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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4 22:52:40

맹조의 발톱 작전

1. 개요2. 무산된 작전3. 성사되었다면?

1. 개요

Operation Talon

맹금의 발톱 작전, 맹금류 발톱 작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6.25 전쟁 중이었던 1951년에 계획만 되고 실행되지 못한 작전이다.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이 입안한 것으로, 원산 부근에 상륙 및 공수작전을 실행하여 공산군의 후방을 타격하여 보급선을 차단하고 국지적인 고지전을 펼치고 있던 지상군은 대규모 공세로 전환하여 전선을 최소 평강-금강산-장전까지 밀어 올리는 작전이었다. 이 작전을 통해서 손실이 심한 고지쟁탈전을 피하고 전선의 굴곡을 정리, 전선을 축소하고 희생이 큰 고지전을 회피하고 공산군에게 대타격을 입혀서 확실하게 휴전 회담으로 이끌어낸다는 것이 목적이었다. 또한 당시에는 휴전을 이미 기정사실로 해 놓았던 상황이었기에 오히려 철원-원산선을 다시 확보하여 정치적 승리를 확실히 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철원-원산선이었냐면 철원과 원산 사이는 경원선이 지나는 추가령 구조곡이 있는 요충지이고, 거의 대다수가 산악지역이다보니 당연히 한 번 차지해 전선을 펼치면 방어도 쉽기 때문이다. 과거 신라가 전성기때 차지했던 영토도 이와 비슷해 역사적으로 효율이 증명되었으며, 1950년에는 이 선을 넘어서 전선이 길어지는 함경북도까지 너무 빨리 진격하다가 결국 이 선을 사수하는 것보다 훨씬 더 멀리 서울까지 포기하고 후퇴한 쓰라린 경험이 있었다.

2. 무산된 작전

유엔군사령부는 공산군이 치명타를 받을 경우, 오히려 휴전 회담에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염려하여 대규모 계획을 보류하고 휴전 회담에 영향을 주지 않을 정도의 소규모 작전만 허용했다.

이에 밴 플리트 장군은 지지 않고 작전을 하나 더 입안하는데 추계 작전이라고 이름만 다르고 비슷한 작전을 다시 상부에 보고하였지만 이것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편, 금강산까지 회복하여 중부 지역을 완전 수복하고자 하는 작전도 계획되었는데 통천군 일대까지 휴전선을 북진하려고 일단 고성의 거진읍을 점령하고 금강산으로 진입하려 하였으나 이것 역시 취소되었다.[1]

삼팔선 너머로 진격한 것이 위기감을 느낀 중국의 참전을 불러왔기 때문에 또다시 대규모 공세가 있다면 이번에는 소련이 참전할지도 모른다는 정치적 고려가 있었던 듯했으며 지나치게 전과를 확장시키면 도리어 그 지역을 다시 찾기 전에 휴전 회담에 나오지 않는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소련은 애초에 무기나 공군 지원하는 것 이상으로 참전할 생각이 없었고,[2] 중국 역시 지속적인 전쟁 수행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북한 소멸만 이뤄지지 않으면 어느 정도 더 양보할 소지는 있었으므로 결과적으로는 중국과 소련에 대한 과대평가에서 비롯된 결정이었다.[3]

백선엽 장군은 이 작전을 밴 플리트 장군에게 전해 듣고 굉장히 기대하였고 열심히 작전을 준비했지만 취소된 것에 대하여 상당히 아쉬워하였다.

사실 프랑스가 베트남과의 전쟁에서 패배로 우리나라 전쟁은 급히 휴전모드로 전환됐다. 리지웨이가 아니라 누구라도 휴전모드가 됐을 듯. 또한 공산군 측도 인천 상륙 작전으로 크게 당한 적이 있어 상륙작전에 대비를 철저하게 했다.[4] 다만 고지전에 따라 인명피해가 줄창 컸다.. 이렇게 고지전만 지속하면서 휴전을 기다릴 것인가, 일거에 정리하면서 강제로 끌어낼 것인가의 의견이 충돌했다.

또한 원산시에 대규모 기뢰를 깔아 놓은 상태에서 상륙하기에도 힘들었을 것이다. 이미 맥아더가 북진하고 있을 때 원산상륙작전을 실시했지만 원산 앞바다에 널려있는 기뢰 때문에 상륙도 못하고 그것들을 치우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이미 육군이 원산시를 점령하고 동해안 따라 북상하고 있을 때에도 해군은 기뢰를 치우는 데 애를 먹었고 일본 자위대까지 동원해서 그 작업을 했다. 그런 기억 때문에 원산시에 재상륙작전은 힘들었을 것이다.

다만 위의 주장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은 편이다. 1950년에는 국군과 유엔군이 38선을 처음으로 넘어서 북진했던 시기라서 기본적인 정보도 없이 원산만에 상륙작전을 강행한 것이라서 손해가 컸지만 1951년 이후부터는 원산 앞바다의 섬들을 유엔군이 전부 점령하면서 상륙에 필요한 교두보를 확보했고, 북한지역의 재해권 또한 유엔군이 장악하면서 사실상 북한 해군은 없는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도 당시 원산은 유엔군의 무자비한 대규모 폭격으로 사실상 가루가 된 상태였다.

3. 성사되었다면?

금강산삭녕군을 포함한 미수복 강원도, 미수복 경기도 등 현 휴전선 이북의 상당한 부분이 대한민국 실효지배영토가 되었을 것이다. 작전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도 휴전 회담의 장기화를 염려해서 받아들이지 않은 것인데 실제로 휴전은 이 작전을 입안하고 무려 2년 가까이 지난 후에 이루어졌다. 아마 당시 유엔군 사령관이었던 리지웨이 장군도 작전과 관계 없이 휴전 회담이 장기화될 줄 알았다면 작전을 승인했을 가능성이 높다. 중국과 소련도 북한 전체의 멸망이 아니라 자국 영토와 자본진영 사이의 완충지대가 필요했을 뿐이라 38선 이북지역까지 내주는 것도 큰 손해가 아니었기 때문에 실행되었으면 성공했을 가능성이 높다.[5]

작전에 성공했다면 이후 역사도 상당히 바뀌었을 것이다.

미수복 경기도를 탈환했다면 남한은 수도 서울특별시가 현재의 충청권의 군사적 포지션이 되어서 잠재적인 위협이 현재보다 크지 않았을 것이고, 무엇보다 서해5도도 안전해졌을 것이다.[6] 무엇보다도 전선의 길이가 짧아져서 현재 상황보다는 안전했을 것이다. 이에 따라 현 국군의 문제점인 머릿수에 집착하는 육군에 쏠려 있는 기형적인 구조가 타파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모병제까지는 아니더라도 현역 복무비율보다 보충역 및 면제비율이 더 높은 식의 널널한 징병제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을 것이다. 2011, 2013년 현역 판정율 91.5%라는 기록도 안 나왔겠지.[7]

한편 강남3구과천시 등 서울 동남권의 개발이 서울이 휴전선 부근에 있어서였다는 걸 감안하면 서울은 양주시, 고양시, 의정부시 등 북부 지역 내지는 인천권(경인통합)으로 확장되었을 것이고 반대로 강남 지역은 북부나 서부로 확장된 서울의 동쪽 위성도시들로 남았을 가능성이 높다. 거기에 수복 경기도가 경기도와 합쳐져서 경기북도와 경기남도로, 그리고 수복 강원도도 강원도와 합쳐져서 강원남도와 강원북도로 분도되었을 확률도 있었을 것이다. 북한의 존재로 인하여 옹진군과 강화군 등의 개발이 진척이 안 되었던 걸 고려하면 이 시나리오에선 옹진군이나 강화군도 현 인천광역시 도심처럼 개발되었을 가능성이 꽤 높다.

반면 북한은 동남부 곡창지대 중 하나인 철의 삼각지대의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던 평강평야를 남한에게 빼앗기고 재령평야와 함께 북한의 핵심 곡창지대인 연백평야가 비무장지대에 인접해 제대로 써먹지 못하거나 아예 빼앗겨 식량 생산량이 실제보다 훨씬 감소하게 될 것이다. 또한 동부 중요 도시인 원산시를 빼앗기거나 지켜낸다고 하더라도 현 시점의 서울처럼 접경지대 바로 코앞에 국군이 주둔하게 되는 등 방어상의 부담이 컸을 것이고 이에 따라 체제 취약성이 더 심해져 어쩌면 90년대 소련 붕괴동유럽 혁명, 고난의 행군을 맞아 북한도 붕괴되었을 가능성이 높았고 그러면 남북통일이 2000년대 초반에 이뤄졌을 확률이 높다.

참고로 북한의 기록이나 선전영화에서는 유엔군이 실제로 이 작전을 벌였는데 용감한 북한군이 쓸어버렸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북한 첩보원의 활약으로 공세를 좌절시켰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중공군과 휴전회담 장기화를 두려워해서 공세를 안 한 것이다. 참고로 위 첩보원 이야기를 토대로 나온 것이 영화 〈이름없는 영웅들〉이다.


[1] 허락받은 몇몇 작전들도 예상 사상자가 많다 하여 스스로 중지시킨 것도 있었다. 그래도 전선을 10~20km 북상시켜 퍼즐 조각같이 돌출된 전선을 일직선으로 만들고 휴전회담에 미온적인 공산군에 압력을 가하기 위한 제한적인 목적의 대규모 공세는 그와 수뇌부 모두 공감했기 때문에 이를 1951년 여름과 가을 사이에 실행해 성과를 거두었다.[2] 소련의 스탈린은 전쟁 개전 자체를 처음부터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김일성의 끈질긴 설득으로 결국 승인하고 지원했지만 이후에도 본격적으로 참전할 생각은 없었다는 것이 소련 붕괴 이후 문서 공개로 드러났다.[3] 사실 중국도 유엔군이 저 정도로 빨리 후퇴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고 한다. 실제로 이들의 원래 계획은 39도선에서 격전을 벌이다가 휴전할 생각이였다.[4] 제2차 세계 대전오마하에서 보듯 대비한 적앞의 상륙작전은 대참사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5] 중국은 휴전 이후 70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에서 전쟁이 난다고 해도 국군과 미군이 평양-원산선까지 진격하는 것은 용인하겠다고 공식, 비공식적으로 언급하고 있다.[6] 최소 황해도까지 수복했을 경우엔 서해5도는 물론이고 과거 UN군과 국군이 수복했으나 방어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북한으로 넘어간 초도석도, 심지어 평안북도의 신미도가도까지도 남한이 보유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 경우 신미도와 가도가 지금의 서해5도를 대신하는 역할을 했을것이고 그 결과 북한은 서해를 봉쇄당해 거의 이용이 불가능한 상황이 되어버린다.[7] 저출산 문제를 고려하면 그 시기가 미뤄지더라도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단, 전선 길이의 감소와 휴전선에서 수도로의 거리가 길었기 때문에 군축도 가능했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