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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30 10:50:53

알렉산드르 푸자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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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

1. 개요

소련의 정치인, 외교관.

2. 생애

1906년 10월 12일, 러시아 제국 이바노보 오블라스트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5년에 전연방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30년, 볼가에 있는 필로스 농업대학을 졸업하고 농업 전문가로 활동했으며, 1931년 이바노보 수부르반 협동농장 부국장이 되어 1933년까지 근무했다.

이후 중앙으르 이동하여 1934년 소련 인민위원회 회의 산하의 국가통제위원회에 배치, 1940년에 수석통제위원으로 승진하였으며 1943년 국가통제위원회 부인민위원이 되었다. 1944년 쿠이비셰프 오블라스트 집행위원장, 1946년 쿠이비셰프 시당위원회 제1서기 겸 쿠이비셰프 오블라스트 제1서기로 재임했다. 1950년에 쿠이비셰프 시 제1서기에서는 물러났다. 1946년 소련 최고회의 부의장으로 선출되어 1958년까지 재임했으며, 1952년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 각료의장으로 임명되었다. 1952년 10월, 소련 공산당 19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 정치국이 간부회로 확대개편되면서 간부회 후보위원으로 전격 발탁되었다. 하지만 그를 발탁하였던 이오시프 스탈린이 불과 4개월 후에 사망하면서 1953년 3월 6일 전원회의에서 간부회 후보위원에서 해임되었다.

1956년 2월, 20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재선되었으나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 각료회의 제1부의장으로 격하되었다. 1957년 2월 22일, 이바노프의 뒤를 이어 주북 소련 대사로 부임하면서 외교관으로 전직하게 된다. 당시 북한은 8월 종파사건, 중국 인민지원군 철수, 1차 당대표자회 등 엄청난 격동을 겪던 곳이었으나 하루아침에 외교관으로 좌천된 푸자노프는 이러한 상황에서 우물쭈물하면서 도무지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하며 김일성의 수령 지위가 공고해지는 것과 김일성이 고려인과 연안계 간부들을 몰살시키는 것을 구경만 해야 했다. 대사 재임 중이던 1959년 2월, 21차 당대회와 1961년 10월, 22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그가 북한 대사 시절에 집필한 푸자노프 일지는 북한 역사 연구에 있어 필수적인 자료이다.

1962년 6월, 북한 대사에서 소환되어 바로 유고슬라비아 대사로 이임하였다. 1966년 4월, 23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1967년 4월에 유고슬라비아 대사에서 소환되어 불가리아 대사로 이임하였다. 1971년 4월, 24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고, 1972년 5월, 불가리아 대사에서 소환되어 아프가니스탄 대사로 이임하면서 다시 한번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1976년 3월, 25차 당대회에서 마침내 중앙위원회 위원에서 탈락하였다. 1978년 4월, 누르 모하마드 타라키가 쿠데타를 일으켜 모하마드 다우드 칸 정권을 전복시키고 아프간을 장악할 때에는 유리 알렉세예프에게 대사관을 맡기고 힌두쿠시로 가서 낚시나 즐기고 있었다. 쿠데타 직후 휴가에서 복귀하여 타라키를 만났으며, 아프간의 신정권에 대한 소련의 원조를 약속하였다. 하지만 하피줄라 아민 집권, 아프간 내부의 혼란에 있어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1979년 11월에 소련으로 소환된다. 귀국 후 소련 외무성에서 잠시 일하다가 1980년에 완전히 은퇴했다.

4차례 레닌훈장을 받았으며 그외에 4차례 수훈을 받았다. 소련 해체 후인 1998년 3월 1일에 모스크바에서 사망했으며 바가놉스키 묘지에 매장되었다.

3.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