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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창리 전투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6.25 전쟁의 전투 및 작전 목록 파일:북한 국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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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경과3. 여담4. 같이 보기

1. 개요

1951년 제6보병사단중공군의 5차 공세(4월 공세)에 맞서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1] 사창리와 화악산 일대에서 4월 22일부터 24일동안 벌인 전투로, 현리 전투와 마찬가지로 사기 관리에 실패해 부대가 와해된 대표적인 사례다.

2. 경과

참고 자료1 참고 자료2

1951년 4월 국군 제6사단은 미군 제9군단의 작전 계획에 따라 사창리 북방의 와이오밍 선으로 진격하려 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저항이 심해지고 대규모의 적이 남하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사단장 장도영 준장은 22일 오후 4시경 선두 좌측의 제19연대에겐 광덕산, 선두 우측의 제2연대는 두류산, 그리고 예비대로 뒤따르던 제7연대는 사창리로 가 방어진지를 구축하도록 지시한다. 이때 중공군은 6사단 방어구역을 돌파하여 유엔군 전선을 분단시킴으로써 주공이 겨냥한 서부전선의 설마리파평산 방면으로의 증원을 저지하려는 의도로 공격을 가해왔다. 즉 조공은 조공이되 작전적 차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으므로 매우 매서운 공격이 예상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중공군의 공세에 위기위식을 느끼지 못했던 간부나 대다수가 신병들이었던 병사들 모두 저마다 꾸물거렸다. 그렇게 해가 지자 중공군 제118사단이 공격준비사격 없이 제2연대를 휩쓸었고, 뒤이어 제19연대도 비슷한 상황에 처했다. 이렇게 1시간이 경과되자 양 연대 전체가 방어진지를 포기하고 무질서하게 도주하기 시작했다.[2] 제7연대는 제2연대가 버리고 달아난 방어진지를 탈환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역시 얼마 안 가 패주했다. 한편 6사단 책임구역 내의 미군 포병은 한국군 제6사단 구역에 관측소를 설치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국군의 화력지원본부(fire support center)를 통해 목표를 지정받아야 했다. 하지만 한국군의 전방관측요원이나 포병들까지 죄다 도주하는 바람에 이렇다 할 포격 지원을 하지 못한 채 이대로 남아 적의 표적이 되든가, 아니면 패주 행렬에 가담해야 할 지 선택해야 했다.

그리고 야포와 각종 차량들이 뒤섞인 패주 행렬은 23시 자정 무렵 사창리 계곡에 집중돼 큰 혼란이 야기되었다. 대혼란의 와중에 미 제2야전로켓포병포대와 미 제2화학박격포대대 C중대는 105mm 야포 및 4.2인치 박격포를 모두 상실해 전투력을 완전히 잃어버렸고, 미 제987야전포병대대 역시 보유한 화포의 절반을 유기해야만 했다. 미군이 이런 상황이니 당연히 6사단 포병대대 역시 모든 105mm 곡사포를 버려둔 채 몸만 빠져나왔다. 사단의 도주는 23일 아침이 되어서야 간신히 진정될 기미를 보였다.

23일 주간 제6사단은 화악산과 석용산을 잇는 캔자스 선(Line Kansas)에서 방어선을 구축하라는 군단 명령에 따라 병력을 수습하여 북상시키려 했으나 날이 저물 때까지 견고한 방어진지 점령은커녕 제대로 된 병력 수습조차 실패했고, 23일 야간 중공군의 공격이 재개되자 거의 즉시 지난 밤의 패주가 반복되었다. 6사단은 그 길로 델타 선(Line Delta) 이남, 가평 남쪽까지 철수했으며, 이로 인해 측방이 노출된 미 제1, 9군단도 후퇴하게 되었다. 그나마 전날 전투력을 상실한 한미 포병을 대신하여 6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북쪽으로 진출한 영연방군 제27여단 뉴질랜드 왕립야전포병연대와 미 제213야전포병대대는 6사단의 붕괴 조짐이 보이자마자 철수를 개시하여 22일 야간과 같은 대량의 장비 손실은 피할 수 있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예비대로 대기하고 있던 영연방군 제27여단이 가평 전투에서 3일 동안 방어선을 고수했고,[3] 이 틈을 타 UN군이 북한강 남쪽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함으로써 중부전선이 붕괴하지는 않았다. 또한 무질서하게 패주하는 바람에 포위당해 전멸하는 것보다 사상자가 적었다.

한편 장도영 준장은 26일 아침 밴 플리트 미8군 사령관으로부터 "당신, 싸울 수는 있냐?(Can you fight?)"는 고함을 들었고, 이에 장 장군도 이에 지지 않고 "싸울 수 있다!"고 맞고함을 쳤다고 한다.[4] 또한 미 제9군단장 호지(William Morris Hoge) 소장은 장도영 준장과 직접 대면한 25일 "전부 이길 수는 없다(You can't win them all)"고 위로하는 한편 다음과 같이 엄중한 질책을 담은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장도영 장군에게,

이 서한은 귀하가 1951년 4월 25일 귀하의 사단의 상태와 현황을 보고한 서한에 대한 답장이오.

1951년 4월 22일 밤 귀하의 사단이 보인 행위에 대한 나의 실망은 글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요. 22일 저녁 제2연대와 제19연대의 패주와 와해는 납득할 수 없으며 모든 면에서 불명예스러운 것이오. 내가 가진 정보에 의하면 적군은 귀하의 사단에 비해 병력과 장비 면에서 열세에 있었던 것이 분명한데 제2연대와 제19연대는 이렇다 할 저항도 하지 않고 혼란에 빠져 도주했으며 무기와 장비를 적이 노획하도록 내버려 두었고 우리 측의 지원부대(포병)들까지 유린되게 했소. 이 때문에 지원부대들은 심각한 물자와 장비의 손실을 입어야 했소.

제7연대도 나을 것이 없소. 제7연대는 예비대로서 공격을 감행해 제2연대가 잃어버린 진지를 탈환하라는 지시를 받았소. 이 공격을 실시했다면 성공했을 것이 분명하고 다른 부대들의 와해를 막는 한편 진지를 되찾을 수 있었으리라 확신하오. 허나 제7연대는 이 공격을 실시하지 않고 후방으로 달아났으며 연대의 일부 병력이 23일 오전 수마일 후방에서 재집결했을 뿐이오.

귀하의 사단으로 인해 양익의 아군 부대들은 적의 돌파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소. 적군이 초기의 성공을 확대했다면 엄청난 참사가 일어났을 것이오. 아군이 적의 돌파를 저지할 수 있었던 원인은 적군이 소수에 불과했고 한국군 6사단의 패배로 인한 이점을 활용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오.

본인의 판단으로는 귀하의 사단이 와해된 근본적인 원인은 모든 계급의 장교와 부사관들의 지휘력과 통제력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라 보오. 하위 제대의 부사관과 장교들이 (교전) 초기 단계에서 지휘책임을 고수했다면 혼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오. 이러한 혼란은 매우 빨리 퍼지기 때문에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최대한 빨리 진정시켜야 하는 것이오.

상위 제대의 지휘관들은 전투 초기 단계에 해당 구역에 없었기 때문에 지휘관들이 개입하기도 전에 병사들의 패주가 손을 쓸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상위제대 지휘관들의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오. 사단장과 사단 참모들, 연대장과 그 이하의 지휘관들은 부대의 훈련과 규율 유지에 책임을 지는 것이오. 과거에 이러한 조치들을 충분히 취했고 이러한 긴급 상황에서 공격적인 지휘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면 이와 같은 패주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오.

본인이 제9군단의 지휘를 맡은 이래 4월 22일까지 제6사단은 부여받은 임무를 모범적으로 수행해 왔소. 본인은 귀하와 귀하의 사단을 높게 평가했으며 한미양국의 고위층에게도 칭찬했소. 이러한 확신이 없어진 것이 정말 유감이오. 앞으로 이와 같은 불명예스러운 기억을 지워버릴 수 있을 만큼 전장에서 활약을 해야만 나의 확신이 되살아날 것이오.

본인은 귀하와 한국군 6사단의 전 장병이 사단의 재건을 위해 최선을 다하여 제8군의 다른 부대들과 전장에서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영광스러운 위치를 차지할 것이라 기대하는 바이오.
From Major General W. M. Hoge to Brigadier General Chang Do Young(1951. 4. 28), James A. Van Fleet Papers, Box 86, Republic of Korea Army, Folder 1-2, 4-9, 10

3. 여담

4. 같이 보기



[1]제15보병사단 주둔지.[2] 앤서니 패러-호클리(Anthony Farrar-Hockley) 영국 육군 대장이 집필한 영국군 한국전 공간사 The British Part in the Korean War Vol.II : An Honourable Discharge(HMSO, 1995), pp.139~140 에선 "Fortunately, they had outpaced their foe.(다행히도 저들(한국군)은 적군보다 훨씬 앞서 도망치고 있었다.)"라고 냉소적으로 평가했다. 참고로 패러-호클리 장군은 설마리 전투 참전용사다.[3] 특히 왕립 호주연대 3대대의 분전이 유명하며, 동 대대는 아직도 가평 전투를 대대적으로 기념한다. 주둔지 이름에도 가평을 붙일 정도. 덜 알려졌지만 캐나다군 프린세스 패트리샤 경보병 연대 2대대도 용감히 싸웠다.[4] 다만 패전의 책임을 묻기는 했어도 유재흥과 달리 후방으로 좌천시키지 않고, 계속 지원해줘 후일 용문산 전투로 설욕하게끔 해준다.[5] 국방부에서 1972년에 펴낸 한국전쟁사 제 5권(중공군 침략과 재반격작전기) 812p에 그의 증언이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