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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慶會
1939년 11월 20일 ~ 2001년 8월 7일 (향년 61세)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법조인이다. 종교는 천주교(세례명: 안드레아)이다.2. 생애
2001년 사망 당시, 그의 삶을 정리한 기사1939년 11월 20일 경상남도 마산부(현 창원시 마산합포구)에서 태어났다. 마산상업고등학교[1](32회) 졸업 후 부산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에 입학했다. 1962년 제14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였고, 같은 해 부산대학교를 졸업했다. 1963년 서울대학교 사법대학원에서 법학 석사 과정을 수료했고, 같은 해 해군 군법무관으로 임관하여 1966년 전역했다.
이후 1966년부터 서울지방검찰청 검사를 지냈고, 1969년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수료했다. 1976년 법무부 검찰국 검사, 1978년 대검찰청 검찰연구관 겸 서울고등검찰청 검사, 1979년 법무부 검찰제2과장, 1980년 서울지방검찰청 남부지청 부장검사, 1981년 서울지방검찰청 공안부장검사 등으로 재직했다.
검사장 진급 후에는 제5공화국 말기 전두환 정부의 잔악상을 드러낸 주요 시국 사건들의 수사를 담당하여 사회적인 주목을 받았다. 1982년 법무부 송무담당관, 1983년 대검찰청 감찰부장, 1985년 마산지방검찰청 검사장을 거쳐 1986년 5월 2일부터 1987년 6월 7일까지 제3대 인천지방검찰청 검사장을 지냈다. 이 시기 1986년 6월 5일 일어난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의 수사를 맡아 문귀동 전 경장의 구속을 관철하였다.
1987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부장검사로 발령되었고, 같은 해 1월 14일 일어났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수사하면서 강민창 전 내무부 치안본부장의 구속을 주도하였다. 1988년 3월 12일부터 1989년 3월 28일까지 제30대 부산지방검찰청 검사장, 1989년 3월 29일부터 1990년 3월 26일까지 제29대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 등을 지냈고, 1989년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에서 최고경영자과정을 수료했다.
이후 1990년 3월 27일부터 1991년 4월 17일까지 제20대 대구고등검찰청 검사장, 1991년 4월 18일부터 1993년 3월 16일까지 제3대 부산고등검찰청 검사장 등을 지냈고, 1992년 부산대학교 환경대학원을 수료했다.
이후 퇴임하여 1993년 서울지방변호사회에 변호사로 등록했다.
1999년 5월 19일부터 제8대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원장으로 재직하던 중, 2001년 8월 7일 간암으로 사망했다. 향년 62세.
3. 기타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세례명은 안드레아. 그가 5공 말기에 맡은 정권 관련 수사들은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천주교계에서 피해자측(예: 박종철)의 적극적인 옹호에 나섰고, 이는 그의 수사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된다.사후 약 1년 동안 중앙일보에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 격동의 시절 검사 27년 '이라는 제목으로 회고록이 연재되었다. 이들 내용은 단행본인 <나 이제 자유인 되어: 격동의 시절, 검사 28년>(2002)으로 출간되었다.
부인 배은영(1943년생. 세례명 이레나) 여사와의 슬하에 아들 3명을 얻었다. 그 가운데 장남인 김태효 성균관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8~2012년 청와대 대외전략비서관(이후 기획관)으로 재직하였고, 이후 2022년 윤석열 정부에서는 국가안보실 제1차장(외교 담당)에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