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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4 01:53:50

이승만/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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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 ~ 대한제국 시기2. 일제강점기
2.1.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기2.2. 태평양 전쟁 시기
3. 해방 정국4. 대한민국 시기
4.1. 초대 대통령 재임기4.2. 6.25 전쟁 시기4.3. 전후 제2·3대 대통령 연임과 퇴임
5. 하와이 망명과 사망

1. 조선 ~ 대한제국 시기

파일:이승만조선.jpg
1893년, 도동(桃洞)서당 시절[1] 아버지 이경선(李敬善), 서당 친구 김홍서[2]와 함께 찍은 사진.

고종 12년(1875년) 3월 26일[3] 황해도 평산군에서 태어났다. 세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승만태조 이성계의 18대손이자 태종 이방원의 장남인 양녕대군의 16대손이다.[4][5] 하지만 5대조부터 벼슬길이 끊겨 이미 몰락한 집안이었다. 이승만은 아버지 이경선과 어머니 김해 김씨 김말란(1833년 ~ 1896년)[6] 사이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으나, 손위의 두 형이 그의 출생 전에 홍역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장남 역할을 대신하였고 사실상의 6대 독자가 되었다.

1877년에 한성부 남대문 밖 우수현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자랐다.[7] 이승만의 인 '우남'이 우수현의 남쪽이라는 뜻이다. 아호는 그의 어머니가 꾼 용꿈에서 영감을 받아 지은 승룡(承龍)이었으나, 사주팔자를 보니 '늦게 왕이 될' 사주라 하여 그의 부모가 이름을 승만(承晩)으로 개명시켰다고 한다.[8] 어린 시절에 서당을 다녔고 그 당시 유생들이 그러했듯 이승만도 과거 시험에 여러번 응시했으나 계속 낙방하였다. 다만 선접 군과 거벽, 사수로 대표되는 당시 과거 시험의 폐단과 부패를 생각하면 이승만이 자력으로 합격하기란 힘들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갑오개혁 시행으로 인해 과거시험이 사라졌다.

동학농민운동이 한참이던 1894년 19세에 개화사상을 받아들여 아펜젤러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 당시 이승만은 뛰어난 웅변으로 유명하였으며 서재필 등의 계몽 운동가들과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원래는 영어를 배우러 입학했으나 이곳에서 그는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것에 대해 처음 배우게 된다. 그리고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계몽운동에 참여하였다. 1898년 3월 10일 종로에서 열린 한국 최초의 근대적 대중집회인 만민공동회에서 23살의 이승만은 연사로 나서 러시아의 이권 요구를 규탄했다. 이는 아관파천 이후 베베르-고무라 각서, 야마가타-로마노트 협정 등을 통해서 러시아의 이권이 조선에서 우위를 세우면서 독립협회의 주요한 공격대상이 러시아로 집중되었기 때문이었다. [9] 그는 연사로 나서서 "러시아의 군사 교관과 재정 고문을 철수시킴으로써 독립국가로서의 체모를 차리자"고 주장하였다. 이를 통해 그는 젊은 리더로 부상하게 된다.

1898년 4월에는 양홍묵, 유영석과 함께 한국 최초의 민간 일간신문매일신문을 창간했다.[10] 순한글 신문이었으며 외국 소식과 개화 문명에 대해서도 실었다. 러시아와 프랑스가 대한제국 정부에 대하여 토지와 탄광에 관한 이권을 요구해 온 외교문서를 폭로하여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 외에도 독립협회와 매일신문을 통해서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요구 반대, 목포 • 증남포 매도 요구 반대운동을 벌였다. 반면 이 당시까지 이승만의 대일 인식은 우호적이었는데 그는 일본이 동양을 서구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전쟁을 벌인다는 것에 감명을 받았다고 했으며 1904년에 저술된 그의 독립정신에도 당시 일본의 황인종단결론에 동조하는 내용이 있다.[11] 왜냐하면 이 때까지는 일본의 제국주의 야욕을 제대로 알아채지 못했기 때문이며 이후 일본이 본색을 드러내고 스스로 서양 제국주의의 일원이 되어 같은 아시아 국가인 한국을 식민지로 삼자 이승만은 강경한 반일로 돌아선다. 한편 매일신문의 자금난 해결을 두고 갈등이 발생해 유영석과 이승만은 해임당하게 되는데 그 뒤 이 둘은 이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제국신문을 창간했고 이승만은 제국신문의 주필로 민중계몽을 계속해 나갔다.

독립협회남궁억이상재 등이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수립하려한다는 익명서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자 이승만은 배재학당 학생들을 이끌고 경무처와 평리원에서 밤샘 농성을 벌여 그들을 석방시켰다. 이후 헌의 6조의 실시를 약속한 고종에 의해 남궁억 등과 함께 중추원 의원에 임명되었으나 불과 한달만에 고종 퇴위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어 1899년 1월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전단지를 돌리다가 체포되었는데 그 전단지 내용 중 일부가 "광무제는 연령이 높으시니 황태자에게 자리를 내 주셔야 한다."[12]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독립협회 시기 이승만은 박영효 계파와 연결고리가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박영효 내란 음모 사건에 연결되었다.[13] 투옥되었을 때 같은 독립협회 동지였던 주시경이 몰래 넣어준 육혈포로 탈옥을 했다가 도중에 잡혀 종신형이 내려졌다. 홍종우가 그를 취조하였고 아들의 구명을 위해 아버지가 이리저리 부탁하면서 목숨은 건졌지만 고문은 피할 수 없었다. 이 때 당한 고문으로 인해 후유증을 겪어야 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 중 하나인 안면근육경련이 바로 이때 생겼다는 말도 있다.

그는 감옥에서 학문연마 및 저술활동에 몰두했다. 선교사들을 통해 성경을 들여와 읽으면서 간수 및 동료 죄수들에게 기독교를 전도했고, 많은 책들을 읽으며 새로운 사상을 학습하고 발전시켰다.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감옥 내 도서관을 만들 정도였다.[14] 미완성이지만 최초의 영한사전을 만들기까지 했다. 또한 독립정신과 청일전기를 비롯해서 여러 저술들을 남겼고, 제국신문과 신학월보에도 계속 논설을 썼다. 이승만은 러일전쟁 이후 영어에 능통하고 국제정세에 밝은 인물을 원했던 민영환한규설의 끈질긴 주청으로 29살이었던 1904년 8월에 5년 7개월의 감옥 생활을 끝으로 특별사면을 받고 석방되었다. 그리고 대한제국의 독립 보전 요청이라는 임무와 함께 미국 유학을 결심한 그는 미국으로 떠난다.
파일:Syngman_Rhee_arrived_at_America.jpg 파일:미국유학1세대.png
1905년, 도미한 이승만이 시카고에서 동포들과 함께 찍은 사진.[15] 1906년, 샌프란시스코에서.[16]

1904년 12월,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시카고를 거쳐 워싱턴 D.C.에 도착한 이승만은 1905년 1월에 워싱턴포스트지와 기자회견을 열어 일제의 한국 침략을 폭로하였다. 2월에는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 2학년 장학생으로 입학하여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학비는 장학금으로 면제받았고, 생활비는 동양과 한국에 관한 강연으로 조달했다. 한국에 선교사로 있었던 미 상원의원 휴 딘스모어의 도움으로 20일에 존 헤이 미 국무장관을 만나 조미수호통상조약의 거중조정 조항에 따라 한국의 독립에 협조하겠다는 약속을 받았으나 존 헤이는 몇달 뒤 사망하고 만다.
파일:이승만예복.jpg 파일:Petition_For_Roosevelt.png
1905년, 미 대통령 접견을 위해 예복을 갖춘 이승만. 미 대통령에게 보내는 하와이 한인 교민들의 청원서.[17]

1905년 8월 5일에는 시어도어 루즈벨트를 만나 독립보전을 위한 교민들의 청원서를 전달했다. 루즈벨트는 "대한제국 정부의 공식 문서로 절차를 갖춰 제출하면 검토해보겠다"며 돌려보냈다. 그러나 이 시기 미국은 이미 일본과 비밀리에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은 시기라 공식적인 절차로 제출하라는 말은 그저 외교적 수사일 뿐 애초에 그런 요청을 받아줄 생각이 없었다. 불행하게도 그런 사실을 알 리 없었던 이승만은 당시 공사인 김윤정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그는 이미 일본에게 포섭되어 있어 이승만의 요청을 외면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포기하지않고 그에게 세례를 주었던 워싱턴 D.C.의 커버넌트 장로교회 루이스 햄린 목사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그는 '이런 공적 성격의 일은 정식 외교 경로를 통해야하며 1882년 조미조약은 단순히 형식적인 것이고 미국 정부와 대통령은 일본에 매우 우호적이다.'는 답변을 해왔고 김윤정을 처음 주미 조선 공사관에 소개시켜준 조지 워싱턴 대학교 총장인 찰스 W. 니드햄 박사 또한 '이런 중대한 문제는 김윤정 공사 단독으로 처리할 수 없고 본국에 먼저 물어보고 지시를 기다리는 것이 상책일 뿐이라며 자신은 김 공사를 신뢰한다'고 하며 이승만에게 단념할 것을 권하였다.[a]

한편 이 루즈벨트와의 면담소식은 국내에서도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고 황성신문에서는 "이승만은 한국 국민의 대표자요, 독립주권의 보전자요, 애국열성의 의기남자요, 청년지사"라며 극찬했다.

이때 8월 4일자 뉴욕 데일리 트리뷴을 비롯해 일부 언론들의 기사에서 이승만은 황제의 대표가 아니라 일진회의 대표로 루즈벨트를 만나러 왔다고 보도되었고, 2011년 한겨레에서 이를 가지고 이승만은 친일단체인 일진회의 대변인을 자처했으며 일본의 입장을 편들었다는 기사를 쓴 적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내용이다. 일진회 대표로 왔다는 기사들의 다른 부분에는 일진회의 '일'을 날 일(日)자로 알고 일진회가 "Society of Daily Progress"라는 뜻이라고 쓰는 등 기초적인 사실관계부터 틀린 내용이 많다. 또한 이승만과 윤병구가 일진회를 대표해서 왔다고 하는데 실제로 이들은 일진회와 아무런 연관도 없었다. 특히 윤병구는 줄곧 하와이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일진회 하와이 지부가 있는 것도 아닌 이상 그가 일진회와 관련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 얘기다.[19] 브루클린 데일리 이글(Brooklyn Daily Eagle)이 8월 4일에 보도한 장문의 대담 기사에 보면 이승만은 이렇게 말한 것으로 나온다.
No, we do not claim to represent the Korean government or any society but the liberal sentiment of the country.
아니오. 우리는 한국 정부 또는 어떤 단체를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의 자유주의 정서를 대변하는 것입니다.
또한 기자가 "당신은 러시아보다 일본을 선호합니까?"(Do you prefer Japan to Russia?)라고 묻자 이렇게 답하는 내용도 나온다.
We like the Japanese better than Russian but we don't like to be controlled by any nation or race.
우리는 러시아보다 일본을 더 좋아하지만 우리는 어떠한 국가나 민족에게도 지배받고 싶지 않습니다.
또한 이승만은 일본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한다.
We claim personal and political freedom. Japan has no protectorate over us any more than the United States.
우리는 개인적 그리고 정치적 자유를 주장합니다. 일본은 우리를 보호 통치할 권한이 없습니다. 미국이 우리를 보호 통치할 권한이 없는 것처럼.
즉, 이승만은 일본은 한국을 보호 통치할 권한이 없고 어떠한 국가에게도 지배받고 싶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으며, 한국의 독립을 위해 갔다는 것이 명확하다.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 재학하면서 이승만은 방학 때면 선교사들을 후원하던 오션 그로브에 위치한 보이드 부인 집에서 기거하였는데 그 때, 『Christian Advocate』지의 주필 A. B. 레오나드의 연설 기사를 읽게 되었다. 그는 이 연설에서 '일본이 한국을 영원히 통치할 것을 바란다'고 했는데 이에 격분한 이승만은 레오나드에게 장문의 항의서를 보냈다. 또 『에즈베리 파크』의 기자와 인터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열변을 토하였다.[20]
열강국은 일본의 감정을 상하게 해서 극동에 있어서의 상업상의 권익이 방해될 것을 우려하고 한마디도 정의에 입각한 말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아시아 전체가 일본에 독점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가? 약소국에 대한 불의의 적당주의의 평화는 결코 오래가지 않는다.
파일:Syngman Rhee in studying abroad.png 파일:이승만박사.jpg
1907년 7월, 이승만이 워싱턴 D.C.조지 워싱턴대를 졸업할 무렵. 1910년 6월,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승만.

이후에도 미국에서 공부하며 학·석·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서 학사,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 프린스턴 대학교[21]에서 정치학을 전공하여 35살인 1910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최초의 한국인 인문학(철학) 박사학위 취득자다.[22] 이 이력은 그에게 엄청난 자부심을 심어주었으며, 권위주의적인 성격과 정치적 행보에 두루 영향을 미치게 된다.

박용만이 미국으로 데려온 자신의 친아들 이봉수가 1906년에 디프테리아로 사망하는 아픔을 겪었다.[23]

1908년 3월 스티븐스 저격사건이 일어나고 재미 교민들이 장인환, 전명운의 법정 통역을 맡아 달라고 하자 3천 달러의 보수를 요구하였다.[24] 교민들이 그 돈을 모아 줬으나 자신은 기독교인으로서 살인자를 변호할 수 없다며 거절하는 모습을 보인다. 상황으로 보아 애초에 의뢰를 완곡히 거절하려고 나름 거액을 불렀는데 실제로 모아오자 당황스러워했을 공산이 있다. 당시 이승만은 하버드에 재학 중이라 동부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이 재판은 캘리포니아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당시 그는 가난으로 끼니조차 제대로 때우지 못했고 아들은 돈이 없어 병도 제때 치료하지 못해 사망했다. 이런 이승만에게 학업을 중도에 때려치고 서부까지 날아와 재판의 통역을 맡아달라는 부탁은 무모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하버드 대학에 재학하고 있을 때 일본이 한국을 말살하기 위해 한국정부의 고문으로 앉혀놓은 스티븐스가 두 한국 사람에 의해 샌프란시스코에서 암살되었다. (중략) 그리고 안중근 열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살해했다. 신문에는 한국 사람들은 잔인한 살인광들이며 무지몽매해서 그들의 가장 좋은 친우인 이토 히로부미와 스티븐스를 살해했다는 기사들이 가득 실리곤 하였다. 어떤 학생들은 나와 이야기하는 것을 두려워 했고 나의 교수는 나를 얼마나 무서워했는지 나의 석사논문을 나에게 우송해 주고는 떠나기 전에 나를 만나주지 않았다.
이승만이 1912년에 쓴 '청년 이승만 자서전' 中
그리고 당시 미국 내 여론은 일본에 우호적이었다. 이승만은 철저히 외교독립 노선을 주장하던 사람이었고 이 저격사건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장인환과 전명운의 입장에서는 친일파를 제거한 의거였을지 모르나 미국인들의 입장에선 자국의 외교관이 암살당한 사건이었다. 이런 미국의 고위 관리를 듣도 보도 못한 한국이란 나라의 두 명이 사살했다니 미국 내 여론은 한국인을 처벌하라며 들끓었고 당시 미국내 언론들에선 한국인들은 잔인한 살인광들이라는 기사들이 실렸다. 예나 지금이나 외교관 암살은 엄청난 외교적 문제가 되는 사건이고 이 사건은 미국내 한국의 입지를 악화시킬 뿐이었다. 무엇보다 이승만은 미국 기독교 선교본부의 후원을 통해 유학을 할 수 있었는데 이들은 일본이 동아시아 문명국이라고 인정하고 있었으며 만약 이승만이 반일운동에 나섰다면 그의 학업은 불안해졌을 것이다. 따라서 이승만은 이런 사건은 여론을 악화시켜 독립에 오히려 해가 된다고 생각했고 개인적 이해관계 또한 엮여있었기 때문에 이를 거절한 것은 그로서는 어찌보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파일:Korean Convention in Denver.jpg
1908년 7월, 콜로라도 주 덴버 시에 있는 그레이스 감리교회에서 열린 애국 동지 대표회. 서있는 첫줄 왼쪽 4번째부터 박용만, 이승만, 윤병구. 이 대회에 헤이그에서 돌아와 미주를 순방 중이었던 이상설도 참가하였다.[25]

1908년 7월 10~15일, 이승만은 콜로라도 주 덴버에서 감리교회에서 개최된 애국동지대표자회의(愛國同志代表者會議)에 이상설과 함께 대표로 참석하였다. 《덴버 리퍼블리칸》지가 이 대회를 자세히 보도하였다. 그는 대회의 폐회사에서 다음과 같은 연설로 마무리 지었다.[26]
현재 정치가들이 '일본은 한국의 강적이기 때문에 한국이 독립을 위하여 일본과 싸워도 성공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한국의 희망은 영원히 잃어버려진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그것은 피상적인 관찰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역사와 지리적 특징과 민족적 특성을 연구해 본다면, 한국은 일본보다 훨씬 뛰어난 데가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4천년 이상 민족의 특성과 완전한 독립을 보존해 왔으며 어떠한 국가도 결코 지구에서 말살되지는 않을 것이다.

2. 일제강점기

파일:Syngman-Rhee-in-1910.jpg파일:Syngman Rhee in YMCA.jpg
1910년, 이승만 박사. YMCA 회의 석상에서. 뒤에 서 있는 사람이 언더우드, 앞 줄 맨 왼편이 학감 이승만, 오른쪽 끝에서 두번째가 윤치호.

한일병탄 이후 이승만은 1910년 10월 10일 한국으로 귀국했다. 황성 YMCA 청년회에서 교사로 활동하며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1911년 일제가 기독교인들에게 데라우치 총독을 암살하려한다는 거짓 누명을 씌워 700여명을 체포한 105인 사건을 계기로 국내에선 저항운동이 어렵겠다는 판단을 하고 하와이로 건너간다.
파일:Korean Central Institute Graduation.png파일:이승만학원.jpg
1914년, 교장인 이승만과 한인중앙학원(Korean Central Institute) 졸업생들과 함께 찍은 사진. 1918년, 이승만이 설립한 남녀공학인 한인기독학원[27]의 학생과 교직원들.

미국 감리회 소속의 한인중앙학원 교장직을 거쳐 5년만에 남녀공학제 교육기관인 한인기독학원(Korean Christian Institute)을 만들어서 한인 학생들의 교육에 힘썼다. 1913년에는 순한글 월간지인 "태평양잡지"도 창간했다. 당시 박용만과 이승만은 둘 다 하와이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박용만은 대표적인 무장투쟁 노선이었다. 박용만은 군사를 양성하고자 했는데 그 군사 양성소에는 막대한 운영비가 필요했고 이승만은 그 돈으로 교육과 외교에 투자해야한다고 주장하여 독립운동 노선에 따른 갈등이 일어났다. 이 때 하와이 교민들의 중심이었던 국민회에서 국민회관 건축비를 유용하는 사건이 터졌고 그 결과 국민회 회장이던 김종학이 파면되었고 이승만과 그 지지자들이 국민회를 장악했다.

1918년 10월 경, 하와이를 방문한 여운홍평북 선천군의 미동병원 원장인 미국인 선교사 샤록스(Alfred M. Sharrocks) 등을 통해 국내의 민족지도자들, 예컨대 송진우, 함태영, 양전백 등에게 알림으로써 그들이 적당한 시기에 자기의 외교활동을 지원하는 대중운동을 국내에서 펼쳐줄 것을 부탁했다. 하와이 교포들은 1918년 11월 휴전이 성립되자 이승만에게 한인기독학원 일을 잠시 접어두고 파리 강화회의에 한인 대표로 참석할 것을 강력히 권유했다. 때마침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둔 대한인국민회에서도 1918년 11월 25일 이승만, 정한경, 민찬호를 강화회의 한인대표로 선출하였다. 이승만은 자기에게 맡겨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1919년 1월 6일에 호놀룰루를 출발, 미주 본토로 향했다. 1월 15일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그는 로스엔젤레스에 들러 1월 22일에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를 만난 다음 미국 동부로 발길을 재촉했다. 그는 뉴욕을 거쳐 2월 3일 서재필이 거주하는 필라델피아에 도착했다.[28]

1918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자 그 소식을 들은 재미 한인사회는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국민회에서 파리 강화 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로 했고 파견을 갈 대표에 이승만과 정한경이 뽑혔다.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안창호를 직접 만난 이승만은 워싱턴으로 가서 파리행 여권을 빨리 발급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미 국무부는 이승만에게 여권 발급을 거부했고 그의 파리행은 좌절됐다.[A]

원래는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한다는 조건하에 일본의 통치로부터 한국을 해방시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 두어달라"는 내용의 위임통치안도 바로 이 파리 강화 회의에 제출하려고 했던 문건이었다. 정한경이 이승만에게 찾아와 이 위임통치안을 제의했고 이승만도 동의했다. 결국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게 된 이승만과 정한경은 미국 대통령에게 이 문서를 파리 강화 회의에서 안건으로 삼아달라고 요청하기 위해 위임통치안 문서에 서명하여 1919년 3월 3일에 백악관에 전달했다. 이것이 위임통치 청원 사건이다.[30]
1919년 4월 16일, 필라델피아서 열린 한인 자유대회 실제 촬영 동영상.[31]
파일:Students of First Korean Congress.jpg
대한인자유대회(The First Korean Congress) 한인 유학생 대표단들. 왼쪽 끝 세번째부터 우조앤(Wu Joan)[32], 이승만, 노디김(Nodie Kim)[33], 일곱번째가 체른호(Haw Chern).

1919년에 3.1 운동이 일어나고 국내외 각지에서 임시정부들이 선포되었는데 그 중 8군데의 임시정부[34]에서 이승만을 국무총리급 이상의 자리에 추대했다. 특히 상해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와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로 추대되었다. 임시정부들이 스스로 이승만을 추대한 것인데, 이승만의 당대 위상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또한 1919년 5월과 8월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 D.C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담당인 구미위원부와 한국위원부부라는 해외 독립기관을 설치하여 해외 독립운동에 기여를 하였다.
파일:Postcard of Syngman Rhee in 1919.jpg 파일:insignia of Korea Independence 1919.jpg
임시정부 집정관 총재로 추대되었을 당시 시카고에서 발행한 엽서. 대한독립 휘장[35]
파일:Independence Indebtedness of Provisional Government of Korea in 1919.jpg
1919년 9월 1일, 임시정부 집정관 총재이자 주미외교위원장인 이승만 명의로 발행된 10달러 대한민국 공채표.

한성정부 집정관총재에 추대된 후 이승만은 워싱턴에 Republic of Korea 본부를 설치하고 외교선전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집정관총재를 영어President로 번역하여 President 명칭으로 각국 정부에 공문을 보내서 임시정부를 지지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 President라는 표현 때문에 임시정부의 다른 요인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36][37] 이승만은 '집정관총재'라는 명칭을 영어로 번역함에 적절한 용어가 President라고 주장했다.[38]

그리고 대통령 직함으로 각국에 한국이 독립되었다는 공문을 보냈는데 일본의 천황에게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보내었다.
일본은 정의에 입각하여 한국 독립을 승인할 것이며 이런 용단을 일본이 내린다면 일본은 전세계 사람들로부터 격찬을 받을 뿐만 아니라 동양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만약 이런 선의의 제의를 일본이 거부할 경우엔 한국 민족은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결국 자유를 획득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일본은 영원히 침략자로서 국제사회로부터 불신과 모멸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워싱턴 일본대사관을 통해 일본 천황에게 전한 공문[39][40]

2.1.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기

파일:external/sunday.joins.com/21015927.jpg 파일:이승만임시대통령.jpg
1920년 12월 28일, 상해 교민단 주최 이승만 도착 환영회. 맨 뒷줄 왼쪽부터 손정도[41], 이동녕, 이시영, 이동휘, 이승만, 안창호, 박은식, 신규식, 장붕[42] 임시정부 대통령 공식 초상화.

이후 각지의 임시정부를 통합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통령제로 개정하고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임시정부 방문 횟수를 근거로 이승만이 독립운동에 소홀했다는 설이 있지만 실제로는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지속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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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구미위원부 시절의 이승만과 김규식. 워싱턴에서.

이승만은 임시정부에 추대된 직후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립했다. 현지 교민들에게 받은 독립자금을 구미위원부가 거의 독점하면서 이승만은 비판을 받았다. 이승만은 계속 미국에서 활동을 했기에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에서도 그에게 빨리 상하이로 들어오라는 요청을 했고, 1920년 11월, 이승만과 비서 임병직은 일본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하와이에서 중국인들의 시신을 싣고 상하이로 가는 직행 배편을 하와이에서 상조회사를 운영하던 윌리엄 보드윅(William Borthwick)[43]을 통해 상하이로 밀항하였다.
파일:Syngman Rhee going to Shanghai.jpg 파일:William Borthwick's Borthwick Mortuary in Hawaii.png
파일:William Borthwick's Borthwick Mortuary in Hawaii 2.png
일제의 감시를 피해 중국인 시체를 운반하는 선박에 전통의상으로 변장을 하고 상해 임시정부로 도항한 이승만. 하와이에 위치한 장의사 윌리엄 보스윅(William Borthwick)의 상조회사.

앞에서 언급했던 위임통치 청원 사건에 대한 반대파들의 비난과 1920년대의 임시 정부의 자금난과 독립노선 차이, 기타 여러 갈등 등이 겹치면서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하와이에서 노선 차이로 이승만과 정적이 된 박용만 계열이 문제 삼으면서 임시 정부의 분열을 초래하였다.

1921년부터 워싱턴에서 군축 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태평양회의(對太平洋會議)' 외교 후원회가 조직되었으며 '태평양 회의 선언서'를 발표하고 이 회의에 한국의 독립 문제를 제기하기 위하여 이승만을 미국으로 파견하였다. 당시 이승만은 밀항하여 상해에 와 있었는데 1921년 5월 20일, 많은 임시정부 요인과 교포들의 환송을 받으며 미국 기선 컬럼비아 호를 타고 필리핀마닐라를 거쳐 워싱턴 D.C.로 향하였다. 임시정부는 파견된 대표단의 활동을 뒤에서 후원하였으며, 뉴욕에서도 후원회가 조직되어 대표단의 외교 경비를 뒷받침해 주었다. 특히 뉴욕서 유학하던 조병옥, 허정 등의 청년 유학생들이 함께하여 많은 도움을 주었다.[a]
워싱턴 군축 회담에 참가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이승만이 기자들과 인터뷰하는 장면을 촬영한 영상.

1921년 8월 16일, 워싱턴 군축 회담(Washington Naval Conference)에 참석하기 위해 하와이 호놀룰루를 출발하여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오전 8시 30분에 샌프란시스코 도착하자 기자들이 사진을 찍고 이승만을 인터뷰 하였다. 파테 뉴스(Pathe News)와 주간 국제뉴스(International News Weekly)가 금문교 공원에서 촬영하였다. 이 인터뷰에서 이승만은 워싱턴 군축 회의에서 한국민의 독립을 호소하고자 워싱턴으로 돌아왔으며, 회의가 미국 영토에서 열리기 때문에 파리 평화회의에서처럼 한국 대표들이 일본 외교관들에게 질식을 당하지는 않기를 희망한다고 말하였다.[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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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워싱턴 군축회의 교섭을 위한 구미위원부 팀 단체 사진. 앞줄 왼쪽 끝이 이승만, 타이피스트 메이본 여사[46], 법률 자문관 프레드 돌프[47].

워싱턴에 도착한 이승만은 한국 대표가 공식적으로 참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준비 위원회를 꾸리기 시작하였다. 임시정부 대표단이 공식적이라는 인상을 가능한 띄기 위하여 이승만의 평생의 독립운동 동지인 국제 통신사인 INS(International News Service)의 젊은 기자 J. 제롬 윌리암스 주선으로 신문 기자들을 초청하여 기자 회견을 열고 억압에 눌린 한국인들의 투쟁사를 설파하며 기자들을 통해 먼저 세계 여론을 환기시키도록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도 있었으나, 임시정부가 과연 한국민의 전체를 대표한 것인지 의문을 품는 자들도 상당하였다. 이에 이승만은 상해 임시정부에 공식 신임장을 전보로 요청하였고 1921년 9월 29일, 다음과 같은 신임장을 받게 되었다.[a]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1년 9월 25일, 정식으로 전 각료의 특별 회의를 소집하고 토의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의안을 채택하였음을 이에 밝히는 바이다. 즉,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은 1921년 미국 워싱턴 D.C.에서 개최되는 군비 축소회의에 전권을 가질 한국 대표단을 다음과 같이 선정 임명한다.

전권대사 이승만, 전권부사 서재필, 비서관 정한경, 고문관 프레드 A. 돌프

전권 대사에게 완전한 권한을 부여하며 대표 1명을 더 추가할 수 있음을 인정하며, 대표단의 전 인원은 5명으로 구성한다. 따라서 본 군축 회의에 한국 문제에 관한 주장을 제의할 권한을 부여하는 동시에 군축 회의에서 제기되는 모든 협정, 의정서, 조약 일체에 대한 협정 및 체결을 할 권한을 부여하는 바이다.

이 신임장을 미국 대표단의 단장인 허그스 국무장관과 군축 회의 사무국에 직접 제출하고 한국 대표단이 이 회의에 정식으로 참석할 수 있도록 주선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이렇다할 아무런 회답도 얻지 못하였다. 그래서 한국 대표부는 옵저버로서라도 이 회의에 참석하여 한국 문제를 논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온갖 방안을 찾고자 하였다. 그러나 끝내 목표한 바는 이루지 못하였고 다만 법률 자문이었던 프레드 돌프의 임시정부 승인에 대한 논설이 1921년 12월 1일미 의회 회의록에 수록되는 결과만을 달성했다. 애초에 제국주의 열강간의 과도한 군비경쟁 해소 및 이권 조정이 회의의 목적이였던만큼 그들의 식민지에 대한 독립 등의 요구는 철저히 묵살되었다. 이 때 그는 이 회의가 끝나자 열강들에게 다음과 같은 경고를 하였다.[a]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탈취할 수 있는대로 탈취하는 것이 오히려 정당한 것으로 통용될 때, 강대국은 이해가 상반되는 다른 강대국으로부터 정치 활동에 제한을 받게 된다. 이 결과가 전쟁을 야기한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일이다. 오직 이러한 현실에서 외면당한 약소 국민만이 그들의 정당한 주장조차 펴지 못하고 주권을 유린당하게 되는 것이다.

이 군축회의에 참석하러 가기 전 임시정부는 이동녕, 이시영, 신규식, 노백린 등 이승만의 지지세력을 중심으로 내각이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처럼 군축회의 관련 일이 잘 풀리지 않자 임시정부 내에서 반(反)이승만파가 득세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승만은 반대파에 의해 1925년 3월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탄핵되었다. 탄핵 사유는 아래와 같다. 사유라고 적힌 내용의 사실 여부를 떠나 당시 임시정부 내의 반(反)이승만파들이 이승만을 바라본 시각이 어떠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임시정부 대통령 탄핵 공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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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면직시킴
이승만 탄핵안에 의해 그 위법사실을 조사한 증거를 열거하면 민국 6년 12월 22일부로 전 재무총장 이시영에게 보낸 공문, 동 6년 12월 22일부로 국무원 각위 회람으로서 송부된 임시대통령 공문, 동 6년 7월 3일에 발한 구미위원부 통신부 특별통신, 동 7년 1월 28일에 낸 구미위원부 통신 특별호, 동 7년 2월 13일부로 박은식에게 송부한 서신 등과 같다.

이승만은 외교를 빙자하고 직무지를 떠나 5년 동안 원양일우에 편재해서 난국수습과 대업진행에 하등 성의를 다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허무한 사실을 제조 간포해서 정부의 위신을 손상시키고 민심을 분산시킨 것은 물론, 정부의 행정을 저해하고 국고수입을 방해하고 의정원의 신성을 모독하고 공결을 부인하고, 심함에 이르러서는 정부의 행정과 재부를 방해하고, 임시헌법에 의해 의정원의 선거에 의해 취임한 임시대통령으로서 자기의 지위에 불리한 결의라고 해서 의정원의 결의를 부인하고, '한성조직 계통 운운'과 같은 것은 대한민국의 임시헌법을 근본적으로 부인하는 행위다.

이와 같이 국정을 방해하고 국헌을 부인하는 자를 하루라도 국가원수의 직에 두는 것은 대업진행을 기하기 어렵다. 국법의 신성을 보지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순국 제현이 명복할 수 없는 바이고, 또 살아있는 충용들이 소망하는 바 아니므로 주문과 같이 심판한다.

대한민국 7년 3월 11일

임시대통령 이승만 심판위원회

위원장 나창헌

위원 곽헌, 채원개, 김현구, 최석순[50][51]

탄핵안이 가결되자 이승만은 임시정부를 향한 재미교포들의 자금 지원을 차단하는 등 거리를 두었으며, 주로 미국에서 활동하였다.

하와이로 돌아간 이승만은 1925년 동지회 회원들에게 주식을 발행해 동지식산회사를 설립했다. 나무를 벌목해 가구용 목재를 만들고 농지를 개간해 동지촌을 건설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가구용으로는 목재 재질이 적합하지 않아 숯가마에서 화약 제조용 목탄을 생산했다. 이 목탄을 미 해군에 공급하는 계약도 체결했다. 하지만 1930년 10월 자본부족과 운영미숙으로 동지식산회사는 실패하고 말았다.

1928년, 박용만의열단에 암살당하자, 이승만은 언론을 통해 의열단을 비난하였다.

1932년 5월 4일, 안창호를 비롯한 무고한 한인 11명이 일본에 체포되자 이승만은 구미위원부의 이름으로 프랑스 대사관에 공문을 보내 상해 거류 한인 보호에 협조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52]

만주사변상해사변이 일어나면서 정세는 다시 급변했다. 이승만은 만주사변 발발 후 1931년 12월 스팀슨 미 국무장관에게 편지를 보내 일본이 장차 미국의 적으로 부상할 위험성을 경고했다. 그리고 1932년 11월 뉴욕동지회보에도 광복의 기회는 미일 충돌에 있으며 만주사변으로 미국의 친일주의가 변화할 것이고 양국의 충돌은 불가피하다는 글을 실으며, 구미위원부의 임무는 미국의 친일정책이 실책이고 한국인을 응원하는 것이 미국에 도움이 됨을 깨닫게 하여 비공식 동맹을 맺는 일을 추진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파일:La Tribune D'orient interviewed Syngman Rhee.png 파일:이승만스위스.jpg
스위스 제네바에서 격주간으로 발행되던 「La Tribune D'orient」지의 1면 머리기사. 이승만의 경력을 소개한 후, 만주 문제에 대한 그의 주장과 신념을 피력하였다.[53] 1933년 5월 2일, 국제연맹 본부 앞에 선 이승만. 임시정부 특명전권수석대표 자격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이승만은 임시정부로부터 국제연맹 총회에 한국 독립을 탄원할 전권대사로 임명되었다. 1933년 국제연맹총회가 열리는 스위스 제네바에 가서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고 회원국 대표들과 기자들에게 한인 독립 문제를 회의 의제로 채택해 줄 것을 호소했다. 처음엔 직접 상정하려 했으나 거부당한 뒤 성명서를 작성하고 국제연맹 사무국과 회원국 대표들에게 발송했다. 만주문제와 만주에 있는 한국인 문제는 불가분의 관계이며 한국이 극동문제의 열쇠이고 국제연맹이 만주국을 승인한다면 그것은 연맹의 기본 정신인 민족자결주의에 위배된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각국 대표들도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현지 언론들도 우호적이었다.

또 그는 세계 각국의 영향력 있는 언론들을 통해 한국의 입장을 널리알려 여론을 움직이려고 부단히 애를 썼는데 1933년 1월 26일자 《주르날 드 제네바((Journal de Geneve)》 지면에는 일본인의 학정 밑에 가혹한 학대를 또다시 받게된 만주의 한국 망명 이주자들의 입장에 대한 그의 담화가 장문의 기사로서 게재되었고, 그 해 2월 26일에는 국제연맹이 서비스하는 방송에서 기회를 얻어 '한국 및 극동의 분쟁'이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기도 했다. 아랍계 독립운동가들[54]이 운영하는 레바논 신문 《라 트리뷴 도리앙(La Tribune D'Orient)》지는 2월 22일자 1면에 그와의 인터뷰에 관한 장문의 기사를 사진과 함께 싣기도 했다. 또 그 이튿날 베른의 《데어 분트(Der Bund)》 잡지도 에드윈 데브리스 박사가 집필한 같은 내용의 기사를 보도하였다.[a]

실제로 이 국제연맹 총회에서 만주국 불승인 결의안이 통과되었고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순전히 이승만 덕분에 그런 결의안이 통과되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의 성명서가 일정부분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무엇보다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는 점과 국제사회에 다시 한 번 한국 문제를 상기시켰다는 점이 중요했다. 이승만국제연맹 사무국장인 에릭 드러몬드 경에게 '한국의 독립 회복을 통하여 아시아에 있어서의 일본의 적극적인 군국주의 정책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내기도 하였고[a] 또 《만주의 한국인들(The Koreans in Manchuria)》이라는 책자도 만들어서 배포하며 일본의 영토야욕과 학살, 약탈에 대해 고발하며 간도 참변관동대학살에 대해서도 알렸다. 이 국제연맹 일로 스위스에 머물던 중 한 식당에서 이승만은 미래의 아내가 되는 프란체스카 도너를 만나게 된다. 그 후 이승만은 소련 모스크바에도 갔는데 일본의 방해로 가자마자 쫓겨났다.
파일:Syngman_Rhee_and_Francesca_Donner_in_America.png 파일:Married Syngman Rhee and Francesca Donner arrived at Hawaii.jpg
1934년, 결혼 직후의 이승만프란체스카 도너. 1935년 1월 24일, 신혼여행을 마친 이승만 부처가 호놀룰루에 도착했을 때의 모습.

1930년대 들어서 임시정부에서 반(反)이승만 세력이 약화되자 1934년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출되었다.

2.2. 태평양 전쟁 시기

파일:싱먼리외교위원장.jpg 파일:appointment letter indicated Syngman Rhee as a chief of Korean Commission in Washington.jpg
주미외교위원장 시절, 뉴욕에서. 1941년 6월 4일, 김구 및 외무부장 조소앙 명의로 발급된 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장 그리고 주미 전권 대표로 임명한다는 사령장.

1939년 말, 동지회의 이원순 씨 등의 조언으로 한인들의 독립운동사에 관한 저서를 집필하여 해외에 거주하는 동포들과 세계 각 국민들에게 한국 독립에 대해 여론을 환기시키고자 이승만하와이에서 워싱턴 D.C.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당초 독립운동에 관한 책을 쓰려했던 계획은 중일전쟁의 불똥이 미국으로 튈 조짐이 보이자 그는 이에 대해 경각심을 울려야겠다는 생각으로 1941년 6월, 일본의 미국 침략을 예고한 일본내막기란 책을 출간하였는데 초기에는 오히려 전쟁을 도발하는 책이라며 비난을 받았으나, 실제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 일어나자 한인 사회뿐만 아니라 미국 사회에서 이승만의 명성이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승만은 미국과 일본이 충돌하는 이 시점이 바로 한국에겐 기회라 생각했다. 그는 워싱턴에 주미 외교위원부를 다시 열고 임시정부로부터 주미외교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은 코델 헐 국무장관극동 담당 비서 알저 히스(Alger Hiss)와 스탠리 혼백(Stanley K. Hornbeck) 극동 국장을 만나서 한국이 사보타쥬게릴라 활동으로 대일 전쟁을 강화할 수 있도록 임시정부를 승인하고 군사 원조와 경제 원조를 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현 시점에서 동북아의 커다란 이해 관계를 일으키는 정치적인 문제 제기는 시기 상조라고 거절하였다.[57][b]
파일:TheKoreanLibertyConference1942.jpg 파일:한미협회.jpg
1942년 2월 27일부터 3월 1일까지 워싱턴의 호텔 라파예트에서 개최되었던 '한인자유대회'.[59] 오하이오 주에서 임정 승인 촉구 켐페인을 벌이기 위해 모인 한미협회 이사진들의 만찬회 모습.[60]
이승만은 루즈벨트 대통령를 비롯하여 미 국무부 등을 상대로 임시정부를 공식 인정 받기 위해 많은 애를 썼지만 잘 되지 않았고, 한계를 느낀 그는 미국 내 여론을 움직이기 위해 미국의 여러 지도층을 중심으로 한미협회를 발족했다. 수십년간 자신과 함께해준 스태거스 변호사와 윌리엄스 기자, 아메리칸 대학교 총장 더글라스와 호머 헐버트 박사, 그리고 로버트 올리버[61] 등이 한미협회에 참여했다. 이 협회를 중심으로 1942년 3월 1일, 3.1 운동 기념일을 기해 이승만워싱턴 D.C.에서 전승 축원을 위한 '한인 자유대회(The Korean Liberty Conference)'를 열었다. 동년 3월 6일, 한미우호협회는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임시정부의 즉시 승인과 연합국에 가담시킬 것을 촉구하는 장문의 성명서를 보냈다.[b]

1942년 5월 15일, 이승만은 미국의 전쟁 활동에 적극 협력하겠다는 임시정부의 전문을 동봉한 다음과 같은 공한을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보냈다.[b]
루즈벨트 대통령 각하, 나는 중경에 망명 중인 한국 임시정부로부터 받은 동봉 전문 메세지를 각하에게 전달할 영광을 가지려 합니다. 이 메세지는 2,500만 한국 인민의 민족적 감정을 표현하고 있으며, 나는 그것이 각하의 특별한 고려를 받을 가치가 있음을 확신합니다.

지금이야말로 미국이 과거 38년간 한국 인민과 한국에 대해서 저질러진 잘못과 부정의를 시정할 시기라는 사실에 각하의 주의를 환기하는 바입니다. 각하께서도 상기하실 것이지만 미국은 1882년한미조약에 위반하여 1905년에 일본이 한국을 점령하고 1910년에는 한국을 병합하도록 허용하였습니다. 각하께서 한 연설에서 언급하였던 바와 같이 그 이래 한국 인민은 전세계의 모든 피정복 민족보다 더한 그리고 더 오랜 고통을 겪어 왔습니다. 한국의 파괴는 일본의 정복 계획의 개시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동경군국주의자들의 손에 하나하나 먹혀 들어간 국가를 여기에 다시 열거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1941년 12월 7일 이래 일본 도국 민족의 폭력으로부터 문명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미국인의 피가 흘려졌고, 얼마나 많은 금전이 사용되었습니까? 이 모든 것이 서방 정치가들이 동양 평화의 보루로서의 독립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데서 온 것입니다. 이 정치가들은 지난 여러 세기동안 일본의 침략을 몇 번씩이나 격파한 것이 한국인이었다는, 오직 한국민만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미국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소련이 종전 후 한국에 '소비에트 조선 공화국'을 수립한다는 소문이 들리는 상황에서 그들의 극동 진출을 막고 현재의 대일 전쟁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당장 임시정부를 승인하고 한국인들을 대일 전쟁에 참전시켜 실질적으로 미국을 도울수 있게 해야합니다. 따라서 현재의 전쟁 노력을 촉진하고 태평양 장래의 평화를 안전화하기 위하여 나는 각하에게 이제 간청하노니 한국 임시정부를 승인하고 우리의 공동의 적인 일본과의 싸움에 한국인이 정식 가입함으로서 미국에 실질적인 봉사를 할 수 있도록 모든 원조와 고무를 주시기를 요청하는 바입니다.

ㅡ 한국위원회(Korean Commission)[64] 위원장 이승만
라는 내용의 서한을 보내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어긴 미국의 책임을 묻고 일제의 대한제국 병합에 미국이 손놓고 있었던 결과가 진주만 공습으로 이어져서 현재 미국이 엄청난 병력과 비용을 낭비하게 되었음을 지적하면서 임시정부를 공식 인정하여 한국이 참전하게 하라고 설득했다.

며칠 후, 루즈벨트 대통령 비서 왓슨 소장으로부터 "세밀한 주의를 받았다."는 짧은 답신[65]을 받았으나 실효를 거둘만한 것은 없었다.[b]

이 외에도 이승만은 미 법무장관 프랜시스 비들에게 미국내 한국인을 적국인 일본인과 동등하게 대우하지 말것을 요청했다. 그 결과 1942년 2월 9일 프랜시스 비들은 외국인등록법에 따라 등록한 한국인 가운데 자의로 일본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사람에 한해 적성국 외국인에 가해지는 규제에서 특별 면제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런데 그 뒤에도 일선 군 지휘관들이 미국내 한국인을 일본인과 같이 적성국민 취급하는 일이 발생하자 1943년 3월 30일에 이승만은 미 육군장관 스팀슨에게 시정을 요구했고 일본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한국인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어 한국인들을 보호하였다.

1942년 6월부터 이승만은 미국의 소리(VOA) 단파 방송망을 통해 고국 동포들의 독립 운동을 격려하고 국제사회의 소식을 알리는 방송활동을 했다.[67] 한국어 방송은 1942년 8월 처음 방송되었는데, 자세한 내용은 항일단파방송 사건 참고.

1943년 이승만은 미국에게 반(反)소련전선을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 해 11월, 12월 카이로 회담에서 연합국은 한국을 '적당한 절차'에 따라 독립시킨다는 것을 발표했다. 비록 이승만은 '적당한 절차'가 신경 쓰였으나 미국 정부에 요청해도 자세한 내막을 파악할 수 없었다. 후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신탁통치에 관한 이야기가 오고 가긴 했었다.

이외에도 이승만은 미국의 전략첩보국 OSS 부국장인 굿펠로우를 만나서 대일전쟁 첩보부대에 한국인들을 참여시키고자 했다.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 OSS는 1942년 1월 24일 한인들을 OSS 대원으로 훈련시키기로 결정했고, 백범 김구와 접촉했다. 이후 6월부터는 미국에 있던 이승만과 굿펠로우는 OSS를 통해 한인병사를 양성하고자 했는데, 초기의 계획은 "일본어에 능통한 한국인 청년 100여 명을 선발해 소정의 비밀 훈련을 마친 후 적당한 시기에 임무를 수행케 한다는 것"이었다. 이 OSS 대원이 된 인물에는 유일한[68], 장기영[69], 장석윤[70] 등이 있다. OSS는 김구광복군과 협력해 한인들을 선발하는 독수리 작전을 세웠고, 미국에서 직접 소수의 한인 특공대원을 뽑아 한반도에 투입하는 냅코 작전도 실시했다.[71] 이 때 이승만이 추천한 50명 정도가 OSS에 가담했다. 그들은 캘리포니아에 있는 산타 카탈리나 섬에서 유격훈련, 무선훈련, 폭파훈련, 촬영훈련 등을 하며 대일전을 준비했다.[72] 그러나 이 모든 작전은 1945년 8월 원자폭탄 투하 후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면서 실행되지 못했다.

이승만은 1945년 4월부터 열린 유엔 창립총회에 참관인 자격으로라도 참석하여 독립 보장을 받으려했으나 잘 되지 않아서 사무국과 각국 대표들에게 카이로 선언의 기본정신에 따라 임시정부를 즉각 승인할 것을 요청하는 진정서를 보냈다. 그러나 이런 시도가 무산되자 "얄타 회담에서 전후 한반도를 소련의 영향력 하에 두기로 했다." 라는 미·영·소 3국 간의 이른바 '얄타 밀약설'을 폭로하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며 한국이 가쓰라-태프트 밀약에 이어 또다시 비밀 협약의 희생물이 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승만은 미국 상하원 외교 분과 위원장들에게 얄타 밀약을 항의하는 전보를 보냈고, 트루먼 대통령에게 한국을 비밀협약의 희생양이 되어 노예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줄 것을 호소하는 서한을 보냈다.
한국에 관한 카이로 선언에 위배되는 얄타에서의 비밀 협정이 최근에 밝혀짐으로써 대통령께서 크게 놀라셨을 겁니다. 비밀 외교에 의해 한국이 희생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1905년 한국을 일본에 팔아넘긴 밀약은 20년 동안이나 비밀에 부쳐졌습니다. 다행히 얄타협정은 바로 이곳 유엔 창립 총회 도중에 밝혀졌습니다. 과거 미국이 저지른 잘못을 바로잡고, 3,000만 한국인이 노예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 대통령께서 이 상황에 개입하시기를 호소합니다.[73]

ㅡ 한국위원회(Korean Commission) 위원장 이승만

당시 이승만이 워싱턴의 주미외교위원부 사무실에 보낸 편지에는 "당시 우리는 세계 지도자들이 얼마나 부패했는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속수무책이었으나, 지금 우리는 이 사실을 캐냈으므로, 세계에 양심이란 게 남아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이 깨어날 때까지 싸워야 한다."고 적었다.

미국 국무부는 사실무근이라며 부정하였고, 공식 성명을 통해서 얄타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침해하는 어떠한 비밀 협정도 체결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영국 하원에서 얄타밀약설에 관한 질의를 받은 처칠 또한 아무런 비밀협약이 체결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3국 정상이 비밀협정의 존재를 부인하는 성명을 발표하라고 요구하였다. 실제로 그 당시 신탁통치를 미국이 찬성했고, 소련에 대일참전을 요구하여[74] 3달 후 만주 작전이 실행됨으로써 이승만의 말이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었음이 밝혀졌다.[75] 무엇보다 이승만의 의도는 얄타회담의 정상들이 비밀 협정이 없었다고 부인하고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고 재차 확인시켜주는 언질을 이끌어내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미국 국무부가 얄타밀약설은 거짓 소문에 바탕으로 두며, 카이로 선언에서 천명된 한국의 독립은 충실히 이행될 것이라고 확인하면서 이승만은 그의 목표를 달성하게 되었다.

1945년 9월 초, 하지 중장이 진주군 사령관으로서 인천에 상륙할 때쯤, 로버트 올리버 박사는 한국에 대한 소련의 야망에 신경과민이 되어 있는 이승만을 찾아가 친구로서 그가 추구하고 있는 "극단적" 침로에 대한 근심을 표명하였다. 그는 워싱턴 D.C. 워드먼 파크(Wardman Park)에서 이승만 부부와 함께 식사를 하였다. 식사가 끝난 후, 올리버는 자기의 의견을 지극히 조심스레 이야기 하였다.[76]
올리버 : 한국은 아시아에서 소련의 세력권내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소련과 협력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정세는 반도공산당과의 연립 정부를 세워야 할 것이 필연적인 사실로 되고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현재와 같은 태도와 고집을 버리지 못한다면 연립 정부로부터도 배척되고, 결국 조국의 독립을 얻기 위하여 한 평생 투쟁한 것이 허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잠시의 침묵이 흐른 뒤 이승만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승만 : 당신도 아시겠지만 나는 조국을 위하여 일생 싸워 왔습니다. 그러한 내가 개인의 지위를 위하여 조국을 소련에 맡기도록 꾸며 나갈 수가 있습니까? 아내와 나는 오랫동안 고국에 돌아가 국민과 재회할 것을 꿈 꾸었습니다. 수백만의 동포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조국노예화되는데도 그들을 속이고 그들에게 독립을 주기 위해서 돌아왔노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되면 조국에 대한 나의 일은 끝입니다. 그러나 나는 될 수 있는 한 계속하여 그들의 잘못을 경고할 작정입니다. 파멸해가고 있는 것은 한국만이 아닙니다. 소련의 세계 정복에 대항할 수 있는 국민은 미국인 뿐이므로 미국은 타국보다 더한 타격을 받을 것입니다. 나의 임무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태를 미국인에게 그대로 알리는 것 뿐입니다. 우리들은...

그는 격한 감정을 누른 채 웃으며 부인을 돌아 보았다.

이승만 : 우리들은 언제든 시골에 은퇴하여 닭을 치며 조국의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을 것입니다.

3. 해방 정국

이승만 환국 첫 육성 라디오 연설 영상 (1945. 10. 17.)[77][78] 연설 전문

광복 직전인 1945년 8월 8일 이승만은 미 정부에 귀국 요청 편지를 보냈으나[A] 미 국무부는 소련과 정책협조를 해야했기 때문에 반공주의자인 이승만의 귀국을 허가하지 않았다. 이 때 같은 반소련주의자인 맥아더의 도움으로 이승만은 도쿄에 가서 그를 만난다. 소련은 8월 8일에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참전하면서 불과 일주일만에 한반도 북부를 점령했다. 8월 27일에는 한반도 북부 지역 대부분에 소련군이 배치되었다. 소련의 급속한 남하에 놀란 미국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38선을 그었고 9월 8일에 미군이 뒤늦게 한반도에 도착했다.

그 후 이승만은 더글라스 맥아더와 함께 10월 4일 미국 워싱턴에서 출발하여 14일 일본 도쿄를 거쳐 10월 16일 저녁 김포공항을 거쳐 귀국했다. 귀국한 이후 이승만은 조선 호텔에 투숙했으며, 이는 33년 만의 귀국이었다. 이승만의 이름은 기존에도 한국 내에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귀국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다. 정적인 여운형이 선포한 조선인민공화국의 지도자로 추대될 정도였다. 그러나 이승만의 의사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추대된 것이었기 때문에 이승만은 방송을 통해 공식적으로 조선인민공화국 주석직 취임을 거절했다. 이승만은 모든 정치세력의 단결을 호소하며 독립촉성중앙협의회라는 통합 기구를 조직했다. 이후 독촉중앙회는 이승만 세력의 정치적 모태가 된다. 1945년 10월 25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독촉에서 한 이승만의 발언을 보자.
무엇이든지 하나로 만들자! 한 덩어리로 애국정신을 뭉쳐 우리의 원하는 바를 세계에 보여야 한다. 그 기관을 만들자. 이 모임을 실로 조선 독립을 위해 우리의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억지로 뭉치라고 강요하지도 않고 또 뭉쳐 만들려 하지도 않는다. 당신들이 뭉쳐서 조선 사람에게 실감하게 하라!
이승만은 조선공산당 재건파를 이끄는 박헌영을 만나 대화를 나누지만 서로 의견차를 좁히지 못했다. 결국 독촉중앙회를 좌우 통합 조직으로 만들려는 그의 시도는 한민당 계열과 조선 공산당의 갈등이 불거지며, 이들이 탈퇴하게 됨으로써 실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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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하지 중장에게 소개하는 이승만

11월 23일에는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했다. 그 뒤 김구는 박헌영 측과 합작을 추진했으나 12월 13일 박헌영이 상해임시정부를 부정하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합작은 실패로 끝났다.

12월 29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시위들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김구의 임시정부에서도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승만도 신탁통치에 반대했다. 그러나 몰래 38선을 넘어 북으로 갔던 박헌영이 소련에 설득된 뒤[80] 1946년 1월 3일 좌익세력들은 신탁통치를 찬성하기 시작했다.

김구는 비상국민회의를 소집하고 정식 국회 수립전까진 과도정부를 만들고 이를 위한 결정권은 자신과 이승만에게 일임할 것을 주장했다.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가 비상국민회의에 참석했던 인물들을 모아 회의를 개최하고 이들을 미군정 최고자문기관인 '남조선 대한민국 대표민주의원' 의원으로 임명했다. 의장에는 이승만, 부의장에는 김구와 김규식이 올랐다. 이후 이승만은 사무엘 돌베어라는 미국인에게 100만 달러를 받고 광산고문이라는 직함과 채굴권을 주었다는 스캔들로 인해 의장직을 사퇴했다고 알려져있다.[81]

그러나 해당 스캔들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한인들이 발간하던 '독립'지에서 1946년 1월 23일 보도하면서 시작된 것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승만이 미국에 있을 때 중경에 있는 김구 주석에게 요구하여 미국인 돌베어(Samuel H. Dolbear)를 조선의 광업고문으로 임명케하여 조선의 광업권에 대한 광범위한 권리를 돌베어에게 양여한다는 약속을 하였으며 그 대가로 돌베어는 이승만에게 미화 100만달러를 주기로 약정되었다. 그리고 1944년 8월 15일에 로스앤젤레스에 전해진 중경 통신에 의하면 중국 국민정부로부터 일방적으로 폐기한다는 것을 발표한 중국과 임시정부와의 9개조 밀약이 있었고 그 내용으로서 조선이 독립된 뒤에 그 외교정책의 지배권을 중국에 부여한다는 약속과 그 대가로 조선이 열강의 승인을 받을 때까지 중국은 임시정부에 매월 중국화로 3백만원을 지불하기로 협정이 되어있었다.
일단 이승만이 1945년 3월 5일에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자격으로 돌베어를 임시정부의 광산고문으로 임명했고 광복 후 존 하지에게도 돌베어를 미군정 고문으로 추천한 것은 사실이다.[82] 그러나 그 대가로 100만달러를 받았다는 것은 저 기사의 주장일 뿐 아무런 근거도 없고 입증된 바도 없다. 이 '독립'지는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에서 발행하던 신문인데 단체 이름만 봐도 알겠지만 김원봉으로 대표되는 공산주의계열 단체였다. 그리고 해당 기사를 쓴 사람은 한길수라는 사람으로 당시 이승만과 적대관계에 있는 인물이었다. 이 기사는 소련공산당 기관지인 'Pravda'에 인용되어 보도되었고 이것이 다시 뉴욕 타임즈에 인용되었다.

1946년 3월 20일부터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다.

이승만은 1946년 4월부터 6월까지 두 달간 삼남 지방을 순회했다. 이 '남선순행'을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지방까지 확대하는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았다. 그와중에 북쪽에서는 1946년 2월에 이미 북조선인민위원회라는 사실상의 정부가 수립되어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하고 기간산업을 국유화하는 등 공산체제를 굳히고 있었다.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미국과 소련의 입장 차로 무기한 휴회되자[83] 6월 3일 정읍을 방문하던 중 이른바 정읍발언을 하며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이승만이 자신이 대통령이 되기위한 권력욕 때문이라는 시각과, 앞서 언급했듯이 이북지역엔 이미 사실상의 정부가 수립되어 단독 국가가 만들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이 한반도 전체를 집어삼키는 것만은 막아야한다는 신념 때문이라는 시각이 공존한다.

미군정은 이승만과 김구 때문에 소련과의 정책협조가 방해받는다고 생각하여 이 두 명을 퇴출시키고 김규식, 여운형 같은 중도적 인물을 키우려고 했다.[84] 미군정은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이후 좌익 탄압을 시작하며, 조선공산당 본부를 수색하고, 공산당 기관지인 해방일보를 정간시키고, 극우신문인 대동신문을 정간시켰다. 미군정은 중도세력을 중심으로 과도입법의원을 구성하기로 하고 1946년 12월 12일에 과도입법의원이 개원했지만 민선의원 선거결과 우익이 압승했다. 당황한 존 하지는 재선거를 지시하는가 하면 관선의원 대부분을 좌우합작위원회 인물과 용공인사들로 선발했다.[85]

존 하지는 이승만을 축출하려고도 했는데 당시 수도 경찰청장이었던 장택상의 증언에 의하면 존 하지가 자신을 찾아와 김규식을 대통령으로 세우고 이승만을 정계에서 물러나게 하면 안되겠냐고 요구했으나 자신이 사표를 내밀자 화를 내며 방을 나갔다고 한다.
파일:Gen. Good Fellow with Syngman Rhee.jpg
경무대를 방문한 굿펠로우 대령. 그는 OSS 시절부터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이런 존 하지의 좌우합작조치와 편파적 조치에 분노한 이승만은 이때부터 공개적으로 하지에 반대하게 된다. 이승만은 1946년 11월 22일 방미 계획을 발표했고, "유엔총회에 한국문제의 해결을 직접 호소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 외교 활동을 펼치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12월 4일 미국 워싱턴 D.C.를 방문해 굿펠로우 대령, 스태거스 변호사, 임병직, 로버트 올리버 등으로 구성된 전략협의회를 구성하고 '한국 문제의 해결책'이라는 건의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이 건의서를 미 국무부 동아시아국장 존 빈센트와 국무장관 조지 마셜에게 제출했다. 건의서는 남쪽에서 과도정부가 선거에 의해서 수립되어야 하고 이 과도정부가 유엔에 가입되어야 하며 미국, 소련과 직접 협상할 수 있어야 하고 미소 양군이 동시 철수할 때까지 미군이 반드시 남쪽에 주둔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현지 언론에 "미 국무부 내 일부 인사들은 공산주의에 기울어져 있고, 존 하지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가운데 관선의원 상당수를 공산주의자들로 채웠다"라고 맹비난했다. 이런 비판은 때마침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던 반소반공 여론과 맞물려 미 의회, 언론계, 종교계에서 호의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조한성에 따르면 이승만의 방미 활동의 목표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미국 외교 담당자들에게 자신의 단정안을 선전해 논의의 중심에 올려놓는 것이었고, 둘째는 자신의 활동을 제약하는 하지와 미군정의 대한정책을 공격해 자신의 활동 반경을 넓히는 것이다. 이승만은 미국 내 자신의 로비스트들을 총동원해 자신의 단정안을 선전했다. 이를 통해 미국의 대한정책 방향의 자신의 단정안으로 향하도록 최선을 다한 것이다. 한편 그는 하지와 미군정, 미 국무부의 일부 인사들을 친좌익으로 매도하면서 미군정과 미국 정부를 압박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외교 활동은 미국 내에서 아무런 효과도 발휘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미국 정계가 이승만의 활동을 철저히 무시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인 것은 미국 내 반공 언론 뿐이었다. 그러나 미국 내에서와는 달리 한반도 이남에서는 커다란 효과를 발휘했다. 이승만은 방미 활동을 통해 끊임없이 뉴스를 생산해냈고, 그것은 국내 우익 신문들을 통해 이승만의 외교적 성과로 심각하게 과대포장되었기 대문이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은 자신의 구상이 항상 미국의 대한정책과 긴밀히 연결된 것처럼 보이도록 꾸몄으며, 미국의 대한정책에 자신의 주장을 교묘히 섞어 미국의 정책이 마치 자신의 외교적 노력으로 이뤄진 양 선전했다.[86]

그리고 그의 방미 중에 때마침 그리스 내전이 일어나고 트루먼 독트린이 1947년 3월 12일 발표되면서 미국의 대외 정책이 이승만이 취해오던 노선과 완전히 일치하게 되었다. 이로써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론은 힘을 얻게 되며, 아시아의 반소 반공의 지도자로 부상할 수 있게 된 계기가 된다. 이승만은 워싱턴 방문을 마치고 1947년 4월 21일 귀국했다.

1947년 5월 21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으나 아무 진전은 없었다. 이 시기에 이승만은 그가 미소공동위원회에 반대하지 못하게 하려는 미군정에 의해 사실상의 가택연금을 당했다. 이화장에 있는 전화기도 철거됐고 주간 라디오 연설을 비롯한 외부와 연락할 수 있는 모든 수단들이 차단되었다.[87] 미소공동위원회 보이콧을 선언한 이승만과 달리, 한민당은 미소공동위원회 참여를 선언했고 한국독립당에서도 미소공동위원회 참여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미군정 관계자들은 좌우가 호각을 이루고 있는 남한 지역과 달리 38선 북쪽은 좌익과 소련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임시정부가 세워진다면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 될 가능성이 컸다. 결국 미소간 입장차를 좁히지 못한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는 결렬됐고 소련 대표단은 철수했다. 한국 문제는 UN으로 이관되었고 1948년 1월 8일 UN한국임시위원단이 서울에 입국했다. 그러나 이북지역은 UN한국임시위원단의 이북방문을 거부했다. 이에 이승만은 이북이 UN한국임시위원단의 방문자체를 막고 있으니 이남만이라도 단독 선거를 실시해야한다고 주장했다. UN도 이남지역의 단독 선거를 통해 자주적인 민간 정부를 수립할 것을 결의했다.

김구와 김규식은 1948년 4월 19일 남북협상을 위해 이북으로 갔다. 이승만은 김구의 이북행을 묵인했다. 그러나 "30살 김일성과 얘기가 통하겠는가? 아예 러시아에 가서 스탈린과 얘기하세"라고 한 걸로 봐서 큰 기대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88] 김구와 김일성은 미소 군대의 즉시 철수와 통일임시정부를 수립하자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연석회의에 불참한 정당과 단체는 통일임시정부 구성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에 북한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내용이었다.

김일성의 목적은 당연히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였기 때문에 그는 5.10 총선거를 막고, 남한 건국을 반대하는 세력과 힘을 모아 한반도 전체의 (공산)통일정부를 세우고자 했다. 결국 UN한국임시위원단의 감독에 의해 1948년 5월 10일 남한 지역에서 5.10 총선거가 실시되었는데, 이 5.10 총선거를 저지하고자 남한 지역에 있던 공산세력들이 반란과 소요사태를 일으켰고 그것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안타까운 사건이 제주 4.3 사건이다.[89]

5.10 총선거에서 이승만은 동대문 갑구[90]에 출마하였는데, 상대 후보는 경찰관 출신 최능진이었다.[91] 결국 최능진은 이승만을 추종하는 서북청년회의 물밑 공작[92]으로 후보 등록은 무효화되었고, 이승만은 제헌국회의원 선거에서 무투표 당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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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부 수립 대통령 취임식
이승만은 제헌 국회에서 초대 국회의장 자격으로 대통령 중심제 헌법 제정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원래 헌법 초안은 내각책임제였으나 이승만은 "이 헌법으로는 강력한 정치를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이 헌법 밑에서는 어떠한 자리에도 취임하지 않겠다고 하는 바람에 대부분의 제헌 국회의원이 반발했지만 인촌 김성수의 중재로 대통령 중심제 헌법으로 바뀌게 되었다.[93][94] 같은 해 7월 20일에는 제헌국회의 간접선거로 진행된 제1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출석의원 196명 중 180명의 표를 얻어 승리했다. 당선 직후 이승만의 소감 육성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가 1948년 8월 15일에 수립됨과 함께 공식적으로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8.15 대한민국 정부 선포식 당시 실제 현장 촬영 영상[95] 대한민국 정부 수립식에서 대통령 이승만의 축사.
8.15 대한민국 정부 수립 경축사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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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귀빈 제씨와 나의 사랑하는 동포 여러분!

8월 15일, 오늘 거행하는 이 식은 우리의 해방을 기념하는 동시에 우리 민국이 새로 탄생한 것을 겸하여 경축하는 것입니다. 이날에 동양의 한 고대국인 대한민국 정부가 회복되어서 40여년을 두고 바라며 꿈꾸며 희생적으로 투쟁하여온 결실이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은 내 평생에 제일 긴중한 시기입니다.

내가 다시 고국에 돌아와서 내 동포의 자치 자주하는 정부 밑에서 자유 공기를 호흡하며 이 자리에 서서 대한민국 대통령의 자격으로 이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는 대통령의 존귀한 지위보다 대한민국의 한 공복인 직책을 다하기에 두려운 생각이 앞서는 터입니다.

우리가 목적지에 도달하기에는 앞길이 아직도 험하고 어려웁니다. 4천여년을 자치 자주해온 역사는 막론하고 세인들이 남의 선전만 믿어 우리의 독립 자치할 능력에 대하여 의심하던 것을 금년 5월 10일, 전 민족의 민주적 자결주의에 의한 전국 총선거로써 우리가 다 청소시켰으며 모든 방해와 지장에 대하여 일시의 악감이나 낙심 애걸하는 상태를 보이지않고 오직 인내와 정당한 행동으로 극복하여 온 것이니 우리는 이러한 태도를 가지고 연속 진행함으로 앞에 많은 지장을 또 일일이 이겨나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금도 우려하거나 퇴축할 것도 없고 어제를 통분히 여기거나 오늘을 기뻐만 하지말고 내일을 위해서 노력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할 일은 우리의 애국심과 노력으로 우리 민국을 반석같은 기초 위에 둘 것이니 이에 대하여 공헌과 희생을 아니한 남녀는 더 큰 희생과 굳은 결심을 가저야 될 것이요 더욱 굳센 마음과 힘을 다하여 다만 우리의 평화와 안전 뿐 아니라 온 인류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서 힘써야 될 것입니다.

이 건국 기초에 요소가 될 만한 몇 조건을 간략히 말하면

1. 민주주의를 전적으로 믿어야 될 것입니다. 우리 국민 중에 혹은 독재 제도가 아니면 이 어려운 시기에 나갈 길이 없는 줄로 생각하며 또 혹은 공산 분자의 파괴적 운동에 중대한 문제를 해결할만한 지혜와 능력이 없다는 관찰로 독재권이 아니면 다른 방식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으니 이것은 우리가 다 큰 유감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목하의 사소한 장해로 인해서 영구한 복리를 줄 민주주의의 대정 방침을 모호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결코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독재주의가 자유와 진흥을 가져오지 못하는 것은 역사에 증명된 것입니다. 민주 제도가 어렵기도하고 또한 더디기도 한 것이지만 의로운 것이 종말에는 이기는 이치를 우리는 믿어야 할 것입니다.

민주 제도는 세계 우방들이 다 믿는 바로 우리 친구들이 이 전제 정치와 싸웠고 또 싸우는 중입니다. 세계의 안목이 우리를 드러다보며 역사의 거울이 우리에게 비치어 보이는 이때에 우리가 민주주의를 채용하기로 하고 30년 전부터 결정해서 실행하여온 것을 또 간단없이 실천해야 될 것입니다. 이 제도로 성립된 정부만이 인민의 자유를 보장하는 정부입니다.

2. 민권과 개인 자유를 보호할 것입니다. 민주 정체의 요소는 개인의 근본적 자유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국민이나 정부는 항상 주의해서 개인의 언론과 집회와 종교사상의 자유를 극력 보호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가 40여년 동안을 왜적의 손에 모든 학대를 받어서 다만 말과 행동 뿐 아니라 생각까지도 자유로 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민족이 절대로 싸워온 것입니다. 우리는 개인 자유 활동과 자유 판단권을 위해서 쉬지않고 싸워온 것입니다. 우리를 압박하는 사람들은 유래로 저의 나라의 전제 정치를 고집하였으므로 우리의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마음이 더욱 굳어져서 속으로 민주 제도를 배워 우리끼리 진행하는 사회나 정치상 모든 일에는 서양 민주국에서 행하는 방식을 모범하여 자래로 우리의 공화적 사상과 수난을 은근히 발전하여 왔으므로 우리의 민주주의는 실로 뿌리가 깊이 박혔던 것입니다. 공화주의가 30년 동안에 뿌리를 깊이 박고 지금 결실이 되는 것이므로 굳게 서 있을 것을 믿습니다.

3. 자유의 뜻을 바로 알고 존중하며 한도 내에서 행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나라에던지 자유를 사랑하는 지식 계급의 진보적 사상을 가진 청년들이 정부에서 계단을 밟어 진행하는 일을 비평하는 폐단이 종종 있는 터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언론과 행실을 듣고 보는 이들이 과도히 책망해서 위험 분자라 혹은 파괴자라고 판단하기 쉬웁니다.

그러나 사상의 자유는 민주 국가의 기본적 요소이므로 자유 권리를 행사하여 남과 대치되는 의사를 발표하는 사람들을 포용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못해서 이런 사람들을 탄압한다면 이것은 남의 사상을 존중히하며 남의 이론을 참고하는 원칙에 위반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비와 선악이 항상 싸우는 이 세상에 우리는 의로운 자가 불의를 항상 이기는 법을 확실히 믿어서 흔들리지 말어야 될 것입니다.

4. 서로 이해하며 협의하는 것이 우리 정부의 관건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새 국가를 건설하는 이때에 정부가 안으로 공고하며 밖으로 위신이 있게 하기에 제일 필요한 것은 이 정부를 국민이 자기들을 위해서 자기를 손으로 세운 자기들의 정부임을 깊이 각오해야 될 것입니다.

이 정부의 법적 조직은 외국 군사가 방해하는 지역 외에는 전국에서 공동히 거행한 총선거로 된 것이니 이 정부는 국회에서 충분히 토의하고 제정한 헌법으로써 모든 권리를 확보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는 우리 일반 국민은 누구나 다 일체로 투표할 권리참정할 권리를 가진 것입니다.

일반 국민은 누구를 물론하고 이 정부에서 분포되는 법령을 다 복종할 것이며 충성스러히 받들어야만 될 것입니다. 국민은 민권의 자유를 보호할 담보를 가졌으나 이 정부를 불복한다든지 번복하려는 권리는 허락한 일이 없으니 어떤 불충분자가 있다면 공산분자 여부를 물론하고 혹은 개인으로나 또 당으로나 정부를 전복하려는 사실이 증명되는 때에는 결코 용서가 없을 것이니 극히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인민의 자유 권리와 참정권을 다 허락하되 불량 분자들이 민권 자유라는 구실을 이용해서 정부를 전복하려는 것을 허락하는 나라는 없는 것이니 누구나 다 이것을 밝히 알어 조심해야 될 것입니다.

5. 정부에서 가장 전력하는 바는 도시에서나 농촌에서나 근로하며 고생하는 동포들의 생활 정도를 개량하기에 있는 것입니다. 기왕에는 정부나 사회에 가장 귀중히 여기는 것은 양반들의 생활을 위했던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이 사상을 다 버리고 새 주의로 모든 사람의 균일한 기회와 권리를 주장하며 개인의 신분을 존중히하며 노동을 우대하여 법률 앞에는 다 동등으로 보호할 것입니다.

이것이 곧 이 정부의 결심이므로 전에는 자기들의 형편을 개량할 수 없던 농민과 노동자들에게 특별히 주의하려 하는 것입니다. 또 이 정부의 결심하는 바는 국제 통상공업 발전을 우리나라의 필요에 따라 발전을 실시하여 우리 농장과 공장 소출을 외국에 수출하고 우리가 우리에게 없는 물건은 수입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즉 공장과 상업과 노동은 서로 떠날 수 없이 함께 병행불패(竝行不敗)해야만 될 것입니다. 경영주들은 노동자를 이용만 하지 못할 것이요 노동자는 자본가를 해롭게 못할 것입니다. 공산당의 주의는 계급과 계급 사이에 충돌을 붙이며 단체와 단체간에 분쟁을 붙여서 서로 미워하며 모해를 일삼는 것이나 우리의 가장 주장하는 바는 계급 전쟁을 피하고 전 민족의 활동을 도모함이니 우리의 활동과 단합성은 우리 앞에 달린 국기가 증명하는 것입니다. 상고 시대부터 태극이 천지만물에 융합되는 이치를 표명한 것이므로 이 이치를 실행하기에 가장 노력할 것입니다.

6. 우리가 가장 필요를 느끼는 것은 경제적 원조입니다. 과연 기왕에는 외국의 원조를 받는 것이 받는 나라에 위험스러운 것을 각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언제든지 무조건하고 청구하는 것은 불가한 줄로 아는 바입니다.

지금와서는 이 세계 대세가 변해서 각 나라 사이에 대소강약을 물론하고 서로 의지해야 살게되는 것과 전쟁과 평화에 화복안위를 같이 당하는 이치를 다 깨닫게되므로 어떤 적은 나라의 자유와 건전이 모든 큰 나라에 동일하게 관심되는 것입니다.

연합국과 모든 민족들이 개별적으로나 단체적으로 기왕에 밝히 표명하였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발표할 것은 이 세계의 대부분이 민주적 자유를 누리게 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방들이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는 것이요 또 계속해서 도움을 준 것인데 결코 사욕이나 제국주의적 요망이 없고 오직 세계 평화와 친선을 증진할 목적으로 되는 것이니 다른 의심이 조금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 미군정은 끝나고 대한 정부가 시작되는 이날에 모든 미국인과 모든 한인 사이에 한층 더 친선을 새롭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유를 회복하는 것은 첫째로 미국이 일본의 강권을 타도하기 위하여 우리나라에 있던 적군을 밀어내었고 지금은 자발적으로 우리의 독립을 회복하기에 돕는 것이니 우리 토지의 일척일촌(一尺一寸)이나 우리 재정의 일푼전이라도 원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미국은 과연 정의와 인도의 주의로 그 나라의 토대를 삼고 이것을 세계에 실천하는 증거가 이에 또다시 표명되는 것입니다. 겸하여 과도기에 미국 장교들을 도와서 계속 노력한 모든 동포들의 업적은 우리가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첫째로 미국 군인이 점령한 동안에 군정이나 민정에 사역한 미국 친우들이 우리에게 동정하며 인내하여 많은 양해로 노력해준 것은 우리가 또 깊이 감사하는 바입니다. 또 다시 설명하고자 하는 바는 미 점령군 사령관이요 지도자인 하지 중장의 모든 성공을 치하하는 동시에 우리는 그분을 용감한 군인일 뿐 아니라 우리 한인들의 참된 친우임을 다시금 인정하는 바입니다.

이 새로 건설되는 대한 민주국이 세계 모든 나라 중에 우리의 좋은 친구되는 나라들이 많은 것을 큰 행복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 정부의 주의하는 바는 기왕에 친근히 지내던 나라와는 더욱 친선을 도모하는 것이요 기왕에 교제 없는 나라들과도 친밀한 교제를 열기로 힘쓸 것입니다.

둘재로 국제연합의 회원된 나라들을 일일이 다 지명하여 말할 수는 없으나 이 모든 나라들이 우리에게 많은 동정을 표하였으며 작년 11월 14일에 한국을 위하여 통과한 결의로 우리의 독립 문제를 해결되게 한 것을 감사히 여기는 중 더욱이 유엔 임시위원단에 대표를 파견한 그 나라들이 민주적 총선거를 자유로 거행하는데 도와주어서 이 정부가 생기게 한 것을 특별히 고마워하는 바입니다. 이 앞으로 유엔총회가 파리에서 열릴 때에 우리나라 승인 문제에 다 동심 협조하여 이만치 성공된 대사업을 완수하게 하기를 바라며 믿는 바입니다.

우리 전 국민이 기뻐하는 이날에 우리가 북편을 돌아보고 비감한 생각을 금하기 어려웁니다. 거의 1천만 우리 동포가 민국 건설을 우리와 같이 진행하기를 남북이 다 원하였으나 유엔 대표단을 소련군이 막기 때문에 못하게 된 것이니 우리는 장차 소련 사람들에게 정당한 조처를 요구할 것이요 다음에는 세계 대중의 양심에 호소하리니 아무리 강한 나라이라도 약한 이웃의 강토를 무단히 점령케 하기를 허락한다면 종차로는 세계 평화를 유지하려는 나라가 없을 것입니다.

그 나라가 자유로 사는 것을 우리가 원하느니만치 우리가 자유로 사는 것을 그 나라도 또한 원할 것입니다. 언제든지 우리의 이 원하는 바를 그 나라도 원한다면 우리 민국은 세계 모든 자유국과 친선을 지키며 지내는 것과 같이 소련과도 친선한 우의를 다시 교환하기에 노력할 것입니다.

결론으로 오늘 지나간 역사는 마치고 새 역사가 시작되어 세계 모든 정부 중에 우리 새 정부가 다시 나서게 되므로 우리는 남에게 배울 것도 많고 도움을 받을 것도 많습니다. 모든 자유 우방들의 후의와 도움이 아니면 우리의 문제는 해결키 어려울 것입니다.

이 우방들이 이미 표시한 바와 같이 금후로도 계속할 것을 우리는 깊이 믿는 바이며 동시에 가장 중대한 것은 일반 국민의 충성과 책임감과 굳센 결심입니다. 이것을 신뢰하는 우리로서는 모든 어려운 일에 주저하지 않고 이 문제를 해결하며 장해를 극복하여 이 정부가 대한민국에 처음으로 서서 끝까지 변함이 없이 민주주의에 모범적 정부임을 세계에 표명되도록 매진할 것을 우리는 이에 선언합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

물론 이승만이 위에 설명한 것과 같이 이 좋았던 것도 있었지만 단순히 운으로 대통령 자리를 얻을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해방 후 한국 사회에서 이승만은 여운형, 김구조차 따라잡을 수 없는 국내외, 좌우를 막론하고 최고의 정치적 명망가였다. 이승만의 명망은 해방 직후 여운형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조선인민공화국이나 그의 적대 세력이었던 한민당이 모두 아직 귀국도 하지 않은 그를 지도자로 추대할 정도였다. 하지만 문제는 그의 지도력을 모든 정파에 부과할 만한 조직적 기반을 갖지 못했고, 정파들 사이의 이해관계는 그의 명망 밑에 조화되기에는 너무나 치열하게 대립되었다. 각 정파는 그의 명망을 업고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려고 했지, 그를 따르려고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려 하지는 않았다. 남한만의 단독 정부가 수립되고 그가 초대 대통령이 되었을 때에도, 그것은 그의 개인적 명망에 의한 것이었지 그의 정치세력의 반영은 아니었다.[96]

4. 대한민국 시기

4.1. 초대 대통령 재임기

파일:대한민국 초대 내각 기념 사진.png
1948년 8월 5일, 첫 국무회의를 마친 대한민국 초대 내각. 앞 줄 왼쪽부터 전진한·임영신·안호상·이인·이범석·이승만·윤치영·김도연·조봉암·장택상. 뒷 줄 왼쪽부터 윤석구·김동성·민희식·유진오.
사람들의 막연한 인식과 달리 이승만 정부의 초대 내각은 친일파 출신인 윤치영을 제외하고 모두 독립운동가 출신들이었다.[97] 그리고 초대 내각에는 다양한 당파 출신의 인물들로 구성되었다. 한민당은 자기 당 출신이 내각에 2명 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승만 정부에 강한 반감을 드러냈다.

이승만은 이윤영을 초대 국무총리에 지명했다. 이윤영은 이북 출신이고 조만식조선민주당을 이끌었었기 때문에 후에 남북통일을 위해서 이북동포들의 힘을 얻기위해서 지명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제헌 국회는 이에 크게 반발했고 결국 부결되었다. 그 후 이범석이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에 임명되었다. 이승만은 초대 농림부장관에 자신과 반대되는 좌익 인사인 조봉암을 임명했다. 이는 지주계급인 한민당을 견제하고 농민들의 시급한 문제인 토지개혁을 해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북한이 시행한 토지개혁에 남한의 농민들이 불만을 느끼고 사회주의가 퍼지는[98] 것을 우려했으며, 이에 따라 1950년 3월에 한민당의 반대를 뿌리치고 농지개혁법을 단행[99]하여 광복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있던 지주제를 혁파하고 농민들의 불만을 해소하는데 성공한다. 이 농민 불만 해소야말로 6.25 전쟁 초반의 패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북한이 전쟁 초기 남한 농민들에게 선전한 토지분배가 전혀 매력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가 열심히 일해서 얻어낸 토지를 뺏어서 옆집 빈둥거리는 녀석이랑 똑같이 공짜로 나눠주겠다는데 어떤 농민이 환영할까. 그리고 국민 절대다수가 농민인 이 시기에 농심은 곧 민심이자 여론이었다. 한마디로 농지 개혁은 단순한 경제 정책이 아닌 대한민국의 안보 정책이기도 했다.

이 농지 개혁은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형태의 토지 개혁으로 이 과정에서 토지 가격은 폭락하고, 지주들에게 땅을 매입하고 나중에 토지의 값을 지불하겠다는 유가증권을 주었는데, 이 유가증권은 6.25 전쟁 등을 거쳐서 완전히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지주들의 몰락과 농민층 분해, 근대적 자본가의 성장의 토대가 마련되었다.[100]

1948년 10월 19일에는 여수순천에 주둔 중이던 14연대의 좌익 군인들이 제주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러 가는 것을 거부한다는 명목으로 대한민국의 분쇄를 내세우며 군사반란을 일으킨 여수·순천 10.19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1949년 소련의 스탈린 정부가 핵개발에 성공하고, 중국 대륙도 내전에서 모택동이 승리하여 공산화되면서 이승만은 철저한 반공 노선을 지향하였다. 이와 더불어 이승만은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여, 이런 공산주의 반란세력을 탄압하는 걸 가속화했고 1949년까지 감옥에 수감된 이가 10만 명을 넘어섰다. 이러한 숙군작업 없이 그대로 6.25 전쟁이 일어났더라면 내부에 수많은 반란군과 간첩들을 안은채로 전쟁을 치를뻔 했다.[101]

1949년 초 반민특위가 출범했고 친일반민족행위자 7,000여명 중 682건을 조사해 305명을 체포했다. 그러나 거리에서는 반민법 반대 관제 데모들이 벌어졌다. 6월 6일에는 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하여 위원 35명을 체포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이후 반민특위는 급격히 위축되었다. 국내 기반이 미약했던 이승만은 친일 전력이 있는자들을 등용하였다.[102] 한반도를 반소반공의 전진기지로 활용하려던 반공국가 미국에게도 친일파 청산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103][104]

이승만은 1949년 2월 반민특위 활동이 위헌이라는 담화를 발표했다.당시 반민특위 위원장이던 김상덕을 비롯한 반민특위 활동가들은 이승만과 대립했으며, 특히나 악질 친일경찰인 노덕술 구속을 둘러싸고 갈등과 대결이 첨예화됐다. 이런 와중에 이승만 편인 경찰은 5월 하순 이른바 국회프락치사건이라 하여 국회의원 이문원과 최태규 등 4명을 전격 구속하면서 이들일 남로당 프락치라고 발표하며 사건을 조작했다. 이승만은 반민특위를 해체하기 위해 신익희 국회의장과 김상덕 위원장을 경무대로 불러 노덕술 석방을 종용했고, 6월 6일에는 내무차관 장경근을 동원하여 궁극적으로 반민특위를 습격하고 해체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반민특위 흔적의 제거 과정을 한국전쟁 중인 1951년까지도 끊임없이 진행했다. 1951년 2월 8일 국무회의에서는 반민특위 관련 임시조치법 폐지 건을 재차 논의했으며, 2월 14일 반민족행위 재판기관 임시조치법이 폐지됨으로써, 친일파 청산은 단 한 명도 처벌하지 못한 채 끝이 났다.[105]

그러나 일본 자체에 대해서는 이승만 라인(평화선)으로 대표되는 독도이어도, 대한해협의 해양주권 절대 사수라는 초강경 외교노선을 견지하였다. 이승만은 긴급명령을 내려 평화선 내 바다에서 조업활동을 하던 일본 선박들을 나포하게 하였고 이 과정에서 도주하던 선박을 격침시킬 정도로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6.25 전쟁 시기에는 맥아더가 일본군 파병에 대한 의중을 떠보는 것이 귀에 들어오자, 일본군이 한국에 들어온다면 총부리를 공산군에서 일본군으로 돌리겠다며 절대 반대하는 등 임기 내 일본에 대해서는 초강경 태세를 유지하였다.

1950년 5월에 있었던 2대 총선에서 이승만 계열 정당은 210석 가운데 개헌 저지선에도 못 미치는 57석을 확보하는데 그치는 대 참패를 겪었고 무소속 후보들이 대거 의원에 당선되었으며 남북협상파 역시 대거 의회에 진출하였다. 그리고 곧 이승만의 대통령 생활 최대 위기가 터진다.

4.2. 6.25 전쟁 시기

파일:Syngman_Rhee_and_Francesca_at_battlefront.jpg
1954년 5월 8일, 이승만프란체스카가 전선을 시찰하고 있다.

이승만은 미군이 철수하면 분명 전쟁이 날 것이라고 얘기했으나 결국 미군은 1949년에 한국에서 철수했다. 그리고 1950년 1월에 미 국무부 장관 애치슨은 애치슨 라인에서 한국을 제외하여 설정하였고, 이는 북한이 미국의 개입이 없을것이라는 오판의 간접적 원인이 되었다.

이승만은 평소 북진통일론을 주장했다. 당시 38선을 중심으로 남한과 북한 사이의 교전이 벌어졌으며, 이는 머지않아 있을 전쟁을 예고하는 징조로 보았기 때문이다. 북진통일론을 주장한 이승만은 미국의 트루먼을 만나 "미국이 한국을 직접 방어해야한다."고 강력히 요구했으며, "북한을 공격할 것"을 주장했다. 존 포스터 덜레스가 총애한 기자 중 한 사람인 윌리엄 매슈스는 이승만은 북쪽 땅으로 쳐들어가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며칠 만에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우리의 도움을 받아 그럴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106]

이렇게 이승만이 평소 북진통일을 주장했기 때문에[107][108] 한국에 군사지원을 해주면 전쟁이 일어날까봐 미국이 군사지원을 주저하게 만들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한국군의 무장상태를 강화시켜주지 않은 것은 그렇다치더라도 미군이 철수한 것은 설명하지 못한다. 이승만이 미군의 지휘권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미군이 한국에 있어도 이승만이 미군을 이끌고 북으로 처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2006년에 김대중을 만난 아미티지 전 미국 국무부 부장관은 "당시 미군 철수가 조기에 이루어졌고 애치슨 라인도 실수였다"고 인정한 바 있다. [109]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침공으로 6.25 전쟁이 발발했고, 전방에 배치된 인민군은 소련의 지원과 압도적인 전력을 바탕으로 밀어붙여 신속히 진격했고, 이 사실은 같은날 오전 10시가 되어서야 이승만에게 보고되었다.

이날 이승만은 무초 주한 미국대사를 만나서 한국은 더 많은 무기와 탄약 그리고 특히 더 많은 소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110] 무초는 이승만과의 회담이 끝난 뒤 미국에 "부산으로 10일치의 탄약들을 즉시 보내라"[111]고 전문을 보냈다.

6월 26일 새벽 3시에 이승만은 도쿄에 있는 맥아더에게 전화를 했다. 맥아더는 자는 중이었으나 이승만은 부관에게 "지금 전화를 받지 않으면 한국 내 미국인들이 하나씩 죽어나갈 것이다"라며 다그쳤다. 결국 전화를 받은 맥아더에게 이승만은 "지금 이 사태가 일어난 건 누구 책임이냐. 내가 여러번 경고했지 않느냐. 빨리 한국을 도와라"라고 말했다.[112] 무초가 미국 국무장관에 보낸 전문에 따르면 이승만은 폭탄을 실은 F-51 전투기 10대와 바주카를 한국군 조종사들이 이륙준비를 하고 있는 대구로 보내 달라는 긴급요청과 함께 105밀리 야포 36문과 75밀리 대전차포 36문, 155밀리 야포 36문을 원한다고 요청했다.

6월 26일에 북한군은 의정부를 점령하고 서울로 진격하고 있었다. 각료들은 이승만에게 피신을 권고했으나 그는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26일 오전 11시에 신익희 의장의 사회로 국회 본회의가 열렸고 이승만도 여기에 참석했다. 그리고 이승만은 오후 2시에는 육군본부와 치안국 상황실을 방문했다.

6월 26일 오후 9시, 김태선 치안국장이 이승만에게 피난을 건의했으나 이승만은 또 거절하였다.

6월 27일 오전 1시, 이승만은 주미대사관의 주미대사 장면에게 전화를 걸어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 군사원조가 시급함을 알리고 협조를 구할 것을 지시하였고 장면은 3시간 뒤 트루먼을 만나 회담을 하였다.

6월 27일 오전 2시, 신성모 국방장관과 조병옥, 이기붕 서울시장이 경무대로 와서 이승만에게 피난 갈 것을 재차 권유했으나 처음에는 거절했다가 잠시 후 김태선 치안국장에게 북한군이 청량리까지 왔다는 보고[113]를 듣고서야 부인 프란체스카와 비서 황규면, 경호원과 함께 오전 3시에 경무대에서 출발해 서울역으로 이동했고 오전 4시에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서 출발했다.

대통령이 잡히면 나라가 더 위험해지기 때문에 피난을 가는 것 자체는 당연한 일이지만 문제는 부통령실, 국무총리실, 국회사무처 등에 통보를 했어야 하는데 신성모 국방장관과 이기붕 서울시장은 본인들이 직접 경무대로 가서 이승만을 피난 보냈음에도 국회측에 대통령의 피난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6월 27일 오전 4시, 국회는 임시회의를 열어 신성모 국방장관의 피난 제의(당시엔 임시이동으로 표현)를 거부하고 서울사수를 결의하고 이승만에게 통보하러 찾아왔으나 이때는 이승만이 불과 조금 전 경무대를 떠난 다음이었다.

무초 미대사가 6월 27일 오전 6시에 본국으로 보낸 전문에 "대통령과 대부분의 각료가 서울을 떠나 남쪽으로 갔다."고 나오고 2시간 후인 오전 8시에 보낸 전문에는 이렇게 나온다.
오전 7시에 신성모 총리서리가 나를 찾아와 대통령이 오전 3시에 진해로 떠났고 각료들은 오전 7시에 남쪽으로 출발했으며 모두 특별열차로 이동했다고 확인해줬다.[114]
1950년 6월 27일 오전 8시에 무초 주한 미대사가 본국으로 보낸 전문 中#
이걸로 보아 나머지 각료들도 이승만이 경무대에 없는 것을 확인하고 피난을 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나머지 각료들도 대부분 27일 아침에는 이미 상황을 알고 떠났다는 뜻이다.[115] 북한이 서울을 점령한 것은 다음 날인 28일이다.

이승만 일행은 처음엔 대구까지 내려갔으나 이승만은 다시 서울로 돌아가고자 했다. 그래서 6월 27일 오전 11시, 이승만은 대구에 잠깐 내려 조재천 경북지사와 유승렬 제3사단장을 만난 뒤 다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갔다.

6월 27일 오후 4시 반, 이승만이 대전에 도착했을 때 각료들이 서울로 돌아가는 것을 만류하여 대전에 임시수도를 세웠다.

6월 27일 밤 10시에 이승만은 대전 임시수도에서 다음과 같은 육성 방송을 했다.
지난 몇 달간 나는 미군의 군사 원조가 임박했다고 주장했으나 민주주의 국가가 그러한 원조를 실현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마침내, 적군은 전차, 전투기전함으로 서울에 다가오고 있는데 우리 국군은 싸울 것들이 전무한 상황이다. 이 암울한 상황에 직면하여 나는 도쿄와 워싱턴에 연락하여 현 상황을 설명했고, 마침내 나는 오후에 맥아더 장군의 전보(미군 참전)를 받게 되었다.

맥아더 장군은 우리에게 수많은 유능한 장교들과 군수 물자를 보내는 중이며 이는 빠른 시일에 도착할 것이다. 이 좋은 소식을 국민에게 전하고자 방송한다. 우리는 공산주의와 싸우기 위한 우리의 용기와 투지를 증명해 보였고, 모든 우방국들이 우릴 지지하고 있다. 나는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모든 용감한 군경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나는 공산주의자들이 과거의 실수를 바로잡고 대한민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다면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 다시 한번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머지않아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우리 국민 모두가 그들을 공화국의 충실한 시민이 되도록 가르쳐야 한다.
Daily Report, No.125, Korea, June 28 1950, ccc 5(RG 263, Records of the Central Intelligence Agency, Foreign Broadcast Information Service DailyReports, 1941-1959, Box 330)
이 방송에서 이승만은 적군이 서울 인근까지 진출했고 국군은 싸울 수 있는게 없다고 분명히 밝혔으며 보통 알려진 것과 달리 "국민 여러분 서울은 안전합니다.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십시오" 같은 얘기는 하지 않았다. 다만 26일과 27일 낮까지 국방부나 다른 인사들이 서울은 안전하다는 등, 의정부를 탈환했다는 둥 중구난방으로 제각각 떠들어 댄 것에 대해 이승만이 정부수반으로서 국정을 제대로 통할하지 못했을뿐 아니라 자신이 현재 어디에 있는지 설명하지도 않았다.

6월 28일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했다. 아직 피난가지 못한 서울시민들이 남쪽으로 피난을 가고 있었으나 28일 새벽에 한강 인도교는 폭파되어 끊긴 상황이었다. 다리를 폭파하는 것 자체는 군사작전 상 당연한 일이었으나 너무 이른 타이밍에 폭파했다는 점과 전쟁 초기에 서울시민들에 대한 피난 지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논란이 되었다. 다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다리 폭파로 인해 다리를 건너고 있던 수백명의 민간인들이 죽었다는건 사실이 아니다.[116] 폭파도 이승만이 지시하지 않았다. 자세한 내용은 한강 인도교 폭파 참고.

대전 임시수도에 며칠간 있다가 북한군의 공세에 전황이 악화되면서 대통령 일행은 부산으로 이동해야 했으나 일반적인 육로를 통해 추풍령을 지나면 남로당이나 공산 게릴라들의 공격을 받을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이승만 일행은 7월 1일 대전을 떠나 오후 3시에 목포에 도착했고, 목포에서 부산까지는 해군 514정을 타고 7월 2일 오전 11시에 부산항에 도착했다. 해군 309정이 호위함으로 함께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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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0월 30일, 평양시청 환영 대회에서 연설을 하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과 그를 환영하는 평양 시민들. 연설 전문

다부동 전투 등으로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낸 뒤 인천 상륙작전 이후 국군과 연합군은 38선 인근까지 밀고 올라갔고 그 상태로 전진을 멈췄다. 1950년 9월 30일 이승만은 군간부들을 불러 왜 38선을 넘어 북진하지 않느냐고 호통쳤다. 정일권의 회고록에 따르면 "38선이 어찌 됐다는건가? 무슨 철조망이라도 쳐 있다는 건가? 장벽이라도 쌓여 있다는 건가? 넘지 못할 골짜기라도 있단 말인가?"라고 했다고 한다. 이승만은 이때를 통일의 기회로 생각했고 국군에 38선 돌파 명령을 내린다. 국군 3사단이 가장 먼저 38선을 넘었고 마침내 국군과 UN군은 1950년 10월 20일 평양에 입성했다. 그 뒤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갔으나 통일을 눈 앞에 둔 상황에서 중공군이 국경을 넘어 진격해왔다.

6.25전쟁 2주년을 맞아 1952년 6월 25일 충무로 광장에서 이승만이 연설을 하였는데 김시현의 사주를 받은 유시태라는 의열단 출신의 노인이 이승만을 암살하려는 사건이 발생했다. 하지만 권총은 불발돼 이승만은 죽을 위기를 넘겼다.

1952년 7월에는 정치깡패와 경찰을 동원해 임시수도 부산을 포위한 상태에서 야당 의원들을 협박해 발췌 개헌을 일으켰다.

중국 인민지원군의 개입으로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부담을 느낀 미국이 휴전을 추진하자 이승만은 "(중공군 백만이 바로 코앞에 있는 상태에서 이대로) 휴전을 받아들이라는 것은 한국민에 대한 사형집행 영장이다"라며 한국에 대한 안전보장 없이는 휴전을 할 수 없다고 극렬히 반대했다. 결국 반공포로 석방 사건을 일으켜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원조와 대한민국 국군 20개 사단으로의 증원,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것을 미국으로부터 얻어내는 쾌거를 이루었다.[117] 이처럼 그는 단지 휴전을 방해하지는 않겠다는 제스처 하나로 강대국을 상대로 막대한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118]
1953년 6월 26일, 반공포로 석방 직후 서방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중공군이 백만이나 이북에 있는 이런 상태에서 휴전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천명했다.[119] 1954년 1월 17일, 제네바 회담을 앞두고 서구권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승만 대통령대한민국을 팔아넘기는 행위는 곧 미국을 팔아넘기는 것과 같다는 메세지를 전하였다.[120]

이런 갈등이 지속되자 1953년 5월에는 미국은 필요할 시 이승만을 제거하려는 에버레디 계획까지 세웠다. 이승만은 미국이 원하는대로 순순히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 입장에서 이승만은 눈엣가시였고 그를 제거하고 대체할 인물을 찾고 있었다. 일전에는 1952년 8월 2일 진해 앞바다에서 미 CIA가 배에서 낚시를 하던 이승만에게 11발의 총을 쏜 사건까지 있었다.#[121]

4.3. 전후 제2·3대 대통령 연임과 퇴임

파일:John Poster Dulles Wrestling with Syngman Rhee.png
1908년, 프린스턴 동기미 국무장관 덜레스이승만휴전 협상을 앞두고 서로 한치도 양보할 수 없는 치열한 대치 속에서 고뇌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

휴전협상 이전부터 미국은 이승만에게 전후지원을 약속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UN군이 철군하고서 미국이 약속을 어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던 그는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할 것을 미국에 요청하였다. 이승만은 부상포로 교환협정 조인 직전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에게 협박성 편지를 보내며 압박하였다. 아이젠하워는 훗날 회고록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서한은 문맥도 난폭하고 내용도 퍽 과격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를 안심시키고 무마시키려고 곧 답장을 보냈다〉고 적었다.

이러한 압박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자 이승만은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초강수를 두었고 이는 미국은 물론 국제사회에 어마어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처칠은 대단히 불쾌해했으며,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회고록에 당시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6월 17일 자로 나에게 보낸 이 대통령 서한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폭탄이 터졌다. 2만 5,000명의 비공산 포로들이 수용소에서 탈출했으며 이 사건에 한국정부가 관계했음을 인정했다. 이들 2만 5,000명의 포로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들 포로는 공산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에 보급로나 후방 지역 안전에 위협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대통령의 존재는 우리가 몇 달 동안 북한과 중공에 대해 주장해 온 입장의 바탕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파일:Syngman Rhee's Speech in U.S. congress.jpg 파일:U.S. Congress Speech of Syngman Rhee.jpg
1954년 8월,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최종 마무리를 위해서 대한민국 사상 처음으로 미국을 국빈 방문한 이승만미 의회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연설하는 모습. 뒤에 닉슨 부통령이 의장석에서 하원의장과 함께 참관하고 있다. 이승만은 여기서 총 33회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이처럼 미국은 이승만이 던진 수에 휘둘리게 되었고 결국 휴전협정 체결 이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줄 것을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은 협상이 끝나 미국 대표단이 떠난 뒤 “이것이 공수(攻守)동맹이야”라고 하면서 이를 기뻐했다고 한다. 그 결과 휴전 이후 1953년 10월 이승만은 미국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한반도를 둘러싼 긴장 속에서 현재까지도 지속되는 미국의 대(對)한국 안보보장을 얻는데 성공하였다.
1954년 8월 2일, 뉴욕의 한미협회 재단(American Korean Foundation)에서 연설하고 있는 이승만.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뉴욕 시민들에게 열렬한 환호속에 카 퍼레이드 환영을 받고 있다.

이승만은 교육이 최우선이라 생각하여 초등학교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전후 대대적인 학교 건립에 나섰다. 그리고 일제의 식민지정책에 따라 제한되어 있던 고등교육 기회[122]를 개방시켜 전 국민의 교육수준을 향상시켰다. 원래는 정부수립 직후부터 실시하려 했으나 전쟁으로 인해 차질이 생겼다가 1954년부터 본격적으로 재개하여 1959년에는 전국 7세 아동의 95.3%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문적 인재 육성을 위해 한국외국어대학교, 인하대학교 등 여러 대학교를 세우는 데 투자했다. 그 결과 광복 당시 80%에 육박했던 문맹률은 22%로 떨어졌고, 학교 수와 학생 수는 3 ~ 11배 이상으로 크게 늘었다. 광복 당시 초등학교 숫자는 2,800여개였고 전쟁 중 대거 파괴되어 전후에는 이보다 훨씬 적었으나 1960년에는 4,600여개로 늘어났다. 중학교도 광복 당시 불과 97개에서 1960년에는 1,000여개까지 늘어났고 고등학교도 1952년 당시 304개에서 1960년 640개로 늘어났다. 대학이나 전문학교 같은 고등교육기관도 광복 당시 19개에서 1960년에는 68개로 대폭 늘어났고 대학생 수는 10만명에 달했다.

이승만은 장기 집권을 위해 1954년 11월에는 초대 대통령에 한해 연임 제한을 철폐하는 사사오입 개헌을 일으켰다. 동시에 그는 국영화와 공영화, 정부통제 등 사회주의적 계획경제 요소들을 헌법에서 삭제하여 시장경제를 추진하였다.

1958년에 진보당 사건을 통해서 조봉암[123]을 상대로 사법 살인을 일으켰다.

당시 미국은 한국에 원조금을 지원하면서 필요한 물품은 일본으로부터 수입해서 쓰기를 바랐다. 일본에서는 물품을 생산하게 하고, 한국에는 원조 자금을 지원하여 그 돈으로 일본으로부터 물품들을 사서 쓰게하는 것이 미국의 동북아 경제 구상이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스스로 생산능력을 갖추는게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서 쓰는 대신 충주 비료공장문경 시멘트공장, 인천유리공장을 지으며 자체 생산을 시작했다.

시슬러 박사로부터 원자력 발전에 대한 얘기를 들은 이승만은 1956년 문교부에 원자력과를 신설하고 1958년에 원자력법을 제정하면서 원자력 발전소를 향한 연구를 시작했다. 1인당 6,000달러가 드는 미국 아르곤 국립 연구소 프로그램에도 150여명의 훈련생을 유학보냈는데 당시 한국의 1인당 GDP가 60달러에 불과했으니 얼마나 큰 투자였는지 알 수 있다. 1959년에는 한국 최초의 연구용 원자로도 만들었다. 이승만이 시슬러 박사에게 지금 시작하면 얼마나 걸릴지 묻자 시슬러는 20년 정도 걸릴거라고 대답했는데 실제로 우리나라는 20여년 후인 1978년에 한국 최초의 원자력 발전소 준공에 성공한다.#
나라 위한 팔십 평생 합심하여 또 모시자
4대 대선 당시 자유당 측 구호
못 믿겠다 구십 노인 합심하여 쉬게 하자
민주당 측 구호
1960년 3월, 4대 대선에서 이기붕이 출마한 부통령 선거에서 3.15 부정선거가 일어났다. 마산에서 시작된 부정선거 항의 시위는 부산, 대구를 거쳐 서울로 확산됐다. 시위에는 경찰이 투입되어 무차별 폭행과 연행이 일어났다. 마산 시위에 참여한 고등학생 김주열이 경찰의 최루탄을 눈에 맞고 사망했으며, 시신은 유기되었지만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면서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124]

이승만은 자유당 강경파에 의해 정보가 차단되어 정국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고, 부통령 선거에서 부정선거가 있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125] 이승만은 김주열 사건에 대해서 알게 된 후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왜 이런 일이 발생한건지 물어도 각료들은 제대로 말 해주지 않았다. 1960년 4월 12일자 국무회의록을 보면 각료들은 이승만에게 "불순분자들이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것 같다"[126], "야당들이 선동하고 있는 것 같다"[127], "학생들이 주동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128]는 식으로 보고를 했다.

부정선거에 관해 아주 낌새를 못 느낀 건 아닌지 이승만은 다음처럼 묻기도 했다.
(전략) 어린 아이들을 죽여서 물에 던져놓고 정당을 말하고 있을 수 없는 것이니 만큼 무슨 방법이 있어야 할 것인바 이승만이[129] 대통령을 내놓고 다시 자리를 마련하는 이외는 도리가 없다고 보는데 혹시 선거가 잘못되었다고 들은 일일이 없는가?
1960년 4월 12일 국무회의록
각료들의 답변을 들은 후 이승만은
가기(可期)이방, 할 일이 있어야 하지 지금 말들 하는 것을 들어서는 안정책이 못된다고 보며 이 대통령이 싫다고 한다면 여하히 할 것인가를 생각할 필요가 있는데 나로서는 지금 긴급히 또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사면하는 것이라고 생각 한다. 잘 연구하여 보라.
1960년 4월 12일 국무회의록
라고까지 말하며 만약 선거에 문제가 있었다면 자신이 사면(하야)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러나 주변에서 다들 이렇게 보고를 하니 이승만은 그 말을 믿었고 시민들을 향해 '야당에 의해 선동당한 국민들의 폭동, 공산당이 사주한 난동'# 이라는 다음과 같은 발표를 했다.
(전략)
지금 법을 다 폐지하고 난당의 행위로 여기저기서 싸움이 일어나고 사람의 생명을 살해하며 학교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을 선동하여 끌어내다가 혼동을 일으켜 위험한 자리를 이루게 되니 이것을 그냥 두고는 어떻게 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부득이 내가 대통령 명의를 가지고 민심을 안정시켜서 모든 사람들이 다 안도가 되도록 하여야하므로 불법행위를 일체 중지하고 법으로 조처할 것이니 만일 누구든지 불만한 일이나 억울한 일이 있으면 다 각각 그 지방에 법을 맡아보는 사람들에게 호소해서 법리적으로 행하게 만들어야 될 것이다.
(중략)
이 난동에는 뒤에 공산당이 있다는 혐의도 있어서 지금 조사 중인데 난동은 결국 공산당에 대해서 좋은 기회를 주게 할 뿐이니 모든 사람들은 이에 대해서 극히 조심해야 될 것이며 또 지방경찰은 각각 그 지방의 정돈을 지켜서 혼잡이 없게 만들어야 될 것이다.

4월 18일에는 고려대생들이 시위를 하다가 정치깡패들에게 습격받아 쓰러졌다. 결국 4월 19일에는 시위가 대규모로 확산되었고 분노가 폭발한 국민들은 친정부 언론사인 서울신문사를 불태우고 탑골공원의 이승만 동상을 파괴했다. 각계의 여론이 극도로 악화되고 교수들까지 참여해 시국선언을 발표하여 '부정선거 다시 하자'는 구호를 외쳤으며 주한 미국 대사관마저 재선거를 말했다. 시위대는 부정축재를 벌이던 이기붕의 집을 방화하였고, 경찰의 발포로 시위 기간 동안 180여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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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친 학생들을 위로하는 이승만 대통령

소식을 들은 이승만은 부상자들이 입원해 있는 병원을 찾아갔다. 이제서야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제대로 파악한 것이다. 실제 당시 촬영된 영상을 보면 이승만이 입원자들을 보며 울먹이는데 가까스로 울음을 참는 표정을 볼 수 있다.[130] 이런 것을 보면 돌아가는 상황을 정말로 제대로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131] 이승만은 병원에서 다친 학생들을 보며 "부정을 보고 일어서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지. 이 젊은 학생들은 참으로 장하다"고 말했다.[132]

이승만은 4월 26일에 시민대표단을 만났다. 그 중 한명이 이승만에게 "각하. 하야하셔야 합니다. 이게 국민이 원하는 것"이라고 말했고 이에 이승만은 "정말로 내가 하야하는 것을 국민이 원하느냐"고 물었다. 시민대표단은 하야해야한다고 다시한번 얘기했고 이승만은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하겠다"고 대답했다.[133] 그리고 그 직후 라디오로 하야하겠다는 대국민담화를 발표했다.
나는 해방 후 본국에 들어와서 우리 여러 애국 애족하는 동포들과 더불어 잘 지내왔으니 이제는 세상을 떠나도 한이 없으나 나는 무엇이든지 국민이 원하는 것만 알면 민의를 따라서 하고자 한 것이며 또 그렇게 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보고를 들으면 사랑하는 우리 청소년 학도들을 위시하여 우리 애국 애족하는 동포들이 내게 몇 가지 결심을 요구하고 있다하니 여기에 대해서 내가 아래 말하는 바를 할 것이며 한 가지 내가 부탁하고자 하는 바는 이북에서 우리를 침략하고 공산군이 호시탐탐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말도록 힘써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첫째는 국민이 원하면 대통령직을 사임할 것이며
둘째는 지난번 정부통령 선거를 많은 부정이 있었다고 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하였고
셋째는 선거로 있는 한 모든 불미스러운 것을 없애게 하기 위해서 이미 이기붕 의장이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가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넷째는 내가 이미 합의를 둔 것이지만 만일 국민이 원하면 내가 책임질 대안을 할 것이다.

이상은 이번 사태를 당해서 내가 굳게 결심한 바이니 나의 이 뜻을 사랑하는 모든 동포들이 양해해 주어서 이제부터는 다 각각 자기들의 맡은 바를 해나가며 다시 질서를 회복시키도록 모든 사람들이 다 힘써 주기를 내가 사랑하는 남녀애국동포들에게 간곡히 부탁하는 바이다.

이승만이 이를 낭독하는 육성이 담긴 영상.

이승만은 위와 같은 국민이 원하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는 담화를 발표하였는데 당시 국회에서 이 부분을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김선태 의원은 이 대통령의 말이 '국민이 원하니까' 사퇴를 한다는 것인지 '만약 국민이 원한다면' 사퇴를 하겠다는 것인지 모호하다고 지적했다. 일부 의원들은 대통령의 진의를 확인하는 절차가 추가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했고, 국회가 대통령의 하야를 확인하고 권한대행 체제로 국정이 운영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갑론을박 끝에 국회 시국대책위원회는 미리 준비해 둔 시국수습 대책에 대통령 하야 문제를 포함시켰다. 그리고 국회는 담화문이 발표된 그날 오후 3시 시국수습결의안을 만장일치로 가결함에 따라 다음 날 이승만이 국회에 제출한 사임서를 즉시 수리할 수 있었다. 부통령 선거가 부정선거였으니 책임은 대통령이 지는 게 당연한 일이며, 애초에 집권 여당과 측근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것이 이승만 자신이기 때문이다.[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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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장에 돌아와 시민들에게 손짓하는 이승만 대통령 '만수무강'의 벽보들을 이화장 문앞에 붙이는 대학생들
1960년 4월 28일 아침, 이승만은 경무대를 떠나 자신의 사저인 이화장으로 돌아갔고 시민들은 이를 환영했다.

5. 하와이 망명과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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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하와이 요양병원에서의 이승만 전 대통령 부부

이후 한 달 간 이화장에서 거주하면서 찾아오는 학생들에게 용돈이나 주며 지내다가 1960년 5월 29일 하와이로 출국했다.[135] 이승만은 자신이 과거 오랫동안 활동한 하와이에서 옛 동지들도 만나고 좀 쉬다가 귀국할 예정이었으나[136]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이었던 허정은 재입국을 불허했고, 그 이후 박정희 정권에서도 귀국을 계속 거절당했다.[137]

결국 1964년 6월 말 갑작스런 급성 위장 출혈[138]로 쓰러진 후 1965년 7월 19일 0시 35분 하와이 마우날라니 양로병원에서 향년 90세를 일기로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쳤다. 이때 남긴 마지막 기도유언은 이렇다.[139][140]
이제 저의 천명이 다하여 감에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셨던 사명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몸과 마음이 너무 늙어버렸습니다. 바라옵건대 우리 민족의 앞날에 주님의 은총과 축복이 함께 하시옵소서. 우리 민족을 오직 주님께 맡기고 가겠습니다. 우리 민족이 굳게 서서 국방에서나 경제에서나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승만의 마지막 기도
잃었던 나라의 독립을 다시 찾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들었는지 우리 국민은 알아야 하며 불행했던 과거사를 거울 삼아 다시는 어떤 종류의 것이든 노예의 멍에를 메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내가 우리 민족에게 주는 유언이다.
이승만의 유언
파일:Syngman Rhee's Funeral at Capital Hall, Seoul.jpg 파일:Syngman_Rhee's_Funeral_at_South_Gate_in_Central_Seoul.jpg
파일:Syngman_Rhee's_funeral_in_Seoul.jpg 파일:The Crowd of Syngman Rhee's Funeral.jpg

7월 21일 하와이 한인기독교회에서 영결식이 거행되었다. 이후 이승만의 유해는 전 주한 미군 사령관이자 친우였던 밴 플리트 장군이 마련한 특별기로 한국에 이송된 후 3군 의장대에 의해 운구되어 가족장으로 장례식[141]이 거행되었고, 7월 27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조사를 짓고 국무총리 정일권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을 낭독하게 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이승만 대통령 조사(弔詞)

「조국독립운동의 원훈이요, 초대 건국대통령이신 고 우남 이승만박사 영전에 정성껏 분향하고, 엄숙한 마음으로 삼가 조의를 드립니다. 돌아보건대 한마디로 끈어 '파란만장의 기구한 일생'이였습니다.

과연 역사를 헤치고 나타나, 자기 몸소 역사를 짓고 또 역사위에 숱한 교훈을 남기고 가신, 조국 근대화의 상징적 존재로서 박사께서는 이제 모든 영욕의 진세인연을 끈어버리고 영원한 고향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생전의 일동일정이 범인용부와 같지 아니하여, 실로 조국의 명암과 민족의 안위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었던 세기적 인물이었으므로, 박사의 최후조차 우리들에게 주는 충격이 이같이 심대한 것임을 외면할 길이 없습니다.

일찍이 대한제국의 국운이 기울어지는 것을 보고 용감히 뛰쳐나서 조국의 개화와 반제국주의 투쟁을 감행하던 날, 몸을 철쇄로 묶고 발길을 형극으로 가로막던 것은, 오히려 선구자만이 누릴 수 있는 영광의 특전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일제의 침략에 쫒겨 해외의 망명생활 30여 성상에, 문자 그대로 혹은 바람을 씹고 이슬위에 잠자면서 동분서주로 쉴날이 없었고, 또 혹은 섶위에 누워 쓸개를 씹으면서 조국광복을 맹세하고 원하던 것도, 그 또한 혁명아만이 맛볼수있는 명예로운 향연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침내 70노구로 광복된 조국에 돌아와 그나마 분단된 국토위에서 안으론 사상의 혼란과 밖으로는 국제의 알력속에서도 만난을 헤치고 새나라를 세워, 민족과 국가의 방향을 제시하여 민주한국독립사에 제1장을 장식한 것이야말로, 오직 건국인만이 기록할 수 있는 불후의 금문자였던 것입니다.

이같이 박사께서는 선구자로, 혁명아로, 건국인으로 다만 조국의 개화, 조국의 독립, 또 조국의 발전만을 위하여 온갖 노역을 즐거움으로 여겼고, 또 헌신의 성과를 스스로 거두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평생 견지하신 민족정기에 입각하여 항일반공의 뚜렷한 정치노선을 신조로 부동자세를 취해왔거니와, 그것은 어디까지나 박사의 국가적 경륜이였고, 또 그중에서도 평화선의 설정, 반공포로의 석방등은 세계를 놀라게 한 정치적 과단력의 역사적 발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집권 12년의 종말에 이르러 이미 세상이 다 아는 이른바 정치적 과오로 인하여 살아서 역사의 심판을 받았던 쓰라린 기록이야말로 박사의 현명을 어지럽게한 간신배들의 가증한 소치였을망정 구경에는 박사의 일생에 씻지못할 오점이 되였던 것을 통탄해 마지 못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이자리에서 다시한번 헤아려보면, 그것이 결코 박사의 민족을 위한 생애중에 어느 일부분일 망정 전체가 아닌것이요, 또 외부적인 실정 책임으로서 박사의 내면적인 애국정신을 말살하지는 못할것이라 생각하며,  또 일찍히 말씀하신 뭉치면 살고 헤치면 죽는다는 귀국일성은  오늘도 이 나라 국민들에게 들려주시는 최후의 유언과 같이 받아들여, 민족사활의 잠언을 삼으려는 것입니다.

어쨌던 박사께서는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세기적 비극의 주인공이였던 것을 헤아리면, 충심으로 뜨거운 눈물을 같이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만,  그보다는 조국의 헌정사에 최후의 십자가를 지고가시는 “어린양”의 존재가 되심으로써, 개인적으로는 한국의 위인이란 거룩한 명예를 되살리고, 민족적으로는 다시 이땅에 4.19나 5.16 같은 역사적 고민이 나타나지 않도록 보살피시어, 자주독립정신과 반공투쟁을 위한 선구자로서 길이 길잡이가 되여주시길 바라는 것입니다.

다만 여러가지 사정으로 말미암아 박사로 하여금 그토록 오매불망하시던 고국땅에서 임종하실 수 있는 최선의 기회를 드리지 못하고 이역의 쓸쓸한 해변에서 고독하게 최후를 마치게 한 것을 마음 아프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또 박사에 대한 영원한 경의로, 그 유택을 국립묘지에서 가장 길지를 택하여 유해를 안장해 드리고자 합니다.  생전에 손수 창군하시고 또 그들로서 공산침략을 격파하여 세계에 이름을 날렸던 바로 그 국군장병들의 영령들과 함께,  길이 이 나라의 수호신되셔서, 민족의 다난한 앞길을 열어주시는 힘이 되실 것을 믿고, 삼가 두 손을 모아 명복을 비는 동시에 유가족 위에 신의 가호가 같이 하시길 바라는 바입니다.」

재임 기간 및 정부 명칭은 대한민국 대통령 일람을 참조.


[1] 현재 서울역 앞 건너편에 있었던[2] 사진에서 왼쪽[3] 조선 마지막 왕인 순종과 겨우 1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순종은 3월 25일 생이라 순종이 태어난 지 1년 하고 하루 뒤에 태어난 것이다.[4] 조선의 왕가와 비교했을 때에는 익종(순조의 아들이자 헌종의 부친), 철종, 흥선대원군과 형제 뻘이였다. 3명 다 이승만의 34촌 형이며 이승만보다 익종이 66년, 철종이 44년, 흥선대원군이 54년 연장자다.[5] 무의공 이순신의 직계 후손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무의공 이순신의 방계 10대손이다. 둘 다 양녕대군의 둘째 서자 장평부정(長平副正) 이흔(李訢)의 후손은 맞지만 그의 아들 대에서 갈라졌다.[6] 김창은(金昌殷)의 딸이다.[7] 그러므로 출생지만 황해도이고 사실상 서울이 고향인 셈이다.[8] 실제 그는 칠순이 넘어 대통령이 된다.[9] 우남 이승만 연구 - 정병준, p. 100[10] 서재필이 창간한 독립신문은 2년 앞선 1896년 창간되었으나 주 3회 발간됐기 때문에 일간지는 아니었다. 독립신문이 일간으로 바뀐 시점은 1898년 7월로 매일신문보다 늦다.[11] 서정민, 구한말 이승만의 활동과 기독교[12] 당시 고종의 나이는 46세로 직무를 수행하는데 큰 문제는 없는 나이였다. 정작 이승만은 훗날 73세의 나이로 대통령이 됐다는 사실이 아이러니다. 그런데 김구와도 불과 1살 차이였고, 여운형은 10살 정도 젊었다. 이렇게 된 것이, 그 뒷 세대가 철들 때 쯤 대한제국이 국권을 잃었거나 아예 없어져버렸기 때문이다.[13] 이승만은 1912년 집필한 '청년 이승만 자서전'에서 배재학당을 다니던 중 서재필의 영향을 받아 일본의 아시아주의에 경도되었고 자신을 비롯한 배재학당 출신이 박영효계 친일파와 손잡은 것을 '불행한 연결'이라고 표현하며 독립협회 활동의 과오를 인정하였다. 이승만은 출옥한 1904년을 기점으로 일본관이 지일에서 반일로 바뀌었다.#[14] 이때 설치된 감옥 도서관의 보유 장서는 총 250권에 달했다고 한다.[15] 왼쪽부터 문경호 전도사, 한성감옥 간수장 이중진의 동생 이중혁, 이승만.[16] 아랫 줄 왼쪽 두번째가 이승만, 세번째가 신흥우.[17] 언론인 프레데릭 맥켄지(Fred A. McKenzie)의 저서 『The Tragedy of Korea』 (1908) 부록에서 발췌[a] 許政, 《雩南 李承晩》, 1970, 太極出版社, p. 62-74[19] 윤병구 또한 이승만과 마찬가지로 독립운동가이며 건국훈장 독립장도 받았다.[20] 許政, 《雩南 李承晩》, 1970, 太極出版社, p. 99-100[21] 당시 프린스턴 총장이 훗날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행정학자로도 유명한 우드로 윌슨이었다.[22] 그의 박사 논문은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이다. 인터넷에서 PDF로 다운 받아 볼 수 있다. 이승만의 박사 학위 논문. 한편 한국인 최초의 박사학위 취득자는 서재필(세균학)이며, 이승만(철학)은 인문학 분야에서 최초이다. 또한 하버드대학 동문으로 보면, 이승만은 한국인 최초의 박사학위 취득자이다.[23] 아들을 미국으로 데려오기 전, 이승만은 아들의 도미에 반대하던 첫째 아내와 크게 다투었다. 이승만은 한성감옥 수감 당시만 해도 아내와 사이가 좋았으나, 이때의 다툼과 (이승만 자신의 책임이 컸던) 아들의 사망으로 인해 아내와의 사이가 소원해지게 된다.[24] 참고로 이후 이 사건을 담당한 미국인 변호사 수임료가 4천 달러였다.[25] 해당 사진은 《Daily Rocky Mountain News》 1908년 7월 13일자 7면에 기사에 실린 사진이다.[26] 李元淳, 《人間 李承晩》, 1965, 新太陽社, p. 134-136[27] 건물 1층은 교회와 예배당으로, 2층은 교실, 3층은 기숙사로 사용되었다.[28] Young-Ick Lew, 《Life and Dream of Syngman Rhee》, 中央日報社, 1996, p. 134-141[A] 이승만은 광복 전까지 일본은 물론이고 중국이나 미국으로도 귀화하지 않고 무국적자로 살았다. 때문에 미국에서 다른나라로 나갈 때 별도로 미국 국무부에 요청해야하는 번거로운 절차가 필요했으나 그는 이를 감수했다.[30] 상해임시정부 첫 국무회의에서 국무총리 이동휘는 이 위임통치 청원 사건을 가지고 이승만을 비판했다. 그러나 이 위임통치안은 안창호의 대한인국민회와도 협의를 거친 것이었고 이승만 뿐만 아니라 안창호, 김규식 등 다른 독립운동가들도 비슷하게 가지고 있던 구상이었다.[31] 영상 중간에 행사를 주도하는 이승만이 어딘가를 향해 소리치는 장면이 찍혔다.[32] 본명 우복자.[33] 본명 김혜숙.[34] 임시대한공화정부, 대한국민회의, 대한민간정부, 고려임시정부, 신한민국임시정부, 조선민국임시정부, 대한민국임시정부, 한성정부[35] 한자로 '대한독립만세'라고 적혀있다.[36] 상해임시정부는 국무총리 제도이고 한성정부는 집정관총재 제도이며 어느 정부에나 대통령 직명이 없으므로 각하가 대통령이 아닙니다...(이하 생략)... 헌법을 개정하지 않고 대통령 행세를 하시면 이는 헌법 위반이며, 정부를 통일하는 신조를 배반하는 것이니 대통령 행세를 하지 마시오. - 1919년 8월 25일 안창호의 서신 -[37] 만일 우리끼리 떠들어서 행동이 일치하지 못하다는 소문이 세상에 전파되면 독립 운동에 큰 방해가 있을 것이며 그 책임이 당신들에게 돌아갈 것이니 언급하지 마시오. - 1919년 8월 26일 이승만의 답신 -[38] 실제로 집정관총재는 한성정부의 수장이었고 국무총리는 그 밑에 따로 있었다.[39] 작성은 당시 구미위원회 법률고문이었던 존 스태거스 변호사가 하였고 이 문서를 비서 임병직이 주미 일본대사관을 직접 방문하여 수교(手交)하였다.[40] 林炳稷, 《臨政에서 印度까지 : 林炳稷外交回顧錄》, 1964, 女苑社, p. 137-320[41] 기독교 목사[42] 기독교 목사[43] 윌리엄 보드윅은 이승만의 친구이며 4.19 혁명 후 하와이로 망명한 이승만과 이웃사촌으로 교류하였고, 그의 영결식장에 참석해 애도를 표하기도 했다.#[a] 許政, 《雩南 李承晩》, 太極出版社, 1970, p. 155-160[45] David P. Fields 외 공편, 《Log Book : 이승만 일기》, 2015, 대한민국역사박물관, p. 111[46] Mayborne, Etta Irene (1857~1936)[47] Fred A. Dolph (1875~1926)[a] [a] [50] 참의부 제2중대장 최석순동명이인이다.[51] 위원 중 곽헌(본명은 곽중규), 채원개, 김현구는 광복과 대한민국 건국 때까지 생존해 있었으며 특히 채원개, 김현구는 4.19 혁명장면 내각은 물론 박정희 정부 때까지 살아있었다.[52] 이덕희 외. 《이승만과 하와이 한인사회》, 2012, 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 p. 164[53] 전날 저녁 식당에서 우연히 합석한 프란체스카는 이 신문을 스크랩해 그에게 전하면서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됐다.[54] 이 때 제네바에는 이승만처럼 타 식민 지배에서 독립하려는 여러 민족의 독립 운동가들이 집결해 있는 상태였다. 이승만과 그 전날 인터뷰한 알리 엘 가이아티는 터키 출신의 저명한 학자였고 이들은 중동에서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의 길을 모색 중이었다. 그래서 아마 약소국대변인으로 온 이승만과도 동병상련인 처지라 여러모로 호의를 가지고 기사를 실어줬을 가능성이 크다.[a] 許政, 《雩南 李承晩》, 太極出版社, 1970, p. 165-170[a] [57] 앨저 히스의 답신 전문 "잘 알겠습니다. 그러나 만일 이 단계에서 미국이 한국의 독립 정부를 승인한다면 북아시아에 커다란 이해 관계를 가진 소련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이며, 소련이 아직 일본과 전쟁 상태에 있지 않는한 그 지역에서의 어떤 정치적인 문제의 계기는 시기 상조라고 생각합니다." 이 답변을 받은 이승만은 막중한 권력을 가진 젊은이가 미국을 위해서보다 소련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b] 許政, 《雩南 李承晩》, 太極出版社, 1970, p. 177-180[59] 이승만은 맨 뒷줄 중앙에 서있고 같은 줄 왼쪽 끝에 서재필, 그리고 오른 쪽에서 세 번째로 호머 헐버트 선교사가 보인다. 앞줄 왼쪽의 첫 번째 여성은 중국 선교사 핏치 부인이고, 한 사람 건너가 프란체스카 여사이다.[60] 왼쪽 끝부터 이승만, 애쉬랜드 지회장 메이어스 부인, 변호사 스태거스, 아메리칸 대학교 총장 더글라스, 호머 헐버트 선교사, INS 통신사 기자 윌리엄즈.[61] 후에 이승만의 정치 자문가가 된다[b] [b] [64] 구미위원부의 미국 명칭.[65] 왓슨 소장의 답신 전문 "친애하는 이 박사! 대통령의 지시에 의하여 나는 귀하가 한국에 관한 제문제를 논의하고 그것과 더불어 조소앙 씨로부터의 전문 사본을 동봉한 1943년 5월 15일자 귀하의 서한을 받았음을 알려 드립니다. 나는 귀하의 서한과 동봉한 전문이 세밀한 주의를 받았다는 것을 표명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ㅡ 에드윈 M. 왓슨[b] [67] 일제 말기 식민지 조선에 있던 여운형 또한 이 미국의 소리를 통해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황소식을 듣고 있었다.[68] 유한양행 창업주[69] 후에 서울특별시장이 된다.[70] 후에 내무부 장관이 된다.[71] 정병준에 따르면 이들은 30대 중반이었기에 징집대상이 아니었고 연령도 많았지만 한국독립을 위한 방편으로 OSS를 선택했다고 한다.[72] 참고로 이때 OSS 소속으로 작전을 준비하던 과정은 이후 여러 대중 매체에서 묘사된다. 소설 태백산맥의 주인공인 김범우도 OSS 훈련을 이수한 먼치킨으로 그려지며, 드라마 서울 1945의 주인공인 이동우 또한 2차세계대전 막바지에 OSS에 들어가 카탈리나 섬에서 훈련 받는 것으로 묘사된다.[73] #[74] 물론 소련도 독자적으로 만주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미국입장에서는 일본과의 전쟁에서 출혈이 컸기 때문에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 소련을 다그친 것.[75] 특히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후임인 트루먼과 달리, 그다지 소련을 견제하지 않았다.[76] 許政, 《雩南 李承晩》, 太極出版社, 1970, p. 201-202[77] 다큐멘터리 건국투쟁사 (1948) - 안경호프로덕슌[78] 환국 다음 날인 1945년 10월 17일 오후 7시 30분부터 경성중앙방송국에서 진행한 라디오 연설[A] [80] 실제로 반탁운동이 일어나자 소련은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문 전문을 공개하는 등 자신에 대한 오해를 해명하려고 했다. 신탁통치 오보사건 문건 참조.[81] 실제론 미군정의 미소공동위원회 개최에 이승만이 반대했기 때문에 물러난 것이다.[82] 돌베어는 실제로 광산 전문가였다[83] 소련은 신탁통치와 모스크바 선언을 지지하는 정당만 새 정부에 참여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런 정당은 공산당 하나뿐이었기 때문에 남쪽의 비공산세력을 전부 배제하겠다는 뜻밖에 되지 않았다.[84] 미국 외교문서 FRUS 1946[85] 과도입법의원의 절반은 간접 선거로 선출한 민선의원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미군정에서 임명하는 관선의원이었다.[86] 조한성, 해방 후 3년, 생각정원, 2015, 213~214쪽.[87] 로버트 올리버의 회고록[88] 김일성은 정확하겐 36살이었다.[89] 제주 4.3 사건은 반란 진압과정에서 무고한 양민들이 희생되었다는 점에서 분명 안타까운 사건이기는 하나 이러한 역사적 맥락은 알고 있어야 한다. 단순히 정부에서 갑자기 제주도로 내려가 아무 이유없이 사람들을 학살했다는 식으로 막연하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90] 지금의 성북구 돈암동, 성북동종로구 창신동, 숭인동. 따라서 종로구 창신-숭인동 또한 종로구에 1970년대에 가서야 편입되기는 했지만 대통령을 3번 배출(이승만, 이명박, 노무현)한 지역구이다.[91] 당시 그 누구도 동대문갑구에 출마하여 이승만과 겨루려 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이승만의 무투표 당선이 유력했는데, 느닷없이 최능진이 출마 선언하여 도전자가 생긴 것이다.[92] 정확히 말하자면, 최능진의 선거등록 문서를 서북청년단이 서류를 강탈하고 등록 자체를 무효화시켜 버리도록 온갖 공작을 벌인 것이다.[93] 당시 제헌국회의원이었던 허정의 회고록[94] 주요 지도자들은 월북하거나 암살 혹은 김구처럼 불참하였기에 대중 지지를 얻을 인물은 이승만밖에 없어 이승만의 취임이 주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따라서 의견을 들어줄 수밖에 없던 것.[95] 00:20 각계 인사들 중앙청으로
02:15 개회
03:01 이승만 대통령 연설
09:48 맥아더 장군 연설
16:28 하지 장군 연설
20:56 유엔 한국위원단 의장 연설
23:52 주한 미 대사 연설
24:33 폐회
24:45 참석한 내외 귀빈들 퇴장
[96] "한국이 일본의 패망으로 해방을 맞았을 때 국내외를 막론하고 최고의 정치적 명망가는 이승만이었다. 구한말 개혁세력의 일원이었고, 상해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그가 항일구국의 오랜 망명생활에서 돌아왔을 때, 정치성향의 좌우를 막론하고 누구도 그의 명망을 따를 수 있는 지도자는 없었다. 그의 명망은 해방 직후 여운형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조선인민공화국이나 그의 적대 세력이었던 한민당이 모두 아직 귀국도 하지 않은 그를 지도자로 추대할 정도였다." - "제 1공화국의 선거제도와 선거" 황수익(서울대 정치학과 교수)[97] 그나마 윤치영도 원래 독립운동가였다가 일제의 폭압이 극에 달해 친일로 변절하는 항일인사들이 속출했던 1930년대 말에 변절하였던 케이스다.[98] 북한의 토지개혁은 사회주의 사상에 입각한 무상몰수 무상분배였다.[99] 남한의 농지개혁 방식은 농지만 대상으로 한 유상매수 유상분배였다. 물론 당시 산업시설이라는 것이 드물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토지는 농지였다.[100] 정치적으로는 반대 정파인 한국민주당을 약화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한민당의 중심 세력이 지주들이었기 때문.[101] 물론 이 과정에서 희생당한 억울한 민간인들도 있다는 점은 이승만의 대표적인 과오로 남아있다.[102] 김구 역시 공산주의를 혐오하여 친일 전력이 있는 인물들로부터 협조를 받았다. 김구가 사망 직전까지 머물던 경교장도 친일 재벌 최창학이 헌납한 건물이었다. 거기다 친일파는 해외 등지를 떠돌아다닌 독립운동가와 달리 국내에 완전히 자리잡았기에 한국의 정치, 행정, 경제 등 국내사정 전반에 정통했으며 적은 사례지만 독립운동도 지원했으며 정부에 자금 후원도 가능할 정도로 재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103] 더글러스 맥아더가 뿌린 '맥아더 포고령'을 보면 잘 알 수 있는데, 대놓고 현재의 관청을 통해라고 명시했다. 미국이 들어오기 전에 어떤 놈들이 관청을 장악했는지 아는 사람들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다.[104] 이는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로 군국주의 체제의 버팀목이었던 우익 정치인과 고위 관료, 군인들(그리고 이들의 친인척과 후손들) 상당수가 1952년 공직추방령 해제 이후에 그대로 복귀하였고 미국도 공산주의 타도를 위해 아군이든 적군이든 가리지 않는다는 실용주의적 포용 하에 이것을 묵인하였다. 미국이 친일파를 포용한 것도 이와 연관성이 있다고 봐야 한다. 이들은 자유민주당요미우리 신문을 중심으로 결집해서 다시 일본 사회의 주류가 되었으며, 현재 문제가 되는 일본 사회의 우경화와 침략 행위 미화도 여기에서 기원한 것이다.[105] 김삼웅, 독부 이승만 평전, 책보세, 2012, 213~216쪽.[106]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1949년 당시 남한의 병력은 10만 명까지 증강했는데, 병력의 규모만 따지자면, 북한이 1950년 초나 되어야 다다를 수 있던 병력의 규모였다. 출처. 브루스 커밍스, 조행복(역),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현실문화, 2017, p.34~36[107] 존 포스터 덜레스가 총애한 기자 중 한 사람인 윌리엄 매슈스는 "이승만은 북쪽 땅으로 쳐들어가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며칠 만에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우리(미국)의 도움을 받아 그럴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라고 주장하였다.[108] 당시 이승만은 미국 육군성 장관 로얄과 주한미국대사 무초와의 대담에서 육군을 증편하고 무기와 장비로 무장시켜 짧은 시일 안에 북진을 실행하고 싶다고 언급했다. 또한 이승만은 “UN이 한국을 승인했기 때문에 한국이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는 것은 합법적이며 기다려서만은 얻을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한국전쟁(박태균 저) p.146)[109]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tvh&oid=052&aid=0000129278#[110] 무초의 회고록[111] ship ten day supply of certain items of ammunition at once Pusan for Korean Army[112] 이승만이 이 때 맥아더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은 교차검증으로 일치하는 사실인데 그 뒤는 기록이 좀 갈린다. 이승만의 아내인 프란체스카의 당시 일기에는 맥아더에게 저런 얘기를 한걸로 나오고, 무초 대사의 기록에는 이승만이 맥아더와 직접 통화는 하지 못하고 다시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 이런저런 무기를 빨리 지원하라고 말했다고 나온다. 이승만이 맥아더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부관과 통화한 뒤 끊고 무초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는데 그걸 옆에 있던 프란체스카는 미처 모르고 계속 맥아더와 통화한걸로 착각했을 수도 있다.[113] 실제로는 이때 북한군이 거기까지 오지 않았으나 이승만을 빨리 피신시키려고 의도로 허위보고를 한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114] Acting PriMin visited me 7 a. m. Confirmed President had left at 3 a. m. heading for Chinhae and Cabinet at 7 a. m. for south both travelling by special trains.[115] 이 부분을 두고 이승만이 서울을 버리고 몰래 도망갔다고 비난하거나 런승만이라며 조롱하기도 한다. 물론 이승만이 피난을 갈 때 제대로 국회에 알리지 못하고 간 것은 잘못한 점이기는 하지만 그 이전에 각료들의 여러차례의 피난 권유가 있었음에도 27일 새벽까지 버티다가 마지막 순간에 피난을 간 것을 보면 그가 악의를 갖고 서울을 버리고 도망갔다고 하기는 힘들다. 만약 그랬다면 전날인 26일에 진작에 갔지 굳이 27일 새벽까지 버텼을 이유가 없고, 후술하듯이 대구까지 갔다가 굳이 다시 서울로 돌아가려고 했던 것도 설명이 안된다.[116] 당시 다리 위에는 민간인이 있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며, 민간인 수백명이 죽었다는 기존의 설 또한 근거가 빈약하다. 사망자 대부분은 다리를 건너던 경찰들이었다.[117] 이승만은 이러한 방식으로 미국을 압박하여 신생 약소국이었던 대한민국이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을 협박하는 아이러니한 사태가 이승만 임기 때 자주 벌어졌다. 오늘날 북한이 종종 쓰는 이 벼랑 끝 전술은 사실 이승만이 원조였던 셈.[118] 許政, 《雩南 李承晩》, 太極出版社, 1970, p. 342[119] 결국 통일도 못하고 아무것도 달라진게 없는, 중공군이 코앞까지 진주하여 오히려 전쟁 이전보다 더 악화된 상태에서 상호방위 조약과 같은 미국의 강력한 보장이 없는한 어차피 또다시 제2의 6.25가 터질 것이라고 그는 내다보았고, 만약 미국이 이대로 한국을 방치하여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싸우고 죽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그의 음성과 어조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120] 한국의 운명을 방관하여 소련에 내어주면 유엔의 권위와 위신은 과거 국제연맹처럼 유명무실해질 것이고, 이는 1882년 조미 조약을 업신여기며 조선을 일본에 넘겨줌으로 그 다음은 만주, 중국까지 손아귀에 넣은 일본의 칼날이 결국 미국 자신에게 향했던 것처럼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121] 미국측에선 이승만의 배가 CIA관할인 저도로 다가와서 쐈다고 주장했으나 이승만은 미국측이 본인인걸 알고도 쐈다고 주장했다.[122] 일본 본토와 식민지 조선의 학제부터가 차등이 있었으며, 이 때문인지 광복과 정부수립 과정에서 국민의 교육열은 가히 폭발적이었다.[123] 이승만이 농지개혁을 위해 자신과 반대되는 노선의 인물이었음에도 초대 농림부 장관에 임명한 사람이었다.[124] 마산 경찰서는 제1차 시위가 일어나자 즉각 빨갱이 조작에 착수했는데, 국무회의는 4월 13일 오제도 검사, 조인구 치안국장, 하갑청 육군특무부대장으로 하여금 대공3부 합동수사위원회를 차리도록 결의했다. 마산사건 적색분자 색출의 능률화가 목적이었는데, 빨갱이라고 조작하기 위해 기구를 만든 것이다.#[125] 당시 이승만의 경쟁 후보였던 조병옥이 미국에서 수술 후 사망하는 바람에 대통령 선거는 이미 이승만의 당선이 확정적이었다. 반대로 부통령 선거는 부정선거 없이는 이기붕이 당선되는 건 사실상 불가능이었다.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부통령 선거에 저리 목숨을 걸어야 했나 싶지만 이승만의 나이는 80이 훌쩍 넘었고, 이승만의 사망 시 권력은 부통령에 승계되기 때문에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확정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당 입장에서는 부통령 선거에 목숨을 걸어야 했다. 애초에 4대 대선에서 자유당의 목적은 이미 노쇠할 대로 노쇠한 이승만은 꼭두각시로 두고 이기붕을 권좌에 앉히는 게 목적이었다.[126] 최재유 문교부 장관[127] 홍진기 내무부 장관[128] 김정렬 국방부 장관[129] 자기자신을 말함[130] 위 영상 1분 24초부터[131] 이것은 모든 독재정권에서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80대 중반의 고령인 이승만은 인의 장벽에 둘러싸여 있었고, 이게 하루이틀도 아니고 당시 이미 2-3년은 지속되는 현상이었다.[132] 김정렬 당시 국방장관 회고록 "항공의 경종"[133] 당시 시민대표 중 한명이었던 설송웅[142]의 증언[134] 그러나 당시 하야를 눈 앞에 두고 이승만은 완강히 하야를 거부했다는 말이 있다. 이는 고령에 따른 정신적 기복으로 보인다.[135] 망명은 망명 신청자가 타국에 신청해서 그 국가가 승인하면 이루어진다. 이승만은 원래 망명이 아니라 두세달 정도 있다가 돌아올 생각으로 갔다.[136] 이웅희 당시 동아일보 기자가 취재한 바에 의하면 이승만은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방한할 때 본인이 국내에 있으면 시끄러워질 거라서 잠시 출국한다는 식으로 말했었다 한다. 이를 두고 이범석은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기 전에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을 초청했는데 막상 하야한 상황에서 아이젠하워가 방한할 때 국내에 있으면 아이젠하워가 이승만을 만나는 문제로 곤란을 겪을 것 같아서 미리 미국이 손을 쓰거라 해석했다고 한다.[137] 그런데 김종필 회고록에 의하면 박정희 정부는 이승만이 원한다면 귀국 의사를 수용하려고 했으나 그의 주치의가 비행기에 타는 순간 그 자리에서 사망한다고 만류하여 어쩔 수 없이 귀국을 거절해야 했고 이승만도 귀국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고 밝혔다.[138] 토혈 증세 및 의식불명 상태에 빠져 곡기를 못 하고 호스로 혈을 제거해야만 했다. 출처는 책 "이승만은 하와이 타향에서 이렇게 죽어갔다".[139] 유언을 남길 무렵에는 영어를 한 마디도 사용하지 못했다고 한다.[140] 신약성경 갈라디아서 5장 1절을 인용하였다[141] 말이 가족장이지 시신운구부터 군부대가 한거 자체가 거의 국민장 수준이고 구경온 인파도 국민장 수준이 된다. 5년뒤 영친왕 서거때도 재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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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이후 국회의원이 되며 설민석의 아버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