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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764><colcolor=#fff> 출생 | 1951년 4월 8일 ([age(1951-04-08)]세) | ||
전라남도 장흥군 대덕읍 가학리 영보마을 | |||
본관 | 전주 이씨[1] | ||
현직 | LKN 법학연구소 대표변호사 법무법인 태하 변호사 | ||
재임기간 | 제52대 법무부차관 | ||
2009년 1월 19일 ~ 2009년 7월 10일 | |||
제61대 법무부장관 | |||
2009년 9월 30일 ~ 2011년 8월 10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3764><colcolor=#ffffff> 학력 | 대덕중학교 (졸업) 인창고등학교 (15회 / 졸업)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 / 학사) | |
가족 | 부인 서향화, 슬하 2남 | ||
경력 | 제22회 사법시험 합격 제12기 사법연수원 수료 서울지방검찰청 동부지청 검사 광주지방검찰청 해남지청 검사 광주지방검찰청 검사 서울지방검찰청 검사 대검찰청 검찰연구관 서울지방검찰청 서부지청 검사 광주지방검찰청 해남지청장 광주지방검찰청 강력부잘 광주지방검찰청 공안부장 수원지방검찰청 성남지청 부장검사 대검찰청 범죄정보관리과장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제3과장 서울지방검찰청 특수제3부장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실 사정비서관 서울지방검찰청 형사제1부장 대검찰청 범죄정보기획관 인천지방검찰청 제2차장검사 대전지방검찰청 제2차장검사 대구지방검찰청 제1차장검사 대검찰청 공안부장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 대구고등검찰청 검사장 | ||
링크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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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법조인. 제61대 법무부장관을 역임했고, 현재 전주이씨대동종약원(全州李氏大同宗約院)의 이사장이다.[2]2. 생애
1951년 4월 8일, 전라남도 장흥군 대덕읍 가학리 영보마을에서 태어났다. 부모님께서 결혼하시고 나서 5년 정도 아이가 생기지 않아 어머니가 쫓겨날 위기에 있던 차에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귀남(貴男)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장흥군에서 대덕중학교까지 다닌 뒤에 1966년 상경하여 서울인창고등학교(15회)에 입학했다. 처음엔 대학을 이공계계통으로 진학하려고 했으나, 당시에 인창고등학교 이사장이 억울하게 구속되는 사건을 보고 법대로 진로를 바꾸었다.[3] 인창고등학교에서는 다른 호남출신 남학생 2명과 의형제를 맺어 오랫동안 벗으로 지냈으며 그 중에 1명은 나중에 광주은행 지점장이 되었으며 1명은 고등학교 교장이 되었다. 하지만 수십년 후 은행지점장이 된 친구와는 절교에 이르게 된다. 교장이 된 의형제가 이귀남 법무부 장관에게 이명박 정부에 대해서 불만을 말하니 "내가 무슨 힘이 있냐, 나도 시키는 대로 할 뿐이다"라고 대답했었고, 노회찬 의원이 문제 제기한 삼성 떡검 사건 때도 친구에게 "절대 떡값 받은 적 없다"고 해명하긴 했었다.
1969년에 고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에 입학하여 1973년에 졸업하였다.
1980년 제22회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1982년 사법연수원을 수료하였다. 사법연수원 기수는 12기. 서울지방검찰청동부지청 검사로 검찰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 후 1985년 광주지방검찰청 해남지청 검사, 1986년 광주지검 검사를 거쳐, 1988년 서울지검 검사가 되었다. 1991년 대검찰청 검찰연구관으로 임명되었고, 1993년에는 서울지검 서부지청 검사가 되었다가, 광주지검 해남지청장으로 승진발령이 났다.
1994년에는 광주지검 강력부장검사가 되었고, 1995년에는 광주지검 공안부장검사가 되었다. 1996년에는 수원지방검찰청 성남지청 부장검사가 되어 다시 수도권으로 올라왔다. 1997년 8월에는 대검찰청 범죄정보관리과장이 되었다.
국민의 정부가 출범한 뒤인 1998년 3월에는 대검찰청 중수부 제3과장검사가 되어 정치인들에게 '저승사자'로 불릴 정도로 두려움을 주었다. 호남 출신으로서 검찰 요직에 몸을 담고 있었기 때문. 그 후 1996년 6월에는 서울지검 특수제3부장검사로 자리를 옮겼고, 2000년 1월에는 청와대 민정수석실 사정비서관으로 들어갔다. 2001년에는 서울지검 형사제1부장검사로 자리를 옮겼다. 김대중 정권 내내 검찰의 요직에 있었던 것. 전체적으로 사법 연수원 동기생들 중에서도 가장 잘나가는 검사였고 잡지에도 여러 번 인물 소개가 되었다.
조폐공사 파업 유도 사건 당시 검사였으며 진형구의 판결문에는 그의 이름이 남아있다.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업무방해, 노동조합및노동관계조정법위반 혐의로 구속된 이후 법원은 진형구에게 다른 혐의는 무죄를 선고하고, "1998년 9월 22일 고등학교 후배인 강희복 당시 조폐공사 사장에게 전화해 "좋지 않은 정보 보고가 올라온다. 서울이 시끄럽다. 빨리 직장폐쇄를 풀고 구조조정을 단행하라."라고 말한 혐의(노동조합및노동관계조정법위반)만 인정, 징역 8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하였다.[4]
참여정부 시절에는 대검찰청 범죄정보기획관이 되었다. 그러다가 2003년 4월에 인천지방검찰청 제2차장검사가 되었고, 2004년 6월에는 대전지방검찰청 제2차장검사, 2005년 2월에는 대구지방검찰청 제1차장검사가 되었다. 그러다가 2006년 2월 대검찰청 공안부장으로 서초동에 화려하게 복귀했으며, 2007년 3월에는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으로 승진하였다. 공안부장과 중수부장을 모두 거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로 이 인물의 능력을 보여준다.
이명박 정부 이후 2008년 3월에는 대구고검장으로 승진했다.[5] 그러다가 2009년 1월에는 법무부차관으로 임명되었다. 보통 법무부차관은 고검장 막내가 가는 곳이기 때문에 이때만 해도 그가 검찰총장이나 법무부장관으로 임명될 것이라 믿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다가 2009년 가을 개각 때에 김경한 장관이 퇴임하면서 2009년 9월에 제61대 법무부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미 공안부장과 중수부장 등 검찰의 요직을 두루 거친 사람이라 법무부장관으로서 자격에 부족함은 없었지만, 국민의 정부 시절 대검 중앙수사과장을 지내며 당시 한나라당 의원들을 워낙 무섭게 대했기 때문에, 여권에서는 그의 임명을 두고 반발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지역 기반으로는 영남 정권으로 분류되는 이명박 정부임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정권에서 사정을 지휘해온 호남 인사가 법무부장관이라는 핵심요직에 발탁된 셈.[6]
법무부장관 취임 당시 목민관의 지침인 다산 정약용의 '비민보세(裨民補世)'를 인용하며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이 백성의 삶에 도움을 주고 세상에 보탬이 되는 것인지를 항상 염두에 두겠다"고 발언했다. 2년의 재임기간 동안 300여회의 외부 강연을 다녔고, 법무부 운전원과 방화원, 환경미화원들과도 점심 식사를 같이 하는 등 소탈한 행보를 보였다. 트위터 활동을 열심히 하기도 했으며 네티즌들과 직접 만남을 갖기도 했었다. 재임기간 불법시위가 줄어드는 등, 상대적으로 무난하게 임기를 마쳤다.
2011년 8월 2년 임기를 마치고 법무부장관직에서 물러났고, 이후 2013년에는 LKN법학연구소 대표변호사가 되었다.
전체적으로 소탈한 성격으로 여당과 야당을 비롯하여 두루두루 적이 없는 편. 호남 출신으로 국민의 정부에서 중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부의 법무부장관을 하면서 배신이라는 둥의 이야기를 듣지 않을 수 있었고 야당으로부터도 별 공격을 받지 않았던 이유다.
3. 논란
3.1. 사형 재집행 논란
조두순, 김길태 사건들로 국민적 분노가 극에 달해서 당시에 경북 청송교도소 관련 기자회견에서 사형 재집행 의지를 밝혔다. 그리고 이명박 당시 대통령에게 사형집행 건의를 했고 이명박 대통령이 진지하게 검토했으나 외교적 마찰을 우려로 흐지부지됐다. # # #3.2. 장관직 수행 중 검찰청 내부 성추문 발생
서지현 검사가 안태근 당시 대한민국 법무부 정책기획단장에게 성추행을 당하고 있을 때 바로 옆에 법무부 장관도 있었다고 밝혀졌다. 장님이 아닌 이상 충분히 봤거나 무언가 이상하다고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서지현 검사에 대한 보복성 인사조치와 불이익에 대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음이 드러나게 되었다.3.3. 한화그룹 비자금 불법적 수사 개입 논란
2011년 2월 법무부 간부를 통해 수사팀에 한화그룹의 전 재무책임자를 불구속 수사하라는 내용의 '수사 지휘'를 한 것으로 알려져 검찰청법 8조를 어긴 게 아니냐는 의혹이 일기도 했다. #4. 기타
- 90년대 인기 드라마였던 아들과 딸의 주인공인 이귀남(최수종)과 한글, 한자까지 이름이 똑같다. 드라마 속 귀남과 실제 이귀남 전 장관의 연배도 비슷해서, 드라마 속 귀남이 사법시험에 합격해 법무장관이 된 게 아니냐는 드립도 있었다.(...)
- 법무부 장관 재직 시절이던 2010년 10월 16일에 그의 고등학교 3년 후배(18회)들이 진행했던 '추억의 수학여행' 이벤트의 환송식에 참여했다. 후배들이 이러한 이벤트를 진행한 이유는 이들이 고등학교 재학중 수학여행을 가는 도중 대형 사고가 나서 많은 급우들과 스승들을 잃었고, 참사 40년이 되었던 그 해 10월 16일부터 1박 2일간 당시의 은사님까지 초청하여 경주시로 수학여행 한풀이를 하며 사고로 희생된 스승과 급우들을 추모하는 행사를 가졌던 것이다. 한풀이 수학여행 참가자들이 서울역을 출발할 때, 당시 인창고 재학생들 및 당시 교장[7]과 함께 환송을 했다. 기사1 기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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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회산군파 17대손, 시조 45세손.(족보)[2] 이귀남 본인도 당연하지만 전주이씨 회산군파 17대손, 시조 45세손으로서 전주이씨 출신이다.[3] 이과에서 문과로 전향했기 때문에 수학 Ⅱ시간에도 다른 공부를 했다고 한다.[4] # 서울지방법원 2001. 7. 27. 선고 99고합790 판결 서울고등법원 2002.6.14. 2001노2159 대법원 2005. 4. 15. 선고 2002도3453 판결[5] 다만 공안부장과 중수부장을 모두 거친 인물이 지방 고검장으로 가는 것은 좌천성 발령으로 보일 수 있다. 다음 보직인 법무부 차관을 보면 초임 고검장이 가는 자리로 보직만 놓고 보면 장관이나 총장을 갈 코스는 전혀 아니다.[6] 이귀남 법무부 장관 내정자에 대한 청문회를 막 끝낸 후 열린 한나라당 최고중진회의에서 한 영남권 인사는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한나라당 의원 수십 명이 반강제적으로 당시 공동여당으로 당적을 옮겼다"며 "그 때 대검찰청 중앙수사과장이던 이 후보자를 법무부 장관에 임명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주장했다.[7] 이귀남과 같은 인창고 15회 졸업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