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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클린 D. 루스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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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 Person of the Year 194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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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폭 투하종전
1946년
1947년
1948년
194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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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8379242-641F-4E16-9EC4-4DDE7A61F63B.png 스미스소니언 선정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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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미국 정부가 운영하는 국립 교육 재단 스미스소니언 재단의 잡지, 스미스소니언 매거진이 “미국사 가장 중요한 100인의 인물”을 선정했다. 미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을 뽑았기 때문에 미국인이 아닌 사람들도 많고 부정적인 인물들도 있다.
<colbgcolor=#000047><colcolor=#ffc224> 개척자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 헨리 허드슨 · 아메리고 베스푸치 · 존 스미스 · 조반니 다 베라차노 · 존 뮤어 · 메리웨더 루이스 · 사카자위아 · 키트 카슨 · 존 웨슬리 파월 · 닐 암스트롱
혁명가 & 저항가들 마틴 루터 킹 · 로버트 E. 리 · 토머스 페인 · 존 브라운 · 프레드릭 더글러스 · 수전 B. 앤서니 · W. E. B. 듀보이스 · 테쿰세 · 타탕카 이요탕카 · 엘리자베스 케이디 스탠턴 · 말콤 엑스
대통령들 조지 워싱턴 · 토머스 제퍼슨 · 율리시스 S. 그랜트 · 우드로 윌슨 · 에이브러햄 링컨 · 제임스 매디슨 · 앤드루 잭슨 · 시어도어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로널드 레이건 · 조지 W. 부시
첫 여성들 포카혼타스 · 엘리너 루스벨트 · 힐러리 클린턴 · 마사 워싱턴 · 오프라 윈프리 · 헬렌 켈러 · 소저너 트루스 · 제인 애덤스 · 이디스 워튼 · 베티 데이비스 · 세라 페일린
범법자들 베네딕트 아놀드 · 제시 제임스 · 존 윌크스 부스 · 알 카포네 · 빌리 더 키드 · 윌리엄 M. 트위드 · 찰스 맨슨 · 와일드 빌 히콕 · 리 하비 오즈월드 · 러키 루치아노 · 존 딜린저
예술가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 앤디 워홀 ·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 ·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 · 잭슨 폴록 · 존 제임스 오듀본 · 조지아 오키프 · 토머스 에이킨스 · 토머스 내스트 · 앨프리드 스티글리츠 · 앤설 애덤스
종교인들 조셉 스미스 · 윌리엄 펜 · 브리검 영 · 로저 윌리엄스 · 앤 허치슨 · 조너선 에드워즈 · 라파예트 로널드 허버드 · 엘런 화이트 · 코튼 매더 · 매리 베이커 에디 · 빌리 그레이엄
팝 아이콘들 마크 트웨인 · 엘비스 프레슬리 · 마돈나 · 밥 딜런 · 마이클 잭슨 · 찰리 채플린 · 지미 헨드릭스 · 마릴린 먼로 · 프랭크 시나트라 · 루이 암스트롱 · 메리 픽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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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선수들 베이브 루스 · 무하마드 알리 · 재키 로빈슨 · 제임스 네이스미스 · 아놀드 슈워제네거 · 타이 콥 · 마이클 조던 · 헐크 호건 · 짐 도프 · 세크리테리엇 · 빌리 진 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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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AOL디스커버리 채널에서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투표한 ‘가장 위대한 미국인’ 명단이다.
1위 2위 3위 4위 5위
로널드 레이건 에이브러햄 링컨 마틴 루터 킹 조지 워싱턴 벤저민 프랭클린
6위 7위 8위 9위 10위
조지 W. 부시 빌 클린턴 엘비스 프레슬리 오프라 윈프리 프랭클린 D. 루스벨트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빌리 그레이엄 토머스 제퍼슨 월트 디즈니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토머스 에디슨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존 F. 케네디 밥 호프 빌 게이츠 엘리너 루스벨트 랜스 암스트롱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무하마드 알리 로자 파크스 라이트 형제 헨리 포드 닐 암스트롱
영문 위키 참고.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
<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미합중국 제32대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
Franklin D. Roosevelt
파일:FDR_1944_Color_Portrait.jpg
본명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
Franklin Delano Roosevelt
출생 1882년 1월 30일
뉴욕주 하이드파크
사망 1945년 4월 12일 (향년 63세)
조지아주 웜 스프링스 리틀 화이트 하우스
재임기간 제44대 뉴욕주지사
1929년 1월 1일 ~ 1932년 12월 31일
제32대 대통령[1]
1933년 3월 4일 ~ 1945년 4월 12일
서명
파일:프랭클린 D. 루스벨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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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부모 아버지 제임스 루스벨트(1828 ~ 1900)
어머니 사라 앤 델러노(1854 ~ 1941)
형제자매 이복형 제임스 루스벨트 루스벨트(1854 ~ 1927)
배우자 엘리너 루스벨트 (1884 ~ 1962, 1905년 결혼)
자녀 장녀 :안나 루스벨트 할스테드(1906 ~ 1975) : 2남 1녀
장남 :제임스 루스벨트(1907 ~ 1991) : 3남 4녀
차남 :앨리엇 루스벨트(1910 ~ 1990) : 4남 1녀
3남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 주니어(1914 ~ 1988) : 3남 2녀
4남 :존 애스핀월 루스벨트(1916 ~ 1981) : 1남 3녀
학력 그로튼 스쿨 (졸업)
하버드 대학교 (역사학 / 학사)
컬럼비아 대학교 로스쿨 (법학 / 중퇴)[2]
종교 개신교 (성공회)
신체 184.2cm[3] / 체중 84kg / O형
소속 정당

문장 파일:Coat_of_Arms_of_Franklin_Roosevelt.png
별명 행복한 전사(The Happy Warrior)[4]
FD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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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Franklin-D.-Roosevelt.jpg
백악관 공식 초상화

1. 개요2. 약력3. 생애4. 평가
4.1. 정치적 평가4.2. 정책 평가4.3. 인종 문제4.4. 외교적인 실책
4.4.1. 반론
5. 기타
5.1. 가족 관계5.2. 애완견 팔라(Fala)5.3. 우표 수집가5.4. 이븐 사우드와의 친분
6. 관련 어록7. 대중매체에서8. 선거 이력9.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제32대 미국 대통령 취임 선서[5]
Happy Days are Here Again
행복한 날이 여기 다시 왔습니다

1932년 미국 대통령 선거 슬로건
미국의 제32대 대통령.

미국 역사상 유일한 4선 대통령으로[6][7] 본명은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8]이며, 두문자어로는 FDR이라고도 한다.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와는 12촌 관계이다.[9] 2차 대전 종전을 몇 개월 앞둔 임기 도중에 순직했다.

하반신 마비로 훨체어 신세를 지고도 대통령에 올라, 역사상 최대의 경제 공황인 대공황과 인류사를 통틀어 최대 규모의 전쟁이라 일컬어지는 제2차 세계 대전, 이 두 차례의 국난을 모두 극복해 미국을 현재의 세계 초강대국 반열에 올려놓았다. 루스벨트의 위업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 대통령 중에서 가장 오래 재임한 대통령이자 가장 많이 대선에 승리했다는 진귀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임기 전까지는 조지 워싱턴의 (최대) 8년 임기가 관습의 형태로 칼같이 지켜졌고 루스벨트 사후에는 수정 헌법에 3선 이상 금지 조항을 명문화시켰기 때문이다.

또한 3월 4일에 취임(1933년)한 마지막 대통령이자 1월 20일에 취임(1937년)한 최초의 대통령이기도 하다. 원래 미국 대통령의 이·취임일은 3월 4일이었는데, 대통령 이·취임일을 1월 20일로 조정한[10] 수정헌법 제20조가 루스벨트의 첫번째 취임 직전에 비준되면서 루스벨트의 재선 임기가 시작되는 1937년부터는 1월 20일이 미국 대통령의 이·취임일이 되었다.

2. 약력

3. 생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생애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3.1. 프랭클린 D. 루스벨트 행정부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행정부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4. 평가

“(루스벨트는) 마치 "무엇이든 올 테면 오라지. 뭐가 됐건 간에, 모두 우리에게 쓸모가 있을 것이고, 우리의 이익으로 다 바꿔놓을 거야.” 라고 말하듯이 미래를 차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 파멸을 향해 나아가는 사악하고 치명적이고 효율적인 미치광이들, 당황한 채 도주하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들이 정의할 수 없는 명분에 대한 열정을 잃은 순교자들로 분열되어 보이는 실의에 빠진 세계에서, 루스벨트는 자신의 능력을 믿었고, 자신이 통제하는 한 이런 끔찍한 흐름을 막을 수 있다고 여겼다. 그에게는 독재자로서의 기질과 에너지, 기량 등 모든 게 다 있었다. 그리고 그는 우리 편이었다."
- 이사야 벌린

장애를 극복하고 대통령이 되어, 대공황으로 수렁에 빠져있던 당시 미국에 희망을 불어넣고 제2차 세계 대전 수혜를 통해 대공황을 완전히 끝내버린 것도 모자라 연합군의 승리로 이끌어내, 미국을 강대국에서 초강대국으로 격상시키는 업적으로 인해 오늘날에도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 중 한 명으로 꼽히고 있다.

특히 미국은 FDR의 집권기를 거치며 소련과 함께 명실상부 세계 제1의 초강대국이 되는데, 대공황제2차 세계 대전을 기점으로 미국은 서유럽 국가들을 대신해 세계를 이끄는 지도국가로서의 역할을 맡게 되고,[13] 종전 후에는 명실상부한 세계 제1의 초강대국으로 군림하게 된다.[14] 이후 유엔 창설 등을 준비하며 전후 국제 질서의 틀을 구축하는 데도 노력했다.

그래서 대공황을 극복하고 제2차 세계 대전을 승리로 이끌어 오늘날 초강대국 미국의 기반을 마련한 대통령이었다는 것에는 많이들 공감하고 있기에 FDR은 오늘날에도 대통령 업적 평가 등에서 최초의 미국을 만든 조지 워싱턴, 최대의 미국을 만든 에이브러햄 링컨 등과 더불어 최강의 미국을 만든 지도자로서 세 손가락 내로 드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2010년 시에나 대학의 업적 평가에선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2000년대 한 조사에선 지도력, 인사, 위기 대응 등 다른 분야는 수위권인데, 도덕성에서 상대적으로 처지는 15위를 차지해 종합 2위를 차지했다.

4.1. 정치적 평가

미국 대통령 최초로 4선 대통령이 되어 자유민주주의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장기 집권의 씨앗을 낳을 뻔한 점도 비판받는 부분이다. 명문화된 규정은 아니지만,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이 임기를 두 번만 역임하고 깔끔하게 물러나면서 후임 대통령들도 이를 따라 재선만 하고 그쳤다. 그러나 루즈벨트는 관례를 깨고 4선까지 성공하여 현직 대통령의 3선 출마를 금지하는 헌법 조항이 명문화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루즈벨트의 3선 출마가 가능했던 이유는 현직 대통령의 3선 불출마가 그저 전통일 뿐이지 명문화된 규정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루즈벨트라는 가장 강력한 패를 갖고 있던 민주당은 대통령의 3선 출마를 밀어붙였고, 국민 여론도 전시에 대통령을 교체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4선 또한 이와 같은 이유를 들어 출마를 선언했고, 4선에 대한 반발이 심하긴 했으나 루즈벨트의 인기와 전시 상황이라는 이유가 크게 작용하여 당선에 성공했다. 결국 4기 임기에 들어선지 세 달 만에 루스벨트는 사망하는데, 이렇게 건강이 나쁜 상태였음에도 집권을 연장한 것이 공적인 책임감 때문인지 사적인 권력욕 때문인지는 본인만이 알 일이다.[15]

프레드 그린슈타인 프린스턴 대학교 교수는 루즈벨트를 현대적인 미국 대통령의 출현으로 규정하면서, 이때부터 의회가 이끌어 왔던 미국의 정책 주도권에서 연방 정부의 영향력이 급격히 확대되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루즈벨트의 집권은 공화당민주당의 정치 성향 및 지지 기반이 서로 바뀌는 중요한 분기점 중 하나로 거론되기도 한다.

루즈벨트는 일명 뉴딜연합이라 하여 계층적으로는 노동자 + 흑인, 유대인소수민족 + 이민자 + 농민, 지역적으로는 북동부 공업 지대를 확보하고 전통적인 지지 기반인 남부를 붙잡아 두면서 민주당의 지지 기반을 두텁게 하는 데 성공했다. 이 뉴딜연합은 오늘날의 기준에서 보면 꽤나 독특한 형태의 투표연합이었다.

남부의 반흑인/인종적 보수주의자들부터 일부 사회주의자들까지 포함하는 광범위한 집단인 뉴딜 연합은 FDR이 카리스마로 이들을 휘어잡던 시기까지는 선거마다 민주당이 연전연승을 이루게 해주는 등 엄청난 힘을 발휘했으나, 너무나도 성격이 다른 이 연합을 장기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결국, 전후에 발생한 사회적 갈등으로 인해 연합은 붕괴하고 1968년 대선부터 남부가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다만, 남부를 제외한 나머지 집단의 지지는 대체로 지금까지도 유지하고 있으며 남부 또한 깅리치 혁명 이전까지는 총선과 지방 선거에서 계속 민주당을 지지했기에 뉴딜 연합이라는 강력한 연합 세력이 붕괴했을지언정, 민주당은 주요 사회 집단의 지지를 유지하면서 반 세기 동안 의회를 장악할 수 있었다.

반면 공화당은 에이브러햄 링컨 이후 백여 년 가까이 강력한 지지 기반이었던 흑인 집단의 지지를 상실하고 만다. 그래도 루즈벨트 시기까지는 못해도 미국 흑인의 30%에게 지지를 받았으나, 1960년대에 민주당이 흑인민권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나선 것과 달리 공화당은 남부 전략문화적 보수주의 전략, 상대적으로 민주당에 비해 민권 운동에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흑인 집단의 지지를 거의 상실하고 말았다.[16]

애초에 공화당의 창건자들이 링컨 같은 연방주의자 + 흑인 노예 해방론자들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아이러니. 하지만, 공화당이 외연 확장을 위해 남부 전략과 문화적 보수주의 전략을 펼치고 남부 보수파들이 민주당 주류의 진보화에 반발해 점차 공화당 지지로 돌아서면서, 남북전쟁 이후 130여 년 만에 양당의 지지 기반은 뒤바뀌게 된다. 정치적 성향 또한 뉴딜 정책을 계기로 민주당은 시장 개입 및 복지 정책의 확대에 관심을 기울이는 반면, 공화당은 보다 자유방임주의에 근거한 시장 친화적 성향으로 굳어지게 된다.

4.2. 정책 평가

매카시즘으로 유명한 조지프 매카시 같은 그 시절 미국내 극우파 인사는 루스벨트와 후임 트루먼 정권을 싸잡아 '반역의 20년 정권'이라고 몰아세우기도 했다. 이런 FDR의 안티들은 뉴딜 정책의 성과가 생각만큼 크진 않으며 불황 탈출도 전쟁 특수가 한몫 했다는 논란이 되는 주장과 자유 시장 경제를 왜곡했다는 비판을 했다.

다만, 2차 대전 동안 전시 체제에 돌입한 미국은 거의 완전 고용을 실현해 실업률이 1%까지 떨어지는 등 일종의 전쟁 특수 효과를 누렸다. 애초에 경제 패러다임 자체가 이때를 계기로 한번 크게 바뀌기에 극우파들의 비난은 부질없는 메아리기도 하다. [17]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바로 개입하지 않아 유럽이 초토화되고, 유대인들도 홀로코스트를 당하는 등 방관자였다는 평가를 하는 이들도 있으나, 이는 부당한 평가이다. 당시 미국의 국민 여론과 국회 의원의 대부분이 "대공황으로 우리도 먹고 살기 힘든데 막대한 돈과 희생이 필요한 전쟁에 뭐하러 뛰어드냐?"며 참전에 매우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루즈벨트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싶어도 그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1933년, 루즈벨트의 무기 금수 조치 법안은 의회에서 폐기당하고 35년에는 아예 의회의 고립주의자들이 중립법을 통과시켜 유럽에 대한 개입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루즈벨트는 여론의 변화와 의회 다수당이란 이점, 자신의 정치력을 최대한 이용한 끝에 겨우 무기대여법 같은 편법을 써서 유럽 연합국을 지원했으며 아시아에서는 중화민국에 물자를 공급하고 일본의 석유 수입을 방해하는 등 최선을 다했다.

무엇보다 전쟁을 초래한 만악의 근원아돌프 히틀러와 일본 제국이지, 애꿎은 루스벨트가 아니다. 반전 여론이 매우 강했던 미국 국민들이 참전으로 돌아선건 에드워드 머로의 영국 본토 항공전 중계와 같은 언론의 보도가 한몫을 했고, 가장 결정적으로 일본 제국무모한 도발이 완전히 기폭제로 작용했다.

한편, 리버럴 진영에서는 뉴딜 정책이 가축 대량 살처분 같은 부작용도 일부 남겼지만, 이때 추진한 여러 정책 중의 상당수가 전후 서구권에서 수십 년간 이어진 경제 성장을 이룩하는 토대가 되었다고 인식하며 대공황 이후에 경제학계의 주류로 올라선 케인즈주의를 언급하며 세계 경제학의 기조 자체를 바꾸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한다.

또한, 흔히 뉴딜을 댐 건설 같은 경기 부양 정책이 전부였다고 오인하는 경우도 있는데, 뉴딜은 경기 부양책 뿐만 아니라 시장 개혁과 양극화 해소를 위한 부당 노동 행위 금지, 최저 임금 제도, 미국 사회 보장 제도 개혁 등 노동권과 복지의 근간을 마련하는 정책이었다. 루즈벨트 정권 시기 미국 사회의 노동, 복지, 금융 관련 주요 기관과 제도들의 원형이 대거 만들어졌고 노동자의 단결권 및 단체 교섭권 보장, 실업 보험, 퇴직자 · 장애인 연금, 과당 경쟁 방지를 위한 공정 거래 제도, 빈민 구제 제도 등이 이 시기에 이뤄진 대표적인 조치들이다.

즉, 뉴딜은 이해 당사자 간의 합의를 통해 새로운 질서와 제도를 만드는 과정을 목표로 둔 말 그대로 새로운 거래였다. 또 루스벨트 행정부 2기의(1937 ~ 1938) 경기 침체는 뉴딜 정책이 한계에 부딪쳤다는 고전학파적 견해와 의회의 비협조나 크루그먼 등이 주장하는 재정 지출 감소 때문에 오히려 뉴딜 정책을 지속하지 못해서라는 정반대의 견해가 대립한다.

사실 뉴딜 정책이 갖는 중요한 의의는 정책의 호불호를 떠나, 미국이 방임주의로 대공황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았지만, 다른 나라들이 파시즘이나 공산주의를 대안으로 선택하던 시절 대중들에게 이를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사회 내 극단주의자들의 성장을 억제하고 큰 틀에서의 기존 체제를 지켜낸 점이라고 평가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뉴딜은 일각에서 비난하는 사회주의스런 정책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를 수호한 수정자본주의적 정책이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후 뉴딜은 트루먼 대통령의 페어 딜로 계승되고, 아이젠하워의 공화당 정부도 상당수의 뉴딜 정책을 이어받았으며 이는 지금도 사회 보장 제도 등의 형태로 남아 있다.

4.3. 인종 문제

행정명령 9066호에 서명하여 엄연히 미국 시민권자인 독일, 이탈리아, 일본계 미국인들의 출신을 이유로 수용소에 강제 수용한 것이나, 1936 베를린 올림픽 육상 금메달 4관왕의 주인공인 제시 오언스에게 축하 연락을 하거나 백악관에 초청하지 않는 등 뭔가 무시한 듯한 태도를 보인 것도 그의 오점으로 지적받는다. [18] [19]

인종에 대한 루즈벨트의 인식은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으며 그의 행보는 인종차별과 평등을 오갔다고 봐야할 것이다. 루즈벨트가 인종차별적인 언행을 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나, 그가 미국 최초의 흑인 비행단인 제332전투비행단을 설치했던 점, 군수 공업에 종사하는 흑인 노동자들과 백인 자유주의자들이 전개한 워싱턴 행진을 진압하지 않고 이들의 요구 사항을 받아들여 공정 고용 위원회를 설치한 점, 워싱턴의 연방 공무원에서 흑인의 비중을 8.5%에서 17.5%로 늘리고 그 중에서 30% 이상이 사무직과 전문직이었던 점, 남부 민주당의 격렬한 반대에도 뉴딜의 혜택을 흑인들에게도 제공한 점, 군대에서 인종 통합을 이루려 했던 점도 사실이다. 게다가 영부인 엘리너 루스벨트는 열정적인 인권 운동가로서 인종 차별 뿐만 아니라 다방면에 걸쳐 인권 운동을 전개했다.

4.4. 외교적인 실책

일각에선 루스벨트가 2차 대전 당시 소련의 힘을 과대평가해 스탈린에게 너무 유화적이었던 것 아니냐고 비판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2차 대전 동안, 서방 진영의 지도자였던 루스벨트와 그 후임자인 트루먼, 처칠 중에서 소련에 상대적으로 가장 호의적이었던 건 루스벨트였다. 그는 소련의 독일 분단안과 동유럽 공산화에 국민 투표 등 몇몇 조건을 달긴 했지만 적극적인 반대는 하지 않았고 대일 전선에서도 소련의 참전을 독촉하며 극동에서 소련의 지분을 용인하려 했다.

2차대전 승전이 확정된 1945년 2월에도 소련의 대일전선 참전을 독촉할 정도였다. 물론 이에 대해 일각에선 온전히 미국 vs 일본 상태로[20] 진행되던 태평양 전쟁에서 자국 병사들의 희생을 줄이고자 소련의 참전을 독촉한 것이란 해석도 하는데, 이에 대해 어차피 전쟁으로 피 보던 판국에 고작 그런 이유로 잠재적 적국이 될 수도 있는 소련을 끌어들인건 현명하지 못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런 주장에 따르면 결국 소련의 부상과 냉전의 성립에는 루스벨트의 지분도 어느정도는 존재한다는 것이다.[21] 다만 대일전의 경우, 루즈벨트의 4번째 대선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프랑스보다 넓은 배후지인 만주에 상륙하며 피를 보는게 부담스러운 시기인 건 사실이다.

이러한 루스벨트의 대소 유화적인 태도와 상반되는 것이 후임자 트루먼으로 그는 유럽이 되었든 극동이 되었든 소련의 지분 확대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가 실시한 베를린 공수작전마셜 플랜은 유럽에서의 소련 영향력 약화 차원이었고 빠른 원폭 투하 결정도 극동에서의 소련 지분을 최소화하기 위함이었다. 트루먼은 소련의 홋카이도 점령과 같이 비교적 작은 부산물에도 격렬히 반대했고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 남한을 지키기 위해 즉각적으로 안보리를 소집해 한국에 파병할 정도로 소련과 공산주의의 위험성을 높이 보았다.

4.4.1. 반론

다만, 이런 주장은 루즈벨트의 전후 구상을 무시한 것이며 루즈벨트 사후에 소련이 미국과 대립하여 냉전을 열었다는 이유로 루즈벨트 생전의 소련을 온전히 잠재적 적국으로만 여긴 결과론적인 판단이다. 루즈벨트는 독일군의 80%를 상대한 소련에게 어느 정도의 양보를 하는 것으로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질서를 용인받았다. 스탈린 또한, 미국이 주도하는 대연합에 합류하는 대신, 소련의 안보와 적대 국가들[22]의 무력화를 보장받았다. 루즈벨트의 미국과 스탈린의 소련은 얄타까지만 하더라도 서로를 적대할 생각이 없었다.

스탈린은 세계 혁명과 공산권의 확장에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독일과 일본의 무력화, 소련의 안보를 위한 동유럽의 완충 지대 확보에 몰두했다. 서유럽 국가들이 두려워하던 유럽 전역에서의 공산 세력의 강화에 대해서는 서유럽과 그리스의 현지 공산 세력을 통제하고 혁명 운동을 막겠다는 약속을 했으며 실제로 스탈린은 냉전이 본격화되던 시점에서조차 그리스 공산 파르티잔들의 활동을 통제하려 했다. 자신이 완충 지대로 삼으려 한 동유럽 국가들도 루즈벨트의 눈치가 보여 의회제와 시장 경제를 허용하는 인민 민주주의 국가를 수립하는 것으로 끝내려 했다.

그리고 스탈린은 전후에도 어느정도는 미국과의 우호 관계를 맺으려 했다. 스탈린은 자신을 제외한 소련 수뇌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시장을 개방하여 과학 기술과 공산품을 받는 대신, 소련의 원자재를 미국에 넘겨주려 했다. 미국이 주도하는 전후 세계를 인정하고 미국이 만든 세계 질서를 받아들이려 했고 루즈벨트가 구상하여 실현한 UN에 소련이 가입한 것도 소련이 미국의 전후 구상을 받아들였음을 보여주는 증거 중 하나이다.

동아시아에서도 스탈린은 미국의 눈치를 봐서 제정 러시아의 고토를 회복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극동에서의 진출을 정당화했으며, 루즈벨트도 이를 받아들였다. 만약, 스탈린이 그 이상을 원했다면, 루즈벨트는 스탈린과 다시 길고 긴 협의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그리고 루즈벨트는 단 한 번도 동유럽의 공산화를 국민 투표로 결정하겠다고 정한 적이 없다. 이는 전후 동유럽 국가들의 정치 체제 과정을 국민 투표로 결정지으려 한 것이지, 공산화를 용인한 것은 아니었다.

관동군에 대한 평가는 핵 2방 맞고 항복한 지금에 와서 보면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모든건 결과론적 해석일 뿐이며 그때 당시 일본 관동군은 미드웨이와 과달카날 패배 이후에도, 만주와 한반도를 손아귀에 쥐고 있었으며 그 숫자만 100만에 가까웠다. 미군 수뇌부와 백악관은 일본 본토에 침공하는 몰락 작전을 개시할 경우, 엄청난 피해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래서 미국은 피해를 줄이기 위해 소련이 제2전선 개설을 지속적으로 요청하던 것처럼 자신도 소련에게 대일전에 참전할 것을 요구했다. 따라서, 이탈리아 전선의 개설과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개시는 전후 지분의 확보만을 위해서 이뤄진 일이 아니라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소련의 제2전선 개설 요청을 받아들여 주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또한, 상단에서 논한 희생을 당연시하며 인명을 별 것도 아닌 것처럼 치부하는 것은 당시 미국이 상대하던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들이나 할법한 발상이며 미국이 강조하는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가치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게다가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은 300만 이상을 동원했고 사상자는 50만에 가까웠으며 전비 또한 엄청났다. 당연히 감수할만한 희생이 아니었으며 빠르게 전쟁을 끝낼 필요가 있었다.

루스벨트가 사망하면서 그의 구상은 IF의 영역이 되긴 했지만, 만약 그가 4선 임기를 수행하여 전세계의 식민지를 해방한 후, 신생 독립국들에 신탁 통치를 실시해 민주주의를 이식하고 전세계를 미국 시장을 만든다는 구상을 실현했더라면 전후 국제 질서는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이 구상에 대해 대규모 식민지를 쥐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가 반발할 게 뻔했기 때문에 루즈벨트 입장에서는 소련을 끌어들일 필요성이 더욱 높아졌고, 중화민국까지 대연합에 합류시켜 미 · 영 · 중 · 소 4개국이 세계 질서를 장악하려 했다.

이와는 별개로 FDR은 1942년, 처칠에게 미국 국무부나 영국 외무부보다 자신이 스탈린을 더 잘 다룰 수 있다는 소신을 밝힌 적도 있다. 스탈린 역시, FDR을 내심 경계해서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의 중핵인 밀로반 질라스에게 '처칠은 사람들이 안 볼 때, 주머니에서 잔돈만 훔쳐갈 인물이지만, FDR은 더 큰 동전을 골라서 훔쳐갈 인물.'이라는 평가를 했다. 이런 점을 들어 그린슈타인 교수는 FDR을 분석보다 직관을 더 믿은 정치인이었다고 평했다.

또한 소련에 대한 서방 국가들의 행태를 놓고 루스벨트만 비판하는 것은 다소 부적절하다. 당장 '동유럽에서의 소련 지분 확대를 막기 위해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베를린 진격을 주장했다'는 처칠과 영국 정부는 정작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된 1941년 6월 22일에 소련과 접촉해 동맹을 제의했으며 곧바로 동맹을 체결했다. 그리고 처칠은 1944년에 스탈린과 퍼센트 합의를 진행해 동유럽을 완전히 소련에 넘겨주고 남유럽에 대한 영국의 이권을 보장받으려 했다. 또한, 처칠은 지중해에서의 패권 유지를 위해 미, 소를 무시하고 이탈리아를 준 식민지로 취급했고 이 때문에 영국 정부는 폴란드 망명 정부를 보호하고 있었음에도 소련이 자신들의 영향력 하에 있는 루블린 정부를 폴란드의 임시 정부로 공인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영국이 이 사안에 대해 항의하는 순간, 소련은 영국이 이탈리아에 점령주의 원칙을 적용해 자기들 마음대로 정권을 수립하고 교체한 일을 제기하며 영국의 항의를 무력화할 수 있었다. 게다가 처칠은 독일을 분할하고 완전히 무력화하는 미국의 모겐소 계획과, 스탈린의 독일 분할안에도 동의한 바 있다. 마치 처칠은 소련을 막으려 했는데, 루즈벨트는 용인하려 했다는 말은 처칠과 영국 정부가 소련과 협력하고 소련의 동유럽 장악을 용인하려 했다는 사실을 무시한 잘못된 평가이다.

그리고 독일의 분할은 소련에게 양보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논의되어 오던 전후 독일에 대한 다양한 처리 방안[23]들을 조정하여 얄타에서 결정지은 것이다. 폴란드를 위시한 동유럽 문제 역시, 루즈벨트와 스탈린, 처칠이 어느 한쪽에게 완전히 양보하는 것이 아니라, 타협과 조정을 거쳐서 매듭지은 것이었다.

스탈린의 경우, 독소전 초기부터 전후 독일의 분할을 부르짖었으나, 냉전이 시작하던 유럽에서의 종전 ~ 포츠담 회담 시점에는 기존의 입장을 버리고 비무장 중립화된 통일 독일 정부를 수립하자고 주장했으며 포츠담에서 트루먼, 애틀리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결론을 내리자면, 전후 독일의 분할은 소련의 분할안을 따른 것이 아니며, 스탈린도 상황에 따라서 분할이 아닌 통일 독일 정부 수립을 주장하기도 했다고 볼 수 있다.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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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임기 동안 대공황, 제2차 세계 대전 등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많았다보니 스트레스를 받아 취임 첫 해와 마지막 해[24]의 인상이 굉장히 달라졌다. 물론 대통령을 12년이나 했으니 자연스러운 노화 탓도 있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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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스턴 처칠과 죽이 잘 맞았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가장 유명한 일화가 처칠이 목욕한 후 알몸으로 있는데 루스벨트가 이를 보고 피하려고 하자 처칠이 "대영제국의 총리는 미합중국의 대통령께 감추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 실제로 둘이 개인적인 '우정' 같은 감정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서로 긴밀한 관계였던 것은 사실이었다. 20세기를 풍미한 두 거목이 배포가 잘 맞았던 셈. 허나 루스벨트와 처칠과의 관계에 대한 해석은 오늘날에도 의견이 분분하다. 일단 처칠은 스스로 둘의 관계를 우정이라고 말하며 친근함을 자주 표현했지만, 루스벨트의 경우에는 처칠에 대해서 "하루에 수백 가지 생각은 하지만 그 중 쓸만한 생각은 열댓 개도 되지 못한다"라고 노골적인 디스를 날린 적도 있다. 그리고 둘은 몇몇 안건에 대해 의견 충돌도 잦았는데, 대표적인게 드골에 대한 인식 차이였다. 처칠은 드골을 프랑스의 유일한 지도자이자 희망이라고 생각하며 지지를 표명했지만, 루스벨트는 드골이 독재자가 될 인격을 갖추고 있기에 민주주의에 걸맞은 지도자가 아니라고 평가하며 사후 프랑스의 지도자 문제에 대해서 처칠과 다른 의견을 냈다.

* 해군 모의 훈련에 참가하였다가 난전에서나 나온다는 아군 오사를 당할 뻔 한 적이 있다. 정확히는 테헤란 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아이오와급 전함 1번함 아이오와 함에 탑승 중 호위 함대의 훈련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플레처급 구축함 USS 윌리엄 D. 포터 함 측에서 모의 사격 훈련을 하다가 실수로 어뢰를 비우지 않고 대항군 역할을 하던 아이오와함을 향해 실탄 어뢰를 발사해버린 것. 이 때 루스벨트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어뢰가 보고 싶다면서 더 잘보이는 자리로 휠체어를 옮겨달라고 했는데, 다행히 어뢰는 전함에 닿기 전 폭발했고 배가 대서양에 가라앉거나 루즈벨트가 물에 빠져 실종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포터 함의 승조원들은 조사를 받기는 했지만 사건을 재밌게 생각했는지, 루즈벨트가 최대한 개입해서 사고에 가깝게 만드는 바람에 책임을 도저히 피할 수 없었던 어뢰 담당자 1명[30]이 노역형에 처해진 것 외에는 아무도 불이익을 받지 않고 기적적으로 가벼운 처벌을 받는 데 그쳤다. 그 대신 포터 함의 승조원들은 이후 다른 함선을 마주칠 때마다 "쏘지 마! 우린 공화당원이야!"라는 식의 놀림을 당해야 했다고 한다.[31]
파일:루이 페르디난트와 프랭클린 루스벨트.jpg* 1932년 미국 대선 후보 시절에 독일 제국의 마지막 황제 빌헬름 2세의 손자들인 루이 페르디난트 폰 프로이센 왕자와 프리드리히 폰 프로이센 왕자를 만난적이 있다. 맨 왼쪽의 인물이 루이 페르디난트, 맨 오른쪽의 인물이 프리드리히 왕자다.
파일:dime.png* 미국 다임 주화의 도안이다.
파일:프랭클린 루스벨트 여장.jpg

5.1. 가족 관계

파일:9lJZ61K.jpg
FDR의 부인 엘리너 루스벨트의 젊은 시절 사진
안나 엘리너 루스벨트는 반신불구가 된 남편을 대신해 영부인 활동도 활발하게 했고, 1945년부터 1951년까지 국제연합대사를 지내면서 1946년에는 국제연합인권위원회의 의장으로 선출되기도 하는 등 인권과 평화 활동 측면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미국 내에서도 공연장을 구하지 못해 애먹던 흑인 가수들에게 링컨 기념관 공연을 성사시켜주는 등 인종차별철폐를 위해 힘썼다. 미국인들이 가장 높이 평가하는 대통령 영부인으로도 손꼽힌다.

근데 부부 사이가 항상 좋았던 것은 아니라, 대통령이 되기 전엔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부인 엘리너의 비서인 루시 머서와 추문을 일으켜 이혼 직전까지 가기도 했었다. 실제 루스벨트는 엘리너와 이혼하고 루시와 재혼할 생각이었으나, 극구반대하는 어머니와 정치인생에 결코 도움될게 없다는 하우의 설득으로[35] 루시와 만나지 않겠다는 다짐 속에 엘리너와 겨우 화해했고, 이후 루시도 다른 사업가와 결혼했다. 하지만 훗날 대통령이 되어서도 밀회를 즐겼다는 카더라가 있으며, 훗날 루스벨트의 임종을 지켜보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도 FDR 역시 그녀를 정치적 동반자로 아꼈는지, 엘리너의 저서 '내가 기억하는 것들'에 의하면 FDR은 보좌진들 사이에 의견 충돌이 있을 경우 식사 자리에서 자신에게 의견을 구했는데, 이때 FDR의 견해와 반대되는 견해를 심지어 약간은 짜증섞인 어조로 그녀가 말해도 빙그레 웃으며 자기 할 말만 하던 양반이, 다음 날 공식 석상에선 그녀의 의견을 마치 원래부터 자기 의견이었던냥 그대로 말해 당황하기도 했다고 한다.

자식으로는 엘리너와의 사이에서 슬하 4남 1녀를 뒀다. 자식들 중에서 고명딸인 안나 루스벨트 할스테드(Anna Roosevelt Halsted)[36]는 부모를 도와서 퍼스트 레이디 직책을 대행하기도 했다.

한편, FDR은 미국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12촌 동생이다. 그리고 프랭클린은 상술되어있듯 시어도어의 조카딸(질녀) 앨리너와 1905년에 결혼했다. 때문인지 프랭클린과 시어도어가 서로 숙부와 조카뻘이라고 잘못 알려진 경우도 있지만 둘은 촌수가 먼 같은 항렬의 형제로, 근친이 아니라 사실상 남남이라고 봐도 무방하긴 하다. 시어도어와 프랭클린의 나이차는 23년으로 오히려 12촌이라는 촌수를 감안하면 평범한 편. 12촌 형제면 노인과 아기 수준으로 나이차가 많이 나는 경우도 있고, 남녀라면 서로 결혼도 가능한 촌수이다.[37][38]

둘은 당적도 달랐지만[39] 사적으론 꽤 가까운 사이였다고 한다. 프랭클린은 시어도어 관련 서적도 읽어볼만큼 그를 존경하면서도 언젠가는 넘어야할 라이벌로 여겼다고. 그리고 실제로 넘어섰다. 사실 시어도어 루스벨트도 미국 대통령 중 꽤 비중있는 인물이지만,[40] 그럼에도 대중들은 루스벨트라 하면 주로 존재감이 더 높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를 시어도어 루스벨트보다 많이 떠올리는 편이다.

한편, 시어도어는 일본 문화에 심취한 소위 원조 와패니즈가쓰라-태프트 밀약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일본의 아시아 침략의 길을 열어놓은 반면, 프랭클린은 무기 대여법과 대일 석유 금수 조치를 통해 일제의 침략 전쟁에 제동을 걸었고 결국엔 태평양 전쟁으로 폭망시켰다는 점도 재미있는 점.

이런 대조적 행보로 인해 일본 우익들은 지금도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일본 제국의 전성기를 만들어줬다고 좋아하는 반면,[41] 태평양 전쟁으로 일본 제국을 침몰시킨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특히 후임 대통령으로 일본에 원폭을 투하한[42] 장본인인 해리 S. 트루먼은 철천지 원수마냥 취급하기도 한다.[43]

5.2. 애완견 팔라(Fala)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백악관에서 개를 길렀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FDR은 그 중에서도 대단한 애견가로 알려져있다. 평생 동안 많은 개를 길렀는데 대통령 재직 중에도 8마리의 개를 백악관에서 길렀다. 가장 유명한 개가 스코티시 테리어 종인 팔라. 친척인 마가렛 서클레이로부터 받은 개였는데 백악관에서 길렀던 개들 중 루스벨트가 제일 아낀 개로 알려져 있다. 이 개의 밥도 손수 챙겼으며, 사적 외출은 물론 공식 행사나 외국으로 출국할 때에도 이 개를 항상 데리고 다녔다.

한 번은 알류산 열도의 한 섬을 방문했다가 팔라가 없어져서 그 섬으로 사람들을 동원해 개를 찾아냈다. 이를 가지고 공화당에서 "개 하나 찾으려고 군함을 보냈다", "예산을 낭비했다"고 비난했는데, 이에 대응하여 1944년 9월 워싱턴 D.C.의 팀스텀스 노동조합 앞에서 이른바 '팔라 연설'을 했다. 그 연설의 일부만 인용하면,
…(전략)…"아시다시피 팔라는 스코틀랜드산이죠. 스코틀랜드 출신으로서, 의회 안팎에서 소설을 쓰는 공화당 사람들이 제가 자기(팔라)를 알류산열도에 남겨놓았고 다시 자기를 찾기 위해 납세자들로부터 2백만 달러에서 3백만 달러, 혹은 8백만 달러에서 2천만 달러의 부담을 지우면서 구축함을 보냈다고 하는 이야기를 지어냈다는 걸 알고 (팔라가) 지금까지도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있습니다...(중략)...전 저 자신에 대해서는 제가 오래되고 벌레가 갉아먹은 같은 온전치 못한 사람인데도 꼭 필요한 사람으로 행세했다는 거짓말과 같은 악의적 거짓말에 익숙합니다. 하지만 저는 제 개에 대한 중상에 분노해하고, 제 개에 대한 모략에 반대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연설의 주요 논지는 본인은 욕해도 좋지만 팔라를 욕하는 것만큼은 참을 수 없다는 것.

파일:external/www.inetours.com/Fala-FDR_1633.jpg
루스벨트 기념관에 있는 루스벨트와 팔라 상.

그러나 이 연설을 한 이듬해 루스벨트가 사망하자 원래 주인인 마가렛과 함께 장례식에 참석했는데 장례식 도중 장송곡에 맞추어 낑낑대다가 루스벨트의 관이 땅 속으로 내려지자 잔디밭 위를 구르며 재롱을 부렸다고 한다. 이후 루스벨트의 영부인 앨리너와 살다가 7년 뒤인 1952년 4월 5일 죽었다. 이 날은 팔라의 12번째 생일이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루스벨트 내외의 무덤 바로 옆에 묻혀 있으며 워싱턴에 있는 루스벨트 기념관 앞의 루스벨트 동상 옆에 함께 조각되어 있다. 지금도 루스벨트를 캐리커처하면 팔라가 함께 그려질 정도로 루스벨트와 뗄 수 없는 동물로 남아 있다. 그야말로 충견.

파일:external/farm1.static.flickr.com/519738884_a424169f4b.jpg
루스벨트 내외와 팔라의 무덤. 루스벨트 부부 묘 뒷편에 보이는 조그만 기둥이 팔라가 묻힌 곳이다.

5.3. 우표 수집가

"난 우표에서 배운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더 많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1942년.
루스벨트는 엄청난 우표 수집광이었다. 재임 중에는 우취인(philatelist)[44]이자 당대 최고의 우표 덕후로 정평이 난 친구 제임스 A. 팔리를 체신부 장관에 임명[45]해놓고 그와 함께 전국적인 차원에서 우표 덕질을 했다. 어머니의 날 기념우표 도안을 직접 해서 우정장관에게 전달한다든가, 시쇄에 반드시 친필 서명을 남긴다든가 하는 식. 1939 뉴욕 엑스포 기념우표는 압권인데, 당대까지는 전지 하나에는 우표 디자인 최대 2개만 사용한다는 것이 세계적인 불문율이었다. 그러나 팔리와 루스벨트는 이 금기를 깨고 A0 우표 전지 하나에 1939 뉴욕 엑스포의 각 전시관을 담은 32가지의 디자인을 담아놓은 우표세트를 발매했다.

주영 미국대사였던 조지프 케네디[46]의 아들인 로버트 케네디[47]에게 자신이 모은 우표를 보내주기도 했으며 로버트가 루스벨트에게 감사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이 때 루스벨트는 로버트에게 우표들을 보내면서 적은 편지에 "짬 나면 백악관에 한 번 놀러와라. 내가 모은 우표들을 보여주마."라고 쓰기도 했다.

루스벨트는 제임스 팔리가 1940년 3선을 한 자신에 대해 비판하면서 사퇴하자 또다른 우리 라인인 프랭크 코머퍼드 워커를 체신부 장관으로 모셔와서 죽는 날까지 우표 덕질을 했다. 다만 아쉽게도 루스벨트가 죽고 해리 S. 트루먼이 대통령이 되자 우취가 장관들은 짤리고 로버트 해네건[48]이라는 관료가 들어오면서 루스벨트식 우표 발행은 중단된다.

기록에 따르면,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 알려지기 직전에도 루스벨트는 대통령 집무실에서 우표 정리를 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물론 우취 오덕질은 단순한 오덕질 수준만은 아니라, 대공황기와 2차대전 중에 국민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의 한가지로도 쓰였다.

우표 수집광인 대통령답게 그가 수집한 우표를 보고 있는 도안으로 우표가 여러 번 발매되기도 했는데, 그 중엔 루스벨트가 육손인 도안도 있다.
파일:external/postalmuseum.si.edu/1d_FDR-05.jpg
바로 이 우표인데, 1947년 모나코에서 발행된 것이다. 이 도안은 그 희소성으로 인해 다른 루스벨트 관련 우표보다 가치가 높다고 한다.

5.4. 이븐 사우드와의 친분

사우디아라비아의 초대 국왕이였던 이븐 사우드와 개인적으로 친구 사이였다고 한다. 일화로 1945년 이븐 사우드와의 회담에서 이븐 사우드가 다리가 불편했었는데, 휠체어를 선물해주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사우디는 2차 대전 동안 중립국이였지만 FDR이 집권한 미국의 편의를 많이 봐줬다. 예를 들어 미국에게 석유를 지원한다거나[49] 아님 아예 사우디 동부 담맘 근교에 있는 Dhahran 지역에 미 공군 기지 건설을 허용해주기도 했다.[50] 또 사우디 항공사 사우디아 항공 역시 1945년 FDR이 이븐 사우드 국왕에게 DC-3 여객기를 선물한 것이 계기가 되어 만들어 진 항공사이다.[51]

6. 관련 어록

"So, first of all, let me assert my firm belief that The Only Thing We Have to Fear is Fear Itself. Nameless, unreasoning, unjustfied terror which paralyzes needed efforts to convert retreat into advance."
"우선, 제가 굳게 믿고 있는 점을 하나 강조하자면, 그것은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유일한 것은 두려움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후퇴를 전진으로 반전시키기 위해 우리가 필요로 하는 노력들을 마비시키는 막연하고, 이유 없고, 근거 없는 두려움 말입니다."
"We must remember that any oppression, any injustice, any hatred, is a wedge designed to attack our civilization."
"우리는 그 어떤 억압, 불의, 증오도 우리 문명을 공격하기 위해 의도된 쐐기라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I should like to have it said of my first Administration that in it the forces of selfishness and of lust for power met their 'match'. I should like to have it said.. Wait a minute! I should like to have it said of my second Administration that in it, these forces met their 'master'."
"저의 첫 번째 임기를 말하자면, 저 권력을 탐하는 이기적인 세력들이 적수를 만나게 된 시기라고 하겠습니다. (군중 환호 후) 그리고! 저의 2번째 임기는 저 자들이 임자를 만나는 시기가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1936년 10월 31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 대선 연설.[52]
"The test of our progress is not whether we add more to the abundance of those who have much, It is whether we provide enough for those who have little."
"진보의 시험대는 많이 가진 자에게 더 얹어주고 있느냐가 아니라, 적게 가진 자에게 충분히 보태주고 있느냐이다."
"In the truest sense, freedom cannot be bestowed, it must be achieved."
"가장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는 수여될 수 없으며, 쟁취해야 한다."
"They (who) seek to establish systems of government based on the regimentation of all human beings by a handful of individual rulers...call this a new order. It is not new and it is not order."
"몇몇 개별 통치자로 하여금 모든 인간의 획일화에 기반을 둔 정부 체계를 만들려는 사람들은 이것을 '새 질서'라고 부른다. (허나) 이것은 새롭지 않고, '질서'도 아니다."
"Yesterday, December 7, 1941 - a date which will live in infamy -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was suddenly and deliberately attacked by naval and air forces of the Empire of Japan."
"앞으로 치욕의 날로 기억될 1941년 12월 7일인 어제, 미합중국은 일본 해군과 항공대로부터 고의적이고 기습적인 공격을 받았습니다."
"We must be the great arsenal of democracy We must apply ourselves to our task with the same resolution, the same sense of urgency, the same spirit of patriotism and sacrifice as we would show were we at war. I believe that the Axis powers are not going to win this war."
"미국은 거대한 민주주의병기창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전쟁과도 같은 비상사태에 있습니다. 전쟁에서 보여주는 애국심과 희생정신을 가지고 우리의 임무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나는 추축국이 결코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1940년 12월 29일 라디오 방송을 통해
"우리만 행복하고 풍요로운 오아시스되려 해선, 미국은 결코 존속할 수 없다."
독립기념일 연설.
"In politics, nothing happens by accident. If it happens, you can bet it was planned that way."
"정치에 있어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란 건 없다. 만약 우연히 일어났다면 그건 그렇게 계획된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7. 대중매체에서

파일:external/s2.hubimg.com/129917_f260.jpg* 담배를 물부리에 끼워서 꼬나문 루스벨트 사진 중 가장 유명한 사진. 이 사진은 그의 평소 모습은 아니었으나 루스벨트를 캐리커처할 때 많이 그려진다. 캐리커처로 그려지거나 하면 강조되는 특징은 안경과 애용했던 아이보리 담배, 그리고 애견 팔라가 함께 그려지곤 한다.
파일:external/www.multivisionnaire.com/keyart_fdr_243.jpg* 이런 영화도 있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중무장을 하고 나치 독일 늑대인간을 박멸한다는 내용이다. "나치 늑대인간을 위한 새로운 처리법(뉴딜)!"이라고 써져 있는 것이 압권.

8. 선거 이력

<rowcolor=#ffc224>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선거인단 수) 당선 여부 비고
1910 미국 뉴욕주 상원의원 선거 뉴욕 26구

15,708 (51.88%) 당선 (1위) 초선
1912 미국 뉴욕주 상원의원 선거 15,590 (48.45%) 재선
1920 미국 부통령 선거[57] 미합중국 9,139,661 (34.15%, 127명) 낙선 (2위)
1928 미국 주지사 선거 뉴욕 2,130,193 (48.96%) 당선 (1위) 초선
1930 미국 주지사 선거 1,770,342 (56.49%) 재선
1932 미국 대통령 선거 미합중국 22,821,277 (57.41%, 472명) 초선
1936 미국 대통령 선거 27,752,648 (60.80%, 523명) 재선
1940 미국 대통령 선거 27,313,945 (54.74%, 449명) 3선
1944 미국 대통령 선거 25,612,916 (53.39%, 432명) 4선[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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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도좌파적 경제관(경제적 진보주의) 한정. 중도우파인 사회적 의제(온건 사회보수주의)는 현대자유주의에 포함되지 않지만 고전적 자유주의에 기반한 미국의 보수주의와도 구별된다.
파일:노란색 깃발.svg 자유주의/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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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국 대통령 중 유일하게 4선을 한 인물이다.[2] 뉴욕 주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후에 로스쿨을 중퇴하였다. 그러다가 2008년, 컬럼비아 법학대학원은 그에게 'posthumous(사후) J.D.(법무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J.D 학위는 1960년대 이후 생긴 학위라 루스벨트 재학 시절에는 존재하지 않던 학위다.[3] 지금이나 예전이나 키가 장신인 편이다. 하지만 그는 소아마비로 거동이 불편했기에 그의 실제 키가 큰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4] 앨 스미스휴버트 험프리의 별명이기도 했다.[5] 그의 첫 임기 때의 선서이다. 참고로 대공황의 파장이 심한 시기였기에 필름값 역시 비싸서 전임 대통령들이던 쿨리지후버랑 비교하면 영상 화질이 매우 좋지 않다. 그는 이 이후로도 취임 선서를 3번 더 하게 된다.[6] 미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3선 이상의 대통령으로 3선한 대통령도 없다.[7] 동시대 독재자인 아돌프 히틀러보다도 대통령 재임기만 따지면(1934년부터) 합법적으로 더 오래 집권했다. 당시 미국 헌법에는 대통령의 연임 제한을 따로 명문화 해놓지 않았으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이 3선을 지내지 않은 것이 관례화 되어 후임자들 또한 모두 단임 혹은 재선만을 하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었다. 하지만 루스벨트가 대공황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역사적 위기 상황 속에서 종래의 관습을 깨고 4연임이나 하면서 1951년 미국 연방 정부 헌법에 3회 이상 중임을 제한하는 수정 제22조가 신설된다.[8] 원래 이 Roosevelt라는 성은 네덜란드어에서 '장미밭 출신(from the rose field)'을 뜻하는 단어로, 미국식 영어 기준으로 /ˈroʊz(ə)vɛlt, -vəlt/(로저벨트·로저벌트 등)에 가까우나,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전후까지 국내 신문에서 루즈벨트·루스벨트라고 표기하는 바람에 관용 표기가 굳어진 경우이다.[9] 굳이 동양식으로 따지자면, 같은 항렬에 속한다.[10] 미국 의회 의원들의 임기 시작일도 이때 1월 3일로 조정되었다.[11] 낙선. 당시 대통령 후보: 제임스 콕스(오하이오 주지사)[12] 1945년 4선 임기 취임 후, 뇌출혈로 사망. 부통령이였던 해리 트루먼이 대통령직을 승계했다.[13] 세계사에서 미국 대통령이 세계의 지도자 역할을 하게 된 것도 루스벨트 이후부터다. 이를 두고 역사상 가장 평화적인 패권 교체기였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물론 당사국들간 잡음이 적었던 것엔 추축국이라는 공통의 적이 있었던 점도 한 원인이었다.[14]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진이 교과서에도 자주 나오는, 상기된 얄타 회담 당시 정중앙에 앉은 루스벨트의 모습이다.[15] 다만, 정부수반의 장기 집권이 반드시 민주주의의 위기나 후퇴를 야기한다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민주주의 선진국으로 평가받는 일부 유럽 국가에서도 10년 이상 장기 집권하는 정치 지도자들이 종종 나오곤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스웨덴타게 엘란데르(23년)나 영국마거릿 대처(11년 반), 토니 블레어(10년), 독일앙겔라 메르켈(16년) 등이 있다. 물론 이런 나라들은 대부분 정부수반의 임기가 불안정하고, 인물 한 명보다는 정당이 집권하는 개념이 강한 의원내각제 국가라는 차이는 있다. 프랑스 대통령의 경우 과거에는 임기 7년에 1회 연임까지 가능했던 터라 한 차례 재선에 성공하면 14년 집권이 가능했고, 임기가 5년으로 줄어든 지금도 최장 10년 집권의 길이 열려있다.[16] 다만, 공화당이 민권법과 민권 운동에 완전히 적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공화당 상원 의원 36명 중에서 27명이 민권법 통과를 지지했고, 자유주의적인 공화당 주류들은 링컨이 남긴 평등주의의 유산을 부정하지 않았다.[17] 당장 2022년 벌어진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만 봐도 알 수 있듯 주변국들이 전쟁 특수는커녕 세계 물가만 더 치솟아 오히려 경제가 나빠졌다. 다만 이건 좀 사례가 다른 것이 전쟁상인 노릇하다 진주만 이후 전시생산 체제가 완편된 상태로 참전한 미국, 바다 건너에서 한국전쟁 지원기지로 공업력을 끌어올린 일본과 달리 우크라이나는 원래 손절할 생각이었던 나라가 러시아군의 무능이 겹쳐 잘 버티자 호흡기 달려고 서방이 지원을 퍼부었기 때문이다. 군사력을 감축하던 유럽국가들이 생산도 안하던 군수품을 보급허느라 민간소비재 생산도 줄고 2차대전 이후 세계 최대 곡창이던 우크라이나의 밀 공급이 중단된 여파이기 때문에 상황이 다르다. 근현대전에서 전쟁당사국은 전쟁으로 손해를 보는 경우가 잦다. 애초에 영국이 세계 패권을 잃은 이유가 바로 미국이 전쟁 특수로 살아난 2차대전이다.[18] 정작 아돌프 히틀러가 오히려 오언스를 환대해 주는 일화도 있었다.(...)[19] 라파엘 메도프의 발언에 따르면 유대인도 싫어했다고 한다.[20] 더 정확하겐 중국도 있긴 했지만 사실 대륙 수비하기도 버거운 상태긴 했다.[21] 일각에선 루스벨트가 죽기 직전 병마에 시달리던 상황이라 총기를 잃고 나약해져서 그런 결정을 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실제 루스벨트는 말년에 가면 회담하는 것도 꽤 힘들어해서 실제 스탈린이 저 양반 오래 못살 것 같다고 측근들에게 얘기할 정도였다. 특히 얄타 회담에서 루스벨트가 소련에게 많이 양보한 것에 대해서는 FDR의 건강 이상을 감지한 스탈린이 질질 끄는 지연 협상 전략을 사용했고, 이에 루스벨트가 말려든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22] 독일, 일본[23] 미국의 5+1 분할, 영국의 2개국 분할안[24] 사망 직전[25] 버락 오바마의 경우에도 취임 당시와 퇴임 당시의 인상이 분명하게 차이가 난다.[26] co-education, 즉 '남녀공학'이란 뜻이고, 이 시절에는 대학 같은 고급 교육은 남자가 받는게 당연하다라는 인식이 팽배했다 보니 굳이 '남녀공학'이라 하면 여학생을 뜻했다. e와 l을 왜 헷갈리나 싶겠지만 필기체로 쓰면 두 글자는 필체에 따라 비슷해질 수 있다.[27] 당시 경제학자로 주가를 올리던 케인스가 뉴딜의 논리적 일관성을 보완해줄 수 있다고 봐서 측근이 주선한 자리였다고 한다.[28] 실제로 케인스는 본래 주전공이 수학이었다.[29] 사실 대중교통 종류가 많고 지하철 역 또한 촘촘하게 짓는 일부 서구권 대도시의 경우 이런 식의 역명 명명법이 크게 특이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파리 1존의 경우에는 역 사이 거리가 짧으면 1분이 채 안될 정도로 많은 역이 모여있기에 지명과 전혀 관련없는 역명도 종종 존재한다. 예를 들어 7호선 중에는 스탈린그라드역도 있다.[30] 뇌관을 해제하지 않아서 어뢰가 발사되게 만들었다. 상당히 중대한 직무태만이자 관리 소홀이다.[31] 승조원들이 대통령 암살 미수 혐의로 감금당했다느니, 포터의 폐급짓에 제대로 빡친 아이오와가 포터를 향해 해명을 요구하며 포문을 돌렸다느니 하는 상당히 과장된 얘기들이 인터넷상에 널리 퍼져 있지만, 조사 기록이나 관계자들의 회고 등 실제 증거자료에 의하면 아무런 근거가 없는 호사가들의 낭설에 불과하다.[32] 구 국군방송(현 국방TV)에서 방영했던 미국 다큐에 의하면 전시 상황으로 긴급히 방탄차를 장만하려고 해도 당시 법적 대통령 관용차 비용을 훌쩍 넘는 터라 도저히 장만할 수 없다보니 꺼내 쓴 거라고 한다.[33] 비슷한 예로 한국 전쟁 당시 켈로 부대가 입은 나치의 무장친위대 위장 군복이 있다. 그 당시 미군은 워낙 급하게 한국에 와서 보급이 상당히 부족했었고, 2차 대전 중에 미군 측이 압수해둔 무장친위대 군복을 켈로부대원에게 지급했다. 이에 북한군과 중국군은 이 군복은 뭔가 하고 의문을 가졌는데, 여차저차해서 이 소식을 들은 (나치와 싸워본) 소련은 이 군복을 단번에 알아보았고, 때문에 왜 독일이 여기 참전했냐며 소련이 항의하기도 했다고 한다.[34] 실제로 대공황2차 대전같은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많이 겪었고, 무언가를 읽고 Grand 표시를 적어놓은 적도 있으며, 젊은 시절부터 오크 섬보물을 찾아다녔고 해군과도 연관이 있는 등 원피스와 관련지을 수 있는 부분이 많다.[35] 아무리 이 쪽으로 동양에 비해 개방적인 미국이라 해도 당시의 시대상을 생각하면 이혼경력은 상대방에게 공격의 빌미를 줄 수 있는 큰 흠집이었다. 하물며 그 이유가 아내의 비서와 바람나서라는 건 아주 물어뜯기 좋은 소재였다.[36] Halsted는 결혼 후의 성이다.[37] 거기에 23세라는 나이차이도 사실 프랭클린의 아버지가 프랭클린을 늦은 나이에 재혼해서 본 늦둥이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의 이복형인 제임스 루스벨트 루스벨트는 마찬가지로 12촌 동생인 시어도어 루스벨트보다 4살이 많았다. 이 정도면 평범한 사촌과도 비슷한 나이일 정도이다. 거기에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이복형이 낳은 조카들보다 나이가 어릴정도로 늦둥이였기에 그나마 이정도 나이차이가 났던 것이다.[38] 유교주의로 깐깐한 한국에서도 8촌 이상이면 혼인이 가능할 정도다.[39] 시어도어는 공화당, 프랭클린은 민주당원이었다. 실제 시어도어가 대선에 출마했을 당시에도 프랭클린은 우드로 윌슨을 지지했다. 이는 18세기에 루스벨트 집안이 이미 갈라져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아온 영향도 있고, 공화당엔 이미 시어도어의 아들들이 진출해있어서 블루 오션을 노린 것 아니냔 추측도 있다. 다만 성향은 진보 성향인 점이 같다.[40] 그 유명한 러시모어 산의 네 얼굴 중 하나가 시어도어 루스벨트다.[41] 다만 시어도어 루스벨트 문서에도 나오듯 한편으로는 일본을 경계하기도 해서 일본인들이 무조건 좋아할 일은 아니다.[42] FDR 시절부터 일명 맨해튼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었다.[43] 사실 이런 식으로 타국의 역사를 자국 문제와 대입해 감정적으로 재단하는 것은 심도깊은 역사 인식에 방해가 될 수 있다. 현실적으로 보면, 시어도어 시절엔 일본과 친선 관계를 맺는 것이 미국 입장에서 나쁠 게 없었고, 반대로 프랭클린 시절엔 일본의 폭주와 선빵질로 인해 일본과 싸운 것일 뿐이다. 두 지도자 모두 시대적 분위기에 따라 자기들 딴엔 적절한 정책을 펼쳤을 뿐이지 일본에 대한 개인적인 호불호가 의사결정의 절대적인 요인까진 아니었다. 게다가 프랭클린 시대에는 일본이 전체주의 유사 파시즘으로 미쳐 돌아가던 시절이였지만, 시어도어 시대 일본은 당대 트렌드인 제국주의 흐름에 동참한거 이외에는 나름 온건한 헌정보수~리버럴들이 정치를 주도했기에 서방과 딱히 충돌할 이유도 없었다. 즉, 한국이나 일본이나 서로 현재 자기들의 국익 문제나 민족 감정으로 두 대통령을 재단하고 있는데 이러한 판단은 두 대통령에 대한 한쪽에 치우친 판단을 심을 우려가 있다. 실제 한일의 인식과 별개로 미국 내에서 시어도어와 프랭클린은 둘 다 미국식 진보주의의 상징적 인물로 리버럴, 좌파들에게 비슷한 존경을 받고 있다. (가령 힐러리, 오바마나 샌더스 등 미국의 리버럴, 진보 거물들도 두 대통령 모두에게 존경을 표하며 둘의 진보적 업적을 기리고 있다. 다만 시어도어의 제국주의적 측면은 이쪽도 딱히 옹호하진 않는다.) 반면에 미국의 강경보수파들은 특히 국내 정책에선 둘 다 그들 기준 '사회주의자'라며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즉, 현대 미국 사회에서 둘의 포지션과 위상은 생각보다 크게 다르지 않다.[44] 단순한 우표 수집의 단계를 넘어 우표들과 관련한 역사 자료를 모아 공부하고 연구하는 경지에 이른 사람들을 일컫는다.[45] 오해의 여지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덧붙이자면, 우표 수집을 즐긴다는 이유로 무능한 사람을 앉힌 건 절대 아니었다. 팔리 장관은 덕질과 직업이 일치하는 인물이였으며, 루스벨트의 당선에 지대한 공을 세운 바 있는 날카로운 정치적 식견과 감각을 갖춘 인물이었고 대공황 과정에서 우체국과 우편국 등 체신부에서 관리해야 하는 것을 평균 이상으로 훌륭하게 관리했다. 이후 루스벨트의 3선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내비치며 루스벨트와의 정치적 우호관계를 매듭지었다. 다만 사적으로는 사이가 계속 좋았다고. #[46] 존 F. 케네디의 아버지다.[47] 존 F. 케네디의 동생이자 후에 법무장관이 된 바로 그 사람이다. 그도 어렸을 때 우표 수집이 취미였다고 한다.[48] 민주당 전국위원장 출신으로, 급진 성향의 헨리 A. 월리스 부통령이 다시 루스벨트의 러닝메이트로 지명받지 못하게 막는등 보수적 면모가 강한 인물이었다.[49] 그러나 별 효과는 없었는데 사우디의 유정은 1936년에야 처음 발견되었고, 1950년대까지도 세계 최대의 산유국은 미국이었기 때문.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연합군이 사용한 석유의 70%는 미국이 텍사스와 캘리포니아 유전에서 공급한 것이다.[50] 사우디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병력을 보낸 적은 없었지만, 승세가 확연히 기운 1945년 2월 28일 추축국에 선전포고를 하긴 했다. 그래서 사우디는 형식상으로는 2차대전의 승전국으로 취급받지만, 일부 자료에서는 그냥 포르투갈처럼 중립국으로 표현되어있는 경우도 있다.[51] FDR-이븐 사우드를 시작으로 사우디는 모로코와 함께 지금도 아랍세계에서 친미 성향이 강한 국가로 남아있다. 심지어 지금도 미군은 사우디에 주둔해있다.[52] 연설문 일부 번역은 여기에서, 원전문은 여기를 참고할 것.[53] 실제 린드버그는 반전론자 겸 친독인사였으며, 이 때 루스벨트에게 공개적으로 비판받는 것은 물론 군 지위를 박탈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그가 친독화하는 설정은 좀 다르다. 자세한 건 스포일러.[54] 내전 중인 미국에서 화해의 연설을 하고 귀환 도중 실종된다.[55] 미국에서 대체역사소설의 거장으로 인정받는 인물. 수십편의 대체역사소설을 썼는데 국내에는 장편 비잔티움의 첩자, 단편 가지 않은 길, 최후의 신조만이 번역출판되었다.[56] 근면함(Industrious)의 오역이다.[57] 대통령 후보는 제임스 콕스.[58] 1945. 4. 12. 임기 중 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