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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2-18 16:05:12

이경선(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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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이경선
李敬善 | Lee Kyung Seon
파일:이승만조선.jpg
가운데 앉아 있는 남자가 바로 이경선이다.[1]
출생 1839년 6월 12일
황해도 평산도호부
(現 황해북도 평산군)
사망 1912년 12월 4일 (향년 73세)
경기도 경성부 서부 반석방 도저동계 도동 우수현
(現 서울특별시 용산구 도동2가)
본관 전주 이씨[2]
부모 아버지 이창록, 어머니 밀양 박씨[3]
배우자 김말란[4] (1896년 사별)
자녀 장남, 차남
삼남 이승만
장녀 우태명(禹泰命)의 처
차녀 심원기(沈遠基)의 처

1. 개요2. 생애3. 조상4. 후손5. 참고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부친. 조선 태종의 장남인 양녕대군의 15대손[5]이다.

2. 생애

1839년 양녕대군의 14대손인 이창록(李昌祿)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승만이 2세이던 1877년, 고향이던 황해도를 떠나 한성부로 이사하여[6] 숭례문 밖 염동, 낙동을 거쳐 도동의 우수현(雩守峴)에 최종적으로 정착하여 그곳에서 지냈다. 이승만의 회고에 따르면 이경선은 한때 부자였으나 젊은 시절에 모두 탕진했다고 한다.

1899년, 사실상 외아들인 이승만이 박영효의 내란 음모 사건[7]에 연관이 있다는 이유로 투옥되자 분주히 구명에 나섰다. 아들이 옥고를 치른 데다 아들이 5년 만에 석방되자마자 미국에 있던 하나뿐인 손자 이봉수가 디프테리아로 사망하는 참척까지 겪었다.[8]

1912년 12월 4일 73세로 사망하였다. # 시대상을 고려하면 비교적 장수했다.

3. 조상

4. 후손

5. 참고


[1] 오른쪽이 바로 이승만이고 왼쪽이 이승만의 서당 친구였다.[2] 양녕대군파 15대손, 시조 39세손 ○선(○善) 항렬.(족보)[3] 1817년 4월 1일 ~ 1849년 8월 16일 (향년 32세), 박동욱(朴東郁)의 딸이다.[4] 1833년 2월 20일 ~ 1896년 7월 25일 (향년 63세), 김해 김씨 김창은(金昌殷)의 딸이다.[5] 물론 전 국왕의 현손까지이거나 현 국왕의 8촌 이내 친척까지만 왕실 종친 대접을 해주기 때문에 왕족으로서의 대우는 먼 선대에서 이미 끝났다.[6] 이 때문에 이승만의 생가는 현재 없다. 6.25 전쟁으로 이북 영토가 된 것은 둘째치고 해방 시점을 기준으로도 너무 오래 전에 이사갔기 때문. 거기다 이승만은 대한제국 시절부터 일제시대 내내 인생의 반 이상을 미국에서 살았다.[7] 고종을 폐위시키고 박영효를 대통령으로, 윤치호를 부통령으로 세우려 했다는 음모론이다. 안 그래도 갑신정변으로 고종 및 조선 조정에 단단히 찍힌 박영효인데 이런 음모론까지 퍼지니 입장이 굉장히 난처해졌고 이후 다른 일로 유배를 가게 된 후 개화파에서 친일파가 되었다.[8] 이승만이 같은 전주 이씨인데다 같은 이성계의 후손임에도 먼 친척들인 대한제국 황실을 극도로 혐오했던 이유가 이 때문이라고 추측되고 있다. 자신을 5년동안 감옥에 보낸 데다 감옥에 있는 사이 하나뿐인 아들까지 디프테리아로 죽었으니 이 때의 기억이 평생 남은 것이다. 대를 잇는 것이 중요했던 조선시대에 태어난 이승만으로서는 외아들 이봉수가 사망하고 구속된 5년 동안 대를 이을 기회를 박탈당했으니... 비록 이승만이 개신교 신자가 된데다 유교를 조선이 근대화를 못 이룬 원인으로 생각하여 유교를 부분적으로 배척하긴 했어도 유교적 사고방식은 평생 남아 있어서 외아들이 죽은 후에 양아들을 2명이나 들였다.[9] 정식으로 입양 절차를 밟은 것이 아니며 이승만이 없는 사이 박승선이 입양한 것으로 이승만은 이은수를 파양하는 것과 동시에 박승선과 이혼해 버렸다. 사실 이혼하기 훨씬 전 프란체스카와 미국에서 결혼한 만큼 중혼 논란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