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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18 02:23:20

더럼 W. 스티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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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더럼 화이트 스티븐스
Durham White Stevens[1] | 須知芬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DurhamWhiteStevens.jpg
출생 1851년 2월 1일
미국 워싱턴 D.C.
사망 1908년 3월 25일 (향년 57세)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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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외교관
학력 오벌린 칼리지 (졸업)
컬럼비안 대학교 (법학 / 졸업)
하워드 대학교 (졸업)
가족 아버지 E. L. 스티븐스
누나, 여동생
경력 대한제국 외부 고문
주일미국공사관 서기관
수상 훈3등 욱일중수장
훈2등 서보장
훈2등 욱일중광장
훈1등 서보장

1. 소개2. 생애
2.1. 생애 초반2.2. 일본 근무2.3. 친일 행적의 시작2.4. 제1차 한일협약대한제국 외교 고문2.5. 을사조약 이후2.6. 폭행피해2.7. 총격으로 인한 사망
3. 저격 과정의 이점들

[clearfix]

1. 소개

더럼 W.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은 미국의 정치가이자 외교관이다.

일본에서 외무성 고문으로 활동하던 중에 대한제국으로 파견되어 '수지분(須知芬)'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대한제국 외교 고문을 지냈고, 미국으로 돌아와서도 친일파로서 미국 외교가에서 일본이 을사 조약을 통해 대한제국의 통감 정치를 지지하고 일본의 한국 지배를 찬양하고 한인들에게 이를 강요하여 한인들의 공분을 샀다. 1908년 샌프란시스코 기차역에서 재미(在美) 한국인 교포였던 전명운, 장인환의 암살계획 및 저격으로 피살되었다.

한국에서는 일본의 한일합방을 지지한 반한(反韓) 성향의 친일 미국인으로 두고두고 비판받고 평생까임권을 얻으며 공공의 적 취급받는 인물. 일본 제국에서는 사후 훈장을 추서하는 등 자신들의 한반도 병합을 편들어준 그를 후하게 대접했다.

2. 생애

2.1. 생애 초반

1851년 2월 1일 미국 워싱턴 DC에서 노예제 반대론자였던 E. L. 스티븐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19세 때 오하이오오벌린 칼리지(Oberlin College)를 졸업하고, 워싱턴 DC의 컬럼비안 대학교(현 조지 워싱턴 대학교)[2] 법리과와 하워드 대학교에서 공부한 후 변호사가 되었다.

2.2. 일본 근무

대학 졸업 후 미국 국무부에 외교관으로 입사하였고, 1873년 일본으로 건너가 주일(駐日) 미국 공사관 서기로 파견 근무를 하게 된 것을 계기로 일본과 인연을 맺는다. 평소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을 구사할 정도로 어학을 좋아했던 스티븐스는 기꺼이 일본행 배편에 올랐다. 일본에서 스티븐스를 맞이한 상관은 존 빙엄(John Bingham) 주일 미국 공사였다.[3] 기존 미국 공사들과 달리, 빙엄은 일본 문화를 존중하는 사람이었으며 일본이 서구 열강과 맺은 여러 불평등 조약을 최대한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 빙엄 공사는 스티븐스의 아버지와 친구이자 오벌린 칼리지 동문이었으며, 역시 노예제 반대론자이기도 했기에 친구의 아들인 스티븐스를 꽤 총애했다. 덕택에 스티븐스는 빙엄이 부재중이던 1878년부터 1879년까지 대리공사(chargé d'affaires ad interim)를 맡기도 했다. 1883년 7월까지 일본에서 근무한 뒤 미국에 돌아와 있던 스티븐스는, 이후 빙엄의 소개로 미국 워싱턴에 있는 일본 외무성의 영어 전문 촉탁으로 임명되었다. 이 때부터 일제의 외교책을 위임받게 된다.

2.3. 친일 행적의 시작

1884년에는 일본 외무성에서 근무하였으며, 동년부터 1885년까지 전권대사 이노우에 가오루를 따라 처음으로 조선에 가서 한성조약의 조인을 도왔다. 이때의 공로로 메이지 덴노로부터 훈3등 욱일중수장을 수여받았다.

훈장을 받은 뒤부터 스티븐스는 더욱 노골적으로 친일 행보를 보이기 시작하는데, 일본이 해외 열강과 맺은 불평등 조약을 개선하고, 멕시코와의 수호통상조약에서 일본이 독립국으로서의 지위와 권한을 온전히 보장받을 수 있도록 공을 세우기도 했다.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미국 《노스아메리칸 리뷰(North American Review)》 지에 '전근대적인' 청나라를 비난하고 '근대화된' 일본을 옹호하는 내용의 칼럼을 싣는 등 국제 무대에서 일본의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포장해주는 데 일조했으며, 이때의 공을 인정받아 일본 황실로부터 훈2등 서보장을 수여받았다.

1901년부터 1902년에는 하와이[4]에 건너가 일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데 앞장섰으며, 이로 인해 훈2등 욱일중광장과 훈1등 서보장을 연이어 수여받았다.

2.4. 제1차 한일협약대한제국 외교 고문

파일:The Archive of Korean Histoy.jpg
외교고문 재임 당시, 사인교를 타고 출근하는 스티븐스.

이후 스티븐스는 일본의 외교가 이노우에 가오루와 동행하여 대한제국으로 건너가서, 한국 이름 '수지분(須知芬)' 이라는 이름하에 대한 제국에서 일본을 대변하는 역할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2. 대한 정부는 대일본 정부가 추천하는 외국인 한명을 외무 고문으로 하여 외부에 용빙하고, 외교에 관한 요무는 일체 그 의견을 물어 실시할 것
제1차 한일협약 중에서
1904년 제1차 한일협약으로 일본은 대한 제국에 1명의 서양인 외교 고문과 1명의 일본인 재정 고문을 둘 것을 강제하였다. 당연히 서양인 외교 고문은 스티븐스를 의미하는 것이었고[5], 고종으로부터 대한제국 외부 고문관 자리를 얻어낸다. 이 당시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이듬해 일본이 승리를 거두게 되면서 스티븐스는 을사조약 체결과 한일병합의 진로를 트게 되는 소통자 역할을 하게 된다.

외무 고문으로서 스티븐스는 대한제국 백성들의 하와이 이민을 방해하는 한편,[6] 미국 언론을 대상으로 일본에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하고 반일 정서를 진정시키는 등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2.5. 을사조약 이후

조선이라는 나라는 일본의 도움 없이는 스스로 살아가기가 어려운 나라다. 그러므로 조선과 일본 간의 조약 체결은 정당한 것이며 이를 통해서 조선은 일본의 도움을 받는 혜택을 얻었다.
- 더럼 W. 스티븐스의 친일 발언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이후, 이토 히로부미의 설득에 따라 스티븐스는 미국 외교가와 정가(政家)에서 일본에 대한 지지 발언과 찬양을 본격화하게 된다.

을사조약 체결 이후인 1906년 초, 스티븐스는 기우치 주시로(木内 重四郎, 1866-1925) 통감부 농상공무총장과 '한국이 언제 일본에 병탄될 것이냐'를 두고 내기를 한다. 기우치는 3년 안에 병탄될 것으로 보았고, 스티븐스는 5년은 걸릴 것으로 내다보았다. 결국 경술국치가 1910년 8월 이루어지면서 좀더 시기를 근사하게 맞춘 스티븐스가 내기에서 이기긴 했고, 내깃돈도 그의 차지가 되어야 할 터였다. 그러나...

2.6. 폭행피해

1908년 3월, 한국일본에서 벌인 외교 활동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온 스티븐스는 뉴저지 주 애틀랜틱시티에 있던 누이 소유의 전원주택에서 휴가를 보내기로 했다. 그는 미국의 외교가에서 일본의 한국 침탈과 을사조약 체결을 강력히 지지하는 의사를 밝혔으며,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이 대한제국을 지배한 것은 당연한 결과로 일본은 헐벗고 굶주려 사는 대한제국을 발전시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으며 일본이야말로 고마운 존재라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미국에 도착해 《샌프란시스코 콜(San Francisco Call)》 지와 21일 가진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미국이 필리핀에서 필리핀인을 위해서 하는 것과 같은 일을 일본은 대한제국에서 한인을 위해서 하고 있는 중이며,[7] 단지 당면한 상이한 조건들에 맞게 대처하여 방법만 수정할 뿐입니다. 일부 계층은 새로운 질서를 결코 받아들이지 않겠지만, 진짜 나라의 근간을 이루는 군중의 무리는 일본인을 친구로 여기기 시작하였습니다.
(Japan is doing in Korea and for the Koreans what the United States in doing in the Philippines for the Filipinos, modifying its methods only to suit the somewhat different conditions with which it has to deal. There are certain classes in Korea that never will be reconciled to the new order, but the mass of the people, the real backbone of the country, are already beginning to regard the Japanese as good friends.)

같은 날 그는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San Francisco Chronicle)》 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관료들은 그렇지 않은 반면에 농민들은 일본을 환영하였으며, 그런 관료들조차도 자기 나라의 유일한 희망은 옛 제도의 개혁에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The peasants have welcomed the Japanese, while the official class has not, even the officials are beginning to see that the only hope for the country lies in a reorganization of the old institutions.)

23일 《내슈아 텔레그래프》 지는 스티븐스의 당시 발언 중 다음과 같은 내용도 함께 실었다.
한인들은 일본에 의한 보호라는 큰 혜택을 누려 왔으며, 일본의 보호를 더욱 호의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The Korean people have been greatly benefited by Japanese protection and that they are beginning to look more favorably upon it.)

《샌프란시스코 콜》의 보도 내용은 재미(在美) 한국인 커뮤니티에도 전해졌다. 감리교 전도사 양주삼(梁柱三)[8]이 전해준 기사 내용은 이학현(李鶴鉉)[9]에 의해 곧 한국어로 번역되어 동포 사회를 격분시켰다. 이들은 한국 정부를 위해 일했다는 미국인 외교관이 대놓고 일본의 침략을 옹호했다는 사실에 배신감과 분노를 느꼈다. 대동보국회와 공립협회에서는 논의 끝에 대표단을 꾸려, 스티븐스를 직접 찾아가 망언을 취소하라고 요청하기로 결정했다. 1908년 3월 22일, 최정익(崔正益), 문양목(文讓穆), 정재관, 이학현 4인은 스티븐스가 묵고 있던 샌프란시스코 페어몬트(Fairmont) 호텔을 찾았다.[10] 영어가 유창했던 이학현과 스티븐스 사이에서 대화가 오갔다. 이학현은 동년 1월에 있었던 13도 창의군의 의거에 대한 스티븐스의 의견을 물으며, 기사를 정정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스티븐스는 일본이 대한제국과 백성들을 잘 먹고 잘 살도록 돕겠다는데 고마워하기는커녕 왜 일본한테 화살을 돌리느냐는 주장을 고수했다.
"대한제국은 황제가 어리석어 생각이 어둡고, 정부 관리들은 백성을 학대하여 재산을 갈취하므로 백성의 원망이 심하오.[11] 그리고 백성은 어리석어 독립할 자격이 없으니, 일본의 보호가 아니면 조선은 러시아에게 먹힐 것이오."

이학현은 화를 억누르며 질문을 이어갔다.
이: 《샌프란시스코 콜》에서 귀하가 했다고 보도된 발언은 귀하의 실제 발언이 맞소? (Did you indeed make the statements attributed to you in San Francisco Call?)
스티븐스: 그렇소. (Yes.)
이: 한국인이 일본인에 의해 학살당하고 있지 않소? (Aren't the Japanese killing off the Koreans?)
스티븐스: 그렇지 않소. (No.)
이: 대한제국 정부 관료들이 모조리 제거되지 않았소? (Haven't all Korean officials been eliminated?)[12]
스티븐스: 그렇지 않소. 귀하는 귀하 나라를 오래 떠나 있어선지 자국 정부 상황을 잘 모르는 것 같군요. (No, you've probably been away from your country too long to know the exact condition of the government.)

스티븐스의 이 말에 4인은 더 이상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정재관이 스티븐스의 안면에 주먹을 날렸고, 주먹에 맞은 스티븐스는 대리석 바닥에 머리를 부딪치며 쓰러졌다가 벌떡 일어났다. 이에 앉아 있던 일행 모두가 일어서 등나무 의자를 들어 스티븐스에게 휘둘렀다. 의자에 턱을 맞은 스티븐스는 뒤로 물러나, 벽에 등을 기댄 채 등나무 의자를 들어 한국인들의 공격을 막았다. 스티븐스가 도와달라고 고함을 치나, 호텔 직원들과 여행사 직원이 달려와 의자를 뺏으며 싸움을 말렸다. 스티븐스는 이마가 찢어지고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삐었다. 폭력사건 신고를 받은 경찰관 두 명이 사건현장에 출동하였으나, 스티븐스는 이들의 처벌을 원치 않아 호텔을 떠났다. 하지만 다음날에는 더 큰 게 기다리고 있었으니...

2.7. 총격으로 인한 사망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스티븐스 저격사건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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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저격 과정의 이점들

일부 도서나 영화 등에서는 스티븐스의 저격 과정이 경우에 따라 다르게 그려졌거나 해석되기도 하였는데 일각에서는 전명운이 스티븐스를 향해 쇠망치로 때렸고 장인환이 후방에서 저격을 했다는 일화를 내놨으나 다른 쪽에서는 스티븐스를 향해 쌍방으로 동시 저격하였다는 일화 등을 내놓으면서 해석이 엇갈리기도 하였다. 다른 쪽에서는 반대로 장인환이 쇠망치로 때리고 전명운이 저격을 했다는 일설도 있다. 또 일부에서는 둘 중 1명이 스티븐스를 저격해야 할 총탄이 다른 사람에게 날아가 부상을 입혔다는 설도 있었다. 1990년대 한국사 관련 책자에선 전명운이 총을 준비했지만 워낙에 낡은 총이라 작동이 되지 않았고 만일을 위해 준비한 쇠망치를 쓰게 된 것이라고 나오기도 했다. 이렇게 관련 설명이 엇갈리는 데에는 사건 자체가 급박하게 진행되어서 목격자들의 증언들이 제각각인 것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서세원의 영화 도마 안중근에서도 스티븐스의 저격 장면이 공개되기도 했는데 특이하게도 기차역이 아닌 다리 위에서 장인환과 전명운이 스티븐스를 쌍방으로 저격하고 돌아갔던 장면이 나오기도 하여서 기차역에서 스티븐스를 저격했다는 지금까지의 고증을 뒤집어 놓는 이변을 일으키기도 했다. 참고로 이 때의 스티븐스는 기차역이 아닌 다리 위를 건너다가 다리 위에서 자동차가 지나가고 난 후에 전명운, 장인환이 쌍방으로 저격한 총탄에 맞아 즉사하였다. 하지만 영화가 워낙 망작인 관계로 크게 반향을 일으키진 않았다.

맹꽁이 서당 극후반에서도 구한말 역사를 다룰 때 언급된다. 이를 왜곡한 어느 만화에선 그가 친일 발언을 하고 길을 가다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지나가던 흑인 꼬마 엑스트라가 먹고있던 아이스크림으로 그를 찔러서 살해하는 장면으로 왜곡되기도 했다.


[1] 구한말 사용된 근대 한국어 표기로는 'ㅼㅏ람·호와이도·수티븐스' 혹은 'ㅼㅏ람·호와이도·스집운스'. 외교고문 계약서 최종본에서는 후자로 표기되어 있는데, 아마 발음을 영어 원음에 가깝게 표현하기 위해서였거나, 고종이 하사한 한자 이름 '수지분'의 음독에 최대한 가깝게 맞추고자 수정되었던 듯 하다. 출처[2] 컬럼비아 대학교와는 관계가 없다[3] 미육군 법무감 대리로서 존 부스의 재판을 담당하기도 했다.[4] 당시에는 미국의 식민지이자 준주였다.[5] 일본인 재정 고문은 화폐정리사업을 시행한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 種大郞, 1853~1926, 가쓰 가이슈의 사위이며, 일본 최초의 하버드 대학교 로스쿨 졸업자이기도 하다.)이다.[6] 이는 하와이 내 일본계 이민들의 세력이 약화되지 않게 하기 위한 공작이었다. 스티븐스 개인적으로는 한국인 이민의 유입을 긍정적으로 생각했다고 하나, 결국에는 일본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 이를 반대했다. 이 때문에 본격적으로 미국 내 한인 사회의 미움을 사기 시작했다.[7] 당연하지만 이는 스티븐스의 기만이었다. 미국은 그나마 약속대로 점차 필리핀에 자치권도 주고 결국에는 독립시켜 주었지만, 일본 제국은 자치권은 커녕, 아예 일본의 일개 지방인 조선으로 격하했다.[8] 이 사람은 훗날 친일파로 전향한다. 한국전쟁 이후로 행적이 묘연한데 아마 납북된 것으로 보인다.[9] 영어명 Earl Lee. 아명이 '일'이었다고 하는데, 이를 변형해서 영어 이름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10] 이 호텔은 2024년 현재까지 그대로 영업하고 있다.[11] 여기까지는 스티븐스의 말이 의외로 사실이다.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 농민 혁명이 순차적으로 조선에서 일어났으며 그 결과는 모두 외세의 개입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은 상황이었다. 허나 이 발언이 문제가 되는 건 그 다음 말 때문이다.[12] 1908년 기준으로는 이미 대한제국 내 관료 중 상당수가 일본인으로 교체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