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 | 카롤루스 마르텔(Charles Martel) | |
관직 | 궁재 | |
가족 | 아버지 피핀 2세 아들 피핀 3세 손자 카롤루스 대제 | |
주군 | 피핀 2세 | |
생몰년도 | 680년 8월 23일 ~ 741년 10월 22일 | |
재임기간 | 국왕 권한대행 | 737년 ~ 741년 |
프랑크인 공작 | 718년 ~ 741년 | |
네우스트리아 궁재 | 718년 ~ 741년 | |
아우스트라시아 궁재 | 715년 ~ 74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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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를 마르텔, 샤를 마르텔, 찰스 마르텔 등으로도 불린다. 생전에 실제 사용된 이름은 고(古) 프랑크어 Carl Martel이며, 라틴어로는 Carolus Martellus로 표기되었다. 후세에 이르러 독일에서는 Karl Martel, 프랑스에서는 Charles Martel이라는 변형된 이름으로 칭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Charles Martel로 표기되며, 현재 우리나라 교육과정에서 표기되고 있는 이름인 카롤루스 마르텔은 프랑크식 발음인 마르텔에 라틴어식 이름 카롤루스가 짬뽕된 형태다. 마르텔(Martel)은 성(Family name)이 아닌 망치(Hammer)라는 의미의 별명이다.프랑크 왕국의 궁재로,[1] 카롤링거 왕조를 개창하는 피핀 3세의 아버지이자, 카롤루스 대제의 할아버지다.
2. 생애
그는 프랑크 왕국의 궁재로 사실상 정권을 장악했던 피핀 2세의 서자로 태어났다. 714년 12월 피핀 2세가 사망했을 때 피핀 2세의 적자들이 사실상 다 죽어서 사라진 상황이었고, 남은 건 적자들의 아들들밖에 없었다. 피핀 2세는 서자인 카를 마르텔이 아닌 적자의 아들들, 즉 자신의 손자들이 실권을 물려받도록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피핀 2세의 자손 중 가장 연장자였던 카를 마르텔은 어린 조카들이 아버지의 지위를 물려받는 것에 불만을 품었고 결국 아버지의 유언을 무시하고 정국을 장악하였다. 그로 인해 전국 각지에서 내전이 벌어졌으나 죄다 제압해버리면서 719년에 프랑크 왕국의 유일한 궁재로 실권을 거머쥐게 된다.카롤루스 마르텔은 각종 정복전쟁을 통해 영토를 크게 확장시켰으며, 성당과 수녀원의 토지와 재산을 압수하면서 교회 세력을 자신의 세력 아래에 묶어 두었다.
그렇게 안정적으로 프랑크 왕국을 이끌던 카를 마르텔은 이베리아 반도를 장악한 이슬람 제국 우마이야 왕조의 침공을 맞게 된다. 우마이야 왕조는 계속 남부로 쳐들어왔는데 그 때마다 카롤루스 마르텔이 출전해서 잘 막아냈고 이슬람과 손잡고 아키텐의 독립을 꾀한 대공 오도를 굴복시키고 그를 프랑크 왕국에 완전히 복속시키는데 성공한다. 마침내 732년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이슬람군을 패퇴시킴으로써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서유럽을 지킨 영웅이 되었다. 이후로도 계속 쳐들어오는 이슬람군을 그때마다 제압했다.
이슬람 세력의 침입을 연이어 막아낸 이후 군제 개혁을 단행하여 이슬람 기병대를 모델로 기병집단을 양성하였고, 이들 기병 집단의 전투력을 유지하기 위한 경제적 기반으로 수도원 등 교회로부터 압류한 토지를 지급하면서 그들로부터 충성 맹세를 받았다. 이것이 바로 은대지 제도이며 중세 봉건제도의 기원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737년 프랑크 왕이 사망하자 왕위를 비워두고 왕위에 오를 시기를 노렸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741년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사망하게 된다. 그가 장악했던 궁재직은 장남 카를로만과 차남 피핀에게 이어졌고, 이후 차남 피핀이 궁재직을 독차지한 연후 허수아비왕인 메로빙거 왕을 폐위한 후 교회와 손 잡고 카롤링거 왕조를 개창하게 된다.
그의 사생아인 제롬(Jerome)의 후손으로 후일 서프랑크의 왕을 역임하는 라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