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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5 21:42:28

노무현/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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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년 및 학창시절2. 변호사 시절3. 퇴임 후4. 성격 및 재능5. 애연가6. 팬클럽이 생긴 최초의 정치인7. 정적이 많았던 대통령8. 국정원의 여론 공작 의혹9. 방송 출연10. 부른 노래11. 각종 타이틀12. 그 외 여담

1. 유년 및 학창시절

2. 변호사 시절

3. 퇴임 후

4. 성격 및 재능

5. 애연가

파일:20030324_16852_노무현사료관.jpg
생전 담배를 많이 피우는 골초로 유명했다. 공식석상에서 담배를 피우는 장면을 쉽게 찾을 수 있을 정도이며, 퇴임 이후에도 봉하마을 주민들과 담배를 피우며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 여러차례 잡히면서 노무현의 서민적인 이미지를 상징하게 되었다. 현재까지도 애연가인 정치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면 늘 1순위로 언급될 정도인데, 서양에서는 윈스턴 처칠이 있다면[13] 한국에는 노무현이 언급될 정도로 담배와 연관이 깊은 정치인이었다. 흡연은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했다고 하며, 본격적으로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변호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흡연량이 부쩍 늘었다고 전해진다. 젊을 때는 하루에 2갑 정도 피웠으며, 식사를 한 뒤에는 꼭 2~3개비씩 줄담배를 피우며 식후땡을 했다고 한다.

평소 멘솔이나 캡슐 같은 가향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클래식한 스타일의 고타르 담배를 선호했다고 알려진다. 정치생활을 하면서 피우는 담배 브랜드를 몇 번 바꾼 적이 있는데, 평소 즐기던 담배는 에쎄였지만 굵은 담배인 디스 플러스와 아리랑 담배도 피웠다. 노무현재단의 회고글에 따르면 2004년 말 무렵까지 에쎄, 디스, 아리랑 3가지 담배를 섞어서 피우다가 임기 중반 무렵부터 에쎄로 완전 정착했다고 한다. 원래 노무현은 굵고 타르 함량이 높은 담배를 좋아해서 가는 담배를 피우는 것을 "담배도 아니다" 라는 식으로 농담한 적이 있었다고 하는데, 대통령직 자체가 격무를 수행해야 하는 직업이다보니 건강 악화를 우려해 가는 담배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중 임기 말, 참여정부에서 문화재청장을 지냈던 유홍준 교수의 추천으로 클라우드 나인으로 담배를 한번 더 바꿨고 퇴임한 후 서거할 때까지 클라우드 나인을 피웠다.[14] 퇴임 후 봉하마을에 위치한 한 슈퍼에서 담배를 피우며 휴식을 취하는 사진이 유명한데, 이 때 피우던 담배가 바로 클라우드 나인이다.

민주당계 정당의 정치인들은 흡연자였던 김대중박상천의 영향으로 담배를 피우는 정치인들이 많았고 흡연에 대해서도 꽤나 관대했는데, 이들은 나이가 들어 대부분 금연했지만 노무현은 끝내 금연에 실패했다. 16대 대선을 앞두고 담배를 끊었지만, 8.8 재보선 이후 지지율이 하락하고 당 내/외에서 단일화 압박이 들어오자 스트레스로 다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이 후 대통령에 취임한 뒤 2004년 무렵, 주치의로부터 금연 권고를 받아 다시 한번 금연에 도전했다. 이 때는 권양숙 여사도 남편의 금연을 적극적으로 도왔고 노무현도 집무실에서 재떨이를 치워버릴 정도로 열정적이었다고 하는데, 노무현과 마찬가지로 골초로 유명한 이해찬이 국무총리로 입각하자 결국 금연 의지가 무너져버려 다시 담배에 손을 댔다. 권양숙이 남편이 담배를 피우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노무현도 아내가 보는 앞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고 대신 회의가 끝난 뒤 참모들에게 몇 개비 얻어서 피우거나 이해찬과 집무실에서 접견을 할 때 몇 개비 얻어서 맞담배를 피웠다고 한다.

퇴임을 앞두고는 담배를 줄여보기 위해 본인의 집무실에서는 담배를 치우고, 대신 보좌관에게 담배를 맡긴 뒤 필요할 때마다 몇 개비씩 배달받은 방식으로 바꾸었고 퇴임 후 봉하마을에 내려가서도 이런 식으로 흡연을 했다. 그러나 2009년에 들어 박연차 게이트 사건으로 검찰 조사를 받게 되자, 극도의 스트레스로 다시 흡연량이 늘기 시작했고 사망할 무렵에는 식사도 거의 하지 않고 담배만 계속 피웠다고 한다.[15]

사망한 당일 경호관과 봉하산에 도착해서도 "담배 있나?" 라고 물어봤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였고, 그가 끝내 서거한 뒤 분향소에 담배를 가지고 방문하는 조문객들이 많았다. 편의점에서도 국민장 기간동안 담배의 매출이 엄청나게 늘었다고 한다. 이는 비흡연자들도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바칠 목적으로 담배를 일부러 사서 분향소나 묘소 등에 놓고 갔다는 이야기다. 현재도 그가 투신한 부엉이바위나 묘지, 분향소 등에 가면 방문객들이 놓고 간 담배를 쉽게 볼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참여정부 시기에 공공장소에서의 금연이 시행되었고 담배갑의 경고 문구도 세세하게 추가되는 등 금연 정책이 다수 도입되기도 했다. 2005년에는 담배갑을 500원 올리려고 했으나 한나라당의 반발로 실패했다. 물론 10년 뒤 이들은 2천원이나 올렸다 이 때문에 공공장소는 모두 금연이지만 청와대는 예외라는 우스개소리가 돌기도 했다.

여담으로 노무현은 평생 국산 담배만 피웠으며, 궐련파이프 담배롤링 타바코는 피우지 않았다. 2003년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할 때 시가를 피운 적은 있는데, 뒷이야기에 따르면 노무현이 회담 분위기를 풀어보기 위해 먼저 시가를 권했다고 한다. 취임 후 첫 브라질 방문이었기에 회담장 분위기도 굉장히 경직되어 있었는데, 노무현이 먼저 시가를 권하며 맞담배를 제안하자 룰라도 긴장감을 풀고 이 후 회담을 좋은 분위기로 진행했다고.

6. 팬클럽이 생긴 최초의 정치인

파일:external/blogimg.ohmynews.com/1357294488.jpg
노무현과 함께하는 노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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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치인 중 최초로 자발적으로 생성된 팬클럽을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한국 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현재는 구심점이 사라진 탓에 인원이 축소되어 명맥만 유지중이다.[16]

7. 정적이 많았던 대통령

노무현 전 대통령은 노사모 등 본인을 열렬히 좋아하고 지지하는 아군 못지 않게 적(안티)도 상당히 많았다. 우선 정치 이념적으로 보수 성향의 사람들 및 정당(당시 한나라당)으로부터 늘 이념 공격을 받았다. 참여정부 기간 내내 보수 진영은 노 전 대통령을 향해 공산주의자 따위의 이념 딱지를 붙이며 색깔론 공격을 퍼부었던 것이다.[17] 그렇다고 노 전 대통령이 재임 시절 진보 진영으로부터 절대적인 사랑을 받았느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진보 진영의 입장에서는 노 전 대통령과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도 보수 정치인들이 많이 소속돼 있는 곳이자 대한민국의 보수정당 중 하나였고, 특히 한미 FTA이라크 전쟁에 한국군 첫 파병 등의 문제에 있어서 참여정부의 결정은 진보 진영이 등을 돌리게 된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한편 대통령 노무현은 · 정치 이념과 상관없이, 소위 사회의 기득권 층으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는데, 이는 노무현이 가난한 시골 출신의 고졸, 그것도 상고 출신 대통령이라는 것이 주요한 이유였다.[18]

노무현은 김영삼에 의해 정치에 입문했고, 3당 합당 때 김영삼의 결정에 반대하며 갈라섰다. 김영삼도 이 사건 이후로 노무현과 사이가 극도로 멀어졌다.[19] 군사정권은 말할 것도 없고, 이승만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김대중은 호남충청연합(DJP연합), 김영삼은 3당 합당으로 얻은 경상/충청의 넓은 지역기반을 지지층 및 아군으로 두었고, 이명박은 YS에 의해 정계에 입문한 배경 덕에 당시 한나라당 內 상도동계 대부분은 물론, (이후 대부분이 친박계에 속하게 되는) 민정공화계에서도 이명박 지지세가 상당히 나왔던 데다,[20] 출신지가 경상북도 포항시이기도 하고, 김영삼 문민정부 당시, 정치 1번지라고 불리는 서울특별시 종로구에서 여당 국회의원을 역임한 후 서울특별시장 시절의 업적 및 화려한 커리어를 갖고 있어, 경상도와 수도권에서 광범위한 지지 세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호남을 제외한 전국에서 압도적인 세력을 아군으로 두었다. 그러나 그에 비하면 노무현은 완전 고립무원이었다.[21][22]

DJ측 인사, 즉 동교동계에서도 노무현을 안 좋게 보던 이들은 상당히 많았다. 참여정부가 출범하자마자 당시 한나라당조중동 등 보수 일간지의 공격이 시작되었고, 이들이 제일 먼저 문제 삼은 것이 김대중 정부의 대북송금이었는데, 당시 여소야대였던 정치 상황 때문에 원활한 국정 운영을 위하여 노무현은 야당의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부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리하여 결국 노무현은 당시 한나라당이 주도하여 발의하고, 국회를 통과한 대북송금특검법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통령이 되자마자 제일 먼저 서명한 법안이 바로 해당 법안이었다. 당시 국무회의에서는 1명을 제외하고 거부권 행사를 요구했다. 이에 대해 동교동계에서는 노무현에게 섭섭함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로써 여당이었던 민주당 내 일부 인사들과도 척을 지게 된다.[23]

또한 "전라도 정치인들과 정치 못 해먹겠다"(관련기사)는 발언이 논란이 될 만큼 전라도 출신 인사들과의 갈등도 존재했다. 이들은 새천년민주당에서 탈당하고 열린우리당으로 따라왔던 친노세력인데도 그랬다. 집권 초기 대북송금특검법 사태 등을 거치며 민주당 내에는 동교동계를 위시한 구주류와 신주류인 친노가 마찰을 밎었고, 결국 민주당 내 소장파가 주축이었던 친노계는 민주당 내 쇄신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동교동계 2선 퇴진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하였고, 친노계는 열린우리당을 창당하면서 민주당 주류 세력과 결별하게 된다. 이때 노무현도 민주당을 탈당하고 당적을 열린우리당[24]으로 옮겼다. 이후 민주당은 여당에서 일순간에 야당으로 전락하게 되었으며, 안 그래도 여소야대였던 국회 상황은 정부에 더 불리한 구도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러한 극도의 여소야대 정국 속에서 결국 2004년 탄핵 사태를 맞이하게 된다.[25][26]

한편 한미 FTA이라크 전쟁 파병 등을 거치며 지지층 중 진보적 색채가 강한 사람들도 점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즉 한미 FTA를 체결하고, 이라크 전쟁에 한국군을 파병했다고 해서 중도층이나 보수층이 새로운 지지층으로 편입된 것도 아니어서 지지율은 추락에 추락을 거듭했다. 이후 노 전 대통령은 이러한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하였으나[27], 오히려 여당인 열린우리당[28]과의 관계마저 악화되는 역효과만 초래하였고, 노무현은 결국 여당 내에서의 탈당 요구를 받고서 결국 2007년 2월에 열린우리당을 탈당하게 된다. 당시 여당 내에서 노무현에게 탈당 요구를 한 것은 2007년 말,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지지율이 낮은 대통령이 여당의 대선 준비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부담만 된다는 인식이 여당 내에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참여정부 말기에는 언론사들도 거의 대부분 노무현 전 대통령과 적대적 관계를 유지했는데, 2007년 1월 노 전 대통령이 "기자실에 죽치고 앉아서 기사나 담합한다"면서 당시 청와대 기자실통폐합안을 제출하여, 진보 매체/보수 매체 할 것 없이, 모든 언론사로부터 집중 비판을 당했다. 당시 진보 매체 프레시안 비판기사, 기사 2. 공무원 기자접촉금지령을 내려서 취재를 원천 봉쇄하려 하고, 공무원의 댓글을 독려했던 대통령의 언론관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후임 대통령 이명박의 경우는 6.3 항쟁의 주역이면서 고려대학교를 졸업했고 그 이후 현대건설 사장이었던 화려한 커리어와 인맥으로 인한 유권자들의 강력한 지지와, 김영삼에게 발탁된 것을 배경으로 한 상도동계 정치인 대부분의 지지, 연고지였던 수도권 - 경상도의 지지, 대부분이 친박계에 속했던 한나라당 內 민정공화계에서도 이명박 지지자들이 상당수 나와서 지지층이 엄청났던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29]

제17대 대통령 선거 직전에는 여당 측[30] 대선 후보인 정동영마저도 의식적으로 거리감을 두었다.[31][32] 정동영은 여당의 대선후보이면서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에 편승해 노무현 대통령 심판론을 대통령 선거 의제로 설정하였다. 대선이 가까워지면서 민주당의 고질병인 이합집산이 시작되면서 민주당 의원들마저 노무현 전 대통령과 거리를 두기에 바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언론의 자유 강화와 권위주의를 허무는 것을 시대정신으로 보았다. 그의 이러한 국정철학은 한국 정치 특유의 경직된 권위주의를 해소하려 했으나[33][34] 반대로 시종일관 강경 일변도의 대언론 정책을 폈고, 결국 언론도, 지지층도, 국민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한 채 상당한 곤욕을 치렀다. 청와대 출입기자실을 폐지한 것은 그 예들 중 하나이다.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라는 말이 등장할 정도.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에 대한 비난 수위에 대해 별다른 제지를 하지 않은 것은 특기할 만하다. 2003년 한나라당(당시 야당) 당직자 회의에서 홍보위원장 박주천은 노무현 대통령이 "생긴 게 개구리와 똑같다"라며 웃고 떠들었고, 한나라당 이상배 의원은 노무현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하자 "등신 외교"라고 하였다. 이에 문제가 되자 한나라당 김덕룡 의원은 "등신이라는 말이 뭐가 나쁘냐?"라고 했을 정도. 심지어는 2004년 한나라당 국회의원 24명으로 구성된 극단 여의도는 노무현 대통령을 원색적으로 모욕하는 "환생경제"라는 연극을 공연했는데, 이 연극에서 국회의원들이 대통령을 "노가리"라고 대놓고 욕을 해도 아무도 뭐라고 지적하는 사람이 없었다. 보수일간지 등은 "천격"이란 표현을 비롯해 다양한 비하 소재를 만들어 내었다. 후에 이명박 정권 때 쥐박이, 박근혜 정권 때 귀태나 닭근혜로서 미러링하게 된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을 욕하는 것은 민주사회에서 주권을 가진 시민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대통령을 욕함으로써 주권자의 스트레스가 해소된다면, 저는 기쁜 마음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고 하였다.[35][36]

8. 국정원의 여론 공작 의혹

2015년 2월, 이인규 전 중수부장은 국정원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포괄적 뇌물수수혐의에 대해 여론조작을 했다고 주장하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 일가가 피아제 시계를 논두렁에 버렸다는 등 허위 사실을 꾸며내어[37] 언론에 흘린 주체가 검찰이 아니라 국정원이라 주장한 것. 결과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은 수사 도중 스스로 목숨을 끊기에 이르게 되었다. 당시 수사를 담당한 이인규 전 중수부장은 이 당시를 회고하면서 당시 국정원 행태는 공작 수준이었다고 말했다. 다만 구체적인 증거는 없는 상태에서 이인규 변호사의 일방적인 주장이었고 이인규는 훗날 자신이 자서전 또는 회고록으로 모든 것을 공개할 것이라 밝혀 2탄을 예고하고 있다. 일단 전국언론노동조합의 논두렁 시계 보도 진상조사에선 국정원의 개입을 확인하지 못했다고 결론내렸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직후, 국민장을 치르며 온 국민이 애도하는 가운데 국정원은 노 전 대통령을 비하하는 인터넷 게시물 수천 개를 유포시키며 추모 분위기를 방해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반대와 비판여론은 국정원에 의해 수동적으로 행해진 것이 아니라, 경제성과와 정책 방향성에 따른 반감에 따른 영향이 컸다고 볼 여지도 있다. 노무현에 대한 비난 분위기는 국정원이 어떻게 손을 써서 그렇다는 표현이 어려울 만큼 그의 임기 때부터 고질적였을지도 모르기 때문.

이후에도 대형 커뮤니티인 디시인사이드의 민간 유저들과 국정원은 여러 인터넷 사이트에 노무현 전 대통령을 모욕하는 게시물을 지속적으로 생산, 유포했다.(검찰의 국정원 댓글 여론조작 수사) 그러나 공무원과 국정원 단독의 여론의 조작능력과 스케일이 여론상의 비율에서 얼마나 되는지는 자세히 설명되지 못하고 있다. 다만, 규모에서 확대언급되는 건 이들이 공직자였고, 그 공직자의 범주가 넓었다는 것이었다.

2013년 밝혀진 유명한 좌익효수 역시 노무현 전 대통령을 모욕하는 게시물을 지속적으로 올렸음이 확인되었다. 한편, 좌익효수의 재판결과, 모욕죄만 인정되었고 국정원법 위반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후 국정원에서 국정원의 신뢰와 기대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해임되었다.( "좌익효수 국정원 직원, 1심서 집행유예 선고...모욕죄 인정-국정원법 위반은 무죄") 이 판결은 여러 면에서 비난을 받았는데, 상당수 게시물은 증거부족으로 채택되지 않았다. 오직 10여 개의 게시물만 채택되었다. 좌익효수는 검찰에서도 죄질이 나쁘다고 말했지만, 국정원에 오래 근무했다. 국정원장은 대법원 판결이 난 다음에 처리하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2016년 20대 총선이 끝나고 여소야대 국면이 이루어지자 국정원은 그를 해임시켰다. 2013년 사건이 밝혀지고 해임에 이르는데 무려 3년의 세월이 걸렸다. 디시인사이드와 일간베스트라는 대형커뮤니티를 사용하는 민간유저들의 반감정서는 타인을 통해 주도된 것과는 다르지만.

이후 이명박 정부박근혜 정부 시기의 국정원이 저지른 범죄행각이 차례로 발굴되면서 국정원이 직접 주도하여 노무현 전 대통령을 공격하고 사후에도 짓밟기 위해 총공격을 가했다는 것이 여지없이 다 드러났다. 국정원이 노 전 대통령에 대한 반감여론을 '주도'했다는 것은 그냥 표현이 그런 게 아니라, 실제로 체계적으로 이를 시행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표적인 예로 이명박 정부는 대북공작금을 유용하여 소위 '연어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노무현의 음해 목적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인터넷에서 쉽게 노 전 대통령을 모독하는 합성사진이나 영상을 찾을 수 있다. 일베저장소 등에서는 'MC무현'이라는 이름으로 노 전 대통령의 생전의 음성을 합성한다. 특히 '응디시티' 와 같은 곡들은 조회수를 1000만 정도 보여주었다.[38] 이로 인해 노무현 전 대통령은 현재까지도 디시인사이드나 일베저장소에서 고인모독을 당하고 있으며 이 사이트들에선 이것이 밈(meme)화되어 이 행위가 명백한 '고인모독'임에도 무엇이 문제냐?라는 식의 적반하장격 그릇된 정서가 형성되어 있다.[39][40]

JTBC에서는 노알라 합성사진이 심리학자들의 조언과 설계에 따라 국정원이 직접 만들어 고인 비하를 주도하였다고 의혹을 게시하였다. 중앙일보 기사 - "노무현 코알라 합성 사진, 심리학자 자문받아 국정원이 제작" 다만 이는 반론도 존재하는데, 노무현 전 대통령을 향한 많은 공작은 2009년 노 전 대통령의 서거시까지가 피크였어야 하나 노알라는 2013년 1월 12일[41] 뜬금없이 일베에 올라온 합성사진이 히트한 것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저 의혹제기의 출처도 한 사람의 증언에 불과하고 확실하게 확인된 것은 아니다. 2022 대선에서 노무현재단의 허락을 받고 AI로 노무현의 육성 복원을 한 것만 봐도..

9. 방송 출연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방송 출연을 많이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변호사 시절인 90년대에 라디오 프로그램 DJ를 맡았고, 예능 프로그램과 100분 토론 같은 시사 프로그램에도 반고정급으로 나오는 등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방송활동을 많이 했었다. 이 때문에 대통령들 중 방송적인 재능은 가장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기도 한다.

10. 부른 노래

다른 대통령들과 달리 노무현은 공식 석상에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자주 보여준 바 있다. 노래뿐만 아니라 기타를 직접 연주해보이기도 했다.

11. 각종 타이틀

12. 그 외 여담

파일:노무현 휘호_1.jpg파일:노무현 휘호_2.jpg}}}||
서예에는 그다지 조예가 깊지 않았다.[60] 대신 펜글씨는 상당히 달필인데 사법시험 출신자답게 '고시체'의 특징이 많이 묻어있다.[61]
파일:0003558891_001_20190523145802399.jpg}}} ||
노무현 前 대통령 10주기 추도식에서 추도사를 하고 있는 조지 W. 부시 前 미국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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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인즉슨, 사진에 나온 병사가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아버지!"하면서 달려들어 안기자 노무현 전 대통령은 "그래, 아들아!"하면서 안아주었다는 설이 웹툰을 통해 확산되었는데, 노무현의 반대자들 중 일부는 이 사진이 연출된 것이라 주장하였다. 그러나, 다음 이종격투기 카페에서 사진에 등장한 병사가 직접 인증하여 당시 상황을 밝히면서 논란은 종식되었다. 결론적으로 이 사진은 연출된 것이 아니며, 웹툰의 내용 100%는 아니지만 실제로는 돌발 상황에 가깝다. 당사자가 밝힌 바에 의하면 노무현 대통령의 자이툰 부대 방문자체가 비밀리에 계획되어 유럽순방을 마치고 돌아오는 중 순식간에 진행된 터라, 당시 수행원과 기자단 대다수 그리고 현지 부대원들조차 대통령의 전격방문을 몰랐고, 병사들도 예정에 없던 대통령이 등장하자 반가운 마음에 대통령을 향해 달려가자 주변의 경호원 2명이 제지를 하였는데, 노 대통령이 괜찮다면서 경호원을 물렸다고 한다. 그리고 이 병사는 노 대통령에게 걸어가서 "포옹 한 번 해주시면 가문의 영광으로 받겠습니다."하고 말하자, 노 대통령은 두 팔을 쫙 벌렸고 병사는 기쁜 마음에 노무현 전 대통령을 번쩍 안아올리면서 위와 같은 사진이 나왔다고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 병사가 본인을 들어올리는 과정에서 혹시나 다칠까 걱정하며 "다칠라"는 말을 건넸고, 병사는 최선을 다해서 복무하겠다는 말로 화답하였다. 이종격투기 카페에선 이 병사의 인증글에 100여개에 달하는 댓글들이 달리며 화제가 되었고, 병사는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고 회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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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무현 전 대통령이 철 없던 시절, 결혼하고 나서 아내에게 가정폭력을 저질렀다는 내용도 있다. 그 외에도 길가던 아주머니들한테 음담패설을 하거나 노상방뇨를 했다는 등의 과거를 털어놓기도 했다. 물론 이 내용자체는 자기자랑 같은 요소가 아닌, 철 없던 시절의 과오에 대한 자기반성의 의미에서 나온 부분이다.[2] 당시 사법시험 합격자 수는 60여명이었고, 심지어 노무현 전 대통령이 변호사로 개업했을 때 부산의 변호사 수가 3명에 불과했다. 독학으로 사법시험을 패스한 경우는 몇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라고 한다.[3] 이후 사법시험 합격자가 300명, 700명, 그리고 1,000명으로 늘어난에뒤에도 고졸 출신 합격자가 나오는 일은 흔치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고작 60명을 선발하던 시절에 고졸/상고 출신이 합격했다는 것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4] 노무현입니다에 따르면 5.18 관련 기록집을 본 이후에 노무현의 감시역으로서의 임무에 회의를 느꼈고, 그걸 당시 변호사였던 노무현에게 털어놓자 감시자가 그래서야 일할 수 있겠느냐고 말해주었다고 한다. 사망하기 얼마 전에도 이화춘이는 요즘 왜 안 오나 하면서 찾기도 했다고.[5] 80년만 해도 진보성향에 가까웠다. 우경화가 된 것은 시간이 지난 뒤의 일[6] 거의 공범 수준으로 변호했으며 피해자 가족들이 변호사가 저렇게 싸우듯이 변호해도 되나하고 우려할 정도였다고 한다.[7]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할 목적으로 작성하였으므로 법적 효력을 기대하고 한 것은 아니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가 자살로 위장한 암살 아니냐는 논란을 불러왔다. 물론 수사를 받는 상황에 있고, 재평가를 받고 있는 지금보다는 약했긴 했지만 나름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암살 논란은 커졌다.[8] 이 충성심이 친노라는 계파가 끝까지 남아 이념집단이 될수 있었던 이유가 되었다. 친노 계파는 보스인 노무현 전 대통령이 타계한 이후 친노 내부의 계파를 가리지 않고 노무현의 의지 중 가장 큰 갈래인 지역주의타파와 주체적인 국제관계설정 등 이념적인 부분을 내세우며 정치 계파로써 부활에 성공했으며, 그의 절친이자 맨토인 문재인은 이를 기반으로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다. 2010년대 중반 들어 친노가 해체된 가장 큰 이유가 이를 통해 친문 세력으로 계승되었기 때문이다.[9] 검찰에 이명박 구속에 핵심 증거가 될 정보를 불었던 사람들을 보면 하나같이 이명박의 측근들이다. 그리고 이명박의 몰락에 기여한 사람들 중에는 과거 친이계 출신도 있다.[10] 다만 대중의 이미지와는 달리 변호사의 업무는 주로 서면으로 행해지기 때문에 모든 변호사가 꼭 달변인 것은 아니다. 그냥 노 대통령 본인이 연설을 잘했던 것이기도 하다. 이는 친구인 문재인 대통령이 똑같은 변호사 경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창한 언변을 소유하고 있지는 않으나, 그 경력이 어디 가질 않아서 나름대로 힘있고 간결하게 말하고자 하는 바를 확실히 전달하는 문장을 주로 사용한다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11] 2018년 아셈 회의 때 문재인 대통령도 비슷한 행동을 하는 것으로 밝혀졌는데, 연설문 점검하고 손수 고치다가 포토타임에서 빠졌기 때문이다. 아셈의전 관계자 연락 받고 이동했으나 엘리베이터가 오지 않아 포토라인에서 빠진 것인데, 자세한 내용은 해당 기사로.[12] 그런데 실제 노서은의 생일은 2004년 1월 14일이며, 이날은 수요일이었다. 아마도 신생아실에서 나오기 직전에 방문한 듯 하다.[13] 다만 처칠은 일반 담배보다는 시가를 주로 애용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하루에 시가 11개비를 피웠을 정도라는데, 일반 담배는 그 정도로 피우는 흡연자들이 많지만 시가는 한번 피우는 데만 수십분 이상 걸린다는 걸 감안하면 시가 흡연자들 중에서도 헤비 스모커에 속한다. 그렇게 시가를 즐기고 코냑, 위스키를 마셨는데도 90세 이상까지 장수했다.[14] KT&G에서 필립 모리스가 출시한 버지니아 슬림을 견제할 목적으로 개발한 담배다. 이전에 즐겨피우던 에쎄와 마찬가지로 슬림하면서도 타르 함량이 5미리 이상인 고타르 담배다.[15] 보통 정신적으로 큰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흡연자들의 경우 흡연량이 극도로 많아지는 경우가 흔하다.[16] 반면 노사모에 비해 정치적 성격이 옅은 노무현 재단의 회원들이 증가하였다.[17] 심지어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같은 당 내에서도 색깔론 공격을 받았다. 즉, 16대 대선 후보 선출을 위한 새천년민주당 경선에서 경쟁자 진영에서는 노무현 당시 후보의 장인의 이력을 들어 색깔론 공세를 펼치기도 했었다는 얘기.[18] 가난한 고학생 출신이었던 이명박과 비교되는 이야기다.[19] 이 후 YS는 참여정부가 끝날 때까지 노무현을 맹비난했으며 그가 자신을 뒷통수치고 떠났으니 의리가 없다는 식으로 평하기도 했다. 노무현의 국민장 때도 소회를 묻는 질문에 “꽃만 던져버리고 왔다“는 식으로 답해서, 마지막까지 두 사람의 감정이 풀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 되었다.[20] 당장 2007년 대선 당시 공화계의 수장이었던 JP가 이명박을 지지했을 정도였다.[21] 경상도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터전이었던 부산광역시에서조차 한나라당의 영향력이 막강했고, 호남도 전남, 광주는 전부 동교동계의 세력 안으로 들어간 상태여서 열린우리당의 텃밭이라 불릴 지역은 전라북도밖에 없었기도 하다.[22] 특히 김영삼과 이명박의 경우 지지율이 호남을 제외한 전국에서 거의 압도적이다시피 했다.[23] 다른 얘기지만, 삼성공화국이라고까지 불렸던 참여정부 말기 삼성X파일 특검법에 대해서는 청와대에서 거부권을 행사하겠다고 했던 적이 있는데, 이것 때문에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다.[24]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의 탈당파와 민주당 탈당파를 포함해 2003년 11월 11일 창당하였다. 열린우리당은 당대표나 당 총재라는 이름 대신 의장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는데, 열린우리당의 초대 의장은 정동영이었으며, 김근태가 원내대표를 맡았다.[25] 이 시기를 탄핵 정국이라고 하며, 여론은 기존 정당에 대한 비토로 들끓었으며 4월 총선에서 신규 정당인 열린우리당이 압승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출처.[26] 실제로 동교동계에서는 현재도 노무현에게 전혀 우호적이지 않거나 적대적인 인물도 상당히 많다. 그 결과, 보수정당 - 동교동계 비노가 연합해서 노무현 탄핵 소추를 가결시키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또한 그 구 동교동계 비노 성향의 인물들은 상당수가 더불어민주당이 아닌 국민의당으로 김한길, 안철수와 같이 당적을 옮겼다.[27] 당시 진보 언론지인 한겨레 21에서 사설로 노 전 대통령의 대연정론을 정면으로 비판했을 정도였다.[28] 당시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 계열과 민주당 계열 간의 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정책 방향이 모호할 뿐더러 참여 정부의 거수기 역할만 했다는 평이 높았다. 출처.[29] 실제로 이명박 대통령 취임 직후 실시된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친박연대와 자유선진당을 제외한 한나라당은 150석을 가볍게 획득했으며, 그 당선자 중 친이계-범친이계 정치인만 무려 국회의원 전체 의석의 45%에 달할 정도로 당시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엄청났다.[30] 엄밀히 말하면 당시에는 여당이 없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 2월에 열린우리당에서 탈당했기 때문이다.[31] 원래 여당 후보가 임기 말에 지지율이 지리멸렬해지는 현직 대통령과 거리를 두는 건 한국 정치의 전통이다. 이건 어느 나라 정치나 마찬가지이다. 조지 W. 부시가 임기 말년에 공화당 대선 후보들로부터 받은 푸대접은 눈물이 날 정도이다. 버락 오바마힐러리 클린턴과 자주 같이 다니는 건 그의 인기가 높아서지 미국 정치가 선진적이어서가 아니다. 전두환은 노태우에게, 노태우는 김영삼에게 팽당했고, 김영삼과 김대중, 노무현은 임기 말에 스스로 만든 당에서 쫓겨났다. 민주화 이후 당적을 유지한 채 임기를 마친 최초 대통령이 바로 후임자 이명박, 민주당계로 한정한다면 문재인이다.[32] 사실 정동영도 노무현 정부 탄생의 일등 공신으로서 중반까지는 사이가 무척 가까웠고, 노무현은 2005년에 정동영을 통일부장관으로 임명시키며 그를 대권 주자로 밀어주려는 움직임도 보였다. 하지만 국정 운영 방침을 두고 둘의 사이는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고, 정동영도 노무현과 선을 긋는 방식으로 조금이나마 지지를 얻게 될 정도였다. 현재도 친노가 아닌, 소위 비노로 분류되는 민생당 소속이다.[33] 당장에 참여정부 직전의 정부였던 김대중 정부(국민의 정부)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공공장소에서는 사소한 말 한 마디만 잘못해도 무조건 큰 곤욕을 치르기 일쑤였다. 물론 그 이전은 말할 것도 없다.[34] 국정원 독대를 받지 않았고, 검찰 권력을 휘두르려 하지 않았다.[35] 당시 노무현 대통령 공격에 앞장섰던 이상돈 교수는 저 정도면 잘못하면 사람이 죽고 임기를 마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훗날 회고하였다. 이후 이상돈 교수는 박근혜 대통령 후보 비대위로 활동하며 이명박 정부 심판을 말하였다.[36] 한편 이명박 대통령 시절에는 인터넷에서 댓글 한 번 작성한 것만으로 경찰조사를 받을 수 있는 법이 제정되었던 것과 대조된다고 하지만, 사이버모욕죄라는 것은 본래 최진실법이라는 이름으로 추진된 법으로 2008년, 즉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가 끝난 후에 적용된 것으로, "단지 대통령을 욕했기에 체포되었다"며 편향적으로 바라보기는 힘들다. "대통령을 욕했다"는 것보다, "특정 인물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경찰서에 소환된 셈이다. 관련 링크 1, 관련 링크 2.[37] 노 전 대통령은 검찰에 피아제 시계를 권양숙 여사가 밖에 내다버렸다고 진술했다. 유시민의 말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이 직접 망치로 깨부쉈다고 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노 전 대통령은 검찰에서 허위진술을 한 것이다.[38] 잘 알려진 대로 일베저장소가 주범이지만, 시작은 디시인사이드이다. 사실 디시 합필갤·코갤·야갤 등에서 출발한 일베 밈이 상당히 많다. 상호관계가 활발하기 때문.[39] 다만 이러한 합성물을 제작하고 향유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인간 노무현을 재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는 편이다. 실제로 메이져 합성 유튜버인 부엉이에듀의 경우 노무현, 이명박을 선역으로 묘사하고 김대중, 박근혜, 문재인, 이재명 등은 악역으로 묘사하는 합성물의 비중이 많다. 그러나 해당 재평가 또한 친노 지지자들 입장에서는 그들의 재평가 대다수는 진심이 아닌 밈(meme)적 재평가나 다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40] 2020년대 들어서는 노무현 밈을 향유하는 세대가 노무현 정부의 경험이 없거나 희미한 Z세대에게로 넘어가며 이러한 모욕, 비하성 합성물은 본인들이 직접 경험한 문재인, 박원순, 이재명에게 많이 옮겨갔다. 상대적으로 정치성향이 옅은 가사나 더욱 다양한 장르의 합성물이 생겨나고 있다. 그리고 JTBC 선거방송에서 노무현재단의 허락을 받고 다른 전직 대통령들과 함께 AI로 노무현의 목소리를 복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앞선 합성물들은 아무리 그 정도가 약해졌어도 기본적으로는 비하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지기 때문에 JTBC 선거방송과 비교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41] 제18대 대통령 선거박근혜의 승리로 끝나고, 국가정보원 여론조작 사건이 발각된 다.[42] 노무현 대통령이 평소 가장 즐겨 부르던 노래, 사망 후에는 노무현 추모곡으로 쓰이기도 했다.[43] 다만 이때 병장으로 전역하지 못한 사람들위해 특별법이 제정되어 본인이나 가족이 원할경우 군적에서 병장전역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44] 탄핵안 기각 직후인 2004년 5월 24일 열린우리당에 입당했다.[45] 당선 경력밖에 없는 8명은 모두 보수 성향이다. 이 중 윤석열은 제6공화국 대통령 중 대선 이외에 선거 경력이 없다.[46] 그의 동지이자 동생이었던 문재인은 당시 민주통합당 국회의원 시절에 18대 대선이 첫 대선 출마였으며, 그러다가 문재인 동생은 1살 많은 누나였던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에게 근소한 차이로 패해 고배를 마셨으며, 그 이후 19대 대선에 출마해 대통령이 된 것.[47] 최규하는 예외적으로 유교였다.[48] 박정희는 본인의 주장으로는 무종교였다지만, 공식 약력에는 불교로 되어 있고, 박근혜는 공식적으로는 무종교라지만, 실상은 박근혜/비판/사이비 종교 논란이라는 문서까지 만들어졌듯이 확실한 종교관을 알 수가 없다.[49] 단, 부인불자다.[50] 이후에 박근혜가 본인의 정치적 고향이었던 대구광역시 달성군으로 돌아갔고, 문재인 또한 퇴임 후 경상남도 양산시 평산마을 사저로 귀향하였다.[51] 사실 세계에서도 국가원수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경우는 탄핵당하는 경우만큼이나 드물고, 지역강국 이상급 국가원수가 자살한 경우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제외하면 제툴리오 바르가스 브라질 대통령이 유일하다. 노무현 이전 존 매큐언 호주 총리는 1달도 안 되어 물러난 권한대행 수준이었고, 피에르 베레고부아 프랑스 총리는 2인자격이었으며, 노무현 이후 드리스 판 아흐트 네덜란드 총리는 안락사이으므로 논외.[52] 2024년 현재 현역인 미군정 출생 정치인은 국민의힘 소속 인천 안상수가 유일하다. 최근까지 현역이었던 창원 안상수, 손학규에 이어 2024년 김진표까지 죄다 정계에서 은퇴했기 때문.[53] 다만 국무위원과 동급인 장관급 공직자를 지낸 대통령은 노무현 이후로 3명이 더 나왔다. 이명박은 서울특별시장을, 문재인은 대통령비서실장을, 윤석열은 검찰총장을 지냈는데, 이 세 직책은 모두 장관급이다. 19대 대선 본선 후보와 20대 대선 경선 후보에 올랐던 유승민과 홍준표도 각각 장관급에 상응하는 국회 상임위원장(유승민은 국회운영위원장과 국방위원장, 홍준표는 국회운영위원장과 환경노동위원장)을 지냈었다.[54] 김대중 대통령의 재임 기간 평균 지지율은 40%, 노무현 대통령은 27%였다. 두번째로 전임 대통령보다 지지율 평균치가 낮은 대통령은 윤석열 대통령이다.[55] 박정희는 임기 도중 암살당했으니 제외.[56] 반면 퇴임 후 전직 대통령으로 지내는 기간이 가장 긴 대통령은 전두환(33년 9개월)이며, 예우가 박탈되지 않은 전직 대통령들 중에서는 윤보선이 28년 4개월로 가장 길다.[57] 세는 나이까지 따지면 이승만(1875년)-윤보선(1897년)과 공동이긴 하나, 이승만은 3월생, 윤보선은 8월생이기 때문에 22년 5개월이므로 세부적으로 보면 김대중-노무현이 가장 많이 차이난다.[58] 참고로 이 나이차이는 노무현이 5년 임기 내내 파트너이자 동갑내기인 조지 W. 부시(미국 제 43대 대통령)와 그의 아버지인 조지 H. W. 부시(미국 제 41대 대통령)의 나이차이와 같으며, 아버지 부시는 6월생, 아들 부시는 7월생으로 이승만-윤보선, 김대중-노무현 보다도 격차가 약간 더 좁다. 전임자인 김대중은 아버지 부시, 지미 카터와 1924년생으로 동갑이다. 다만 부시 부자는 그 사이에 빌 클린턴이 있는 것을 생각해야 하지만...그런데 클린턴도 같은 1946년생[59] 게다가 당시에는 결혼연령이 10대 후반~20대 중반으로 빨랐던걸 감안하면 김대중과 노무현은 아버지와 아들 뻘이다. 이것은 앞서 설명한 이승만-윤보선도 마찬가지.[60] 어차피 유명인들의 휘호는 그의 삶에 대한 평가로 가치가 정해지는 것이지 글씨를 얼마나 잘 썼느냐는 부차적 요소이긴 하다.[61] 모음은 휘갈겨 쓰면서도 가독성이 좋아야 하기 때문에 자음은 큼직큼직하게, 구분이 확 되도록 쓰는게 고시체의 특징이다. 'ㄹ'자는 'ㅈ'과 구분되게 하기 위해 반드시 한 획에 쓰지 않고 3획으로 쓰고, 'ㅁ'자는 'ㅇ'이나 'ㄹ'과 헷갈리지 않기 위해 삐침을 강하게 주는 것 등이다.[62] KBS의 前 아나운서.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국회의원인 김민석의 아내. 지금은 이혼했다.[63] "스머프 무슨 그 만화,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뭐..."[64]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이 이뤄졌을 당시의 발언이다. 헌데, 워낙 당시에는 원더걸스가 절대적인 존재였는지라 이명박, 정동영, 이회창, 권영길 같은 다른 대선 후보들도 하나같이 같은 대답들로 일관했다.[65] 유시민: 권 여사께서 담배 갖고 지청구를 많이 주셨다. 저녁에 우리가 관저에 들어 갈 때면 우리와 어울려서 담배를 피우곤 하셨다. 그러면 권 여사께서 말을 못하니까. 어느 한 날은 우리도 지청구를 들었다. 대통령이 담배를 많이 피우게 만든다고 말이다. 그러다가 권 여사가 나가시면 또 담배를 피우곤 했다.[66] 에쎄의 경우 지금이야 젊은 층들을 겨냥해 가벼운 담배도 많이 나오지만 첫 출시 때는 고타르 제품이었다.[67] 참고로 저 정도면 세계 기준으로는 저타르 담배에 가깝다. 한국이 얼마나 저타르 담배를 선호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68] 2004년 참여정부 민정수석을 그만두고 히말라야로 트래킹을 갔다가 오랜 흡연으로 인해 산소가 부족해지는 것을 느끼고 바로 금연했다고 한다.[69] 이는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연설문에서 군대 다녀온 뒤 예비군 훈련까지 다 받았다고 언급된다.[70] 노건호의 경우 스트레스성 탈모가 상당히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71] 반대로 후임 이명박은 하도 잡곡밥을 많이 먹은 탓에 흰쌀밥을 좋아하고 잡곡밥을 싫어한다고. 특히 콩을 상당히 싫어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둘 다 어린 시절 질리도록 먹은 음식이지만 한 명은 나이를 먹고 역으로 더 찾는 반면 한 명은 트라우마 급으로 싫어한다는 게 재밌는 점.[72] 1999년 설립되었으나 2006년 3월에 폐쇄된 캐릭터메일 사이트다.[73] 파일:1_2315_1.gif[74] 2004년 2월까지 해당 배너가 띄워졌다.[75] 파일:씨즈메일2003크리스마스.png이때 배너 내용은 "노산타! 에게 바라는 당신의 소원은?" 이었으며, 자고로 쟁반노래방 자막의 글자체와 동일한 폰트를 사용했다.[76] 철자도 같다[77] 이경실이 당시 대기실에서 자신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주는 그의 모습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고 훗날 예능에서 밝힌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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