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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스트라시아의 왕 Dagobert II | 다고베르 2세 | ||
제호 | 한국어 | 다고베르 2세 |
프랑스어 | Dagobert II | |
생몰 년도 | 미상 ~ 679년 | |
재위 기간 | 아우스트라시아의 왕 | |
675년 ~ 67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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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로베우스 왕조 프랑크 왕국 아우스트라시아 분국의 왕.2. 행적
633년부터 656년까지 재위한 아우스트라시아의 왕 시게베르 3세는 침네차일드 왕비 사이에서 아들을 좀처럼 얻지 못했다. 이에 아우스트라시아 궁재 그리모알트는 자기 아들을 양자로 삼을 것을 권고했고, 그는 이를 받아들이고 아이에게 '킬데베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얼마 후 침네차일드 왕비가 다고베르 왕자를 낳았다. 이로 인해 킬데베르가 왕이 될 가망이 사라지는 듯했지만, 그리모알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656년 시게베르 3세가 사망하자, 그리모알트는 사병들을 이끌고 궁궐을 장악한 뒤 어린 다고베르를 삭발하고 푸아티에의 주교 디도에게 보내 수도사로 삼게 한 후 킬데베르 3세를 새 왕으로 옹립했다. 디도는 다고베르를 아일랜드의 수도원들 중 한 곳으로 데려갔다.666년 더블린에서 켈트 공주 마틸다와 결혼한 디고베르는 아일랜드를 떠나 브리타니아로 가서 노섬브리아의 요크에 정착한 뒤 요크의 주교 윌프리드와 친구가 되었다. 670년 마틸다가 셋째 딸을 낳다 죽자, 윌프리드는 로데스 백작의 딸인 로데스의 기셀라와 약혼하게 했다. 671년, 다고베르는 기셀라와 결혼한 뒤 영불해협을 건너 프랑크 왕국에 잠입했다. 675년 킬데리크 2세가 암살된 후 아우스트리아에서 클로비스 3세를 옹립했던 에브로인이 클로비스 3세를 도로 폐위하고 네우스트리아의 궁재가 되어 테우데리크 3세를 받들자,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 울포알드는 요크의 주교 윌프리드의 강력한 추천에 따라 다고베르를 '다고베르 2세'로서 왕위에 옹립했다.
다고베르 2세는 왕위에 오른 이래 아우스트라시아의 무정부 상태를 종식하고 질서를 확립하고자 힘을 기울였으며, 왕권에 저해될 정도로 반항적인 귀족들을 숙청했다. 또한 네우스트리아 왕국과 전쟁을 지속적으로 벌였으며, 랑고바르드족과 평화 협약을 맺었다. 그리고 킬데리크 2세가 670년경에 중단했던 금화 주조를 재개하게 했다. 그는 마르세유에서 동전이 주조된 마지막 왕이기도 했다.
679년, 다고베르는 자신을 도와준 윌프리드 주교가 로마 순례를 가던 중 자신의 궁정에 들리자 환대하면서, 스트라스부르 교구에 임명하겠다고 제안했다. 윌프리드는 요크 시민들을 저버릴 수 없다며 거절했고, 다고베르는 아쉬워하면서도 윌프리드가 로마로 안전하게 갈 수 있도록 호위병을 붙여줬다. 그 후 베르됭 근처의 베르브 숲으로 사냥을 갔다가, 자신들을 숙청하는 그에게 반감을 품은 귀족들이 사주한 하인에게 암살당했다. 그를 옹립했던 울포알드 궁재 역시 잇따라 살해되었다. 이후 네우스트리아 궁재 에브로인이 피핀 2세와 마르틴 등 아우스트라시아 귀족들의 저항을 물리치고 테우데리크 3세를 프랑크 왕국의 단독 군주로 세웠다. 다고베르는 생전에 기셀라로부터 아들 시게베르를 낳았는데, 아버지가 살해된 후 시게베르의 운명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다고베르는 성인으로 시성된 윌프리드를 신실하게 돕고 교회를 지원한 선한 군주로서 교황청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872년 그의 무덤이 베르됭 근처 스테나이-쉬르-뮤즈에 있는 생레미 성당 공동묘지에서 발견되자, 교황청은 그를 성인으로 시성했다. 축일은 12월 23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