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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8 18:54:25

브룬힐트(프랑크 왕비)

아우스트라시아의 왕비
Brunehilde | 브룬힐트
파일:브룬힐트(프랑크 왕비).webp
제호 한국어 브룬힐트
라틴어 Brunichildis
프랑스어 Brunehilde
출생 543년
사망 613년 (향년 69~70세)
재위 기간 아우스트라시아의 왕비
566년 ~ 575년 (1차 재위)
576년 ~ 613년 (2차 재위)

1. 개요2. 행적
2.1. 시게베르 1세의 왕비2.2. 왕의 어머니2.3. 숙적 킬페리크 1세의 사후2.4. 왕의 할머니2.5. 비참한 최후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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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고트 왕국의 왕녀이며, 프랑크 왕국 메로베우스 왕조의 아우스트라시아 분국의 왕 시게베르 1세의 왕비였다.

프랑크 왕국의 패권을 놓고, 네우스트리아의 왕비 프레데군트와 30년에 걸쳐 내전을 벌인 것으로 유명하다. 메로베우스 왕조의 역사가 대체로 대중들에게 생소하지만 이 두 여인의 피비린내나는 싸움만은 꽤 잘 알려져 있다.

브룬힐트의 인생사는 한마디로 파란만장함 그 자체이다. 역사적으로 큰 업적을 남긴 인물이 아님에도 이 항목이 매우 길게 서술된 이유가 여기에 있는데, 이는 그녀가 시게베르 1세와 결혼한 후 죽을 때까지 메로베우스 왕조의 궁정 정치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브룬힐트보다 프레데군트가 일찍 죽었지만 필생의 라이벌이 죽은 후에도 브룬힐트의 삶은 바람잘 날이 없었으며, 결국 프레데군트의 아들 클로타르 2세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두 여인의 대립은 중세시대부터 유명해서 낭만적으로 각색되었고, 북유럽 신화에도 등장하며, 훗날 《볼숭 사가》와 《니벨룽의 노래》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특히 북유럽 신화와 문학에 등장하는 발키리 브륀힐드는 브룬힐트에서 직접적으로 모티브를 얻은 캐릭터로 추정되고 있다.

2. 행적

2.1. 시게베르 1세의 왕비

543년경 서고트 왕국의 군주 아타나길드와 고이빈타 왕비의 장녀로 출생했으며, 여동생으로 갈스빈트가 있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브룬힐트는 용모가 뛰어나고 품성이 훌륭했으며, 교육을 잘 받아 출중한 지성을 갖추었다고 한다. 566년, 프랑크 왕국과 우호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부왕 아타나길드의 뜻에 따라 프랑크 왕국 아우스트라시아 분국의 왕 시게베르 1세와 결혼했다. 그녀는 서고트 왕실의 관습에 따라 아리우스파를 추종했지만, 가톨릭을 국교로 정한 나라에 시집왔기에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부부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이며, 아들 킬데베르 2세, 딸 인군트와 클로도신드를 낳았다.

한편, 프랑크 왕국 네우스트리아 분국의 왕 킬페리크 1세는 567년 브룬힐트의 여동생이었던 갈스빈트와 결혼했다. 그러나 이들의 결혼생활은 불행했다. 킬페리크 1세는 브룬힐트와는 달리 평범한 용모를 지녔던 갈스빈트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서 시녀프레데군트를 정부로 삼았다. 갈스빈트는 정부를 모두 내보내겠다고 약속한 걸 어긴 남편에게 불만을 품고, 자신을 조국인 서고트 왕국으로 돌려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파일:Galswinthe_&_Chilperic00.jpg
자고 있는 갈스빈트 왕비를 목 졸라 죽이는 킬페리크 1세

그러던 567년 12월, 아타나길드 왕이 승하했다. 그후 서고트 왕국이 정치적인 혼란에 빠지면서 위상이 떨어지자, 킬페리크 1세는 서고트 왕국과의 친선관계를 이어가야 할 필요가 없어졌고, 배후 세력이 없어진 갈스빈트 왕비에게 연연할 이유도 없다고 여겼다. 결국 킬페리크 1세는 그녀를 몰아내고, 정부였던 프레데군트를 새 왕비로 세우기로 했다. 568년경, 갈스빈트 왕비는 잠자던 도중 노예에게 목이 졸려 살해당했다. 왕비를 수녀원으로 보내는 당대의 일반적인 왕실의 혼인무효 방식을 택하지 않고,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을 택한 이유는 불분명하다. 킬페리크 1세가 죽이라고 명령했다는 설과 프레데군트가 사주했다는 설이 양립하는데, 정황상 프레데군트가 주도했고, 왕은 이를 방조 또는 방관했을 가능성이 높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킬페리크 1세는 갈스빈트의 장례식에 참석해 애도를 표한 후, 며칠 후에 프레데군트를 왕비로 삼았다고 한다.

여동생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에 극도로 분노한 브룬힐트는 남편 시게베르 1세에게 복수해달라고 간청했다. 시게베르 1세는 왕비의 간절한 설득을 받아들여 아우스트라시아군을 이끌고 킬페리크 1세의 영지로 쳐들어갔다. 그러자 부르군트 왕 군트람이 두 형제에게 자제할 것을 촉구했고, 그들은 569년 전국에서 소집한 대표들이 집결한 궁정회의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기로 했다. 궁정회의 결과, 킬페리크 1세는 갈스빈트 왕비 살인 사건에 관여한 책임을 지고, 처형인 브룬힐트에게 아키텐의 5개 도시(보르도, 리모주, 카오르, 베른, 비고르)를 넘겨야 했다. 몇년 후, 킬페리크 1세는 아키텐의 영토 손실을 만회하고자 시게베르 1세로부터 투르와 푸아티에를 탈취했다. 여기에 573년 시게베르 1세의 포로였다가 풀려났던 테우데베르[1]에게 아키텐 일부를 약탈하도록 했다. 테우데베르는 아키텐을 철저하게 약탈했는데, 특히 리모주를 공략할 때는 성직자까지 모조리 죽였다고 한다.

이에 시게베르 1세는 이참에 킬페리크 1세를 처치하고 그의 영지를 자신의 영역안에 귀속시키기로 마음먹었다. 575년, 시게베르 1세는 라인 강 너머 게르만인들을 대거 고용해 강대한 군사력을 갖춘 뒤 수아송으로 쳐들어갔다. 킬페리크 1세는 부르군트 왕 군트람과 손을 잡고 대항했지만, 군트람이 보낸 장군이었던 군트람 보손이 돌연 편을 바꿔버리는 바람에 테우데베르가 참패를 면치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킬페리크 1세는 공포에 사로잡힌 채 투르로 도망친 뒤 그곳에서 농성했다. 그러나 투르 공방전이 갈수록 불리하게 돌아가자 절망에 빠진 나머지 성당에 들어가 기도를 드릴 뿐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파일:Grandes_Chroniques_de_France_-_XIVème_siècle_-_Assassinat_de_Sigebert_Ier.jpg
프레데군트 왕비가 보낸 자객에게 칼에 찔려 죽는 시게베르 1세

파리 일대의 프랑크인 귀족들은 대세가 기울어졌다고 판단한 뒤, 킬페리크 1세를 떠나 시게베르 1세에게 귀순하고자 대표단을 보냈다. 시게베르 1세는 비트리 앙 아르투아에서 사절단을 맞아들이고, 파리의 왕이 된 것을 축하하는 연회를 열었다. 그런데 도중에 프레데군트의 사주를 받은 암살자 2명이 휘두른 독이 묻은 단검에 찔려 암살당했다. 시게베르 1세를 호위하던 병사들은 암살자들을 곧바로 처단했지만 지도자를 잃은 아우스트라시아의 군대는 곧 해산되었고, 킬페리크 1세는 잃어버렸던 영토와 재산을 쉽게 되찾았다.

킬페리크 1세는 여세를 몰아 브룬힐트 왕비와 킬데베르 2세 모자가 있는 파리로 향했다. 킬데베르 2세는 시게베르 1세의 총신이었던 군도발트에 의해 아우스트라시아의 본거지인 메츠로 피신했지만, 브룬힐트는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고 사로잡힌 뒤 모든 보물을 빼앗긴 채 루앙으로 유배되었다. 576년, 킬페리크 1세는 아들 메로베에게 군대를 이끌고 푸아티에를 공격하도록 했다. 하지만 메로베는 브룬힐트에게 흑심을 품고 있었으며 이에 부왕 킬페리크 1세의 명령을 무시하고 투르에 진군해 그 일대를 심하게 황폐화시켰다. 이후 모후 아우도베라가 유폐된 수녀원에 가고 싶은 척 하면서 루앙으로 갔고, 그곳에서 브룬힐트를 만나 그녀와 결혼했다.

이 소식을 접한 킬페리크 1세는 분노해 아들을 만나기 위해 직접 떠났다. 오랜 협상 끝에 킬페리크 1세는 브룬힐트와 결혼하겠으니 간섭하지 말라는 아들 메로베의 요구에 굴복하는 듯했지만 여전히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한편, 샹파뉴에서 온 이들이 수아송을 습격해 순식간에 장악한 후 프레데군트 왕비와 킬페리크 1세의 아들인 클로비스를 수아송에서 몰아냈다. 이에 킬페리크 1세와 메로베 부자는 잠정적으로 화해한 뒤 수아송으로 진군해 샹파뉴군을 몰아내고 수아송을 탈환했다. 그러나 킬페리크는 이 사건이 메로베의 사주로 일어났다고 여겨 아들을 긴급 체포한 뒤 감옥에 가두었다가 삭발식을 거행해 상속권을 박탈한 후 아니솔 수도원에 보냈다. 이렇듯 부자간의 대립이 벌어질 때, 브룬힐트는 루푸스의 도움으로 루앙에서 빠져나와 메츠로 이동했다.[2]

2.2. 왕의 어머니

브룬힐트는 메츠에 도착한 뒤 어린 아들을 대신하여 아우스트라시아를 통치했다. 그러나 킬페리크 1세와 연락을 주고 받는 아우스트라시아 귀족들의 저항에 끊임없이 시달려야 했다. 랭스의 에지디우스는 루푸스와 고곤이 잘못되기를 기다렸다. 우르시온과 베르테프레드 역시 독립적인 행보를 보였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는 두 사람이 서고트 출신인 브룬힐트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으며, 그녀에게 굴욕감을 줄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했다고 기술했다. 브룬힐트는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 잘못 행동했다간 끝장이라고 판단했다.이에 따라 어느 누구에게도 공개적으로 편을 들지 않고, 통치자가 아닌 어린 왕의 어머니 역할을 주로 수행해 귀족들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렸다. 그녀는 친 네우스트리아파의 반대 세력인 베르테프레드의 딸의 대모를 맡았으며, 고곤과도 친분을 다졌다. 579년, 브룬힐트의 장녀 인군트와 서고트 왕 리우비길드의 아들 헤르메네길드의 결혼이 결정되었다. 이는 친정인 서고트 왕국의 지원을 토대로 세력을 키우려는 브룬힐트의 계책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이윽고 여러 귀족 집단의 지지를 확보한 브룬힐트는 아우스트라시아의 정치에 독자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580년, 로데츠의 달마티우스 주교가 56년 동안 재임한 끝에 선종했다. 차기 주교 선거를 앞두고, 고곤은 토른소바트라는 이름의 지역 신부를 지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로데츠 주민들이 달마티우스의 유언장을 읽기 위해 아우스트라시아 궁정에 도착했을 때, 킬데베르 2세는 테오도시우스 신부를 주교로 선출하라고 명령했다. 고곤의 지원을 받았던 후보가 낙마한 것은 "왕의 교육자"의 영향력이 줄어들었고, 왕비가 그들을 배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음을 암시한다.

581년 고곤이 사망했다. 연대기 작가 프레데가르는 브룬힐트가 고곤을 독살했다고 주장했지만, 학자들은 고곤의 장례가 정중하게 치러졌고, 각종 명예로운 칭호가 수여되었다는 사실이 고곤의 비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신빙성이 없다고 본다. 고곤이 사망한 후 교육자의 자리는 반델린이라는 인물이 맡았는데, 이 인물에 대해서는 고곤의 지지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전해지는 바가 없다. 섭정의 새로운 '강자'는 랭스의 에지디우스, 우르시온, 베르테프레드였다. 그들은 부르군트 왕 군트람과의 동맹을 추구했던 고곤의 정책을 바꿔서 네우스트리아 왕 킬페리크 1세와의 동맹을 추진하기로 했다.

당시 킬페리크 1세는 아들들을 모두 죽이거나, 병으로 잃어버리면서 더이상 후계자를 구할 수 없었다. 따라서 킬페리크 1세와 가까워져서 후계 자리를 맡아둔다면, 장차 네우스트리아를 확보할 수 있었다. 에지디우스는 킬페리크 1세를 찾아가 이 문제를 논의했고, 킬페리크 1세는 자신이 죽으면 모든 영토를 킬데베르 2세에게 상속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네우스트리아와 가까이 지내기로 한 것에 불만을 품은 루푸스가 반기를 들면서, 아우스트라시아는 내전에 시달렸다. 브룬힐트는 두 파벌 중 어느 쪽도 승리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만약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무너뜨린다면, 그들이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그녀는 중재자 역할을 맡기로 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우르시온과 베르테프레드가 군대를 이끌고 루푸스를 해치려 하자, 브룬힐트는 남자처럼 허리를 두른 채 우르시온과 베르테프레드의 진영으로 뛰어들어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여러분, 제발 이 악한 행위를 저지르지 마십시오. 무고한 사람들을 박해하지 마십시오. 나라의 안녕을 해칠 수 있는 한 사람 때문에 싸움을 시작하지 마십시오."
우르시온이 호통쳤다.
"이 여자야, 우리에게서 떨어져라! 당신은 남편이 살아있는 동안 통치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제 당신의 아들이 통치하고 왕국은 당신이 아닌 우리의 것이다. 너는 우리에게서 떨어져라. 우리 말의 말굽이 너를 짓밟게 하지 마라."
우르시온 일당은 오랫동안 온갖 조롱을 퍼부었지만, 브룬힐트는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계속 설득했다. 이에 병사들이 왕비의 입장에 동조하자, 결국 그들은 전쟁을 포기하고 물러섰다. 이후 루푸스는 우르시온 일당이 자신의 재산을 약탈하는 걸 보고 킬데베르 2세와 함께 부르군트의 군트람에게 망명했고, 군트람은 킬데베르 2세가 성인이 될 때까지 보호해줬다고 한다. 그리하여 에지디우스, 우르시온, 베르테프레드 등이 이끄는 친 네우스트리아파가 정국을 장악했지만, 루푸스가 여전히 건재했고 군트람이 개입하여 어린 왕의 보호를 천명했기에 모든 걸 자기들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581년, 고곤의 오랜 친구였으며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의 부유한 남부 일대를 다스리고 있었던 다이나미우스가 친네우스트리아파를 규탄하며 반기를 들었다. 그는 군트람과 동맹을 맺고 그해 말에 마르세유의 절반을 넘겼다. 이로 인해 킬데베르 2세의 후견인들과 군트람 왕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킬페리크 1세는 이 때를 틈타 부르군트를 침공해 페리구스와 아쟁을 공략했다. 결국 군트람은 582년 킬페리크 1세가 점령한 두 도시를 그대로 넘겨주는 조건으로 평화협약을 맺어야 했다.

582년, 킬페리크 1세는 프레데군트에게서 아들 테오도리크를 얻었다. 이로 인해 킬데베르 2세가 네우스트리아를 상속받을 가능성이 사라졌다. 이에 아우스트라시아 왕국 측은 불만을 품었다. 얼마 후 네우스트리아군과 아우스트라시아군이 부르군트를 향한 공세를 개시했다. 이때 아우스트라시아군은 일부러 늦장을 부렸고, 네우스트리아군은 부르주 근처에서 군트람의 부르군트군에게 요격당해 막대한 손실을 입고 퇴각했다. 킬페리크 1세는 평화협정을 이루기 위해 부르군트의 군트람에게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이후 아우스트라시아군 내부에서 친 네우스트리아파를 박멸하라는 목소리가 일어나자, 에기디우스 등은 겁에 질려 달아났다. 이 반란이 브룬힐트에 의해 계획되었는지 아니면 자발적인 것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브룬힐트는 이 덕분에 전권을 쥘 수 있었다.

군트람은 브룬힐트가 권력을 장악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녀를 돕기로 하고 584년 초 마르세유의 절반을 킬데베르 2세에게 돌려줬다. 브룬힐트는 군트람의 지원 덕분에 인기를 드높일 수 있었다. 이후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의 친척인 군돌프 공작 등을 자기 편으로 포섭했으며, 진영을 바꾸기로 한 에기디우스도 끌여들었다. 이후 브룬힐트와 군트람이 연합하여 킬페리크 1세를 공격했다. 당시 2살배기 아들 테오도리크가 이질에 걸려 사망한 것에 낙심했던 킬페리크 1세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캉브레로 피신했다. 그는 그곳에서 또다른 아들 클로타르 2세를 낳았지만 몇달 후인 584년 9월 27일 괴한에게 살해당했다.

2.3. 숙적 킬페리크 1세의 사후

프레데군트는 남편 킬페리크 1세가 암살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국고를 챙겨서 갓난아기였던 클로타르 2세와 함께 노트르담 대성당으로 피신해 숨어 지냈다. 그녀는 한동안 정세를 살피다가 부르군트의 군트람 왕에게 서신을 보내 아이의 대부가 되어주고, 성년이 될 때까지 네우스트리아의 섭정을 맡으라고 요청했다. 군트람은 즉시 파리에 도착한 뒤 프레데군트 모자를 자기 진영으로 들였고, 나중에 클로타르 2세를 양자로 들였다. 브룬힐트는 프레데군트를 자신에게 인도해달라고 요구했으나, 군트람은 묵살했다. 이에 브룬힐트는 568년 군트람 본인과 킬페리크 1세, 시게베르 1세가 파리를 공유지로 남기기로 합의하지 않았느냐며 파리를 접수한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자 군트람은 아우스트라시아군이 577년 부르군트와 동맹을 맺기로 해놓고 581년에 킬페리크 1세와 동맹을 맺은 후 자신을 공격한 바 있다고 언급하며 묵살했다.

브룬힐트는 다시 사절을 보내 본래 아들의 영역이어야 했으나 킬페리크 1세에게 빼앗겼던 땅을 양분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군트람은 시게베르 1세가 형제의 허락 없이 계약을 위반하고 파리에 들어갔으며, 나중에 킬페리크 1세도 똑같이 행했으니, 그들이 과거에 한 맹세에 따라 정한 왕국의 분할에서 자신의 몫을 잃었으며, 오직 자신만이 그 땅의 주인을 맡을 수 있다고 답했다. 현실적으로 군트람을 거역할 수 없었던 브룬힐트와 킬데베르 2세는 승복했고, 군트람은 클로타르 2세와 킬데베르 2세 모두를 양자로 삼은 채 프랑크 왕국 전체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584년, 쾰른에 숨어지내다가 갈리아에 들어온 클로타르 1세의 아들 군도발트가 아키텐에서 킬페리크 1세의 옛 지지자인 데시데리우스 공작, 블라다스트 공작, 사가타리우스 주교, 와돈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툴루즈와 앙굴렘 등 여러 도시를 공략하며 군트람에 맞섰다. 군트람은 군도발트의 반란 토벌에 전념하기 위해 아우스트라시아와 화해하기로 하고, 585년 봄 킬데베르 2세를 궁으로 초대해 군도발트의 공범들 중 일부를 동등한 입장에서 심판할 수 있도록 두 개의 왕좌를 세웠다. 이후 군트람은 킬데베르 2세에게 창을 건내주고 자신의 유일한 후계자로 임명했다. 그후 킬데베르 2세는 군트람과 함께 군도발트를 살해하고 항복한 반역자들을 심판한 뒤 아우스트라시아로 돌아갔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킬데베르 2세는 한 번 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믿을 수 없다며 처형하라고 독촉했고, 군트람은 이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군트람은 킬데베르 2세가 이제 완전한 성인이 되었으며 독자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선언한 후 킬데베르 2세가 자신의 조언자를 선택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는 킬데베르 2세가 모후 브룬힐트의 통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권고였다. 그러나 본국으로 돌아간 킬데베르 2세는 브룬힐트에게 국정을 계속 맡겼다. 킬데베르 2세는 라틴어를 잘 이해했고 몇 개의 시를 짓기도 했다. 그러나 정치에는 그리 관심이 없었고, 취미인 낚시를 즐겼다. 그렇지만 브룬힐트는 혹여 아들이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가능한 모든 예방 조치를 내렸다. 먼저 아들 킬데베르 2세의 결혼 상대를 페일루바라는 여인으로 정했다. 이 여인의 출신 성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귀족 가문 출신이라는 이야기는 없는 것을 볼 때 미천한 신분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브룬힐트는 외국의 공주나 귀족의 여식이 왕비가 되었을 경우, 자신을 권좌에서 끌어내릴까 두려워했기에 이같은 조치를 내렸을 것이다. 또한 브룬힐트는 요직에 자신의 충복과 친구들을 대거 앉혀서 권력 기반을 탄탄히 다졌다.

587년 11월 28일, 군트람과 킬데베르 2세는 안델로트 조약에 서명했다. 두 사람은 영원한 우정을 보장하고, 아이가 없을 경우 상호 유산을 확립하며, 상대방에게 모반을 꾀한 자를 넘기기로 했다. 또한 두 왕은 왕국의 분할과 경계를 정했다. 군트람은 파리, 토덴, 반도마, 에탐나, 샤르트르를 받았고, 킬데베르 2세는 모, 상리스, 투르, 푸아티에, 아브론테, 에어, 콩세랑스, 라부르드, 알비를 접수했다. 하지만 군트람이 여전히 킬데베르 2세를 유일한 상속자로 삼는 것에 주저하자, 브룬힐트는 그의 마음을 사기 위해 예전에 반역자 군도발트를 지지하고 군트람에 대적했던 자들을 넘기기로 했다. 이 움직임에 당황한 우르시온과 베르테프레드는 궁정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수아송의 라우칭 공작과 동맹을 맺어 브룬힐트에게 대항하려고 했다. 그러나 음모는 사전에 발각되었고, 라우칭 공작은 킬데베르 2세와 대화를 나누던 중 갑자기 궁전 경비원의 공격을 받아 살해되었다. 이후 우르시온과 베르테프레드 역시 살해되었고, 많은 이가 브룬힐트를 두려워하여 다른 지역으로 도주했다.

브룬힐트는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친 네우스트리아파 지도자인 랭스의 에지디우스에게 화해를 제안했다. 이에 에지디우스는 킬데베르 2세를 찾아가 막대한 선물을 바치며 과거에 저지른 무례를 사죄했고, 킬데베르 2세는 그를 용서했다. 루푸스 공작 역시 옛 정적을 용서하기로 했다. 또한 일전에 축출되었던 마르세유의 테오도르 주교도 복위했다. 한편, 브룬힐트는 본래 네우스트리아에 속했지만 라우칭 공작이 아우스트리아에 귀순할 때 함께 딸려왔던 수아송이 언제라도 프레데군트에게 넘어갈 수 있다고 여긴 후, 이를 방지하고자 589년 8월 킬데베르 2세의 아들이자 자신의 손자였던 테우데베르 2세를 수아송의 왕으로 임명했다.

590년, 프레데군트는 킬데베르 2세와 테우데베르 2세 부자를 암살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그녀는 6명의 암살자를 고용해 두 팀으로 나눠서 두 왕을 동시에 죽이도록 했다. 그러나 이 음모는 조기에 발각되었고, 브룬힐트는 암살 음모에 관련된 자들을 모조리 처형했다. 이어진 조사 결과, 에지디우스가 라우칭의 반역 음모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에지디우스는 곧바로 체포되었고, 590년 11월 중순 메츠에서 사법 재판이 열렸다. 에지디우스는 자신이 킬데베르 2세와 브룬힐트를 암살할 계획에 참여했고 네우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은 후, 킬페리크 1세와 군트람을 견제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했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킬페리크 1세로부터 뇌물을 받고 그와 동맹을 이어나갔다고 덧붙였다. 사람들은 에지디우스가 처형될 거라고 예상했지만, 놀랍게도 브룬힐트는 직위 해제 후 스트라스부르로 유배할 뿐 목숨을 거두지는 않았다. 이는 죄를 고백한 거물들을 언젠가 유용하게 쓸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한편, 브룬힐트의 딸 인군트와 결혼했던 서고트 왕자 헤르메네길드가 580년 부왕 리우비길드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583년에 진압당했다. 헤르메네길드는 곧 피살되었고, 인군트와 아들 아타나길드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망명했는데, 인군트는 도중에 시칠리아 섬 또는 북아프리카에서 병사했다. 브룬힐트는 손자를 돌려받기 위해 마우리키우스 황제와 그의 아들, 친척, 최고위 인사, 고위 사제들에게 많은 편지를 보내 간청했지만, 마우리키우스는 아나타길드가 인질로 활용하기 적합하다고 여겨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후 서고트 왕국과 프랑크 왕국은 전쟁을 벌이다가 586년 서고트의 새 왕위에 오른 레카레드 1세가 화해를 촉구하면서 관계가 개선되는 듯했다. 킬데베르 2세는 자신의 여동생인 인군트 공주의 죽음에 대해 10,000솔디를 배상금으로 지불하는 조건으로 서고트 왕국과 우호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군트람은 동맹 제의를 묵살하고 레카레드 1세에게 반기를 들려는 자들을 지원했다. 레카레드 1세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 군트람을 따르는 모든 상인이 셉티마니아를 통과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후 군트람이 레카레드 1세와 전쟁을 벌일 때 킬데베르 2세는 일부 병력을 보낼 뿐 적극적으로 돕지 않았다.

588년, 브룬힐트는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게 군트람을 찾아가 서고트 왕국과의 전쟁을 종식하라고 요구하도록 했다. 마침 서고트와의 전쟁에서 연이어 패배해 기세가 꺾여 있었던 군트람은 브룬힐트의 제안에 동의했다. 브룬힐트는 자신의 딸 클로도신다를 레카레드 1세와 결혼시킴으로써 양자간의 관계가 개선되길 희망했다. 그러나 브룬힐트의 어머니 고이빈타가 가톨릭을 국교로 정하고 아리우스파를 탄압하는 레카레드 1세를 축출하고자 반란을 꾀했다가 발각된 후 곧 사망한 사건이 벌어지자, 양자간의 약혼은 취소되었다. 레카레드 1세는 협상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바도라는 이름의 서고트 여성과 결혼하여 아들 리우바 2세를 낳았다.

592년, 군트람이 후계자를 따로 두지 못한채 승하하면서 아우스트리아와 부르군트가 킬데베르 2세에게 귀속되었다. 이리하여 상당한 병력을 보유하게 된 킬데베르 2세와 브룬힐트는 오랜 숙적이었던 네우스트리아의 프레데군트와 클로타르 2세를 타도하려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592년 또는 593년, 브룬힐트는 네우스트리아로 쳐들어가서 수아송의 드로슈에서 프레데군트군과 격돌했다. 《프레데가르 연대기》에 따르면, 양측 모두 막대한 손실을 입은 후 전투를 중단했고, 이후 몇년 동안 적대 행위를 벌이지 않았다.

한편, 브룬힐트와 킬데베르 2세는 군트람이 생전에 굴복시키려 했지만 연전연패하면서 끝내 실패했고, 이후에도 변경 지역을 약탈하는 브르타뉴 브로그웨네드의 군주 와로흐 2세를 제압하기로 결정한 후 594년에 토벌대를 파견했다. 대브르타뉴 원정 결과가 어땠는지는 알려진 바 없지만, 브르타뉴가 이후 조용해진 것을 볼 때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듯하다. 595년, 튀링겐과 북해 사이에 살던 바르네스족이 반란을 일으켰다. 프랑크군은 즉시 투입되어 이들을 모조리 살육하고 이 지역에 대한 프랑크의 주권을 복원했다. 한편 바이에른 왕 가리발트 1세가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독립할 낌새를 보이자, 킬데베르 2세는 바이에른으로 쳐들어가서 그를 축출하고 타실로 1세를 왕위에 올렸다. 이렇듯 대외에서 문제가 연이어 터졌기 때문에, 네우스트리아의 숙적 프레데군트를 축출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브룬힐트와 킬데베르 2세는 입법 활동에도 관심을 보였던 것으로 보인다. 595년 2월 29일에 반포된 《킬데베르 법령》은 593년 안데르나흐, 594년 마스트리히트, 595년 쾰른에서 열린 세 번의 사법회의에 관한 설명을 담았다. 이에 따르면, 프랑크인과 로마인을 별도로 다뤘으며, 대부분의 조항은 전통 관습의 기독교화를 목표로 삼았다. 의무적인 일요일 휴식을 게을리하는 사람들에게 벌금을 부과하는 법이 제정되었으며, 근친상간 금지에 관한 법안을 재확인했다.

2.4. 왕의 할머니

596년 초, 나름 유능했던 킬데베르 2세가 26세의 젊은 나이에 승하했다.[3] 사후에 각각 10살과 9살인 두 아들 테우데베르 2세테우데리크 2세가 왕위에 올랐고, 조모인 브룬힐트가 섭정을 맡았다. 이 소식을 접한 프레데군트는 지금이야말로 브룬힐트를 물리치고 프랑크 왕국 전역을 제패할 때라고 판단했다. 그녀는 12살의 아들 클로타르 2세와 함께 군대를 일으켜 파리로 진격했다.

몇몇 아우스트라시아 귀족들의 호응 덕분에 일드프랑스의 일부 지역을 확보한 후, 프레데군트는 아우스트라시아 왕국 영내로 진입했다. 이윽고 수아송 인근의 라포에서 네우스트리아군과 아우스트라시아군이 맞붙었다. 막대한 희생자를 양산한 이 라포 전투에서 끝내 승리한 프레데군트는 여세를 몰아 아우스트라시아의 수도 메츠로 진격하려고 했다. 그러나 도중에 폐렴에 걸려 쓰러졌고 1년 동안 병상에 누워 있다가 결국 사망했다. 일설에 따르면 프레데군트는 병상에 누워서도 브룬힐트를 잡아오라며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브룬힐트는 프레데군트가 병사한 뒤 곧바로 네우스트리아 왕국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녀는 주변 정세가 여전히 불안했고 귀족들이 여전히 독립적으로 구는 상황에서 섣불리 공세를 개시했다간 위험하다고 여겼다. 여기에 599년 프로방스에서 역병이 발생해 군대를 일으키는 게 더 힘들어졌다. 그래서 브룬힐트는 충실한 관료를 임명하고 잠재적인 반역자들을 숙청하면서 행정을 돌보는 등 내치에 전념했다. 그러다가 600년, 기반을 어느 정도 닦았다고 판단한 브룬힐트는 친히 아우스트라시아와 부르군트 연합군을 이끌고 두 손자와 함께 파리로 진군했다. 이에 네우스트리아에서는 16살의 클로타르 2세가 군대를 이끌고 맞서 싸웠다. 양군은 도르멜 근처의 오르베나 강둑에서 맞붙었다. 네우스트리아군은 이 오르베나 전투에서 시체가 너무 많아 강을 막을 정도로 참혹한 패배를 당했고, 클로타르 2세는 얼마 안 남은 병력을 이끌며 파리로 도주했다. 이후 여러 마을을 차례대로 공략하고 파괴한 아우스트라시아-부르군트 연합군은 클로타르 2세를 포위했다. 결국 클로타르 2세는 세나와 루아르 강 사이에 있는 영역 전체를 부르군트에게 넘기고, 오이즈, 캉슈, 영국해협 등 해안 지대를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에 넘기는 평화협약에 동의해야 했다. 이제 클로타르 2세에게 남은 것은 센 강 하류에 자리잡은 12개 마을 뿐이었다.

하지만 브룬힐트는 네우스트리아 왕국을 병합하지 않고 클로타르 2세가 조그마한 왕국에서 계속 군림하도록 내버려뒀다. 이는 아우스트라시아-부르군트 연합이 네우스트리아 왕국과 대립할 때는 단결하지만 공동의 적을 무너뜨린 뒤에는 서로 세력 경쟁을 벌이다가 나중에는 내전을 벌일 거라고 여겼고, 아우스트라시아 귀족들을 힘겹게 통제하는 상황에서 네우스트리아 귀족까지 통제하기는 버겁다고 여겼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래서 네우스트리아를 껍데기나마 남겨놓고, 상파르뉴 공작 비시온과 프로방스 지사 에길라를 반역을 꾀한 혐의로 처형하는 등 정적 숙청에 힘을 기울였다. 이무렵, 바스크인들이 아두르 강과 가론 강 계곡을 장악하고, 프랑크 왕국을 잇따라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이에 브룬힐트는 602년 군대를 파견해 이들을 물리치고 그들을 복종시킨 후 공물을 바치도록 했다. 또한 바스크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바스코니아 공작을 세웠다.

이윽고 테우데베르 2세가 15살이 되어 성인식을 거행했다. 브룬힐트는 손자에게 노예 신분이던 빌리힐데라는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게 했다. 이는 훌륭한 가문에서 며느리를 맞아들이면 자신의 권력이 약화될 것을 우려한 조치였다. 브룬힐트는 일찍이 아들인 킬데베르 2세에게도 평범한 신분이었던 페일루바를 왕비로 맞이하게 했다. 페일루바는 시어머니에 대한 흠잡을 데 없는 충성심을 보이며 공손하게 처신했다. 그러나 빌리힐데는 이와 달리 브룬힐트의 간섭에서 벗어나 여러 귀족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면서 남편인 테우데베르 2세에게 할머니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활동하라고 권고했다. 테우데베르 2세는 아내의 말에 동감했고, 점차 브룬힐트를 적대하기 시작했다.

604년 말, 클로타르 2세가 일전의 패전으로 잃어버린 땅을 되찾기 위해 부르군트 왕국을 공격했다. 그들은 센 강과 루아르 강 사이에 있는 여러 도시와 마을을 공격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테우데리크 2세는 형에게 협약을 위반한 클로타르 2세를 응징하자고 요청했지만, 테우데베르 2세는 병력을 보내길 거부했다. 이에 테우데리크 2세가 독자적으로 진군하여 루아르 강으로 가 네우스트리아군과 맞붙었다. 이 전투에서 부르군트 선봉대를 이끌었던 베르토랄트가 아들과 함께 전사했지만, 부르군트군은 이에 굴하지 않고 밀어붙여 적장 메로벨을 사로잡고, 랑데리크를 패퇴시키는 등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테우데베르 2세가 콩피에뉴에서 클로타르 2세와 평화협약을 맺고 아무런 손실 없이 돌아가게 하는 바람에 전과를 확대시키지 못했다. 이후 부르군트와 아우스트라시아 왕국간에 긴장감이 흘렀지만, 브룬힐트가 내전을 벌이는 것만큼은 원하지 않았기에 몇년 간은 별 탈 없이 흘러갔다. 브룬힐트가 수아송에 있는 생메다드 바실리카 대성당에서 나오는 수입을 받기를 거절했을 때, 테우데베르 2세는 이를 확인해달라고 요청하는 지역 주교에게 할머니가 그 돈을 계속 받기를 바란다는 답장을 보내기도 했다.

605년, 테우데리크 2세는 할머니 브룬힐트의 요청에 따라 프로타디우스를 재무관으로 삼았다. 프로타디우스는 재무 능력은 뛰어났지만 잔인한 인물이었다. 그는 온갖 기발한 방식으로 세금을 매겨 백성들을 착취해 재고를 풍족하게 했으며, 정적들을 잡아들여 온갖 잔혹한 고문을 가했다. 그의 전횡에 반감을 품은 병사들이 왕의 천막을 에워싸며 프로타디우스를 처형하라고 요구하자, 테우데리크 2세는 그들을 달래기 위해 운실렌을 보냈다. 그러나 운실렌은 군인들에게
"왕께서 프로타디우스의 처형을 명령했다."
라고 거짓말했다. 이에 병사들은 고무되어 프로타디우스를 죽였다. 이후 새 재무관에 선임된 클라우디우스는 폭식을 일삼아 무척 뚱뚱했지만 좋은 교육을 받아 지성이 뛰어났고, 모두에게 온화하게 대해 두터운 인망을 샀다. 그러나 총신 프로타디우스를 죽인 것에 분노한 브룬힐트는 운실렌을 체포해 유죄를 선고하고, 발을 자른 후 재산을 몰수하는 조치를 했으며, 프로타디우스의 죽음에 연루된 또다른 귀족이었던 울프는 파베른에 있는 자신의 별장에서 살해되었다.

606년, 테우데리크 2세는 서고트 왕국위테리크 왕에게 그의 딸 예르멘베르다와 결혼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강력한 프랑크 왕국과 손을 잡는다면 득이 된다고 본 위테리크는 흔쾌히 허락했고, 예르멘베르다는 607년 샬롱으로 가서 테오데리크 2세와 약혼했으나 결혼은 이뤄지지 않았다. 브룬힐트가 서고트 왕국을 등에 업은 며느리를 제어할 수 없다고 여겨 결혼을 결사 반대했기 때문이다. 테우데리크 2세는 1년 후 예르멘베르다를 돌려보냈지만 지참금은 그대로 가졌다. 위테리크는 이에 분노하여 네우스트리아 왕 클로타르 2세와 테우데리크 2세의 형제인 아우스트라시아 왕 테우데베르 2세와 동맹을 맺고, 랑고바르드 왕국의 군주 아길루프와도 손을 잡아 테우데리크 2세를 협공하려고 했다. 그러나 각자 사정이 있었기 때문인지 연합 공격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위테리크를 암살한 뒤 서고트의 왕위에 오른 군데마르 역시 셉티마니아 공작 불가르를 통해 테우데베르 2세와 서신을 주고 받으며 테우데리크 2세와 브룬힐트를 조속히 타도하려고 했지만 실현에 옮기지는 못했다.

610년, 아우스트라시아의 빌리힐데 왕비가 갑자기 사망하고 테오데힐트가 새 왕비가 되었다. 《프레데가르 연대기》에 따르면, 테오데힐트가 빌리힐데를 독살한 뒤 그 자리를 가로챘다고 한다. 빌리힐데는 브룬힐트에게 복종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우스트라시아와 부르군트 왕국 사이에 평화가 유지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테오데힐트를 비롯한 아우스트라시아 귀족들은 달랐다. 그들은 일전에 부르군트에 넘겼던 생트, 샹파뉴, 투르가우, 그리고 프로방스 서부와 알자스 일부 지역을 되찾기를 바랬다. 테우데베르 2세는 그들의 설득에 넘어가 클로타르 2세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과 힘을 합쳐 부르군트를 협공하자고 제안했다. 부르군트의 테우데리크 2세는 낌새를 눈치채고 역시 클로타르 2세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과 합세하라고 권고했다. 클로타르 2세는 두 제의를 놓고 고심한 끝에 중립을 선택했다.

610년 초, 아우스트라시아군이 알자스를 침공하여 강제로 병합했다. 부르군트의 테우데리크 2세는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라인 강 하류에 있는 셀츠 요새에서 회담을 가지기로 했다. 그러나 테우데리크 2세가 소수의 무장 수행원과 함께 회담장에 간 것과 달리, 아우스트라시아의 테우데베르 2세는 정예병을 대거 동원해 회담에 참석했다. 결국 테우데리크 2세는 강한 압박을 받고 알자스를 형에게 공식적으로 넘겨야 했다. 이리하여 부르군트 왕국이 약한 모습을 드러내자, 알레만니인들은 자발적으로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에 귀순한 뒤 부르군트 왕국에 귀속된 아벙슈 일대를 파괴했다. 이 일련의 상황에 분노한 브룬힐트는 테우데리크 2세의 편에 서서 테우데베르 2세와 대립했다.

612년 5월, 테우데리크 2세는 부르군트의 전 병력을 집결한 뒤 할머니 브룬힐트와 함께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을 침공했다. 그들은 안델로트를 통과한 후 툴루즈를 공략했다. 이에 테우데베르 2세 역시 아우스트라시아의 전군을 이끌고 툴루즈 교외에서 맞붙었다. 전투 결과는 브룬힐트와 테우데리크 2세가 지휘한 부르군트군의 압승이었고, 테우데베르 2세는 수많은 정예병을 잃은채 아르덴 숲을 통해 도주했다. 이후 색슨족(작센족), 튀링겐족 등 여러 게르만족을 용병으로 고용한 뒤 612년 7월 톨비악(현재의 췰피히)에서 재차 맞붙었다. 《프레데가르 연대기》에 따르면, 프랑크 왕국의 성립 이래 이 톨비악 전투 만큼 막대한 희생자가 양산된 전투는 없었으며, 전사자들은 마치 그들이 아직 살아있는 것처럼 서로 몸을 기댄채 서 있었다고 한다. 테우데베르 2세는 이 전투에서도 역시 패배한 뒤 쾰른으로 도주했다. 그러다가 추격대가 오자 소수의 추종자들과 함께 탈출하여 숲속으로 달아나려 했다가 테우데리크 2세의 부하인 베르타르에게 사로잡혀 끌려왔다.

테우데베르 2세는 왕의 의복과 인장을 빼앗긴 뒤 샬롱 수도원으로 보내져 머리를 깎이고 수도자가 되었다. 그의 어린 아들이었던 메로베는 숙부인 테우데리크 2세의 명령에 의해 돌에 던져지면서 머리가 깨져 죽었다. 《성 콜룸바누스와 제자들의 삶》의 저자였던 바비오의 요나에 따르면, 테우데베르 2세는 수도자가 된 지 며칠 만에 조모인 브룬힐트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다고 한다. 반면 익명의 저자가 기술한 《프랑크 역사집》에 따르면, 리푸아리 백성들이 테우데베르 2세를 죽여 수급을 보내라는 테우데리크 2세의 지시에 따라 목을 베었다고 한다.

이로써 부르군트와 아우스트라시아 일대의 군주가 된 테우데리크 2세는 네우스트리아의 클로타르 2세와 대립했다. 613년 테우데리크 2세는 아우스트라시아와 부르군트에서 군대를 소집한 뒤 클로타르 2세에게 사절을 보내 덴텐 공국을 자신에게 넘기지 않는다면 정벌하겠다고 통보했다. 그러나 613년 8월 23일 메츠에서 돌연 승하했고 부하들은 집에 돌아갔다. 《프랑크 역사집》은 테우데리크 2세가 조모인 브룬힐트에 의해 독살당했다고 주장하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브룬힐트가 유일하게 남은 손자를 굳이 해쳐야 할 동기가 없으며, 《프레데가르 연대기》에 명시된 대로 이질에 걸려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2.5. 비참한 최후

부르군트와 아우스트라시아의 테우데리크 2세가 승하한 뒤, 브룬힐트는 테우데리크 2세의 사생아이자 자신의 증손자인 시게베르 2세를 아우스트라시아와 부르군트의 왕으로 선포했다. 그러나 아르눌프와 피핀 1세 등 아우스트라시아의 다른 귀족들은 네우스트리아의 클로타르 2세를 왕으로 초빙했다. 클로타르 2세가 안더나흐에 도착했을 때, 선왕 테우데리크 2세의 아이들과 함께 보름스에 있었던 브룬힐트는 테우데리크 2세에게 정당한 후계자가 있으니 아우스트라시아의 왕위를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사절을 클로타르 2세에게 보냈다. 이에 클로타르 2세는 특별히 소집된 프랑크 민회에서 왕위계승자를 결정할 것이라고 답했다.

브룬힐트는 클로타르 2세에 맞서기 위해 알보인, 바나차르 및 지지자들을 규합한 뒤 시게베르 2세를 튀링겐으로 보냈다. 이때 그녀는 알보인에게 비밀편지를 보내 바나차르 등이 클로타르 2세에게 합류하려 할 경우 그들을 죽이라고 지시했다. 알보인은 편지를 읽은 뒤 갈기갈기 찢어서 땅에 던졌지만, 바나차르의 부하 한 명이 이를 발견하고 밀랍판에 붙인 후 주군에게 보였다. 바나차르는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는 걸 깨닫고 다른 귀족들에게 이 사실을 털어놨다. 그들은 서고트 왕국 출신인 이민족 여자이고, 절대권력을 휘두르며 귀족들을 모조리 숙청한 브룬힐트에게 두려움과 혐오를 동시에 느꼈고, 이참에 테오데리크 2세의 아이들 중 1명도 탈출하지 못하도록 한 뒤 브룬힐트와 함께 모조리 죽이고 왕국을 클로타르 2세에게 넘기기로 결의했다.

얼마 후, 부르군트와 아우스트라시아 연합군이 브룬힐트의 지휘하에 클로타르 2세를 치려고 진군했다. 샹파뉴의 아시네 강에 이르러 네우스트리아군과 마주쳤을 때, 바나차르를 비롯한 수많은 귀족들이 곧바로 귀순했다. 브룬힐트의 원정에 동행했던 시게베르 2세, 코르부스, 메로베는 곧바로 체포되었고, 킬데베르는 가까스로 빠져나온 후 종적을 감췄다. 브룬힐트는 도주를 시도했으나 끝내 딸 테오데린다와 함께 체포되어 클로타르 2세의 앞으로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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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타르 2세는 메로베의 대부를 맡은 바 있었기에 그를 살려줬지만 시게베르 2세와 코르부스는 죽였다. 이후 브룬힐트에게 40여년 동안 프랑크 왕국을 혼란과 고통에 빠뜨리고 여러 왕을 파멸로 몰고 간 책임을 물었다. 이에 모든 프랑크인과 부르군트인이 한 목소리로
"저 악녀에게 참혹한 죽음을 내려라!"
라고 외쳤다. 브룬힐트는 3일 동안 온갖 고문을 받은 뒤 낙타에 태워진 후 조리돌림당했다. 그 후 발가벗겨진 채 머리카락과 두 팔, 두 다리가 두 마리의 야생마의 발에 묶인 뒤 두 말이 채찍질을 받고 앞으로 내달리면서 사지가 갈기갈기 찢겨졌다. 이리하여 프랑크 왕국으로 시집온 이래 40여 년 동안 나라를 좌지우지하며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서고트족 여인은 참혹한 최후를 맞이했고, 프랑크 왕국은 프레데군트의 아들이었던 클로타르 2세에 의해 통합되었다.

3. 여담



[1] 킬페리크 1세가 아우도베라 왕비와의 사이에서 낳은 장남이었다.[2] 이후 메로베도 수도원을 빠져나와 브룬힐트에게 합류하려고 했지만 귀족들의 방해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사람들을 모아 부왕 킬페리크 1세에게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다가 실패하고 살해당했다. 킬페리크 1세 항목 참조.[3] 프레데가르는 킬데베르 2세가 왕비 페일루바와 함께 독살당했다고 주장했는데, 다만 스스로도 별다른 근거가 없이 단지 소문일 뿐임을 인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