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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포로 수용소를 시찰하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 내외와 수행원들. 포로들이 태극기를 들며 열렬히 환영하고 있다. |
1. 개요
6.25 전쟁의 휴전협정이 진행 중이던 1953년 6월 18일 대한민국 각지에 수용되어 있던 북한, 중국 출신 포로 중 반공 성향 포로를 석방한 사건.[1]공산측 및 UN측은 6.25 전쟁의 휴전을 맺으려고 했으나 이승만은 휴전에 반대하고 있었고, 아무런 안전보장 장치 없이 휴전이 이루어지면 이후 다시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우려를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승만이 미국을 압박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이 반공포로 석방 사건이다.
이 사건 이후 이승만은 미국에게 휴전협정 전 안전보장 약속을 해 줄 것을 요구했고 실제로 휴전협정이 맺어지기 보름 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할 것이라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2. 사건의 배경
1951년 이후 6.25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UN군 측과 공산군 측 사이의 휴전 논의가 이어졌으나 좀처럼 결론이 나지 않은 채 교전과 휴전 협상이 오랫동안 병행하게 되었다. 이때 협상 내용 중 큰 문제점으로 떠오른 사항이 있었는데 바로 전쟁 포로 송환 문제였다. 포로를 송환할 때 단순 국적에 따라 일괄적으로 본국에 보낼 것인지, 아니면 포로 개개인의 의사에 따라 선택권을 줄 것인지 두고 양측이 첨예하게 대립하였다.이런 문제가 발생한 이유는 6.25 전쟁이 공산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이 충돌한 이념 전쟁이었고 국가 사이의 전쟁이면서 동시에 내전의 성격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거제 포로수용소에 조선인민군 15만, 중공군 2만 등 17만에 달하는 적군 포로가 수용되어 있었으나 실상 미군과 한국군은 외부에서 식량만 공급하고 있을 뿐 포로 수용소 내부는 전혀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다. 수천 명 단위로 수용된 개별 수용소의 안쪽은 사실상 무법천지로 포로 조직을 중심으로 사상 교육과 조선인민군 군사 훈련까지 행해지고 있었고 공산 포로들은 다수의 반공 포로들에게 갖가지 적색 테러와 고문, 살해 등을 통한 회유 공작을 펼치고 있었다.
1952년 7월 9일, 이승만 대통령이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시찰하고 있다. |
심지어 1952년 5월 7일 수용소장인 도드 미 육군 준장을 납치해 인질로 삼고 일괄 북송을 요구하는 폭동을 일으켰을 정도였으며 당시 공산포로에게 반공포로 105명이 살해되었다. 이후 조사를 거쳐 주로 반공포로들이 거제도 밖의 수용소에 배치되었고 거제도에는 대부분 공산포로만 남게 되었다.[2] 또 UN군은 제3국을 경유해 자유 선택에 따른 북송을 추진했으나 북송을 원하지 않았던 반공포로들은 강제 송환을 우려해서 몸에 태극기를 문신으로 새기고 혈서를 써서 몸에 지니는 등 북송 후 처형을 각오하는 결기를 보였다.
양측의 주장이 대립하긴 하였지만 한 가지 공통된 생각이 있었으니 바로 공산군 포로 중 공산주의 국가에 송환되는 것을 반대하는 '반공 포로'의 수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치였다는 점이다. 이게 문제가 된 건 남한에서 강제로 입대한 북한군이 상당히 많았고 당장 공산화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중국과 북한에서 내심 공산주의에 반감을 가지고 있다가 징집되어서 포로가 된 뒤 반공주의를 드러낸 사례도 적지 않았다.
당시 중국과 소련, 북한 등은 만약 포로 개개인에게 송환국의 선택권을 줄 경우 포로 중 공산주의를 버리고 남한 등 상대편으로 전향해 버릴 포로들이 대거 등장할 것을 우려했고 이를 막기 위해 일괄적으로 포로를 송환할 것을 주장하였다. 반면 UN군 측에서는 개개인에게 선택권을 부여하는 자유 송환을 주장하였다.[3] UN군 병력의 다수를 차지한 미국, 영국 등은 자국 포로 중 공산주의 측으로 전향할 포로들의 수가 극히 적을 것이라고 자신하였고[4] 공산포로에게 선택권을 줌으로써 자본주의 진영으로 전향하는 인원을 늘리고 자신들이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주의 국가'임을 선전하고 공산주의 진영에게 정치적인 타격을 줄 수 있다고 판단했다.[5]
1953년 3월 스탈린이 사망한 후 휴전협상은 다시 진전을 보였다. 3개월 뒤인 1953년 6월 지루한 협상 끝에 포로 송환 문제가 일단락되었는데 송환 절차는 대략 다음과 같았다. 1차로 자국 송환을 원하는 포로들을 송환한 다음 양측 대표단이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에게 방문해 자국 송환을 권유하게 하고 그럼에도 송환을 거부할 경우 중립국에 이송한 다음 그곳에서 포로 개개인의 의사를 수용하도록 하였다. 자국 송환을 권유하는 과정은 최인훈의 소설인 '광장'에서 잘 묘사되어 있다. 그 유명한 '중립국' 대사가 이것이다.
이승만은 이에 반대하며 모든 반공포로들은 일괄적으로 대한민국 정부에 송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포로들이 공산 측의 위협에 노출되어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북으로 끌려갈 수 있다는 것. 또 이승만의 계산도 있었는데 당시만 해도 미국은 휴전 후 대한민국에 대한 군사/경제적 지원 여부에 대해 어느 정도 약속은 있었으나 확약이라고 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고 휴전 협정에 참여하지 않은 남한은 UN군의 휴전회담을 파기할 영향력이 없었다. 이승만이 휴전을 반대한 것은 UN군의 힘으로 전쟁을 유지하여 북한 정권을 소멸시킬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통일도 못한 채로 죽음과 파괴만 남길 것이라고 이승만은 미국 정부에 휴전 협정에 절대 반대하는 서한도 여러차례 보냈다. 이는 한국군만이라도 단독으로 북진하겠다는 요지의 내용이었다.
따라서 당시 이승만은 UN군, 특히 그 대표국인 미국의 지원을 받아내기 위해서는 극단적인 방법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는데 그 카드가 바로 반공 포로의 석방이었다. 반공포로 석방 일주일 후에는 가인 김병로 대법원장 등을 포함한 입법부/사법부/행정부 각료와 함께 6.25 북진통일의 날 국민대회까지 열었다.
미국의 지원 자체는 후술하는 바와 같이 이미 예정되었다. 다만 6.25 전쟁 이후 북한 정권의 소멸과 멸공통일의 목적을 포함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의 발표 시기에 대한 문제가 있었는데 미국은 휴전협정 이후 체결/발표할 예정이었고 이승만은 휴전 협정 후 UN군이 철군하고서 미국이 약속을 어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다.[6] 따라서 이승만은 휴전협정서 체결 이전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할 것을 요청했다.
3. 사건의 전개
1953년 6월 18일 자정을 기해 대한민국 육군 헌병사령부 원용덕 사령관의 주도로 송효순 육군 헌병 부사령관과 홍구표 헌병사령부 작전처장의 기획하에 대한민국 정부와 한국군에 의한 반공 포로 석방이 강행되었다. 당시 작전 통제권이 미군으로 넘어간 다른 부대와는 달리 육군 헌병사령부는 대한민국 정부의 통제 아래에 놓여 있었다. '포로 석방'이란 이름 때문에 단순히 수용소 문을 열고 포로들을 풀어준 한낮의 평화적인 행사 정도로 생각할 수 있는데 실제로는 전국 각지의 수용소에서 일어난 한밤중의 대탈주극이었다.당시 포로의 수용과 감시는 UN군 측에서 맡고 있었고 당연히 UN군은 포로들을 수용소에 얌전히 가둬 둘 의무가 있었다. 반공포로 석방은 UN군과 사전 동의가 없는 대한민국 정부 측의 일방적인 석방 행위였으므로 그 과정은 사전에 몰래 언질을 받은 반공포로들이 일제히 포로 수용소를 탈출해 이를 대놓고 돕는 한국군과 한국 경찰, 그리고 이에 협조하는 민간인들의 보호를 받아 도망치는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포로들은 한국군과 한국 경찰이 미리 나가라고 뚫어준 전기 철조망을 통해 탈출한 뒤 민간인으로 위장해 전국에 골고루 분산되었다. 한국군이 미군을 '무력으로 제압'한 뒤 포로들을 탈출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이후에도 미8군 사령부는 미군 방송으로 반공포로들에게 돌아오라고 하였는데 서울중앙방송국(KBS의 전신)에선 외국 기관(미군) 말 듣지 말라고 방송에서 말하면서 아군 방송끼리 싸우는 희귀한 장면이 연출됐다.
6월 18일부터 약 5일 동안 35,400명의 반공 포로 중 약 26,900여 명이 수용소에서 석방되었다. 당시 마산 포로수용소 경비대장인 한필동 예비역 대령[7]의 증언에 따르면 남선전기 마산지점의 도움을 받아 수용소 내 전기를 차단시킨 후 포로들을 집단 탈출시켰다고 한다. 탈출 도중에 포로수용 책임이 있는 UN군의 사격으로 인해 61명이 사망하고 116명이 부상당했다. 나머지 8,200여 명은 미처 석방 소식을 듣지 못했거나 UN군의 진압 등으로 인해 수용소에 잔류하였다.
4. 반응
4.1. 미국
이 사건으로 인해 UN군 측, 특히 미국은 큰 충격을 받았다. 미국 정부에서는 이승만을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그러나 한국 국민들과 한국 군부의 이승만에 대한 지지가 상당하여 섣불리 제거하기는 힘들었으며 이 행동이 단지 동맹국에 대한 이승만의 의지 표출이고 이승만이 반미주의자는 아니라는 결론을 내려서 제거 논의는 취소되었다. 이승만 암살 계획(에버레디 계획) 이후 그를 대체할 사람으로 언급된 인사 가운데는 장면 전 총리와 백선엽 육군참모총장도 있었다.[8]아이젠하워는 "미국은 우방을 잃는 대신 적을 하나 얻었다"고 말했다. 훗날 자신의 8년의 대통령 재임 기간 중 자다가 일어난 것은 그때가 유일하다고 회고했다. 아이젠하워는 일본이 전략적으로 중요하지 않았다면 대부분의 동맹국이 한국에서 퇴군했을 것이라고 일기에 기록했다. 미 국무장관 덜레스는 "등에 칼 꽂는 짓"이라고 비난했고[9] UN군 사령관 클라크는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지옥문이 열렸다"고 말했으며 미국의 뉴욕타임즈는 '대재앙'이라고 비판했다.
다만 공산권 측의 의도에 반대해 일으킨 사건임이 명백했으므로 나름의 반공 명분이 있었고 미국의 높으신 분들이 전부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미8군사령관을 역임했던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은 훗날 인터뷰에서 반공포로 석방은 이승만 대통령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4.2. 영국
당시 영국 수상인 윈스턴 처칠은 아침 면도 중 이 소식을 듣고 놀라서 얼굴을 베었다고 한다. 처칠은 이승만을 '배신자'라고까지 말하며 극도로 비판했고 나아가 비밀리에 이승만을 즉각 구속하거나 대통령직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미국 정부에 요청까지 했다.[10] 정작 이승만은 처칠의 비난에 대해 "그 늙은이는 아편전쟁이 끝났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군."이라고 비웃었다.[11][12]4.3. 중국
중국은 신문을 통해서 반공포로 석방에 대해 국제법 위반이라고 격렬하게 비난했으나 한편으로는 이승만의 독단적 결정임을 인지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문구를 삽입하여 유엔군과의 휴전협상을 파토내지 않고 계속 이어갔다.4.4. 반공포로
1953년 6월 18일, 마지막으로 석방된 반공포로들이 이승만 대통령 사진을 들고 나오고 있는 모습. |
이 사건이 당시 국제사회에서 비판도 많이 받았지만 어쨌든 풀려난 반공포로는 당연히 이승만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았다. 북한에 가기 싫은데 강제로 북한에 보내질 상황에 처했다가 이승만이 밀어붙인 이 사건으로 구사일생한 셈이기 때문이다. 논산시 관촉사 입구에는 1965년에 세워진 이승만의 추모비가 있다. 당시 논산에도 포로수용소가 있었는데 이때 풀려난 이들 중 일부가 이승만이 사망하자 이곳에 추모비를 세운 것이다.
다만 반공포로에 대한 전후 처우가 나중에 문제가 됐는데 이들에게 충성심을 보장받겠다며 한국군 입대를 요구한 것은 그렇다 쳐도 이후에도 위험 인물로 간주하여 지속적으로 감시하여 한국에서 반발을 샀다.[13] 이는 송환된 한국군 포로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어 용호도(당시 이름은 용초도)에서 가혹한 사상 검증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억울함에 자살한 사람들이 많았다. 한편 혐의를 벗은 귀환 포로들도 군에 복귀했으나 대부분 한직을 전전하는 등 불이익을 받아 2000년대 초에 사회 문제로 방송에서 다루기도 했다.
5. 사건 이후
1953년 6월 26일 반공포로 석방 직후 서방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승만은 중공군이 백만이나 이북에 있는 이런 상태에서 휴전은 사형선고라고 천명했다.[14][15] |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으려는 시도 자체는 이 사건 이전에도 계속 있었다. 물론 한국측의 요구였을 뿐 미국은 '휴전 이후 긍정적으로 논의해 보자'는 정도였으며 명시적인 확답은 없었다. 미국은 상호방위조약 대신 16개 유엔 참전국들의 명의로 '확대제재선언'을 공포하고 한국군을 20개 사단으로 증강시켜 주는 것으로 무마하려고 하였다. 미국 내부 정책은 한국에서 철수하는 쪽에 가까웠고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다고 쳐도 한국 정부가 뭔가 할 수 없다는 게 명백하다면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할 것은 자명했기에 이승만 입장에서는 한미상호방위조약 없이 휴전이 먼저 이루어진다면 휴전 이후 미국이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걱정이 있었다.
실제로도 국제 관계에서 구두약속은 믿을 만하지 못하다. 일례로 미국의 헨리 키신저는 베트남 공화국에게 유사시 즉각적인 군사 지원을 구두로 약속하며 파리 평화 회의에 서명하게 했지만 남베트남이 멸망할 때 미국은 개입하지 않았다.[16] 멀리 갈 것 없이 소련 붕괴 이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카자흐스탄의 핵 포기에 따라 부다페스트 안전 보장 각서가 체결됐지만 법적 구속력이 없어 문제가 됐고 결국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휴짓조각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문서화된 조약마저도 믿을 수 없는 경우가 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중화민국 상호방위조약으로 1979년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의 일방적인 통보로 대만은 상호방위조약을 완전히 상실했다.
당시 이승만은 휴전에 강력하게 반대하며 북진통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만약 전쟁이 통일로 마무리되지 못하고 아무런 안전보장 장치도 없는 상황에서 휴전협정 후 미국이 빠지게 되면 또다시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승만은 반공포로 석방을 통해 자신이 맘먹으면 뭔가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서 미국이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할 수 밖에 없도록 했다. 미국이 결국 내부 정책을 바꿔 한국을 적극 지키는 쪽으로 선회했고 이를 먼 훗날인 오늘날 돌이켜 보면 도박은 대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미국도 남한을 포기해 버린다면 UN군의 희생을 헛되게 만드는 격이기 때문에 남한을 애써 지켜 놓고 다시 줘 버리는 것은 미국으로서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을 뿐더러 상호방위조약을 맺음으로서 남한을 포기할 의지가 없음을 남한 정부에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승만은 반공포로 석방 외에도 '전작권을 환수하겠다', '휴전협정 이후 한국군을 군사분계선 2km 이남으로의 후퇴시키지 않을 수도 있다' 등의 강수를 두며 미국 측의 안전보장을 압박했다. 결국 휴전협정이 맺어지기 보름 전인 1953년 7월 12일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을 것이라는 공동성명을 발표했고 같은 해 10월 1일에 실제 조약이 맺어졌다.
반공포로 석방 당시 탈주하지 못했거나 남한 잔류(혹은 대만행)가 아닌 중립국행을 희망한 이들은 휴전과 포로 교환이 이루어진 후 비무장지대에 진주한 인도군에 인계되어 공산군의 설득 작업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이 설득이라는 게 말이 설득이지 온갖 강압과 협박으로 가득했다. 반공포로가 설득이라고 온갖 회유와 협박을 늘어놓는 공산군 군관과 설전을 벌이는 장면을 촬영한 기록 사진이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이를 두려워한 나머지 탈주를 시도하다 인도군에게 사살된 사람들도 있었다. 중립을 지켜야 할 인도군들은 반공포로들에게 북한행을 은연중에 강요했고 심지어 위원장조차 포로들에게 북한행을 권유했다. 또 반공포로를 본인 의사에 상관없이 강제 북송한 일까지 있었다. 참고로 이승만 정부는 인도가 친공적이라고 하여 인도군의 영토 통과를 거부했고 인도군은 별 수 없이 육로로 이동하지 못하고 미군이 제공한 헬기를 타고 여러 차례로 나눠서 비무장지대로 들어가야 했다. 당시 인도는 제3세계의 일원이긴 했으나 소련 등 사회주의 국가에 우호적이었다.
이 사건으로 이승만이 일방적으로 포로에 관련된 협약을 깨 버렸기 때문에 반공포로 석방으로 인하여 북측에 사로잡힌 한국군 포로들을 더많이 돌려받을 기회를 놓쳤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 사건 이전에도 북한은 상습적으로 국군 포로들을 강제 전향시켜 북한군에 편입시키거나(#) 고의적으로 통보 명단에서 누락시키거나 남한으로 돌아가겠다고 한 포로들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시범 케이스로 살해해 다른 포로들을 강제로 북한에 눌러 앉히는 등의 짓거리를 계속하고 있었으므로(#) 반공포로 석방으로 인해 생긴 영향은 거의 없었다. 최종적으로 공산측은 UN군 포로 5000여명과 한국군 포로 8800여명을 송환하는 데 그쳤다. 전술한 대로 포로들을 회유·기만·위협하여 반강제적으로 북한 주민으로 편입시켰고 실제로 1956년 내각 43호 결정으로 이것이 사실임이 드러났다.
북한의 위협과 인도의 강요에 반강제로 뜻을 굽히고 북한으로 돌아간 사람들도 소수 있었지만 공산군과 인도군의 회유에도 입장을 번복하지 않은 반공포로들은 다시 UN군에 인계되어 1954년 1월에 공식적으로 석방되었고 북한 출신들은 남한 각지에 정착하였다. 중공군 출신들은 대부분 대만으로 갔으며[17] 일부는 대만에도 가지 않고 남한에 정착하여 대한민국의 화교 사회를 이루었다. 그리고 지조를 지키며 본토로 돌아간 중공군들은 영웅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전쟁에서 지고 온 반동이라며 비판을 받았다. 이때 중공군 포로의 70%가 본국 송환을 거부하고 주적인 대만으로 보내진 것에 격노한 마오쩌둥이 한국군 포로들을 북한에 억류하도록 지시한 것이 언론에 뒤늦게 알려졌다. (#)
또 1953년 6월 당시 중공군은 중부 전선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금성 돌출부의 장악을 목적으로 대규모 공세를 가하였는데 전선을 완전히 밀어내지는 못했으나 일부 영토를 점령하는 등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고 이에 만족한 중공군은 이 상태에서 전쟁을 끝내려고 했으나 며칠 후 이승만이 터트린 반공포로 석방 때문에 이 승리가 전부 묻혀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이때 풀려난 중국인 반공포로들이 본국으로 귀환하지 않게 되자[18] 이에 격분한 마오쩌둥은 석방된 인원들만큼 한국군을 죽이라는 지시를 내렸고 중국군은 금성 돌출부를 다시 빼앗는 것을 목표로 1953년 7월 13일 5개 군, 24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1951년 춘계 공세 이후 최대 규모의 대공세를 감행했다.
6. 의의
중국 인민지원군의 개입으로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부담을 느낀 미국이 휴전을 추진하자 이승만은 "(중공군 백만이 바로 코앞에 있는 상태에서 이대로) 휴전을 받아들이라는 것은 한국민에 대한 사형집행 영장이다"라며 한국에 대한 안전보장 없이는 휴전을 할 수 없다며 극렬히 반대했고 반공포로 석방 사건을 일으켜 미국을 압박하였다. 결국 당장 휴전에 급한 미국이 양보하여, 이승만은 휴전을 방해하지 않는 조건으로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원조와 대한민국 국군 20개 사단의 무장 지원, 그리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얻어내었다.그러나, 사실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반공포로석방사건 한달여 전 미국이 먼저 제안한 것이다. 이승만은 이를 알고도 더 많은 것을 얻어내기 위해 반공포로 석방을 적극적으로 지시한 것으로 추측된다. 하나는 NATO처럼 유사시 미군이 자동으로 개입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과 또 하나는 정전협정을 체결하기 전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어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둘 다 관철되지 않았다. 이승만은 이러한 방식으로 미국을 압박하여 신생 약소국이었던 대한민국이 제2차 세계 대전 승전국이자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을 협박하는 아이러니한 사태가 그의 집권기에 자주 벌어졌다. 오늘날 북한이 종종 쓰는 이 벼랑 끝 전술은 사실 이승만이 원조였던 셈이다. 결국, 단지 휴전을 방해하지는 않겠다는 제스처 하나로 대한민국은 강대국들을 상대로 막대한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이로서 한국은 미국의 각종 원조와 확보된 안보를 토대로 이후 경제 발전에 자금을 올인할 수 있었고 반공포로 석방으로 미국의 허를 찔러 따낸 한미동맹은 이승만의 가장 큰 업적으로 꼽힌다.
7. 일화
반공포로 석방과 관련하여 이승만의 여러 일화들이 있는데 반공포로를 석방하기 직전 원용덕 헌병 사령관을 불러 자신이 왜 이것을 하려는지 그 뜻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a]포로 석방을 하고 나서 이승만은 자기 심정을 이렇게 피력하였다.[a]
나는 내 신분의 권한으로서 전 반공포로를 석방하도록 명령하였다. 나는 이 조치를 단행함에 있어서 유엔군 당국 및 관계 당국과 전연 협의 없이 진행한 것이다. 나는 벌써부터 제네바 협정 및 인권 옹호의 제원칙하에 반공 포로들은 석방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이젠하워가 특사로 파견한 로버트슨 미 국무성 차관보가 이승만이 더 이상 휴전을 훼방하지 못하도록 설득하러 방한했는데, 이승만은 계속해서 화제를 돌려 신변 잡담으로 대화 시간을 끌었다. 초조한 특사단이 반공포로 석방 문제를 꺼내려고 하자 그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때마침 경무대 숲을 날고 있는 까치 한 쌍을 가리키며 태연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a]
저 모습이 얼마나 자유스럽고 평화스럽습니까? 나는 반공 포로를 공산 지옥으로 보내느냐, 광명의 이 땅에 머무르게 하느냐는 문제를 가지고 근 일주일 동안 기도한 끝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이번 조처를 감행한 것입니다.
장택상은 반공포로 석방 직후 이승만을 찾아가 대화했던 기억을 회고하면서 이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인 이승만의 당시 심경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반공포로 석방으로 국제적인 물의가 꼬리를 물고 일어날 때였다. 영국 의회에서는 수만명의 포로를 일방적으로 석방한 이 박사를 체포하라는 결의까지 나오고 있었는데, 포로 석방 1주일 후에 서울에서 이 박사를 뵙게 되었다. 아직 정부가 서울에 환도하기 전이었다.
'그래, 반공포로 석방에 대한 일반의 여론은 어떠한가?'
'선생님, 잘된 처사라고들 합니다.'
이 박사는 한동안 나를 응시하더니 나지막한 음성으로, 그러나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여는 것이었다.
'내가 오늘은 솔직한 고백을 할테야. 일생을 통해 감옥을 드나들고 사형 선고를 받아도 눈 하나 깜짝 안한 나야. 그런데 이번 반공포로 석방 후엔 사흘 밤을 꼬박 새웠어.'
'무슨 다른 일이라도 있으셨읍니까?'
'들어봐, 내 개인으로서야 설혹 불행해진다 하더라도 관심 밖의 일이야. 무엇보다 국운이 풍전등화인데 나라가 망하지나 않나 해서 실은 무척 초조했어⋯'
말을 채 맺지 못하는 그의 눈시울에는 평생 처음 이슬 방울이 비치는 것이었다. 낙누 직전의 아슬아슬한 표정이었다.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평생 후회가 없는 이 박사였지만, 약소국가의 원수로서 분명 주권을 행사하고나서 적지 아니 당황한 것이 사실이었다. 영국 의회에서 유엔군 사령관으로 하여금 이 박사를 체포하라는 명령이 내렸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여론이 극도로 악화된 일촉즉발의 위기였던 것이다. 결국 이 박사가 휴전협정에 가담 안한 것은 그가 정치가로서 탁월한 일면이라고 나는 보고 있다."[22]
'그래, 반공포로 석방에 대한 일반의 여론은 어떠한가?'
'선생님, 잘된 처사라고들 합니다.'
이 박사는 한동안 나를 응시하더니 나지막한 음성으로, 그러나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여는 것이었다.
'내가 오늘은 솔직한 고백을 할테야. 일생을 통해 감옥을 드나들고 사형 선고를 받아도 눈 하나 깜짝 안한 나야. 그런데 이번 반공포로 석방 후엔 사흘 밤을 꼬박 새웠어.'
'무슨 다른 일이라도 있으셨읍니까?'
'들어봐, 내 개인으로서야 설혹 불행해진다 하더라도 관심 밖의 일이야. 무엇보다 국운이 풍전등화인데 나라가 망하지나 않나 해서 실은 무척 초조했어⋯'
말을 채 맺지 못하는 그의 눈시울에는 평생 처음 이슬 방울이 비치는 것이었다. 낙누 직전의 아슬아슬한 표정이었다.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평생 후회가 없는 이 박사였지만, 약소국가의 원수로서 분명 주권을 행사하고나서 적지 아니 당황한 것이 사실이었다. 영국 의회에서 유엔군 사령관으로 하여금 이 박사를 체포하라는 명령이 내렸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여론이 극도로 악화된 일촉즉발의 위기였던 것이다. 결국 이 박사가 휴전협정에 가담 안한 것은 그가 정치가로서 탁월한 일면이라고 나는 보고 있다."[22]
8. 관련 문서
9. 대중매체
[1] 남한 출신 반공포로들은 늦어도 1952년까지 모두 석방되었다. 물론 1952년 이후에 수용된 사람들은 중간중간 개별적으로 석방된 게 아니면 이 무렵까지 있다가 북한 출신들과 같이 탈출하거나 휴전 이후에 석방되어 귀향했을 것이다.[2] 이 과정에서 포로들을 1~2백명 단위의 소그룹으로 분산해서 수용하면서 수용소 내부에 대한 통제권을 회복했다.[3] 일단 1949년 체결된 제네바 협약에 따르면 공산측 주장대로 일괄송환이 원칙이었다. 포로를 돌려주기 싫다고 포로들에게 전향하라는 강요와 세뇌를 하지 말라는 것.[4] 당시 공산 측이 보유한 포로의 숫자가 훨씬 적었기 때문이다. 일괄 송환하면 UN군 측에선 적은 인원을 받고 많은 인원을 보내야 하기 때문에 손해이고 선택권을 주면 공산 측에서는 어차피 잡고 있던 UN군 측 포로의 수가 적었기 때문에 포로들을 전향시키려고 하는 것보다 일괄 송환하는 편이 더 많은 인원을 받을 수 있게 되므로 이런 주장을 한 것이다.[5] 물론 한국군이나 UN군 포로 중 공산주의 측으로 전향하는 포로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공산군 측에서 포로 감시를 맡은 중공군은 적극적이고 교묘한 선전 활동을 벌였고 여기에 설득되어 조선인민군 군복으로 갈아입고 전장에 투입된 한국군 포로와 공산주의자로 전향한 극소수의 UN군 포로들이 있었다.[6] 실제로 세계사에서 약소국에 대한 강대국의 안전보장 약속이 파기된 사례가 여러 차례 있었기 때문에 이승만이 아무 이유 없이 미국을 불신한 건 아니다.[7] 유관순의 5촌 조카로, 유관순의 사촌 언니이자 유관순과 함께 아우내장터 만세 운동을 주도했던 유예도의 장남이다. 여담으로 일본군 학병으로 끌려갔을 때에도 포로수용소 감시병이었다가 탈출을 요청하는 중국군 장교 요청에 같이 탈출하여 광복군 장교가 되었다. 10년 사이에 2번이나 포로 탈출시킨 것.[8] 하지만 당시 장면은 이승만 정도의 정치력과 지명도를 가지진 못했고 백선엽은 이승만의 견제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무리하게 정면에 나서서 이승만을 거스르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9] 막상 덜레스 국무장관은 이후 이승만의 계획대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미합중국 정부를 대표하여 서명했다.(...)[10] 김창훈, 한국외교 어제와 오늘, 다락원, 2002, p. 60[11]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2권/ 35~36쪽.[12] 참고로 처칠은 이승만보다 한 살 많다.[13] 1960년대 파독 근로자 선발 과정에서 반공포로 출신이라는 이유로 출국을 거부당한 사례가 나와 사회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때 화가 난 반공포로 출신들은 수용소에서 새긴 반공 표어나 그림 문신, 심지어 칼로 그어 새긴 문신이나 그림(!!!)을 보여주며 반공 노래를 부르며 항의하거나 면접실을 뒤집는 깽판을 치거나 단체로 몰려가서 진을 치고 하루종일 에워싸고 위협하다가 경찰에 잡혀가기도 했다. 이때 반공포로들은 정말 한탄을 금치 못했다고도 하며 일부는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나와서 동네 순경은 건들지도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14] 결국 통일도 못 하고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었으며 중공군이 코앞까지 진주하여 오히려 전쟁 이전보다 더 악화된 상태에서 상호방위 조약과 같은 미국의 강력한 보장이 없는 한 어차피 또다시 제2의 6.25가 터질 것이라고 그는 내다보았고 만약 미국이 이대로 한국을 방치하여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싸우고 죽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그의 음성과 어조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15] Original Script : "But the United Nations, instead our requests, decided to ceasefire and we cannot ceasefire under this term. therefore, we're going to continue our fight."[16] 다만 당시 미국 내 반전 분위기 때문에 베트남판 상호방위조약 같은 걸 추진했어도 의회에서 통과될 리 없긴 했다.[17] 본토로 돌아가면 투항군으로 몰릴까봐 대만행을 선택했다고 한다.[18] 사실 이때 한국이 석방시키고자 했던 포로들은 모두 북한인 포로들이었고 중공군 반공포로들은 석방 대상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다만 석방 당시 상황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 눈치를 챈 몇몇 중공군 반공포로들이 개별적으로 북한군 반공포로 행렬에 합류하여 탈출했고 북한군 반공포로들이나 한국 군경은 이들이 알아서 끼어들어 탈출하는 것을 딱히 막지는 않았다.[a] 許政, 《雩南 李承晩》, 太極出版社, 1970, p. 342-344[a] [a] [22] “나의 交友半世紀 : 故張澤相씨의 回顧錄”, 《新東亞》, (東亞日報社), 통권 (제74호), p. 218-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