를 국가 전체에 퍼트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과 정치적인 움직임은 지방 분권적인 귀족들에게는 좋지 못했던 것이었고, 그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국왕과 여러 차례 대립했다.
[1] 다만 《프레데가르 연대기》에 따르면, 킬데리크 1세가 파울루스를 살해하고 앙주를 탈취했다고 한다.[2] 밀라노 칙령 이래 로마 황제가 기독교 세계의 세속 군주들 가운데 서열 1위였기에 기독교, 특히 제국 정부에서 공의회를 열어 교리를 정리해 온 정통파(아타나시우스파)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형식상으로나마 로마 황제의 우위를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고대 후기~중세 초기에 게르만족 왕, 왕족, 귀족들이 아리우스파를 믿었던 이유는 아리우스파에 대한 신심이 유달리 깊어서라기보다는, 정통파는 곧 로마 국교회라서 로마 황제를 종교적으로도 상급자로 인정하고, 들어가야 했기 때문에 일부러 최대한 피해보려고 한 것이었다. 결국 이 점 때문에 기독교화에 대한 저항도 있었다.[3] 로마 제국의 식민지는 오늘날의 식민지와는 다른 개념이었다. 식민지인들은 로마인의 외국인(Peregrinus)들과 비슷한 대우를 받았다. 근현대의 식민지는 넓은 경지, 인력, 자원 등을 이용해 본국에 이익을 가져다주기 위함인 것에 반해, 로마 제국의 식민지는 "국경선이 확장된 국토"에 더욱 가까웠다. 실제 212년, 카라칼라 황제의 칙령(<안토니누스 칙령>이라고도 함)은 식민지를 포함한 모든 국토에 거주하는 남성 자유인에게 로마 시민권을 줄 것을 명시하고 있었다. 로마 제국이 500년이 넘게 유럽, 북아프리카, 근동아시아를 아우르고 1억 명에 가까운 인구를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었던 것도, 식민지인이 점층적으로 "로마인"과 동화된 것도, 이와 같은 포용적인 정책을 실행했기 때문이었다.[4] 킬페리크 1세의 첫 번째 왕비였다.[5] 《프레데가르 연대기》는 사모의 기원을 프랑크인이라고 명시했지만, 현대 학자들은 슬라브인이며 본명은 '사모슬라프' 또는 '사모스뱌트'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6] 중세때 게르만인들이 자신들과 인접한 지역에 살던 슬라브족을 부르던 명칭이었다.[7] 라인 프랑크족의 법[8] 이 칭호는 후일 부르고뉴 공국이 될 지역에서 자주 쓰였다.[9] 로마 제국에서 내려온 지역 구분으로서의 아퀴티니아. 이 지역은 갈로-로마인이나 로마인들이 대부분 거주하는 지역이었다[10] 대표적으로 샹파뉴 백작령의 경우 메로빙거 시절에는 샹파뉴 공국이었다가 카롤루스 왕조로 넘어가면서 공국이 해체되고 여러 백국으로 조각조각 나뉘었다가 9세기에 재통합된 것이다.[11] 이 역시 로마 제국 시절 행정단위로, civitas 하위의 구역이다[12] 여담으로 fisc는 경제학에서 재정을 뜻하는 fiscal과 어원이 같다.[13] 이 관직을 지냈던 자로는 보소 5세가 있다. 그는 프랑크 왕국의 귀족이자 이탈리아 총독, 프로방스의 공작, 빈의 백작, 879년부터는 프로방스의 왕이었다.[14] 여담으로 긴 머리가 종교적 권능이 부여되어 유행한 것은 앵글로색슨 시대 잉글랜드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