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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12 22:39:43

유진 슬레지

유진 슬레지
Eugene Bondurant "Sledgehammer" Sledge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ugene_sledge.jpg
출생 1923년 11월 4일
미국 앨라배마 주 모빌
사망 2001년 3월 3일 (향년 77세)
미국 앨라배마 주 몬테벨로
신체 173cm 63kg[1]
복무 미합중국 해병대
복무 기간 1942 ~ 1946
학력 플로리다 대학교 생물학 박사 (1960)
몬테발로 대학 생물학 교수(1962~1990)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2.2. 참전2.3. 전역 이후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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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진 슬레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합중국 해병대에 복무했던 참전군인이며, 대학교수이고, 작가이기도 하다. 1981년 발간된 그의 전쟁 회고록, "태평양 전쟁(With the Old Breed: At Peleliu and Okinawa)"은 후일 켄 번스(Ken Burns)의 PBS 다큐멘터리, "The War"의 소재가 되었고, HBO 방송국의 전쟁 드라마 "더 퍼시픽, The Pacific"으로 극화되기도 했다. 드라마 더 퍼시픽에서 배우 조셉 마젤로(Joseph Mazzello)가[2] 유진 슬레지 배역을 맡아 연기했다.

2. 생애

2.1. 유년기

1923년 앨라배마 주 모빌에서 부유층으로 태어났다. 증조부는 남북전쟁 당시 남부군 장교였고, 아버지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미합중국 육군 군의관으로 복무한 경력이 있으며 모빌 지역에서는 유명한 의사였다. 유진은 을 좋아했고 몸이 허약했었다. 그의 아버지는 유진이 바깥에 나가는 걸 장려했고, 유진은 아버지로부터 낚시와 사냥을 배웠으며, 유진의 부모님은 그를 위해 자동차를 사주기도 했다.[3] 또한 시드니 필립스하고는 고향 친구였으며, 둘 다 밀덕질에 심취해 구덩이나 참호를 파서 리인액트먼트를 하는가 하면, 남북전쟁 당시 쓰였던 총알이나 남부군 벨트버클 같은 유물을 파내는 걸 즐겼고, 이를 위해 거의 주말마다 모빌 외각에 있는 옛 남북전쟁터로 답사를 나가기도 했다.

그러다 진주만 공습으로 미 전역이 분노에 휩싸였을 때 필립스와 함께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기로 한다. 하지만 그의 부모님은 유진이 류머티스성 열을 가지고 있으며, 당시에 다니고 있던 머피 고등학교를 졸업해야 한다는 이유로 참전을 반대했다. 류머티스성 심장 잡음[4] 때문에 제때 입대할 수 없었던 유진을 두고 친구인 필립스는 먼저 신병 훈련소로 떠난다. 머피 고등학교 졸업 후, 1942년 가을에 유진은 앨라배마의 마리온에 있는 마리온 군사학교에 입학했으나, 그는 그 학교 대신 1942년 12월에 미 해병대에 지원하여 장교를 양성하는 V-12 프로그램에 배치되어 조지아 공과 대학에 다니게 된다. 그러나 유진은 이 프로그램을 계속 받다가는 직접 전쟁터로 나가서 싸울 기회를 갖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일부러 시험 성적을 적당히 낮추어 프로그램을 이수하지 않고,[5] 자신이 원하던 전투부대인 미 해병대 1사단에 입대하게 된다.

이 당시 유진의 형으로 미 육군 기갑병과 장교였던 에드워드 슬레지 소령(최종 계급)은 자신이 전쟁터[6]전차 앞에서 찍은 사진을 유진한테 보냈다고 한다. 유진은 사진을 보면서 형이 아직 전쟁터에 나가지 않은 자신을 놀리는 것 같아서 기분이 껄끄러웠다고 한다.

2.2. 참전

입대 후, 그는 미 해병대 제1사단 5연대 3대대 K중대('킹 중대') 박격포소대[7]에 배치되었고 펠렐리우 전투오키나와 전투를 겪는다. 군생활을 하면서 스내푸하고 꽤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8] 태평양 전쟁이 끝난 후, 중국 베이징으로 파병됐다. 1946년 상병 계급으로 제대했다.

그는 복무기간 동안 가지고 있던 성경이나 기타 종이에 틈틈이 전쟁에 대한 생각 등을 정리했고, 이는 나중에 그가 회고록을 쓸 때 참고가 되었다.

2.3. 전역 이후

파일:/img/img_link7/851/850383_2.jpg

생물학과 교수 시절의 유진 슬레지.

전역 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의사가 되고자 했으나, 해병대 전투부대에 들어가려고 일부러 낙제한 V-12 프로그램을 이수하지 않은 것이 의대 진학에 방해가 되었다. 결국 그는 앨라배마 기술대학(오번 대학의 전신)에서 경영학을 공부했고 보험회사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친구의 결혼식에서 같은 모빌 토박이인 진 아르세노를 만나 1952년 3월 결혼했고, 전혀 즐겁지 않았던 보험회사 일을 때려치우고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 공부를 재개하여 플로리다 대학에서 생물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앨라배마 주 북부의 몬테발로 주립대학에서 생물학과 교수가 되어 여생을 보냈다. 이후로는 자신이 전쟁 당시에 성경이나 쪽지에 일일이 메모했던 내용을 정리하여 1981년 참전 수기 <With the Old Breed at Peleliu and Okinawa>를 출판했다. 'With the Old Breed'는 드라마 더 퍼시픽의 엔딩곡 제목이기도 하다.

2001년 3월 3일에 손자, 손녀 6명을 두고 위암으로 사망했다. 1년 뒤인 2002년, 아내인 진 슬레지는 남편이 손으로 쓴 참전 수기의 원래 원고에서 일부 원고를 <중국 해병대(China Marine)>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3. 여담

파일:/img/img_link7/851/850383_3.jpg* 1982년도의 유진 슬레지.


[1] 징병검사에서 측정된 수치이다. 본인의 저서에서는 본인의 키가 175cm 정도(five feet nine inches) 라고 밝혔다.[2] 쥬라기 공원(영화)에서 존 해먼드의 손자 티미 역을 맡았던 배우. 이후 보헤미안 랩소디(영화)에서 스내푸 역의 라미 말렉과 다시 만난다.[3] 1930년대 미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세계 1위이긴 했지만, 중산층 부모들이 영화에서처럼 자식들에게 자동차를 사줄 정도로 부유해진 것은 1950년대 이후에나 가능해진 일이다. 즉, 유진네 집안은 지역 유지급의 부자였던 셈. 드라마에서도 넓은 마당이 딸린 집에 흑인 정원사와 가정부를 두고 있는 모습이 나온다.[4] 드라마 더 퍼시픽 초반에 유진이 아버지로부터 입대 전 심장박동 검사를 받은 것도 이 심장 잡음 때문이었다.[5] 부모님에게는 일부러 낙제했다는 사실은 알리지 않은 채 '그냥 이 길이 자신의 길이 아닌 것 같다'고만 알렸다.[6] 에드워드는 유럽 서부전선에서 나치와 싸웠다.[7] 60mm 박격포 분대원으로서 포탄을 떨어뜨릴 각도를 재는 역할을 했다. 박격포가 소용없는 근접전투에서는 들것 운반이나 지원 사격수를 맡기도 했다.[8] 유진의 참전 수기에서 유진은 스내푸 옆에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밝혔다.[9] 소위 '오함마'라고 불리는, 양손으로 내리쳐야 하는 큰 망치이다. 유진의 이름에 '슬레지'가 들어가기도 하지만, 유진이 평소엔 조용하다가도 의외로 성깔 있고 잘 싸워서 붙여준 듯 하다. 스내푸가 이 별명을 지어 줄 때 옆의 빌 스미스에게는 반대로 '볼핀 해머'라고 지어주었다. 이유는 '작으니까'(...)[10] 이와 정반대로 그의 절친 시드니 필립스는 매우 쾌활하고 밝은 성격이었고 유진이 전쟁의 상처에서 벗어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11] 그의 이러한 성격은 그가 훗날 회고록을 쓰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12] 군의관으로 1차 세계대전을 경험했다. 이 때문에 전쟁의 참상을 잘 알고 있기도 하다.[13] 심약했던 유진이 험악한 성깔로 바뀐 것을 보여줌과 더불어 당시 민간인과 군인간의 괴리를 묘사하기 위한 부분이긴 하지만, 이정도로 멕이는 질문을 한다는 것은 미국 내에서도 상황 묘사를 와닿게 표현할려고 접수원을 의도적으로 심각하게 무개념으로 설정했다는 평이 주류이다. 하지만 실제로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긴 했었다고.[14] 일본군이 펠렐리우에서 미 해병대가 미처 수습하지 못한 전사자들의 시신을 탈취하여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훼손한 채 유기했고 이를 이후 발견한 슬레지와 동료 해병들은 일본군에 대해 엄청난 증오와 분노를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15] 특히 앤드류 할데인 대위의 죽음은 그에게 전쟁이 끝나고 수십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슬픔과 상실감을 주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