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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군트의 왕 부르군트-아우스트라시아의 왕 Theuderic II | 테우데리크 2세 | ||
제호 | 한국어 | 테우데리크 2세 |
프랑스어 | Theuderic II | |
생몰 년도 | 587년 ~ 613년 | |
재위 기간 | 부르군트의 왕 | |
596년 ~ 613년 | ||
아우스트라시아의 왕 | ||
612년 ~ 61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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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르군트-아우스트라시아 프랑크 왕국의 왕.2. 행적
586년경 아우스트라시아-부르군트 프랑크 왕국 군주 킬데베르 2세와 페일루바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테우데베르 2세가 있었다. 596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9살의 나이에 부르군트 왕이 되었고, 형 테우데베르 2세는 아우스트라시아의 왕이 되었다. 그들의 할머니 브룬힐트 왕비가 이들의 섭정을 맡아 전권을 잡았다. 이때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은 부르군트 왕국에 생트, 샹파뉴, 투르가우, 그리고 서부 프로방스와 알자스 일부 지역을 넘겼다. 이 조치는 두 왕국의 영역을 비슷하게 설정하는 한편 아우스트라시아 귀족들을 제어하기 위한 브룬힐트의 의도로 이뤄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는 아우스트라시아의 수도 메츠와 부르군트의 수도 오를레앙 중 어느 곳에도 거주하지 않고 두 왕국의 국경 지대인 오툉과 오세르에 주로 거주하면서 두 나라를 효과적으로 제어했다.킬데베르 2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 네우스트리아 왕비이자 브룬힐트의 오랜 숙적인 프레데군트는 지금이야말로 브룬힐트를 물리치고 프랑크 왕국 전역을 제패할 때라고 판단했다. 그녀는 12살의 아들 클로타르 2세와 함께 군대를 일으켜 파리로 진격했다. 몇몇 아우스트리아 귀족들의 호응 덕분에 일드 프랑스 일부 지역을 확보한 후, 그녀는 아우스트라시아 왕국 영내로 진입했다. 이윽고 수아송 인근의 라포에서, 네우스트리아와 아우스트라시아군이 맞붙었다. 막대한 희생자를 양산한 이 전투에서 승리한 프레데군트는 여세를 몰아 아우스트라시아의 수도 메츠로 진격하려 했다. 그러나 도중에 폐렴으로 쓰러져 1년간 고통을 겪다가 결국 숨을 거두었다. 일설에 따르면, 그녀는 죽어가면서 브룬힐트를 잡아오라며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브룬힐트는 프레데군트가 사망한 뒤 곧바로 네우스트리아 왕국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녀는 주변 정세가 여전히 불안했고 귀족들이 여전히 독립적으로 구는 상황에서 섣불리 공세를 개시했다간 위험하다고 여겼다. 여기에 599년 프로방스에서 역병이 발생해 군대를 일으키는 게 더 힘들어졌다. 그래서 그녀는 충실한 관료를 임명하고 잠재적인 반역자들을 숙청하고 행정을 돌보는 등 내치에 전념했다. 그러다 600년 기반을 어느정도 닦았다고 판단한 그녀는 친히 아우스트라시아와 부르군트 연합군을 이끌고 두 손자와 함께 파리로 진군했고, 16살의 클로타르 2세가 이에 맞서고자 진군했다. 양군은 도르멜 근처의 오르베나 강둑에서 맞붙었다. 네우스트리아군은 이 전투에서 시체가 너무 많아 강을 막을 정도로 참혹한 패배를 당했고, 클로타르 2세는 얼마 안 남은 병력을 이끌고 파리로 도주했다. 이후 여러 마을을 차례대로 공략하고 파괴한 아우스트라시아-부르군트 연합군은 클로타르 2세를 포위했다. 결국 클로타르 2세는 세나와 루아르 강 사이의 있는 영역 전체를 부르군트에게 넘기고, 오이즈, 캉슈, 영국해협 등 해안 지대를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에 넘기는 평화 협약에 동의해야 했다. 이제 클로타르에게 남은 것은 센 강 하류에 자리잡은 12개 마을 뿐이었다.
하지만 브룬힐트는 네우스트리아 왕국을 병합하지 않고 클로타르 2세가 조그마한 왕국에서 계속 군림하도록 내버려뒀다. 이는 아우스트라시아-부르군트 연합이 네우스트리아 왕국과 대립할 때는 단결하지만 공동의 적을 무너뜨린 뒤에는 서로 세력 경쟁을 벌이다가 나중에는 내전을 벌일 거라고 여겼고, 아우스트라시아 귀족들을 힘겹게 통제하는 상황에서 네우스트리아 귀족까지 통제하기는 버겁다고 여겼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래서 네우스트리아를 껍데기나마 남겨놓고 상파르뉴 공작 비시온과 프로방스 지사 에길라를 반역을 꾀한 혐의로 처형하는 등 정적 숙청에 힘을 기울였다. 이 무렵, 바스크인들이 아두르 강과 가론 강 계곡을 장악하고 프랑크 왕국을 잇따라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이에 브룬힐트는 602년 군대를 파견해 이들을 물리치고 그들을 복종시킨 후 공물을 바치도록 했다. 또한 바스크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바스코니아 공작을 세웠다.
604년 말, 클로타르 2세가 일전의 패전으로 잃어버린 땅을 되찾기 위해 부르군트 왕국을 공격했다. 그들은 센 강과 루아르 강 사이에 있는 여러 도시와 마을을 공격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테우데리크 2세는 형에게 협약을 위반한 클로타르 2세를 응징하자고 요청했지만, 테우데베르 2세는 병력을 보내길 거부했다. 이에 그가 독자적으로 진군하여 루아르 강으로 가서 적군과 맞붙었다. 이 전투에서 부르군트 선봉대를 이끌었던 베르토랄트가 아들과 함께 전사했지만, 부르군트군은 이에 굴하지 않고 밀어붙여 적장 메로벨을 사로잡고 랑데리크를 패퇴시키는 등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테우데베르 2세가 콩피에뉴에서 클로타르 2세와 평화 협약을 맺고 아무런 손실 없이 돌아가게 하는 바람에 전과를 확대하지 못했다. 이후 부르군트와 아우스트라시아 왕국간에 긴장감이 흘렀지만, 브룬힐트가 내전을 벌이는 것만큼은 원하지 않았기에 몇년 간은 별 탈 없이 흘러갔다.
605년, 테우데리크 2세는 할머니의 요청에 따라 프로타디우스를 재무관으로 삼았다. 프로타디우스는 재무 능력은 뛰어났지만 잔인한 인물이었다. 그는 온갖 기발한 방식으로 세금을 매겨 백성들을 착취해 재고를 풍족하게 했으며, 정적들을 잡아들여 온갖 잔혹한 고문을 가했다. 그의 전횡에 반감을 품은 병사들이 왕의 천막을 에워싸고 프로타디우스를 처형하라고 요구하자, 테우데리크 2세는 그들을 달래기 위해 운실렌을 보냈다. 그러나 운실렌은 군인들에게 "왕께서 프로타디우스의 처형을 명령했다"라고 거짓말했고, 병사들은 이에 고무되어 프로타디우스를 죽였다. 이후 새 재무관에 선임된 클라우디우스는 폭식을 일삼아 무척 뚱뚱했지만 좋은 교육을 받아 지성이 뛰어났고 모두에게 친절하고 온화하게 대해 두터운 인망을 샀다. 그러나 총신 프로타디우스를 죽인 것에 분노한 브룬힐트는 운실렌을 체포해 유죄를 선고하고 발을 자르고 재산을 몰수하는 조시를 내렸으며, 프로타디우스의 죽음에 연루된 또다른 귀족 울프는 파베른에 있는 자신의 별장에서 살해되었다.
606년, 테우데리크 2세는 서고트 왕국의 위테리크 왕에게 그의 딸 예르멘베르다와 결혼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강력한 프랑크 왕국과 손을 잡는다면 득이 된다고 본 그는 흔쾌히 허락했고, 예르멘베르다는 607년 샬롱으로 가서 테오도리크 2세와 약혼했다. 그러나 결혼은 이뤄지지 않았다. 브룬힐트가 서고트 왕국을 등에 업은 며느리를 제어할 수 없다고 여겨 결혼을 결사 반대했기 때문이다. 테우데리크 2세는 1년 후 예르멘베르다를 돌려보냈지만 지참금은 그대로 가졌다. 위테리크는 이에 분노하여 네우스트리아 왕 클로타르 2세와 테우데리크 2세의 형제인 아우스트라시아 왕 테우데베르 2세와 동맹을 맺었고, 랑고바르드 왕국의 군주 아길루프와도 손을 잡아 테우데리크 2세를 협공하려 했다. 그러나 각자 사정이 있었기 때문인지 연합 공격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위테리크를 암살한 뒤 왕위에 오른 군데마르 역시 셉티마니아 공작 불가르를 통해 테우데베르 2세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테우데리크 2세와 브룬힐트를 조속히 타도하려 했지만 실현에 옮기지 못했다.
이렇듯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그는 네우스트리아 왕국과 손잡으려 애썼다. 이무렵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정부가 메로벨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그는 네우스트리아 왕 클로타르 2세에게 아이의 대부가 되어달라고 요청해 승낙을 받아냈다. 그러던 610년, 테우데베르 2세는 클로타르 2세에 사절을 보내 자신과 힘을 합쳐 부르군트를 협공하자고 제안했다. 테우데리크 2세는 낌새를 눈치채고 역시 클로타르 2세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과 합세하라고 권고했다. 클로타르 2세는 두 제의를 놓고 고심한 끝에 중립을 선택했다.
610년 초, 아우스트라시아군이 알자스를 침공하여 강제로 병합했다. 테우데리크 2세는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거라 믿고 라인 강 하류에 있는 셀츠 요새에서 회담을 가지기로 했다. 그러나 테우데리크 2세가 소수의 무장 수행원과 함께 회담장에 간 것과 달리, 테우데베르 2세는 정예병을 대거 동원해 회담에 참석했다. 결국 테우데리크 2세는 강한 압박을 받고 알자스를 형에게 공식적으로 넘겨야 했다. 이리하여 부르군트 왕국이 약한 모습을 드러내자, 알레만니인들은 자발적으로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에 귀순한 뒤 부르군트 왕국에 귀속된 아벙슈 일대를 파괴했다. 이 일련의 상황에 분노한 브룬힐트는 테우데리크 2세의 편에 서서 테우데베르 2세와 대립했다.
612년 5월, 테우데리크 2세는 전 병력을 집결한 뒤 할머니와 함께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을 침공했다. 그들은 안델로트를 통과한 후 툴루즈를 공략했다. 이에 테우데베르 2세 역시 전군을 이끌고 툴루즈 교외에서 맞붙었다. 전투 결과는 브룬힐트와 테우데리크 2세가 지휘한 부르군트군의 압승이었고, 테우데베르는 수많은 정예병을 잃고 아르덴 숲을 통해 도주했다. 이후 색슨족, 튀링겐족 등 여러 게르만족을 용병으로 고용한 뒤 612년 7월 톨비아크(현재 췰피히)에서 재차 맞붙었다. 프레데가르의 연대기에 따르면, 프랑크 왕국 성립 이래 이 전투 만큼 막대한 희생자가 양산된 전투는 없었으며, 전사자들은 마치 그들이 아직 살아있는 것처럼 서로 몸을 기댄채 서 있었다고 한다. 테우데베르 2세는 이 전투에서도 역시 패배한 뒤 쾰른으로 도주했다. 그러다가 추격대가 오자 소수의 추종자들과 함께 탈출하여 숲속으로 달아나려 했다가 테우데리크 2세의 부하 베르타르에게 사로잡혀 끌려왔다.
테우데베르 2세는 왕의 의복과 인장을 빼앗긴 뒤 샬롱 수도원으로 보내져 머리를 깎고 수도자가 되었다. 그의 어린 아들 메로베는 테우데리크 2세의 명령에 의해 돌에 던져지면서 머리가 깨져 죽었다. <성 콜룸바누스와 제자들의 삶>의 저자 바비오의 요나에 따르면, 테우데베르 2세는 수도자가 된 지 며칠 만에 브룬힐트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다고 한다. 반면 익명의 저자가 기술한 <프랑크 역사집>에 따르면, 리푸아리 백성들이 그를 죽여 수급을 보내라는 테우데리크 2세의 지시에 따라 목을 베었다고 한다.
이로써 부르군트와 아우스트라시아 일대의 군주가 된 그는 클로타르 2세와 대립했다. 613년 아우스트라시아와 부르군트에서 군대를 소집한 뒤 클로타르 2세에게 사절을 보내 덴텐 공국을 자신에게 넘기지 않는다면 정벌하겠다고 통보했다. 그러나 613년 8월 23일 메츠에서 돌연 사망했고 부하들은 집에 돌아갔다. 프랑크 역사집은 그가 브룬힐트에 의해 독살당했다고 주장하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브룬힐트가 유일하게 남은 손자를 굳이 해쳐야 할 동기가 없으며, 프레데가르 연대기에 명시된 대로 이질에 걸려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사후 사생아인 시게베르 2세가 브룬힐트에 의해 부르군트-아우스트라시아의 왕이 되었지만, 더이상 이민족 여자에게 시달리는 걸 달가워하지 않은 귀족들에 의해 폐위되었고, 클로타르 2세가 프랑크 왕국의 단독 군주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