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51년 9월 4일부터 10월 14일까지 미 19군단 예속 국군 5사단이 북한 27, 12사단이 주둔한 가칠봉(해발 1,242m)을 비롯한 강원도 양구군 해안분지(펀치볼) 북쪽 능선을 점령해 해안분지를 완전히 확보하려고 벌인 전투이다.또한 한미 해병들이 8월 31일 ~ 9월 21일간 해안분지 북쪽 능선의 모택동 고지(1026고지)와 김일성 고지(924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치른 펀치볼 전투와 혼동하는 사람이 있지만 이 둘은 해안분지 북쪽 능선을 각각 확보하기 위해 거의 동시기에 치른 별개의 전투다.
참고로 가칠봉 전투 이후 육군에서 점령을 시도한 '김일성 고지'와 펀치볼 전투에서 해병대가 점령한 '김일성 고지'는 각기 다른 고지로 육군의 '김일성 고지'는 가칠봉 북쪽의 1211고지를 가리킨다. 이 1211고지는 주인이 몇 번씩 바뀌는 격전 끝에 북한이 차지해 군사분계선 이남의 가칠봉과 대치하고 있다.
2. 전개
참고 자료1951년 8월 30일 미 해병 1사단 및 예속된 국군 해병 1연대가 먼저 펀치볼 전투를 치른다. 그리고 같은 날 국군 5사단 27연대는 적진 정찰과 부대 배치를 마친다.
그리고 9월 4일 5사단 27연대가 미2사단 38연대와 함께 가칠봉 일대를 향해 기어오른다. 하지만 데인저 클로즈로 인해 화력지원을 온전히 받을 수 없었기에 가칠봉 일대를 방어하는 북한 27사단[1]과 12사단 23연대는 여유롭게 저지대에서 기어오르는 국군들을 상대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미군은 우월한 화력으로 가칠봉을 점령한 뒤 이를 27연대에게 인계했으며, 이 기세를 몰아 27연대장은 3대대에게 가칠봉으로부터 북쪽으로 500m 가량 떨어진 김일성 고지(1211고지)를 점령할 것을 하달한다. 그러나 3대대 2개 중대로는 뚫을 수 없자 연대장은 1,2대대를 축차 투입했으나 이조차도 돈좌되었고, 급기야 피의 능선 전투를 치르고 온 36연대까지 투입해 마침내 김일성 고지 점령에 성공한다. 그러나 적의 역습에 충분한 대비를 하지 않아 점령 5시간만에 다시 물러나야 했다.
그래도 지독하리만치 쟁탈을 6번 반복한 끝에 5사단은 (김일성 고지 부근을 제외한) 가칠봉 일대 고지들을 장악할 수 있었으나 이로 인해 사상자는 수백 명에 달할 정도로 무시할 수 없었기에, 10월 즈음 국군 3사단에게 가칠봉 진지들을 인계하고 후방으로 물러났다.
3. 여담
- 이후 5사단 진지들을 인계받은 3사단도 쟁탈전을 반복하는 와중, 김일성 고지로도 돌격했으나 역부족이었고 널려있는 시체들을 모아 진지를 구축하기도 했다.
- 이 봉우리 일대는 금강산의 마지막 봉우리들로, 이 7개가 있어야 1만 2천봉이 완성된다는 의미로 더할 가(加)가 쓰였다고 한다.
- 제4땅굴이 가칠봉 부근에 있다.
[1] 7,12,32연대 예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