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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년 및 학창시절
- 여섯 살에 천자문을 독학해 동네 산골 마을에서 천재로 알려졌고, 대창초등학교와 진영중학교에서 항상 상위권을 유지했으나 부산상고 시절부터는 친구들과 수업을 빼먹고 술·담배 등을 접하며 엇나갔다고 한다. 이는 가난이라는 콤플렉스가 반항기의 주된 이유였는데, 그의 자서전 에세이 ‘여보, 나 좀 도와줘’[1]에서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어릴 때 나는 상당히 반항적이었고 한편으로는 열등감이 심했던 것 같다. 가슴에 한과 적개심을 감추고 있기도 했고, 쉽게 좌절하기도 했다.”라 쓰여있다. 원래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하려고 했으나 가세가 기울며 원하지 않는 상고로 진학하게 된 것이 이유로 추정된다. 당시에는 성적도 낮아지고 고교시절을 친구의 집에서 방황하며 지냈다고 전해진다. #
- 중학교 2학년엔 3.15 부정선거를 앞두고 ‘우리 이승만 대통령’이라는 제목의 글쓰기 행사가 교내에 열렸는데, 당시 반장이었던 본인은 불법선거 운동이라며 ‘백지동맹’을 주도했다. 그는 이 일로 반성문을 강요받았지만, 이를 시인하지 않고 끝까지 버텼다고 한다. #
- 노무현 대통령 장례식에 참석했던 그의 친구 중 한 명은 고등학교 때 빵을 하나 사서 노 전 대통령한테 나눠 먹자고 했는데 ''반씩 먹으면 둘 다 배고프니 네가 다 먹어라. 나는 배고픈 거 잘 참는다"라고 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눈물을 보였다. #
2. 변호사 시절
- 극히 적은 인원을 선발하던 시절에 사법시험을 합격하여[2][3]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입증해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학력이 낮다는 이유만으로, 즉 고졸/상고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법조계 내에서 심한 무시와 멸시를 당했다고 전해진다. 다만 학력이 낮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법조계나 상류사회 내에서 낮다는 얘기지, 사실 1960년대 당시 중학교 진학률이 40%~50% 수준이었고, 고등학교와 대학교 진학률은 그보다도 더 낮았기 때문에 동세대 기준으로 치면 학력이 오히려 높은 축에 들었다. 노무현이 한창 학교를 다녔을 때에는 고등학교는 물론이고 중학교도 시험쳐서 가야 했던 시절이고, 국민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취업하거나 부모 일을 도왔던 청소년들이 많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1960년대와 2000년대 이후의 시대상을 동일선상으로 비교하는 것은 사실 잘못된 것이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사법시험에 합격하자마자 바로 변호사가 된 게 아니었다. 사법시험을 처음 합격했을 때에는 대전지방법원에서 판사를 했으나 7개월 만에 퇴직하고 변호사가 된 것이다. 참고로 판사는 사법시험 합격자들 중에서도 실력과 덕망을 고루 가진 최상급 엘리트만 선발한다. 강용석의 경우 군복무 시절 구타 가혹행위 가해 혐의로 인해 판사 부적격 인물이 되었다.
- 노동운동가인 김진숙의 회고에 따르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인권변호사 시절 노동자들에게 법률지식을 가르치기 위한 소모임을 열거나, 노동조합원들이 여는 강연에 강사로 나서기도 하였다. 무료 법률상담소를 운영하며 형편이 어려운 자들을 위해 법률상담을 해주거나 무료로 소송을 대리하기도 하였다. 전태일의 기일에는 김진숙을 비롯한 몇몇 노동자들을 초청하여 변호사 사무실에 간단한 제사상을 마련하여 추모 의식을 치르곤 했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은 1980년대 안기부에 의해 문제 변호사 4인 중 1명으로 찍혀 있던 상태였다. 이때 감시 역할을 맡은 안기부 직원 이화춘씨에게 노무현은 광주항쟁을 다룬 비디오나 기록집을 보여주고 노동·학생운동과 관련된 토론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이화춘 씨의 기관원 의식은 무뎌져갔고, 노무현 변호사와는 서로 애환을 챙기는 사이로까지 발전했다고 한다.[4] 훗날 이 사람은 노무현 대통령 후보의 경선, 대선 캠프에 정책특보로 합류한다.기사,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만화
- 노무현이 세무전문변호사로 활동하던 시절 부림사건에서 체포된 학생들 중 한 명을 면회하는 과정에서 고문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때부터 이 사건의 변호에 미친듯이 매달렸다고 한다.# 당시 노무현 변호사는 주 변호인단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림사건의 피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노무현 변호사가 가장 열성적으로 변론했다고 증언하고 있으며 당시 판사였던 서석구 변호사[5]도 본인의 블로그에 쓴 글에서 노무현 변호사가 재판 중 부림사건 피해자들에게 고문이 있었음을 폭로했다는 사실을 밝힌 바 있고, tv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노무현 변호사가 부림사건 당시 피해자들에게 고문이 있었음을 폭로하여 큰 화제가 되었다고 증언하였다.# 훗날 대법원은 부림사건의 수사과정에서 고문이 있었음을 인정하며 피해자들 전원에게 무죄로 최종판결을 내린다. 부림사건 피해자들은 훗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헌신적인 노력에 깊은 감사의 뜻을 밝혔다.# 고호석 씨는 노무현 변호사가 법정에서 격앙되어 판사와 싸울 정도로 열정적으로 변호했다고 증언하면서[6] 그의 당시 헌신적인 변호 덕분에 33년이 지나 무죄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1, #2, #3 박욱영 씨는 노무현 변호사가 차분하고 논리적이면서도 때로는 거칠게 판검사들을 밀어 부쳤다고 증언하였으며, 최준영 씨는 노무현 변호사가 편한 길을 갈 수 있었음에도 부림사건 피해자들을 변론하느라 험난한 길을 걷게 되었다며 안타까움을 나타내었다. 윤연희 씨는 노무현 변호사가 자신들의 무료변론 요청에 흔쾌히 응해준 것에 감사해하며 재판에서 피해자들의 편에 서서 당당하게 변호해 주었다고 회고했다.
- 훗날 부림사건의 피해자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역을 참배하며 고마움을 전했고#, 2014년 2월 13일 부림사건 피해자들에 대한 무죄선고가 나온 뒤 "무엇보다 오늘의 이 무죄 선고는 33년 전 저희를 위해 헌신적으로 변호했던 노무현 변호사님의 헌신적인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한다"며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기사
- 노무현 전 대통령이 변호사 시절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씨의 장례식에 제 3자 개입 위반 혐의로 구속된 적이 있었다. 이 건과 관련한 구속 적부심에서 99명의 변호사가 무료변론을 자청하였고, 이들 대부분이 재판에 참석하여 화제가 된 적이 있다. 99명의 변호인단 중 대표변호사를 맡은 김광일 변호사가 판사에게 재판에 출석한 변호인단 모두를 일일이 호명해줄 것을 요청했고, 그에 따라 자리가 모자라 방청석에까지 앉아있던 수많은 변호사들이 판사의 호명에 따라 한 명 한 명 자리에서 일어나 응답하였다고 한다. 이 장면은 영화 변호인에서 그대로 묘사되었다. 여담으로, 노무현의 변호를 맡아 도와줬던 변호사들 중에서는 박원순 前 서울특별시장도 있었다.# 김광일 변호사의 평전 '참 멋진 놈 하나 만났더라'에서 당시의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그 순간 김 변호사가 변호인석에서 벌떡 일어나서 이렇게 요구했다."출석한 변호인의 수가 많고 방청석에도 다수가 앉아 있어 변호인의 출석 여부를 확인하기 어려우니 재판장께서 직접 변호인을 호명하여 출석 여부를 확인하여 주십시오."결국 재판장은 장시간에 걸쳐 변호인을 일일이 호명하여 출석 여부를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토록 많은 변호사가 선임되었을 뿐 아니라 직접 법정에 출석하여 노무현 변호사의 석방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재판부가 직접 확인하도록 함으로써 재판의 분위기를 유리하게 이끌고 재판부에도 압박을 가하는 일종의 시위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원로 변호사들까지 포함한 그 많은 변호사들이 방청석 여기저기에서 "나도 출석했소"하고 한 명 한 명 일어날 때의 감동과 그런 상황을 연출해낸 김 변호사의 순간적인 판단력은 그 후 오랫동안 변호사들 사이에서 회자되었다. - '참 멋진 놈 하나 만났디라' 143~144 페이지
3. 퇴임 후
- 퇴임 이후 김해시 진영읍 봉하 들녘 8만1000m²에서 친환경 오리농법으로 벼를 재배했다. 이른바 ‘봉하 오리쌀’.
# 친환경 오리농법 보급에 의욕적이었던지 봉하마을 사저에서 오리농법의 창시자 후루노 다까오 박사를 접견하기도 하였다. 후루노 다까오 박사를 접견하는 노무현 전 대통령 - 퇴임 이후 봉하마을을 찾은 사람들을 만났을 때 반갑게 맞으며 같이 사진을 찍기도 했다.
- 묘역 공사는 서거하고 나서 거의 1년 후인 2010년 5월에 마무리되었다.
- 근년 들어서 지지층들 사이에서는 사람 보는 눈이 뛰어났던 인물로 새삼 회자되고 있다. 문재인에게는 정치할 것은 강권한 반면, 유시민에게는 정치를 그만두고 작가가 될 것을, 안희정에게는 정치를 그만두고 농사나 짓는게 어떻냐는 식의 얘기를 거듭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 이 같은 발언들이 2017~18년 들어서 문재인이 제19대 대통령이 되고, 유시민이 작가 겸 방송인으로서 큰 유명세를 얻은 반면, 안희정 전 충남지사는 성폭행 파문을 일으키자, 노 전 대통령의 말을 따른 두 사람은 성공하고 따르지 않은 한 사람은 나락으로 떨어지면서 새삼 조명되고 있는 것이다.
- 퇴임 후, 다양한 시민들의 의견을 듣고 토론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해 '민주주의 2.0' 이라는 인터넷 사이트를 만들었는데, 2010년까지 운영되었다. 당시 닉네임(필명)으로 사자성어 우공이산을 사용하려고 했으나, 누군가가 그 닉네임을 선점하는 바람에 성씨를 붙여 '노공이산' 이란 필명을 쓰게 된다. 서거 이후에는 만화 제목으로도 등장한다.
- 회고록 및 봉하마을에서 행한 연설, 김경수 비서관의 인터뷰 등을 참고해 보면 퇴임한 이후에도 자신을 잊지 않고 찾아주는 사람들 덕분에 행복했다고 한다. 김경수 비서관의 회고에 의하면 봉하마을의 방문객들과 인사하고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가장 즐거웠던 시간이었다고 한다. 퇴임 대통령이 이렇게 인기가 있었던 것은 이례적인 경우라, 퇴임 이후의 대통령이 자주 산악용 오토바이를 타는 모습이나 밀짚모자를 쓰고 방문객과 막걸리를 마시는 모습 등이 노출되었고 KBS 다큐멘터리 3일의 소재로 방영되기도 했다. 퇴임 후 고향에서 환경운동을 하는 전직 대통령의 새로운 모델이 신선했던 측면도 크다. 실제로 이 시기에 20대가 선택한 대중문화 전반의 핫 아이콘을 선발해 상을 주는 '제2회 Mnet 20's 초이스 컴백스타 부문'에서 노 전 대통령은 1위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김국진·신애·박미선·박찬호 등 스타들을 누르고 1위에 오른 것이다.
- 노무현을 차용하여 만든 2013년 영화 변호인은 천만 관객 돌파 영화가 되었으며 노무현입니다를 포함하여 여러 다큐멘터리들이 방영되고 있다.
- 2017년 5월 17일 '스위치'라는 조사기관에서 연예인, 스포츠 스타, 정치인 등을 총망라하여 호감도 순위를 조사한 결과 노무현 전 대통령은 65.2%로 7위를 기록하여 역대 정치인들 중 유일하게 10위 안에 들었다. 이는 54.2%로 16위를 기록한 전직 대통령 문재인보다 높은 수치이다. 참고로 1위는 유재석(70.5%), 2위는 공유(68.2%), 3위는 김연아(68.0%) 순으로 나타났다.#
- 퇴임후 낙향한 노무현은 김해에서 아마추어 사학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기사를 찾아보면 직접 임나일본부설을 반박할수 있는 고고학적 유물을 발굴했다고 나오기도 한다.
- 2023년을 전후로 대한민국의 정치가 서커스화되고 언론사들은 자극적인 기사와 편향보도, 정치인들은 상대방에 대한 악마화, 비방을 밥먹듯이 하며 국민을 생각하는 태도가 단 1g도 없다는 것이 사실상 드러남과 동시에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피로가 극에 달하면서, 좌우 막론 노무현 대통령을 그리워하는 여론이 매우 커졌다. 취임 후의 평가나 본인에 대한 논란은 있을지언정, 노무현이 아직 후보였던 시절 지역감정을 철저히 배제하고 예비군 활동에 참여하거나 시민들의 일을 함께 돕는 등의 모습에서는 진정성이 보였기 때문.
4. 성격 및 재능
- 국가 정보 기록물 시스템 이지원의 발명가 중 한명. 인문계의 성공 루트를 탄 인물이지만 대중들이 받아들이는 이미지와 달리 컴퓨터 관련 지식이 상당했고 활용 능력도 뛰어났다고한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정치계에서 인맥을 관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스스로 개발하기도 했으며 자신의 유서조차도 보통 자살하는 이들이 주로 사용하는 수기 방식이 아닌 한글 문서 타이핑으로 남겼다.[7] 게다가 사후의 논란으로 알려진 내용에 따르면 퇴임 후 e지원 시스템의 사본을 자신의 봉하마을 사저 네트워크에 NAS를 이용해 제작하여 통합시킬 정도의 능력자. 그리고 사법시험을 공부할 시절에 독서대를 개량하여 실용신안을 따낸 실력도 있다. # 다만 94년에 발간한 에세이인 “여보 나 좀 도와줘”에서는 외주를 맡겼다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외주라고 해도 프로그램 기획에 있어서 프로그래밍 지식이 없다면 절대 불가능하기 때문에 프로그래밍 능력은 있는 것으로 본다.
- 정치인이나 대통령이 아닌 한 개인으로 만났을 때는 국민들뿐만 아니라 한나라당 사람들에게도 평판이 좋았다고 한다. 자기 고집만 밀고 나가는 것 같지만 이야기를 해 보면 상대의 말을 잘 들어주고, 수긍만 시키면 금방 생각을 바꿨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의 평가에 따르면 본래는 평범하고 감성이 따뜻한 사람으로, 가난과 불합리에 대한 분노가 치열한 삶의 형식으로 나타났고 그것이 그의 죽음이 비극적으로 작용하는 원인이 되었을 거라고 평했다.
- 특유의 소박하고 털털한 성격과 인간적인 대우 때문에 부하들과 친했다. 또 자신의 어려움에는 강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자신 때문에 피해를 보는 것에는 매우 약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노무현이 처음 이명박 정부 시절 공격당했을 때는 상대할 자신이 있었지만 주변 사람들이 그로 인해 고통받게 되자 마음이 꺾였다고 한다. 그러한 면모 때문인지 정치 일선에서의 배신이나 결별과 별개로 역대 대통령의 부하들 중에서도 손꼽히게 부하들의 충성심이 높은 편이었다.[8] 이명박이 팀킬하는 보스로 악명이 자자해서 부하들이 보복으로 이명박을 감옥에 넣은 것과 대조되는 모습.[9]
- 변호사 출신이라 그런지 연설을 굉장히 잘한다. 글을 바라보는 눈도 굉장히 높아 연설 담당원 강원국이 임기 내내 제출한 연설문 초고중 단 한 건만 수정 없이 받아들였을 정도.
- 참여정부 시절 여러가지 폐단에 개혁적인 발언을 공개적으로 한 적이 많았다. 유시민 전 노무현재단 이사장의 말에 따르면 '지도자로써 국민들이 듣고 싶은 말만 할 수는 없다며 말이라도 해놓아야 문제가 뭔지 알테니 말은 해야겠다'라 했다고. 현재 노무현재단에서 진행하는 알릴레오 등 노 전 대통령이 생전에 한 관련 어록들을 찾아보면 벌써 참여정부 집권 종료 14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생을 마감하신지 12년이 넘어가는 시점에서까지 아직도 남아있는 국가적인 이슈에 관하여 깊이 고찰해온 소견들을 참모에게 이야기 해놓거나 매체에서 직접 발언한 것이 많다. 대표적으로 선거제도 개편, 검찰 개혁, 지역주의 완화, 남북관계 및 동북아 관계 개선, 언론 개혁, 연금, 건강보험 등에 관련된 복지제도 등 이미 당시 중요한 의제들을 2002~2003년에 이슈로써 이야기한 것만 보아도 지도자로써 국가의 비전을 제시하는 능력이 탁월했음을 알 수 있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전속 이발사였던 정주영 씨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소탈하고, 배려심 많은 따뜻한 분”으로 기억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발하는 동안에도 이발사가 긴장할까봐 먼저 농담을 건네고, 말도 항상 존대를 했다고 한다. 일주일에 한 번 청와대에 들어가는 이발사에게 “바쁜데 오라 가라 해서 미안하다”고 마음을 써주었고, 이런 대통령의 배려 덕에 정주영 씨는 일을 하면서 불편했던 적이 없었다고 한다. 평소 머리스타일은 이발사에게 일임하였지만, 딱 한 번 탄핵당했을 때 머리를 짧게 잘라달라고 주문한 적이 있다. 당시 노무현의 짧은 머리는 사람들 입길에 오르내렸고, 이발소의 단골손님들은 정 씨에게 핀잔을 주었다고 한다. 며칠 후 노무현은 이발을 하면서 정 씨에게 "제 머리 때문에 마음고생 많았죠"라고 말을 건네며 미안해했다고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만난 이후 정주영 씨는 경상도 특유의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진보적 성향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연설을 모두 담당했던 강원국 씨의 말에 따르면, 김 전 대통령은 생각의 과녁이 너무 멀어 맞추기가 어려웠고, 노 전 대통령은 과녁은 가까우나 막 움직여서 맞추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비슷한 비유로 유시민은 김 전 대통령은 높은 산이라 우러러보기에는 좋으나 오르기에는 힘들고, 노 전 대통령은 낮은 언덕이라 함께 오르기에 좋다는 말을 한적있다. 이 두 표현은 김대중과 노무현의 차이를 잘 보여준다.
- 연설에 능숙한 전문가이다. 노무현 대통령 연설 모음 대선 출마 연설 한일 관계 담화문 연세대학교 초청연설 그의 연설 능력을 볼수 있는 가장 좋은 사례는 작통권 연설인데, 연설문이나 자료도 없는 순전한 즉흥 연설인데도 상당한 수준을 보인다. 이는 변호사라는 이력이 큰 영향이 미친 것으로 보인다.[10] 연설문이 생기면 전날 밤까지 고심고심하며 수정을 거듭했다고 전해지며, 대통령 재임 시절에도 대국민 담화라도 해야할 일이 생기면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11] 더불어 달변가로도 유명한데, 수십 명 되는 평검사들과의 토론에서도 굽히지 않고 토론을 이어나갈 정도로 막힘이 없다. 노무현 스스로도 대중 앞에서 말하기를 즐겼다. 귀향 후 봉하마을 방문객들 앞에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떠들었을 정도니. 이 이야기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연설문 작성 방식이 재조명받고 있으며,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연설비서관이었던 강원국 씨가 방송에 자주 노출되었다. 아울러 대통령의 글쓰기 책도 재조명받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은 상술했듯 본인이 직접 연설문을 쓴 경우도 꽤 되었으며, 전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연설문 강의 지시를 내린 적도 있었다. 언론에 자주 노출된 강원국 씨의 사례를 보면 하나같이 나오는 말이 "자기 생각을 자신의 말로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사람은 리더가 아니다"이다.
- 많은 연설 중에서도 특히 1988년 7월 8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한 말이 상당히 유명하다. 2009년 5월 23일 서거 이후 더욱 회자되었다.존경하는 의원 여러분! 그리고 국무위원 여러분!부산 동구에서 처음으로 국회의원이 된 노무현입니다.국무위원 여러분, 저는 별로 성실한 답변을 요구 안 합니다. 성실한 답변을 요구해도 비슷하니까요.청년 학생들이 죽어가는 것은감옥에 가서 참회해야 될 사람들이 권력을 잡고 온갖 도둑질을 다 해 먹으면서바른 말 하는 사람 데려다가 고문하고 죽이는 바람에 생긴 일이니까그 사람들이 임명한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에게 무슨 대책이 있으리라고는 믿지 않습니다.물으면 제가 그르지요.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는 더불어 사는 사람 모두가 먹는 것, 입는 것, 이런 걱정 좀 안 하고, 더럽고 아니꼬운 꼬라지 좀 안 보고, 그래서 하루하루가 좀 신명나게 이어지는 그런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만일 이런 세상이 좀 지나친 욕심이라면, 적어도 살기가 힘이 들어서 아니면 분하고 서러워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그런 일은 좀 없는 세상. 이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노동자와 농민이 다 함께 잘 살게 되고 임금의 격차가 줄어져서 굳이 일류 대학을 나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리고 높은 자리에 안 올라가도 사람 대접 받을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되면...
- 노무현 전 대통령은 손녀가 태어난 날 병원을 방문하여 잠깐 손녀를 본 뒤 곧바로 자리를 떴다고 한다. 동행한 권양숙 여사가 좀 더 있다가자고 말하자 노 전 대통령은 "일요일인데 경호원들이 집에서 못 쉬고 나와있지 않느냐? 우리가 빨리 가야 경호원들이 쉴 수 있다."라며[12] 재촉하여 서둘러 자리를 떴다고 한다.#
5. 애연가
생전 담배를 많이 피우는 골초로 유명했다. 공식석상에서 담배를 피우는 장면을 쉽게 찾을 수 있을 정도이며, 퇴임 이후에도 봉하마을 주민들과 담배를 피우며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 여러차례 잡히면서 노무현의 서민적인 이미지를 상징하게 되었다. 현재까지도 애연가인 정치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면 늘 1순위로 언급될 정도인데, 서양에서는 윈스턴 처칠이 있다면[13] 한국에는 노무현이 언급될 정도로 담배와 연관이 깊은 정치인이었다. 흡연은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했다고 하며, 본격적으로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변호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흡연량이 부쩍 늘었다고 전해진다. 젊을 때는 하루에 2갑 정도 피웠으며, 식사를 한 뒤에는 꼭 2~3개비씩 줄담배를 피우며 식후땡을 했다고 한다.
평소 멘솔이나 캡슐 같은 가향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클래식한 스타일의 고타르 담배를 선호했다고 알려진다. 정치생활을 하면서 피우는 담배 브랜드를 몇 번 바꾼 적이 있는데, 평소 즐기던 담배는 에쎄였지만 굵은 담배인 디스 플러스와 아리랑 담배도 피웠다. 노무현재단의 회고글에 따르면 2004년 말 무렵까지 에쎄, 디스, 아리랑 3가지 담배를 섞어서 피우다가 임기 중반 무렵부터 에쎄로 완전 정착했다고 한다. 원래 노무현은 굵고 타르 함량이 높은 담배를 좋아해서 가는 담배를 피우는 것을 "담배도 아니다" 라는 식으로 농담한 적이 있었다고 하는데, 대통령직 자체가 격무를 수행해야 하는 직업이다보니 건강 악화를 우려해 가는 담배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중 임기 말, 참여정부에서 문화재청장을 지냈던 유홍준 교수의 추천으로 클라우드 나인으로 담배를 한번 더 바꿨고 퇴임한 후 서거할 때까지 클라우드 나인을 피웠다.[14] 퇴임 후 봉하마을에 위치한 한 슈퍼에서 담배를 피우며 휴식을 취하는 사진이 유명한데, 이 때 피우던 담배가 바로 클라우드 나인이다.
민주당계 정당의 정치인들은 흡연자였던 김대중과 박상천의 영향으로 담배를 피우는 정치인들이 많았고 흡연에 대해서도 꽤나 관대했는데, 이들은 나이가 들어 대부분 금연했지만 노무현은 끝내 금연에 실패했다. 16대 대선을 앞두고 담배를 끊었지만, 8.8 재보선 이후 지지율이 하락하고 당 내/외에서 단일화 압박이 들어오자 스트레스로 다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이 후 대통령에 취임한 뒤 2004년 무렵, 주치의로부터 금연 권고를 받아 다시 한번 금연에 도전했다. 이 때는 권양숙 여사도 남편의 금연을 적극적으로 도왔고 노무현도 집무실에서 재떨이를 치워버릴 정도로 열정적이었다고 하는데, 노무현과 마찬가지로 골초로 유명한 이해찬이 국무총리로 입각하자 결국 금연 의지가 무너져버려 다시 담배에 손을 댔다. 권양숙이 남편이 담배를 피우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노무현도 아내가 보는 앞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고 대신 회의가 끝난 뒤 참모들에게 몇 개비 얻어서 피우거나 이해찬과 집무실에서 접견을 할 때 몇 개비 얻어서 맞담배를 피웠다고 한다.
퇴임을 앞두고는 담배를 줄여보기 위해 본인의 집무실에서는 담배를 치우고, 대신 보좌관에게 담배를 맡긴 뒤 필요할 때마다 몇 개비씩 배달받은 방식으로 바꾸었고 퇴임 후 봉하마을에 내려가서도 이런 식으로 흡연을 했다. 그러나 2009년에 들어 박연차 게이트 사건으로 검찰 조사를 받게 되자, 극도의 스트레스로 다시 흡연량이 늘기 시작했고 사망할 무렵에는 식사도 거의 하지 않고 담배만 계속 피웠다고 한다.[15]
사망한 당일 경호관과 봉하산에 도착해서도 "담배 있나?" 라고 물어봤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였고, 그가 끝내 서거한 뒤 분향소에 담배를 가지고 방문하는 조문객들이 많았다. 편의점에서도 국민장 기간동안 담배의 매출이 엄청나게 늘었다고 한다. 이는 비흡연자들도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바칠 목적으로 담배를 일부러 사서 분향소나 묘소 등에 놓고 갔다는 이야기다. 현재도 그가 투신한 부엉이바위나 묘지, 분향소 등에 가면 방문객들이 놓고 간 담배를 쉽게 볼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참여정부 시기에 공공장소에서의 금연이 시행되었고 담배갑의 경고 문구도 세세하게 추가되는 등 금연 정책이 다수 도입되기도 했다. 2005년에는 담배갑을 500원 올리려고 했으나 한나라당의 반발로 실패했다.
여담으로 노무현은 평생 국산 담배만 피웠으며, 궐련 외 파이프 담배나 롤링 타바코는 피우지 않았다. 2003년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할 때 시가를 피운 적은 있는데, 뒷이야기에 따르면 노무현이 회담 분위기를 풀어보기 위해 먼저 시가를 권했다고 한다. 취임 후 첫 브라질 방문이었기에 회담장 분위기도 굉장히 경직되어 있었는데, 노무현이 먼저 시가를 권하며 맞담배를 제안하자 룰라도 긴장감을 풀고 이 후 회담을 좋은 분위기로 진행했다고.
6. 팬클럽이 생긴 최초의 정치인
노무현과 함께하는 노사모 |
한국 정치인 중 최초로 자발적으로 생성된 팬클럽을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한국 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현재는 구심점이 사라진 탓에 인원이 축소되어 명맥만 유지중이다.[16]
7. 정적이 많았던 대통령
노무현 전 대통령은 노사모 등 본인을 열렬히 좋아하고 지지하는 아군 못지 않게 적(안티)도 상당히 많았다. 우선 정치 이념적으로 보수 성향의 사람들 및 정당(당시 한나라당)으로부터 늘 이념 공격을 받았다. 참여정부 기간 내내 보수 진영은 노 전 대통령을 향해 공산주의자 따위의 이념 딱지를 붙이며 색깔론 공격을 퍼부었던 것이다.[17] 그렇다고 노 전 대통령이 재임 시절 진보 진영으로부터 절대적인 사랑을 받았느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진보 진영의 입장에서는 노 전 대통령과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도 보수 정치인들이 많이 소속돼 있는 곳이자 대한민국의 보수정당 중 하나였고, 특히 한미 FTA와 이라크 전쟁에 한국군 첫 파병 등의 문제에 있어서 참여정부의 결정은 진보 진영이 등을 돌리게 된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한편 대통령 노무현은 좌·우 정치 이념과 상관없이, 소위 사회의 기득권 층으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는데, 이는 노무현이 가난한 시골 출신의 고졸, 그것도 상고 출신 대통령이라는 것이 주요한 이유였다.[18]
노무현은 김영삼에 의해 정치에 입문했고, 3당 합당 때 김영삼의 결정에 반대하며 갈라섰다. 김영삼도 이 사건 이후로 노무현과 사이가 극도로 멀어졌다.[19] 군사정권은 말할 것도 없고, 이승만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김대중은 호남충청연합(DJP연합), 김영삼은 3당 합당으로 얻은 경상/충청의 넓은 지역기반을 지지층 및 아군으로 두었고, 이명박은 YS에 의해 정계에 입문한 배경 덕에 당시 한나라당 內 상도동계 대부분은 물론, (이후 대부분이 친박계에 속하게 되는) 민정공화계에서도 이명박 지지세가 상당히 나왔던 데다,[20] 출신지가 경상북도 포항시이기도 하고, 김영삼 문민정부 당시, 정치 1번지라고 불리는 서울특별시 종로구에서 여당 국회의원을 역임한 후 서울특별시장 시절의 업적 및 화려한 커리어를 갖고 있어, 경상도와 수도권에서 광범위한 지지 세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호남을 제외한 전국에서 압도적인 세력을 아군으로 두었다. 그러나 그에 비하면 노무현은 완전 고립무원이었다.[21][22]
DJ측 인사, 즉 동교동계에서도 노무현을 안 좋게 보던 이들은 상당히 많았다. 참여정부가 출범하자마자 당시 한나라당과 조중동 등 보수 일간지의 공격이 시작되었고, 이들이 제일 먼저 문제 삼은 것이 김대중 정부의 대북송금이었는데, 당시 여소야대였던 정치 상황 때문에 원활한 국정 운영을 위하여 노무현은 야당의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부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리하여 결국 노무현은 당시 한나라당이 주도하여 발의하고, 국회를 통과한 대북송금특검법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통령이 되자마자 제일 먼저 서명한 법안이 바로 해당 법안이었다. 당시 국무회의에서는 1명을 제외하고 거부권 행사를 요구했다. 이에 대해 동교동계에서는 노무현에게 섭섭함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로써 여당이었던 민주당 내 일부 인사들과도 척을 지게 된다.[23]
또한 "전라도 정치인들과 정치 못 해먹겠다"(관련기사)는 발언이 논란이 될 만큼 전라도 출신 인사들과의 갈등도 존재했다. 이들은 새천년민주당에서 탈당하고 열린우리당으로 따라왔던 친노세력인데도 그랬다. 집권 초기 대북송금특검법 사태 등을 거치며 민주당 내에는 동교동계를 위시한 구주류와 신주류인 친노가 마찰을 밎었고, 결국 민주당 내 소장파가 주축이었던 친노계는 민주당 내 쇄신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동교동계 2선 퇴진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하였고, 친노계는 열린우리당을 창당하면서 민주당 주류 세력과 결별하게 된다. 이때 노무현도 민주당을 탈당하고 당적을 열린우리당[24]으로 옮겼다. 이후 민주당은 여당에서 일순간에 야당으로 전락하게 되었으며, 안 그래도 여소야대였던 국회 상황은 정부에 더 불리한 구도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러한 극도의 여소야대 정국 속에서 결국 2004년 탄핵 사태를 맞이하게 된다.[25][26]
한편 한미 FTA와 이라크 전쟁 파병 등을 거치며 지지층 중 진보적 색채가 강한 사람들도 점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즉 한미 FTA를 체결하고, 이라크 전쟁에 한국군을 파병했다고 해서 중도층이나 보수층이 새로운 지지층으로 편입된 것도 아니어서 지지율은 추락에 추락을 거듭했다. 이후 노 전 대통령은 이러한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하였으나[27], 오히려 여당인 열린우리당[28]과의 관계마저 악화되는 역효과만 초래하였고, 노무현은 결국 여당 내에서의 탈당 요구를 받고서 결국 2007년 2월에 열린우리당을 탈당하게 된다. 당시 여당 내에서 노무현에게 탈당 요구를 한 것은 2007년 말,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지지율이 낮은 대통령이 여당의 대선 준비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부담만 된다는 인식이 여당 내에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참여정부 말기에는 언론사들도 거의 대부분 노무현 전 대통령과 적대적 관계를 유지했는데, 2007년 1월 노 전 대통령이 "기자실에 죽치고 앉아서 기사나 담합한다"면서 당시 청와대 기자실통폐합안을 제출하여, 진보 매체/보수 매체 할 것 없이, 모든 언론사로부터 집중 비판을 당했다. 당시 진보 매체 프레시안 비판기사, 기사 2. 공무원 기자접촉금지령을 내려서 취재를 원천 봉쇄하려 하고, 공무원의 댓글을 독려했던 대통령의 언론관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후임 대통령 이명박의 경우는 6.3 항쟁의 주역이면서 고려대학교를 졸업했고 그 이후 현대건설 사장이었던 화려한 커리어와 인맥으로 인한 유권자들의 강력한 지지와, 김영삼에게 발탁된 것을 배경으로 한 상도동계 정치인 대부분의 지지, 연고지였던 수도권 - 경상도의 지지, 대부분이 친박계에 속했던 한나라당 內 민정공화계에서도 이명박 지지자들이 상당수 나와서 지지층이 엄청났던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29]
제17대 대통령 선거 직전에는 여당 측[30] 대선 후보인 정동영마저도 의식적으로 거리감을 두었다.[31][32] 정동영은 여당의 대선후보이면서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에 편승해 노무현 대통령 심판론을 대통령 선거 의제로 설정하였다. 대선이 가까워지면서 민주당의 고질병인 이합집산이 시작되면서 민주당 의원들마저 노무현 전 대통령과 거리를 두기에 바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언론의 자유 강화와 권위주의를 허무는 것을 시대정신으로 보았다. 그의 이러한 국정철학은 한국 정치 특유의 경직된 권위주의를 해소하려 했으나[33][34] 반대로 시종일관 강경 일변도의 대언론 정책을 폈고, 결국 언론도, 지지층도, 국민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한 채 상당한 곤욕을 치렀다. 청와대 출입기자실을 폐지한 것은 그 예들 중 하나이다.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라는 말이 등장할 정도.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에 대한 비난 수위에 대해 별다른 제지를 하지 않은 것은 특기할 만하다. 2003년 한나라당(당시 야당) 당직자 회의에서 홍보위원장 박주천은 노무현 대통령이 "생긴 게 개구리와 똑같다"라며 웃고 떠들었고, 한나라당 이상배 의원은 노무현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하자 "등신 외교"라고 하였다. 이에 문제가 되자 한나라당 김덕룡 의원은 "등신이라는 말이 뭐가 나쁘냐?"라고 했을 정도. 심지어는 2004년 한나라당 국회의원 24명으로 구성된 극단 여의도는 노무현 대통령을 원색적으로 모욕하는 "환생경제"라는 연극을 공연했는데, 이 연극에서 국회의원들이 대통령을 "노가리"라고 대놓고 욕을 해도 아무도 뭐라고 지적하는 사람이 없었다. 보수일간지 등은 "천격"이란 표현을 비롯해 다양한 비하 소재를 만들어 내었다. 후에 이명박 정권 때 쥐박이, 박근혜 정권 때 귀태나 닭근혜로서 미러링하게 된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을 욕하는 것은 민주사회에서 주권을 가진 시민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대통령을 욕함으로써 주권자의 스트레스가 해소된다면, 저는 기쁜 마음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고 하였다.[35][36]
8. 국정원의 여론 공작 의혹
2015년 2월, 이인규 전 중수부장은 국정원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포괄적 뇌물수수혐의에 대해 여론조작을 했다고 주장하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 일가가 피아제 시계를 논두렁에 버렸다는 등 허위 사실을 꾸며내어[37] 언론에 흘린 주체가 검찰이 아니라 국정원이라 주장한 것. 결과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은 수사 도중 스스로 목숨을 끊기에 이르게 되었다. 당시 수사를 담당한 이인규 전 중수부장은 이 당시를 회고하면서 당시 국정원 행태는 공작 수준이었다고 말했다. 다만 구체적인 증거는 없는 상태에서 이인규 변호사의 일방적인 주장이었고 이인규는 훗날 자신이 자서전 또는 회고록으로 모든 것을 공개할 것이라 밝혀 2탄을 예고하고 있다. 일단 전국언론노동조합의 논두렁 시계 보도 진상조사에선 국정원의 개입을 확인하지 못했다고 결론내렸다.#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직후, 국민장을 치르며 온 국민이 애도하는 가운데 국정원은 노 전 대통령을 비하하는 인터넷 게시물 수천 개를 유포시키며 추모 분위기를 방해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반대와 비판여론은 국정원에 의해 수동적으로 행해진 것이 아니라, 경제성과와 정책 방향성에 따른 반감에 따른 영향이 컸다고 볼 여지도 있다. 노무현에 대한 비난 분위기는 국정원이 어떻게 손을 써서 그렇다는 표현이 어려울 만큼 그의 임기 때부터 고질적였을지도 모르기 때문.
이후에도 대형 커뮤니티인 디시인사이드의 민간 유저들과 국정원은 여러 인터넷 사이트에 노무현 전 대통령을 모욕하는 게시물을 지속적으로 생산, 유포했다.(검찰의 국정원 댓글 여론조작 수사) 그러나 공무원과 국정원 단독의 여론의 조작능력과 스케일이 여론상의 비율에서 얼마나 되는지는 자세히 설명되지 못하고 있다. 다만, 규모에서 확대언급되는 건 이들이 공직자였고, 그 공직자의 범주가 넓었다는 것이었다.
2013년 밝혀진 유명한 좌익효수 역시 노무현 전 대통령을 모욕하는 게시물을 지속적으로 올렸음이 확인되었다. 한편, 좌익효수의 재판결과, 모욕죄만 인정되었고 국정원법 위반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후 국정원에서 국정원의 신뢰와 기대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해임되었다.( "좌익효수 국정원 직원, 1심서 집행유예 선고...모욕죄 인정-국정원법 위반은 무죄") 이 판결은 여러 면에서 비난을 받았는데, 상당수 게시물은 증거부족으로 채택되지 않았다. 오직 10여 개의 게시물만 채택되었다. 좌익효수는 검찰에서도 죄질이 나쁘다고 말했지만, 국정원에 오래 근무했다. 국정원장은 대법원 판결이 난 다음에 처리하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2016년 20대 총선이 끝나고 여소야대 국면이 이루어지자 국정원은 그를 해임시켰다. 2013년 사건이 밝혀지고 해임에 이르는데 무려 3년의 세월이 걸렸다. 디시인사이드와 일간베스트라는 대형커뮤니티를 사용하는 민간유저들의 반감정서는 타인을 통해 주도된 것과는 다르지만.
이후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 시기의 국정원이 저지른 범죄행각이 차례로 발굴되면서 국정원이 직접 주도하여 노무현 전 대통령을 공격하고 사후에도 짓밟기 위해 총공격을 가했다는 것이 여지없이 다 드러났다. 국정원이 노 전 대통령에 대한 반감여론을 '주도'했다는 것은 그냥 표현이 그런 게 아니라, 실제로 체계적으로 이를 시행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표적인 예로 이명박 정부는 대북공작금을 유용하여 소위 '연어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노무현의 음해 목적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인터넷에서 쉽게 노 전 대통령을 모독하는 합성사진이나 영상을 찾을 수 있다. 일베저장소 등에서는 'MC무현'이라는 이름으로 노 전 대통령의 생전의 음성을 합성한다. 특히 '응디시티' 와 같은 곡들은 조회수를 1000만 정도 보여주었다.[38] 이로 인해 노무현 전 대통령은 현재까지도 디시인사이드나 일베저장소에서 고인모독을 당하고 있으며 이 사이트들에선 이것이 밈(meme)화되어 이 행위가 명백한 '고인모독'임에도 무엇이 문제냐?라는 식의 적반하장격 그릇된 정서가 형성되어 있다.[39][40]
JTBC에서는 노알라 합성사진이 심리학자들의 조언과 설계에 따라 국정원이 직접 만들어 고인 비하를 주도하였다고 의혹을 게시하였다. 중앙일보 기사 - "노무현 코알라 합성 사진, 심리학자 자문받아 국정원이 제작" 다만 이는 반론도 존재하는데, 노무현 전 대통령을 향한 많은 공작은 2009년 노 전 대통령의 서거시까지가 피크였어야 하나 노알라는 2013년 1월 12일[41] 뜬금없이 일베에 올라온 합성사진이 히트한 것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저 의혹제기의 출처도 한 사람의 증언에 불과하고 확실하게 확인된 것은 아니다. 2022 대선에서 노무현재단의 허락을 받고 AI로 노무현의 육성 복원을 한 것만 봐도..
9. 방송 출연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방송 출연을 많이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변호사 시절인 90년대에 라디오 프로그램 DJ를 맡았고, 예능 프로그램과 100분 토론 같은 시사 프로그램에도 반고정급으로 나오는 등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방송활동을 많이 했었다. 이 때문에 대통령들 중 방송적인 재능은 가장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기도 한다.- 노무현, 김자영의 뉴스대행진
- TV내무반 신고합니다
- 100분 토론
- 체험 삶의 현장
- 손석희의 미디어비평
- 손석희의 시선집중
- 봉두완의 진단 2002
- 유창선의 아침저널
- 심야토론
- YTN포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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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낌표 - 책을 읽읍시다
- 도올이 만난 대통령
- 시사매거진 2580
- 사랑의 리퀘스트
- 도전 골든벨
- 안녕 프란체스카
- 2005 성탄특집 MBC 희망콘서트
- 돌발영상
- 다큐멘터리 3일
- 표영호의 세상읽기
- 30분 다큐
- 정치 다큐멘터리 2부작 - 대한민국 대통령
10. 부른 노래
다른 대통령들과 달리 노무현은 공식 석상에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자주 보여준 바 있다. 노래뿐만 아니라 기타를 직접 연주해보이기도 했다.11. 각종 타이틀
- 최초의 현역 일반병(상병 전역) 출신 대통령: 다만, 만기제대임에도 병장이 아닌 상등병으로 전역하였다. 이는 당시엔 병장을 달기 위해서는 먼저 분대장이 되어야 했는데,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수많은 병사들이 분대장을 다는 바람에 노무현 본인은 TO가 없었기 때문. [43]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이 최초의 병장 출신 대통령이 되었다.
- 최초로 여당을 옮긴 대통령: 이승만의 자유당 창당은 그 이전에 여당이 없었던 상황이었고, 노태우의 민자당은 노태우의 소속정당인 3당 합당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에 비해 노 전 대통령의 열린우리당은 원래 여당이었던 새천년민주당과 한나라당에서 탈당한 개혁적 성향의 인사들이 만든 정당이다.[44]
- 유일하게 당선 경력보다 낙선 경력이 많은 대통령: 당선 3회, 낙선 4회. 이는 그의 평생의 숙원이었던 지역주의 타파를 위한 노력 탓이 컸다. 참고로 당선, 낙선 횟수가 같은 대통령은 김대중이 유일하며(당선 7회, 낙선 7회) 나머지 대통령들은 당선 횟수가 더 많거나 (윤보선, 김영삼, 문재인) 당선 경력밖에 없다(이승만,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 윤석열)[45].
- 유일하게 단번에 대통령에 당선된 민주당계 정당 대통령: 16대 대선이 처음으로 출마한 대선이었으며,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꺾고 단번에 대통령에 당선된 것. 현재 아직까지도 민주당계 정당 출신 대통령 중에도 단번에 대통령에 당선된 인물 노무현 뿐이다.[46]
- 최초의 경상도 출신 민주당계 정당 대통령: 최초의 민주당계 정당 대통령인 윤보선은 충청권 출신, 김대중은 호남 출신이다. 그 외 경상도 출신 대통령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박근혜는 모두 보수정당 대통령이다.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친했던 동생이던 문재인이 두번째 경상도 출신 민주당계 정당 대통령이 되었다.
- 유일무이한 무종교 대통령: 노무현을 제외한 다른 대통령들은 개신교, 천주교, 불교 등 종교를 하나씩 믿지만[47][48], 노무현은 종교인들과의 관계가 두터울지언정 종교를 가진 적은 없었다[49].
- 헌정상 최초로 국회에서 탄핵 소추된 대통령: 2004년 3월 12일 국회에서 정족수 이상의 찬성으로 가결되어 탄핵소추되었으나 2004년 5월 14일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이 기각되었다. 18대 대통령 박근혜가 2016년 12월 9일 국회에서 탄핵이 소추되고 2017년 3월 10일 헌재에서 인용되면서 헌정 최초로 탄핵된 대통령이 되었다.
- 최초로 퇴임 후 고향으로 귀향한 대통령: 이전 거의 모든 대통령들은 퇴임 후 낙향하지 않고 그대로 서울특별시에 머물렀다가 그 곳에서 생을 마쳤거나 여생을 살고 있다. 이승만은 아예 대한민국에서 쫓겨나 하와이서 남은 여생을 보냈고, 박정희는 임기 중에 사망했으므로 논외.[50]
- 최초로 대통령의 시신이 화장된 대통령: 유지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 시신은 수원 연화장 8번 화장로에서 화장되어 고향 봉하마을에 안장되었다. 역대 대통령 중에서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은 서울현충원에, 윤보선 전 대통령은 충청남도 아산시의 선산에, 최규하 전 대통령은 대전현충원 국가원수 묘역에 안장되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이어 서울추모공원서 화장 절차를 밟고 경기도 파주시 검단사에 임시 안치 이후 파주 통일동산지구 내 동화경모공원묘역에 안장되었다. 이로서 노씨 성을 가진 대통령 모두 서거 후 화장 의식이 거행된 대통령으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전두환 전 대통령도 화장되었다. 대통령 예우가 박탈된 대통령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화장된 대통령인데, 이는 전직 대통령 예우에 의해 화장터에서 공통면제대상이 된 유일한 대통령이란 뜻도 된다. 대통령 예우가 박탈될 경우에는 공통면제대상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 가장 넓은 묘역에 안장된 대통령: 3206 제곱미터로 법적 묘지 면적의 100배가 넘는다. 유서에는 작은 비석만 세우라고 했지만, 친노 단체와 유가족들에 의해 묘지 면적이 넓어지게 되었다.
- 유일하게 자살로 생을 마감한 대통령: 현재 기준으로 사망한 전직 대통령들은 타살인 박정희 전 대통령을 제외하면 모두 자연사로 운명을 달리 하였으나, 노무현 전 대통령은 측근의 비리 혐의 수사 과정에서 강압 수사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이는 전직 대통령으로서는 유일하게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경우가 되었다. 이로 인해 당시 많은 국민들이 충격에 빠졌다.[51]
- 최초로 해방 이후에 태어난 대통령: 이승만과 윤보선은 각각 조선과 대한제국 시기에 태어났고,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이명박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났다. 이제 박근혜 이후에 취임한 대통령들은 모두 해방 이후 태어난 사람만이 될 것이다.
- 유일하게 미군정 시기에 태어난 대통령: 해방 이후에 태어난 대통령은 노무현을 포함하여 여럿이 있지만 미군정 시기에 태어나 대통령이 된 사람은 현재까지 노무현이 유일하다. 미군정 시기 자체가 매우 짧은 데다가 해당 시기 출생자들이 80을 바라보고 있는 만큼, 아마 전무후무한 미군정 출생 대통령으로 남을 것으로 보인다.[52]
- 역대 네 번째 국무위원(해수부장관) 출신 대통령: 최초의 국무위원 출신 대통령은 윤보선(상공부장관), 두 번째는 최규하(외무부장관), 세 번째는 노태우(내무부장관)다. 이후 현재까지 국무위원 출신 대통령은 나오지 않고 있다.[53]
- 한국갤럽 조사 기준 대한민국 제6공화국 대통령 중 재임기간 평균 지지율이 전임 대통령보다 낮은 최초의 대통령[54]
- 퇴임 후 전직 대통령으로 지낸 시간이 가장 짧았던 대통령: 퇴임 후 불과 1년 3개월(15개월) 만에 자살하였으며, 자연사한 대통령들 중에서는 이승만이 5년 3개월로 가장 짧다.[55][56]
- 전임자와 나이차이가 가장 많이 나는 대통령: 전임자인 김대중은 1924년 1월생, 노무현 본인은 1946년 9월생으로 두사람의 나이 차이는 22년 8개월이다.[57][58][59]
12. 그 외 여담
- 통용되는 영어 표기는 "Roh Moo-hyun"이지만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으로는 No Mu-hyeon,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으로는 No Muhyŏn이다.
- 휘호는 주로 한글로 많이 썼다.
- 보수 네티즌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임기 중 지지율이 역대 대통령 중 최저인 5.7%를 기록한 적이 있다고 주장한다. 헤럴드경제가 실시한 여론조사가 그 근거인데, 하지만 이는 '보통'이라고 답한 응답까지 부정 평가로 둔갑시켜 왜곡했기 때문에 부적절한 주장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모든 여론조사를 통틀어봐도 지지율 한 자릿 수를 기록한 적이 없다. 헤럴드경제 조사와 같은 시기에 이뤄진 리얼미터 여론조사에서 14.4%가 나왔었다. (#)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12%가 나온 적이 있었는데, 이 한국갤럽의 12%가 노무현 전 대통령 임기 중 가장 낮았던 지지율이다.(#) 디오피니언 등 마이너 조사 기관에선 이보다 낮은 10.2% 지지율을 보이기도 했다.(#) 오히려 이후 박근혜 전 대통령이 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2016년 11월 초 역대 대통령 지지율 중 최저인 5%를 기록하면서 기존의 역대 최저 지지율이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6%을 경신했고(#) 11월 말에는 4%로 지지율이 또 하락하면서 역대 대통령 최저 지지율을 다시 한번 경신하게 된다.(#)
- 대표적인 유행어로는 ''맞습니다, 맞고요"가 있다.
- 대통령 재임 시절 한 군부대를 방문했는데, 이병 한 명이 "대통령님, 맞습니다 맞고요 (한번 해 주실 수 있나요)" 라고 한 적이 있다. 국가원수에게 이런 장난을 치는 행위는 너무 상식 밖의 행동이라 부대 전체가 얼음장처럼 싸해지기에 충분한 상황이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노무현 대통령은 "괜찮습니다 괜찮고요" 라고 재치 있게 받아쳤다. 그리고 "근데 요즘은 이병도 용감하네요" 라는 묵직한 말도 덧붙였다.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세간의 소문에 따르면, 선임이 농담삼아 한번 해보라고 했는데 진짜 할 줄 몰라서 생긴 일이라고 한다. 영상 노무현 재임 초기 개그 콘서트의 봉숭아 학당에서 이 발언을 패러디한 개그맨이 있어 유행으로 크게 번졌다.
- 2004년까지는 주소창에 이를 입력하면 청와대 홈페이지로 연결되었으며, 당시 가족오락관의 코너 중 하나인 가문의 왕발에서도 문제로 등장한 바 있다.
-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또한 참여정부 시절 생긴 유행어다. 해당 문서 참고. 2006년 12월 21일 연설 도중에 일침을 가하며 한 말로, 일베 및 일베 성향 네티즌이 이를 악용하는 경우도 있으나, 오랜 시간이 지난 현재까지 정치인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발언이다.
- 노안으로, 이마에 난 유난히 큰 주름살 한 줄은 이미 30세가 되기 전에 생긴 주름살이다. 다만 50대 이후로는 나이대에 맞는 얼굴이 되었다.
- 대통령 재임 기간 중에 안검하수와 그로 인한 안검내반증이 심하여 건강을 위해 2005년 2월 수술을 했고, 이때 쌍꺼풀이 생겼다. 사실 재임 이전에도 눈을 크게 뜬 사진을 보면 원래 쌍꺼풀이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안검하수로 쌍꺼풀이 가려졌고 수술로 인해 드러난 것. 원래 눈꺼풀이 처진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피부가 탄력을 잃어 처짐이 심해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처짐이 심해 시야가 좁아지고 눈썹이 안구를 지속적으로 찔러 눈 건강이 악화된다. 굳이 재임 기간 중에 해서 구설수를 만들 필요가 있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노년의 나이에 심한 안검내반증을 방치하면 실명으로 이어질 수 있다.#
- 1993년 사법연수생 자치회에서 발행하는 '사법연수'지에서 예비법조인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가장 존경하는 선배 법조인’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뽑혔다고 한다.
- 1997년 6월 30일부터 1997년 9월 26일까지 김자영 前 아나운서[62]와 함께 SBS 러브FM 노무현 김자영의 792 뉴스대행진의 진행자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 1997년 3월 서울 역삼동에서 당시 낙선한 국회의원 동료들과 같이 하로동선(夏爐冬扇)이란 고기집을 개업하였다. 김원기, 김원웅, 노무현, 박계동, 박석무, 원혜영, 유인태, 이철, 홍기훈 전 의원과 김홍신, 제정구 현직의원까지 돈을 보탰으며 2명씩 당번을 정해서 장사를 했다고 한다. 식당명을 직역하면 여름 난로 겨울 부채인데 당장은 쓸모없지만 때가 되면 요긴하게 쓰일 물건이란 의미가 담겨 있었다고 한다. 식당은 결국 1년을 못가서 문을 닫았지만 그 이름값을 제대로 했는지 다수가 국회의원으로 당당히 정치일선에 복귀했고 대통령과 정무수석, 국회의장을 배출하게 되었다.
- 일본 방송에 출연한 적이 있는데, 당시 MC 비슷한 역할을 한 쿠사나기 츠요시가 "SMAP을 알고 계신가요?"라고 한 질문에 "그 애니메이션 말이죠?"[63]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그럴 만한 게 SMAP의 일본식 발음은 스맙프(スマップ)여서 유사한 데다가 당시 쿠사나기의 발음이 스마프보다는 스머프에 가까웠다.
- 리무진이 아닌 버스를 자주 애용한 최초의 대통령이기도 하다. 리무진을 타면 고립되어 있는 느낌이지만 버스를 타고 가면 비서나 기자들과 가는 시간 동안 의논이나 토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 애연가이자 상당한 골초였다고 전해진다. 가난했던 고시생 시절에도 하루 두 갑씩 피웠을 정도였고 식후엔 꼭 2개피씩 피웠다고 한다. 혼자서 피우면 권양숙 여사가 잔소리를 하니까, 참모진이나 장관들이랑 자주 피웠다고 한다.[65]#주로 피웠던 담배는 에쎄 출시 전에는 디스 오리진을 피웠으며 에쎄로 갈아탄 이후 클라우드 나인으로 다시 갈아탔다가 서거 직전까지 그 담배만 피웠다. 대체로 4~5 정도의 고타르 담배를 선호한 것으로 보인다.[66][67]
- 골초였지만 대통령 재직 기간동안에는 금연을 시도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완전 금연에 성공한 문재인이나[68] 김근태 전 의장과는 달리 노무현은 금연에 실패했고, 금연과 흡연을 반복하다가 서거할 때까지 흡연을 했다. 2009년 4월 검찰조사를 받으러 갔을 때도 담배를 한대 핀 뒤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 노무현은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Easy man'으로 불리기도 했다. 당시 한미관계가 불편했기 때문이라고는 해도 타국 대통령에게 무례를 당한 것이다. 부시는 김대중에게도 'This Man'이라고 부르는 결례를 저질렀던 사람이다. 그렇긴 한데, 사실 김대중은 '그 남자, 그 양반' 정도로 지칭했고, 노무현은 '쉬운 사람, 한심한 사람' 같은 뉘앙스로 부른지라 부시가 무례한 것이 맞다. 다만 하술할 장례식 참석으로 과거 발언이 재조명되면서, 번역 상의 오류였을지도 모른다는 지적도 새로 등장한 바 있다.
- 하지만 이후 부시 대통령은 2019년, 노무현 前 대통령 10주기 추도식에 참석하고 싶다는 제안을 먼저 해왔고, 결국 방한이 성사되어 직접 그린 초상화를 가지고 추도식에 참석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노 前 대통령이 "동맹과 국익을 우선했다"고 말하며 "한국의 인권에 대한 노 대통령의 비전이 국경을 넘어 북에까지 전달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는 메시지를 전했다.[전문] 노무현 기리는 부시 추도사 "친절, 따뜻하고 강력한 지도자···영광이다"
노무현 前 대통령 10주기 추도식에서 추도사를 하고 있는 조지 W. 부시 前 미국 대통령 |
- 미국의 로버트 게이츠 前 국방장관은 노무현 사후 발간한 자신의 자서전 《DUTY》에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나는 그가 반미성향(anti-American)을 가진 사람이며 아마 미친(crazy) 것 같다고 결론내렸다"라고 평가하여 논란이 있었다. 또한 콘돌리자 라이스는 김대중은 노련한 정치가라면서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노무현에 대해서는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며 괴상한 언행을 일삼고 종종 반미적 발언을 한다고 매서운 혹평을 남긴 바 있다.#
- 백혈병으로 위독한 상태였던 한 학생이 퇴임한 노무현 전 대통령과 만나고 싶어했고, 담당교사가 사람사는 세상 홈페이지에 이런 사연을 올리면서 결국 만남이 이루어진 적이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 학생에게 '의지의 승리를 기원하며'라는 자필사인을 건네주며 쾌유를 기원해주었다. 그러나 그 학생은 악화된 병마를 이기지 못하여 2008년 10월경 세상을 떠나고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8개월 뒤 사망한다. 그리고 죽은 학생의 담당 교사들이 노 전 대통령과 이 학생의 만남을 담은 앨범을 고인의 영전에 바치면서 이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기사
- 노 전 대통령이 13대 국회의원을 하던 시절, 경남 진주의 어느 길가에서 한 남성이 그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고 함께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런데 이 남성은 삶이 너무 힘들어 죽으려 한다는 얘기를 꺼냈고, 깜짝 놀란 노무현은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굳세게 살겠다고 나와 약속해달라"는 말과 함께 "약속은 생명이다. 욕심 부리지 마라"란 말이 쓰인 액자를 이 생전 처음 보는 남성에게 선물한다. 1년 뒤 이 남성은 김대중 대통령 선거유세 중이던 노무현과 재회하게 되고, 그때 격려가 큰 힘이 돼 주었다며 감사를 건냈고 노무현 역시 살아줘서 고맙다며 화답했다. 그리고 이 남성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망한 후 분향소에 찾아와 "자식들과 함께 약속을 끝까지 지켰다"며 영정 앞에 과거 노 전 대통령에게 선물받았던 액자를 바쳤다.(기사)
- 조선일보를 배달하던 신문배달원들이 자신들의 권익을 지키고 열악한 근로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도움을 건네줄 변호사들을 찾았지만, 서슬퍼런 조선일보의 기세에 눌려 아무도 나서서 이들을 도와주지 않았다. 이때 노무현이 발벗고 나서며 이들을 도와준다. 직접 나서서 신문사 지국을 상대로 소송을 거는 등, 3년간이나 이 일에 매달린 끝에 승소하여 그 결과 신문배달원들의 근로조건이 나아지게 됐다. 조선일보 기자가 노무현을 찾아와 이 일에서 손을 떼라고 협박을 했지만, 노무현은 기자면 기사나 잘 쓰라고 받아치면서, 이 때부터 노 대통령 사망 이후에도 조선일보와 악연이 시작되었다.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라는 책에 나온 내용.
- 청와대 전속 사진사로 일하며 노무현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한 장철영 사진사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한 인간으로서 완벽한 사람이었다고 평가하였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의 변호사 시절 운전기사였던 노수현 씨의 회고에 의하면 노무현 변호사는 노수현 씨의 신혼여행 때 신혼부부를 태우고 웨딩카를 직접 신혼여행지인 경주까지 운전해주었고 호텔비용과 10만원의 금일봉까지 챙겨주었다고 한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의 두루마기 입은 초상화를 그린 김호석 화백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대통령의 지위에 앉은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화가를 편안하게 해주는 모델"이었다고 회상하였다. 노 전 대통령과 김호석 화백은 만나면 예술과 미학에 관한 담론을 주고 받았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초상화 작업을 할 때도 화백의 까다로운 지시를 묵묵히 잘 이행해주는 사람이었다고 김호석 화백은 회고하였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이 판사로 재직하던 시절 법원 총무과에서 근무하던 공무원의 증언에 의하면 노무현은 예비군 훈련에 빠짐없이 참여하였을 뿐 아니라 훈련에도 적극적으로 임하는 유일한 판사였다고 한다.[69]
- 최강욱 전 청와대 비서관이 전직 청와대 101단 근무자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청와대 101단 경비경찰들은 청와대 정원을 청소하다가 대통령이 산책을 나오면 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 않기위해 무조건 어딘가에 숨어야한다는 암묵의 규칙이 있었다고 한다. 탄핵으로 대통령 직무가 정지된 노무현이 답답한 마음을 풀러 정원에 산책을 나왔는데, 여느때처럼 101단 경비경찰들은 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 않기 위해 정원 곳곳에 숨었다고 한다. 이를 의아히 여긴 노무현은 경비경찰들에게 자초지종을 듣자 당직자에게 연락하여 청와대 전속 사진사를 부른 다음 정원에 있던 경비경찰들과 한 명 한 명씩 다정한 포즈로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그리고 경찰들과 찍은 사진을 액자에 담아 감사편지를 동봉하여 경찰들의 고향에 보내주었다고 한다.#
- 일측에서는 대우조선 문제 당시의 일 때문에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과 악연이 아니냐는 의견을 제기하기도 했으나, 이런 비하인드가 있었던 것을 보면 그리 부정적이었지는 않았는듯 하다. 오히려 김우중 회장 측은 세간의 인식과 달리 노무현 전 대통령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의견을 피력한 바 있었다.
- 행정부 관료 출신인 자유한국당 윤상직 국회의원은 경제심리를 가장 잘 이해했던 대통령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을 꼽았으며 , 자신이 본 기업인들은 이구동성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이 가장 정부 간섭이 없었으며 규제 개혁에 적극적이었다고 평가하였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이툰 부대 파병부대를 방문하여 찍은 아래의 사진을 두고 지지자들과 반대자들 간에 논란이 있었던 적이 있다.
논란인즉슨, 사진에 나온 병사가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아버지!"하면서 달려들어 안기자 노무현 전 대통령은 "그래, 아들아!"하면서 안아주었다는 설이 웹툰을 통해 확산되었는데, 노무현의 반대자들 중 일부는 이 사진이 연출된 것이라 주장하였다. 그러나, 다음 이종격투기 카페에서 사진에 등장한 병사가 직접 인증하여 당시 상황을 밝히면서 논란은 종식되었다. 결론적으로 이 사진은 연출된 것이 아니며, 웹툰의 내용 100%는 아니지만 실제로는 돌발 상황에 가깝다. 당사자가 밝힌 바에 의하면 노무현 대통령의 자이툰 부대 방문자체가 비밀리에 계획되어 유럽순방을 마치고 돌아오는 중 순식간에 진행된 터라, 당시 수행원과 기자단 대다수 그리고 현지 부대원들조차 대통령의 전격방문을 몰랐고, 병사들도 예정에 없던 대통령이 등장하자 반가운 마음에 대통령을 향해 달려가자 주변의 경호원 2명이 제지를 하였는데, 노 대통령이 괜찮다면서 경호원을 물렸다고 한다. 그리고 이 병사는 노 대통령에게 걸어가서 "포옹 한 번 해주시면 가문의 영광으로 받겠습니다."하고 말하자, 노 대통령은 두 팔을 쫙 벌렸고 병사는 기쁜 마음에 노무현 전 대통령을 번쩍 안아올리면서 위와 같은 사진이 나왔다고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 병사가 본인을 들어올리는 과정에서 혹시나 다칠까 걱정하며 "다칠라"는 말을 건넸고, 병사는 최선을 다해서 복무하겠다는 말로 화답하였다. 이종격투기 카페에선 이 병사의 인증글에 100여개에 달하는 댓글들이 달리며 화제가 되었고, 병사는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고 회고하였다.
- 참모였던 안희정이 '담금질'이라는 책을 내며 출판기념회를 연다고 참석을 요청했으나 참석이 어려워지자 대신 축하영상을 찍었는데 촬영 도중 너무 고생시켜서 자신이 빚을 많이 졌다고 울었다.
- 학생들의 생활 기록부와 교무학사/행정 업무를 온라인으로 처리할 수 있게 해주는 교육행정정보시스템을 최초로 도입하였다. 이 시스템은 추후 이명박 정권에서 '차세대나이스'라는 이름으로 개편되었다.
- 일본 국민과의 대화 프로그램 중 일본 사회자가 계속 남성 방청객들에게만 질문 기회를 주자 "계속 남성 분들에게만 마이크가 가는 것 같네요, 여성 통역사를 통해서 들리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모든 질문이 여성의 질문으로 들리긴 합니다마는..."이라는 말을 할 정도로 성평등에 관심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 머리숱이 굉장히 많은 것으로도 유명했다. 보면 알겠지만 정수리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머리에 빈틈이 아예 없는 수준이다. 특유의 가르마 없는 헤어스타일도 어지간한 사람은 머리숱 탓에 따라하기 힘든 편. 말년에 할아버지가 된 후에도 노화로 인해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탈모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 때문에 탈모갤이나 대다모 등의 탈모 커뮤니티에서 한국에서 머리숱이 가장 많은 사람을 꼽으라면 항상 언급된다. 반대로 아들 노건호는 탈모 때문에 삭발했다가... 머리가 다시 자라면서 풍성충에 복귀했다. 결국 머리숱도 유전이었다.[70]
- 선관위 홈페이지에 등록된 부재자투표에서 모두 1위를 차지했다. 부재자투표는 군인의 비율이 가장 높다. 즉 군인의 지지를 많이 받았던 노무현 대통령이었다. 노무현 후보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하게 보였던 1992년 총선 부재자투표에서 대한민국 제5공화국의 출신이었던 허삼수를 눌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간판인 민주당(1991년) 소속으로 출마했고 무엇보다 3당합당 이후의 선거였고 노무현은 3당 합당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허삼수는 이 당시 김영삼의 지원을 받았다. 부산 동구의 전체결과: 노무현 32.3% 허삼수 63.6%, 부산 동구의 부재자투표: 노무현 53.2%, 허삼수 43.9%
- 여러 스포츠 분야에 관심이 많았다. 변호사로 활동하던 시절에는 요트를 취미로 하여 직접 2인승 요트를 제작하고 부산요트클럽 회장을 맡기도 했다.# 88년 서울 올림픽 출전을 목표로 일본의 요트 클럽에서 훈련을 받는 등 상당히 깊이 파고들었지만 민주화운동에 투신하면서 완전히 접었다. # 후에 주간조선이 이를 두고 호화 요트를 보유한 재산가로 왜곡 보도하여 민사 손해배상소송을 치르는 등 곤욕을 겪기도 했는데, 후에 자서전에서 인식에 비해 돈이 크게 드는 스포츠가 아니었다고 해명하기도 했다. 야구부로 유명한 부산상고 출신이어서인지 야구에도 애착을 보여 2003년 올스타전에서는 스트라이크존에 들어가는 시구를 하여 화제가 되었다.# 그 외에도 2000년 총선 낙선 이후 한국e스포츠협회 회장을 맡고자 했으며, 실제로 명예회장직을 맡고자 협회에 메일을 보내기도 하였다.#
- 재임 시절 중국의 베이징 대학교에서 조선족에게 이중국적을 가질 수 있게 하자는 말을 했다가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 김영삼이 칼국수, 김대중이 삼합, 문재인이 해물요리, 먹방으로 유명한 이명박이 한정식을 좋아한 것 처럼 노무현 대통령이 좋아한 것은 고구마였다고 한다. 어렸을 적 찢어지게 가난해서 밥을 먹을 형편이 못 되어 끼니로 항상 고구마를 먹었는데, 그나마 배부르게 먹어본 적이 없어 고구마를 마음껏 먹는 것이 어릴 적 소원이었기에 대통령이 되고 나서 청와대에서 조리사들이 오븐에 구워 준 고구마를 원없이 먹었다고 한다.[71] 또한 집무 중에 정말 자주 먹었던 것은 옛날 분식집 스타일 라면이었다고 한다.# 당시 근무했던 청와대 셰프가 그때를 회상하며 만들어 먹어본 영상이다.
- 노 전 대통령의 재임 시절에 '대한민국은 전시상황(휴전국)이기때문에 나라의 총수가 술을 마셔서 긴급상황 발생시 대처할 수 없는 상황이 오면 안된다며 포도주스로 건배를 했었다.'라는 소문이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노 전 대통령은 막걸리를 매우 좋아했고 청와대에서도 즐겨 마셨다. 대표적으로 2005년경에 단양군에 왔을 때 앉은 자리에서 대강막걸리 양조장의 '오곡 막걸리' 여섯 잔을 연거푸 마셨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그 이후 대강양조장 막걸리는 청와대 만찬주로 지정돼 공식 만찬에 200여회나 사용됐다고 한다. "노 전 대통령께서 우리 양조장 막걸리를 참 좋아하셨어요. 거의 매일 청와대에 막걸리가 들어갔죠. 그쪽에서 내일부터 넣지 마세요 하면 외국 가시는구나 했고 내일부터 다시 넣어주세요 하면 한국 돌아오셨구나 했죠. 퇴임하신 뒤에는 봉하 마을로 꾸준히 들어갔어요."라고 대강양조장 조재구 대표는 전한다.##이후 세월이 지나 노무현입니다 영화에선 서거 이후엔 더이상 막걸리가 들어갈일이 없다고 매우 슬퍼했다.
- 노무현이 취임했던 2003년에 씨즈메일[72]에서 노무현을 패러디한 "노통령"[73] 이라는 캐릭터를 만들었다. 더군다나 2003년 크리스마스 시즌[74]에는 노통령 캐릭터에 산타복이 적용되어 메인 배너에 "노산타"로 등장하기도 했다.[75]
- "노무현" 단어를 영문 키보드로 쓰면 Shangus, 샹구스가 되며 이는 노무현 본인이 사용하던 ID들 중 하나였다. 다만 이 Shangus[76]는 인도 카슈미르의 지명이기도 했고 위키백과에 해당 문서는 일베 사용자들의 반달을 겪기도 하였다. 봉하마을에서 6km 떨어져 있다고 저술한다던지, 관련 문서들 항목에 타지키스탄의 도시 "Unji" (운지)를 기술한다던지.... 참고로 유명 록밴드 AC/DC의 기타리스트 앵거스 영의 이름 앵거스(Angus)도 이를 한타로 쳐보면 무현이 돼서 별명이 노무현이 됐다.
- 집사부일체의 2022년 7월 3일 방영분에서 그의 전속 사진사였던 홍성규와의 인터뷰가 있었는데, 과거 빡빡한 스케줄 탓에 무좀이 있어 발가락 양말 사진을 찍지 말라고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홍성규는 후에 몰래 찍었다고... 본인은 해당 사진을 보진 못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특히 싫어했던 것이 3가지 있었다고 말했는데, 첫 번째는 메이크업, 두 번째는 경호원들의 밀착 경호, 세 번째는 사진사 본인이 바로 옆에서 사진을 찍는걸 싫어했다고 한다.
- 젊을때 찍은 사진을 보면 래퍼 창모와 외모가 비슷하다는 의견이 있다.
- 생전에 생선회도 좋아했다. 해양수산부장관 시절 제가 바다를 좋아하잖아요. 회도 잘 먹고. 라고 밝힌 바 있다.
- 일베에서 고인드립을 너무 많이 당한 인물이라서 이에 대한 부작용인지, 오프라인에서 섣불리 노무현을 언급하거나 말투를 흉내내거나 어록을 말하기만 해도 분위기가 싸해질 수 있다. 만약 일베용어를 곁들인다면 완전 자폭 행위로, 그대로 인간관계가 파탄날 수도 있다. 그 이유는 당연히 대한민국에서 최악의 인식을 가진 극우 사이트 이용자들의 만행 때문이다. 이로 인해 보수 정치인들이나 우파 유튜버도 비판을 하는 경우는 많아도 어지간히 극우 성향이 아닌 이상 대놓고 비난하는 경우는 잘 없다. 오랜만에 김진 전 논설위원이 100분 토론에 나가 노무현 및 일가에 대해서 원색적인 비방을 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 해양수산부장관 시절인 2000년 10월 KBS 체험 삶의 현장에 출연하였는데[77] 부산 남항에서 바닷속에 버려진 해양폐기물을 수거하는 작업을 하였다.#영상 이는 원래 해양수산부가 주도적으로 해야하는 본질적인 업무 중 하나이다.
[1] 노무현 전 대통령이 철 없던 시절, 결혼하고 나서 아내에게 가정폭력을 저질렀다는 내용도 있다. 그 외에도 길가던 아주머니들한테 음담패설을 하거나 노상방뇨를 했다는 등의 과거를 털어놓기도 했다. 물론 이 내용자체는 자기자랑 같은 요소가 아닌, 철 없던 시절의 과오에 대한 자기반성의 의미에서 나온 부분이다.[2] 당시 사법시험 합격자 수는 60여명이었고, 심지어 노무현 전 대통령이 변호사로 개업했을 때 부산의 변호사 수가 3명에 불과했다. 독학으로 사법시험을 패스한 경우는 몇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라고 한다.[3] 이후 사법시험 합격자가 300명, 700명, 그리고 1,000명으로 늘어난에뒤에도 고졸 출신 합격자가 나오는 일은 흔치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고작 60명을 선발하던 시절에 고졸/상고 출신이 합격했다는 것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4] 노무현입니다에 따르면 5.18 관련 기록집을 본 이후에 노무현의 감시역으로서의 임무에 회의를 느꼈고, 그걸 당시 변호사였던 노무현에게 털어놓자 감시자가 그래서야 일할 수 있겠느냐고 말해주었다고 한다. 사망하기 얼마 전에도 이화춘이는 요즘 왜 안 오나 하면서 찾기도 했다고.[5] 80년만 해도 진보성향에 가까웠다. 우경화가 된 것은 시간이 지난 뒤의 일[6] 거의 공범 수준으로 변호했으며 피해자 가족들이 변호사가 저렇게 싸우듯이 변호해도 되나하고 우려할 정도였다고 한다.[7]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할 목적으로 작성하였으므로 법적 효력을 기대하고 한 것은 아니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가 자살로 위장한 암살 아니냐는 논란을 불러왔다. 물론 수사를 받는 상황에 있고, 재평가를 받고 있는 지금보다는 약했긴 했지만 나름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암살 논란은 커졌다.[8] 이 충성심이 친노라는 계파가 끝까지 남아 이념집단이 될수 있었던 이유가 되었다. 친노 계파는 보스인 노무현 전 대통령이 타계한 이후 친노 내부의 계파를 가리지 않고 노무현의 의지 중 가장 큰 갈래인 지역주의타파와 주체적인 국제관계설정 등 이념적인 부분을 내세우며 정치 계파로써 부활에 성공했으며, 그의 절친이자 맨토인 문재인은 이를 기반으로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다. 2010년대 중반 들어 친노가 해체된 가장 큰 이유가 이를 통해 친문 세력으로 계승되었기 때문이다.[9] 검찰에 이명박 구속에 핵심 증거가 될 정보를 불었던 사람들을 보면 하나같이 이명박의 측근들이다. 그리고 이명박의 몰락에 기여한 사람들 중에는 과거 친이계 출신도 있다.[10] 다만 대중의 이미지와는 달리 변호사의 업무는 주로 서면으로 행해지기 때문에 모든 변호사가 꼭 달변인 것은 아니다. 그냥 노 대통령 본인이 연설을 잘했던 것이기도 하다. 이는 친구인 문재인 대통령이 똑같은 변호사 경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창한 언변을 소유하고 있지는 않으나, 그 경력이 어디 가질 않아서 나름대로 힘있고 간결하게 말하고자 하는 바를 확실히 전달하는 문장을 주로 사용한다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11] 2018년 아셈 회의 때 문재인 대통령도 비슷한 행동을 하는 것으로 밝혀졌는데, 연설문 점검하고 손수 고치다가 포토타임에서 빠졌기 때문이다. 아셈의전 관계자 연락 받고 이동했으나 엘리베이터가 오지 않아 포토라인에서 빠진 것인데, 자세한 내용은 해당 기사로.[12] 그런데 실제 노서은의 생일은 2004년 1월 14일이며, 이날은 수요일이었다. 아마도 신생아실에서 나오기 직전에 방문한 듯 하다.[13] 다만 처칠은 일반 담배보다는 시가를 주로 애용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하루에 시가 11개비를 피웠을 정도라는데, 일반 담배는 그 정도로 피우는 흡연자들이 많지만 시가는 한번 피우는 데만 수십분 이상 걸린다는 걸 감안하면 시가 흡연자들 중에서도 헤비 스모커에 속한다. 그렇게 시가를 즐기고 코냑, 위스키를 마셨는데도 90세 이상까지 장수했다.[14] KT&G에서 필립 모리스가 출시한 버지니아 슬림을 견제할 목적으로 개발한 담배다. 이전에 즐겨피우던 에쎄와 마찬가지로 슬림하면서도 타르 함량이 5미리 이상인 고타르 담배다.[15] 보통 정신적으로 큰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흡연자들의 경우 흡연량이 극도로 많아지는 경우가 흔하다.[16] 반면 노사모에 비해 정치적 성격이 옅은 노무현 재단의 회원들이 증가하였다.[17] 심지어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같은 당 내에서도 색깔론 공격을 받았다. 즉, 16대 대선 후보 선출을 위한 새천년민주당 경선에서 경쟁자 진영에서는 노무현 당시 후보의 장인의 이력을 들어 색깔론 공세를 펼치기도 했었다는 얘기.[18] 가난한 고학생 출신이었던 이명박과 비교되는 이야기다.[19] 이 후 YS는 참여정부가 끝날 때까지 노무현을 맹비난했으며 그가 자신을 뒷통수치고 떠났으니 의리가 없다는 식으로 평하기도 했다. 노무현의 국민장 때도 소회를 묻는 질문에 “꽃만 던져버리고 왔다“는 식으로 답해서, 마지막까지 두 사람의 감정이 풀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 되었다.[20] 당장 2007년 대선 당시 공화계의 수장이었던 JP가 이명박을 지지했을 정도였다.[21] 경상도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터전이었던 부산광역시에서조차 한나라당의 영향력이 막강했고, 호남도 전남, 광주는 전부 동교동계의 세력 안으로 들어간 상태여서 열린우리당의 텃밭이라 불릴 지역은 전라북도밖에 없었기도 하다.[22] 특히 김영삼과 이명박의 경우 지지율이 호남을 제외한 전국에서 거의 압도적이다시피 했다.[23] 다른 얘기지만, 삼성공화국이라고까지 불렸던 참여정부 말기 삼성X파일 특검법에 대해서는 청와대에서 거부권을 행사하겠다고 했던 적이 있는데, 이것 때문에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다.[24]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의 탈당파와 민주당 탈당파를 포함해 2003년 11월 11일 창당하였다. 열린우리당은 당대표나 당 총재라는 이름 대신 의장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는데, 열린우리당의 초대 의장은 정동영이었으며, 김근태가 원내대표를 맡았다.[25] 이 시기를 탄핵 정국이라고 하며, 여론은 기존 정당에 대한 비토로 들끓었으며 4월 총선에서 신규 정당인 열린우리당이 압승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출처.[26] 실제로 동교동계에서는 현재도 노무현에게 전혀 우호적이지 않거나 적대적인 인물도 상당히 많다. 그 결과, 보수정당 - 동교동계 비노가 연합해서 노무현 탄핵 소추를 가결시키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또한 그 구 동교동계 비노 성향의 인물들은 상당수가 더불어민주당이 아닌 국민의당으로 김한길, 안철수와 같이 당적을 옮겼다.[27] 당시 진보 언론지인 한겨레 21에서 사설로 노 전 대통령의 대연정론을 정면으로 비판했을 정도였다.[28] 당시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 계열과 민주당 계열 간의 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정책 방향이 모호할 뿐더러 참여 정부의 거수기 역할만 했다는 평이 높았다. 출처.[29] 실제로 이명박 대통령 취임 직후 실시된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친박연대와 자유선진당을 제외한 한나라당은 150석을 가볍게 획득했으며, 그 당선자 중 친이계-범친이계 정치인만 무려 국회의원 전체 의석의 45%에 달할 정도로 당시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엄청났다.[30] 엄밀히 말하면 당시에는 여당이 없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 2월에 열린우리당에서 탈당했기 때문이다.[31] 원래 여당 후보가 임기 말에 지지율이 지리멸렬해지는 현직 대통령과 거리를 두는 건 한국 정치의 전통이다. 이건 어느 나라 정치나 마찬가지이다. 조지 W. 부시가 임기 말년에 공화당 대선 후보들로부터 받은 푸대접은 눈물이 날 정도이다. 버락 오바마가 힐러리 클린턴과 자주 같이 다니는 건 그의 인기가 높아서지 미국 정치가 선진적이어서가 아니다. 전두환은 노태우에게, 노태우는 김영삼에게 팽당했고, 김영삼과 김대중, 노무현은 임기 말에 스스로 만든 당에서 쫓겨났다. 민주화 이후 당적을 유지한 채 임기를 마친 최초 대통령이 바로 후임자 이명박, 민주당계로 한정한다면 문재인이다.[32] 사실 정동영도 노무현 정부 탄생의 일등 공신으로서 중반까지는 사이가 무척 가까웠고, 노무현은 2005년에 정동영을 통일부장관으로 임명시키며 그를 대권 주자로 밀어주려는 움직임도 보였다. 하지만 국정 운영 방침을 두고 둘의 사이는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고, 정동영도 노무현과 선을 긋는 방식으로 조금이나마 지지를 얻게 될 정도였다. 현재도 친노가 아닌, 소위 비노로 분류되는 민생당 소속이다.[33] 당장에 참여정부 직전의 정부였던 김대중 정부(국민의 정부)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공공장소에서는 사소한 말 한 마디만 잘못해도 무조건 큰 곤욕을 치르기 일쑤였다. 물론 그 이전은 말할 것도 없다.[34] 국정원 독대를 받지 않았고, 검찰 권력을 휘두르려 하지 않았다.[35] 당시 노무현 대통령 공격에 앞장섰던 이상돈 교수는 저 정도면 잘못하면 사람이 죽고 임기를 마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훗날 회고하였다. 이후 이상돈 교수는 박근혜 대통령 후보 비대위로 활동하며 이명박 정부 심판을 말하였다.[36] 한편 이명박 대통령 시절에는 인터넷에서 댓글 한 번 작성한 것만으로 경찰조사를 받을 수 있는 법이 제정되었던 것과 대조된다고 하지만, 사이버모욕죄라는 것은 본래 최진실법이라는 이름으로 추진된 법으로 2008년, 즉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가 끝난 후에 적용된 것으로, "단지 대통령을 욕했기에 체포되었다"며 편향적으로 바라보기는 힘들다. "대통령을 욕했다"는 것보다, "특정 인물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경찰서에 소환된 셈이다. 관련 링크 1, 관련 링크 2.[37] 노 전 대통령은 검찰에 피아제 시계를 권양숙 여사가 밖에 내다버렸다고 진술했다. 유시민의 말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이 직접 망치로 깨부쉈다고 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노 전 대통령은 검찰에서 허위진술을 한 것이다.[38] 잘 알려진 대로 일베저장소가 주범이지만, 시작은 디시인사이드이다. 사실 디시 합필갤·코갤·야갤 등에서 출발한 일베 밈이 상당히 많다. 상호관계가 활발하기 때문.[39] 다만 이러한 합성물을 제작하고 향유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인간 노무현을 재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는 편이다. 실제로 메이져 합성 유튜버인 부엉이에듀의 경우 노무현, 이명박을 선역으로 묘사하고 김대중, 박근혜, 문재인, 이재명 등은 악역으로 묘사하는 합성물의 비중이 많다. 그러나 해당 재평가 또한 친노 지지자들 입장에서는 그들의 재평가 대다수는 진심이 아닌 밈(meme)적 재평가나 다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40] 2020년대 들어서는 노무현 밈을 향유하는 세대가 노무현 정부의 경험이 없거나 희미한 Z세대에게로 넘어가며 이러한 모욕, 비하성 합성물은 본인들이 직접 경험한 문재인, 박원순, 이재명에게 많이 옮겨갔다. 상대적으로 정치성향이 옅은 가사나 더욱 다양한 장르의 합성물이 생겨나고 있다. 그리고 JTBC 선거방송에서 노무현재단의 허락을 받고 다른 전직 대통령들과 함께 AI로 노무현의 목소리를 복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앞선 합성물들은 아무리 그 정도가 약해졌어도 기본적으로는 비하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지기 때문에 JTBC 선거방송과 비교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41] 제18대 대통령 선거가 박근혜의 승리로 끝나고, 국가정보원 여론조작 사건이 발각된 후다.[42] 노무현 대통령이 평소 가장 즐겨 부르던 노래, 사망 후에는 노무현 추모곡으로 쓰이기도 했다.[43] 다만 이때 병장으로 전역하지 못한 사람들위해 특별법이 제정되어 본인이나 가족이 원할경우 군적에서 병장전역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44] 탄핵안 기각 직후인 2004년 5월 24일 열린우리당에 입당했다.[45] 당선 경력밖에 없는 8명은 모두 보수 성향이다. 이 중 윤석열은 제6공화국 대통령 중 대선 이외에 선거 경력이 없다.[46] 그의 동지이자 동생이었던 문재인은 당시 민주통합당 국회의원 시절에 18대 대선이 첫 대선 출마였으며, 그러다가 문재인 동생은 1살 많은 누나였던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에게 근소한 차이로 패해 고배를 마셨으며, 그 이후 19대 대선에 출마해 대통령이 된 것.[47] 최규하는 예외적으로 유교였다.[48] 박정희는 본인의 주장으로는 무종교였다지만, 공식 약력에는 불교로 되어 있고, 박근혜는 공식적으로는 무종교라지만, 실상은 박근혜/비판/사이비 종교 논란이라는 문서까지 만들어졌듯이 확실한 종교관을 알 수가 없다.[49] 단, 부인은 불자다.[50] 이후에 박근혜가 본인의 정치적 고향이었던 대구광역시 달성군으로 돌아갔고, 문재인 또한 퇴임 후 경상남도 양산시 평산마을 사저로 귀향하였다.[51] 사실 세계에서도 국가원수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경우는 탄핵당하는 경우만큼이나 드물고, 지역강국 이상급 국가원수가 자살한 경우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제외하면 제툴리오 바르가스 브라질 대통령이 유일하다. 노무현 이전 존 매큐언 호주 총리는 1달도 안 되어 물러난 권한대행 수준이었고, 피에르 베레고부아 프랑스 총리는 2인자격이었으며, 노무현 이후 드리스 판 아흐트 네덜란드 총리는 안락사이으므로 논외.[52] 2024년 현재 현역인 미군정 출생 정치인은 국민의힘 소속 인천 안상수가 유일하다. 최근까지 현역이었던 창원 안상수, 손학규에 이어 2024년 김진표까지 죄다 정계에서 은퇴했기 때문.[53] 다만 국무위원과 동급인 장관급 공직자를 지낸 대통령은 노무현 이후로 3명이 더 나왔다. 이명박은 서울특별시장을, 문재인은 대통령비서실장을, 윤석열은 검찰총장을 지냈는데, 이 세 직책은 모두 장관급이다. 19대 대선 본선 후보와 20대 대선 경선 후보에 올랐던 유승민과 홍준표도 각각 장관급에 상응하는 국회 상임위원장(유승민은 국회운영위원장과 국방위원장, 홍준표는 국회운영위원장과 환경노동위원장)을 지냈었다.[54] 김대중 대통령의 재임 기간 평균 지지율은 40%, 노무현 대통령은 27%였다. 두번째로 전임 대통령보다 지지율 평균치가 낮은 대통령은 윤석열 대통령이다.[55] 박정희는 임기 도중 암살당했으니 제외.[56] 반면 퇴임 후 전직 대통령으로 지내는 기간이 가장 긴 대통령은 전두환(33년 9개월)이며, 예우가 박탈되지 않은 전직 대통령들 중에서는 윤보선이 28년 4개월로 가장 길다.[57] 세는 나이까지 따지면 이승만(1875년)-윤보선(1897년)과 공동이긴 하나, 이승만은 3월생, 윤보선은 8월생이기 때문에 22년 5개월이므로 세부적으로 보면 김대중-노무현이 가장 많이 차이난다.[58] 참고로 이 나이차이는 노무현이 5년 임기 내내 파트너이자 동갑내기인 조지 W. 부시(미국 제 43대 대통령)와 그의 아버지인 조지 H. W. 부시(미국 제 41대 대통령)의 나이차이와 같으며, 아버지 부시는 6월생, 아들 부시는 7월생으로 이승만-윤보선, 김대중-노무현 보다도 격차가 약간 더 좁다. 전임자인 김대중은 아버지 부시, 지미 카터와 1924년생으로 동갑이다. 다만 부시 부자는 그 사이에 빌 클린턴이 있는 것을 생각해야 하지만...그런데 클린턴도 같은 1946년생[59] 게다가 당시에는 결혼연령이 10대 후반~20대 중반으로 빨랐던걸 감안하면 김대중과 노무현은 아버지와 아들 뻘이다. 이것은 앞서 설명한 이승만-윤보선도 마찬가지.[60] 어차피 유명인들의 휘호는 그의 삶에 대한 평가로 가치가 정해지는 것이지 글씨를 얼마나 잘 썼느냐는 부차적 요소이긴 하다.[61] 모음은 휘갈겨 쓰면서도 가독성이 좋아야 하기 때문에 자음은 큼직큼직하게, 구분이 확 되도록 쓰는게 고시체의 특징이다. 'ㄹ'자는 'ㅈ'과 구분되게 하기 위해 반드시 한 획에 쓰지 않고 3획으로 쓰고, 'ㅁ'자는 'ㅇ'이나 'ㄹ'과 헷갈리지 않기 위해 삐침을 강하게 주는 것 등이다.[62] KBS의 前 아나운서.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국회의원인 김민석의 아내. 지금은 이혼했다.[63] "스머프 무슨 그 만화,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뭐..."[64]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이 이뤄졌을 당시의 발언이다. 헌데, 워낙 당시에는 원더걸스가 절대적인 존재였는지라 이명박, 정동영, 이회창, 권영길 같은 다른 대선 후보들도 하나같이 같은 대답들로 일관했다.[65] 유시민: 권 여사께서 담배 갖고 지청구를 많이 주셨다. 저녁에 우리가 관저에 들어 갈 때면 우리와 어울려서 담배를 피우곤 하셨다. 그러면 권 여사께서 말을 못하니까. 어느 한 날은 우리도 지청구를 들었다. 대통령이 담배를 많이 피우게 만든다고 말이다. 그러다가 권 여사가 나가시면 또 담배를 피우곤 했다.[66] 에쎄의 경우 지금이야 젊은 층들을 겨냥해 가벼운 담배도 많이 나오지만 첫 출시 때는 고타르 제품이었다.[67] 참고로 저 정도면 세계 기준으로는 저타르 담배에 가깝다. 한국이 얼마나 저타르 담배를 선호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68] 2004년 참여정부 민정수석을 그만두고 히말라야로 트래킹을 갔다가 오랜 흡연으로 인해 산소가 부족해지는 것을 느끼고 바로 금연했다고 한다.[69] 이는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연설문에서 군대 다녀온 뒤 예비군 훈련까지 다 받았다고 언급된다.[70] 노건호의 경우 스트레스성 탈모가 상당히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71] 반대로 후임 이명박은 하도 잡곡밥을 많이 먹은 탓에 흰쌀밥을 좋아하고 잡곡밥을 싫어한다고. 특히 콩을 상당히 싫어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둘 다 어린 시절 질리도록 먹은 음식이지만 한 명은 나이를 먹고 역으로 더 찾는 반면 한 명은 트라우마 급으로 싫어한다는 게 재밌는 점.[72] 1999년 설립되었으나 2006년 3월에 폐쇄된 캐릭터메일 사이트다.[73] [74] 2004년 2월까지 해당 배너가 띄워졌다.[75] 이때 배너 내용은 "노산타! 에게 바라는 당신의 소원은?" 이었으며, 자고로 쟁반노래방 자막의 글자체와 동일한 폰트를 사용했다.[76] 철자도 같다[77] 이경실이 당시 대기실에서 자신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주는 그의 모습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고 훗날 예능에서 밝힌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