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6.25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25일부터 6월 28일까지 육군사관학교 생도들로 구성된 생도대대 및 (구)수도사단(7사단) 9연대 1대대가 태릉과 경기도 포천시 내촌면과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해 북한군과 벌인 전투이다.2. 배경
1950년 6월 24일 당시 (구)수도사단, 지금의 제7보병사단은 경기 북동부를 맡고 있었으며, 동두천에는 제1연대, 포천 방면은 제9연대가 맡고 있었다.그리고 6월 25일 새벽 기습 남침한 북한군은 이 지역에 사전 배치된 제3사단과 제4사단, 제105기갑여단 등의 병력으로 동두천과 포천, 의정부를 거쳐 서울을 조기 점령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동두천 전투가 시작되었고, 포천 또한 포천 전투로 급박해졌다.
이처럼 전황이 급박해지자 육군본부는 수도경비사령부의 제3연대 병력을 포천 방면으로 급히 보내는 한편 태릉에 있는 육군사관학교에서 교육중이던 생도들도 전투부대로 편성해 투입하라는 명령을 내렸다.[1] 이에 육군사관학교장 이준식 준장은 정식 임관을 20여 일 앞두고 비상소집되어 학교로 복귀한 생도 1기 262명 전원과 입교한 지 불과 20여 일 밖에 되지 않은 생도 2기 277명 등 539명으로 생도대대를 편성해 곧바로 전선으로 향했다.
3. 전투
부대 편성을 마친 생도대대는 6월 25일 오후 포천시 내촌면으로 가서 서울특별시청 경찰국의[2] 전투경찰 1개 대대와 함께 교차로 인근 고지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내촌은 철원에서 포천으로 이어지는 도로와 동두천에서 포천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교차하는 지점으로 의정부 동쪽 방어의 요충지였다.6월 26일 북한군 제3사단의 일부 병력이 접근해오자 생도대대는 이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의정부 전투에서 (구)수도사단이 패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생도대대는 태릉으로 철수해 (포천 전투에서 살아남은) (구)수도사단 9연대 1대대 병력들과 함께 불암산과 태릉 일대에 진지를 쌓고 방어선을 구축했다. 하지만 의정부 전선이 무너짐으로써 제1사단이 지키던 임진강 방어선도 측방에서 협공을 당할 위험에 놓이게 되었고, 1사단이 물러남으로써 서울이 점령될 위험에 놓이게 되자 이승만 정부는 6월 27일 새벽에 대전으로 피신했고, 6월 27일 오후부터는 서울 근교에서 북한군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내촌 전투 이후 중랑천 인근까지 곧바로 진격해온 북한군은 6월 28일 새벽부터 태릉 지역으로 포격을 가해왔다. 게다가 육군본부와의 통신마저 단절된 상태에서 큰 피해가 우려되자 사관학교장 이준식 준장은 생도대대에 철수를 명령했다. 그러나 북한군의 포격이 계속되는 상태에서 이 명령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뒤늦은 철수과정에서 생도들은 큰 피해를 입고 와해되었다. 한편 이 와중에 일부는 불암산으로 들어가 주민들의 협조 속에 일대를 교란하는 유격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자세한 건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 참고.
4. 결과
6월 28일 한강을 건너 철수한 생도대대는 이후 수원 전투 등에도 참전하는 등 7월 4일까지 전투를 치르고 대전으로 철수했다. 이 과정에서 생도 151명[3]이 전사하고 63명이 실종되었다. 이후 살아남은 생도들도 장교로 임관하여 전투에 투입되었고, 추가로 95명[4]이 전사해 생도 1·2기 596명 중 246명이 전사했다.한편, 현재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에서 내촌면으로 넘어가는 큰넋고개에 전적비인 '육사생도 6.25 참전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장교자원이 부족한 창군 초창기에 그것도 전쟁 중이어서 초급 장교들이 급속히 소모되는 상황에서 생도들을 후방으로 이동시켜 단축교육을 실시해서 장교로 임관시키지 않고 급하게 전투에 투입해서 일반병같이 소모시킨 것은 채병덕의 큰 비판거리중 하나이다.
[1] 당시 육군사관학교에는 1948년 9월 국군이 창설된 뒤 입교한 생도 1기(262명)와 최초의 4년제 생도로 1950년 6월 1일에 입교한 생도 2기(334명)가 교육을 받고 있었다.[2] 지금의 시·도경찰청(행정자치부 직할의 광역경찰청)과 전혀 다른 직제로서 XX도청 직할의 XX부국이다. 제1공화국은 미군정청의 경무부(警務部)와 관구경찰청(管區警察廳)을 내무부의 치안국과 10개 도청의 경찰국으로 축소했기 때문에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지방공무원으로 근무한 경찰관들은 박봉과 격무에 시달렸지만, 내무부가 모든 도청의 고위직(예를 들면 대한민국 대통령→도지사/국무총리→부지사/내무부 장관→국장/내무부 차관→과장)을 임명하여 파견하는 방식으로 경찰국을 통제했다.[3] 1기생 65명, 2기생 85명.[4] 1기생 48명, 2기생 47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