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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세대(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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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 한국식 X세대?
2. 특징3. 역사
3.1. 개념의 수입3.2. 밀레니얼 세대의 등장3.3. 97세대
4.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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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Generation X

대한민국의 세대 중 하나.

대체로 1970년대생[1]을 뜻하는 세대명으로, 흔히 이 세대 절대 다수가 90년대 학번이라 '97세대(구칠세대)\', '497세대(사구칠세대)'[2] 등으로도 부른다.


원래는 후기(2차) 베이비 붐 세대 즈음인 1960년대 중후반생에서 1975년생을 뜻했으나, 1996년경부터 86세대라는 세대명과 N세대(1977~1997년생)가 유행하고, 1997년 말 IMF 외환위기로 X세대 유행이 끝나게 되자 1970년(넓게는 1969년생)~1975년생으로 축소된다. 이후 2007년 88만원 세대가 출간된 이후엔 1970년대생 전체를 뜻하게 되었다. 2010년대 후반에 40대가 1970년대생으로 채워지며 40대=X세대라는 등식이 세워진다. 2020년 이후 MZ세대의 유행과 초기 밀레니얼 세대가 40대에 접어들고, X세대 전반생들이 50대로 올라가면서 X세대에 대한 개념이 혼란한 상태다.

1.1. 한국식 X세대?

인구학자 서울대 보건대학원 조영태 교수에 의하면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하던 시기(1992년)에 10대인 1974~1983년생 또는, 1993년에 10대이자 처음 수능을 치른 1975~1984년생이라고 하면서 이를 한국의 X세대로 재정의하고 있다. # 이 주장에선 서태지가 데뷔하던 1992년 20대였고 서태지와 아이들 멤버 나이 또래로 보는 것에 대해 서태지가 10대들의 우상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다소 무리가 있다고 한다. 두루뭉실하게 1970년대생을 X세대라고 보는 것에도 많은 오류가 따른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조영태 교수도 신사의 품격유행 당시 1970년대생 X세대론을 그대로 사용하여 이들을 마이웨이 세대로 재명명한 적이 있다.# 아무튼 그가 X세대를 재정의 한 이후 그의 해석을 따르는 사람들과 언론이 생기고 있다.

조영태 교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우리나라에서 X세대는 75~85년에 태어난 사람들이다. 혹자는 7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이 X세대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74년생과 75년생은 매우 다른 사회 경험을 하며 성장했다. 75년생은 90년대 초반 새로운 형태의 대중문화를 만들었던 서태지를 고등학교 때 만났고, 최초로 학력고사가 아니라 수능을 보고 대학에 진학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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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태 교수의 한국식 X세대 정의는 '서태지의 영향을 10대에 받고 수능을 치른 세대'이다. 그러나 막상 태평양의 트윈 엑스 광고가 방영된 1993년 11월 이후의 자료를 살펴보면 X세대 가 유행하던 당대에는 서태지 또래의 사람들이 X세대였음이 바로 확인된다. 위의 기사에 나온 석광렬, 이병헌, 이영애, 심은하 모두 이에 벗어나지 않으며, 1994~1985년 관련 기사를 종합한 경향신문 2020년 10월 24일기사에서도 확인된다.#

또한 서태지는 90년대 문화의 아이콘, X세대의 상징, 10대들의 우상으로 다양한 층위를 가졌다. 그래서 1999년 조선일보가 기획한 서태지 세대 기사에는 유시진(당시 29세), 박준(당시 30세), 황정하 (당시 32세)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조선일보의 정의에 따르면 서태지 세대는 서태지가 나온 해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대학교 재학생인 1969~1980년생#으로 1970년대생과 거의 일치한다. 즉 서태지가 당시 그의 또래인 20대들의 표상이기도 했다는 점을 간과하면 안 될 것이다. 따라서 조영태 교수의 주장은 X세대란 용어가 한국에서 등장한 당대에서 벗어난 세대 구분이란 지적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조선일보나 조영태 교수는 서태지의 영향력을 너무 과대 평가해 "서태지 세대"의 폭을 너무 넓게 잡고 있기도 하다. 1970년대 후반생부터는 서태지와 아이들 보다 H.O.T, 젝스키스, S.E.S., 핑클1세대 아이돌에 열광했기 때문에 이들을 과연 '서태지 세대'로 볼 수 있을까라는 물음이 따를 수 밖에 없다.

또한 "서태지"와 "수능"을 기준으로 삼기에는 1993년 당시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느끼던 20대 초반들이 기존 사회 구성원과 많이 다르다고 생각했던 집단적 무의식을 대변하지 못한다.
‘뭔지 잘 모르겠지만 좋은 것 같다’

여기에 얽힌 일화가 또 있다. 동방기획이 광고주인 태평양화학 간부진 앞에서 시사회를 가졌을 때, 15초ㆍ 20초ㆍ 30초대 텔레비전 광고를 모두 보여주고 난 다음의 분위기는 일제히 침묵, 바로 그것이었다. 50대를 넘긴 그들로서는 도대체 무엇인지 모를 조각난 화면들, 천장에 매달린 전구가 박살나는 장면이라든지 샌드백이 흔들리는 모습, 십자가 목걸이가 떨어지는 장면과 한 건물에서 비둘기가 일제히 날아오르는 풍경을 조합한 것이, 그것도 컬러가 아닌 흑백 장면들이 화장품 광고와 무슨 연관성이 있는 것인지 파악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개중에는 ‘저게 무슨 광고야!’하고 소리친 사람도 있었다.

한참 후에야 한 책임자가 대졸출신으로 20대 후반~30대 초반인 비교적 젊은 사원들을 수십명 불러서 광고를 보여주었다. 반응은 마찬가지였다. 그들 역시 좋은지 나쁜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침묵을 지켰다. 이번에는 10대 후반~20대 초반 ‘어린’ 사원들이 동원되었다. 그들의 반응은 이러했다. ‘뭔지 잘 모르겠지만 좋은 것 같다’.

태평양화학은 바로 이 말에 회사의 명운을 걸었다. 태평양화학은 ‘뭔지 잘 모르겠지만 좋은 것 같다’라는 말만을 믿고 모험을 단행했다. 바로 그들이 새 상품의 주요 타깃이었으므로.

--- "X세대, 그들이 말하기 시작했다" 시사저널 1994년 5월 5일#

이렇게 X세대는 1993년 당시 10대 후반 20대 초반이 기존 사회구성원과 뭔가 다른 망탈리테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한 일종의 사회적 합의로 광범위하게 수용된 단어였다.

더군다나 '수능'을 기준으로 삼은 것은 86세대와 같이 지극히 대학 진학자 중심의 관점이다. 정작 "X세대"란 단어를 유행시킨 트윈 엑스 화장품 광고가 창고에 묻히지 않고 세상에 나오게 만든이들은 '태평양 화학'의 "10대 후반 20대 초반 어린 사원들", 즉 대부분 고졸 사원들인데도 말이다.

인구학적 이유가 있다며 1993년 11월부터 스스로를 X세대라고 자칭하며 한국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킨 장본인들과 X세대란 단어가 유행하개 된 당시 사회적 맥락 배제한다면 그것은 굳이 X세대란 용어를 사용할 이유가 없다.

차라리 그 주장을 집약한 서태지•수능세대라고 부르면 될 것이지 왜 굳이 기존에 한국적 맥락에 따라 잘 쓰이고 있고 서구가 정한 세대 범위(1965년 이후 출생부터 1980년생)에도 어느 정도 부합하는 X세대란 용어에 큰 혼란을 가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2. 특징

한강의 기적으로 일컬어지는 고도 경제 성장 속에서 태어나서 자랐다. 구세대와는 달리 IMF 외환위기 이전 청소년 시절이나 20대 때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풍요를 동시에 누린 첫 번째 세대이다. 그러나 IMF 외환위기 이후 양극화를 맞으며 일부는 높은 경제적 성취를 이룩해냈으나 한편으론 삼포세대[3]의 시작점이 된 세대이기도 하다.

참고로 이 세대를 이해할 수 있는 창작물로는 tvN의 <응답하라 1988>, <응답하라 1994>를 들 수 있다. 특히 둘 중 응답하라 1994는 주인공들이 모두 1975년에 태어난 94학번들로 1993년부터 시작된 X세대 열풍 한 가운데서 대학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래서인지 드라마는 작정하고 X세대가 겪은 시대상과 문화를 응축해서 보여주고 있다. 해태가 자신의 방에서 PC한메타자교사의 베네치아 게임을 즐기고 주인공 성나정이 첫 직장으로 취업하려던 회사는 IMF 외환위기의 불똥을 맞고 부도에 직면하는 장면이 나온다.

응답하라 1988은 고등학생 시기에서 시작하고 있기 때문에 초기 X세대의 성장기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작품이다. 대한민국이 개발도상국이었으며[4][5], 사람들은 농촌적 마을 공동체를 도시에 이식하여 살아가고 있었는데 이들은 그 속에서 이웃과 밀접히 교류하며 성장하였다. 시스템적으로도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갓 변모하던 시절이었기에, 이 세대는 사회 인프라나 환경 측면에서 여러모로 부실한 여건에서 자랐다. 중고등학교에 교복부활이 시행된 시기에 학교를 다닌 첫 세대이기도 하다.

그런 반면 1997년 외환위기 때는 대학교를 한창 다닐 때라서 취업 시즌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이후에도 2008년글로벌 금융 위기를 겪는 등 시기에 따라서 풍요와 빈곤이라는 혼란스러운 극과 극의 환경이었다. 기사(동아일보) 그리고 그 혼란스러운 시기 경제정책과 사회변화에 경험이 없는 대학생과 사회초년생이라 많이 좌충우돌하였다.

카드 사태 때 큰 위기를 겪었다. 원래 신용 카드를 아무나 발급 받기도 쉽지 않았다. IMF 외환위기 이후 내수가 침체 하자 김대중 정부는 내수 진작 차원에서 카드 사용을 장려했는데, 아무런 소득이 없던 대학생이나 사회초년생이었던 이들에게도 발급이 되었고, 심지어는 고등학생에게도 카드가 발급되었다. 심지어 카드사들은 대학교 근처에 가판대를 두고 카드 발급시 경품과 현금을 주며 카드 사용을 유도했다.# 이때 신용 카드를 발급 받은 다수는 신용 카드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그도 그럴만 한 것이 1990년 국민소득 대비 카드 사용 비중은 2.8%, 1999년에는 7.9%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이 2002년 36.8%까지 급증했다.# 1990년 1,000만장이었던 카드발급 수는 2002년에는 1억장을 넘었다.# 이런 신문물을 처음 접한 당시 젊은이들은 “광고 속에서 신용카드는 소비자를 왕자와 공주로 만드는 ‘도깨비 방망이’로 묘사되"는데 넘어가 “스타와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젊은이들의 소비심리를 자극"되어 과소비의 유혹에 빠져 신용 불량자가 되고 말았다.###

하우스푸어 문제에도 중심에 섰다. 이들이 10대, 20대이던 1990년대 한국 부동산 시장은 노태우 정부의 주택 200만호 건설 이후 장기간 안정되었다. 철이 들고 한번도 집값이 오르는 것을 본 적이 없는 이들에게 김대중 정부가 규제를 완화한 이후 부동산이 급증하는 것은 충격이었으며 크게 좌절했다.### 집값이 계속오르고 결혼과 출산을 할 시기가 된 이들은 자연스럽게 하우스푸어가 되었다.###


1990년대는 자료 보관이 자리 잡았을 때다. 그래서 후대에 재해석 또는 재현된 것이 아닌 당대 X세대의 생활상을 보고 싶다면 질투[6], 내일은 사랑, 우리들의 천국, 느낌 등이 있다. 이 드라마들도 현실과는 다소 동떨어져 있다는 비판을 받지만 판타지에 가까운 시트콤들보다는 훨씬 낫다. 이 작품들로 많은 2020년대까지도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X세대 스타들이 탄생했다. 모두 Wavve에서 시청 가능하다.

청소년기에서 청년기까지 시기에는 30대 이상의 기성 세대였던 전후 세대86세대로부터 '싸가지 없는 놈들', '버릇없는 놈들', '도저히 섞일 수 없는 신세대' 등의 평을 많이 들었다. X세대의 기성세대들은 성장기에 소달구지를 끌면서 농사를 짓는 시골에서 자란 세대였지만, X세대는 현대 문화가 완전히 녹아든 사회에서 성장했고 연예인 문화 등이 꽃피던 시기를 성장기로 보냈다. 이런 이유로 국내와 해외를 막론하고 기성세대로부터 마치 '신인류' 따위로 취급받는 경우가 많았다. 이 세대의 이름이 'X'가 된것도 '도무지 알 수 없는 세대 = Generation X'라는 의미에서 유래한 명칭이다.[7] '오렌지족'이라는 이질적 집단도 이들 세대였다.

이들이 청년층이였던 1990년대에는 이전세대와 달리 외모를 꾸미고 세련된 패션을 입고 돌아다니거나 취미나 자기계발과 같은 개인의 취향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이 많았다.

성장해가며 그런 점들을 잃어버린 사람들도 다수 존재하지만 여전히 이 점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남성의 경우 군복무가 보편화된 첫 세대이기도 하다. 1986년 현역 판정률은 51%였으나 점차 강화되어 1990년대 초반 70%를 넘기 시작했으며 1996년부터는 85% 넘어 84%-86% 현역 판정 비율이 꾸준히 유지되며 군복무가 보편화되기 시작했다.[8] ###[9]

여성의 경우는 대학진학이 보편화 되었다. 전체 대학생 입학생 중 여성의 비율은 1980년 27.4%로 로 10명 중 3명에 미치지 못했으나 1990년 39.3%로 10명 중 4명에 가깝게 되었고 1995년에는 42.5%로 10명 중 4명 이상이 되어 여성도 남성과 거의 비등하게 대학에 진학하게 된다.#

이들의 정치 성향은 대체로 '운동권', '86세대'로 대표되는 1960년대생보다도 훨씬 더 강경한 친민주당 성향이다. 이들은 젊은 시절을 풍요로운 환경에서 보낸 첫 세대이기에 경제성장보다는 복지자유, 평등을 추구하였으며 이는 이들을 현대자유주의, 사회자유주의적 성향으로 만들게 되었다. 무엇보다 이들이 사회에 진입할 시기에 IMF 외환위기를 겪은 것에 큰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데, 그 당시 정권이 우파에 해당하는 김영삼-신한국당 정권이라는 점 때문에 세월이 지나도 우파 정권에 강력한 반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반보수정당 감정은 IMF 외환위기 당시 10대 후반-20대에 해당하느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한다.[10] IMF 경제위기를 겪으며 X세대는 단순 좌절 뿐만 아니라 X세대가 가지고 있던 탈권워적, 기존 사회 반항적 태도를 버리고 살아남기 위해 기존 사회에 순응을 택하게 하는 공통적 세대 경험을 하게 된다.#

이 세대의 앞으로는 전후 세대86세대가 있고, 뒤로는 밀레니얼세대, Z세대가 있다. 이 세대는 '6.25 전쟁 이전에 태어난 세대'나 '전후 세대'의 자녀이며, 대부분 'Z세대'의 부모이다.

이들의 부모는 보통 1930년대 후반~1950년대 초중반생이며, 자녀는 1990년대 후반~2010년대 초반생으로,[11]
늦둥이의 경우 2010년대 중반 이후에 태어난 경우도 있다.

3. 역사

3.1. 개념의 수입

X세대라는 표현이 1993년에 처음 대한민국에서의 들어와서 1970년대 초반생들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열풍적으로 사용되었다. 다만 이 시기는 최진실 등 1960년대 후반생도 포함된다.##

1993년 태평양에서 내놓은 트윈엑스 화장품 광고로 X세대란 용어가 대중화되기 시작되었다. #1 #2 당시만 해도 세대를 '알파벳'으로 구분지어 부르는 것은 상당한 센세이션이었으며, 이원복 교수의 해외토픽 만화 <현대문명진단>에서도 소위 '신인류'라고 불리는 X세대에 대해 수차례 다룬 바 있다.

1990년대 당대 X세대 대표 스타로 불린 인물은 이병헌, 신은경, 김원준 등 1970~1973년 사이에 출생한 사람들이었다.### 동시에 사회적 논의도 활발해져 민주화 이후 성인이 되어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사회가 아닌 처음으로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돌린 신세대를 의미했다. 이 관점은 오늘날도 유효해서 오랫동안 세대론 관련 책을 집필한 전영수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교수는 2차 베이비부머 세대와 겹치는 1969-1974년생들을 통해 X세대의 성격을 고찰하였다.### 또한 정치적으로도 꽤 강한 특징을 여전히 보여 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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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트윈엑스 광고를 만들어 X세대란 용어를 수입 대중화시킨 동방기획(현 BBDO Korea)에서 1995년 발표한 레포트를 살펴보자. # 당시 기획자들이 주목했던 것은 10대와 20대들, 특히 20대 초반의 엄청난 인구와[12][13] 경기호황에 따른 높은 자기 가처분 소득이었다고 한다. 설문 조사 결과도 기존 세대와 다른 당시 20대들의 특징이 나타났다고 하며, 그럼에도 공통 분모를 도출할 수가 없어 하나의 마켓팅 전략을 세우기 어려워 X세대란 용어를 수입해왔다고 한다. 지금은 평범하게 느껴지는 그 광고 또한 임원진은 이해하지 못했으나 신입사원인 X세대 사원들에게 초안을 보여준 뒤 그들이 좋다고 하나 그제서야 채택되었다고 한다…#

당시 10대까지 보고 미래를 대비한 X세대론임에도 이를 부각시킨 한 축인 "경기호황에 따른 높은 자기 가처분 소득"이란 측면이 IMF 외환위기와 함께 깨지면서 순식간에 증발했다. 이는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4의 주연 성나정의 다음 나레이션에서 극명히 드러난다.
찬란한 X세대였던 우린, 하루 아침에 저주받은 학번이 되었다.
이렇게 멈추었던 X세대에 대한 논의는 밀레니얼세대론의 등장과 함께 다시 시작된다.

3.2. 밀레니얼 세대의 등장

2000년대 후반부터 N세대(1977~1997년생)였던 1970년대 후반생들을 이 세대에 포섭하여 설명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세대인 1980년대생이 성인이 되어 사회에 나왔기 때문이다.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중반에는 1977년[14] 이후 출생부터 1997년 출생자 까지로 분류해 최초로 인터넷에 익숙해진 세대라하여 N세대로 정의했다.#1 #2

이는 1998년 출판된 돈 탭스콧의 "Growing Up Digital: The Rise of the Net Generation"에서 'Net Generation (N-gen)이란 용어가 소개되면서부터이다. 한국에서도 "N세대의 무서운 아이들"로 번역되어 N세대 유행의 기폭제가 되었다.##2 배두나, 김민희, 김효진, 전지현, 신민아 등이 N세대 스타로 불리었다.#1#2

그러나 N세대들은 이내 1980년대생들을 뜻하게 된다. 특히 2000년대 중반에 1980년대생 스타들이 주로 N세대 스타들로 불리게 되자 1977~1979년생들은 어디에도 끼이지 못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386세대, X세대, N세대. 세대를 위한 수많은 이름이 있지만, 우리를 위한 이름은 없었다. 우리는 신세대가 입에 오르내릴 때는 아직 고교생이었고, N세대는 1976년생이 아니라 1980년대 이후의 ‘애들’에게 붙여진 이름이었다.(중략)
괜한 심술이란 건 안다. 하지만 한창 취업해야 할 때 IMF와 불황을 겪었고, 직장에 들어가니 경기 호황 당시 입사해 자리를 굳히고 있는 선배들과, ‘아예 다른’ 사고방식을 인정받기 시작한 80년대생들을 보며 이상한 거리감을 느껴야 했다. 이상한 거리감은 사람을 이상하게 만든다.
강명석, 왜 1976년생은 건너 뛴거지, 한게레21 577호, 2005년 9월 7일

그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며 주목받지 못하던 1970년대 후반생들의 당혹감을 표현했다. 그러나 이러한 어느 세대에도 속하지 못했다는 이들의 당혹감은 무시된 채, 2000년대 후반에 X세대로 편입되었고, X세대의 범위가 확대되었다. 그 원인은 2007년 88만원 세대, 2011년 N포 세대론과 같은 토종 세대론의 유행과 함께, 2010년 '밀레니얼 제너레이션'이 처음 번역되어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IMF 외환위기와 함께 X세대 논의가 사라진 1997년 만 18~20세였고, 강명석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2000년대 중반까지도 X세대로 여겨진 구간이 아니다보니 "내가 X세대라고?"하면서 갸우뚱하는 사람들도 있는 영역이다.

문화사회학자 최샛별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는 약 10년간 연구를 하여 "문화사회학으로 바라본 한국의 세대 연대기"라는 책#1 #2을 2018년 출판했다.[15] 그는 선행연구와 세대 의식(스스로 자신의 세대를 어떻게 규정하는가와 그 소속감)에 대한 설문조사, 그리고 이 설문 조사를 통해 각 세대들이 자신의 세대를 규정한다고 생각하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측면의 주요 사건들을 취합하는 등 양적, 질적 연구를 통해 세대를 나누었다. #1 이를 통해 X세대를 1970~1979년생으로 정의했다. 이들이 문화에 주목한 첫 세대이자 스스로 문화를 주도해 간 세대로 보고 최샛별 교수는 문화세대로 명명하고자 했지만 이들은 X세대란 단어가 더 적합하다면서 그 표현을 거부했다고 한다.[16] 설문조사를 하면서 사람들이 자신은 무슨 세대라는 것을 굉장히 확실하게 주장해 놀랐다고도 한다.

3.3. 97세대

2020년대 기준으로 정치 영역에서는 '97세대(구칠세대)\'라는 이름으로 주로 불린다. 90년대에 대학을 다닌 70년대생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대학 운동권 세력이 사실상 마지막으로 힘을 발휘한 세대라고 볼 수 있다. 1996년 연세대 사태와 1997년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사실상 운동권이 흐지부지되었기 때문이다. 산업화민주화 등 굵직한 이슈에 기여한 바는 없지만, 586세대로부터 정치적 유산을 그대로 승계받은 듯한 모습이어서 정치적 신념이 진보 쪽으로 쏠려서 그대로 따라가는 경향성을 보인다. 기사(시사저널) 기사(조선일보)

앞세대인 86세대의 위세에 밀려, 바로 뒷세대인 밀레니얼세대에게 '아류 86세대', '유사 86세대'로 평가받으며 '정치적으로 잊힌 세대'처럼 평가받기도 했다. 기사(한국일보) 하지만 2022년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이 세대인 박용진강훈식, 강병원, 박주민이 출마하여 정치적으로 크게 부각되기 시작했다. 기사(연합뉴스)

4. 분석

인구학자인 서울대 보건대학원 조영태 교수에 의하면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하던 시기(1992년)에 10대였고, 처음 수능을 치른 1975~1984년생이라고 재정의하고 있다. # 이 주장에선 서태지가 데뷔하던 1992년 20대였고 서태지와 아이들 멤버 나이 또래로 보는 1번, 2번 구분(1965~1974)에 대해 서태지가 10대들의 우상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다소 무리가 있다고 한다. 두루뭉실하게 1970년대생을 X세대라고 보는 것에도 많은 오류가 따른다고 보기도 한다. 조영태 교수도 신사의 품격유행 당시 1970년대생 X세대론을 그대로 사용하여 이들을 마이웨이 세대로 재명명한 적이 있다.#

조영태 교수는 한국적 구분이라 하여 1975-1984년생을 X세대라고 칭하고 있지만, 서구에서도 이들의 독특한 낀 세대적 특성에 주목하여 제니얼(Xennials)이라고 부르고 있다.##

즉 현재 한국의 역사적 배경을 포함한 X세대론에선 "1988년 민주화 이후 성인이 된 세대"라는 쪽과 새롭게 등장한 "서태지에 영향을 받고 수능을 치른 세대"라는 두 주장이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서태지에 대해서도 "민주화 이후 성인이 된 이해할 수 없는 X세대의 아이콘"[17]으로 해석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후자는 서태지가 "10대들의 대통령"으로 불리었다는# 점에 주목해 X세대의 창조자로 사회적 의미도 완전히 새롭게 정의를 한 것이다. 그러나 서태지를 10대들의 우상이라하여 X세대의 창조자로 보는 관점은 서태지와 아이들 이외에도 큰 인기를 누리고 이전과 결이 다른 문화계를 주도한 사람들(ex. 현진영, 듀스, 솔리드, 무한궤도, 넥스트, 박진영, 전람회, 룰라, 등)이 1980년대 후반~1995년 사이에 동시 다발적 등장한 것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X세대가 "서태지에 영향을 받고 수능을 치른 세대"란 주장에선 1970년대생론에 많은 오류가 따른 다고 주장하나, 앞서 예시된 서태지 외에도 무수히 많았던 서태지 또래의 X세대 문화생산자들의 존재를 간과했다는 점과 1990년대 초반 X세대론이 대두하게 된 사회적 경제적 배경을 제거했다는 문제가 있다. 그런 점에서 X세대론이 한창일 당시 20대 초반으로 X세대라 불리었고, 스스로 X세대로 규정짓는 경향이 있는 "1988년 민주화 이후 성인이 된 세대"인 1970~1975년생 그룹을 배제하고 X세대를 논하긴 어려워 보인다.

이렇듯 '알 수 없다'는 이유로 X세대로 정의된만큼이나 이 세대가 어디부터 어디까지인지는 여러 주장이 있고 이들의 범위와 성격에 대해서도 수입정통파, 민주화 이후 성인파[18], 서태지 때 10대파[19] 등 제각각으로 혼란하다.

1993년 X세대론이 수입된 배경과 최샛별 교수의 문화사회학적 연구에서 파악한 사람들의 주관적 세대 의식에서 알 수 있듯이 X세대는 1970년대생으로 볼 수 있다. 그 중에서 특히 1993년에서 IMF 외환위기 이전까지 X세대 열풍을 이끈 1970-1975년생이 핵심 세대에 해당한다. 1965-1969년생은 X세대 열풍의 한 축을 담당한 것이 분명하나 1996년부터 시작된 386세대의 유행, 그리고 너무 명확한 86세대의 정의(60년대생, 80년대 학번)로 인해 386세대로 편입되고 말았다. 2020년대 이후 인구문제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확대됨에 따라 서울대 조영태 교수의 1975~1984년생 구분이 일부 언론을 중심으로# (특히 조영태 교수의 주장이 실린 중앙일보가 주도하고 있다.#) 사용되고 있다. 이를 모두 취합하여 1965-1984년생을 하나의 세대로 묶을 수 있겠으나, 이미 정착된 세대 구분과 충돌하는 문제가 존재한다. 또한 이렇게 묶을 경우 대한민국의 고도성장기를 포괄하게 되어 X세대의 첫세대가 태어난 1965년, X세대의 첫세대가 성인이 되는 동시에 마지막 세대가 태어난 1984년, X세대의 마지막 세대가 성인이 되는 2003년의 대한민국은 각각 갭이 너무 크게 되어 MZ세대 이상으로 현실성이 결여된다.


[1] X세대가 어디까지인지는 논쟁적이다. 다만 X세대란 용어가 수입되고 폭발적으로 수용된데는 1993년 동방기획이 트윈엑스 화장품 광고를 만들면서 1970년대 초반생들이 자신과 이전 세대들이 다르다는 세대의식을 캐치하고 이를 이미지화한 것이 컸다. 그래서 2016년 이런 주관적 세대 의식에 대한 대규모 세대 연구를 한 최샛별 교수가 1970-1979년까지로 정의했으므로 이에 따른다.#[2] 2020년대 초반 기준으로 40대여서 붙은 별칭.[3] 삼포세대란 용어는 2011년 만들어졌으며 당시 2030을 의미#한다.[4] 선진국 진입 직전에 IMF 외환위기로 고꾸라졌다.[5] 1인당 GDP가 세계 평균을 처음 넘긴 것도 1988년으로부터 1년 전인 1987년이었다. 그리고 중진국도 넓게 보면 개발도상국에 들어간다.[6] 1990년대 초반 신세대 문화를 종합한 드라마로 명성이 높다.[7] 이원복의 현대문명진단 같은 90년대 서적을 보면 당시 기성세대들이 '신세대'인 X세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잘 드러난다. 또한 이렇게 입으면 기분이 좋거든요 문서를 보면 1990년대 중반 X세대들의 상황을 알 수 있다.[8] 그래도 많은 인구 덕에 상근이나 전환복무 등으로 많이 빠지긴 했다.[9] 2004년부터 기준이 엄격해지며 현역 판정 비율이 90%를 넘게 되었으며 2015년 임영대란 이후엔 80% 초반으로 1990년대 중후반보다 낮아졌다.#[10] 한국당 비지지 확률이 가장 큰 세대는 1970∼1974년생이다. 그다음은 1975∼1979년생이고, 이 뒤를 1965∼1969년생과 1980∼1984년생이 잇는다.###[11] 2000년대 후반생과 2010년대 초반생(2007~2012)년생은 부모 세대가 70,80년대생 둘다 해당되는 경우가 있다.[12] 1993년 기준 20대(1964~1973년생, 현재 50대)는 900만명으로 전체 인구의 20%를 차지했는데, 그 중 20-24세가 500만명이었다고 한다. 10대는 19%의 인구비율을 차지했다고 한다.[13] 10대라고 뭉뚱그려 표현했으나 곧 20대로 편입될 10대 후반을 중요시 한 것임을 다른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14] 용어를 처음 사용한 돈 탭스콧은 1977년생부터라고 정의했으나 한국 언론은 1976년생도 일부 포함시켰다.[15] 다만 그의 연구는 X세대 이전 세대인 1955-1969년 출생자들을 86세대와 그 이전 세대로 나누지 않고, 베이비붐 세대로 뭉뚱그려 통합했다는 문제가 있다.[16] 그는 세대론이 지나치게 세대를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끊는 것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세대 스펙트럼은 무지개처럼 섞어지며 이어지다 색이 변하는 구조라는 것.[17] 서태지와 아이들이 처음 등장했을 때 기성세대는 이상한 음악 정도로 취급했으나, 10대에서 대학생들은 열광했다고 한다.[18] 전두환이 퇴임한 해의 이듬해인 1989년 성인이 된 1970년생의 경우, 70년대 중후반생과는 달리 취업이 비교적 수월했던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에 취직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IMF의 영향을 덜 받았다.[19] 특히 이쪽이 IMF 사태로 인해 취업이 어렵던 세대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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