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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23 04:40:52

공주-대평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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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6.25 전쟁의 전투 및 작전 목록 파일:북한 국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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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전투 경과
2.1. 공주 전투2.2. 대평리 전투
3. 결과 및 영향

1. 개요

6.25 전쟁 초반 전의 전투 이후인 1950년 7월 13일부터 16일동안 미군 제24보병사단이 공주시(당시 공주군)와 세종특별자치시(당시 연기군) 관내를 흐르는 금강에 방어선을 구축해 북한군 2, 3, 4사단을 저지한 전투이다. 금강 방어선 전투로도 불리며 미군 전사에는 Battle of the Kum River로 기록되어 있다.

일부 미국 전사에서는 공주-대평리 전투(금강 방어선 전투)를 대전 전투에 포함시켜 광의의 대전 전투 (7월 13일~7월 20일)로 설명하기도 한다.

미군은 전사 317명, 실종 및 포로 185명의 손실을 보았다.

2. 전투 경과

미 제24보병사단의 제34연대가 공주를 방어하기로 하고 제19연대가 7월 12일 저녁에 대평리 일대에 도착하여 13일 09시 30분경에 방어책임지역을 제21연대로부터 완전히 인수받았다.

2.1. 공주 전투

7월 14일 아침 미 34연대 방면을 정찰중인 항공기가 북한군들이 나룻배 2척으로 도하를 시도한다는 보고를 했으며, 이에 34연대의 대대들은 적들 수가 늘어날 때까지 침묵했다. 반면 11포병대대 A포대는 동일 항공기의 연락을 받고 155mm 곡사포 2문을 그 지점을 향해 한동안 퍼붓기도 했다. 직후 적들은 삼교리 일대에 포진한 제63포병대대 본부를 노리고 박격포 공격을 가해 통신교환대를 박살냈다. 그런데 직후 적들은 전방의 34연대를 우회해 제63포병대대의 예하부대들을 노렸으며, 우선 A포대가 기습을 받았다.

그리고 오후 2시 15분 무렵엔 남쪽의 B포대도 대대급 공격을 받았고, 이를 지원하기 위해 광복군 출신 장철부 소령이 지휘하는(직접 현장 지휘는 아님) 육군 독립기갑연대 기병중대가 돌격하여 적을 배후를 공격하였고 비록 적을 격퇴하지는 못하였지만 B포대원들과 함께 철수에 성공하여 미군 부상병들을 말에 실어 논산으로의 후송을 도왔다.

이 전공은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1979년 발간한 한국전쟁 공식 전사(戰史) - 한국전쟁사 제2권 지연작전기 (p. 471)에서 기병중대의 소대장이었던 조철돈 소위의 증언 형식으로 그리고 미 육군 군사((戰史) 연구소(U.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가 1961년 발간한 한국전쟁 공식 전사(戰史) -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p. 128)와 T. R. 페렌바크가 저술한 미국의 유명한 한국전쟁 역사책인 This kind of War에도 기술되어 있다.

* '한국전쟁사 제2권 지연작전기' (p. 471) - 조철돈 소위 증언 원문 발췌
"우리 중대가 유구전투(평택―조치원 부근의 전투 참조)를 치르고 공주로 복귀하다 보니 12일 밤이 되었는데, 그때 이미 공주의 금강교가 끊어진 다음이었다. 그래서 금강 서안을 따라 밤중으로 말을 달려 그 이튿날 13일 아침에 부여대안에 도착, 그곳에서 배를 구하여 부여로 도하하였다. 부여에서 공주로 가다가 지석리(부여 동북쪽 7.5km) 부근에서 하안정찰을 나왔다가 길을 잃은 미군 6명을 만나 함께 삼교리로 갔다. 그곳에 포진지가 있었고, 서쪽 강변에는 미군수색중대와 공주경찰병력이 배치되어 있다고 하였다. 중대는 우금치(삼교리 동북쪽 1.8km) 남쪽에 중대본부를 두고, 우금치 서쪽 고지에 경계병력을 배치하였다."
"14일, 중대본부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있는데, 고개 서쪽 고지에서 사격이 가해져서, 급히 달려가보니 적이었다. 그 고지의 적을 무찔렀는데 그 동안에 삼교리의 포병진지가 공격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포대를 구출하려고 달려갔으나, 이미 포대가 수라장이 된 뒤여서 적의 등을 찔러 포대와 합세를 하였을 뿐 적을 격퇴하지는 못하였다. 결국 포대와 함께 그곳에서 철수하게 되고말았는데, 105mm곡사포 5문인가 모두 공이를 뽑아 파괴하였다. 중대의 말(馬)에 미군 부상병을 싣고, 우리 병사들은 걸어서 동쪽의 논산도로로 빠졌는데, 도로에 나오니 미군차량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그들을 후송해 갔다. 중대는 논산으로 집결하여 그날 밤을 보낸 뒤, 그곳에서부터 미 제34연대의 지휘를 벗어나, 15일 여산―전주로 내려가, 서남지구 전투사령부의 장악하에 들게 되었다."

*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ul' (p. 128) 원문 발췌
"A group of South Korean carvalry rode past the battery and attacked west toward the enemy, but the confusion was so great that no one in the artillery position seemed to know what happened as a result of this intervention"

* T. R. 페렌바크의 'This kind of War' 원문 발췌
"Next, it was B Battery's turn. Four hundred enemy infantry surrounded the battery area, and for several minutes something akin to Custer's last stand was repeated. Then, while a group of ROK horse cavalry, who had ridden out of nowhere to attack the enemy, slashed into the North Koreans on the west, the artillerymen went march order."

2.2. 대평리 전투

7월 15일 대평리를 담당한 미 19연대장 멜로이 대령은 적들이 야간도하를 시도할 것으로 보고 경계를 철저히 시키면서, 강 너머의 마을들을 포격해 적들의 집결을 방해했다. 그런데 해가 지자 북한군 전차 3대가 포격 지원 속에 미군 진지에 공격을 가했고, 이에 미군도 전폭기를 요청해 한대를 격파하고, 나머지 두대는 숲속으로 도주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이후에도 보병들의 도하 시도가 두차례 이어졌으나 이를 미군들이 격퇴함으로서 교착 상태가 되었다.

한편 포병들과 함께 논산으로 퇴각해 재정비중인 34연대는 이날 마구평리에 진지를 구축해 대전으로의 퇴로를 지키게 했으나 적들이 전방에 집중한 탓에 전투는 치르지 않았다. 또한 사단 예비로 물러난 21연대는 사실상 전멸 상태에서 교량과 터널의 폭파를 명령받고 11포병대대 C포대와 공병중대를 배속받은 채 옥천으로 진군했다.

7월 16일 새벽 3시 대평리의 미 19연대 진지를 뚫기 위해 Yak-9가 금강 상공에 조명탄을 투하했고, 뒤이어 무자비한 공격준비사격 속에 적들이 도하를 시도했다. 한편 미 19연대는 조명탄을 쏘아가며 이를 저지하려 했고 11, 13, 52 포병대대들도 이를 지원했다. 하지만 조명탄 지원을 전담한 11포병대대원이 고각을 잘못 조정해 쏜 탓에 20여분간 암흑이 찾아왔고, 이 틈을 타 상당수의 적들이 도하에 성공했다.

결국 오전 6시 반 무렵에 연대 방어선 중앙이 뚫리기 시작했고, 이에 멜로이 연대장은 연대 본부중대 일부와 예비로 대기중인 M24 채피, M16 하프트랙 차량들에게 1대대를 지원토록 지시한다. 그리고 이들이 시간을 버는 사이 나머지 병력들은 두만리로 후퇴하나, 이곳도 도로가 차단돼 결국 뿔뿔이 흩어져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철수 도중 7월 16일 밤 금남면의 두만리와 용담리 경계 인근 야산으로 피신했던 19연대 소속 30명의 부상병과 부상병을 위해 일부러 남았던 군종 신부 허먼 G. 펠홀터(Herman G. Felhoelter)가 북한군에게 무참히 살해당한 두만리 학살 사건이 발생하였다.6·25 참전 미군, 허먼 G. 펠홀터 군종신부의 성덕"용담리에서 순교한 군종신부 펠홀터를 아시나요"

군종 신부 허먼 G. 펠홀터(Herman G. Felhoelter)는 6.25 전쟁에서 전사한 미군의 첫번째 군종신부가 되었으며 수훈십자장이 추서되었다.

3. 결과 및 영향

7월 16일 이후 금강 방어선이 완전히 무너졌고 제24보병사단장인 윌리엄 F. 딘 소장은 미 육군 제24보병사단의 잔여 병력을 대전으로 집결하여 대전에서 지연전을 펼치기로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대전광역시 일대에서 대전 전투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