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능선 전투 Battle of Bloody Ridge 血染岭战斗 | ||
시기 | 1951년 8월 16일 ~ 9월 5일 | |
장소 |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동면 일대 | |
교전국 | UN군 대한민국 미국 | 북한 중국 |
병력 | 미군 제2사단 국군 5사단 36연대 국군 7사단 대전차대대 | 북한군 제12사단 |
피해 | 3,700여 명 사상 | 15,000여 명 사상 |
결과 | UN군의 승리 양구군 일대 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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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6.25 전쟁이 교착에 빠진 1951년 8월 18일에서 9월 5일까지 미 2사단, 그리고 그 아래에 배속된 대한민국 국군 5사단 36연대, 국군 7사단 대전차공격대대가 강원도 양구군 983고지 - 940고지 - 773고지 능선군에서 북한군 5군단 예하 12사단과 치른 고지전으로, 격전 중에 생겨난 무수한 사상자들이 쏟은 피들이 능선을 시뻘겋게 물들이자 종군기자들이 태평양 전쟁 당시 과달카날 전역에서 미 해병대와 일본군이 격전을 벌인 과달카날 섬의 피의 능선(Bloody Ridge)의 이름을 따 이 곳 역시 피의 능선이라고 이름붙였다.2. 전투 전 상황
파일:허트브레이커리~찡4o4.png이미지 출처
6.25 전쟁 중반인 1951년 7월 개성에서 첫 휴전 회담이 열렸으나 서로의 입장 차만 확인한 채 결렬되었다. 이후 유엔군은 휴전으로 중단되었던 공격을 재개, 장마가 끝난 직후인 8월 14일, 미 8군사령관은 국군 1군단 및 미 10군단의 합동 작전인 포복 작전(Operation Creeper)[1]을 하달했고, 이에 미 10군단장은 16일 국군 5사단에게 가칠봉 일대를, 국군 7사단은 백석산 일대의 883고지, 미 2사단에겐 단장의 능선을 공격하도록 명령한다.
이에 미 2사단은 단장의 능선 남쪽 능선[2]부터 공격하기로 한다.
3. 전투 경과
출처
3.1. 1차전(8.18~8.26)
8월 15일 공세를 며칠 앞둔 상태에서 사전 공격준비사격이 실시되었다.8월 18일 오전 6시, 공격준비사격 직후 미 2사단에 배속된 국군 5사단 36연대가 피의 능선 고지군을 향해 기어오른다. 일단 3대대는 서쪽의 983고지로, 2대대는 중간의 940고지와 동쪽의 773고지로 기어올랐으나 북한군들이 목함지뢰들을 여기 저기 매설하고 포격으로 완강하게 저항하는 통에 진격이 돈좌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연대장 황엽 대령은 지뢰 지대에 포격을 요청해 오후 8시부터 200문의 포들이 2시간 가량 퍼부어댔다. 이후 10시에 돌격을 시도했으나 잔여 지뢰들 때문에 피해가 생기자 황엽 대령은 병력을 물렸다.
8월 19일 오후 2대대는 773고지를 향해 공세를 시작해 20일 새벽 2시에 점령에 성공했다. 이후 2개 중대가 940고지를 향해 후속 공세를 펼쳤으나 돈좌되었다.
8월 21일 5개 중대가 세 갈래로 나뉘어 940고지로 돌격했고, 조공병력이 쇄도하고 국군 저격병들이 북한군 토치카들을 집중 저격하자 적들은 동요했다.# 그리고 이 틈을 타 오후 10시, 6중대가 점령에 성공한다. 한편 3대대도 983고지로 재공세를 펼쳤으나 돈좌되었다. 하지만 이 와중에 11중대가 940고지와 983고지 중간을 거쳐 뒤편으로 침투해 발판을 다졌다.
8월 22일 오전 11시 30분, 마침내 983고지를 점령했다. 뒤이어 983고지 북쪽의 855고지마저 확보함으로써 36연대는 피의 능선을 완전히 점령하게 되었다. 그러나 점령 과정에서 생긴 피해로 황엽 대령은 983고지의 방어를 미군이 맡아주기를 건의하였으나 미8군에서 '당신네들의 공적을 미군이 가로챈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다.'는 이유로 거부했고, 그날 밤 북한군은 1개 대대로 야간기습을 시도하나 성과가 시원찮자 물러난다.
8월 26일 오전 2시 북한군의 연대급 기습이 시작되었고, 983고지를 포위할 정도가 되자 36연대는 완전히 포위되기 전 후퇴하여 적에게 고지를 내주게 된다. 뒤이어 940, 773고지들도 차례대로 피탈당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미 10군단장은 서쪽 백석산 전선의 국군 7사단에게 983고지 서쪽 능선의 554고지를 우선 점령하라고 명령해 이 날 7사단 8연대와 대전차공격대대가 554고지 남쪽 536고지를 점령한다.
3.2. 2차전(8.28~9.5)
8월 28일 9시, 미 9연대는 940고지, 국군 36연대는 773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각자 공세를 펼쳤다. 이후 36연대는 773고지를 재탈환한 뒤, 야간에 다시 탈취당하기도 하였으나 이후 재돌격해 다시 탈환하며 쟁탈전을 이어갔다. 한편 미 9연대는 940고지 앞에서 돈좌된 상태였다.8월 31일 국군 7사단 8연대가 554고지 서쪽 901고지를 점령해 피의 능선 전장에 가세할 준비를 마쳤다.
9월 2일 국군 7사단 대전차공격대대가 전투지경선을 넘어 피의 능선 전장에 가세[3]해 554고지를 점령한다. 뒤이어 미 9연대 병력들이 피의 능선 북쪽 진고개의 666고지와 752고지를 장악함으로써 피의 능선을 포위했다.
9월 3일 미 9연대가 773고지를 탈환했고, 이에 983, 940고지의 북한군들은 완전히 포위되기 전 물러나기 시작했다.
9월 4일 미 9연대가 940고지를 탈환했다. 한편 이 무렵 동쪽 가칠봉 일대에서는 국군 5사단 주력이 미 38연대와 함께 가칠봉 전투를 치른다.
9월 5일 미 23연대가 983고지 북쪽 855고지를 점령해 포위를 굳혔으며, 최종적으로 미 9연대가 마지막 남은 983고지로 돌격해 오후 2시경 점령에 성공하여 해당 전투는 한미연합군의 승리가 되었다.
4. 여담
- 한국군은 전사 130여 명 등 사상자 800여 명, 미군은 전사 530여 명 등 사상자 3천여 명을 내었고, 북한군은 병력 약 1만 5천여 명을 잃었다고 추정한다.
- 한국전쟁 당시 공산권(북한, 중공) 부대에선 기관총 사수의 발목에 쇠사슬을 채운 후 기관총에 묶어 후퇴도 못 하고 죽을 때까지 기관총만 쏘도록 했는데, 특히 이 전투에선 이런 사례가 즐비했다고 한다.#
- 또한 미 제9연대 3대대 병사들은 9월 4일 940고지 탈환 당시 부상자 한 명이 발생하면 후송한다며 3~4명이 들고 내려올 정도로 겁에 질렸었다고 한다.#
- 여기에 동원된 국군 36연대 장교들 중 채명신의 동생인 채명세가 소위로 있었고, 채 중령 역시 서쪽 백석산 전선에 있었다. 그리고 이런 저런 정보가 오가면서 7사단 5연대장이던 채 중령도 동생이 근처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나 전선에 있겠다는 동생의 의지와 사사로운 감정으로 동생을 후방으로 빼낼 수는 없다는 감정이 맞물려 모른 척 하다 결국 동생의 전사 소식을 듣게 되었다.
* 비록 격전을 치른 건 36연대 뿐이지만 5사단 내에서도 자랑거리인지 사단가 내용에 언급될 정도다.
* 국방홍보원이 운영하는 국방TV 유튜브 채널이 구르카 용병 주제의 콘텐츠를 다룰 때 유용원 군사기자가 영국군 소속으로 참전한 구르카 부대가 피의 능선 전투에서 활약했다는 역사왜곡 발언을 하였다.(15분 20초부터 참고)
그러나 6.25 전쟁에 참전한 영국군에 배속된 구르카 부대 자체가 없었을 뿐 아니라, 왜곡을 하려고 해도 영국군이 참가했던 전투를 언급해야 그럴듯한 것인데 보다시피 피의 능선 전투는 국군과 미군이 중공군과 벌인 전투라서 영국군에 배속된 구르카 부대가 있었다고 가정하더라도 피의 능선 전투에서는 활약할 수가 없는 것이다.
5. 대중매체
해당 전투 중 983고지를 두밀령 고지[4]로 불렀고, 이를 두고 벌인 공방전을 두밀령고지 전투로 불렀다.[5] 그러나 피의 능선 전투의 하위 전투였던 만큼 독립적으로 별칭되지는 않는다.[6]5.1. 태극기 휘날리며에서의 묘사
작중 마지막 무대가 두밀령 전투이긴 한데 극장 개봉 당시 팸플릿, 그리고 아트북에서 두밀령 전투의 공식 명칭을 파주 석현리 전투로 표기하는 바람에, 파주 석현리에 위치한 두밀령이란 가상의 고지에서 벌어진 가상의 전투가 되어, 혼란을 가중시켰다.그래도 이 전투와 유사하게 미 해병대 F4U 콜세어 6대의 공습을 시작으로 국군 포병대의 후속 포격으로 공준사가 이뤄졌고 전투기 한대가 격추당하였음에도 북한군 진지와 방어군에게 큰 피해를 준 후 M4 셔먼을 대동한 보병들이 고지 위로 기어올라가 육박전을 펼치며 승기를 잡아간다.
그러나 이진태를 선봉으로 한 북한 6사단 수색대(붉은 깃발부대)가 산 아래로 뛰어내려와 무자비한 공격을 가하면서 전세를 알아볼 수 없는 난장판이 되었고, 그 한복판에 있던 이진석은 형 이진태와 재회한다. 그러나 이미 사랑하는 이들을 모두 잃은 분노에 눈이 뒤집힌 진태는 진석을 알아보지 못한 채 보자마자 찔러 죽이려 들고, 결국 살기 위해 반격하는 진석이었지만 차마 죽일 수 없어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다시피 한다.
형제가 육박전을 벌이는 와중 인민군 6사단 주력이 산 아래로 내려오며 공격해 오자 국군은 퇴각을 결정한다. 한편 진석이 살아있음을 깨달은 진태는 동생을 도피시키기 위해 진지 한켠에 나뒹굴던 M1917 브라우닝 기관총을 세우고 총구를 인민군을 향해 돌렸고, 그렇게 진태가 이목을 끌 동안 그의 동생 및 한국군은 무사히 퇴각할 수 있었다.
또한 영화 도입부 데이터베이스에 진석의 소속이 1사단 제8보병연대[7]로 기재되었다가 나중에 전화할 때 12연대 소속으로 정정했는데, 설정 오류가 아니라면 진석이 형이 있는 두밀령으로 가기 위해 전출을 신청했었던 게 남아서 DB가 꼬였을 가능성도 있다.[8]
[1] 양구군 해안분지 동쪽 낚시바늘 형상의 능선(J Ridge)을 탈취, 해안분지 공격의 발판을 마련한다는 작전.[2] 첫 공격 당시엔 무명의 능선이었으나, 이후 피의 능선으로 불리게 된다.[3] 백석산 전투 상황도에서도 보이듯 해당 고지는 미 2사단 작계지 안에 있다. 하지만 계속 죽을 쑤자 대전차대대라도 가세시킨 것.[4] 공식 명칭은 수리봉으로, 화천의 수리봉과는 이름만 같다.[5] 국회법률전자 도서관 링크.[6] 이는 금성 전투의 핵심 전투인 백암산 전투와도 같다.[7] 다만 8연대는 한번도 1사단에 예속된 적이 없는데, 반대의 경우는 평양 탈환작전 당시 1사단 1개 대대가 얼떨결에 8연대에 배속된 적은 있다.[8] 아니면 '두밀령 고지가 파주에 있다'는 팜플렛 설정과 이곳에서 전투했던 국군 부대가 12연대라는 가정이 맞다면 8연대라 적힌 건 무시하고 불렀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