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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단일화 협의회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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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원인3. 노무현-정몽준 단일화4. 단일화 이후5. 명단
5.1. 구 여권(한나라당, 문민정부) 출신5.2. 경제인 출신5.3. 전문가 영입5.4. 1997년 이전 영입5.5. 동교동계/舊 민주계 출신
6. 참고7. 유사 사례

1. 개요

2002년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새천년민주당대통령 후보였던 노무현의 지지율이 떨어지자 국민통합21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사실상 정몽준으로의 후보교체)를 요구하면서 노무현 후보의 사퇴를 주장했던 새천년민주당 의원들. 보통 약칭인 "후단협"으로 통한다.

대한민국 정치권에서 해당행위의 대명사로 불리는 사건이지만,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이 승리하는 데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정몽준과의 단일화 없이는 노무현의 당선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물론 투표 하루 전 날 지지를 철회하긴 했지만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을만한 지지기반을 모으는 데 정몽준과의 단일화가 절대적이었다.

2. 원인

이 사태의 원인은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김대중이 정권교체와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위해서 행한 묻지마 영입이다. 김대중은 1992년 대선에서 패배한 뒤에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보수우파의 상징인 마거릿 대처를 연구하였고 귀국한 뒤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아태재단)을 만들면서부터 기존의 동교동계 혹은 민주당계와는 매우 이질적인 구 여권 정치인, 군 장성, 경제관료, 기업인들을 대거 영입해서 자신에게 덧씌여진 급진, 극단적인 이미지를 희석화하면서 세를 불리기 시작했으며, 여기에 정권교체를 위해서 정치노선이 이질적인 김종필과도 손잡은 DJP연합으로 1997년 15대 대선에서 승리했고 이후에는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선 안정적인 국정 운영이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한나라당에서 의원 수십 명을 빼오고[1] 이인제국민신당과 합당하는 등 구 여권 정치인과 관료들을 무차별적으로 긁어모았다.

물론 이런 묻지마 영입은 양날의 검이었다. 일단 이념을 떠나서 지역연합인 DJP연합 자체가 동상이몽으로 취약했다.[2] 하지만 DJ의 국민회의는 소수 집권세력이었기 때문에 JP의 충청 세력과 손잡을 수밖에 없었다.[3] 오랜 기간의 군부독재 때문에 야당은 오직 민주화를 위해 싸우는 투쟁정당이었지 차분히 정책과 비전을 제시하는 대안정당, 수권정당이 되기에 인재풀이 너무 모자랐다. 한국은 오래전부터 기술관료제가 강화된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입법·사법·행정 등 국가권력 운영에 있어서 전문인력, 한마디로 관료나 그에 준하는 인재를 비정상적으로 많이 요구한다. 그러나 이런 인재는 국가고시를 통해 극소수만 선발되며 이들은 독재정권에서 성장하면서 자연스레 보수우익 성향을 가지게 되고, 1987년 6월항쟁으로 민주화 국면이 도래한 이후에도 군부독재의 후신인 민정당, 민자당 위주로 정치에 참여하였다. 또한 1990년대까지도 시민사회운동, 노동운동, 학계 등 비제도권의 중도개혁 혹은 진보 그룹들은 아직 확실한 전문성을 가지지 못한 상태였다. 민주당계 정당의 이런 인재풀 부족 현상은 2016년 20대 총선부터 급격히 해소되기 시작했지만 당시는 사회적으로도 보수정당의 영향이 워낙 강력한 시점이었다.

또 노무현도 마찬가지로 1997년에 DJP연합의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DJ가 꼬마민주당의 'PK 4인방' 영입에 나선 결과로 김정길 의원과 함께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하게 되었다.[4]

따라서 국민의 정부는 원만한 국가운영과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정치노선, 이념, 과거 경력 같은 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단 전문성, 대표성이 있다고 하면 닥치는 대로 인재를 긁어모았다.[5][6][7] 김대중 본인의 지도력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세력 때문에 안정적 국정운영을 위해 평민당 시절부터 모여 왔던 DJ계의 외연확장을 목표로 다양한 인사[8]들을 끌어모았고 이 사람들이 집권 후 청와대, 내각, 집권당, 산하 공공기관과 공기업에 다수 포진했다. 그리고 이렇게 마구잡이로 끌어모은 사람들로 2000년에 새천년민주당을 창당했다.

이들은 새천년민주당의 다른 계파인 동교동계[9]나 재야세력[10]과는 달리 정치인으로써 시베리아에 가까웠던 야당 생활을 전혀 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권력을 빼앗긴다는 것에 대해 깊은 공포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 다른 요인은 ‘YS 시계 사건'[11]의 후폭풍과 노 후보가 지방선거에서 부산, 울산, 경남을 다 뺏기면 후보직을 내놓겠다고 한 뒤 전패하자 지지율이 급락하면서 후보 교체론이 나온 것이다.# 그나마 경선 전후 노풍이 불 때는 정권 재창출을 위해 뭐든지 참을 수 있다는 자세로 가만히 있었지만 YS 시계 파동지방선거 참패로 노풍이 꺼지고 이회창 대세론이 형성되면서 대선에 대한 위기감을 느꼈고 8.8 재보선에서도 참패하자 이대로는 정권 재창출에 실패할 것이라는 불안감이 민주당 전체를 짓눌렀고 정권 재창출만 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움직임을 보였다.

사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냥 흔하디 흔한 민주당의 계파 갈등이었지만 후단협 의원 중 김원길박상규, 원유철 등은 아예 이회창 지지를 선언하면서 한나라당에 입/복당했다. 결국 이 세 의원은 단일화라기보다는 노무현이 싫어서 후단협 활동을 한 것이고, 노무현이 여권 단일후보로 선출되자 아예 한나라당으로 전향하여 자신들의 본색을 드러낸 것이었다.

3.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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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단일화 이후

우여곡절 끝에 후보 단일화에 성공했고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민주당은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지만 상당한 정치적 후유증을 남겼다.

한나라당에 입당한 김원길박상규, 전용학[12], 강성구 등의 인사들은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했고 사실상 정치생명이 끝장났다. 참고로 후단협의 주도자는 김원길이었다. 김원길 의원은 후단협 좌장으로서 기자들에게 "어떻게 이룬 평화적 정권교체인데 독재세력인 한나라당에게 줄 수 있냐"며 눈물까지 글썽이며 후단협의 순수성을 강변해 오더니만 정작 노무현으로 후보 단일화가 이뤄지자 대선을 20여 일 앞둔 11월 26일 "이회창 후보가 노무현보다 더 안정돼 있다"며 한나라당으로 날아가서 비웃음을 얻었다. 이때 폐허가 된 지구당 사무실에 PD수첩이 가서 취재했는데 지구당 사무장조차도 김 의원의 행보를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훗날 더불어민주당의 당대표가 된 송영길 의원의 증언에 의하면 노무현은 이런 김원길에 대해 상당히 유감이 많았던 듯 하다. 노무현이 후보 시절 단골 이발관에 갔으나 김원길이 앉아 있는 걸 보고 그대로 나왔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에 김원길이 한나라당에 입당하기로 결정하자 김원길 의원실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던 윤후덕 보좌관과 최종환 비서관은 김원길 의원의 잘못된 선택을 용납할 수 없다며 사표를 쓰고 뛰쳐 나왔다. 이 두 사람은 나중에 노무현 대통령에게 발탁되어 참여정부 청와대에서 일하게 되었고 각각 훗날 국회의원과 파주시장으로 당선되는 등 정치 인생이 잘 풀렸다.

한나라당 입당파 중 원유철은 2004년에 낙선했지만 김문수 경기지사의 아래에서 경기도 부지사를 하다가 2008년 국회에 복귀해 20대까지 당선되어 새누리당 원내대표도 지내는 등 나름 중진급의 정치인이 되기는 했다. 새천년민주당에 계속 남아 있다가 노무현의 편에 서서 열린우리당에 참여한 탈당파 후단협 의원 김덕배, 송석찬, 설송웅[13], 송영진은 당원들의 반발로 불출마를 할 수밖에 없었다.

후단협이었지만 탈당하지 않은 박병석열린우리당에서도 계속 살아남아서 국회 부의장까지 했고 결국 제21대 국회에서 6선에 성공하여 국회의장까지 되었다. 사실 의외로 살아남은 인사는 많다. 홍재형 의원도 같은 루트를 타서 국회 부의장을 끝으로 19대 총선에서 낙선하고 정계를 은퇴했다. 민주정의당 출신의 김명섭은 공천을 받았으나 탄핵 역풍이라는 유리한 조건에서도 한나라당고진화에 밀려 낙선했다.[14]

그 외에 새천년민주당에 잔류한 후단협 인사들도 대부분 낙선했으며 듣보잡이 되었다. 다만 열린우리당이 망하고 새천년민주당과 대통합민주신당이 합당하여 통합민주당으로 재출범하는 과정에서 부활한 인사도 여럿 있다. 17대에서 낙선한 여수시 기반의 김충조 의원은 18대에 비례대표로 부활했고, 송훈석 의원, 이용삼 의원도 탄핵 역풍으로 낙선 후 다음 총선에서 같이 부활했으나 이용삼 의원은 임기 중 위암으로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다. 17대 총선에서 살아남은 담양, 장성 기반의 김효석 의원은 구 민주계로서 18대 총선 때 지역구 의원으로서 부활했다. 제19대 총선에서 강서구 을에 출마하였으나 김성태 의원에게 패해서 정계은퇴했고 제19대 대선 때는 문재인 후보 지지선언을 하였으며 문재인 정부 출범 후에는 대한석유협회 회장까지 지내고 사망했다. 김충조 의원은 지역구 공천에서 떨어지자 다시 탈당했고 19대 총선에서 낙선하면서 정계를 떠났다.

후단협 입장에서 보면 후단협은 DJP연합처럼 원칙에는 어긋난 행위였으나 당시 여권의 승리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긴 했다. 정몽준이 단일화를 명분으로 사퇴하지 않았다면 결과적으로 노무현 후보가 당선될 수 없었다는 것은 명백했다. 후단협 의원들은 스스로 악역을 맡았고 일부 후단협 인사들이 실제로 한나라당으로 전향하는 등 불순한 목적도 있었지만 어쨌든간에 결과적으로는 여권의 승리의 필요악이었다. 물론 그 후단협 모임이라는 것이, 한번 와해되기 시작하자 고급 음식점을 돌던 모임이 식사비 분담 문제로 국회에서 도시락을 먹으면서 모이는 신세가 되었고 심지어 "누가 배신할지 몰라 매일 서로 얼굴을 확인하는 것이 하루 일과"라고 스스로도 자조하기까지 할 정도가 되었지만 말이다.

특히 후단협 사태의 백미는 여론조사를 통해 노 후보로 단일화된 뒤 벌어진 억측과 배신, 생존 투쟁이었다. 김영배 의원 등 민주당에 복당[15]한 12명은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 회복 1등 공신은 비난을 무릅쓰고 단일화를 외친 자신들이라며 억지 논리를 펼쳤으며 심지어 뒤늦게 대통령 선거전을 돕겠다며 1천만원씩 특별당비까지 낸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후단협 소속 수도권의 한 의원은 동료들과 약속한 것보다 몇 배나 많은 특별당비를 낸 것으로 전해지면서 후단협 출신 동료들로부터 "저만 살려고 치사하게 처신한다"는 소리를 듣는 등 우스꽝스러운 모습만 남겼다.

5. 명단

5.1. 구 여권(한나라당, 문민정부) 출신

5.2. 경제인 출신

5.3. 전문가 영입

5.4. 1997년 이전 영입

5.5. 동교동계/舊 민주계 출신

6. 참고

7. 유사 사례

한편 이들은 이재명을 같이 까지 않는다고 민주당의 지도부 인사들과 원조 친문 인사들까지 소위 '찢빠'라며 몰아세우면서 이재명을 출당 시킬 수 있다고 말한 김진표를 당대표로 지지했지만[29] 결과는 이해찬의 승리로, 호남 당원들이 지지하는 송영길에게도 밀린 3위로 탈락했다.
5월 16일에 이재명은 1심에서 4가지 기소 혐의가 모두 무죄 선고를 받았지만 강성 친문은 '2심, 3심이 있다'고 주장했다. 2심에서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공표 혐의는 유죄가 선고되었지만[30] 대법원(3심)에서 결국 토론회에서 사실이 아닌 정보를 이야기하는 것이 허위사실공표가 아니라는 논란의 대법관 다수 의견으로 무죄취지 파기환송됐고[31] 무죄가 최종 확정되었다. 그러나 이 극문 세력은 2021년 더불어민주당 대선 경선에서 이낙연을 지지하면서 반이재명 전선을 지켰으며 3차 선거인단에서 이낙연에게 몰표를 주는 등 발악하고[32] 이재명에게 패배한 이낙연이 사실상 경선불복을 선언하면서 이낙연 강성 지지자들도 이에 호응해 항의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10월 13일 더불어민주당 당무위원회는 이의제기를 수용하지 않았고 결국 이낙연은 결과에 승복하고 민주당의 정권 재창출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공식 입장을 밝혔으며 당내 분란을 만들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33] 물론 이재명을 극혐하는 일부 강성 친문 지지층들은 남경필 찍자고 할 때처럼 '정권교체 되도 이재명을 쫒아낼 수 있으니 상관없다'며 뮨파가 되어 내부 분탕을 벌였다. 이에 친이재명으로 돌아선 온건 친민주당 지지자들은 다른 친민주당 커뮤니티로 떠나기도 했다.
그리고 이 경선불복 흐름은 설훈, 홍영표필연캠프 인물들이 공동선대위원장을 맡고 12월 이재명과 이낙연이 <국가비전과 통합위원회>를 구성한 뒤 예상보다 빠르게 진압되었으며 국민의힘 경선에서 후보자들의 막말 남발과 함께 폭력사태새시대준비위원회, 윤석열을 중심으로 한 국민의힘 내 분열이 일어나면서 재평가받았다(...).
2023년 2월 27일 이재명 체포동의안 결과 발표 지연 사건에서 30여명 대의 민주당 의원들이 가결, 기권, 무효로 분산되면서 분열이 심화될 조짐을 보였다.


[1] 1998년 지방선거 이후 한나라당을 탈당한 의원들이 국민회의로 입당하여 DJP연합은 과반을 확보했다. (여권, 집권 6개월여만에 과반의석 확보)[2] 당시 기본 논리는 아렌드 레이파트가 제시한 ‘협의민주주의(Consociational Democracy)'였다. 소수당끼리 고립을 피하기 위해 연립해 집권하자는 논리였다.[3] 1998년 당시 국회 내 의석수에서 한나라당이 다수였다.[4] '이젠 PK와 접속' DJP 여세몰이. 경향신문. 1997.10.30[5] 더욱이 당시에는 진보언론이 한겨레, 월간 말 두 개밖에 없었고 조중동공영방송 체제의 거대 보수언론의 독점체제가 자리잡은 언론 환경은 항상 여당 중심 위주의 보도를 하는 등 극심히 편파적이었기 때문에 현재의 기울어진 운동장보다도 훨씬 더 불리한 환경이었다. 이런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김대중이 이룬 정권교체가 1997년 외환 위기를 극복하는데 큰 역할을 했고 한국의 민주주의를 한 걸음 더 성장시켰다는 일반적 평가를 보면 어느 정도 합리화가 가능하다.[6] 예를 들어 이헌재 같은 경우 1997년에 이회창에 줄을 섰음에도 김대중이 자민련 인사인 김용환의 추천을 수용하여 과거를 묻지 않고 능력만으로 금융감독위원장으로 발탁하여 IMF 극복에 큰 역할을 했으며 참여정부에서도 신용 불량자 관련 종합대책을 내놓는 등 위기상황에서 소방관 역할을 했다. 이런 무리수 없이 소수파 정파,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호남당인 국민회의를 소위 "정도"대로 이끌었다면 집권은 아예 어려웠을 것이다. 설령 집권에 성공했다고 해도 전혀 국정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안정적인 국정운영이나 필요한 개혁조치를 취하지 못했을 것이다.[7] 20년 후인 2012년 대선에서 진보진영이 거의 대등하게 보수세력과 대결한 것, 2017년 대선에서 진보진영이 압도적으로 보수진영을 리드한 것도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1997년의 정권교체에 맞닿아 있다. 결과적으로 김대중의 이런 "묻지마 영입"은 단기적으로 후단협이라는 부작용도 만들어냈지만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면 민주세력의 집권능력의 성장에 큰 공헌을 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인재영입 기조는 단점은 보완하고 장점은 강화하면서 이어졌으며 이는 새정치국민회의의 직계 후신인 더불어민주당의 역량 강화에 큰 역할을 했다.[8] 김대중이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면서 영입한 집단을 말한다. 이때 여권 출신 및 김한길, 김진명(소설가로 1996년 송파을에 국민회의 소속으로 국회의원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본인은 흑역사가 아니라 소중한 경험으로 생각한다고...), 추미애, 정동영, 김민석 등등을 영입했다.[9] 권노갑, 한화갑, 한광옥, 김옥두, 김경재, 김홍일 등.[10] 김근태, 박영숙, 이우정(1923) 등. 1988년 이후 김대중은 매번 선거때마다 재야출신들을 꾸준히 영입했다.[11] 노무현은 대선 후보 확정 이후 김영삼의 상도동 자택을 방문했는데 이때 YS가 과거에 선물로 줬던 손목시계를 차고 와 내보이면서 "총재님 생각날 때는 꼭 차고 다녔다"면서 YS와의 인연을 강조했고 면담이 끝난 뒤 YS는 대문 앞까지 나와 노 후보를 배웅했다. 그런데 이 'YS 시계' 사건은 노 후보에게 역풍으로 작용했는데 지지자들이 "3당 합당은 야합", "3김 시대 청산"을 외치던 정치인 노무현의 이미지를 스스로 부정하는 사건으로 받아들였다. 특히 부울경권에 여전히 영향력이 있었던 YS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는 분석이 나오면서 "지역주의를 부활시킨다"는 역풍이 불었다. 새천년민주당 지지자들은 물론이고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도 "옛날로 돌아가 정략적인 합종연횡을 통해 정권을 따자는 것은 이뤄질 수도 없고, 국민이 호응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YS와 노 후보를 싸잡아 비판했으며 홍준표 의원도 "YS 시계를 보이며 애교떨고 아양떨면서 YS가 마치 민주당 공천권을 쥐고 있는 듯 얘기하는 것은 보통 코미디가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급기야 노무현발 정계개편 시나리오까지 회자되면서 노 후보의 지지율은 급락했고 민주당 내 후보 단일화 협의회(후단협)의 싹을 키웠다는 분석까지 나왔다. 노 후보는 이후 방송기자 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김 전 대통령(YS)과의 회동이 지지도 하락에 영향을 미친 것 같다"고 발언했는데 YS는 이를 듣고 격노했다고 한다. #[12] 후단협을 하는 듯하다가 가장 먼저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한 후 후보 단일화 이전에 가장 먼저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김원길과 박상규는 단일화 이후 입당했다.[13] 설민석의 아버지. 여담으로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그와 대적했던 사람이 진영이다.[14] 한나라당 내에서 개혁이 목소리를 드높이면서 당지도부와 충돌하던 고진화 의원은 대선 시즌에 자기당 후보인 이명박이 아닌 문국현을 지지하는 바람에 18대 총선을 앞두고 공천에서 잘렸다. 애초에 고진화는 정치노선으로 보면 한나라당보다는 민주당계 정당에 훨씬 가까웠다. 그리고 이 결정은 8년 후 전화위복이 되었는데...[15] 후단협 등 과거 분열 조장 세력의 전례로 인해 더불어민주당에서는 탈당 인사들의 복당에 대하여 엄격하고 강경한 자세를 취했다. 국민의당의 녹색 열풍이 꺼지고 21대 총선에서 김경진, 이용주, 이용호 등 구 국민의당 의원들이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에서 당내 분란을 일으킨 뒤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민주당에 복당하겠습니다(...)"라는 공약을 내걸자 아예 이해찬 대표를 비롯한 당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복당을 불허했다. 그런데 이 중에서 이용주 전 의원은 2022년 대사면 및 심사를 거쳐 더불어민주당에 복당하였다. 그리고 미래통합당도 공천탈락자들이 영남 지역에서 복당 공약을 내걸었다(...). 더불어민주당 지지층에서 구 국민의당계에 대한 감정은 이들이 바미당에서 이준석도 기겁할 정도로 철수맛을 보여주고 뛰쳐나간 국민의힘과 비견될 정도로 극히 안 좋다. 다만 낮은 자세로 돌아서서 과거의 일을 반성하고 전향하여 더불어민주당을 지지, 지원하기로 한 극히 일부 의원과 인사에 대해서는 그나마 비판 수위가 낮은 편이며 이들의 경우 복당 후 백의종군하여 19대 대선, 7대 지선, 21대 총선 승리를 도왔다. 반면 국민의힘은 부정부패, 비리 등으로 인한 의원직 사퇴가 이어져 탈당한 의원들을 마구잡이로 복당시키는 과정에서 계파 갈등이 심해지게 되었다.[16] 2002년 16대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복당. 2015~2016년 새누리당 원내대표. 미래통합당 5선 의원[17] 2002년 16대 대선을 앞두고 국회의원직 상실.[18] 2002년 16대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입당. 2003년 12월 국회의원직 상실.[19] 2002년 16대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입당.[20] 이 문서에 후단협 구성원으로 언급된 인물 중 유일하게 현역 정치인으로 활동 중이다. 심지어 내리 6선에 성공하면서 국가의전서열 2위인 제21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까지 지위가 올라갔다.[21] 2002년 16대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입당.[22] 2002년 16대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입당.[23] 2002년 16대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입당.[24] 2003년에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잃을 위기에 처하자 결국 자진사퇴했다.[25] 그러나 이후 이종걸, 송호창은 더불어민주당에 남아서 안철수와 거리를 두게 되었다.[26] 한화갑은 박근혜 지지를 선언했으나 앞선 두 사람과는 달리 새누리당에는 입당하지 않았다. 반면 설송웅의 지역구였던 용산구의 진영 의원은 2016년 더불어민주당으로 소속을 옮겼다.[27] 파워레인저냐?[28] 그 와중에 더불어민주당 및 자유한국당 공천을 받지 못한 기초의원, 자치단체장 후보들이 2018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바른미래당에 공천을 받기도 했으나 결과는 모두가 알다시피 폭망했다. 광역, 기초의원 비례득표가 오히려 정의당보다 못할 정도였다.[29] 참고로 김진표는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시절부터 계속 민주당에서 활동한 친노, 친문이지만 정치적 성향은 꽤 보수적인 편이다.[30] 만약 이대로 대법원에서 유죄 확정되었다면 당선무효형에 해당하기 때문에 선거비용 30억원을 토해내야 했고 그랬다면 이재명은 평생 모은 재산을 깡그리 날리고 '경제적 사형' 선고를 받아 알거지가 될 뻔했다.#[31] 대법관 13명 중 1명은 제외, 7명은 무죄의견(다수의견), 5명은 유죄의견(소수의견)으로 결과는 매우 아슬아슬했다.[32] 이 때문에 3차 선거인단에서 국민의힘 당원 및 지지자들의 고의적 밀어주기 의혹이 대두되었고 통계학과 정치학 연구자들이 실제로 이같은 행위가 일어났는지 분석해 보기도 했다.[33] 이낙연은 21대 국회에서 의석수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주요 개혁과제에 반하는 행보로 인해 당 내부 평가가 상당히 나빠졌다.[34] 게다가 임재훈은 2002년 대선에서 새천년민주당의 조직본부에 있으면서 후단협 결성을 눈앞에서 지켜본 바 있으며, 후단협도 심지어 선거 본선에서는 형식적으로라도 결과에 승복했다.[35] 다만 선대위 해산 후 국민의힘 선거대책본부로 선거대책위가 개편되면서 윤석열 중심으로 선대위가 돌아가 후보 교체 가능성은 낮았고 초/재선 의원도 당대표를 공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