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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파키스탄 전쟁의 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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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 ||
1999년 5월 3일 ~ 7월 26일 | ||
장소 | ||
잠무 카슈미르 카르길 지역 | ||
전력 | ||
교전국 | [[인도| ]][[틀:국기| ]][[틀:국기| ]] | [[파키스탄| ]][[틀:국기| ]][[틀:국기| ]] |
지휘관 | 베드 프라카쉬 말리크 | 페르베즈 무샤라프 |
병력 | 30,000명 | 5,000명 |
피해 | 527명 전사 1,363명 부상 제트기 1기 격추 제트기 1기 손상 헬리콥터 1대 격추 | 453명 전사 665명 부상 |
결과 | ||
인도군의 승리 | ||
영향 | ||
카길 지역에서 파키스탄군의 철수 인도의 영유권 회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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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9년 5~7월 인도와 파키스탄 간에 벌어진 전쟁. 파키스탄군이 영토 분쟁 지역인 카슈미르의 카길(Kargil)을 점거한 것이 발단이었다.핵무장국 사이에서 발생한 최초의 전쟁으로 기록되었으며[1], 아울러 병참이 곤란해지는 고산 지대에서 벌어진 가장 최근의 전투다. 카길 전쟁 이전에는 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가 치른 이손초 전투가 가장 높은 곳에서 벌어진 전투였다. 그리고 다수의 국가가 개입하지 않고, 교전당사국 간의 1:1 전쟁으로는 20세기의 마지막 사례이다.[2]
2. 경과 및 진행
1999년 2월부터 파키스탄은 비밀리에 다수의 대대급 병력을 인도령 잠무 카슈미르 지역으로 침투시켰다. 이들 병력은 명목상 준군사조직인 북부 경보병대 소속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파키스탄 육군의 제10군단이 지휘했으며, 파키스탄군 특수부대도 중대 규모로 참전했다.파키스탄군의 침투, 배치 지도. 인도령 잠무 카슈미르의 북부를 관통하는 NH-1A 고속도로를 직접 공격할 수 있는 고지대를 다수 포함했다. 파키스탄이 이들 지역을 점령할 경우 인도가 잠무 카슈미르의 주요 지역들에 대한 행정, 관할권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이 대폭 약화되고, 결국 파키스탄의 영유권 확대에 유리해지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 문제였다. |
인도가 이들 병력의 존재를 발견한 것은 3개월이 지난 그해 5월이었다. 파키스탄군 병력이 침투한 지역은 히말라야산맥 인근의 고원 지대로 평균 해발고도가 3천에서 5천미터에 달하고, 영하권의 추위가 계속되는 곳이어서 겨울에는 경계가 어려웠다. 파키스탄은 이들 무장 병력이 "카슈미르 내부의 자생적인 의용군 세력"이라고 주장하며 연관성을 부인했지만, 인도는 5월 25일부터 파키스탄군을 격퇴하기 위한 군사작전을 실시했다.
전쟁 초반은 파키스탄군이 우세했다. 이들 병력이 점령한 고지대는 북부 카슈미르로 이어지는 유일한 고속도로와 인접했으며, 덕분에 접근해 오는 인도군을 포격으로 손쉽게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5월 27일엔 인도 공군이 MiG-21과 MiG-27을 각각 한 대씩 손실해 당시 MiG-27 조종사 Kambampati Nachiketa 대위가 파키스탄군에 포로로 잡혔으며, 28일엔 인도군 Mi-17 헬리콥터가 파키스탄군의 스팅어 지대공미사일에 격추되어 4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6월 1일엔 파키스탄군이 미국으로부터 수입한 AN/TPQ-36 대포병 레이더를 이용해 NH-1A 고속도로의 인도군에 포격을 가해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인도가 최대 2만 명에 가까운 보병과 공군 전투기 등으로 지속적인 화력 지원을 가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인도 공군의 프랑스제 미라주 2000 전투기들이 LGB를 파키스탄군의 물자 집적소에 투하하고 250여문이 넘는 스웨덴제 FH-77B 곡사포들이 파키스탄군의 대포병 사격으로 인한 일부 손실에도 꾸준히 파키스탄군에게 포격을 가한 것. 그리고 8000여 개 이상의 지뢰들이 인도군에 의해 곳곳에 매설되었다.
고지에 국기를 게양한 인도군 |
6월 중순부터 인도군이 파키스탄군을 주요 고지에서 격파하기 시작했고, 7월 초에는 대부분의 고지가 인도군에 의해 탈환되었다. 7월 4일 파키스탄 정부가 병력 철수를 선언하였고 7월 하순 철수가 마무리되었다. 이로써 전쟁은 인도의 승리로 끝났으나 사상자는 인도군이 파키스탄군의 1.7배에 육박했다.
3. 평가 및 영향
인도, 파키스탄 양국이 경쟁적 핵개발을 실시한 지 1년 만에 전쟁이 일어나자 세계 각국은 양국 간 분쟁이 핵전쟁으로 확전될 가능성을 우려했다.당시 파키스탄의 도발은 '핵무장에 따른 지나친 과신'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우리가 핵무기를 갖고 있으니 국지전 정도 일으킨다고 인도가 함부로 맞서지 못하겠지?"라고 오판했다는 것. 이를 국제정치학에서는 '안정-불안정의 역설'(stability-instability paradox)이라고 한다. 핵무기를 가진 국가들이 핵전쟁에 따른 공멸을 피하기 위해 서로 전면전쟁은 자제하지만, 그보다 낮은 수준의 무력 충돌이 발생할 가능성은 오히려 높아진다는 이론. 또한 파키스탄은 전쟁이 일어난다고 해도 우방과 국제사회가 '핵전쟁의 예방'을 명목으로 적극 개입하면 인도에게 자신들의 점령을 용인하도록 강요하는 데 유리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실제 전쟁에서는 오히려 파키스탄이 침략자로서 국제적 비판을 받았고, 주요 강대국들도 파키스탄의 철수를 요구하면서 파키스탄의 전쟁 목적은 실패했다. 심지어 인도 견제라는 명목으로 협력해 온 중국마저도 파키스탄을 외면했다.
인도는 해군 3개 함대 중 2개를 파키스탄 인근의 아라비아해 북부로 투입했는데, 유사시 파키스탄의 최대 도시인 카라치의 항구를 봉쇄하거나 해상교통로의 차단을 감행하기 위해서였다.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당시 파키스탄이 보유한 연료 비축분은 전면전쟁을 전제로 6일치에 불과했는데, 이 점에서 인도 해군의 무력 시위는 파키스탄에 상당한 전략적 압박이 되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후에도 인도는 카슈미르 접경, 자국 내부에서 친파키스탄 이슬람 무장단체의 테러 공격을 받게 되었다. 2001년 뉴델리 국회의사당 테러, 2008년 뭄바이 연쇄 테러가 대표적 사례. 인도는 이 사건들이 파키스탄 군부와 정보기관의 지원과 배후 조종에 의한 대리 전쟁이라고 주장하는데 카길 전쟁과 마찬가지로 핵무장을 통해 전면전의 부담을 회피하면서 인도에게 인적, 물적 피해와 전략적 부담을 강요하려는 의도라는 것이다.
이에 인도군은 2000년대 중반 이후 재래식 군사력을 중심으로 파키스탄의 저강도 도발에 신속한 반격, 보복을 가한다는 '콜드 스타트(cold start)' 전략을 수립,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단급 이하의 중소 규모 전투집단들(IBG)을 동시 다발적으로 투입하여, 전면전쟁으로 악화되기 이전에 파키스탄에게 도발 의도를 무력화할 만큼의 정치-군사적인 응징을 가한다는 것. 인도군은 이러한 재래식 군사력 중심의 응징 능력 확보, 발전이 그동안 계속되어 온 파키스탄의 저강도 분쟁 도발, 일방적인 피해 강요 시도를 억지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파키스탄의 나스르 미사일 |
이처럼 남아시아의 전통적 지역 라이벌인 인도, 파키스탄의 군사적 대립은 양국의 핵무장으로 인해 그 복잡성과 위험성이 더욱 심화되는 추세에 있다.
4. 기타
- 당시 파키스탄의 수상 나와즈 샤리프는 카길 지역에서의 병력 철수 결정을 패배로 인식하며 반발한 군부에 의해 3개월 후인 1999년 10월 쿠데타로 실각했고, 육군참모총장 페르베즈 무샤라프가 장기 집권했다. 무샤라프는 노동 미사일을 기반으로 한 가우리-1의 실전배치를 지시했지만 유도 시스템에 결함이 있어서 실제로 배치하지는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도군 포병대 |
- 파키스탄군은 대포병 레이더로 인도군의 포병 전력에 상당한 타격을 입히기도 하였다. 그래서 인도군은 이 피해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2015년까지 최소 1,000억 달러를 부어 군대를 정비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대포병 레이더야 말할 것도 없고 항공모함, 원자력 잠수함 등 각종 전력을 갖춰 현재는 파키스탄을 압도하고 있다. 반면 파키스탄은 탈레반을 지원하던 추악한 실태가 드러나서 2년 뒤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때는 좋은 말 할 때 길을 내주지 않으면 탈레반과 같이 석기시대로 만들어버리겠다는 협박까지 받아 미군에 영공을 내주어야 했다. 그럼에도 탈레반과의 유착을 포기하지 않아 미국의 경제제재를 받게되고, 핵무기를 앞세워 분쟁만 일삼는 국제사회의 문제아로 낙인찍힌 상태다. 심지어 파키스탄은 경제난도 심각해서 국제통화기금의 지원을 받는 처지가 되었고 국방비를 줄여야 하는 지경까지 왔다. 난국이지만 성장을 계속하고 있는 인도, 외교와 군사는 별볼일 없어도 경제 개발에 주력해서 1인당 GDP가 파키스탄을 앞지를 정도가 된 동파키스탄 방글라데시와는 상황이 정반대다.
- 이때 인도군 소속 구르카들의 백병전 전과가 대단했다고 한다. 파키스탄군이 구르카들과는 철저히 거리를 유지하라고 명령했을 정도였으며 결국 멀리서 포격하며 제압해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파키스탄군은 포로로 잡은 구르카들을 잘 대해 줬는데 나중에 또 터질 전쟁에서 보복당할 것을 두려워해서 그랬다고 한다. 석방된 구르카 포로들은 인도 정부에게 훈장도 받고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 한편 인도군은 당시 미국에서 군사용 GPS를 제공받을 수 없었다. 물론 민간용 GPS는 사용할 수 있었지만, 선택적인 오차가 있었기에 군사용으로 쓰기에는 정밀도가 부족했고 방해전파로 교란이 가능한 문제점도 있다. 실제로 미군은 특정 지역의 민간용 GPS 사용을 방해하는 것이 가능하며, GPS 교란 기술은 북한에서도 사용할 만큼 어렵지 않은 기술이다. 이런 사유로, 인도에서는 자체적인 위성 항법 시스템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2006년부터 인도에서는 자체적인 위성 항법 시스템 IRNSS(Indian Regional Navigation Satellite System)를 개발하기 시작했고, 2013년부터 2018년까지 쏘아 올린 총 7개의 위성으로 인도 아시아 대륙, 남쪽으로는 인도양, 서쪽으로는 아라비아 반도, 동쪽으로는 한반도까지를 커버하고 있다.
- 1990년 첫 도입한 Su-30K 또한 실전을 치뤘으나, 유의미한 전과는 없다.
인도군 Su-30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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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기적으로는 1969년의 중국-소련 국경분쟁이 앞서지만 전쟁이 아닌 단순 분쟁으로 보는 의견이 주류이다.[2] 21세기의 첫 사례는 그로부터 약 20년 후에 발발한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