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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3 22:24:33

마오안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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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기기총창 당 총지부 부서기
마오안잉
[ruby(毛, ruby=Máo)][ruby(岸, ruby=Àn)][ruby(英, ruby=yīng)] | Mao Anying
파일:마오안잉.jpg
<colbgcolor=#ee1c25><colcolor=#ff0> 이름 마오안잉(毛岸英, 모안영)
이명 마오위엔런(毛遠仁, 모원인)
출생 1922년 10월 24일
중화민국 후난성 창사
사망 1950년 11월 25일 (향년 28세)
평안북도 창성군 동창면 대유리
(現 평안북도 동창군 대유로동자구)
묘소 평안남도 회창군 지원군렬사릉
국적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중화인민공화국 파일:중국 국기.svg
학력 이바노보 국제 기숙학교
레닌 군사정치학교
프룬제 군사대학
모스크바 동양학원 (중국학과)
부모 아버지 마오쩌둥(毛泽东) ,(1893~1976),
어머니 양카이후이(楊開慧) ,(1901~1930),
형제 남동생 마오안칭(毛岸青) ,(1923~2007),
배우자 처 류쑹린(刘松林)[1] ,(1930~2022),
직업 군인
종교 무신론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ao_Unyin_and_wife_Liu_Songlin.jpg
류쑹린과 마오안잉

1. 개요2. 생애3. 사망 경위4. 방공동 무단 이탈 이유
4.1. 중국 정부의 주장4.2. 이설
5. 사후 수습6. '계란 볶음밥 시위'와 '볶음밥 금지의 날'7. 가계8. 기타

[clearfix]

1. 개요

마오쩌둥장남.[2] 청년기 소련군에 입대하여 활동하였으며 6.25 전쟁에서 중공군으로 참전하여 대한민국 침공에 가세했다가 폭격으로 북한 평안도에서 사망하였다.

2. 생애

1922년 10월 24일 중국 후난성 창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마오쩌둥은 1927년 9월 추수폭동[3] 이후 도주하면서 가족과 헤어졌는데, 마오안잉의 어머니 양카이후이(杨开慧)는 1930년 창사 폭동 이후 호남성 정부주석 허젠에게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이후 마오안잉과 그의 동생들인 마오안칭(毛岸青, 본명 毛远义), 마오안룽(毛岸龙)은 작은 아버지인 마오쩌민(毛泽民)의 도움으로 국민당의 추적을 피해 상하이로 도주했으나 마오안룽은 곧 이질로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상하이에서는 중국공산당 지하 보육기관이던 다퉁 유치원(大同幼稚园)에서 양육되었다. 그 사이에 마오쩌민은 수배를 피해 도주해야 했고 이후 기독교 목사로 위장한 공산당원이자 다퉁 유치원 원장이던 둥젠우(董健吾)의 집에서 지냈지만 둥젠우도 수배를 피해 우한으로 떠나면서 결국 돌봐줄 사람이 없던 마오안잉-마오안칭 형제는 부랑아 신세로 전락하여 매우 빈궁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가 1936년 상하이의 당 인사들에게 이들 형제가 발견되면서 딱한 사정이 알려졌고 이를 보고받은 코민테른의 지시로 리두(李杜)와 함께 소련으로 향하게 된다.[4] 두 형제는 프랑스 마르세이유와 파리를 거쳐 모스크바에 도착하고 당시 코민테른 대표이던 캉성이 돌봐줬다. 두 형제는 소련이 국제 공산주의 혁명가들의 자녀를 보육해 주던 이바노보 국제 기숙학교(Ивановский интернациональный детский дом, 약칭 인테르돔·Интердом)에 들어가서 '세르게이 마오(Сергей Мао)'란 이름으로 공부하게 된다.

1941년에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소련군에 자원입대했다. 당시 중국공산당 측에서는 유학 중이던 중국 공산당 지도부 자제들의 신변 보장을 요청한 상태였기 때문에 원칙적으로는 입대를 불허해야 했으나 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고 한다. 대신 야전병으로는 받아들이지 않고 레닌 군사정치학교와 프룬제 군사대학 군사학교로 보내 정치장교 양성과정을 밟게 하였다. 그는 입대한 지 2년 후인 1943년에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고 1944년이 되어서야 중위 계급으로 제2 벨로루시 전선군 소속 전차중대의 정치장교로 배치되어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해방전을 거쳐 베를린까지 입성했다. 종전 후에는 다시 모스크바 동양학원(Московский институт востоковедения) 중국학과에서 잠시 공부하다가 마오쩌둥의 요청으로 1946년 1월에 먼저[5] 중국으로 귀향한다. 귀국할 때 스탈린이 권총 한 정을 선물했다고 한다.

그는 이처럼 어린 시절 10년을 소련에서 보내고 소련군의 정치장교 양성과정을 두루 거친 데다 제한적이나마 소련군에 복무해 독소전쟁 참전 경험까지 갖췄다. 당연히 소련의 당, 군 관계자들과 소통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정도로 소련 사정에도 밝고 수준급의 러시아어 실력을 갖고 있었다. 이 때문에 마오쩌둥도 그를 자랑스러워하며 몹시 아꼈다고 한다. 동생 마오안칭이 어릴 적 체포 당시 구타의 후유증으로 인해 정신질환을 앓으면서 제 구실을 못한 것과 비교되기도 했을 것이다. 귀국 후에는 중국공산당 중앙사회부[6] 부장이던 리커농(李克农)의 비서 겸 통역 역할을 맡았다.
파일:마오쩌둥 마오안잉.png
청년기의 마오안잉과 마오쩌둥.

만 27세가 되던 1949년 10월에는 오래 전에 정혼한 사이인 류첸추(劉謙初)-장원추(張文秋) 부부의 장녀 류쑹린(刘松林)과 결혼하였다. 류첸추-장원추 부부는 중국공산당 초기 인사로서 마오쩌둥과 사이가 각별하여 마오쩌둥은 이들 부부가 1927년에 결혼할 때부터 이후 자식들끼리 혼인을 시키자고 약조한 바 있었다.[7][8]

6.25 전쟁이 발발하고서 1950년 8월에는 베이징기기총창(北京机器总厂)의 당 총지부 부서기를 맡았다. 그러다가 중국 인민지원군의 파병이 결정되자 마오쩌둥은 마오안잉을 입대시키기로 한다. 이는 후계자 수업의 일환으로 참전 경력을 쌓게 하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마오안잉의 출전 통지에 대해서는 일화가 있다. 1950년 10월 7일 밤에 마오쩌둥은 바로 다음날 선양으로 출정을 앞둔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를 초대했다. 단순한 환송회로 생각한 이 자리에서 마오쩌둥은 불쑥 마오안잉을 데려가라는 말을 꺼낸다. 펑더화이는 처음에 이를 농담인 줄 알았다. 그래서 "나는 주석의 집에 지원병을 모집하러 온 게 아니다. 주석을 모병관으로 임명한 적도 없다"며 웃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있던 마오안잉이 자신이 뛰어난 인재라며 지원병 1호로 나가겠다고 진지하게 나서는 바람에 이내 대경실색했다. 행여 자신이 마오쩌둥이 가장 아끼는 맏아들을 데리고 나갔다가 사고라도 터지면 난리가 날 것을 직감하고서는 통역이라면 몰라도 전투원으로는 절대 안 된다고 못을 박아 사령부 통역장교로 데려가기로 한다.[9] 그러고도 펑더화이는 불안한 마음에 밤새 잠을 못 이뤘다고 한다.

다른 공산당 고위 간부들도 마오안잉이 위험한 전선에 나가는 것을 우려하고, 마오쩌둥에게 이를 철회해달라고 했으나, 그는 "내 아들을 참전시키지 않으면 누가 전쟁터에 간단 말인가?", "그는 어쨌든 마오쩌둥의 아들이다"라고 하며 참전을 반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마오안잉은 사령관 비서 겸 러시아어 통역관 신분으로 참전하게 되었다. 마오안잉의 러시아어 실력은 확실히 뛰어나서, 그가 활동할 당시 인민지원군 각급 지휘부와 소련 군사고문단과의 의사 소통은 매우 원활했다고 한다. 다만 보안상 그가 마오쩌둥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철저히 비밀에 붙여졌고, 인민지원군 사령부 내에서도 가명으로 활동했다.[10][11]

그러나 6.25 전쟁에 참전한지 약 한 달 만인 1950년 11월 25일, 북한 평안북도 창성군(현 동창군) 대유동에서 미 공군 B-26 폭격기네이팜탄 폭격을 맞아 사망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만 28세였다.

3. 사망 경위

중국 인민지원군은 참전 이전부터 미군의 압도적인 제공권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한반도에 진입한 이후, 각급 부대는 미군의 정찰기와 폭격기에게 포착되지 않으려고 많은 대책을 세웠다. 당시 평안북도 창성군 대유동에 있던 중국 인민지원군 총사령부도 예외가 아니어서, 부사령관 훙쉐즈(洪学智)가 방공 책임을 맡아 엄격한 대피규정을 마련했다. 경험 많은 홍쉐즈는 사령부 요원 전체에게 동 트기 전에 일어나 아침식사를 다 마치고, 이후 날이 밝으면 절대 난방이나 요리를 위해 연기를 피우지 말고, 공습경보가 내려지면 사령부 옆 대유동 광산[12]에 설치한 방공동[13]으로 신속히 대피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중국 최고 지도자의 아들로 이전부터 기고만장해 있던 마오안잉은 이런 명령을 잘 따르지 않았다고 한다. 종종 늦잠을 자고 방공동으로 대피하는 것도 설렁설렁했다. 괄괄한 성격으로 아랫사람들이 어려워하던 펑더화이 사령관을 사석에서 '라오터우(老头)'[14]라고 거리낌없이 불러댈 정도였다. 게다가 마오안잉은 초공작전, 중일전쟁, 국공내전을 치르며 압도적인 화력을 갖춘 적들을 상대해온 고위장교들과 달리, 독소전쟁 말기에 이미 소련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해진 뒤에나 약간의 전쟁 경험을 가져본 게 다였기 때문에 미 공군의 위력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했다.

이러던 차에 1950년 11월 24일 늦은 오후, 미 공군의 P-61 정찰기 2대가 대유동 사령부 상공에 출몰한 것이 목격되었다. 이들이 사령부 위치를 포착했는지는 불분명했으나, 훙쉐즈는 다음날 날이 밝는대로 폭격을 받을 수 있다고 예견하고 비상 경계령을 내렸다. 지시에 따라 사령부 요원들은 새벽에 일어나 아침밥을 먹고 방공동으로 피신했다. 훙쉐즈는 "마오안잉도 이때 분명히 방공동에 들어와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오전 10시가 넘도록 폭격기가 접근하지 않자, 부대에서는 "전날 미군 정찰기들에게 발각되지 않은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며 경계가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이 무렵 마오안잉은 공습 경계경보가 해제되지 않은 상황에서 동료 가오뤼신(高瑞欣), 청푸(成普)와 함께 방공동을 나와 사령부 건물로 이동했다. 그런데 오전 11시경, 미군 폭격기들이 갑작스럽게 들이닥쳐 네이팜탄 폭격을 시작한다. 공습 경보에 이들은 다시 방공동으로 돌아오려 했으나, 청푸만 간신히 빠져나오고 마오안잉과 가오뤼신은 미처 건물을 빠져나오기 전에 건물을 강타한 화염에 휩싸여 사망했다. 이들 세 명이 공습 경계경보가 해제되지 않은 상황에서 왜 위험을 무릅쓰고 동굴 밖 사령부 건물로 돌아갔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이 분분하다.

4. 방공동 무단 이탈 이유

4.1. 중국 정부의 주장

중국 정부가 예전부터 공인해온 사유는, '마오안잉 등이 사령부 건물에 두고 온 기밀서류를 챙겨오기 위해 방공동을 나갔다'는 것이다. 중국 정부는 이를 근거로 "마오안잉은 최고 지도자 마오쩌둥의 아들이지만 자신의 몸을 사리지 않은 전쟁 영웅이다"라고 교육하고 있다. 중국 정부의 검열, 통제를 받는 각종 교과서는 물론, 드라마와 영화 등 대중매체에서는 이 주장을 그대로 답습하여 마오안잉의 최후를 애국적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중국 정부의 주장은 사실과 동떨어졌을 가능성이 계속 제기되어 왔다. 아무리 중요한 서류라 해도 펑더화이 사령관과 홍쉐즈 부사령관이 모두 엄중한 경계를 유지하고 방공동에 머무르라는 명령을 거역해야 할 수준인지도 의문이다. 그만한 서류라면 새벽부터 챙겨서 방공동으로 옮겼어야 했다. 또한 행여나 빼먹은 기밀서류가 있었다 하더라도, 이를 가져오는데는 많은 시간이 걸릴 일도 아니었다. 폭격이 이뤄질 때까지 수십 분이나 허비한 부분이 석연치 않다.

4.2. 이설

당시 사건을 목격한 관련자로부터 전해지는 사유는 여럿 회자되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구체적인 내용은 조금씩 다르긴 해도 결국 마오안잉의 사망이 영웅적인 헌신이나 혁명적 행동의 결과가 아니라, 개인적 사유로 무단으로 사령부 건물을 나와 음식을 마련하다가 자초한 어이없는 사고라는 점이 공통적이다. 중국 내부에서도 이 일화가 한동안 정설인 것으로 매우 널리 알려졌으며, 오늘날에도 검열을 피해 풍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전기 작가인 텅쉬옌(滕叙兖)은 2014년 봉황망과의 인터뷰에서 "마오안잉이 대피 명령을 무시하고 사령부 건물에서 박일우가 펑더화이에게 선물한 계란을 삶아먹다가 변을 당했다"고 밝혔다. 이러한 설은 펑더화이가 생전에 친구 양센전(杨献珍) 중앙당교 교장에게 밝힌 내용인데, 텅쉬옌은 양센전의 자녀들로부터 이를 전해들었다고 한다.
당시 사령부 작전실에는 달걀이 10여 개 있었는데. 중국 공산당원이며 팔로군 출신으로 북한 정권 출범 이후 귀국해 내무상을 지낸 박일우 조선인민군 전선사령부 부사령관이 선물로 보내준 것이다. 그는 펑더화이 사령관이 고생을 한다며 어렵게 달갈 10여 개를 마련해 광주리에 담아 보내주었다. 펑더화이는 먹지 않겠다면서 부상병들에게 주라고 했다. 하지만 당시 지원군 사령부에는 부상자가 전혀 없기도 하고 달걀이 워낙 귀한 물건이라 누구도 감히 손을 대지 못했다.

그러자 마오안잉이 이 달걀을 먹으려 했으나, 당시 사령부에는 아궁이는 없고 목탄으로 때는 조그만 난로가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달걀을 컵에 넣고 난로 위에 올려 놓았다. 난롯불이 영 신통찮아 한참이 지나야 달걀 하나가 겨우 익었다. 그는 밤을 새가며 댤걀을 익혔고 그러는 사이 날이 밝았다. 전날 미군 정찰기가 오랫동안 대유동 상공에 머물러 있어 인민지원군 사령부는 이날 새벽부터 대피령을 내린 상태였다. 홍쉐즈 부사령관이 다급하게 숙소로 들어와 야전침대에 누워있던 펑더화이 사령관을 “아직도 누워계시냐”면서 끌어냈다. 펑더화이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라고 버텼으나 참모들이 모시고 나갔다. 숙소에 있던 지도며 물건도 다 들고 방공호로 옮겼다. 펑더화이는 문을 나서면서 “안잉, 너도 빨리 나와라”하고 외쳤다. 그러나 마오안잉과 가오뤼신은 그대로 난로 곁에 있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미군 전투기 4대가 산 쪽으로 날아와 정확하게 산허리에 있는 인민지원군 작전실에 네이팜탄을 투하했다.
중국어 원문 @ @2 / 한국어 번역

계란을 먹다가 변을 당했다는 점에서는 같으나, 조금 다른 설도 있다. 이 설에 따르면 마오안잉은 이날도 늦잠을 자느라 아침을 거르고 대피를 하는 바람에 배가 몹시 고팠다. 그래서 폭격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10시 경에 나오려고 하는데 가오뤼신이 경보가 아직 해제되지 않았음을 이유로 만류했으나 마오안잉이 "설마한들 꼭 이 곳에 폭탄을 명중시키겠느냐"며 끝내 고집을 부려 사령부 건물로 나와 박일우가 선물한 달걀로 황금 볶음밥(蛋炒飯)을 만들어 먹다가, 11시에 들이닥친 미군 폭격기의 네이팜탄 세례를 받았다는 이야기이다.
그날 아침 마오안잉은 침대에서 늦게 일어났고, 아침 식사도 하지 않았다. "방공동 안에 숨어있던 마오안잉은 고개를 빼서 하늘을 보았는데 비행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때는 이미 배가 고팠다." 10시가 지난 후, 마오안잉은 가오뤼신(高瑞欣)에게 작전실로 돌아가겠다고 말한다. 가오뤼신은 말했다. "기다려봐라. 경보가 아직 해제되지 않았지 않느냐." 마오안잉이 말한다. "겁낼 것 없다. 내가 보기에 비행기는 한동안 오지 않을 것이다. 온다고 하더라도, 어디 꼭 이 곳을 명중시킬 것인가. 엣날에 국민당의 비행기가 자주 연안을 공습했지만, 부친(마오쩌둥)은 일에 바빠서 방공동에 들어가지도 못했지만 아무 일도 없지 않았는가. 부친이 보인 모범을 아들이 배우지 않으면 누가 배우겠는가?"(공공연히 규율을 어기면서 '부친'의 기치를 내걸었다. 이런 도련님은 정말 지원군 사령부 사령관의 골칫거리였을 것이다)는 말을 하면서, 마오안잉은 이미 방공동을 빠져나갔다. 가오뤼신 등은 할 수 없이 그를 따라 작전실로 가서 밥을 했다(찬밥에 달걀을 넣어서 따뜻하게 볶음).

아쉽게도 아들은 부친처럼 운이 좋지 못했다. 11시가 지나서, 미군의 B-26 폭격기 4대가 대유동 상공을 지나갔다가 바로 되돌아온다. 마오안잉이 요리하는 연기를 보았기 때문인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번에 수십 개의 기유탄(汽油彈)을 떨어뜨리는데, 정확하게 작전실에 명중한다. 생존자인 청푸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당시 마오안잉은 난로 옆에서 먹고 있었다. 우리는 문 밖에서 비행기가 폭탄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는 빨리 도망치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마오안잉과 가오뤼신은 모두 탁자 아래로 숨어들어 폭탄을 피했다… 일찌감치 도망쳐 나왔더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이다."
중국어 원문 @ @2 / 한국어 번역

이런 삶은 계란, 계란볶음밥 이외에도 만터우이 언급되는 버전도 있다. 다만 마오안잉과 사령부 작전실에 갔다가 유일하게 빠져나온 인물인 청푸는 당시 사령부 건물에는 계란이나 프라이팬도 없었으며, 그 이야기를 한 사람은 마오안잉의 실제 사망현장에 있지도 않았다고 했다. 대신 그는 마오안잉이 작전실에서 사과를 먹고 남은 껍질을 굽던 중이었다는 이야기는 은근슬쩍 남겼다. 최후까지 같이 있던 인물의 증언이니 아마 이것이 가장 신빙성이 높을 것으로 보이나, 청푸 또한 중국 당국으로부터 입단속을 단단히 하라는 지시를 받았을테니 사실을 비틀어서 증언했을 가능성도 있다.

흔히 이야기되는 계란이 원인이 아니라 해도 허기를 달래려 무단으로 조리를 하다가 폭사했다면 영웅적인 죽음과 거리가 있기는 매한가지이다. 이러한 비공식 사유 중 어느 것이 사실이라 해도 후대에 곧이 곧대로 알리기에는 신중국의 국부로 추앙받는 마오쩌둥의 위신에 크게 손상이 가는 일이었기 때문에, 중국 정부도 마오안잉의 죽음을 어떻게든 영웅적으로 포장하기 위해 이를 계속 윤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오안잉이 계란 볶음밥을 만들다가 사망했다'는 설은 중국인터넷건전성회의(中国网络诚信大会, China Internet Integrity Conference)에서 결정한 '공식 노선에서 벗어난 12가지의 역사 기록' 중 하나에 포함되어, 그러한 내용의 정보를 발신하거나 공유하는 것을 검열하도록 하고 있다. 2020년 11월 중국역사연구원은 SNS를 통해 "마오안잉이 계란 볶음밥을 만들다가 폭격당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라고 밝히며, "이는 마오안잉의 죽음을 희화화하려는 헛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2021년 6월 15일 월스트리트 저널은 보도에서 "시진핑 주석이 공산당의 역사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에 대응하라는 지시를 내리면서, 중국역사연구원 등이 과거사 미화의 전면에 나섰다"고 비판했다. #

5. 사후 수습

이 사고 이후 펑더화이는 불길한 예감이 현실화된 것에 망연자실하였으며, 저우언라이에게 급보를 보내 알렸다. 놀란 저우언라이는 이 사실을 공산당 수뇌부 일부에게는 공유했으나, 마오쩌둥에게는 그가 심한 충격을 받을 것을 우려해 보고를 최대한 늦추기로 한다. 그러다가 1951년 1월에 불쑥 마오쩌둥이 마오안잉의 안부를 묻자,[15] 저우언라이는 그제서야 이실직고를 한다. 마오쩌둥은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듣고 눈시울을 붉히며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하더니 "전쟁에는 희생이 따르는 법이지…"라고 한탄을 했다고 전해진다. 마오쩌둥은 대범하게 맏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듯 했으나, 아들을 끝까지 지키지 못한 펑더화이에 대한 불편한 감정은 삭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이 묵은 감정은 1950년대 말 대약진 운동의 실패에 대해 펑더화이가 직언을 하자 폭발하여, 루산 회의에서 펑더화이가 몰락하는 빌미가 된다.[16]

그가 전사한 이후에도 마오쩌둥은 다른 인민들도 자식을 전쟁에서 잃었을 것임을 생각하여 아들의 시신을 가져오지 않았고, 훗날 '지도자라면 모범을 보여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에 아들의 참전을 말리지 않았다고 기억했다.

유사한 사례로 스탈린도 장남인 야코프 주가시빌리독소전쟁에 참전시켰다가 잃었다. 마오안잉과는 달리 야전에서 독일군의 포로로 잡혔기에 살릴 기회도 있었고, 주코프도 구출작전을 세우고 실행 허가까지 받았으나, 작전이 실제로 실행되지는 못했다. 독일측에서는 야코프 주가시빌리를 선전 도구로 톡톡히 활용하고,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에는 항복한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와 교환하자는 제안까지 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이걸 받아들일 경우 생길 후폭풍을 우려해 포로 교환 제안도 거부했다. 결국 야코프 주가시빌리는 포로 수용소에서 탈출하다 총에 맞아 숨지는데, 스탈린도 내색은 크게 안했으나 마오쩌둥처럼 아들의 죽음에 깊이 슬퍼했다고 한다.

마오안잉의 유해는 북한 평안북도 회창군에 소재한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부 열사릉원에 묻혀 있다. 과거 북중관계가 안 좋았을 당시만 해도 북한측에서는 마오안잉 묘비를 철거하려고도 했으나, 오늘날 중국의 지원이 북한 체제 유지에 필수적인 상황에서 그의 묘는 북한과 중국의 혈맹을 상징하는 정치적인 장치로 이용되고 있다.

6. '계란 볶음밥 시위'와 '볶음밥 금지의 날'

중국 정부는 그의 영웅적 희생을 주장하기 때문에 사령부 건물에서 음식(특히 계란 볶음밥)을 해먹다가 폭사했다는 설을 철저히 부정하고 있다.[17] 대부분의 중국인들에게 그에 대한 인지도는 마오쩌둥의 아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마오쩌둥은 몰라도 그의 아들까지 관심이 많은 사람은 적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중국 정부의 통제에 항의하는 의사로 이 소재를 이용하여 마오쩌둥 일가를 풍자하는 데 사용하기도 했는데 그의 생일인 10월 24일 또는 기일인 11월 25일에 인터넷 커뮤니티에 뜬금없이 계란으로 황금 볶음밥을 만들었다는 식의 포스트를 도배하는 식이다. 중국 정부나 마오안잉에 대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없지만 간접적으로 이를 드러내는 식으로 처벌을 피해가는 것이었다. 이를 외신에서는 "계란 볶음밥 시위(Egg fried rice protests)"라는 이름으로도 보도했다.

이러한 이유로 '계란볶음밥(蛋炒飯)'은 중국에서도 정부에 불만이 많은 네티즌들 사이에서 '마오안잉'을 비꼬아 일컫는 은어가 되었고 중국 정부의 검열의 대상이 되었다. 2021년 10월 26일 자유아시아방송의 보도에 따르면 중국의 검열 당국은 10월 24일부로 마오안잉을 기념해 계란 볶음밥 레시피를 게시한 중국의 통신업체 중국연합통신(China Unicom)의 장쑤성 공식 SNS 계정을 폐쇄한 것으로 전해졌다. #

중국의 내셔널리즘이 심화되면서 볶음밥 이야기는 정부 당국 뿐만 아니라 소분홍중국공산당중화사상을 광신적으로 추종하는 국수주의 성향 네티즌의 집중 공격 대상이 되었다. 보다 앞선 2020년에는 중국 요리사 '미식작가 왕강(美食作家王刚)'이 우연히도 마오안잉 생일에 양저우(揚州) 볶음밥 요리법을 소개하는 유튜브 영상을 올렸다가 중국 네티즌들에게 집단린치를 당했다. 문제의 유튜브 영상을 보면 유튜브까지 와서 욕하는 중국인들의 댓글을 몇 개 볼 수 있다.[18] 2021년 12월 26일 마오쩌둥의 생일에는 쓰촨성 당 기관지 《쓰촨일보》의 공식 웨이신 계정에서 '소시지 계란 볶음밥(腊肠蛋炒飯)'이라는 단어를 언급했다가 마오 추종자들의 거센 항의를 받고 게시물을 삭제하기도 했다.

7. 가계

8. 기타


[1] 다른 이름은 '류쓰치(刘思齐)'. 마오안잉 생전에는 류쑹린을 주로 썼고 이후에는 류쓰치를 주로 썼다. 참고로 마오안잉은 결혼한 지 1년 만에 전사했다. 1930년생이며 2022년 1월 7일에 사망했다.[2] 참고 항렬자 항목에도 설명이 있다.[3] 1927년 9월 7일 중국 후난성과 장시성 일대에서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주의자들이 일으켰다가 실패한 무장봉기이다. 이 봉기는 중국에서 최초의 공산당 무장봉기로 기록된다.[4] 리두는 원래 만주(동북) 지역의 항일세력을 조직하기 위해 프랑스-소련을 거쳐 만주국으로 잠입하려고 했으나 일본측의 방해로 인해 프랑스에서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다.[5] 동생 마오안칭은 마오쩌둥의 세 번째 부인이던 허쯔전과 함께 소련에 남아 있다가 국공내전이 종식된 후 귀국했다.[6] 현재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조사부의 전신이다. 당시에는 중국 국민당에 대한 정보, 간첩, 통일전선 조직 등의 업무를 수행했다.[7] 류첸추는 장원추가 류쑹린을 임신한 1929년에 국민당에 체포되어 1931년에 사형당했다.[8] 이 혼인 약조는 마오안잉의 동생 마오안칭까지 이어졌다. 마오안칭은 장원추가 두 번째 남편 첸젠야(陳振亞)와 결혼해서 얻은 딸 샤오화(邵华)와 결혼했다.[9] 사실 마오쩌둥도 아들을 위험한 야전으로 내보낼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10] 그러나 마오안잉은 과시욕이 심해서 사령부 내에서 자신의 정체를 은근슬쩍 드러내기 일쑤였고, 이내 사령부 전체에 그가 실은 마오 주석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퍼졌다고 한다.[11] 이때 한국어 통역관으로는 후일 조선족으로 가장 높은 직위인 중국 인민해방군 상장 계급으로 4대 부서 중 하나인 총후근부 부장까지 올랐으며, 이후에도 군사과학원 원장,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부의장 등을 역임한 조남기함께 근무했고, 둘의 사이도 좋았다고 한다.[12] 운산군에 위치한 운산 금광과 함께 한반도 최대의 금광으로 유명했던 광산이다. 한국사 근현대사 수업에서는 구한말 열강의 이권 침탈 당시 프랑스 자본에게 넘어갔다고 배우는 곳이다.[13] 공습을 피할 목적으로 인위적으로 판 방공호가 아니라, 방공 목적으로 이용하는 동굴을 의미한다.[14] 우리 말로 '노인네', '영감'이라는 뜻이다.[15] 마오쩌둥은 마오안잉이 석 달 정도 경험을 쌓았으니 다시 곁으로 불러오려 했다고 한다.[16] 공식적으로는 펑더화이가 고의로 마오안잉 사망 보고를 지연했다는 점이 문제가 되었으나, 사실 펑더화이는 사망 직후 지체 없이 저우언라이에게 보고했다. 이를 곧바로 전달하지 않은 것은 저우언라이의 책임이었다.[17] 일부 한국 뉴스에서는 이러한 미화가 근래에서 생긴 일이라 오보한 바 있지만# 10여년 전의 중국 뉴스에서도 이미 계란볶음밥 설을 부정하고 있다.[18] 그런데 왕강은 깡도 좋은 게 2023년까지 5년 동안 똑같은 날에 똑같은 요리를 소개하는 영상을 올리고 사과하기를 반복했다.[19] 실명 비공개[20] 1940년대까지 세습에 대해 전혀 생각한 적이 없던 장제스는 중일전쟁을 겪으면서 천리푸, 천궈푸가 영도하는 CC파, 리쭝런, 바이충시의 광서파 등과의 계속된 싸움과 끊임없는 국민당 내부의 배신 때문에 믿을 것은 혈육밖에 없다고 여겨 장징궈를 중용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총통 자리를 물려주었다. 이 때문에 중화권에서는 대만에서 3대세습도 당연히 할 것이라고 보고 있었고 이에 반해서 미국의 중국학계에서는 장징궈가 후계자 육성을 하지 않고 있는 점을 미루어 3대세습은 하지 않을 것으로 보았고 미국학계가 맞는 것으로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