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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1 09:19:47

마오쩌둥 암살 음모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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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전개3. 실상4. 참고 문헌

1. 개요

1950년, 일본인 야마구치 류이치와 이탈리아인 안토니오 리바가 마오쩌둥을 암살하려고 시도했다고 중화인민공화국주장한 사건. 하지만 현대 정치학/사학계에서는 외국인 추방과 혁명외교의 명분을 찾기 위한 중국공산당의 조작으로 보고 있다.

2. 전개

안토니오 리바는 원래 이탈리아의 비행기 조종사로 1920년대국민정부에서 공군을 육성하기 위해 초빙한 교관 중 한 명이었는데 한때 일본 육군 특무부대의 포섭으로 스파이 활동을 하다가 전쟁 이후에는 무역업에 종사했다고 한다. 야마구치 류이치의 경우, 1938년 중화민국 국제문제연구소에서 일하다가 사임한 이후 서적판매상을 하고 있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고 중국에 살던 수만명의 외국인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어 대대적인 탈출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아직 중국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중국 정부는 이들이 10월 1일 국경절 행사에서 톈안먼광장에 도열한 마오쩌둥 이하 중국 지도자들을 박격포로 쏘아 살해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고 주장하며 체포했다. 중국 정부는 또한 하북성 이셴 교구장 타르치시오 마르티나 주교, 루쉰 연구가 해리엇 밀스, 풀브라이트 재단 회원 앨런 리킷, 아델 리킷 부부 등 총 7명의 외국인을 체포하였다. 중국 정부는 리바가 박격포를 가지고 있었고 야마구치가 천안문광장을 그린 도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암살의 증거라고 주장했다. 또한 이들을 최종적으로 사주한 것은 다름아닌 미국 군인인 데이비드 베럿 대령이라는 것이었다. 체포된 두 사람은 1951년 8월 17일 차량에 태워져 조리돌림을 당한 후에 총살되어 반혁명분자들의 시신을 묻는 베이징 외각의 농장에 매장되었다.[1] 마르티나 주교 등 나머지 사람들은 1955년 중국에서 추방되었다.[2]

야마구치의 부인은 일본으로 귀국한 후 이 사건이 중국 공산당 정부의 조작이라고 주장했지만 당시 일본과 중화인민공화국은 외교관계가 없던 상황이라 어찌해볼 방법이 없었다. 야마구치와 리바의 처형에 즈음하여 베이징 공안당국은 수천명의 외국인 사제, 의사, 기술자, 사업가, 유학생들을 체포하여 베이징에서 추방하고 수감했다. 1951년 8월 2일 외국인을 모조리 추방하라는 결의안이 통과되어 베이징에 거주하던 외국인들은 톈진을 통해 국외로 추방되었다. 필립 쇼트는 이 사건에 대해 6.25 전쟁으로 외국에 대한 불안감이 강해진 중국 공산당 지도부의 우려가 낳은 결과로 분석하고 있다.

3. 실상

중국 내라면 모를까 해외에서는 중국공산당이 자국 내의 기독교 세력과 서양인들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공안사건이라는 의견이 대세이다. 사실 중국 정부의 주장은 조악하기 그지 없었으며 증거도 빈약했고, 제대로 된 재판도 없이 용의자들을 허겁지겁 처형하고 나머지는 추방하는 것으로 끝났다.

4. 참고 문헌



[1] 안토니오 리바의 부인은 중국 공안국에 남편이 가톨릭 장례를 치러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여 시신을 되찾아 베이징의 교회 묘지에 매장했으나 몇 년 뒤 중국 정부가 이곳을 쓰레기장으로 바꾸면서 유해 행방도 사라졌다.[2] 앨런 리킷과 아델 리킷 부부는 중국 공안의 지속적인 고문과 세뇌로 자신들이 정말로 스파이라고 믿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