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에서 열린 세계 스카우트 잼버리 부실 운영 사태에 대한 내용은 제25회 세계스카우트잼버리/문제점 및 사건 사고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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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03년 전라북도 부안군의 방사성 폐기물 처리시설 유치 문제를 놓고 벌어진 대규모 유혈사태. 제2의 안면도, 굴업도 사태라고 할 수 있다.2. 진행
원자력 발전은 다른 발전 방식에 비해 경제성이 매우 좋지만 발전 과정에서 필히 방사성 폐기물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원자력 발전 과정에서 생기는 방사성 폐기물은 국내에서는 원자력 발전소 내부나 한국원자력연구원의 임시저장시설에 저장하는 방식으로 처분해왔는데, 이들 임시저장시설이 포화상태에 임박하면서 정부는 1986년부터 방사성 폐기물 처리시설의 건설을 위한 부지 확보를 모색하였다. 정부는 이후 10여 년간 경상북도 영덕군, 강원도 영월군, 충청남도 태안군 안면도, 인천광역시 옹진군 굴업도 등지에 부지 확보를 시도했으나 해당 지역 주민들의 강한 반발과 지형의 문제에 부딪혀 실패했다.2000년대에 들어 정부는 부지 선정을 유치 공모 방식으로 전환하고 유치 지역에는 양성자 가속기 등의 인센티브를 부가했다. 이에 김종규 당시 부안군수가 지역 발전을 위해 위도에 방폐장 유치를 결정하였고 2003년 7월 15일 부안군 단독 유치가 확정되었는데 이에 반발한 부안군 주민들이 거센 시위를 벌였다.
이를 막기 위해 인구 6만 명의 부안군에 무려 1만 명의 경찰이 배치되는 준전시상태가 벌어졌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전, 의경들이 이동할 때 최소 중대 단위로 뭉쳐다녀야 할 정도였으며 시위 지역 부근 골목에 복병(...)이 깔려 있어 이동하던 전, 의경들의 측면이나 후미를 기습하는 일도 잦았다. 그래도 정부는 대화하려고 했고 기습적으로 게시물을 철거하는 등의 대처를 했다.
엄청난 반발로 인해 부안군수는 산 속의 절로 도피하고 경찰병력을 배치해서 주민을 막으려고 했는데 분노한 주민 수백 명이 경찰의 봉쇄망을 뚫고 들어가 군수를 집단폭행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주민 45명이 구속되었고 121명이 불구속 기소됐으며 부안군수, 관련 공무원, 경찰과 주민 50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결국 정부와 경찰, 지휘부였던 행자부는 강경대처 방침을 세우고 치안부터 확보한 뒤에 대화에 나서기로 결의했다.# 이 사태로 인해 당시 부안경찰서장은 직위해제를 당했다.
이렇게 난리를 치면서 방폐장 부지 선정은 원점으로 되돌아갔고, 정부는 부안사태를 교훈으로 삼아 고준위성 방사성 폐기물인 사용후 핵연료가 아닌 방사성 폐기물 중 대다수를 차지하고 그나마 위험성이 덜한 중·저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리시설부터 우선 건설하기로 하고 특별지원금 3000억원, 한국수력원자력 본사 이전 등 파격적인 조건이 포함된 중·저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분시설의 유치지역 지원에 관한 특별법을 의결하였다.
유치전의 결과 최종적으로 경주시가 선정이 되었고, 이후 경주시는 월성 원자력 환경관리센터를 유치한 조건으로 한국수력원자력 본사 이전과 토함산터널과 문무대왕1터널 등 많은 혜택을 받게 되었다. 경주시가 방폐장을 유치하면서 많은 혜택을 받게된 것이 부안 내에서도 재조명되었는데 결국 니가 잘못했네, 네가 잘못했네 하는 식으로 의견이 갈리면서 지역 분위기가 말이 아니게 되었다고... 부안의 경제 발전이 뒤쳐지면서 당시 반대한 것을 후회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반면 방폐장 반대 의견을 고수한 측에서는 방폐장의 경제적 효과는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니고[1] 부안의 주 산업과는 맞지 않는 데다 군민 정서상(...) 불가능했으며 군민들이 적극적으로 거부하는데 굳이 세워야 할 이유가 있냐고 정신승리를 들며 반박했다.
3. 이후
이 초유의 사태는 행정학계에서 아주 유명한 사건이 되었는데 사전에 충분한 행정PR 없이 일방적인 행정을 추진하면 어떤 부작용이 초래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남았다. 만약 부안군수가 사전에 충분히 PR을 했더라면 주민을 설득할 기회도 있었을 것이고 설령 설득에 실패했다고 해도 이후 경주시의 유치 성공을 통해서 교훈을 얻기 쉬웠을 것이다.이 사태의 여파로 당시 부안군수였던 김종규는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2007년 재보궐선거,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연거푸 낙선됐다가 2014년 6월 지방선거를 통해 군수직에 복귀했으나 2018년 6월 지방선거에서 또 다시 낙선했다. 그리고 당시 시위를 주도한 환경단체는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나섰다가 깨졌다.
다만 2024년에 안타까운 소식이 들렸는데 방폐장 받는 조건으로 한수원을 유치했던 경주에서 한수원이 방폐장만 납두고 핵심부서를 수도권 인근인 충북 청주로 이전(한수원측에서는 일단 부정)하려다 적발되는 일이 벌어져서 앞으로는 님비시설 유치 조건으로 막대한 혜택을 준다해도 님비시설만 남고 혜택은 언제든지 빼앗길 수 있다는 부정적인 선례가 남게되었다.
4. 여담
부안군 출신으로 유명한 인터넷 방송인 셀옹은 시청자들의 질문에 "그 당시의 동네 상황은 매우 살벌했다"고 증언했다.새만금방조제에 들어가기 전 해변에 나무 기둥이 여러 개 있는데 핵을 반대하는 의미를 담은 나무들로 당시에는 본부 역할을 했던 집과 비핵화를 상징하는 나무가 수십 개가 있었지만 이것도 상당수 제거되어 수 개의 나무만 남아 있으며 변산면 마을에 가면 비핵화를 원한다는 벽화가 상당히 남아 있고 부안군 읍내에는 핵을 반대하는 작은 비석이 세워져 있다.
당시 핵폐기장 반대 티셔츠를 애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입고 다녔고 데모가 일어나 도로가 막히는 날이 흔했으며[2] 등교거부를 일주일 정도 했고 학교가 동네 교회에서 따로 수업할 정도였다고 한다.
방폐장 부지가 들어설 예정이었던 위도 현지의 주민들은 정작 유치 찬성 의견이 대다수였는데 유치를 통한 각종 경제적 지원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부안군수가 유치를 강행한 것도 이런 배경이나마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위도를 제외한 다른 군민들의 여론도 수렴해야 했는데 정작 이건 하지 않았다. 위도 주민들 역시 이 때문에 매우 곤란한 상황이 되었고 결국 유치 철회 이후 지역 분위기를 더욱 암울하게 만드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당시 부안에 출동했던 전의경부대원들의 고생도 말 못 할 지경이었다. 소규모 경력 지원은 해당 지역의 숙소를 구해서 숙식을 해결하지만 전국의 경력들이 대대적으로 지원을 오게 되어 매트리스 한 장 달랑 지급하고 길거리나 공설운동장 체육관, 경찰서 강당 같은 곳에서 사실상 노숙을 시켰으며 당시 부안에서는 경찰에 대한 지역 주민의 반감이 극심했기 때문에 숙소를 구한다는 것은 더더욱 언감생심이었고 부대를 떠난 전의경대원들이 인근 경찰서의 마당에서 매트리스 한 장 깔고 몇 날 며칠 기약 없는 노숙을 해야 했다.
더 최악인 것은 부안군민들이 던진 새우젓탄이었다. 당시 성난 부안군민들은 전의경들을 향해 비닐봉지에 새우젓을 담은 새우젓탄을 만들어 던졌는데 이 새우젓탄에 맞아 진압복에 새우젓이 묻으면 냄새가 상상을 초월했다. 더구나 당시는 한여름이었다. 뜨거운 날씨에 옷에 묻은 새우젓이 썩어가는 냄새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런데도 앞서 말했듯이 사실상 노숙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했기 때문에 옷을 빨아 입거나 갈아입는 것도 어려웠다. 당시 부안에 출동했던 경찰관들은 직업경찰관이든 전의경 대원이든 모두 새우젓이라면 치를 떨었다.[3]
부안의 지역 언론지 2종 중 하나인 부안독립신문은 해당 사태를 계기로 창간되었다. [4] 군민의 여론을 오롯이 담는다는 목적으로, 당시 악마화된 김종규에 맞서 부안을 독립(…)시킨다는 의미.
심지어 마구잡이로 차출해서 투입시키다 보니 부안군 출신의 전의경도 투입되었는데 이들은 가족이나 이웃을 상대해야 하는 막장 사태를 겪어야만 했다. 군에 입대한 조카가 진압선 최전선에서 방패를 들고 있었는데, 숙부와 눈이 마주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는 일화가 시위 공연 도중 소개되기도 했다.
유해진, 차승원 주연의 영화 이장과 군수는 이 사태를 모티브로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부안군수였던 김종규가 낙후된 지역 발전을 위한 명분으로 주민과의 소통없이 일방적으로 방폐장 유치를 신청했는데 주민들과의 심한 갈등과 혼란이 격화되었다가 결국 유치를 취소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이와 상당히 유사하다.
5. 참고/관련 자료
- 2004 경찰백서 (경찰청)
- 부안, 끝나지 않은 노래: 코뮌놀이로 본 부안항쟁 - 고길섶 저. 엘피. 2005.
- 부안 방폐장 관련 주민운동 백서 - 전라북도 부안군/사회조정갈등연구소 저. 갈등조정아카데미. 2010. 본문 부록 요약
- PD수첩: 부안의 절규, 출구없는 핵 폐기장 (2003.09.30. MBC)
- PD수첩: 무너진 부안, 해법은? (2003.12.02. MBC)
[1] 국가나 한수원 등에서 나서서 방폐장에 대한 보상으로 인프라 확충을 해주기는 하지만, 방폐장 같은 시설이 일자리를 획기적으로 늘린다거나(...) 그렇지는 않다. 원자력 관련 직장에는 대학교에서 전문적으로 학습한 사람들만이 취직할 수 있기 때문에 차후 처리나 경제적 문제들은 사실 엄밀히 따지면 '부차적인' 요인이다.[2] 일례로 교육청이 인근에 위치한 부안고등학교 인근 사거리를 시위대가 점거하고 타이어 벽을 쌓고 불을 지른 일도 있었는데 해당 사거리는 이후 몇 년간 당시 불길에 녹아내린 타이어 잔해가 도로에 들러붙은 흔적이 시꺼멓게 남아 있을 정도였다.[3] 만화가 조석이 웹툰에서 전경 시절 일화를 소개하면서 멸치액젓이 날아오는 상황을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개그스러워도 현실이었던 셈이다.(...)[4] 나머지 하나는 서림신문